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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7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6월 설교 시리즈 – 필작어세(必作於細)>1. 어느 날 저녁에 침대에서 일어난 다윗!
본문 : 사무엘하 11장 2절(1~5절)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그 때에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 보았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새번역>
‘필작어세’란 사자성어는 중국 고대 철학서 노자 도덕경 63장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어려운 일은 쉬운 것에서 시작하고, 큰일은 작은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라는 의미가 담긴 말로 시작해 이제는 거의 ‘세상의 큰일은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기 위하여 시작된 2026년의 분기점을 돌면서, 특별히 여름이란 성장의 시기를 시작하면서, 가을에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다시금 눈 여겨 보아야 할 작은 일들을 이 6월 한 달 동안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너무도 칭찬 할 것이 많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 하지만 오늘은 칭찬이 아니라 너무도 안타까운 때의 다윗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무엘하 10장까지 다윗은 소위 전성기를 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통일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시고 강한 힘으로 영토를 넓혀 가게 하시면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다윗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이상하게 기록되어지기 시작합니다. 암몬 자손들과의 전쟁을 위하여 왕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었지만 정작 왕인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그들을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요압에게 맡기라고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묻지 않고 자신 스스로 그렇게 결정합니다. 그렇게 요압에게 맡기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것 역시 특별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젠 자신까지는 나서지 않아도 될 전쟁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쟁에서는 반드시 ‘왕들이 출전하는 때’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의 전쟁이므로 왕인 다윗이 출전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사무엘하 11장 2절A, 새번역>
다윗은 양치기였을 때부터, 사울 아래에 있을 때에도, 도망칠 때에도, 어느 때라도 소위 ‘새벽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 <시편 5편 3절, 새번역>
내 영혼아, 깨어나라. 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련다. <시편 57편 8절, 새번역>
다윗은 ‘새벽’ 이란 시간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난히 기뻐했던 사람이었고, 그 새벽에 주신 은혜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기도 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편 9~10절, 개역개정>
이랬던 다윗이 지금 언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전쟁에 자기의 부하들을 보내 놓고는 무려 저녁에 다윗은 침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늦잠을 자고 일어났겠냐고 다윗을 옹호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그동안 전쟁을 치르고,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피곤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늦잠을 자고 일어났으면 일단 전쟁의 상황부터 보고를 받고, 자기가 도울 일은 없는지 편전으로 가서 나랏일을 돌아보는 것이 왕으로서 정상적인 임무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다윗은 저녁에 일어나 갑자기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어두컴컴한 옥상을 거닐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성경은 그런 다윗의 행동에 악이 맞장구라도 쳤다는 듯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때에!!!’
하필 바로 그 때에, 잠에서 깨자마자 옥상을 거닐 때에,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 보게 됩니다. 왕궁은 주변 건물 중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궁 옥상에 오르면 전망대처럼 주변을 다 둘러 볼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저는 끝까지 다윗을 옹호해 주고 싶습니다. 그냥 별이 보고 싶어 올라갔을 수 있습니다. 저녁 바람을 쐬며 정신을 차리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선한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밧세바의 목욕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모세는 잘 생겨서 부모가 죽이지 못했다는 기록에 버금가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볼 때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어마어마하게 밝은 불빛이 존재했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을 얼마나 뚫어져라 보았기에 아주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다윗은 충분히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됐습니다. 요셉처럼 옷을 버려두고라도 주인의 아내와 함께 있던 자리를 피한 것처럼 그 자리를 피하면 됩니다. 다윗은 재빨리 옥상을 내려가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신하를 불러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보게 합니다. 그런데 진짜 충성스러운 신하라면 다윗에게 무엇이라고 해야겠습니까?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얼마나 강하게 말했으면, 이미 말이 통하지 않을 상태였기에, 아무 말도 못한 채 바로 누구인지 알아보게 됩니다. 또한 신하의 전하는 내용도 아주 특이합니다.
다녀온 신하가,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로서,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고 하였다. <사무엘하 11장 3절, 새번역>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엘리암의 딸 밧세바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먼저 누구의 딸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신하도 다윗의 마음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신하와 밧세바가 일부러 꾸민 사건이 바로 사무엘하 11장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래서 악이 만나 박수를 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교묘하게 앞 뒤를 바꾸고 있습니다.
자신의 충성스런 장군 우리야의 아내라는 말을 먼저 들었다면 다윗은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암의 딸이라는 이야기만 듣고는 그 뒷말을 흘려들을 수도 있을만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이제 더 이상 다윗에게 브레이크는 없습니다. 자신을 말려 줄 훌륭한 부하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 있습니다. 잔소리꾼들도 없겠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니 자신의 마음대로 해도 될 것만 같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누군가는 왕이 할 수 있는 일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네, 하나님을 모르는 왕이라면, 정말 악한 왕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과 다른 왕이었습니다. 모세가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한 것만큼 하나님께 신앙적으로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던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저지른 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범죄로 끝나지 않고 피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11장 이후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있던 우리야를 불러 모든 일을 무마시키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간음죄에 살인교사죄를 더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가게 됩니다. 이 일로 어린 아이의 죽음부터, 자신의 아들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수치스러운 일까지 다윗의 노년은 정말 실패자로 보이게 됩니다.
필작어세! 이렇게까지 다윗에게 큰 일이 되게 만든 다윗의 첫 번째 작은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어떤 작은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저는 오늘 2절 말씀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사무엘하 11장 2절A, 새번역>
그리고 이 2절 말씀을 저와 여러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싶습니다.
첫째,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결국 육체의 게으름을 유발하게 만드는 기초가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다윗은 왕들의 전쟁이 있던 때,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마무리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한가롭게 잠을 청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부하들과 나아가 하루라도 더 빨리 이 전쟁을 마무리 짓고, 모든 군사들과 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함께 두 다리 쭉 뻗고 잠들게 했어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일들을 하나님께 부여받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쯤이면 되었겠지, 저 정도는 요압으로 충분하겠지, 무엇보다 더 이상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 스스로 판단해 버리는 영적 게으름을 보이게 됩니다. 영적인 게으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최소한의 소통도 끊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던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묻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에서는 하나님이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잊어버린 채 하나님과의 소통을 끊어버린 영적인 게으름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적인 게으름의 상황이 바로, ‘어느 날 저녁에 일어난 다윗처럼’ 우리에게도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저녁이 너무도 자주 찾아와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최소한의 소통이 있으십니까? 있어야 하는 줄 알지만 끊어져 버린 것은 아닙니까? 다른 것을 할 시간은 많은 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없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드릴 시간은 없지만 티비를 보고, 유투브를 보고, 게임을 하고, 취미를 즐길 시간은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에도 부족해서 하나님과의 그나마 남은 시간조차 줄여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저녁에 일어난 다윗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인정해야 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과의 최소한의 시간부터 회복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씀 한 장, 1분 기도, 예배 시간에 집중 등 하나님과의 최소한의 시간으로부터 소통하고자 한다면 다시 물꼬는 트이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이기적으로 닫힌 귀입니다.
다윗은 지금 완전히 닫힌 귀를 가진 순간입니다. 아마 그 어떤 말로도, 하나님조차도 다윗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이라는 의식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압 장군조차도 우리야를 죽이라고 보낸 편지를 보고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너희는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앞세우고 나아갔다가, 너희만 그의 뒤로 물러나서, 그가 맞아서 죽게 하여라." 요압은 적의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적의 저항 세력이 가장 강한 곳에 우리야를 배치하였다. <사무엘하 11장 5~6절, 새번역>
용감하게 충언을 할 수 있어야 했던 요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다윗의 이기적으로 닫힌 귀를 눈치 챈 요압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기적으로 귀를 닫아도 될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 사람의 말이 들리겠습니까? 귀를 닫으니 눈도 닫히고 마음도 닫히고 오직 욕망으로만 달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훗날 이 때를 회상하며 눈물로 지은 시편 51편에서 이런 고백을 남기게 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입니다. <시편 51편 8절, 새번역>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말해 줄 동역자가 설사 있었더라고 하더라도 듣지 않았을 시기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귀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느 날 저녁에 일어난 다윗과 같은 이기적으로 닫힌 귀를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동역자의 조언이나 충고도 결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닫힌 귀는 교만이자 방종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더라도 내가 가장 옳으니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다행히도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게 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이런 나단 선지자 같은 동역자가 반드시 있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단마저 없었다면 다윗의 인생을 정말 사울왕보다 더 악한 길로 갔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함께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나단 선지자가 되어,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이 나단 선지자가 되어 우리의 마음에 들려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내가 지금 영적인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최소한의 하나님과의 소통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기적으로 닫힌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동역자의 말도 들리지 않는 교만과 방종의 시간은 아닐까?’ 이렇게 마음을 다해 내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어느 저녁에 잠이 깬 다윗의 시간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필작어세의 첫 시간, 어느날 저녁에 일어난 다윗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작은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작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과의 최소한의 소통, 들음! 이 두 가지는 신앙을 지탱하는 바탕이자 반드시 몸에 밴 기본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날 저녁에 일어난 다윗이 옥상 위를 방황하듯 인생을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말씀 앞으로, 사랑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결단 찬양 - 채우소서 + 오셔서 다스리소서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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