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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녹색당에 참여하는가?
우석영
'녹색당'이라 하면 벌써 생소한 느낌이고 어쩐지 다가서기 힘든 느낌마저 든다. 앞으론 어떨는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분명 그러한 느낌이다.
물론 ‘녹색’ 자체는 우리에게 그닥 생소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녹색 성장, 이라 하면 벌써 친근하다. 대부분의 우리가 행복의 이념과 무의식적으로 등치시키고 있는 ‘성장’에 ‘녹색’을 갖다 붙였기 때문이다. 녹색 성장이라 하면 무언가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주역] 식으로 말하자면 ‘성장’이라는 효爻가 ‘녹색’이라는 효를 제어하고 있어, 충분히 수용할 만한 ‘녹색’이라는 느낌이라 할까?
녹색+당? 지나치게 윤리적인 이들이 아닐까? 동물 윤리니, 환경 윤리니, 윤리에 과민 반응하는 이들의 집단이 아닐까? 지나치게 자기 과시적인 이상주의자의 집단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계도하려는 이들이 아닐까?
난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이 미정형의 정당에 벌써부터 붙어 있을지도 모를 이러한 선입-이미지들이 싫다. [자연/생태/환경] 윤리의 독점도 싫고, 과민은 더더욱 싫고, 자기 과시와 계도는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바라는 녹색당, 내가 꿈꾸는 녹색당은 잘나고 똑똑하고 까다로운 소수의 정당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정당이다. 생계를 위해 나날이 분투하는 평범한 생활인들의 잠재적인, 진행 중인, 발전 중인 녹색에 열려 있고, 그 녹색을 키우고, 거꾸로 그 녹색을 흡수하여 커가는 정당이다. 그리하여 숲의 초록 이끼 융단처럼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는 ‘번짐의 정당’이다.
적극 자세를 낮추어 대중에게 다가서야 제대로 된 대중 정당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녹색 정치란 무엇보다도 일상 생활의 정치, 먹고 마시고 이동하고 일하는 일상적 삶의 문제를 핵심 의제로 삼는 정치이기에, 대한민국 사람들의 ‘평범’의 내용, ‘평범’의 방향, 그것이 조금 수정될 수 있다면, 저 ‘초록 이끼의 융단의 번짐’은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평범의 내용과 방향의 수정이라니? 내가 말하는 ‘평범’이란 오늘날 평범한 한국인들이 행복의 이념으로 붙들고 있는 암묵적 집단 가치, 암묵적 문화 감각이다. 1953년부터 2011년까지 역사의 단절과 도약이 있어왔지만, 그리하여 이 시대를 사는 세대들 간에 이러한 가치와 감각에 차이가 있을 법하지만, 그 시기 동안 거의 변함 없이, 거의 모든 세대에게 수용되어온 암묵적 행복 가치와 감각을 난 ‘평범’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973년 경제학자 유인호는 당시 박정희 정권이 경제 성장 지상주의를 종교화하다시피 하고 있다 지적하며 그 종교를 ‘GNP교’라 명명한 바 있는데, 이 원형적 종교는 그 모든 역사의 비탈과 계곡을 넘어 거의 변함 없이 대다수 한국인의 실질적 삶의 종교가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평범’의 핵심은 바로 이 무서운 시민 종교다.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2007년 말, 747 공약을 내세우고 나온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 주위에 깔려 있는 그 모든 ‘개발’ 계획들은, 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한 미미한 반대 여론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국가의 경제 역량과 부의 증대가 우리 ‘부족’ 전체의 행복, 물론 나 개인의 행복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은 한국사회에서 거의 의심받아온 적이 없는 절대 이념이다. 이것이야말로 1953년 이후 지금까지 우리를 끌고 온, 항로의 절대 좌표다.
경제성장 지상주의는 악이고 탈-경제성장주의는 선이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1973년이었다면, 유인호의 GNP교 지적은 청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한국은 ‘비교적 최근에’ (1950-1953년) 문명 붕괴 (아니라면, 중단) 체험을 한 희귀한 역사 공간이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체험을 온 몸으로 한 이들이건대, 어찌 그 후손이 경제의 성장을, 문명의 건설을, 국가의 부와 기술력, 군사력의 증대를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문제는 그러나 역사의 ‘바뀌어진 지평선’이다. 지금은 1973년도 아니고 1985년도 아니고 1995년도 아니다. 우리는 저 ‘평범’의 이념으로는 더는 행복하기 어려운 시대로 이미 진입해 있거나 진입해가고 있건만, 아직도 저 평범의 이념, 그 마력魔力으로부터 거의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대가 ‘녹색 전환’을 다급하게 요청하고 있건만, 경제성장 지상주의라는 절대 좌표를 변경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성장’에 ‘녹색’이라는 외피만을 입혀놓고 ‘그래 이 정도면 된 거겠지’ 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저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우리 중 다수가 마음에 품고 있는 행복의 이념은 분명 ‘녹색 성장’과 매우 친근한 것이다. “성장 우선, 녹색도 조금.” 아니라면 “복지 우선, 녹색도 조금.” 소위 ‘친환경 웰빙’이라는 문화 기호의 본질은 바로 이런 것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이 집단적 문화 이념의 항로 자체가 변경되지 않고는 더는 행복을 지속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는 사회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녹색당에 참여하고자 한다. 단순히 기성 항로가 ‘나쁘고’ 그 항로의 변경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항로의 변경이 오늘날 현실적으로 너무나 긴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녹색당을 이념의 잿빛 지하에서 푸른 현실의 지상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은 이 긴박한 현실적 필요이지 허공에 뜬 자연[친화]주의의 이상이 아니다.
사정이 이러한 결정적 원인은 지구가 현 문명을 부양할 수 있는 생태적 부양 능력의 임계점tipping point 도달에 있다. 세계 생태발자국 네트워크(GFN)가 2009년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9년 현재 세계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지구는 1.4개의 지구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미 1986년에 지구의 인간 부양 능력은 임계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2004 UN 밀레니엄 생태계 평가보고서(MEA)가 지적하듯, (2004년 현재) 25개의 지구 생태계 서비스 중 16개가 더는 지속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속적 경제 성장을 위해서 말이다.
이런 정황에서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인구 증가와 도시화일 것이다. 세계 인구는 현재 70억을 넘어 2050년이면 최소 90억에 도달할 전망이다. 설상가상으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도시인이 되어 도시인의 소비주의적인 삶으로 합류하고 있다. (1800년 전 세계 도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3%였지만 2007년엔 50%에 도달했고, 증가일로에 있다고 보고된다.)
이들을 다 어떻게 먹이고, 이들의 소비주의적 삶을 다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UN의 보고에 따르면, 농지 과용과 기후 변화로 인해 경작 가능한 세계의 농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수많은 연구자들의 식품 가격의 상승 가능성 지적은 이러한 사태를 배경으로 한다. GM 식품이라는 출구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식품의 안전성 여부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그리하여 사회 내 일각에서 식량자급률 증대의 긴요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아직 변방의 목소리일 뿐이다. 지금 누가 나라 농업의 미래를 참으로 걱정하고 가능한 위험을 냉엄히 직시하며 새 길을 열어가고 있단 말인가?
석유의 고갈을 보고하는 연구자들의 보고도 듣기 무서운 소식이다. 2008년 말 IEA는 세계 석유 생산량이 매년 9. 1%씩 하락하고 있다고 확언한 바 있다. 혹자는 핵에너지라는 인간 지성의 총화라는 보루가 있다고 주장할는지 모르지만, 2011년 봄 후쿠시마의 사고가 증거했듯, 기후 변화의 시대에 이 에너지원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원자력 안전 신화’만 앵무새처럼 옹알거리며 핵산업의 이익과 시민의 안전한 삶을 교환하려 하고 있다. 기후 변화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석유, 가스, 석탄 등 탄화 수소 기반 에너지원에 계속 의존하는 정책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에 다름 아니다. 해법은 탈핵, 탈-화석연료, 에너지 효율성 증대, 재생가능에너지 생산량 증대임이 자명함에도, 지금 어느 정당이 나서 이 에너지 전환의 긴급한 요청에 부응하고 있는가?
전지구적 기후 변화, 기후 이상은 그토록 ‘국익’ 운운하는 이라면 결코 경시할 수 없을 주제임에도, 이 둘을 함께 말하는 정당을,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2011년 11월 IPCC가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가 홍수, 가뭄, 폭풍과 같은 극단적 날씨를 초래한다고 보는 관점은 옳다고 봐야 한다. 같은 해 12월 초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COP 17회의에 맞추어SFIT(Swiss Federal Institute of Technology) 연구자들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50년 이후 지구 고온화 중 최소 ‘74%’는 바로 인간이 초래한 것이다. 혹자는 기후 변화론이 정치적 음모가 개입된 담론일 가능성을 말하고 싶겠지만, 현재 약 97~98%의 세계 기후 변화 연구자들이 인간 활동이 초래한 기후 변화와 지구 고온화 가설에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후 변화의 문제는 그러나 문명 세계 ‘바깥’의 ‘환경’ 문제가 아니다. 기후 변화 또는 생태계 이상은 세계 경제의 근간을 침식하기에 중대하다. 생태계와 생물다양성의 경제학 (TEEB)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 이변으로 인한 생태계 서비스의 손실은 경제학적으로 매년 122억 달러(한화 약 14조원)에 상당한다. 2006년 발표된 니콜라스 스턴의 리뷰에 따르면, 기후 변화의 위험이 초래하는 전체 비용은 매년 전 세계 GDP의 최소 5%, 최대 20%에 상당한다. (하지만 스턴 리뷰는 보수적인 관점이라고 평가되니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기후 변화의 시대란 경제의 근간이 위협받는 시대라고 봐야 하지, 안전한 경제 또는 문명의 외곽에 있는 지구 자연이 위태로운 시대라고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태가 이처럼 다급한데, 도대체 한국의 그 어느 정치인이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경제의 전면적 [방향] 재조정을 말하고 있는가? 진보연하는 정당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은 안일하게도 기후 변화’도’ 조금 언급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2011년 1월, 호주 브리즈번에서 거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대부분은 기억 못하겠지만, 당시 초유의 홍수 사태가 일어나 이 도시를 일주일 이상 마비시켜놓았다. 사람들은 전기가 끊기고 물에 잠긴 도시를 떠나 귀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거개 ‘가내 동물’이 되었다. 주류 판매점에는 차량이 줄을 이었고, 슈퍼마켓에는 평소의 20배, 30배 되는 줄이 흉측한 뱀처럼 길게 이어졌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도 평소의 친절함이 아니라 동물의 냉기가 느껴졌다. 돌연 삶은 ‘식품 쟁탈전’으로 변모했고 현대인은 고대인이 되었다. 왜 이런 야만적인 일이 일어났을까? 브리즈번 사람들은, 호주인은, 서양인은 본래 야만적이어서? 천만에. 삶의 무수한 조건과 환경이 삶의 품질을, 인성과 문화의 품질을 규제한다. 그 조건과 환경의 근본 지반은 바로 우리가 ‘생태환경’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브리즈번은 인구 2백만이 꽤 넓은 공간에 널리 퍼진 채로 살아가는 곳이다. 인구 과밀 지역이라 절대 볼 수 없는 곳이 이러했다. 서울, 부산과 같은 인구 과밀의 도시에 그와 같은 규모의 홍수가 발생하는 경우라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20세기의 모든 경제 활동, 생산과 소비 활동 일체는, 즉 앞서 말한 ‘부’의 창출 과정은 그 생태학적 비용을 자연과 미래 세대에 전가해온 활동이었다. 우리가 도달해 있는 시대는 이 엄연한 사실이 그 사실을 보고 싶지 않은 이들의 눈에 확연히 드러나버린 시대, 그리하여 그들에게 ‘전가에 관한 책임’을 요청하는 시대다. 지금 한국의 경우엔, 이 책임[비용 지불]의 요청과 경제성장 지상주의 지속의 요청이 충돌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지금까지 한국 정부와 한국인의 선택은 이 충돌의 현실을 외면, 그 모순을 봉합하고, 전자의 요청을 후자의 요청에 종속,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러한 모순 봉합의 길이 ‘지속 가능할’ 것이라 막연히 가정하고 또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잿빛 가정과 믿음 뒤에 있는 것은 1953년 (또는 1894년) 이래 변하지 않은, 미국 아니라면 서유럽 수준의 경제 성장에의 장밋빛 열망이다.
그러나 난 이 막연한 가정과 믿음의 길이 지극히 의심스럽고 염려스럽다. 그리고 그 ‘노선’이 초래할 결과가, 나와 내 아이의 생애에 끼칠 결과가 두렵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근시안적 열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남쪽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갖은 복지 담론 역시 근시안적 대안 담론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난 저 ‘평범’의 내용과 방향을 수정할 것을, 우리 부족의 항로, 그 절대 좌표를 변경할 것을 요청하고자 한다. 그 요청을 하고자, 나아가 새 항로를 개척하는 데 함께 하고자 녹색당에 참여한다.
그러나 ‘평범’의 외곽에서가 아니라 ‘평범’의 일자로서 그렇게 하고자 한다. 숨쉬고 먹고 이동하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저 ‘비용 전가의 책임’을 지닌 채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고자 한다. 팔짱 끼고 녹색당을 관망하고 계신 또 다른 평범한 독자 분들께 호소한다. 녹색+당의 녹색은 까다로운 색깔, 이채로운 색깔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색깔도, 이상주의의 색깔도 아니다. 이 녹색은 역사가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고 또 선물하고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거의 유일한) 행복의 색깔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거의 유일한) 출구의 색깔이다. 왜 이 현실적 미래의 색을 당신의 미래의 손에, 당신 아이의 손에 쥐어주지 않는가. (2011.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