수년째 정기구독하고 있는 한 잡지사에서 책을 한권 보내왔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다.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린다.
그리고 아련한 옛날 스무살 때,
대부분의 청춘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대구 산격동의 한 하숙방에서 이 책을 읽고
한참이나 감동받았던 적이 생각난다.
그 당시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책 선물하기를 즐겼는데
아치볼드 조셉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리고 "독일인의 사랑" 중에서
한 권을 골라 선물했었다.
영혼을 아름답게 그리고 황홀하게 하는 글이라 여겼다.
그중 "천국의 열쇠"를 읽고 그에 영향을 받은 나의 종교관은 지금껏 변하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
어려서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에
열심히 참석했었으나
성인이 되면서부터
차츰 다원주의적 종교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종교문제에 관해서는 평생 동안 늙으신 어머니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책이라 읽기에 망설여졌다.
내 자신이 너무나 많이 변한 것을 알고 있기에
이제는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책을 본지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티없이 깨끗한 감성을 가졌던 어린 시절은 가고
이 세상의 세월은 그 깨끗함을 퇴색시키고 또 오염시키고 말았다.
자라면서
하나씩 배우고
하나씩 느끼면서
하얀 도화지에 얼룩이 번지듯이
순수함은 지워지고 말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무디어지고 무감각하게 되어 버렸다.
슬픈 일이다.
책을 보고 나서 나의 지난날에 있었던 사랑이
생각났다.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는데....
지금보다 조금 더 늦은 가을날 이른 밤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지난 여름 내내 그래 왔듯이
이웃의 하숙집에 살고 있는 그녀와 산책길에 나선 길이다.
오늘은 그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사랑의 고백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교정을 가로질러 뒷동산으로 난 수크령이 무성한 오솔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지고 가슴은 설레이고 있었다.
우거진 나무들의 으스름달 그림자에 좁은 길은
더욱 어두워지면서 동산 꼭대기에 도착했다.
나란히 앉아 산아래 멀리 압량읍 위를 감싸고 있는 뿌연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하늘에는 손톱만한 달이 구름속을 드나들면서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워져 그녀의
옆모습은 실루엣으로만 보일 뿐이다.
내 가슴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더듬 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사랑한다도 아니고 사랑하는 것 같다 라는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울줄이야.
말을 마치고 나서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침묵이었다.
내가 철이 들고 나서 이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이때 처음 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깨끗하고 순수했던 사랑이 이때, 26살때에 있었으니 깨나 늦게까지 꿈속에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독일인의 사랑"에서 보여주는
순백의 사랑은 때묻지 않은 영혼에서나 가능한
어쩌면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랑이다.
막스 뮐러가 회상을 담담히 서술하는 형식으로
쓴 추억의 사랑이었기에 좀 더 아름다웠을 수도 있었겠다.
남아 있는 페이지 수가 줄어들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고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재미있게 읽었다.
세월이 더 흐르더라도
감성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늘 느끼면서 말이다.
몸이 늙는 것도 서러운데
마음까지 같이 늙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