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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廣城堡
사적 제 227호이며,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위치한 광성보(廣城堡)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호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흘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시절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 안해루(按海樓) '라고 이름지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광성보(廣城堡)는 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곳은 자연 지형이 천연의 要塞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고려때부터 중요한 요새(要塞) 구실을 하였다.
광해군 시절 1618년에 강화 外城을 수축하였고,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강화 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는데,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 화도(花島), 광성(廣城) 등의 세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 정포대를 관할하였다.1745년 (영조 21)에 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는데, 신미양요 때 戰禍를 입어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안해루 按海樓
1745년 (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바다를 제압한다는의미의 안해루(按海樓)라 이름 지었다. 이곳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안해루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그후 1976년 다시 복원하였다.
이 곳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공방전이 있었고,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 함대를 광성, 초지(草芝), 덕진(德鎭), 덕포(德浦) 포대에서 물리쳤으나, 4월23일 450명의 미국 해병대가 草芝鎭을 점령하였고, 다음날 미국은 덕진진을 함락하고 이어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광성보를 지키던 어재연(魚在淵)장군은 휘하 모든 장병을 이끌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창, 칼, 조총 등의 구식 무기로는 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미국과의 이틀간의 전투로 어재연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을 비롯한 200여명의 군사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광성돈대 廣城墩臺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의 돈대 중 하나이며, 보급 창고 역할을 했던 손돌목돈대와 용의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용두돈대(龍頭墩臺)가 있다. 광성돈대는 1679년 (숙종 5),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명군 4,300명이 40여 일 만에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미양요 때 파괴되었다가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하였다. 돈대에 속한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포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사정거리 700m의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포탄이 날아가기는하지만 폭발하지 않기 때문에 위력은 약하다.
돈대(墩臺)란, 경사면을 절토(切土)하거나 성토(盛土)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擁壁)으로 받친 부분을 말하는데, 분수, 연못, 화목(화목) 등이 조성되는 정원시설로서의 돈대와,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추고 있는 방위시설로서의 돈대가 있다.
방위시설로서의 돈대는 조선시대 ' 남한지(南漢誌 '에 인조 때 수축한 남한산성에 돈대 2 기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나, 현재 그 유적은 전하지 않는다. 그후 1679년 (숙종 5), 강화도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으며, 그 형태는 돌을 원기둥형으로 쌓아 곳곳에 총구멍을 설치하고, 위에는 낮은 성첩(城堞)을 쌓았다. 1796년, 정조 20년에 축성된 수원성곽에도 3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벽체에는 총구멍을설치하였고, 돈대 위에는 대포의 일종인 불랑기(佛狼機)를 놓았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선과 미국은 1855년 (철종 6), 1865년 (고종 2) 그리고 1866년에 미국의 선박이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영일 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제너럴 셔먼號 사건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의 大同江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商船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한다. 1866년 6월18일 미국 商人 프레스텐이 조선과의 교역을 위하여 제너러셔먼호를 타고 중국의 천진(天津)을 출발하였다. 그 배에는 大砲 2문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완전무장한 승무원 19명과 통역자인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가 타고 있었다. 7월7일 대동강 하류에 도착하여 서서히 강을 거술러 올라가 황해도 황주목 송산리 앞에 정박하였다.
제너럴셔먼號
당시 조선은 대원군 정권 하에 철저한 쇄국정책을 견지하고 있었으므로 외국과의 交易 및 기독교의 포교는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에 황주목사 정대식(丁大植), 譯官 이용숙(李容肅) 등이 프레스턴일행에게 돌아 가라고 요구하였으나, 제머럴셔먼호는 7월13일 평양부 신창포까지 올라 갔다. 이에 평안도관찰사 박규수(朴珪壽)는 제너럴셔먼호로 中軍 이현익(李玄益)과 서윤(西尹) 신태정(申泰鼎)을 파견하여 즉시 퇴거할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프레스턴일당은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야간에 상륙하여 약탈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폭우로 水位가 높아진 대동강 상류까지 나아가 16일 만경대 부근에 정박하였다. 이에 조선의 이현익(李玄益) 등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배에 접근하였다가 붙잡혀 감금당하였다. 이에 신태정(辛泰鼎)이 제너럴셔먼號에 접근하여 이현익(李玄益) 등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金, 銀, 人參 등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강변에는 평양군민이 운집하여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이현익의 석방 교섭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군민들은 격분하여 활과 소총을 난사하고 돌을 던졌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프레스턴일행은 뱃머리를 돌려 하류로 내려 가는데, 이때 퇴역장교 박춘권(朴春權)이 배를 타고 제너럴셔먼호에 돌입하여 李玄益을 구출하였으나 나머지는 살해되었다.
평안도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 백낙연(白樂淵)을 평양중군에 임명하고 화포 공격을 명하였다. 마침 제너럴셔먼호는 여울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조선은 24일 썰물 때 작은 배에 연료를 싣고 불을 지른 다음, 그 배를 제너럴셔먼호를 향하여 내리띄우고 제너럴셔면호를 불태워 버렸다.
평양 대동강에 있는 제너럴셔먼號 격침 기념비 .. 북한
조선군은 대포 2문을 노획하였고, 제너럴셔먼호의 승무원은 전멸되었으며, 조선측에서는 1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박규수 등의 벼슬을 높여주는 한편 중국에 양이쇄멸(洋夷殺滅)의 사실을 알렸다.
한편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항해도 및 평안도 연안에 무장선을 파견하여 제너러셔먼호의 소식을 조사하였으나, 큰 성과 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미국은 1871년 대한포함외교(對韓砲艦外交)정책을 수립하고 조선 침략을 단행하는데, 이것이 신미양요(申未洋擾)이다.
신미양요 申未洋擾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武力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나라 정부에 이 사건의 조사를 의뢰한다. 또한 5년 전 1866년에 병인양요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공동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전쟁 직전에 있었으므로 거절하였다. 이에 미국은 독자적으로 제너럴셔면호 사건을 조사하러 황해도 연안을 조사하였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교섭을 요구하며 지방 관리들과 협상하였으나 성과없이 물러갔다.
로저스사령관
이에 미국은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통상을교섭하기로 결심하고,청나라 주재 특명전권공사 F.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함대 사령관인 J.로저스에게 조선 원정을 지시하였다. 로저스는 상해를 떠나 일본 나가사끼(長琦)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號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앞줄 가운데 로저스사령관
미국함대는 그해 4월 경기도 남양주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정하면서 4월에는 물류도(勿流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에서는 이 급보를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이창회(이창회)를 강화 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각 영(營)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 화약, 군량미를 수송하였다.
그해 4월4일 조선 정부에서는 한학역관(漢學譯官)을 파견하자, 미국은 미관(微官)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상대하지 않고, 高官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일대를 측량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하였고, 덕진진과 초지진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그 결과 미국 측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미국은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조선 정부는 미국 함대가 허락 없이 헤협을 해하는것은 영토 침략행위이므로 사죄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하여 협상이 깨졌다.
그 해 4월 15일, 흥선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鄭岐源)을 시켜 미국의 불법 침략을 문책하고 통상조약 교섭을 거절하게 했다. 미국은 무단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4일 안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 행동을 취할것이라고 협박했다. 그 해 4월22일 '로저스'는 공격 개시를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였다. 이 때 10개 중대로 상륙군을 편성하고, 포병대, 공병대, 의무대, 사진 촬영반 등을 동원하였다. 미국은 해상 함포 사격으로 초지진을 공격한 뒤 수륙 양면으로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草芝鎭의 함락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 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군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戰死하고 24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미군은 3명 전사, 10명이 부상 당하였다. 이에 미국은 광성보에 성조기를 내걸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지구책)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도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하고, 전국 중요 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광성보의 함락 .. 성조기가 펄럭인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병인양요 당시의 프랑스함대 처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하고, 전국의 주요 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척화비 (斥 和 碑) .. 1871년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수교와 통상을 금하고,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음력 4월에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후 1882년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조선이 각국과 통상하게 됨으로 모두 철수되었다. 척화비의 주문(主文)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서양오랑케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기대하였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 들여졌다. 미국은 다시 교섭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응하지 않자, 지금보다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로저스는 이러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결국 조선으로부터 물러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5월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을 위하여 접견을 거부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의견을 제시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 당하였을 경우 구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 함대를 거느리고 청나라로 돌아 갔다.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官民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하였고, 배외의식(排外意識)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인의 鎖國 및 排外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 졌다.
한,미 최초의 전쟁 ... 누가 이겼는가 ?
이 전쟁으로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고, 미군은 전사자 3명, 중상자 5명, 경상자 5명이었다. 한.미 양국간 최초의 전쟁이었던 신미양요는 군사적으로 미국의 일방적 승리이었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를 보면, 서로 치열한 전쟁을 했고 수 많은 사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는 잃은 것만 있었고, 남은 것은 없었다.
실제로 광성보 전투가 있었던 그날, 고종은 '패전'을 인정하기는 커녕 서양오랑케(洋夷)가 화친하려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수 천년 동안 '예의의 나라(禮義之邦)'가 어찌 짐승(犬羊)과 화친할 수 있겠는가 ? 비록 몇 년을 서로 버티더라도 반드시 통절(痛絶)할 것이다 ..라고 쇄국양이(鎖國洋夷)를 표방하며 전국의 주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운 것이다. 또 미국인은 서양 귀신(洋鬼)이자 서양 깡패(洋匪), 심지어는 성 불능자를 의미하는 검둥이 고자(黑鼓子)로 불러졌다.
미군의 군사력에 압도 당한 조선 정부가 저자세로 개항 교섭에 나설 것이라는 '로저스'사령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결국 '로저스'는 3주간을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미국 해군부에서도 ' 승리는 승리이었으나 누구 한 사람 그다지 자랑할 것이 못되며, 누구 한 사람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무의미한 승리이었다고 ' 라고 이 전쟁의 의미를 말하기도 하였다. 오히려 신미양요는 조선에서 미국에 대한 배외 감정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신미양요 관련 사진들
미군에 빼앗긴 조선군 사령관 기(旗)...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손돌목 포격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대대적인 강화도 침공 작전을 감행하였다. 미국은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초지진을 함포로 초토화시킨 후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거하고 광성보에 쳐들어 갔다. 강화 수로의 가장중요한 근거지이자 난공불락의 자연 요새로 알려진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최정예 부다가 있었지만, 수륙 양면에서 한 시간 이상 동안 포격을 당하고 난 후 쳐들어온 미군에게 조선의 군대는 속수무책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손돌목 돈대에 높이 휘날리던 ' 장수 帥 '자가 새겨진 깃발(帥字琪)이 내려지고, 그 대신성조기가 걸렸다. 현재 이 수자기를 비롯한 50개의 군기와 대포 481문은 현재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다만 최근 '수자기'는 장기 임대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반환되었다.
미 해병, 로저스제독의 작전회의 등등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해병대. 뒤에 이들은 광성보에서 조선군과 백병전을 벌인다.
덕진진(德津鎭)을 점령한 미 해병대 .. 1971년 6월 2일
초지진(草芝鎭) 포대를 점령한 미 해병 ..450명이었다.
1871년 6월2일.. 손돌목 돈대에서 결사 항전하다가 전사한 조선군인. 차일이 처있던 곳은 어재연장군의 지휘소가 있던 곳이다.
조선군 포로들
조선군 포로들과 이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된 조선의 문정관(問情官 ..갓을 쓴 사람)
미국 배에서 일한 조선인 .. 맥주병과 미국신문을 들고 있다.
어재연 魚在淵
어재연(魚在淵. 1823~1871) ..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이다. 아버지는 용인(用仁)이다. 1841년 무과에 급제하여, 1864년 장단부사를 거쳐 1866년에 공충도(公忠都)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해 로즈(Rose)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하였다가 1871년(고종8) 2월 도총관.금위영 중군에 임명되었고, 이 해 미국 해병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삼군부(三軍府)에서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추천되어 강화도로 급파되었다.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진에서 배수진을 치고 수비하던 魚在淵은 6월11일 德津鎭을 함락한 美軍이 총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하였다. 水,陸 양면작전을 전개하는 미군을 맞아 야포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하여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황현(黃鉉)은 그의 저서 ' 매천야록(梅泉野錄) '에서 " 魚在淵은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적에게 던지며 싸웠으며, 적의 창에 난자되고 머리를 베어갔다 "고 적고 있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또한 韓末의 대학자인 이건창(李建昌)은 어재연을 평하여 " 청백강정(淸白剛正)해서 이르는 곳마다 이름난 공적을 남겼다. 체격이 장대하고 절인(絶人)의 힘이 있어서 세상사람들은 그를 壯士라 불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어재연의 묘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의 묘이다. 소재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이다. 두 형제는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군에 대항하여 강화도 광성진을 수비하다 함께 전사하였다. 이 묘는 함종어씨 문중에서 두 형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두 봉분이 나란히 있으며, 그 앞에는 각각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세워져 있다.
어재연의 생가
어재연 장군의 생가(生家)는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리에 자리하고있다. 후손들은 이 집이 그의 생가라고 주장하므로, 적어도 1820년대 초엽에는 지어졌으리라 추정한다. 그러나 오래 되었다고 하는 안채도 200년 가까이 된 집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뒤에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은 뒷산 자락이 다소곳이 내려온 터에 북서향으로 앉았다.
수자기 帥字旗
申未洋擾 때 美軍에게 빼앗긴 손돌목 돈대에 펄럭이던 어재연장군이 장군기이다. 그동안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전시되었었는데, 최근 10년간 장기 임대형식으로 빌려 왔다. 가로,세로 각각 4.5m의 크기로 재질은 삼베 또는 광목으로 만들었다. 수자기(帥字旗)란 陣中이나 營門의 뜰에 세워 두었던 大將의 軍旗이다.
순국한 어재연장군을 기리는 쌍충비(雙忠碑) 맞은 편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1871년 (고종 8) 4월 23일, 광성진에서 벌어졌던 미해군 육전대(陸戰隊)와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무영 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군사를 이끌던 어재연(魚在淵)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그리고 군관, 사졸 등 53명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나머지 51명의 시신은 7개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호랑이를 사냥하던 포수 출신으로 용맹함이 뛰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