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15일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문세광 사건’ 관련, 발생 초기부터 각종 의혹이 나돌았다. 특히 저격 당시 현장상황과 총탄발사 정황, 제3의 저격수 등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됐다. 사건은 또 DJ납치사건과의 거래 등 음모론으로 재생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각종 의혹과 음모론을 입증할 증거는 사건 후 30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이번 외교문서 공개로 의혹 해소를 기대했지만 역시 답을 얻지는 못했다.??오히려 사건을 둘러싼 의혹만이 더욱 거세지는 형국이다.
문세광은 1973년 11월 오사카 조총련 간부였던 공범 김호용에게 공작금 80만엔을 받는다. 74년 5월 오사카에 정박한 만경봉호에서 암살지령을 받는다. 7월 오사카 한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치고 위장 여권과 비자를 준비한다. 8월6일 라디오에 권총을 숨기고 서울에 온다.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은 일본인 고위층 행세를 하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검문을 쉽게 통과한다. 식은 시작되고 박 대통령의 기념사 낭독이 이어진다. 문세광이 권총을 뽑으려는 순간 방아쇠를 건드려 총알이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한다. 문세광은 권총을 빼들고 통로로 달려나가 또 다시 암살을 시도한다. 연이어 3발을 발사했으나 박 대통령은 무사했다. 그러나 육 여사가 머리에 총탄을 맞는다.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이날 오후 사망한다. 문세광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10월7일 법정에 선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같은 해 12월2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문서 공개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각종 의혹은 끊이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의문은 육영수 여사가 과연 문세광의 총에 맞아 사망했느냐는 점이다. 당시 수사발표를 보면 사건 당일 현장에 울린 총성은 모두 7발. 반면 문세광은 5발이 장착되는 권총을 사용했고 범행 뒤 한 발이 권총 약실에 남아있어 모두 4발을 발사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다면 나머지 3발을 과연 누가 어디에서 쐈을까. 이 점이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경호원이 합창단원에게 쏜 오발탄 하나를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두 발의 행적은 묘연하다.
이 때문에 제3의 저격수가 있다는 의혹이 증폭됐다. LA타임스 도쿄 특파원이 총탄을 맞은 육 여사 머리의 위치가 “잘못됐다”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문세광은 당시 행사장 좌측 뒷좌석에서 앞으로 뛰어가며 총탄을 발사했다. 육 여사가 만약 그의 총탄에 맞았다면 육 여사의 머리는 좌측으로 기울어 있어야 정상. 그러나 육 여사의 머리는 우측으로 넘어와 있었다는 것. 그러나 화면 분석 결과 3번째 총성과 동시에 고개가 젖혀졌으며, 일단 오른쪽으로 흔들렸다가 왼쪽으로 숙여지는 것이 나타났다.
이와 관련, 현장검증에 참여한 수사본부 요원 이건우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의 얘기는 또 다시 의문에 물음표를 덧붙인다. 이건우 계장은 지난 89년 한 월간지와 인터뷰 내용에서 이처럼 주장했다.??
“육 여사는 절대로 문세광의 총탄에 죽지 않았다. 육 여사를 숨지게 한 사람은 짐작되지만 지금은 밝힐 수가 없다. 이 사건은 숱하게 은폐되고 조작됐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다문 채 지난 99년 숨졌다.??
이에 대해 당시 수사의 실무책임자였던 정치근(74) 변호사는 “의혹의 여지가 없다”는 반응.
“수사·재판기록을 보면 당시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문세광의 자백에다 보강증거까지 충분해 의혹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문세광은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고 검찰에 송치된 후 순순히 혐의를 시인했다. 직접 신문하고 재판에도 참여했지만 혐의를 부인하는 등의 일은 없었다.” 문세광이 조총련 일을 하면서 만경봉호에서 북측 사람을 만나 지령을 받았다고 실토했고, 권총이 입국전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 2점 중 1점으로 밝혀졌으며 외신기자가 촬영한 현장사진을 통해 탄환의 궤적이 문세광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났다는 점 등이 그 예라는 주장.
육 여사의 사망과 관련해서는 특히 다양한 의혹이 제기된다. 문세광이 현장에서 잡힐 때까지 육 여사가 살아 있었고 이때 제3의 인물이 등장해 위해를 가했다는 주장도 있다. 80년 대 이를 제기한 한 월간지는 그 근거로 현장 녹음 테이프를 내세웠다. 그러나 녹음 테이프의 대화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8·15 행사장 주변에는 수많은 경찰이 배치됐고 비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문세광은 비표가 없었다. 또 그는 외곽 검문이나 신체검색도 받지 않았다. 이날 행사장으로 향하는 차량을 검문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로 인해 문세광은 행사장 입구를 무사통과 했다. 당시 경호 관계자들은 훗날 증언에서 “외국인에 대한 검색이 약화돼 외제 대형 승용차를 탄 문세광이 입장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며칠 전 대통령과 외교사절이 참석한 연극 공연에서 경호원이 외교관 부인의 핸드백을 뒤져 거센 항의를 받은 뒤였기 때문이라는 것. 문세광은 행사 당일 일본어를 구사하며 VIP로 행세했다.
문세광의 진술대로 조총련이 사건에 연계됐느냐는 것도 의혹 중에 하나. 수사본부는 문세광이 북한의 지시를 받고 조총련 관계자와 함께 범행을 준비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문서공개를 통해 일본은 한국 측으로부터 이 같은 수사상황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전달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일본은 74년 12월 9일 조총련과의 연계 여부를 포착하지 못했다고 주일대사관에 통보했다. 조총련 연계와 관련, 양국이 전혀 다른 수사 결론을 내린 것이다.
조총련 연계 관련 일본이 한국의 수사 정보를 알면서도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 배경에 대해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일본은 당시 박정희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문세광의 범행 의도만을 부각했다.
사건의 수사, 재판, 사형집행이 속전속결로 진행됐다는 점도 의문. 사건발생부터 사형까지는 3개월 밖에 안 걸렸다. 문서에 따르면 아사히신문은 사형 이틀 뒤인 12월22일 평론에서 “초스피드로 사형이 집행됐다. 피스톨 입수경로, 한국입국경위, 기념식장 입장, 저격당시 모양 등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 사건 전체가 정치적 장막에 싸여있다. 그의 운명의 벽은 일본 한국 북한에 걸쳐있는 냉혹한 정치의 벽이며, 권력의 논리다”라고 서술했다.
문세광 사건은 ‘김대중 납치 사건’ 1년 뒤에 발생했다. DJ사건으로 일본에게 수세로 몰린 데다 독재에 대한 비판 등이 일면서 박 정권이 국면 전환용으로 사건을 꾸몄다는 음모론도 제기됐다. 특히 문세광이 조총련보다는 친한 단체인 재일 거류 민단에 가까웠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박 정부가 물증 없이 북한을 배후로 몰아넣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문세광 사건 문서는 공개 됐지만 이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수많은 물음표는 계속될 전망이다.
문세광은 누구?
195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한국의 본적지는 경남 진양군. 사건 당시 처와 두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그는 고교시절 ‘공산당선언’ ‘김일성선집’ ‘모택동어록’ 등 각종 공산주의 서적에 심취했다. 고교 중퇴 후에는 재일 거류민단 소속의 ‘한국청년동맹’ 회원으로 각종 집회시위를 선동했다. 이후인 73년 8월 ‘DJ납치사건’ 등의 영향을 받아 조총련계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며 공산주의 사상에 더욱 심취했다. 9월부터 대통령 암살을 결심하면서 일본 여인과 홍콩으로 사전 답사 여행을 하는 등 범행을 준비했다.
문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