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춘정(富春亭) : 춘양면 부곡리 부춘강상에 있다. 명종때 참봉 돈암(遯庵) 조수겸(曺守謙)이 건립하여 소요풍영한 곳이었으나 퇴락하였다가 1942년에 후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 정자는 옛날엔 이 강가에 있었는데/우리 조상 은거처는 한 고을에서 으뜸이었네 세속을 떠난 마음 깨끗한 물과 함께 하고/세간의 명예나 이곳은 뜬구름같이 여겼네 흥폐가 가끔 있으니 상전벽해의 변화요/이어갈 겨를이 없이 세월만 흘렀네 해마다 집 이으니 중건한것과 같고/ 부춘정 아름다운 액자 오래 이야기하며 남으리
정자 규모는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중재실이 있다. 현판은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1872~1941)가 해서로 쓴 것과 소옹(素翁)이 예서체로 쓴 것 등 두 개가 걸려 있다.
부춘정사(富春精舍) : 춘양면 부곡리 259번지에 있다. 돈재 문달환(遯齋 文達煥)의 문인들이 건립하여 문달환이 만년에 藏修한 정사이다. 시가 있다.
상지재(尙志齋) : 춘양면 부곡리 산104번지에 있다. 1916년에 尙志齋 文基鎬가 건립하여 후진을 강학한 곳이다.
영락정(永樂亭) : 춘양면 가봉리에 있다. 보성오씨 영락정(永樂亭) 오준상(吳晙庠)의 처서이다. 오준상은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의 문인이다. 그의 아들 송포(松圃) 오동섭(吳東燮)에 의해 건립되었다.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재실형이나 심히 훼손되어 있다.
이로 보아 20ct초엽의 건립되었으며 원운에는 "용산龍山에 영락永樂을 점하여/ 내가 나에 정(亭)을 이름하노라 龍山占永樂 吾以名吾亭 고송(孤松)속 흐른 물에/ 풍금(風琴)을 누워서 듣노라. 流水孤松裏 風琴臥自聽"하고 읊었다. 1900년 초엽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정 (枕漱亭) 우봉리 우봉마을의 옆 산중턱에 있다.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의 문인으로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풍산인 팔우(八愚) 홍경고(洪景古;1645~1699)가 세운 정자다. 이곳은 17세기 말 건립 된 것으로 알려진 정자이다.
그후 정자는 타인의 소유로 넘어갔다가 홍경고 사후 181년이 지난 1879년에 후손들이 재구입하여 1885년에 중건한 것이다. 경내에는 기우만(奇宇萬)의 기문(記文)을 비롯하여 모두 36개에 달하는 많은 현판이 게액되어 있다.
침수정의 후면에는 홍경모를 배향한 오산사(鰲山祠)가 있는데 현재는 이 정자가 오산사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산사에는 침수정시집(枕漱亭詩集)과 오산사지(鰲山祠誌) 등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적은 정자 다시 일어나 속진에서 벗어나니/ 정자가 허물어졌다 또 성조된 것은 몇 번이나 되느뇨 땅은 달라도 이름이 같음은 수석(水石)이 있음이라/ 자손에게 전수하여 집과 몸을 보존하되 뜬 구름 내려오니 강 빛이 가까워지고 / 어지러운때 이지만 들빛은 새롭네 만일 선생의 풍절을 안다면/ 큰 소나무 긴 대처럼 푸르리라 7대손 우흡 재배근술(七世孫 祐洽再拜 謹述)
영귀정(詠歸亭) 칠송리 칠송부락에 있다.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재실이다.정자는 20ct초의 건립일 것으로 보이며 수차례의 개보수를 거쳤다.
광산인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강학소로 사용하였다. 인신재 정의림(鄭義林. 1845년(헌종 11)∼1910년(융희 4)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로, 자는 계방(季方)이고, 호는 일신(日新)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노사 기정진(奇正鎭)에게 유학을 배웠다. 스승인 노사(蘆沙)의 문집 간행에 관여하였으며 스승의 학설을 옹호하는 글을 남겼다.문집으로 《일신재집(日新齋集)》이 전한다. 그래서 고산서원(高山書院)서 배향하고 잇다.
서석산 靈氣를 힘입어 이 亭을 세웠으니/ 소풍하고 돌아오니 志氣가 호연하여라 泗上의 봄바람 불어서 다하지 않으니/ 원컨대 비파소리와 함께 어울렸음은
현학정(玄鶴亭) 용두리 산중턱에 있으며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중재실이 있다. 최근에 중창한 것으로 보이며 정내에 현판은 없다. 처사 정근(處士 鄭謹)이 지은 정자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 학 거친 티끌 싫어서/ 그윽한 안개속에 붙혀 있으니 숙기는 새롭네 여정으로 돌을 세우니 쌓여진 바위 상이요/ 천년을 전할 명성 있는 정자에 주인이 있구려
이곳에서는 정근에 대한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병자호란시 진주정씨가 과거에 급제하여 장원을 했음에도 불고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는데 인조대왕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그 소식을 듣고 의분을 못이겨 베틀바위 정상에 정자를 짓고 홀로 기거하며 처사생활을 하던중 용암산 아래서 그만 호식을 당하고 말았다. 그뒤로 마을에서 용암산에 산신제를 지내기로 하였는데 여러 마을에서 호응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삿날만 되면 검은학들이 하늘을 가릴만큼 많이 찾아와 이 정자에서 울어대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정처사가 죽어 학이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운수당(雲樹堂) : 춘양면 산간리에 있다. 전주이씨 蓮汀 李相후와 그의 종제 진사 相檜의 강학소이다. 춘탄정(春灘亭) : 춘양면 용두리에 있었다. 광산이씨 춘탄 이지영(春灘 李之榮)이 건립하였다. 원운이 있다.
송암정(松菴亭) 대신리 마을에서 떨어진 앞 산자락에 있다. 단층의 팔작지붕 평기와 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재실이 있는데 현재는 이를 마루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이 정자의 주인 하동인 송암 정홀(1607~1679)은 조선 중기 문신.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으며 절개와 충절이 높은 선비로 평가되는 동계 정온(鄭蘊. 1569~1641)의 문인으로으로서 병자호란이 일어나 조선시대 중기의 의병장, 문신, 성리학자였던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보성출신 우산 안방준(安邦俊)을 따라 창의하여 종질 6명과 함께 여산으로 진격하다가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통곡하면서 낙향, 1638년(인조 16)에 이 정자를 세우고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1906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정내에는 9개의 현판이 있다.
적은 간수가에 齋를 얽었으니/ 戊寅때 겨울 달이로다 일만 나무는 모두다 떨어졌는데/ 푸를 솔만 홀로 울연하여라
해망정 海望亭(書院) 대신리 1구에 있으며 해망정은 하동인 돈재(遯齋) 정여해(鄭汝諧)가 무오사화(1498, 연산군때)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김일손(金馹孫 1464~1498) 등이 화를 당함을 보고 이곳에 은거하고 정자를 지었다 함으로 1500년 초의 어느 무렵에 세워졌다고 보이며 단을 만들어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을 향배하였다.
후일 한동안 해망단은 돌보는 사람없이 황폐화되었는데, 1871년(고종 8) 해당지역 유림들이 그의 뜻을 계승하기 위하여 해망단의 제향을 복구하였다. 이때 정여해의 위패도 함께 해망단에 모시고 제향하게 되었다. 해망단은 1934년 현재의 규모로 증축되었고, 1979년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되면서 이름을 해망서원이라 바꾸었다.
서원건물(구인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건물로 겹치며 팔작지붕이며 우물천정을 하였고 우측으로부터 방, 대청, 2칸방의 순으로 되어 있다.
강당(열락당)은 정면 4칸 측면 l칸반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우측으로부터 방,대청2칸, 방의 순으로 되어있다. 숭의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l989년 단청과 강당 및 숭의사 번와를 하였고 l993년,1996년 서원을 보수하였다.
담락정사(湛樂精舍.담락정) : 춘양면 가동리에 있다. 청도김씨 김보승(金寶昇), 김구정(金九鼎), 김우정(金禹鼎) 등 종형제의 강학소로 지금은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금난정(金蘭亭) : 춘양면 우봉리에 있다.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재실 건물이다. 청계 기용호(聽溪 奇龍鎬) 등 12인이 금난계를 조직하여 교우하다가 시회를 즐길 정자를 건립하자는데 합의하여 경비를 마련하여 지었다. 계의 조직은 1917년에, 정자은 1967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仙庄 名區를 어느곳에 찾을까/ 竹樹 남쪽에 대야의 머리로다 맑은 냄새 유유하여 만고에 향기롭고/ 끊은 소리 활활하여 천추를 울리구나 烟霞는 때때로 엉켰다 흩어지니/ 어느덧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가누나 산하의 풍광은 모두가 절경이니/ 석양에 찾아온 손님 속절없이 머물렀구려
모의정(慕義亭) : 춘양면 가봉리 가승동(佳勝洞)마을에 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때 경주김씨 김인기(金仁基)를 비롯 김종룡(金鍾龍), 김종천( 金鍾天), 김종문(金鍾文), 홍기주(洪璣周), 윤학모(尹學模) 등 2백여명이 창의(倡義)할 것을 다짐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1867년(고종 4)에 호미등에 건립하였다가 가봉리 도로변으로 이건하였으나 퇴락하였다. 근자 1998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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