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까지 바둑을 어떻게 두는 건지는 알았지만 그 수준이 줄바둑을 두는 수준이었습니다. 바둑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치훈 9단이 일본 명인전 타이틀을 획득한 때부터 바둑에 흥미가 생겨서 바둑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곳곳에 기원이 많이 있었지만 기료가 아까워서 그 돈이면 바둑책을 사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바둑책을 사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바둑책을 한권 두권 사다보니 나중에는 백수십권을 넘게 샀고 바둑 신문이나 바둑잡지까지 따지면 수백권을 사서 바둑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쩌다 실제로 바둑을 두면 상대가 바둑책에 나온대로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둑정석사전'이라는 500쪽도 넘는 책을 보면서 정석을 연구했지만 정석대로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속으로 '왜 정석대로 두지 않는거야.'라고 불평하지만 결과는 내가 이기는 경우가 드물어서 도대체 바둑책을 읽은 보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책으로 키스를 배웠어요."라고 하면 뭔가 황당한 상황을 연상하게 됩니다. "책으로 배웠어요"하면 알기는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용하려면 미숙하고 엉뚱한 실수를 하게됩니다. "책으로 수영을 배웠어요."라고 하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수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책으로 바둑을 익힌 사람들의 바둑을 '화초바둑'이라고 합니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가 겉으로 보기에는 얌전하고 이쁘지만 비바람 치는 거친 환경에서 생존하지 못하는 것처럼, 책으로 주로 배워서 이론은 해박한 듯이 보이지만 실전에서 별로 이기지 못하는 바둑이 화초바둑입니다. 내가 화초바둑이었습니다. 책으로만 바둑을 배워 응용할 줄 모르고 싸움에 약해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실전을 많이 두면서 바둑책도 읽어야 실력이 향상되는 것인데 책만 읽으니 바둑이 늘리가 없었습니다.
형 친구 중에 바둑이 아마 6단 정도 되는 형이 있었습니다. 그 형이 우리 집에 가끔와서 그 형에게 바둑을 배웠는데 처음에 4점을 깔고 두었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후에 한 두해 동안 그 형하고 계속 바둑을 두고 책도 열심히 봐서 두점으로는 이기고 정선으로는 지는 수준까지 되었습니다.(바둑은 먼저 두는 흑이 유리해서 맞바둑인 호선바둑에서는 백에게 덤을 주고 시작합니다. 요즘은 6집반이나 7집반을 줍니다. 반집을 주는 이유는 승패를 가리기 위해서 가상의 반집을 주는 것입니다. 6집반이면 흑이 유리하고 7집반이면 백이 유리하다고 합니다. 덤없이 두는 바둑을 정선이라고 합니다. 정선이면 당연히 흑이 유리합니다.)
이제는 나도 바둑을 꽤 둔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대전 은행동에 있는 기원에서 바둑을 둔 적이 있었습니다. 기원에 들어가니 손님이 별로 없었는데 기원 원장이 츄리닝을 입고있는 어떤 할아버지를 가르키면서 "저 분하고 한번 둬봐."라고 해서 그 할아버지하고 두게 되었는데, "얼마나 두세요?"하고 물어보니 "여섯점 깔아."라고 대답해서 내가 어이가 없어서 "이제까지 제가 다섯점 이상을 깔고 둔 적이 없었습니다. 다섯점만 깔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다섯점을 깔고 두는데 그 할아버지의 백돌이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바둑은 직접 둘 때 느껴지는 어떤 감이 있습니다. 놀라운 바둑이었습니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흑돌 진영에 들어와서는 교묘하게 살아버리고, 전혀 죽지 않을 것 같은 흑돌을 요술이라도 하는 것 처럼 잡아버립니다. 세판을 연속지고 나서 씩씩거리니 할아버지가 다음판은 양보한 것인지 내가 이겼지만, 그 다음 두판은 또 내가 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둘 마음이 없어져서 할아버지에게 "아마 몇단이세요?"라고 물으니 그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화가 나서 원장에게 "저 할아버지 얼마나 두세요?"하고 물어보니 "김태현 프로야."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당시에 대전 출신 바둑 프로기사는 두명 뿐이었습니다. 김태현 3단과 서봉수 9단이었습니다. 물론 김태현 3단이 나이가 많아 바둑대회 1차 예선도 통과 못하는 원로 기사이기는 하지만 프로는 프로인지라, 프로기사인 김태현 3단과 바둑을 두었다는 사실은 가문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게임이나 오락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이 바둑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젊은 사람들 중에 바둑을 두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서 바둑도 쇠퇴하는 중입니다. 나도 언젠가부터 생각하기가 싫어져서 바둑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가끔 유튜브로 바둑 해설하는 것을 보기는 하지만, 인내심이 없어져서 직접 바둑두기가 싫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