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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스크랩 조선 선비의 부부 생활과 부부유별
麗尾 박인태 추천 0 조회 827 13.03.05 06:1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선비의 부부 생활과 부부유별

이 종 묵(서울대학교)

1. 서론

인문학은 사람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육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다보니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중심에 있었고, 범상한 인간의 사적인 문제보다 보편적인 문제를 강조하다보니 개인보다 국가니 민족과 같은 거대담론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형이상학적인 문제나 거대담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연구의 방향은 자칫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실생활과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고할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행동한다. 사고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인문학에서 이성보다는 감성, 합리(合理)보다는 합정(合情)을 더 가깝게 여기는 문학이나 문학 연구가 할 일이 더욱 많아진다.

다른 한편 인문학은 과거와 현재의 소통에서 그 의미가 확보된다. 옛사람의 삶이 지금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옛사람의 삶과 글을 읽고 이를 자신의 삶에 투영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전통시대 학문에서 그토록 강조하였던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바로 인문학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 글은 이러한 인문학의 두 관점에서 집필한 것이다. 범상하고 사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삶과 사유 방식을 살피고 이를 통하여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여기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족의 문제를 다룬다. 가족은 부부라는 수평적인 관계와 부모 자식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가 핵심이다. 부부 관계의 핵심적인 윤리는 별(別)이고, 부모 자식 관계의 핵심적인 윤리는 효(孝)다. 이 두 가지 핵심적인 윤리에 대해 옛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였는가를 살피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삼는다. ‘위기지학’으로서 연결하기 위하여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는 개인 혹은 실천의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2. 부부유별의 의미

조선시대에도 신혼의 부부라면 서로 사랑하면서 살고자 하였고 또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부부 생활이 온전하지 않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부부 사이에도 일정한 윤리적인 규범이 형성되어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였다. 전통시대 가장 핵심적인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윤리는 오륜(五倫)이라 할 수 있다. 맹자(孟子)는 “인간이면 가야 할 길이 있는데, 배불리 밥 먹고 따뜻하게 옷 입고 편안히 지내면서 교육이 없으면 바로 새나 짐승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순(舜)이 설(契)을 사도(司徒)로 삼아 그로 하여금 인륜(人倫)을 가르치도록 했는데, 그 내용은 바로 부자유친(父子有親)ㆍ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오륜은 오교(五敎), 혹은 오상(五常)이라 하여 근대에까지 핵심적인 윤리로 인정되었다.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 이 오륜을 걸어두었으니, 주자를 존숭한 조선시대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로 굳어진 것이다.

그런데 부부유별이 무슨 뜻인가? 부부유별이라 하면 보통 부부라 하더라도 서로 내외를 구분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하는 일을 달리 하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생각한다. 정약용(丁若鏞)은 왕명으로 염찰사(廉察使)로 경기 지역을 순찰하다가 적성(積城) 시골 마을에 들러 쓴 시에서, 당시 핍박받는 백성의 삶을 노래하면서 부부유별의 문제를 이렇게 말하였다.

놋수저는 지난 번 이장에게 빼앗기고

무쇠솥은 다시 인근 부호에게 빼앗겼네.

닳아빠진 무명 이불 한 채만 남았으니

부부유별 그 말 따져보았자 무엇하겠나.

銅匙舊遭里正攘 鐵鍋新被隣豪奪

靑錦?衾只一領 夫婦有別論非達

정약용, <왕명을 받들고 염찰사로 적성 시골 마을에 이르러 짓다>

정약용은 한 이불을 덮지 않고 따로 거처하는 것이 부부유별이라 하였다. 이불이 한 채밖에 없어 부부유별의 기본적인 윤리조차 지킬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아무리 빈천한 사람도 부부가 서로 거처를 달리하여야 하는 것, 이것이 부부유별의 의미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부부유별은 한 가지 뜻이 더 있다. 부부 내부의 윤리 기준으로 ‘가림(別)’이 있어야 한다는 뜻 외에 다른 부부와의 관계에서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두 가지 뜻을 분명하게 구분한 사람은 이득홍(李得弘)이라는 학자다. 이황(李滉)의 제자인 이득홍은 남녀와 부부의 문제를 음양의 문제로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한 바 있다.

대개 부부유별의 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천지 생성의 수와 합치한다. 하나의 남편과 하나의 아내가 제각기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다른 사람과 난잡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하나의 의미다. 비록 부부가 한 집에 함께 산다 하더라도 남자는 바깥채에, 여자는 안채에 있으면서 안과 밖을 서로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이 또한 한 가지 의미다.

어떤 이가 부부유별이 한 가지 뜻만 있는지 물었다. 내가 대답하였다. “남녀가 가림이 있으니 부부가 가림이 있는 것이다. 대개 남녀가 가림이 있으니, 남자는 남자끼리 한 곳에 거처하고 여자는 여자끼리 한 곳에 거처하여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곧 양과 양이 서로 좇고 음과 음이 서로 좇는 것과 같다. 부부유별은 남편이 그 아내가 아니면 좇지 않고, 아내는 그 남편이 아니면 좇지 않는 것을 이르니, 하나의 양과 하나의 음이 한 방위에 처하지만 다른 방위와 위치를 바꾸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남녀는 다른 부부와 서로 꺼려 매번 서로 피하여, 길을 갈 때에는 길을 달리 하고 집에 살 때도 집을 달리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득홍은 부부유별의 의미를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 해석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두 가지 의미에 대해 매우 자세히 부연하였다.

대개 금수의 부부 관계는 정해진 짝의 분별이 없어 서로 더럽고 난잡하게 산다. 이 때문에 그 어미에게 젖이 있는 줄만 알아서 간혹 패역한 짓을 하며, 어떤 것이 아비인지 알지 못하므로 보고서도 심상하게 여긴다. 이 때문에 예전 사람이 처음 혼인을 할 때 십분 신중하며 반드시 중매를 통해서 이름을 알고, 반드시 폐백을 받고서 친하게 되며, 담에 구멍을 내어 사사로이 친하게 되었다는 혐의나 담장을 뛰어넘는 천함이 없다는 것을 보인다. 또 임금과 신명과 동료와 벗에게 고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무개와 아무개가 배필이 되었음을 알게 하고, 한 번 정한 짝을 바꾸지 않는 뜻을 보인다. 상견례에서 성심과 신의로 고하여 공경하라고 고하는 것은 그렇게 하여 혐의가 없어 떳떳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요, 혼례를 할 때에는 두 성이 다르다는 것을 가려서 문란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한 번 함께 하여 각기 그 배필을 정한 경우에는 평범한 남녀가 각기 내외에 거처하고 목욕간을 함께 쓰지 않는 것은, 또한 평범한 부부 관계에서 혐의를 풀어주어 서로 난잡함이 없도록 한 것이다. 만약 남녀가 함께 섞여 지낸다면, 평범한 부부들은 반드시 그 가림이 있음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니, 아무개와 아무개가 한 부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가림이 있도록 교육을 하여 함께 자리를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이로써 보건대, 부부유별의 별(別)은 다만 남편이 바깥채에 부인이 안채에 머문다는 뜻만을 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책으로 고증할 수 있다. 『시경』의 「관저(關雎)」 주자의 주석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짝이 있어 서로 어지럽지 않는다. 우연하게 함께 놀아도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처음 ‘별’이라는 글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설을 따르면 사람마다 늘 정해진 배필이 있어 어떤 부부와 다른 부부가 서로 가려서 서로 난잡하지 않다는 뜻이다. 마치 부자의 친한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아무개 집의 부자가 다른 집의 부자와 가림이 되어 서로 난잡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부가 가림이 없다면 부자도 분별하기 어렵다. 『예기』에 ‘남녀의 가림이 있은 다음에야 부자가 친해지고, 부자가 친해진 다음에야 도리가 생겨난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공보문백(公父文伯)의 어머니는 계강자(季康子)의 종조숙모(從祖叔母)인데 계강자가 가서 문을 반쯤 닫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턱을 넘어가지 않았다. 공자가 이를 듣고 남녀의 예절에서 가림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짝이 있어 서로 어지럽지 않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후자의 설을 따른다면, 남편과 부인은 비록 서로 친한 도리는 있지만 집에 머물 때에 정중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지나친 데 빠져 예절에 맞지 않고, 음란한 마음이 생겨 도리를 따르지 못할 우려가 있다. 이 때문에 반드시 경계할 것을 정하여 안팎의 가림을 엄격하게 한 것이다. 주자는 ‘무제(武帝)가 뒤뜰에서 놀 때 남녀의 가림이 없었으므로, 태자의 변고가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것은 가까이 하여 가리지 않은 까닭이다. 분결(冀缺)이 김을 매는데 그 처가 들밥을 내어갈 때 손님처럼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대하였다. 이는 우연히 늘 함께 놀았지만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정이 두터우면서도 가림이 있다는 뜻은 어떠합니까?” 내가 말하였다. “외부로 말하자면 짝을 정하였으니 정이 두텁다는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만, 서로 난잡하지 않으니 가림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부로 말하자면 함께 노니 정이 깊은 두터운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만 서로 가까이 하지 않으니 가림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외부로 남의 부부와 가리고 내부로 우리 부부가 서로 가려서, 집집마다 부부가 각기 서로 가려 예로서 교제를 하므로, 남의 부부에게 혐의가 생기지 않고 또 나의 부부도 더러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하니 하나의 ‘별’이라는 글자가 두 가지 뜻이 있어 한쪽을 없애지 못한다.

이득홍은 부부유별의 뜻을 이렇게 두 가지로 구별한 것을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이라 여겨 의기양양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조선 후기 부부유별이 다른 부부와의 가림을 지칭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부유별과 남녀유별을 분리하여 부부 내부의 윤리는 남녀유별로 처리하고 부부유별에서는 다른 부부와의 난잡한 성풍속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후기의 큰 유학자 한원진(韓元震)은 자신의 집안 며느리를 교육하기 위하여 저술한 ?한씨부훈(韓氏婦訓)?에서 부부유별의 뜻을 제 남편을 남편으로 여기고 제 처를 처로 여겨서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또한 반드시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여 서로 함부로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 또 비슷한 시대 김종명(金宗溟)이라는 사람이 한원진, 윤봉구(尹鳳九) 등의 스승이었던 권상하(權尙夏)로부터 들었다면서 “(고대) 중국의 풍속이 우리나라와 달라 여자는 일정한 남편이 없고 남자는 정해진 아내가 없어 음란하고 패륜한 이가 많으므로 부부유별이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윤봉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부유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 바 있다.

보내온 편지에서 남자는 바깥에 여자는 안에 거처하면서 함께 목욕을 하지 않고 같은 옷걸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남녀유별의 예절이다. 부부 관계에서도 또한 절목(節目)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부부유별은 가림을 두터이 한다는 뜻을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가림을 두터이 한다는 말은 믿음으로 말한 것이요, 또 종신토록 개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남편이 죽더라도 개가하지 않는 것은 부부유별의 큰 의미가 여기에 있다. 대개 갑과 을이 부부가 되고 병과 정이 부부가 되었으면 갑이 정을 아내라 부를 수 없고, 을은 병을 아내라 부를 수 없다.

윤봉구는 부부유별의 윤리를 들어 아예 여성이 개가를 하면 아니 된다는 논리로 나아간 것이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여성의 개가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 이러한 부부유별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에서 부부유별에 대한 강조는 남편이 외도를 하지 않는다는 논리로도 확장된 장점이 있다. 정약용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부가 분별이 있다는 것은 각자가 그 짝을 배필로 삼고 서로 남의 배필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가 가림이 있은 뒤에 부자가 친하게 된다고 한 것이다. 창부의 자식은 그 아비를 알지 못한다. 가령 부부간에 가림은 없고 다만 서로 공경하여 손님처럼 대하기만 한다면 부자의 친함에 무슨 도움이 있겠느냐. 경전 가운데에 부부유별에 대한 증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네가 한번 모아 보아라.”라 하였을 때, 아들로 하여금 외도를 하지 않도록 학문적으로 가르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애정과 공경의 거리

조선 후기 부부유별이 사회 윤리로 나아갔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부가 적극적인 애정행위를 하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는 의미로서의 부부유별이 의미가 감쇄된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지극히 당연한 윤리가 된 것이기도 하다. 정약용처럼 자식이 외도를 할까 부부유별을 말하는 이도 있었고, 다음 안정복(安鼎福)처럼 자식이 부부간의 지나친 애정에 빠질까 부부유별을 말하기도 하였다.

부부는 백 가지 복의 근원이니 처음을 잘 하는 방도를 근실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절이나 공경심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갑작스럽게 가까이 지내면 금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니 바로 여기에 달려 있고,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이 늘 여기에서 비롯하니, 근실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용?에 이르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단서가 시작된다.” 하였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은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평소 거처할 때 처자와 함께 거처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되면 자질이 아름다운 자라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빠져들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 관설(觀雪) 허후(許厚)는 그 내자와 손님처럼 상대하여 늙을수록 더욱 지극하였다. 지금에도 사람들이 칭찬하느라 바쁘다. 이것이 가장 배울 만하다. 지금의 자제들은 어려서 부모 곁에서 자라나서 출입하고 접대하는 예절을 알지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부인을 맞게 되면 가볍고 약하게 되어 예의로서 몸을 다스리지 못한다. 언행에서 더욱 허물과 후회가 교대로 이르게 되어 남들로부터 천대를 받게 되니,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

안정복은 부부의 지나친 육체적인 사랑이 부부간의 공경심을 잃게 하는 원인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위대한 유학자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하였다. 16세기 실천적인 유학자 조식(曺植)는 부부가 평소 거처를 달리 해야만 공경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였고, 17세기 대표적인 예학자 허목(許穆)의 형 허후(許厚)는 부인을 손님처럼 대하였다는 것이 모범 사례로 칭송을 받았다. 이이(李珥) 역시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부부 사이의 정욕이 공경심을 잃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하였다.

요즘의 학자들은 겉으로 긍지를 지닌 듯하지만 안으로 독실한 이가 드물다. 부부 사이에 이부자리 위에서 정욕을 멋대로 푸는 일이 많아 그 위의를 잃고 있다. 부부가 서로 육체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서로 공경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이와 같이 하고서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일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반드시 남편은 온화하면서 의리로 통제를 하고 부인은 순종하면서도 정도로 따라야 한다. 부부 사이에 예의와 공경심을 잃지 않은 다음에야 집안일을 다스릴 수 있다. 만약 서로 몸을 가까이 하다가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공경하고자 한들 그 형편상 되기 어렵다. 반드시 서로 더불어 경계하여 반드시 예전의 습관을 버리고 점차 예법으로 들어가야 옳을 것이다. 처가 만약 내 말과 몸가짐이 한결같이 바른 도리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점차 나를 믿어 순종할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이처럼 부부가 육체적인 탐닉에 빠지면 공경하는 마음을 잃어 그것이 가정의 파괴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부는 손님의 관계여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조선 중기 뛰어난 시인이었던 박인로(朴仁老)의 <오륜가(五倫歌)>에서 부부유별 역시 그렇게 되어 있다.

사람 내실 적의 부부(夫婦) ?게 삼겨시니

천정배필(天定配匹)이라 부부(夫婦) 치중(重)?소나

백년(百年)을 아적 삼아 여고금슬(如鼓瑟琴) 렷로라

부부(夫婦)을 중(重)타 정(情)만 중(重)케 가질것가

예별(禮別) 업시 거처(居處)며 공경(恭敬) 업시 조?소냐

일생(一生)애 경대여빈(敬待如賓)을 기결(冀缺)갓치 ?오리라

남으로 삼긴 거시 부부(夫婦)치 중(重)넌가

사?의 백복(百福)이 부부(夫婦)에 가잣거든

이리 중(重) 이에 아니 화(和)코 엇지리

박인로는 하늘이 사람을 만들 때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도록 하여 천정배필로 금슬 좋게 살아가야 한다고 하고, 서로 남남이면서 부부가 되어 조화를 이루어 살아야 백복이 깃든다 하였다. 그러면서도 부부는 서로의 애정만을 중시할 것이 아니라 서로 공경하여 거처를 달리하는 것이 바로 부부유별이라 하였다. 기결은 춘추시대 기읍(冀邑)에 살았던 극결(?缺)이라는 사람으로, 기읍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부부간에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을 대하듯 하였다는 고사가 ?소학?에 보인다. 부부유별의 전범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부에 대한 생각은 중국 고대 한나라 때부터 형성된 윤리관으로, 조선시대 여성 교육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전범은 한나라 반소(班昭)의 ?여계(女戒)?에서 확립되었다. 이이 등이 이른 여성의 도리인 공경하고 순종하는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대저 경(敬)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래 유지함을 이름이요, 순(順)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너그러움을 이름이다. 오래 유지함이란 만족함을 아는 것이요, 너그러움이란 공순함을 숭상하는 것이다. 부부간의 좋은 점은 종신토록 떨어지지 않는 것이나, 방 안에 늘 같이 있게 되면 음란한 마음이 생기게 되고, 음란한 마음이 생기게 되면 언어가 지나치게 되고, 언어가 지나치게 되면 방자한 짓을 하게 되고, 방자한 짓을 하게 되면 남편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만족함을 모르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무릇 일에는 곡직이 있고 말에는 시비가 있다. 곧은 것은 다투지 않을 수 없고, 굽은 것은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다투고 따지는 일이 이미 있게 되면 분노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데 이는 공손함을 숭상치 않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남편을 업신여기는 일을 절제하지 않으면 꾸지람이 따르고, 분노를 그치지 않으면 매질이 따른다. 무릇 부부가 된 자는 의리로써 친하고 은혜로써 화합하는 것인데, 매질이 이미 행해지면 무슨 의리가 있겠고, 꾸지람이 이미 베풀어지면 무슨 은혜가 있겠는가? 은혜와 의리가 다 없어지면 부부가 서로 헤지게 된다.

반소는 흔히 조대가(曹大家)라 한다. 한나라의 학자 반표(班彪)의 딸이자 반고(班固)의 누이며 조세숙(曹世叔)의 아내인데 후대 그의 학문을 높여 대가(大家)라 불렀다. 반소의 ?여계?는 성종 연간부터 구결이 달려 궁중에서 읽혔고, 그의 또다른 여성 교화서인 ?여칙(女則)?, ?여헌(女憲)? 등과 함께 한글로 번역하여 인쇄하여 궁중에서부터 민간에까지 두루 읽히도록 한 바 있다. 조선후기에는 남유용(南有容)이 이 책을 다시 번역하여 누이와 조카딸에게 읽게 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여성들은 어린 시절 필수적으로 배우는 책이 한글로 번역된 ?소학?과 ?여계?가 되었고, 이에 따라 성욕을 억제하는 것이 부부의 윤리로 강요되었다.

조선시대 딸들에게만 이러한 교육을 시킨 것은 아니다. 17세기 큰 학자였던 윤증(尹拯)은 아들을 장가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여 사랑에 빠져 부부의 도리를 잃지 말라 당부하였다.

부부의 도리는 인륜의 시작이다. 일이 지극히 미세하고 비근하지만 진리가 그 안에 행해지는 법이니, 군자라면 이를 알지 아니할 수 없다. 내가 요즘 사람들을 보니 이를 아는 이가 드물다. 이를 신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남자는 욕정에 끌려 윤리강상을 잃어 희롱하고 교만해지며, 아내는 즐거움에 빠져 공손함을 잊어 붙어 지내면서 남편을 쉽게 여겨 마침내 여자 승냥이가 되어버리니, 남편의 약점을 이롭게 여겨 코를 꿰어 제 말을 듣게 한다. 남자 중에 포악한 이는 부인이 자신을 능멸한다고 원망하여 눈을 뒤집어 째려본다.

윤증은 부부가 지나치게 사랑하여 희롱하는 것이 화를 부르는 길이라 하였다. 아내와 지나친 성적인 접촉이 아내를 승냥이로 만든다고 하였다. 남편의 약점을 잡고 코를 꿰어 제어하려 드니, 이 때문에 부부의 불화가 시작된다고 아들을 타일렀다.

4. 사랑과 효의 거리

조선시대 결혼의 목적은 효(孝)를 달성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효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후사(後嗣)를 두는 것이다. ?맹자?에서 “후손이 없는 것이 불효 중에서 중대한 것이다(無後爲大)”라 하였다. 현실 생활에서 후손을 두기 위하여 부부의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생활 윤리에서 효를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곧 후손을 두는 것과 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노동력을 얻는 것이 혼인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셈이다. 조선시대 정실부인이 죽은 후 첩을 들이는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운 것이 바로 늙은 부모를 남편 혼자 봉양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부모 봉양에 부부의 사랑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부부의 사랑보다 부모에 대한 효가 늘 앞섰다.

부부라는 것은 하나의 몸이 둘로 나뉜 것만이 아니다. 이 때문에 위로는 종묘를 잇고 아래로 자식을 이끌어내어 대대로 무궁하게 후손을 전할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기?에서 혼인을 중시한 것이요, ?주역?에서 대가(大家)의 괘를 배열해놓은 것이다. 공경하고 조심함을 극진하게 하고 내외를 바르게 하는 의리를 간곡하게 반복하는 것이니 지극하다 하겠다. 반성하여 서로 공경하는 실질에 있어서 ?요결거가장(要訣居家章)?에서 다시 그 단서를 펴내었다. 이는 배우는 사람들이 더욱 마땅히 유추하여 그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이니 근실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자가 아내를 얻는 것은 그 또한 함께 부모를 섬기기 위한 것이니, 자식 된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 혹 정과 사랑에 빠지거나 자기들끼리만 좋아하는 데 길들여져서,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에게 화목하지 못하여 온 집안의 변고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대개 아내라는 사람은 성품이 꽉 막혀 있기도 한데, 먼 데서부터 합친 존재요, 바깥에서부터 존재이므로, 그러한 형편을 고려할 때, 부인이 시가를 내(內)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알지 못하여 이러한 근심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 그렇지만 남편의 경우는, 부모의 슬하에서 태어나 형제자매와 더불어 같은 배에서 태어나 같은 이불을 덮고 자랐으니 그 은혜가 가장 크고 사랑이 가장 깊은데도, 도리어 꽉 막혀 있고 멀고 바깥에서부터 온 사람에게 저도 모르게 융화되어서, 혹 예법에 죄를 얻기도 하고 사대부 사이에 창피를 당하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옛날의 군자는 처자에게 사랑을 나누어줄까 하여 종신토록 처를 들이지 않았으니, 의리에서 정말로 지나침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은 또한 슬퍼할 만하다.

남편은 강건하고 부인은 유약한 것이 천지자연의 이치다. 내가 요즘 세상을 보니, 그 남편이 어리석고 용렬할 뿐만 아니라, 그 부인도 간악함이 심하지만, 부인 중에 조금 재주와 지혜가 있으면서도 대의를 알지 못하여, 부귀한 가문 출신이라 하여 시댁을 멸시하는 사람들도 남자에게 굴복하지 않음이 없다. 요컨대 이치가 그렇게 귀결되는 것이요, 절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되어가지고 자립하지 못하고 끝내 부인에게 제압을 당해서 뒤집어지고 혼미함에 빠져서, 인륜을 해치고 집안의 도리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른다. 『주역』에서 “위엄이 있으면 길하니, 제 몸을 반성함을 이른다.”고 하였는데 정말 이를 두고 한 것이다.

부인의 병통은 두 가지니, 재물을 좋아하고 괴상한 것을 좋아한다. 오직 재물만 좋아하므로 부모가 하고자 하는 것에 순종을 하려 하지 않고, 형제가 급한 것이 있어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의가 마침내 깨어지고 변고가 따라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 재물과 부모형제 중 어느 것을 더 가까이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니, 천양지차가 있는데도 그리하는 것이다. 오직 괴상한 것을 좋아하여 도사와 부처에게 복을 구하고 무당에게 재앙을 물리치도록 빈다. 신체와 모발처럼 매우 가까이 있는 것도 감히 아까워하지 않는데 금과 옥, 비단과 같은 물건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한 부류의 폐단은 이에 집안의 도리를 더럽히고 마침내 집을 귀신의 소굴로 만들어버리게 되며 어떤 경우에는 이를 자식과 손자에게 전하여 그치지 않기까지 한다. 생사가 운명에 달려 있고 부귀가 천명에 달려 있어 억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지 못한다. 대개 똑 같은 재물인데도 부모형제에게는 혹 잃어버릴까 겁을 내면서, 도사와 부처, 무당에게는 주지 못할까 겁만 낸다. 백성의 의무에 힘을 쓰지 않고 귀신에만 빠져 있으니,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부인이 대의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야 어쩔 수 없는 형편이겠으니, 남자가 된 이가 마땅히 깨우치고 이끌어주어야 할 것이다.

17세기 정통적인 유학자 박세채(朴世采)가 1685년 8월 6일 자식들에게 <집안을 다스리는 요체(居家要義)>라는 이름으로 내린 글이다. 박세채는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17세기 사상계의 지도자로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윤리 강목에 의거하여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며,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라는 뜻을 밝히면서 남녀가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교조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박세채는 혼인의 목적이 부모를 섬기기 위한 것이라 하여 효를 실천하는 한 방편이라 생각하였다. 자식은 당연히 낳아준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겠지만, 다른 집에서 온 아내가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남편과의 사랑만을 강조하여 이 때문에 부모와 형제 사이에 반목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불효를 저지를까 우려하여 아예 혼인을 하지 않는 사례까지 말하였다.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주자학의 이단으로 공박을 당한 윤휴(尹?) 역시 『효경』을 해석하면서 혼인의 목적을 인륜을 중히 여기고 후사를 잇기 위해서라 하여 효의 입장에서 혼인을 설명한 바 있다.

박세채는 남자는 강건하고 부인은 유약한 것이 천지자연의 이치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사실 『주역』에 근거한 것이다. 『주역』은 건곤(乾坤)과 음양(陰陽), 강유(剛柔)와 남녀(男女)의 대립항목을 설정하고, 두 대립항목의 만남에 의하여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을 생생(生生)의 이치라고 하였다. 이러한 유추에 의거할 때 구시대의 학습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남존여비(男尊女卑)는 『주역』의 인식에서 근거한 것이라 하겠다. 남존여비라는 말이 『주역』에 대한 정자(程子)의 해석에서 유래한 말이니, 성리학(性理學)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 문인들이 이러한 인식을 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필연이라 할 수 있다.

박세채는 양강(陽剛)의 기를 품부 받았으므로 남자가 음유(陰柔)의 기운을 타고난 여자를 인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아무리 집안이 대단하고 재주가 뛰어난 여자라도 혼인을 하면 남편에게 복속되는 것을 당연하므로, 남편의 위엄이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는 방안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성을 극도로 폄하하는 발언을 이어나갔다. 박세채가 본 여성의 단점은 첫째, 재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재물을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부모형제와 소원하게 된다고 보았다. 박세채는 두 번째 여성의 단점으로 기복(祈福)을 좋아하여 집안을 어지럽게 한다는 점을 꼽았다. 점을 치고 푸닥거리를 하여 복을 빈다는 것이다. 여성은 이러한 두 가지 단점을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성이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여성이 혼인을 하여 사랑만을 찾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에 대한 우애심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여성이 천성적으로 편협하다는 그릇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진보적인 지식인인 중국 명말의 학자 이지(李贄)가 “사람에서 남녀가 있다고 하면 옳지만 견해에 남녀가 있다고 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견해에 장단이 있다고 하면 옳지만, 남자의 견해는 다 바르고 여자의 견해는 다 그르다고 한다면 그 또한 어찌 옳겠는가?(人有男女則可, 見有男女則可乎? 見有長短則可, 男子之見盡長, 女子之見盡短, 其亦可乎?)”라는 지적은 당시 사회에서 결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문인들은 여성들이 한편으로 천성적으로 편협하기 때문에 가족공동체로서의 임무에 소홀하기 쉽다고 보고, 남편이 여성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여겼다. 안정복(安鼎福)도 이와 비슷한 취지로 아우와 아들에게 글을 남겼다.

부부는 의리로서 합쳐야 하는데, 사랑이 이를 넘어서기 때문에 서로 가까이 하는 마음이 쉽게 생기고 가정의 도리가 무너지게 된다. 증자(曾子)는 “효심은 처자 때문에 시든다[孝衰於妻子].”고 하였고, 유개(柳開)는 “세상의 남자 중에 굳센 심지를 지녀 부인에게 빠지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라 하였다. 저 부인네들은 모두 어찌 사람의 골육을 소원하게 하고 이간질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다만 부인들은 성품이 편벽되어 변화시키기가 어렵고 기쁨과 분노가 쉽게 나타나므로, 남편 된 자가 혹 제어하다가 방도를 잃어버려 부드러운 살갗을 맞대는 사이에 현혹이 되어버리면, 잠깐 사이에 짐승이라는 구덩이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건은 미세한 데서 일어나 원한이 깊게 맺히는 법이어서, 길 가는 사람만도 못한 경우까지 생긴다. 이는 정말 무슨 마음인가? 나로 하여금 평소에 마음을 세워서 광명정대하고, 인륜과 일상사에서 모든 일에 마음을 다하면 애초에 이러한 근심이 없게 된다. 부부는 의리가 중요한데, 지금 세상의 부녀자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니, 어찌 의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모두가 남편 된 자가 인도하여 착하게 만들어야 할 뿐이다. 작은 허물이 있으면 마땅히 덮어주어야 하지만, 부모를 원수처럼 대하고 지친을 갈라놓으려는 뜻이 있으면 결단코 너그럽게 대처해서는 아니 되니, 매우 미워해서 통절하게 배척해야 점차 그러한 마음이 자라나지 않는다. 고금의 가정에서 복록을 많이 누린 자를 보면, 전대에 가정이 잘 다스려진 데서 말미암으니,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정복은 죽음에 임하여 아우와 아들에게 내린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혼인의 목적이 효를 실천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의 가정에서는 부부의 애정과 효가 상치되기 쉽다. 그래서 『논어』에서 효자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증삼(曾參)은 “효는 처자 때문에 시든다(孝衰於妻子).”고 하였고, 맹자도 “처자가 딸리면 처자를 사랑하게 된다.(有妻子則慕妻子)”고 한 바 있다. 송나라의 명현인 유개(柳開) 역시 남자 중에 부인에게 빠지지 않는 강한 남자가 없다고 탄식한 바 있다.

이러한 현실 자체는 고금에 다를 바 없다. 다만 박세채는 남존여비에 바탕하여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이끌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안정복은 발언의 수위를 조금 낮추었다. 부부가 의리(義理)로 만나야지 사랑으로 만나서는 아니 된다고 강조하여, 혼인이 감정적 사랑에 의한 만남이 아니라 이성적인 윤리에 의한 만남이라야 한다고 보았다. 의리를 바탕으로 할 때 설사 부인이 작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감싸주어야 한다는 인식을 보인 것은 진일보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불효에 대한 태도는 단호하여, 이혼에까지 이를 태세다.

5. 결론

오늘날 사람들은 서로 늘 함께 거처하면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부부라 생각하는데, 조선시대 선비들이 왜 그토록 부부유별을 강조하면서 부부가 서로 거처를 따로 하고 손님처럼 일정한 거리를 둔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하였을까? 오랜 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부부유별이 화목한 가정을 지키기 위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부부가 배우자로서 외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키기 위하여, 다른 부부와의 가림을 강조한 것이 부부유별의 첫 번째 의미다. 난잡한 성생활로부터 가정을 지키기 위한 윤리로서 부부유별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부부유별은 부부 관계의 지속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부부가 지나치게 허물없이 지내다가 서로에 대해 존중과 배려를 잃는 지경까지 이르면 가정은 파탄에 이른다.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은 그 지속의 기간이 길지 않음은 생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으니, 이 논리 역시 부정할 것만은 아니다. 이 때문에 예전 선비는 부부 관계에서 애정보다 공경을 더 강조한 것이다. 부부 관계에서 지나친 애정을 강조한 것은 가족의 중심이 부부 관계에 놓이게 되고 이에 따라 부모나 형제가 소외되는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혼인과 출산 자체를 기피하고 또 쉽게 이혼에 이르는 현실을 생각할 때, 조선시대 선비들의 부부유별에 대한 생각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에 대해 좀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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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05 22:34

    첫댓글 부부라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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