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과 호드기
德田 이응철(수필가)
형님의 증언을 듣고 심히 사무쳤다.
기제사인 섣달 스무날, 생전의 어머님을 얘기하시다가 호드기 얘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제사 때면 나는 어머니만 떠오르자 아버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한 살 때 돌아가셨으니 이때까지 살면서 쓰지 못한 새 카드는 아버지였다. 내 생애 편모 슬하에서 칠순을 거침없이 항해한 것이 모두 홀어머님의 치마폭 사랑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강 건너 우두에서 지금 삼악산 케이블카가 있는 삼천동 마삼내麻森란 동네로 시집을 오셨다. 우두 상리 성황당이 있던 소양초등학교 부근 가라매기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어머님의 새댁 시절에 아리고 쓰린 인생사가 숨어있음을 이번에 처음 형님께 들었다.
삼천동 마삼내로 시집 와 동네에서는 우두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할아버지 이선영先榮은 족보조차 없었다. 서울 동대 구파발이었다. 경주 李씨 집성촌에 사시다가 어떤 연유인지 당시 춘천으로 낙향하신 조부님은 아들과 삼천동 마삼내에서 어린 며느리를 맞이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항렬이 높았다고 하신다. 시집와서 서울로 기제사를 보러 가 보면 머리 땋은 젊은이들이 허리 굽혀 젊은 새댁인 어머님께 정중히 예를 표하셨다고 전설처럼 회상하셔 항렬이 높은 종갓집 어른이셨음을 강조하셨다.
삼천동에서 어머니 신혼은 어땠을까? 홀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하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낙향했으니 재산도 없이 초가삼간에서 살림을 꾸려 우두벌에서 어머님를 만났으니 운명적인 만남이 틀림없다. 외가는 정선 전全씨 집안으로 딸만 다섯 중에 넷째로 제법 밥술이나 먹는 집안에서 사셨던 어머니셨다.
십여 년 전, 온 가족이 지금 삼천동으로 벌초를 갔을 때였다. 구순이 넘은 풍채 좋은 토박이 부잣집 최 노인이 길가에 앉아 계셔 난 호기심에 예를 표하고, 마치 기자회견처럼 설레며 물어보았다.
ㅡ음, 그분! 우두 댁이었지, 살림을 잘하고 항상 바느질 품삯으로 근근이 살아가셨지, 부지런 하셨지, 봄이면 어찌나 호드기를 잘 불으셨는지-. 칭송하시며 젊은이는 누구냐고 반문하셨다. 춘천고에 근무할 때라 그 후손이라고 하니 아래위로 눈길을 주시며 대견해 하신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머님은 봄이면 호드기를 구성지게 잘 부셨다고 형은 전한다. 표준어는 호드기 또는 버들피리지만 고향에서는 호들기로 불렀다. 12살에 시집 오셨으니 오죽 친정에 가고 싶으셨을까! 강 건너 우두 친정에 가고 싶은데 못 가고, 홀 시아버님 때 끓일 걱정으로 항상 마음 조이실 때면 호들기를 만들어 부셨으리라. 등잔불 심지가 모두 타 검뎅이로 가물거리면 바늘로 긁어 달래시며, 삯바느질하다가도 어린 것 잠재우시고 샘밭까지 가는 소금 배를 바라보시며 여울물에 한恨을 띄우며 호들기를 불곤 하셨으리라.
구슬픈 호들기 소리가 작은 동네에 퍼져 우두댁의 한 恨은 좁은 동네에 퍼져 마차꾼들이 지나가다가 구슬픈 호드기소리를 듣고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금비가 없던 시절, 이른 봄이면 인분을 보리밭에 퍼 날랐다는 얘기는 더욱 가슴을 방망이질 한다. 부잣집들은 머슴들이 똥장군을 우마에 싣고 가지만, 가난한 엄니는 동이를 이고 지금 체육고등학교 고동패기 보리밭에 뿌렸다고 전한다. 가다가 강바람에 오물을 뒤집어쓰며 악착같이 사셨던 내 어머님의 12살 어린 여인의 모습이 가슴을 친다. 그 때도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고루 비틀어 뽑은 껍질을 잘라 피리를 만든다. 칼로 입에 맞게 마우스피스처럼 만들어 부셨으리라.
아! 총각선생 시절 엄니를 수년간 모시고 다녔어도 진정 가난의 아픔을 왜 내게 입을 봉하고 사셨을까? 흉이라도 볼까봐 그러셨을까? 어머님 생전 때 모처럼 어렵게 중고차를 장만해 생전에 어머님과 두 형님을 태우고 삼천동을 지날 때였다. 서행하며 어머님의 새댁 시절을 큰형께서 꺼내려 하시자, 어머님은 막무가내로 내 등을 떠밀던 게 지금이해가 간다. 악몽 같았던 그 시절을 자식들에게 전하고 싶지 않으셨으리라!
지금도 우뚝 선 호텔 곁에 당시 초가삼간이 아! 어머님이 새댁 때 거하시던 집이었단다. 요즘은 개발로 자취를 감추었지만 어머니의 체취가 서린 그곳을 자주 찾아보리라. 가라매기에서 삼천동 마삼내로 시집오셔 갖은 고생을 하시며 집안을 일구며 가난속에서도 자식을 키운 내어머님의 새댁시절, 스트레스를 날리던 유일한 것이 호드기였다니 내겐 철없이 느낀 또 다른 낭만에 젖게 한다. 군자는 음악을 즐긴다고 했다. 고생하시며 살던 얘기를 단한번 하지않으시던 당신이시여! 자정 무렵 가슴 뭉클 돌아온 날은 어머님의 영혼을 다시 만난 기제사 날이었다.(끝)
첫댓글 호드기가 무언가 궁금하여 읽어 보았더니 어머니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 집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시집오셔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시면서 자식들을 키워 내셨는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자식들에게 고생하셨던 이야기를 푸념 삼아 하실 만도 한데 끝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대단하신 어른입니다.
네 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히셨으면 그 가난에 쫒기어 가시며 구남매를 키워 제가 막내로 앤드마크를
ㅎㅎㅎ대단하신 어머님이시지요. 제어머님이셔도 ㅎ 허리시술이 완쾌되어 너무 감사드려요 조만간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