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마눌은 15일 부터 계획되어 언제나 그러하듯 혼자서 튈려고 암중모색중이었는데 아들하고 가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말을 건낸다. 아이들이 초교시절부터 전국을 헤매고 다녔지만 이제는 아이들도 싫어하지만 나역시 혼자 떠나야 자유롭다. 길 나서서까지 구속당하고 얶매여야 하는가?
눈치없는 놈. 대학 1학년이 여자친구랑 가면될텐데 주저없이 따라 가겠단다. (별 수 없이 머리를 굴러) 그래 아빠도 너랑 답사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으이구!!!!!!!!). 기왕지사. 아들과 동행 참 멋지지 않는가? 작가 이순원이 아들과 대관령을 넘어면서 나눈 이야기를 소설로 그린 책을 읽고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이제 훌륭한 아빠 반열에 들어갈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대부분의 아버지 처럼 나도 아이가 고등학교 진학후 거의 대화를 하지 못했다. 학교를 둘러싼 환경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대한민국 40대 직장인들의 생활이 그러한 여유를 박탈해버린 것 같다. 특히 이름하여 출생 혁명기(?)인 58개띠(난 닭띠)들과 고교.대학을 함께 즐긴 우리세대는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교육.이데올르기의 한가운데를 항해했었다. 항해보다는 풍랑이 휘몰아치는 먼바다를 의지와 관계없이 얻어터지고 짓밟힌 일엽편주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어? 이야기가 오끼나와로 빠지는구먼! 아무튼 먹고 살기위해서라는 핑계로 포장하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무척 힘든 세대였다. 그런 연유로 아들과의 대화는 멀어지고 관계마져 소원해졌는데 이번 답사길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겠다.
청량산
청량. 늘 겁없이 횡설수설하는 나는 청량은 극락이라 말한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책에서 읽었고 인도의 자연환경을 고려하면 극락은 시원한 장소이어야만 했다. 송광사 청량각. 남산제일봉 청량사등 불교 유적과 관련 생각해보라.
대구에서 청량사 가는 길은 환상적인 동선이 아닐 수 없다. 여유가 있다면 안동에서부터 도보로 답사하면 민속.불교.유교.역사.자연환경.문학을 섭렵할 우리나라 최고의 코스이지만 그런일은 식자나 낭만파들의 몫이고 마음만 부르죠아인 나는 편리함이 조오타.
"청량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수행에 전념했던 신라시대 천년 고찰이다. 청량사는 풍수지리학상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히는데 청량산의 열두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절을 둘러싸고 있는 연꽃의 꽃술 자리이다. 옛글에 전하는 청량산 사암(寺唵)의 숫자는 계룡산의 3분의 1 정도 되는 이 산을 뒤덮고도 남을 만하다.
신라시대 중흥기엔 연대사를 포함해 크고 작은 암자가 33개를 헤아렸다. 그뿐이랴. 청량산은 산 이름부터 문수보살의 정토(淨土)이며, 조선 시대 주세붕이 멋대로 이름을 바꿔놓기 전에는 청량산의 열두 봉우리도 보살봉, 의상봉, 반야봉, 문수봉, 원효봉 등 불교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화엄영산(華嚴靈山)의 깎아지른 암벽에 의지한 열두 봉우리들을 연꽃잎처럼 둘러싸고 앉은 청량사는 그대로 화엄(華嚴)의 세계이다."...청량사 홈
이런 산세를 놓칠 우리의 조상님들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지척에서 태어나신 퇴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온다. 아래 시는 퇴계가 68세 지은 것이다. 관련자료를 청량사 홈에서 가져왔다.
퇴계 이황
천석 연하 노는 일이 아직 식지 않았거늘 늙은 나이의 이 몸이 그릇 부귀의 꿈을 꾼단 말가 어찌 알았느냐 이 유선침을 베고서 가서 청량산의 복지산을 올라 갈 줄이야
이 몸이 저 시원한 열어구의 바람 타고 하룻밤 지난 사이 온 산천을 구경했네 늙은 중이 나에게 농가의 삿갓을 주면서 일찍이 돌아와서 들 늙은이 되길 권했네
퇴계 이황보다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청량산은 옛 퇴계 가문의 산으로 그의 5대 고조부 이자수(李子修)가 송안군(松安君)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다. 안동 예안의 온혜에서 청량산까지는 불과 40여 리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명승지이다.
퇴계는 평생을 이 산에 올라 학문을 탐구했으며 꿈에서도 이 산을 잊지 못했다. 이렇듯 청량산은 퇴계 삶의 동반자이자 스승이었다. 퇴계와 청량산의 인연은 1513년 2월에 13세의 나이에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偶, 1469~1517)가 조카와 사위 조효연(曺孝淵)"오언의(吳彦毅)와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퇴계는 1515년(15세) 되던 해 봄에 사형(四兄) 온계 해(瀣)와 함께 숙부 송재 선생을 모시고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했다.
1525년 25세에는 봄에 청량산에 입산하였는데 열흘 동안 눈바람이 세차 서울에 올라간 3째형을 그리며 2년 전 한강을 건널 때 눈보라를 맞으며 읊은 시 '풍설(風雪)'에 이어 시를 읊었다. 1552년 (52세) 9월에는 주세붕의 '청량산록발(淸凉山錄跋)'을 지었으며 1553년 (53세) 9월에는 주세붕의 '청량산록후발(淸凉山錄後跋)'의 제시(題詩)를 지었다.
반평생의 이 심장이 쇠와 같이 굳세지 못하여 선산에 묵은 빚을 오래도록 갚기 어렵도다 꿈에 혼이 다시 맑고 높음을 능멸히 알고 형체의 역은 이제 오히려 고운 향기를 떨어뜨리도다.
이백(李白)은 광여산에 들어가 일조(日照)의 시를 읊었고 한유(韓愈)는 서악에 올라 하늘의 빛을 움직였도다 큰 책편을 어찌 다행히 보내 주심을 보게 되어 천 길 절벽에 도리어 함께 옷깃을 떨치는 것 같구려
퇴계는 이해 12월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와 '양생설후(養生說後)'에 처음으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란 호(號)를 쓰기 시작했다. 1555년 (55세) 11월에는 청량산에 와서 한 달간 머물러 있으면서 '십일월입청량산(十一月入淸凉山)'시 40구(句)를 읊었다.
지애미는 발발이 전화다. 아 괜찮나? 아이스박스에 음료수 있는데 챙겨줘라. 제기럴 남편 길 나설때는 방문도 열어보지 않더니만. 기실 어제저녁부터 마누라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운전 면허시험 외에 독서로 일관하던 놈이 아빠 따라 답사간다는 말 듣고는 아이스 박스가 터져 나가게 준비했다.
야.임마! 청량사에는 공민왕이 다녀 갔단다?
와 왔는데?(이자슥이 숫제 말을 깔고 있네).
너 뭐 공부했냐? 아빠는 30년이 지나도 기억한다.
아빠는 맨날 답사책만 보잖아!
한마디도 안 지고 앵기네 그참!!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청량산을 거쳐 안동까지 피난을 했다. 그 자취가 이곳을 비롯 안동 봉정사.영호루등에 현판으로 전해온다. 우리 민속에 유난히 관심이 많지만 시간과 아들놈 취향을 생각 들리지 않았지만 공민왕.노국공주를 모신 사당은 꼭 다시 참배할 것이다. 아랫글은 공민왕과 관련 청량사 홈에서 가져 왔다.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고려 왕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원나라 왕족이었던 노국 공주는 공민왕과 결혼한 뒤 스스로 고려인을 자처하며 원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공민왕의 자주 정책을 도왔다. 하지만 결혼 8년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자 중신들의 간청으로 공민왕은 이제현의 딸을 후궁으로 삼았다.
이곳 청량사에 왔을 때가 결혼 생활 11년 즈음으로 노국 공주는 유리보전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응진전에서 16나한을 모시고 기도를 했다. 홍건적을 무찔러 달라는 것과 함께 아마도 아이를 갖게 해 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빌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개경으로 환도한 뒤 공주는 16년 만에 임신을 했지만 1365년 겨울 난산 끝에 숨지고 말았다. 공주가 죽은 이후 공민왕은 가슴에서 공주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귀족과 시녀들의 음란한 행위를 보는 관음증이나 동성애에 빠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공민왕과 노국 공주의 묘역은 현재 개성시 증서면에 있다. 공민왕은 이곳 청량산으로 피난 오면서 숱한 전설을 남겼다. 1361년 10월 홍건적이 침입하자 공민왕은 노국 공주를 데리고 이곳 청량산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청량산으로 들어갈 때 지금의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와 관창리를 연결하는 나분들(廣石)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때 공민왕은 말을 타고 건너고 노국 공주와 시녀들은 인근 부녀자들의 등을 딛고 건넜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놋다리밟기>의 시초이다.
이 놋다리밟기를 <기와밟기>라 하기도 하는데 앞으로 복원해야 할 유산이다. 공민왕은 이곳 청량산에 3개월여 동안 있으면서 <유리보전>의 현판을 썼으며 산성을 쌓는 등 홍건적의 침입을 대비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공민왕이 죄인들을 사형시킨 밀성대 등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지역 사람들이 공민왕 사당을 만들어 매년 정월과 칠월 보름(백중)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공민왕당의 공민왕 영정은 도난 당하고 위패만 남아 있다."
오늘날 청량사가 불교신도는 물론 등산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을 제외하면 문화유산 답사꾼들에게는 크게 볼거리가 많지 않은 가람이지만 한번쯤 답사하고 싶은 것은 산중불교에서 대중불교를 표방하신 지현(?) 스님‘의 공덕일 것이다. 청량사에 관해 일전에 읽은 기사 내용이 생각나서 은근히 말했더니 지놈도 읽었단다.
오는 차안에서 불쑥 아빠는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당황스러웠다. 이제 세상눈을 떠는가? 작년까지도 신문 논설을 읽으라 했더니 집에서 구독하는 신문이 정통 보수지인 관계로 나보다 더 보수적인 시각으로 주장을 폈었는데 이제 어려운 길로 발걸음을 내딛는 듯해 묘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는다.
무엇때문에 그러는데?
아파키스탄 인질.탈레반. 그들이 선교인가.봉사인가 등등 일목요연하게 정리는 되지 않았어도 제법 옹골진 견해를 보여 내심 흐뭇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은 애비의 노파심 만은 아닐것이다. 우리세대에서 해결하지 못한 제문제가 결국 후손들 몫이 되는 것인가?
조선일보 기사. "상전벽해의 주인공은 주지 지현(50) 스님. 그는 1986년 5월 스물아홉 나이에 청량사 주지로 부임했다. 쌀, 수저, 이불도 없는 절에 새 주지는 쌀 반 가마와 이불을 사왔지만 깎아지른 경사를 오를 길이 없어 다음날 지게로 져 날랐다.
그는 눈만 뜨면 흙을 파내고, 돌을 모아 축대를 쌓았다. 그러면서 법당에서 목탁 두드리고, 절을 했다. 부임 이듬해 부처님 오신날엔 절 마당에 걸린 연등이 25개뿐이었지만, 틈 나는 대로 마을로 내려갔다. 고추 따기, 잡초 뽑기를 도우며 ‘출장법회’를 열었다. 농사일 바쁜 농민들에게 ‘산중의 절에 오시라’ 해봐야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마을의 새마을회관을 임대해 농사일 끝난 저녁 9~10시쯤 법회를 열었다. 그것도 멀어서 오기 힘든 경우엔 경운기를 빌려서 모셨다. 영주, 안동까지 나가 연령별, 취미별 신행모임을 만들고 법회를 열었다.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로, ‘산중 불교’에서 ‘대중 불교’를 지향했다.지난 7일 만난 그는 “당시 ‘야간출장법회’를 마치고 경운기 20~30대가 일제히 시동 걸 때 ‘탈탈탈’ 울리던 소리는 어떤 법고(法鼓) 소리 보다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오는 도중에 들꽃을 보고 이름을 물었더니 도대체 아는 꽃이 없다.
너 학교에서 뭐 배웠니?
꽃이름 안 배웠는데...
대화는 단절 되고 내얼굴에는 울긋불긋 열꽃이 핀다.
저 굴뚝은 무엇인지 아니? 심상찮은 내표정을 감지한 놈이 한풀꺽여 조용히 "모르겠는대요" 란다. 돌아가신 분의 유품을 소각하는 영가라고 설명을 해주어도 그새 듣기는 커녕 돌아서서 약수터 물만 들이킨다.
범종루
願此鐘聲遍法界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산의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 다 밝아지며
三途離苦破刀山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과 도산의 고통을 모두 여의고
一切衆生成正覺 모든 중생 바른 깨달음 이루어지이다.
聞鍾聲煩惱斷 이 종소리 들으시고 번뇌망상 끊으소서.
智慧長菩提生 지혜가 자라고 보리심을 발하소서.
離地獄出三界 지옥고를 여의고 삼계를 뛰쳐나와
願成佛度衆生 원컨대 성불하시고 중생제도하옵소서.
청량사는 산지가람으로 경사한 심한 터에 석축을 쌓은 후 전각을 세웠다. 유리보전은 주전각으로 종이로 만든 불상이다. 주불인 약사여래의 협시는 일광.월광 보살이어야 하건만 문수, 지장보살을 모셨다. 현판은 공민왕 친필이라고 전해온다.
유리보전 팔작지붕 측면이 눈에 들어온다. 합각을 기와로 조적했다. 전해오던 숙종조의 탱화는 한국불교박물관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선방인 심검당과 요사. 최근에 불사임에도 호화롭거나 사치롭지 않고 수더분한 까닭은 산세 때문일까?
산신각
오층탑은 근자에 조성한 듯,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삼각우총(송)
청량사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뿔이 셋 달린 소의 무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청량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남민(南敏)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기르던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뿔이 셋 달렸으며, 차차 자라남에 따라서 크기가 낙타만 하고, 힘이 세며 사나워서 부려먹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량사 주지가 남민의 집을 찾아가서 절에 시주하도록 권하여 승낙을 받았다.
크고 힘세며 고집이 많은 이 뿔이 셋 달린 소는 절에 온 후 차츰 고분고분해져 연대사(蓮臺寺)와 암자(庵子)의 석축을 쌓는 데 소요되는 돌을 운반하거나 절에서 소비하는 나무를 운반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준공을 하루 앞둔 어느 날, 뿔이 셋 달린 이 소가 죽었으므로 이를 불쌍히 여겨 절 앞에다 묻고 묘를 만들어 주니 그 자리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나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불러오고 있다.
건방진 애비는 약사여래불을 문밖에서 뵙는 불경을 범했지만 아들놈은 다소곳이 법당안에서 삼배를 올린다. 저런 모습을 바라보고 흐뭇하고 든든하지 않은 애비가 있겠는가?
ㅎㅎ 니 엄마도, 표충사에서 아빠랑 데이트하면서 불전에 삼배하는 내뒷모습이 하도 믿음직스러워 결혼 결심을 했다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유효할리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