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는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202 14.05.26 23: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는 이야기>

경복궁 흥례문(2012.12.01)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는 이야기>


정여립 모반사건→건저의 사건→정철 처단문제→남인/북인으로 분당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확실히 갈라지는 사건의 경위는 
저 유명한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이 시발점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서인의 거두 송강 정철이 있었다. 

정여립 모반사건이란,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었던, 
서인에서 동인이 된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상소가 올라와 
동인(특히 호남출신)의 선비들이 천여 명(1300 여명)이나 참살 또는 
귀양을 갔던, 조선시대 몇 안되는 비극적인 미스테리 사건을 말한다.  

정철 등 서인은 기축옥사를 확대 수사하면서 
이발의 가솔(家率)들을 모두 잡아들인다.
이발의 80 노모(老母), 이발의 아들인 10살 만귀, 3살, 5살 아이들, 
서(사위), 노복, 기타 가솔 10여 명이 잡혀오는데 
[정철 : 연일정씨, 이발 : 광산이씨]
 
1590년 5월 14일(선조 23년)
선조가 임석한 추국청 형틀에 묶여 압슬형(壓膝刑)이 가해졌고 
5살과 3살 아이들은 자루에 담아 메쳐 죽였다. 
그 참상(慘狀)을 본 윤 씨(尹氏) 부인이 발끈하여 크게 꾸짖기를 
형벌의 남용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호통하고 
내 자식이 어찌 이런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자 
10살인 이발의 아들 만귀(萬貴)가 
부친의 평소 가르침은 
입즉(入卽 들어 와서는 곧) 부모에게 효도하고 
출즉(出卽 나가서는 곧) 군국(君國)에 충성하라 하셨지 
역적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어찌 이 아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이냐 하면서 
장살(杖殺)을 명하여 
윤 씨 부인과 만귀, 두 사위, 노복 등 10여 명이 
모두 압슬사(壓膝死) 내지 장살되었으나 
노복까지 어느 누구도 구차하지 않고 조용히 불복한 채 죽어갔다.
(광산이씨 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이산해와 동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고 복수 할 기회를 노리게 된다.

정철을 이용해 동인의 힘을 눌렀던 선조. 
그러나 선조는 기축옥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철을 파직 한다….』 

당시 정철이 파직 당했던 이유는
건저문제(建儲問題-세자책봉)를 제기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건저 문제(建儲 問題)는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며, 건저의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건저 문제, 건저 사건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건저의(建儲議)는 “왕세자를 세움에 따른 의론”을 뜻한다.)

당시 세자로는 공빈 김 씨의 둘째아들인 광해군이 가장 유력하였는데, 
문제는 선조가 광해군을 시기질투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제14대 선조] (하성군) 1552-1608, 
 ▶ 재위기간 : 1567.7 - 1608.2 (40년 7개월) 
   * 중종 - 덕흥군(덕흥대원군) - 하성군(선조)
 
 ▶ 비(妃) : 11명 - 자녀 : 14남 11녀 
   - 의인왕후 박씨(자식없음) 
   - 인목왕후 김씨(김계남의 딸) : 영창대군, 정명공주 
   - 공빈 김씨 : 임해군, 광해군[제15대 광해군] 
   - 인빈 김씨 :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원종, 인조의 아버지), 의창군,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 
   - 순빈 김씨 : 순화군 
   - 정빈 민씨 : 인성군, 인흥군,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 
   - 정빈 홍씨 : 경창군, 정정옹주 
   - 온빈 한씨 : 흥안군, 경평군, 영성군, 정화옹주 
   - 귀인 정씨, 숙의 정씨, 소원 윤씨  
   
   * 정원군(원종으로 추존, 인조의 아버지)
     -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 능양군 종[제16대 인조], 
                                      능원군 보, 능창군 전
     - 후궁 김씨 : 능풍군 명(사망)

때문에 선조는
늙은 나이에 얻은 인빈 김 씨의 자식들 중에서 세자를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의사를 영의정인 이산해에게 물어보려 하였는데, 
선조의 의중을 꿰뚫어본 이산해는 
 ‘와병’을 이유로 궁궐에 나가지 않고 말았다. 
(이는 정철을 겨냥한 동인과 이산해의 고의지계 이었다) 

당시 영의정은 동인인 이산해, 좌의정은 서인인 정철, 
우의정은  동인인 유성룡이 맡고 있었는데, 
이산해가 와병을 이유로 입궐하지 않아 
선조는 다음 순번인 좌의정 정철에게 의중을 물어보게 되었다. 
본시 동인과 서인이 광해군을 추천하기로 합의한 사실이 있었던 지라, 
정철은 선조의 의중이 
신성군(인빈 김 씨의 둘째아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광해군을 추천하였다. 정철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격노하고 말았다. 
때를 같이 하여 ‘정철이 주색(酒色)에 빠져 국사를 그르치고 있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 또한 빗발쳤다. 
결국 정철은 파직된 뒤 
명천, 진주, 강계 등지를 떠돌며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후 유성룡은 좌의정으로 영전되었고 
선조는 서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다시 동인을 중용하였다.  

그 후 조정에는 정철에 대한 처단 문제가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동인 내부에서도 의견이 팽팽히 갈리었다. 
이산해 등은 정철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고, 
우성전, 유성룡 등은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느냐는 온건론을 폈다. 
요컨대, 정철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로 
동인은 결국 분열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이산해가 낙북(洛北)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강경파는 북인(北人),
 
우성전은 남산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온건파는 남인(南人)이라고 하였다. 

남북 분당은 또한 학통의 분기이기도 했는데, 
북인은 
이산해, 정인홍 등 주로 남명 조식의 문인이 주축을 이뤘고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 이덕형, 김성일 등 퇴계 이황의 문인이 주축을 이뤘다. 

이것이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기(1591년)된 경위인 것이다. 

그리고 일 년 뒤 1592.4.13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노래 : 박수정/나야 나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