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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末 애국열사의 표상 梅泉 黃玹 (1855∼1910) “나라 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 글·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 격동의 조선 말기를 살다 간 역사가이자 시인인 매천은 망국의 소식을 듣고 세 덩어리의 아편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아편을 먹기 전 세차례 망설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죽었다. 부패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주변국들이 야수가 되어 잡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그 나라를 걱정하다 결국 자신이 책임질 것도 없는 亡國의 비보를 듣고 그렇게 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애국과 憂國, 殉國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그가 남긴 저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등에서 그는 잠시도 나라 사랑과 나라 걱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히 애국열사의 표상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황현 선생은 한말의 순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고,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김택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 난리를 겪어 허옇게 센 머리 (亂離滾到白頭年) 죽고자 했어도 죽지 못했던 것이 몇 번이던가 (幾合捐生却未然)
오늘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今日眞成無可奈)
바람 앞의 촛불이 하늘을 비추누나 (輝輝風燭照蒼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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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도 슬퍼 울고 강산도 시름한다 (鳥獸哀鳴海嶽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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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먼 옛일 생각하니 (秋燈掩卷懷千古)
세상에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가 이처럼 어렵구나 (難作人間識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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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9월7일 새벽.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8월29일)의 비보를 들은 지도 1주일이 지났다. 아편 세 덩어리를 앞에 두고 지긋이 눈을 감고 깊은 시름에 빠진 매천(梅泉) 황현(黃玹). 이미 시인으로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절명시(絶命詩) 4수(首)를 써놓은 상태다. 저승을 코앞에 둔 그의 생각은 시구(詩句) 그대로 천고(千古)를 돌아볼 만큼 깊기만 하다.
“이 아편 덩어리들을 삼키기만 하면 이제 저세상이다. 나라 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
그런데 진정 이것을 삼켜야 하는 것일까. 죽을 수 있을까.”
망국(亡國)의 한을 달랠 길 없어 죽기를 각오하고 생을 끝내는 마지막 시까지 써 놓았건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손은 쉽게 아편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아편을 손에 들고 입에 대었다 떼었다 하기를 몇차례. 그러다 결국 소주와 함께 그것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다니….’ 선비로서, 사대부로서 매천은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매천은 죽음에 이르렀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증세가 점점 더 심해졌다. 지난 1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으로 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몸은 허해질대로 허해져 아편 기운은 금세 몸을 휘감고 돌았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절했다 깼다를 반복한 것도 여러 번. 그는 하루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보내다 결국 다음날 아침 한많은 세상을 등졌다. 그의 나이 쉰다섯.
역사가로서, 시인으로서 한창 완숙미를 뽐낼 때였다. 죽기 직전 가족들은 통곡하며 그를 살리려 애썼지만 매천은 살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했던 자신이 초라해질 뿐이었다. 마지막 죽어가는 자리에서 그는 동생 황원(黃瑗)에게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아우야, 내가 아편을 입에 댔다 떼었다를 세차례나 했다. 선비로서 도리를 지키지 못했구나.”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 나라를 잃은 선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가 남긴 4수의 절명시(絶命詩)에는 슬픔, 고통, 절망, 수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대궐이 침침하고 어둡다” (九闕沈沈晝漏遲)고도 했고 “해맑은 종이에 천가닥 눈물이 난다” (琳琅一紙淚千絲琳)고도 했다.
“나라 위한 벼슬아치가 아니니 (曾無支廈半椽功)
이 죽음은 도리일 뿐 충일 수 없다” (只是成仁不是忠)는 시구도 있다.
녹(祿)을 먹는 자가 그렇게 많아도 자기 배 불리고 자기 일가(一家) 편하기만 원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썩은 나라라는 사실이 절망감을 부추기지만 한편으로 나라가 망한 날 죽은 자 있으니 아직 그 나라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절명시에 들어 있는 그의 심정은 그가 개인적으로 가족에게 남긴 유서 ‘유자제서’(遺子弟書)를 봐도 알 수 있다.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義理)가 없다. 그러나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백년이 됐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이가 없구나. 나는 다만 그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내가 위로는 하늘이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 속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았다.
이제 길이 잠들려 하니 참으로 속이 시원하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
'國家養士五百年'의 恩典에 보답하고, '難作人間識字人'의 사명을 자임한 心吐이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비분.강개함을 절감케 한다.
격동의 조선 말기를 살다 간 역사가이자 시인인 매천은 이렇게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부패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주변국들이 야수가 되어 잡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그 나라를 걱정하다 결국 자신이 책임질 것도 없는 망국(亡國)의 비보를 듣고 그렇게 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애국’과 ‘우국’(憂國), ‘순국’(殉國)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이들 수식어가 전혀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순종 4) 경술국치일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역사를 그린 “매천야록”(梅泉野錄), 19세기 동학혁명을 집중적으로 쓰고 있는 “오하기문”(梧下記聞), 한시(漢詩)를 중심으로 한 그의 유고집 “매천집”(梅泉集)이 그가 남긴 대표작들. 이 글들 안에는 나라사랑, 나라 걱정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최고 통치자인 고종과 그의 비(妃)인 민씨, 또 세도가로 악명이 자자했던 그의 친인척, 나라의 녹을 먹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고관대작들, 나라가 어지럽다며 남을 해하는 도적떼의 우두머리들…. 누구 하나 성한 사람이 없었다.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즉 세상은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모든 역사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당시 시대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매천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지 모른다. 그만큼 그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1855년 생이니 그는 아편전쟁이 발발한 지 13년, 일본이 미국에 의해 쇄국의 빗장을 연 지 2년 후 태어났다.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큰 것만 꼽아 봐도 그의 시대가 어느 정도 격변기였는지를 알게 된다.
◇ 전남 구례 매천사(梅泉祠)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땅이 이젠 물속에 가라앉았도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겨보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가 어렵기만 하구나.”
구한말의 한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 선생이 남긴 절명시의 한 대목이다. 매천은 1910년 일본이 이 나라를 강제합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못이겨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 매천이 마지막 삶을 산 곳이다. 지역 유림들은 그의 뜻을 기려 이곳에 1955년 사당인 매천사를 지었다. 이곳엔 그가 1864~1910년 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매천야록>과 사용하던 유품·고서들이 보관된 유물전시관과 기념비가 들어서 있고, 한켠엔 생을 마감한 세칸짜리 건물이 조촐한 모습으로 이 땅의 봄을 다시 맞고 있다. 사당의 문은 잠겨 있으나 매천의 증손자 며느리 이유례(60)씨가 혼자 사는, 왼쪽 골목 오른쪽 첫집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061-782-5580). 구례읍에서 남원으로 가다 천은사쪽으로 우회전해 들어가면 왼쪽에 월곡마을이 있다.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문화재자료 37호 매천사(梅泉祠).
특히 이건창과의 교우는 ‘신교’(神交)로 알려질 만큼 애절한 것이었다. 영재는 매천의 글을 가리켜 “붓끝의 기백은 반고(班固·後漢의 역사가)가 눈에 차지 않는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은 1883년(고종 20), 그의 나이 29세 때 일이었다. 정기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 초시(初試)에 응시해 차석을 차지한 것이 첫 시험 성적표다.
“당시에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의 우환이 날로 커지고 있었으며 정사(政事) 또한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자네들은 어찌 나로 하여금 귀신 나라의 미친 무리들 속에 끼어 미친 귀신 짓을 하게 하고 싶어 하는가’ 매천은 이들의 무능과 부패를 망국의 첫번째 요인으로 보고 있다. 무당이나 점술가 등을 요직에 배치했다는 사실은 매천이 조선을 ‘귀신나라’라고 부른 가장 중요한 이유다. “매천야록”은 무당 진령군(眞靈君)의 중용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특히 각 대신들을 임명하고 1주일도 채 안돼 자리를 바꾸게 하는 등의 졸속행정으로 “부하직원들이 공문서를 들고 갈 곳을 모르더라”는 탄식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명성황후, 상궁 장씨 아들 낳자 “칼 받아라”
명성황후에 대한 글 역시 여러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악독한 성품인지…. 매천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정말 ‘귀신 나라’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매천야록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오하기문”에서 그는 ‘대개 성이 민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다. 전국의 큰 고을이라면 대부분 민씨들이 수령 자리를 꿰찼고 평양감사와 통제사는 민씨가 아니면 할 수 없게 된 지가 이미 10년이나 됐다’고 쓰고 있다. 나라를 잡아먹는 귀신은 다름아닌 민씨 일가임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그의 글 곳곳에서 민씨 가문에 대한 혐오증이 드러난다.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개화파나 동학혁명에 대해서도 매천의 평가는 결코 좋지 않았다.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매천이 외면당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일부 역사가들로부터 메이지 유신에 비교되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갑신정변에 대해 매천은 거의 ‘최악’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 중심 세력인 개화당을 가리켜 ‘도적’이나 ‘역당’(逆黨)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살육과 횡포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동시에 ‘음모’의 실패를 ‘하늘의 뜻’으로 말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매천의 마음은 각별하다. 특별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순국의 전후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우리 후대인들은 그의 사실적 묘사로 인해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선열들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어나 화장실로 가 이완식을 부르며 ‘내가 설사를 하였으니 끓인 물을 조금 갖다 주게, 내 손을 조금 씻어야겠네’라고 하자… 그는 손을 씻은 후 통증을 느끼는 듯한 말로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죽지 않고 이럴까’라고 했다. 이완식은 크게 놀라며 화급히 그를 끌어안고 문을 부수듯 방으로 들어갔다. 선혈은 이미 그의 다리까지 묻어 있었다. 이완식은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고 온 가족들도 그를 따라 울었다. 그 곡성(哭聲)은 서로 전달되어 삽시간에 성안으로 퍼져 산이 꺼질 듯이 요란했다.”(매천야록) 그가 많은 양을 할애한 순국지사 김봉학(金奉學)은 평양에서 징집된 일개 병졸에 불과했다.
“어찌 왜놈을 때려죽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는 그의 말에 여러 장병들이 웃고 말자 그는 영문(營門)으로 달려가 입에 칼을 물고 한번 높이 뛰어 내려 엎어졌고 그 칼은 등을 관통했다”고 썼다.
그러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만큼 그의 마음을 비탄에 빠지게 만든 순국지사는 없었다. 면암은 잘 알려진대로 개항기 흥선대원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유림(儒林). 1868년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한 후 삭탈관직당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다시 기용된 후에도 끊임없이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해 제주도 귀양살이까지 한, 한말 쇄국을 주장했던 대표적 선비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 체포되어 쓰시마(對馬)섬으로 유배되어 단식 끝에 죽었다.
이항로께 배움받은 꽃다운 나이로 (英年抱贄華溪門) 애타는 백성 구하고자 상소를 올리셨지 (救火人家位偶尊) … 선비거나 재상이거나 이제는 모두 끝이구려 (宰相儒林都結局) 천년 만년 길이 길이 공론만 남았소 (海東千載有公言) … 속 썩은 귀양살이 이역이라 만 리밖 (腐心萬里南冠) 빨간 신 신고 오신다기에 삼년을 손꼽으며 기다렸는데 (屈指三霜赤還) 소식조차 뜸했던 그 사이 바다 건너서 (海外光陰來雁少) 하늘 끝 큰 별 떨어졌다는 기별이니 (天涯消息落星寒) 초혼한다 하여 높은 곳 올라 바라볼 생각 마소 (招魂且莫登高望) 푸르른 대마도 보기조차 싫지 않소 (厭見靑蒼馬島山) …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故國有山虛影碧) 가련타 어디에 님의 뼈를 묻사오리 (可憐埋骨向何方)
▲면암 최익현 선생을 기려 지은 모덕사 전경.
◇ 충남 청양 모덕사 모덕사는 1906년 무장항일의병투쟁을 이끌다 전북 순창에서 잡혀 대마도로 유배된 뒤 단식 끝에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동래포구에서 대마도로 떠날 때 “왜놈 땅을 밟지 않겠다”며 버선에 흙을 담아 신고 간 면암은 유배지에서도 “목말라 죽을지언정 도적의 것은 물 한방울도 마시지 않겠다”며 식음을 전폐하다 끝내 주검이 되어 돌아와 만백성을 통곡케 했다.
면암은 대원군 실정 직격 비판, 강화도조약 반대 상소를 비롯해, 을사조약 매국노 처단 등을 거침없이 주장하다 제주·흑산도 등으로 잇따라 유배되기도 한 두려움을 모르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1914년 면암이 살던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모덕사를 짓고 영정을 모셨다. 5천여평의 터에 모덕사와 면암이 기거하던 중화당, 선대 위패를 모신 영모재, 유물전시관, 4천여점의 서책 등을 보관한 춘추각 등 7동의 건물이 있다. 앞쪽에 우목저수지가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울창한 숲과 장승이 많은 곳으로 이름난 칠갑산의 대치고개에는 1973년 세워진 4m 높이의 면암 동상이 서 있다. 묘소는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남쪽 야산에 있다. 4월13일엔 봄철 추모제향이 열린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나라의 존망을 우려한 시, 나라의 영원을 기원한 시, 지배계급을 조롱한 시가 많지만 어디서고 그의 지조와 절개를 느낄 수 있다.
매천이 남긴 저작물들
“매천야록”은 1950년대, “매천집”은 1980년대 전모 드러나
매천이 남긴 저작은 “매천야록” “오하기문” “매천집’ 등 3종. 동학혁명만 집중적으로 다룬 것으로 추정되는 “동비기략”(東匪紀略)은 원전이 전하지 않는다. 매천의 저작은 종류로 보나 양으로 보나 결코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학 또는 한시학적으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저작들로 취급받는다. 구한말의 시대상이나 한시의 발전을 말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서적이 됐다.
매천야록은 1864년(고종 원년)부터 1910년(순종 4)까지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 말기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의 상황들을 사실을 토대로 솔직하고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유려한 문체와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눈과 비판정신 등 황현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높은 학문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걸작이다. 세도정권의 부패, 청·일 양국의 각축, 의병운동,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한 구한말 조선의 위태롭고도 불안한 격동기의 역사적 상황이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고자 한 역사가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서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는 동안 자손들이 원본을 숨겨 놓았다가 해방이 된 후 국사편찬위원회에 넘김으로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55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가 사료 총서 제1집으로 펴낸 것을 보더라도 이 야록이 지닌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매천의 책은 한말 비사(秘史)에 반일(反日)정신이 농축되어 있어 출간과 번역에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매천야록”. 이 책은 누가 봐도 비사(秘史)나 야사(野史)의 성격이 짙다. 관보를 비롯해 각종 신문을 참고한 것은 물론 본인이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 풍문으로 떠돌던 것, 요직에 있던 인물로부터 들은 것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고종과 민비의 첫 아들 세자가 고자(鼓子)였다거나, 명성황후가 직접 나서 궁비(宮婢)에게 잠자리를 갖게 했으나 실패했다거나, 궁녀 장씨가 고종의 아들을 낳자 민비가 칼을 들고 쫓아갔다는 등의 얘기는 “매천야록”이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얘기들이다.
따라서 매천은 자손들에게 “이 책을 절대 외부인에게 보여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자손들은 상당 기간 이 책을 비밀에 부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후손들이 원본의 훼손이나 분실을 우려해 다수의 복본(複本)을 만들고 이를 생전에 매천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던 김택영에게 교정을 부탁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김택영은 상하이(上海)에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이 책을 운반하는 것도 꽤 조심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 후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책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인정, ‘한국사료총서’ 제1집으로 간행해 비로소 일반인에게도 접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된 것은 비교적 최근으로 1994년 교문사에서 한학자 김준의 번역으로 완역본이 발간됐다. “오하기문” 역시 94년 역사비평사에 의해 처음 완역(김종익 옮김)됐다.
“매천집”의 발간도 적지않은 고충이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천집”은 매천 황현의 시와 글을 엮은 문집으로 황현이 순절한 이듬해인 1911년에 나라가 어지러움을 보고 중국 상해로 망명한 황현의 친구 김택영이 상해에서 직접 발췌하여 엮은 것이다. 제1권에서 제5권까지는 지은 연도별로 839수의 시를 수록하고, 제6권에는 그의 사상이 담긴 여러 글을, 제7권에는 상소문과 제문 등을 수록하였다. 매천이 순절할 당시 매천은 동생 황원에게 “김택영은 시문의 정리를 맡아준다 해도 너무 멀어 갈 수가 없을 것 같구나”라면서 김택영이 정돈해 주기를 원했고 “시는 연대에 따라, 문은 주제에 따라 나누어 글에 능한 사람에게 부탁해 정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김택영은 상하이(上海)에서 매천의 글을 정리해 1911년과 1913년 초간본으로 간행했고 박형득(朴炯得)은 이를 기본으로 시문을 선별 편집해 “매천시집”을 발간했다. 이들 문집은 매천이 순국한 후 동생과 문인들이 통문(通文)을 돌려 2백70여명으로부터 출연받아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이들 문집에 적지 않은 작품들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건방(李建芳)과 황원이 “매천집”에서 빠진 글을 다시 정리한 시집이 발견된 것이다. 일명 총독부 검열본으로 이름붙여진 이 시집은 총독부의 검열 표시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일제 치하 문학 작품에 대한 검열 연구에도 일조하고 있다.
검열본에는 시문의 상당 부문에 ‘치안방해’‘일부분 삭제’‘삭제한 곳을 공란으로 두지 말 것’‘삭제한 내용의 요지를 기록하지 말 것’등의 표시가 곳곳에 묻어 있다. 매천은 죽어서도 일본의 압제를 밝히고 있는 셈이다.
“매천집”은 아직 완역되지 않았다지만 후학들의 연구서를 통해 그의 시향(詩香)을 느낄 수 있다. 이병주의 “한국 한시의 이해”(민음사, 1987), 민족문학연구소의 “한국고전문학 작가론”(소명, 1998)이 대표작. 간단하게나마 그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글은 정옥자 등이 쓴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효형, 1998)와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가 쓴 “실사구시의 눈으로 시대를 밝힌다”(강, 1999) 등을 보면 좋다.
매천야록 梅泉野錄
매천야록'은 1865년부터 1910년 8월 까지 45년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매천이 주관적 안목으로 정리하여 편년체로 구성한 책으로 모두 황현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나, 끝 부분인 10년 8월 29일부터 9월 10일 순절(殉節)할 때까지는 문인 고용주(高墉柱)가 추기(追記)한 것이다.
나라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매천야록은 황현(黃玹)이 고종 원년(1864)부터 융희 4년(1910)까지 47년간의 한말 역사를 적은 책이다. 책은 모두 6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갑오 이전 1책 반은 수문수록(隨聞隨錄)하여 명확한 연대는 표시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 나머지는 정확한 연대를 표시한 편년체의 사찬비사(私撰秘史)이다.
책은 사회 전반적인 부문을 기록의 대상으로 삼았고,또한 자신의 시각에서 평가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하였다. 한동안 극비에 부쳐져 있다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자료총서 1'로 간행됨으로 그 빛을 보게 되었다. 그 후에 매천야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필독 고전교양서로 읽혔고,황현이 '이달의 문화인물'(1999년 8월)로 선정됨으로 더 많은 관심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책은 번역사업 대상이 되고 대학강좌(2002년)까지도 개설되어 있다.
매천야록은 개인이 기록한 사찬서이기 때문에 사료수집에 한계가 있었던 반면,기사선택과 자신의 평가에 자유로움이 보인다. 황현은 서울에 유학하면서 강위(姜瑋)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擇榮) 등과 교류하였고,1888년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장원급제한 후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그 후에 구례에 기거, 사료수집에 상당한 애로점이 있었다. 따라서 전해들은 것을 통해 자신의 사전지식과 평가를 가미하여 기록하였고,이 결과 연대가 바뀌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사료수집의 환경은 기록의 대상이 다양하고 넓었으며,사안에 대한 비판의 자유로운 점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다른 역사서에서 잘 보이지 않는 개인 친인척 스승 교우관계 등과 같은 인물평가에서 과감하게 긍정적,부정적인 면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가 실무관료출신이 아닌 점은 안동김씨 세도정치,민씨정권,대원군세력,개화파,위정척사세력,동학 등의 정치적 현실인식에서 좀 더 대국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과 칭찬을 아끼지 않게 하였다. 이 점은 이 책이 쉽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게 하였고,나아가 양서로 평가되는 부문이다.
한편으로 사회,경제 등 일상생활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천주교,과거제도,개가(改嫁),서자,교육문제를 비롯하여 석유,장탕반(漿湯飯)과 같은 음식,전보,약령시,의복,풍속 등 사회문제와 화폐,조세문제 등 경제관련부문과 같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당면문제를 기록하여 생생한 생활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전 과정을 기록하면서 그의 심경과 울분,일제에 대항하는 의병에 대한 활동과 기대,나아가 국운의 쇠함에 대한 원인과 지식인의 고뇌 등을 표출함으로 그가 얼마나 훌륭한 한말 애국열사였던가를 알 수 있다. '나라 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라는 글과 죽음을 앞두고 쓴 절명시(絶命詩),그리고 1910년에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로 이어지는 그의 단호한 행동은 애국충절의 표상이었다.
망국으로 치닫는 격동기에 한 인간이 사회를 비판하고 고뇌하였던 것을 사관(史官)이 사초(史草)를 기록하던 것보다 더 어려웠던 조건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책으로 남겼던 것은 우리 후손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 최진식, 부산정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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