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를 제외하고는 제가 발행한 책은 기본적으로 무료였습니다. 작은 오해(?)에서 시작하였으나 곧 원칙으로 굳어졌습니다.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를 작성할 때 각 교단(敎團)을 방문하여 고 홍성렬 교수님의 범증산교사(汎甑山敎史)의 개정판을 내겠다고 알리며 협조를 구할 때, 오정동 교단의 김상용 선생님을 찾아뵌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제가 용화전경(龍華典經)을 재 출간하시는 줄 아시고 재출간을 허락 하셨습니다. 단 돈을 받고 용화전경(龍華典經)을 파는 것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를 출간 한 뒤 처음으로 재 출간한 책이 용화전경(龍華典經)이었는데 서문에 김상용 선생님과의 약속으로 무료배포 한다고 공지를 했습니다.
용화전경을 들고 김상용 선생님을 찾아가 책이 다시 나왔다고 하며 약속한대로 무료 배포하겠다고 하니, 김상용 선생님께서 본인이 언제 그냥 나눠주라고 했나며 말씀을 좀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윤을 남기지 말라는 말이었지, 무료로 막 나누어주면 어떻게 감당하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무료배포라고 공지까지 다 한 상태였고, 감당할만 했습니다. 이게 무료로 책을 배포하게된 시작입니다.
그리고 종단사를 쓰면서 든 생각 하나가, 어떤 교인이 자신의 교단것만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무관한 타 교단을 챙기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타 교단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교단만 챙기면 그게 우리가 말하는 상생(相生)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관계 없는 타 교단(사람이 거의 남지 않아, 잘못하면 기록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 교단)을 도와 그 분들의 기록을 널리 알리고, 영구보존(국립도서관에 납본)해 보고 싶었습니다. 반드시 그런 선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한 평생 신앙을 하다가 교세가 약해지자 그 분들의 역사와 그 분들이 말하는 진리가 그냥 사라지는 것을 두고 보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것이 명예욕인지, 양심의 발로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에 우연히 듣게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인생관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Youtube에서 우연히 잠깐 들었는데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이익이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면 항상 자신만 손해보는 방향으로 일을 정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크게 놀랐고, 말로는 상생(相生)을 주장하지만, 저 자신을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만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면 여러 종단의 기록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는데는 일의 진행이 빠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료 배포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종단사를 내면서 알게된 무속인이 저를 보고 하는 말이 “거사님이 책을 쓰는게 아니에요. 거사님은 그냥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 일은 죽을 때 까지 합니다” 마치 무속인이 강(降)을 받으면 평생 가듯이, 저에게는 일종의 업(業)이라는 것처럼 말한 것이 기억에 납니다. 예전에 밴드에 글을 남긴것 처럼, 저는 글 무당(巫堂) 팔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타 교단의 경전과 기록을 돈을 주고 사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도 무료배포의 원칙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저에게 일어났던 가정사(家庭事)도 좀더 이해가 되었습니다. 종단사 초판을 내고 초판에 문제가 많음을 알고 재판을 내려할 때, 집사람의 말이 정말 거역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나이에 집도 없고 얼마되지도 않는 전세에 살면서 저금한것도 없고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사는데, 책 내는 것 한 번은 이해해주겠는데, 두 번은 너무 감당하기 어렵다라는 집사람의 말이 제 가슴에 적중했습니다.
어찌할줄 몰랐는데, 집사람에게 갑자기 신(神)이 내려 가출하였고, 결국 제 월급은 제가 온전히 쓰게 되면서 종단사 재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단사 재판을 내고 얼마지나지 않아, 집사람 스스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집사람이 크게 변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소규모 종단의 책을 내고 나누워주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덕(德)을 짓는 일이니 하라고 지원해주었습니다. 제가 만든 여러 책은 집사람의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려고 가정사(家庭事)를 흔들으셨구나 라는 생각이 ~~~~~~~~ ㅎ
그 동안 묵묵히 저를 지켜봐주면서 지원해준 제 집사람에게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어찌 보면 그 동안 제가 만들어낸 책의 절반은 집사람이 만든 것 입니다.
참고로 이 일로 제가 손해(?)를 봤을까 하면, 제가 보기에는 그 보답을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아주 넘치게요.
부부(夫婦)가 같이 신앙을 하는 것이 의외로 큰 복(福)입니다. 증산계열에서 부부 신앙을 하는 분이 없지는 않지만 많은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제 집사람은 증산계열(甑山系列)의 증(甑)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남편따라 온 것이었는데, 이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삼덕교(三德敎)에 홀로 우뚝서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제 집사람도 스스로 증산미륵세존님과 인연을 맺은 듯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책 값에 들어간 비용은 받은 것 같습니다.
올해 제가 직장을 3번 옮겼습니다. 중대재해법 시행으로 인하여 경험 있는 안전관리자들의 품귀현상이 일어난 면도 있지만, 갑자기 마음속에서 이 직장을 떠나야 한다라는 저 만의 생각(착각?)이 갑자기 마구 마구 들었습니다.
결국 3번의 이직 끝에 연봉은 1200만원 정도 증가했으며 주 6일 근무에서 격주 토요일 휴무에 연차까지 있는 직장(노가다에서는 이 정도면 최상급)으로 이직합니다.
그 동안 책쓰는데 들어간 비용도 거의 전부 보전 받습니다.
제 자랑으로 쓴 글이 아닙니다. 누구나 증산계열 신앙을 하시는 분들은 무엇인가 말로 설명할수 없는 인연이 한 두 개 정도는 다 있으실 것입니다.
부디 저의 작은 경험담(착각?)이 도생님들의 신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쉽지 않은 형편에 책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고, 만세님 벌금도 내주시고 성심이 대단하십니다.
어려운 일을 하시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