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종고의 大慧宗杲(1089~1163) 『서장』 중에서
화두 깨면 만 가지 의심 부서지리라
부처님[黃面老子]이 이르시되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가 되는지라, 온갖 모든 착한 법을 길러낸다”고 하며 또 이르시길 “믿음은 능히 지혜의 공덕을 더욱 자라나게 하며, 믿음은 능히 여래의 땅에 반드시 이르게 한다”고 하시니 천리 길을 가려고 함인데 한 걸음이 맨 처음이 됨이라.
십지보살이 장애를 끊고 법문을 증득함도 처음 십신으로부터 들고난 뒤에 대법신(大法身)을 얻어서 자재력(自在力)을 갖춘 법운지(法雲地)에 올라 바른 깨달음을 이루나니 처음의 환희지(歡喜地)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환희를 내기 때문이다.
만약 결정코 척추뼈를 세워 일으켜서 세간과 출세간의 한량없는 자가 되고자 할진댄, 마땅히 한낱 무쇠로 부어 녹여서 만든 자라야 바야흐로 증득할 수 있거니와, 만약 반쯤은 밝고 반쯤은 어두우며 반쯤은 믿고 반쯤은 믿지 못한다면 결정코 증득할 수 없으리라.
이 일은 인정(人情)이 없어서 전해주고 싶어도 전해줄 수가 없나니, 마땅히 본인 스스로가 깨달아 밝혀야만 비로소 취향(趣向)할 분이 있으려니와 만약 다른 사람의 입의 판단함을 취한다면 영겁토록 쉴 때가 있지 않으리니 천번만번 당부하나니 하루 종일 가운데 헛되이 보내지 말지어다.
원만하고 아름다움이 석가, 달마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건만 스스로 (화두를) 보아 사무치지 못하고 꿰뚫어 통과하지 못하므로 온전한 몸이 모양과 현상 속에 뛰어 들어 있으면서도 도리어 그 속을 향해 벗어나기를 구하나니 더더욱 교섭치 못하리라.
이 일은 오랫동안 선지식을 참문하면서 총림을 두루 돌아다닌 뒤에야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에 더러는 총림에 있으면서 머리가 희고 이가 누렇게 되도록 요달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또 더러는 잠깐 총림에 들어와 정진하고도 천 가지를 요달하고 백 가지를 감당하는 자가 있나니, 발심에는 선후가 있거니와 마음을 깨달음에는 선후가 없느니라.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이니, 화두 위에서 의심을 파(破)한 즉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지리라. 화두를 부수지 못한 즉 다시 화두 위에 나아가서 더불어 겨루어 갈지어다. 만약 화두를 내팽개쳐 버리고 도리어 문자 위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키거나 여래의 경교(經敎)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公案) 위에서 일으키거나 일상생활의 일 속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모두가 마구니의 권속이리라.
마음이 만약 시끄럽더라도 오직 화두만을 들지니 부처의 말씀, 조사의 말씀과 여러 노숙(老宿)의 말씀과 천만 가지의 차별들을, 만일 ‘무’자만 꿰뚫는다면 한꺼번에 꿰뚫어 통과하여서 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으리라. 늘 사람에게 묻되 “부처님의 말씀은 또한 어떻고, 각지의 노숙은 말씀은 어떻고…”만 하다보면 영원토록 깨달을 때가 없으리라.
■ 대혜종고는
대혜 스님은 어릴 적 스스로 출가해 처음에는 조동종 계통의 스님을 참문해 수행하다가 담당화상의 유언에 따라 원오선사의 제자가 됐다. 스님은 ‘서로 좇아오는구나(相隨來)’라는 원오의 말에 크게 깨닫고는 뒤에 간화선을 널리 펼쳤다. 모함으로 16년의 긴 세월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스님은 이후 선을 크게 진작 시켰으며 특히 당대 수많은 지식인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