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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 트이는 소리
김 지 연
여자는 두 무릎을 세워 웅크리고 앉은 채 방구석으로 몸뚱이를 이끌어갔다.
몸뚱이를 펴면 느닷없는 돌풍이라도 몰아닥쳐 쓰러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똘똘 뭉쳐 엉기적엉기적 앉은걸음질을 한다. 그리고 벽과 벽이 이어지는 구석에 몸뚱이를 끼운다.
양팔과 등에 닿는 시멘트벽의 감촉이 써늘해도 여자는 조금도 피하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벽과 벽 사이에 가능한 몸을 밀착시키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안면근육을 심하게 움적거리며.
얼마 후에 미미한 웃음 같은 일렁임이 여자의 얼굴에 머물렀다. 안도의 낯빛
과 흡사했다.
여자의 그런 표정은 제법 계속되었다. 등짝의 양옆으로 꿋꿋이 버티고 선 시멘트벽이 온갖 난관을 막아줄 수호신이나 되는 듯 여자의 얼굴은 희열기조차 어리어 있었다.
마루의 괘종이 덩덩, 사위의 적막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마치 쇠둔기로 가슴을 얻어맞은 기분인 듯 흠칫 놀라다가 시계추의 소리를 입속으로 센다.
―一하나, 둘·……열하나·……
열한점에서 소리는 그쳤다.
여자는 서서히 고개를 꺽어 곧추세운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는다.
튼튼한 벽 귀퉁이에 끼어 앉음으로써 짧은 순간이나마 가쳤던 안도감이 맥 없이 허물어짐을 안타까워하며 그녀는 다시 불안의 늪속으로 잦아든다.
재깍재깍, 일정하게 움직이는 시제추의 간격만큼 그녀 심장의 박동소리도 쿵
쿵 어김없이 뛴다.
여자는 부스스한 퍼머머리를 무릎 사이에 숫제 쑤셔박듯 더욱 웅크린다. 마치 동글동글한 달팽이 같은 형상이 되어 가슴을 죈다.
―아냐, 내가 이래서는 안돼·…… 이건, 자청하여 피를 말리는 짓이야·…… 절대로 자폭해서는 안돼·……
여자가 고개를 불끈 들었다. 충혈된 눈을 홉뜨며 목에 힘을 주고 방안을 휘둘러 본다.
웃목에 남자를 위한 저녁밥상이 놓여져 있고 아랫목엔 다섯 살박이 막내딸이 곰인형을 안고 잠들어 있다.
그 옆으로 남자를 위한 잠자리가 흡사 신혼부부의 침구인 양 화사하게 펼쳐져있다. 황금색 양단바닥에 천연색실로 수놓여진 봉황 한 쌍이 금방 승천할 듯 깃을 펴고 있다.
여자가 볼을 실룩인다. 해져 너덜너덜한 이불껍데기를 벗겨내고 양껏 화사한
그것으로 바꾸어 펼치던 날 남자가 부리던 억지가 생각나서였다.
“덩·…….”
괘종이 또 한점을 쳤다.
―·……열한시 삼심분·……,
여자가 침을 꿀꺽 삼킨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한결 고조되고 여자의 귀는 대문켠을 향해 아침 나팔꽃처럼 벌려진다. 찢어진 걸레조각마냥 산산히 흐트러진 이성(理性)을 억지로 끌어모아 대문을 걷어차고 킬킬대며 들어설, 만성 알콜중독자인 남자의 소리를 기다린다.
여자에게 비친 남자는 〈낮이면 사람 밤이면 야수〉로 돌변하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신기한 동물이었다. 알콜에 푹 절어 이빨이 근질근질, 전신이 스물스물, 마냥 가려워서 무엇이든 물어뜯고 욕질하고 들부수여야 잠을 이룰 수 있는 묘한 체질의 동물이었다.
남자는 일 주일에 네 번 정도는 발작했다. 신혼이었던 이십대엔 두 번 정도, 삼십대에는 세 번 정도이다가 사십대 초반인 이즈음에는 네댓 번으로 늘어났다.
소위 주사(酒邪)의 양상도 해마다 조금씩 변화되다가 이즈음에는 〈미쳐서 발작한다〉는 여자의 표현이 적절할 만큼 비정상적이었다.
남자는 이날 밤에도 언제나처럼 자정에서 5분쯤 전후하여 들이닥칠 것이었다.
여자는 또다시, 가능한 천천히 침을 꿀꺽 삼킨다. 벽속에 잠적해버릴 듯 구석으로 더욱 파고들었으나, 좀전같이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지는 못한다.
심장이 파열될 듯 곤두박질치고 머릿속은 불안과 공포로 범벅되어 차라리 앉은 채로 돌이 되고 싶은 여자는, 그러나 고개는 빳빳이 쳐든 채 몸뚱이만 웅크리고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살모사 대가리같이 얼굴을 쳐들고 귀를 바짝 세워 전신경을 대문켠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십분이 또 지나서 열한시 사오십 분은 됐음직한데 골목을 접어드는 남자의 구둣발소리도 고함소리도 또한 텍시의 클랙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벌떡 일어섰다.
벽 구석에서 다시는 몸을 빼지 않을 사람같이 집요하게 파고들던 그녀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홀홀 털고 방 밖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건넌방에 혼곤히 잠들었을 딸아이들이 행여 깰까 우려하며 여자는 분합문을 조심조심 여닫곤 뜰에 내려선다.
열엿샛날 만월이 손바닥만한 시멘트마당에 차겁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여자는 대문 빗장을 소리나지 않게 벗겨놓는다. 야수로 변하여 기어들 남자를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몹쓸자식〉 때문에 새우잠을 들이고 있을, 아랫방의 노친네를 위해서기도 하다.
대문이 반쯤 열려 있으면 걷어찰 건더기가 없는 남자는 좀 덜 소란을 피울 것이었다.
여자는 양손을 가ㅅᅟᅳᆷ에 모으고 뜰에서 서성거린다. 귀는 대문 밖 골목으로 벌리고 끊임없이 파닥대는 심장의 곤두박질을 애써 누르러 안간힘 쓴다.
“덩, 하나. 덩, 두울. 덩, ·……열두울.”
드디어 마루의 괘종이 멈췄다. 자정이 된 것이다.
하루가 끝내 그 순간으로 서서히 죽어지듯, 사위는 황량한 적막 속에 파묻혀
졌다.
여자의 불안은 절정에 달했다.
여자가 가슴에서 두 손을 내렸다.
그녀는 느닷없이 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순서도 구령도 없었다. 생각나는 대
로 팔, 다리, 몸뚱이를 휘두를 뿐이었다.
여자는 피그르르 실낱 같은 웃음을 입귀로 홀린다. 부스스 산발한 퍼머머리에 잠옷차림의 한물 간 여편네가 야밤 시멘트마당에서 하나 둘, 하나 둘.
一·……달밤에 체조하는 여자·……
여하간에 여차의 불안은 조금씩 가셔지기 시작했다.
희한스런 현상이었다.
미친 듯 휘둘러지는 팔다리의 억센 서슬에 심장의 작동이 얼결에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여자는 허리굽혀 땅을 짚고 다시 허리잡고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킬킬거린다. 둥그런 달이 호방한 웃음을 머금고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골목 안이 왁자해졌다.
“쨔앙, 씨팔, 새끼덜, 야 임마, ·……쌔꺄 임마, 까불지말란 말씀야, 크윽·……”
새날의 새움이 곱실곱실 트려 하는 축복받을 시간에, 남자는 흐트러진 발자국과 쌍소리로 그것들을 짓밟고 깔아뭉개며 기어들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잼싸게 대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우뜩 멈추어선다.
남의 집 담벼락을 붙들고 비틀거리던 남자가 바로 옆집 대문짝을 향해 물건을 내잡고 싸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제발, 옆집 아낙네가 자기 집 대문에 부딪치는 오줌소리에 깨지 않기를, 여자는 두 손 모아쥐며 가슴을 죈다.
하긴 오줌살이 세지는 않었다. 별볼일 없는 산동네 수도꼭지처럼 찌르륵 찔끔 찌르륵거려서 자던 사람이 놀라 깰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가 비틀했다. 마지막 오줌털기를 하려다가 중심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때 여자는 불같이 내달았다. 그리고 남자의 몸뚱이를 붙잡았다.
“어, 으음, 뉘, 뉘귀냔 말씀야. 히! 싸앙년”
남자가 여자의 팔을 뿌리치는 시늉을 하는데 몸뚱이는 외려 여자에게 통째로 실려진다.
―-―녹초가 되었구나·…… 오냐, 이 정도면 네 주먹질은 막을 수 있겠다·……
여자는 남자의 상태를 파악하곤 우선 안도감을 갖는다. 그러나 물간 해삼마냥 흐느적대는 남자의 몸뚱이가 턱 없이 버둥대고 있어 여자는 애를 먹는다.
남자의 겨드랑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곤 한 팔로 남자의 허리를 껴안아 대문 안에 간신히 들여놓는다. 이어 숨돌릴 짬도 없이 곧장 마당을 질러 봉당 위로 끌어올려 마루에 앉힌다.
남자는 마룻바닥에 벌렁 네 활개를 펄치고 퍼져버렸다.
여자는 안도의 숨을 거듭 몰아쉰다. 남자가 이토록 〈술젓갈〉이 되어 있는 상태면 마구잡이 폭력은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서둘지 않고, 몸을 돌려 대문을 잠그고 마루의 분합문도 닫는다.
“씨, 씨파알·…… 싸앙녀엉·…… 크으으·……여, 여기가 어디냐 말싸암야…….”
여자가 안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 잠시 궁리한다.
남자를 덜렁 안아들을 힘이 여자에겐 없었다. 집구석을 찾아들던 그 정신으로 남자 스스로 몸을 움직여주면 되는데 남자는 대문 밖에서 여자를 보는 즉시 흐물흐물 긴장을 풀어버린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상반신을 일으켜 뒤에서 죄어안고 방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러
자 남자의 목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구역질을 했다.
“왜액, 으억.”
순식간의 일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구부린 채로 속의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
여자가 남자를 껴안은 채 눈을 감는다. 그러나 곧 남자가 토하기에 편한 자세로 만들어준다.
남자는 쉴새엾이 토했다. 미처 세수대야를 받치지 못해 남자의 검정코트와 양복과 여자의 팔과 손, 마룻바닥에 오물은 질펀하게 깔려쳤다.
一―아이쿠, 이 웬수야, 이렇게 평생올 살려면, 그만 콱 뒈져라.
여자는 속으로 울부짖는다.
그러나 뼛속 골골에서 가슴올 끓일 뿐 한마디도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다
만 통곡하는 낯빛이 되어 꽥꽥대는 남자의 등을 쓸어주곤 민첩한 솜씨로 오물을 제거한다.
마루에서 남자의 겉옷올 벗겨내고, 가까스로 방으로 끌어들여, 봉황이 수놓인 침구에 눕힌다.
“싸앙년, 싸앙, 무, 물 가져와!”
남자가 오물 묻은 입귀로 침방울을 튀기며 악을 쓴다.
여자가 미리 준비해둔 설탕물을 남자의 입술에 대준다.
남자는 걸신들린 거렁벵이같이 철철 홀리며 벌컥벌컥 들이켜다가 팔을 휘둘러 물그릇과 함께 여자의 얼굴을 밀어버린다.
스텐대접의 가장자리에 부대낀 여자의 오똑한 콧등이 빨개지다가 곧 제색깔로 돌아왔다.
코를 싸쥐었던 여자가 얼굴에서 손을 떼고, 봉황 수무늬 위에 아무렇게나 고꾸라진 남자의 상반신을 다시 부추겨 요 위에 제대로 뉜다.
“씨이팔, 씨이, 시…….”
남자가 입을 벌리고 드디어 잠이 들었다.
크르륵, 트르륵, 투루루, 커그르르…… 남자는 별 희한한 기성을 코로 입으로 내지르며 잠을 자는 것이었다.
비로소, 여자가 방바닥에 퍼지듯 주저앉는다. 마치 농익은 홍시가 감나무에서 돌바닥에 철벅 떨어겨 제멋대로이듯 여자의 맥놓은 자세가 그런 형상과 같다.
남자가 들어오기 전의 여자 얼굴에 극도로 치닫던 불안과 두려움의 그림자가 거짓말같이 없어져 있었다. 의지할 곳을 찾아 시멘트벽과 벽 사이로 집요하게 몸을 끼던, 얼굴을 무릎새에 처박고 긴장의 덩어리로 똘똘 뭉쳐지던……여자에겐 그런 혼적조차 없었다.
괘종이 덩덩, 두점을 쳤다.
새벽 두시였다.
여자는 옮겨다놓은 정물처럼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표정도 없었다. 맞은편의 벽에 시선을 박고 넋나간 듯 앉은 여자는 흡사 백치 같았다.
남자가 뿜어내는 역겨운 악취가 방안 가득 괴어넘치고, 뻘창에 뒹군 허물을 벗어 팽개친 듯 마루에 널려진 남자의 옷나부랑이가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느나,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건년방 딸아이들의 잠꼬대 소리가 마루를 거쳐 안방으로 흘러들었다. 칭칭대
듯 불분명한 그 소리들은 남자의 코고는 소리와 얼크러져 산화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멀거니 내려다본다.
방안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폐품처럼 구겨져서 입과 코를 벌린 채 구린내와 소음을 함께 내뿜는 남자의 몰골을 멀거니 바라본다.
여자가 입귀를 실룩이며 피그르르 웃었다. 싸늘한 냉소가 남자의 초라한 몸뚱이 위로 실뱀 스치듯 지나갔다.
―一하여간에, 너는 별난 인종이다……
남자는 일곱 명의 누이 밑에 드디어 얼굴내민 〈하늘이 접지해준 아들〉이었다. 적어도 일곱 명의 딸을 가진 남자의 집 안에서 그는 〈하늘아들〉로 금이야 옥이야 깨질세라 부서질세라 이 세상의 가장 값나가는 보석인양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라났다.
일곱 누이의 넘치는 사랑 속에서 남자는 자연스럽게 여성화되어, 만사에 소극적이고 얌전하고 의타심이 강한 고추달린 〈여자〉처럼 성장했다.
결혼 당시의 남자측 조건은 아들 많은 집의 딸을 얻는 것이었는데, 마침 지금의 여자는 다섯 아들 속의 외동딸이어서 남자측 가족들은 〈찰떡궁합〉이라고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 많은 집의 외딸이 또 딸만 넷을 줄줄이 낳았다.
첫딸, 둘째딸은 생기는 대로 낳다가 터울을 두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인위적
으로 4년, 5년 터울을 만들었는데 또 딸, 딸이었다. 그래서 큰딸은 열여덟 살의 고3 인데 막내딸은 이제 다섯 살이었다.
끝의 딸을 〈막내〉라고 부른 것도 작년 봄부터였다. 열 명도 스무 명도 좋으니 끝까지 낳아보자고 안간힘쓰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작은딸을 끌어안고 “네가 막내야, 막내라구.” 하며 훌쩍거리더니, 느닷없이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남자의 술행사가 개망나니 짓으로 더욱 농도가 짙어진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저 혼자 결단으로 〈씨줄〉을 끊어놓곤, 조상탓인 양, 여자 탓인 양 펄펄 날뛰었다. 집안에 아들 손(孫)을 잇지 못함은 순전히 여자들 (노친네도 포함) 탓이며, 특히 자기 분신(分身)을 종절시킴으로써 제 인생을 깡그리 망가뜨려놓은 것은 바로 마누라인 여편네라고 억지를 부려댔다.
여자는 그러는 남자를 어처구니 없이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러나 정작 혼절하여 경악하는 사람은 남자의 어머니인 칠순의 노친네였다.
여덟번째에 드디어 아들 하나를 낳았던 노친네는 〈낳으면 얻는다〉는 굳은 신념에 절어 있었던 터여선지 아들의 고의적인 철손(絶孫)행위에 거의 매일 통곡이다가 이즈음은 조상에게 죄지어 햇빛 볼 자격도 없다며 아랫방에서 두문불출인 것이었다. 전국 곳곳에 살고 있는 딸네들 집에도 친척 집에도 내왕 않고 시름시름 앓으며 훌쩍이고만 사는 것이었다.
여자는 시모인 노친네의 뜻과는 달랐다. 단 한번도 겉으로는 남자의 단산(斷
産)수술에 가타부타 내색조차 않았지만, 속으론 은근히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재산이라곤 몸담고 있는 다 찌그러진 구옥(舊屋) 한 채와 소규모의 시계포 하나에 전가족의 생명줄을 결고 있는 처지에 딸을 넷이나 낳은 것만도 후회막급인데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분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사실은 남자가 제 스스로 정관절제수술을 받지 않았으면 그녀 스스로 단산수술을 행하려던 차라, 가만히 앉아서 덕을 본 셈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자기 행위의 모든 책임을 여자에게 덮어씌울 떼마다 여자는 은근히 “다시 재수술을 받아서 또 낳아보지요.” 하고 튕겼으며, 이에 남자는 “복원 수술이 가능치 않게 했단 말이야.” 하고 악을 썼다.
남자는 거의 밤마다 술을 펐다.
시계포에서 남는 이문은 술값으로 처박아지고 집 안은 됫박쌀과 낱개 연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딸들의 학비는 여자의 친정오라범 집 구걸순례와 여자가 자폭하는 심사로 갖는 그녀의 부업(?)으로 이어지는 처지였다.
여자의 부업 이란 초상화(肖像畵) 그리기였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녀가 짧은 시간 틈틈이 동리노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오로지 생 활을 위해서였다.
서양화가로서의 부풀었던 꿈이 남의 사진이나 놓고 베껴그리는 하루살이 간판쟁이와 다를 바 없는 행위에 끝없이 비참했으나, 당장 몇푼이라도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방책 〉이어서 그것을 놓지 못했다.
그것을 그릴 때마다 여자는 심한 진통을 겪었다. 학교 졸업하고 20년이 넘 었어도 화가로서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는 자기 전공을 살려야 할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단지 먹기 위해 쏟는다는 사실 때문에 번번이 극심한 좌절과 갈등을 겪는 것이었다.
전공을 살린 그녀의 동기생들이 화단(晝壇)에서 중견급으로 그 위치가 굳혀짐을 볼 때마다, 혹은 자기보다 실력이 뒤쳤던 친구가 늦게나마 화려하게 부각됨을 볼 메마다 그녀의 고통은 격심했다. 그럴 때면 손닿는 곳에 두고도 펼쳐보지 못하는 화구(晝具)들을 쓸어안고 꺼이꺼이 가슴으로 오열도 했다.
--―어쩌다 내가…… 내 인생이…… 이 모자라는 남자로 하여 만신창이 되고……
물론 여자는 자신의 함몰이 남자의 무능에만 있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어떤 모진 환경에 부닥쳤어도 그 난관을 힘차게 꿰뚫고 나가는 강한 투지와 의지가 자신에게 결여돼 있음을 그녀는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아들 절손의 원인을 남자가 그녀에게 덮어씌우듯 자신의 능력을 함몰시킨 모든 원인을 남자에게 돌리고 싶었다. 찌든 가난 속에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줄기찬 강요와 온갖 방범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했어도, 아들이 되어주지 않는 섭리속에서 겪던 뻐근한 강박관념.
뿐이던가, 남자는 허구현날 폭력을 동반한 술타령에 턱 없는 의처증으로 여자를 달달 볶듯 했었다.
――하루도 몸,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내 인생이 더럽고 해진 빨랫감마
냥 폭삭 구겨져버린 것은 바로 너 때문이야……
“덩, 덩, 덩.”
마루의 괘종이 정확하게 세 번 울렸다.
새벽 세시.
여자는 선하품을 한다.
그러나 잠은 여자의 몸뚱이에서 이미 깡그리 달아나고 없었다.
여자는 야금야금 새김질도 하는 남자의 추한 얼굴에 다시 눈을 꽃는다.
“트르르 크르으…… 푸우푸르으…… 냠, 냐음냐음…….”
코고는 소린지 입바람소린지 어떻게도 표현키 어려운 괴음(怪音)들이 남자의
얼굴 구멍마다에서 끊임없이 요란했다. 귀신들의 변주곡(?)이 저러려니 여자는
생각한다.
――술을 퍼마셔야만 기운이 솟는 남자…… 술을 마셔야만 자신이 사내로 변
신한다는 착각속에 빠지는 등신 같은 남자…… 마치 아들 없음이 세상 최대의 고민인 양, 제 무능과 모자람을 그것에다 덮씌우고 허구현날 꽥꽥대며 술을 푸는 불쌍한 남자……
여자는 사내의 몸뚱이에 저주와 경멸의 조소를 듬뿍 바른다. 술에 절은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겪은 불안과 공포의 고통스런 순간들에 보복이라도 하듯……
여자는 한(恨)의 덩어리처럼 나날이 서서히 경직되어 가는 자신에 놀란다.
남자를 향한 좌절과 혐오의 결정체가 해마다 눈덩이마냥 불어나기 시작하다가 이즈음은 터쳐지기 직전으로 그 팽만감이 극에 달했다.
참으로 많은 세월을 남자에게 호소하고 애원하고 간구하며 살아왔다. 술만 끊어준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여자는 전신으로 남자를 설득해왔었다.
그러나 여자의 결사적인 노력은 여자 자신의 피를 말리는 일방적 작업으로 끝나고, 남자는 철딱서니없는 반항기의 아이놈같이 외려 더 술속에 절여졌다.
여자는 맥을 놓고 말았다. 남자에게 걸었던 혼신의 신경줄을 놓아버렸다. 차라리 그것이 훨씬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저래도 매 한가지일 바에야 자초하여 스스로를 말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이런 싸늘한 체념과 방관에 처음에는 어리벙벙한 낯빛이다가,
비로소 살판났다는 듯 동분서주 종횡무진 날뛰기 시작했다.
주사의 형태를 나날이 각양각색으로 변색시키며 여자를 터놓고 학대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원인이 여자에게 있다며 공공연히 덮어씌워 머리끄덩이를 잡아채고 걸핏하면 법상을 둘러쳤다. 겁에 질린 딸애들을 차례대로 세워놓고 노래를 부르라고 눈을 부라리고 〈쓰잘데 없는 것들〉이라 고래고래 악담을 퍼부었다.
여자의 심장은 나날이 오그라져들었다. 돌덩이도 강철도 혹은 무감각의 마비
된 상태도 아닌 여자의 몸뚱이는 비바람에 점점 깎여드는 돌멩이처럼 위축되어갔다. 살얼음판을 딛는 기분으로 나날을 보냈다.
여자는 스무 번도 서른 번도 더 팔자를 바꾸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안에 밟히는 아이들의 슬픈 모습이 그녀의 여린 날개를 꽁꽁 옭아메었다.
뿐만 아니었다. 키들키들 웃어대며 “죽어도 이혼은 안해준다.” “자식들 손끝
하나 못 댄다, 네년 도망가면 그뿐인기라, 히히…….” 하는 남자의 낯빛에서 여자는 어떤 섬뜩한 느낌을 받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여자가 남자의 곁을 떠나는 순간부터 남자와 아이들은 폭발물에 의한 파편처럼 허공에 조각조각 산화되고 말 것 같은 위기감을 여자는 피부로 느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자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는 것은 딸들의 야멸찬 언동들이었다. “엄마가 우리 곁에 없으면 우리는 멋대로 살 거야”, “우리는 엄마 없이 아버지와는 절대로 같이 살지 않을 거야…….” 라든가 하면, 열여덟 살 큰딸은 “엄마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고문이야, 처참한 엄마의 인생 이 가엾어서 미치겠어…… 하지만 엄마! 우리들에게 기대해봐, 희망을 걸어봐, 제발 바라옵건대 우리들을…… 더 불쌍하게 만들지 마.” 라고 했다.
여자는 그 울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날이 조금씩, 심장을 말려가며, 더운 생명을 죽여가며 남자 곁을 돌고 있었다.
“덩, 덩, 멍, 덩.”
네시가 되는 모양이었다.
덩덩 울리는 시계소리가 신호이기나 한 것처럼 남자가 카르륵, 이가는 소리를 내지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끙끙 앓는 소리도 냈다.
여자가 주먹으로 여자 자신의 허리를 두드린다.
남자가 흐드러지게 취한 덕분에 머리끄덩이를 잡히지도, 가구 들부숨을 말리느라 힘을 쏟은 것도 없는데, 전신이 흠뻑 두들겨 맞은 후처럼 결리고 아팠다.
여자는 손을 멈추고 허리를 편다.
그러다 남자를 또 멀거니 내려다본다.
――오냐…… 네 몸뚱이도 살덩이이거늘…… 얼마나 견디나 보자……
여자는 천만 근 같은 몸뚱이를 일으켰다. 어차피 날은 지샜으니 조반준비도 해야 되었지만 새벽잠이 없는 딸들이 일어나기 전에, 마루에 어질러진 남자의 코트며 양복 따위를 거두어 젖은 수건으로 훔칠 건 훔치고 씻을 건 씻어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밤의 소란을 연상케 하는 그런 혼적들로 새벽부터 딸들의 기분을 궂혀주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는 뱃속에서 솟구치는 절절한 아픔과 증오와 비애와 분노를 죽이면서, 구부정하게 엎드려 남자의 옷들을 집어올린다.
남자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낮 열두시가 다 되어서였다.
여자가 일상적인 집안 일올 끝낸 것도 그 시간쯤이었다.
여자는 다섯 살박이 막내를 아랫방의 노친네와 놀도록 보내놓고, 웃목켠에 밀쳐두었 던 초상화들을 끌어 당겼다.
지난밤에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고단한 몸상태 같아서는 모든것 제쳐두고 몸을 뉘고 싶었으나, 이미 돌려줄 날짜가 넘은 것이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여자가 쓰디쓴 낯빛이 되어 마악 연필을 집어들려던 순간이었다.
“무, 물 좀 달란 말이야아.”
등뒤의 남자가 뒤치락거리며 껄걸한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여자가 깜짝 놀라며 남자의 머리맡에 미리 준비해둔 차거운 보리차물 대접을 두 손으로 받쳐올린다.
엉거주춤 힘겹게 일어난 남자가 그릇을 낚아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스텐대접을 방바닥에 내꽂아버렸다.
“씨팔, 서방 알기를 개떡같이 아는 년, 그래 꿀이 없으면 그 혼한 설탕 한 숟갈 물에 탄다고 집기둥이 부러진디야? 오, 그래 맹물 처먹고 어서 꺼꾸러져라 이거겠지. 씨파알.”
여자가 하얗게 질린다. 그러나 잽싸게 이불과 방바닥에 엎질러진 물부터 닦
는다.
언젠가 술깬 후에 설탕물을 만들었더니 〈당뇨병 걸려 빨랑 죽으라〉는 것이냐고 악을 써서, 그 이후부터는 가능한 설탕을 넣지 않고 날계란 두 알과 식힌 보리차 물을 준비했던 것인데 이날따라 또 생트집인 것이다.
여자는 숨을 죽인다. 술꾼이 술 깰 때의 〈불쾌한 뱃속 상태〉며 〈혼미한 정신상태〉를 이해하자고 마음으로 다짐한다. 그런 남자에 대꾸해서 그 누구에게도 이득될 것이 없음을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흥, 어느 집 개가 짖느냐 이거겠다? 좋다구, 그래, 좋다구, 씨팔.”
남자가 중얼중얼 상소리를 거듭 주절대며 소반 위의 유리 그릇에 담겨진 날계란 두 알을 후루루 마신다.
“진지, 올릴까요?”
여자가 비로소 입을 멘다.
남자가 충혈된 벌건 동자를 흡뜨며 소리를 꽥 질렀다.
“썅, 그럼 밥 안 주고 굶겨죽일 작정이야?”
악을 쓰는 남자의 관자놀이가 불룩불룩 솟고 귓밥 부근의 살갖에 경련이 일었다. 여자가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돌아서 부엌으로 나간다.
다시 국 데우고 숭늉 덥혀서 상을 올린다 해도 한 숟갈 제대로 뜨지 않을 것을 삔히 알면서 정성으로 점심 겸한 조반상을 차린다.
“흥, 보나마나 뜨 김칫국일 줄 알았어. 어떤 여편네들은 살코기나 선지국으로 서방님 속 풀어준다는데 이건 북어국도 못되는 허구헌날 김 칫국이라니.”
법상을 올리자 예상대로 남자는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실제 뱃속은 밥알 한 톨 들여놓을 상태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기 밥통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만이라도 드세요……,”
여자가 묵은 김치를 다져넣고 그 위에 두부를 얇게 썰어넣고 끓인 얼큰하고 시원한 국그릇을 남자 앞으로 당겨놓는다.
“치워. 내가 소나 말인 줄 알어 ? 육식을 식용으로 하는 위대한 인간이란 말이여.”
남자가 수저를 상 위에 내꽂으며 소리쳤다.
여자는 아무말 없이, 상을 마루로 내간다. 얼굴엔 짙은 자조(自嘲)의 그림자가 출렁거렸다. 상을 차릴 때도 뻔히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갖은 정성을 다하던 자신의 답답하고 수모스런 인종에 이날따라 구토를 격렬하게 느낀다.
“다리 주물러.”
법상을 부엌까지 미처 내가지도 않았는데 남자가 내뱉었다.
“……”
여자는 초금 전에 꺼냈던 초상화 도구들을 다시 꺼내어 웃목켠에 옮겨놓는다. 그리고 남자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날계란 두 알과 보리차를 마신 남자의 뱃속이 차츰 안정될 떼까지 또한 그가 다시 잠속에 빠져들 때까지 다리를 주물러야 했다.
말은 더욱 큰 피로와 소란을 몰고 오는 것이어서 그녀는 시종 벙어리처럼, 잘 훈련된 순한 개처럼 움직인다.
“건성건성 하지 말고 힘을 주어 좀 똑똑히 주무르란 말이야.”
남자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투덜댔다.
여자는 남자의 발작 같은 신경질이 터질 때마다 깜짝깜짝 소스라치며 더욱 최선을 다한다.
미친개가 되어 남자의 전신올 뿌드득 뿌드득 물어뜯고 싶은 강렬하고 끈적한 충동과는 달리, 가냘픈 어깻죽지가 아프도록 남자의 몸뚱이를 알뜰히 보살피는 이율배반적인 자신을 끝없이 혐오하며.
이날, 남자는 저녁때가 다 되어 일어났다. 오후 두세시경부터 여자가 열심히 갖다바치는 라면이며 국밥이며를 서너 차례 쩔룩거려 먹곤, 식구들 먹여살리기
위해 나가야 한다며 털고 일어선 것이다.
“그럼요, 그럼요…… 당신이 누워계시면 우리들은 어찌 사나요! 여섯 가족의
눈동자가 오로지 당신만 의지하고 살아가는데요!”
여자는 많이 느긋해진, 남자의 자존심과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려 애쓰며 양복입음을 도와준다.
남자가 킁킁,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실상 남자는 몇 달 동안 한 푼도 집에 들여놓지 않았고, 시계포에 간답시고 어기적대고 일어난 것은 가게의 점원이 달려와 〈수유리아줌마〉가 왔다고 남자에게 귀뜀을 해주고 갔기 때문이었다. 수유리아줌마란 남자의 국민학교 동창생으로 돈이 많은 미망인임을 여자도 들어 알고 있었고 안면도 있는 정도였다.
남자는 자기 사업에 그 동창생의 도움을 받고 있는 입창임을 언젠가 여자에게 넌지시 비친 이후부터 터놓고 그녀와 친숙하게 내왕하는 모양이었다. 그녀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점잖게 〈돈〉 때문임을 주지시키곤, 그러나 눈이 빛나고 전신에 기운이 솟는 양 덤벙대어 가끔 여자의 시선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여자는 그들이 얼마의 채무관계를 갖고 있는 건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어쩌다 여자가 가게에 나가서 마침 나타난 그녀와 한자리에 앉게 되면, 남자는
동창생을 은인모시듯 하고 그녀는 당연한 대점을 받는 듯 여유만만 도도했었다.
그런 분위기에 말려 여자도 남자의 동창생을 고맙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정도였다.
남자가 양복 앞자락에 묻혀진 덜 닦인 오물자국을 내려다보고 낯을 찡그렸다. 그러나 희한스럽게도 한마디의 군소리 없이 다른 양복으로 바꾸어입곤, 크윽크윽 헛기침과 트림을 하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몸 생각하시고…… 제발 저녁에는 잡숫지 마시고…… 늦지 않게 들어오세
요.”
여자가 남자의 뒷등에 대고 더듬거린다. 그러다가 얼굴을 붉힌다, 남자의 폭음에 대한 한마디 바가지는커녕 끝없이 비굴해서 아부하듯 더듬대는 자신의 몰골이 땅속으로 기어들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남자는 들은 척도 않고 씽씽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 어느 한 곳 잘나지도 못한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껏 턱을 치켜들곤.
남자의 무능이 도드라져 뵐수록, 자기비하에 대한 여자의 기분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가…… 어쩌다가……
여자는 자기의 등신스런 비굴함이 남자의 여일없는 무분별한 횡포의 잔재이며, 또한 맥해무익한 맞상대로 힘올 쏟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야만적 인 사내의 매질에 의해 잘 길들여진 보통여자……
그러나 여자는 의식적으로 그런 참담한 현실을 외면하려고 노력한다. 확실히
어딘가 모자라는 남자의 무분별한 행패에 의해 자신이 길들여졌다는 사실은 자기의식이 강한 여자의 입장으론 엄청난 모욕이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내면은 항상 자글자글 끓었다. 사방이 꽉 막힌 구덩이 속에서 끊임없
이 바글바글 끓었다. 태고적 화산 속의 용암처럼 북적거렸다.
나날이 증가되는 열기로 하여 금방이라도 터쳐질 것 같은 여자의 내부는 그러나 신기하게도 터뜨려지지 않았다. 끓어오르다 잦혀지고 식어지는 어떤 과정도 아닌데 묘하게 폭발되지 않는 것이었다. ·
아이들을 덜 가련하게 만드는 길이 그나마 현재의 자기희생의 지속 외는 달리 방책이 없음을 익히 아는 여자의 〈체넘〉이 바로 끓어넘치지 않는 원인인지도 몰랐다.
사실 여자는 이즈음 들어 남자가 술 속에서 헤어나지 않는 한, 소중한 딸들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 숙명적일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스스로에 다짐두고 있는 참이긴 했다.
그러나 완전한, 일백 프로의 자기회생을 감수하기엔 여자의 두뇌와 이성은 너무나 선명했고 더불어 자기인생을 살고픈 욕망은 여느 때보다 더 치열했다.
― 아……
여자는 비칠대며 방안으로 들어선다.
남자가 빠져나간 널려진 침구 위에 몸뚱이를 내꽂으며 격렬하게 전율한다.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솜이불에 열굴을 파묻고 여자는 꺼어꺼어 오열한다.
여자는 곧 얼굴을 들고 범벅된 눈물을 훔쳤다. 그럴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초상화 도구들을 끌어당겨 그것을 마저 그려야 하고 또한 저녁준비도 해야 되었다.
딸애들이 차례대로 귀가할 시간이기도 하여 짐짓 밝은 표정을 만들어야 될 시간이기도 했다.
“엄마 손들어, 빠앙, 빠빵.”
다섯 살박이 막내딸이 어느 사이 들어섰는지 그녀를 향해 장난감 총을 겨누었다. 여러 해를 걸려 임신했을 메부터 온 가족이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랬던 아이는 유독 하는 짓이 선머슴애 같이 거칠고 활달하여 이 집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엄마 엄마, 함니가 날 붙들고 또 울었쩌. 내가 고추만 달고 나왔음 함니는 춤췄을 거래. 난 함니방에 안 가, 함니는 나만 보면 자꾸 울어, 싫어.”
딸애가 도리질을 하다가, 작은 손을 불쑥 여자의 가슴 안으로 들이밀었다.
여자는 젖꼭지를 비트는 아이의 손을 밀어내고 저녁밥을 짓기 위해 일어선다.
“그래, 그럼 이 방에서 놀아라. 엄마 밥 지어올께.”
“싫어, 나도 부엌에 갈 거야. 마징가제트도 못 보고, 씨이. 근데 엄마, 테레삐 어쨌어?”
“그것 많이 보면 눈이 나빠지거든. 그래서 엄마가 감춰뒀단다. 우리 영옥이 이렇게 자라면 엄마가 꺼내줄 거야.”
“아니야, 테레삐 부서쳤다구 언니가 그랬써. 나 마징가제트 보고 싶단 말이야.”
아이는 부엌으로 따라나서며 칭얼댔다.
여자는 쓰디쓴 침을 삼킨다. 벌써 한 달도 전에 텔레비전은 남자의 발길에 박살이 났지만 아직 수선도 못하고 다락에 처박혀 있었다.
딸아이들이 하나둘 귀가하기 시작했다.
집 안에는 그런대로 싱그러운 기운이 떠돌기 시작하고 막내는 신바람이 나서 이방 저방으로 돌아쳤다.
고1짜리 둘째딸이 부엌으로 들어섰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어깨가 아래로 처져 있어 여자는 속으로 뜨끔한다. 4분기 수업료 독촉을 또 심하게 받은 모양이었다.
“엄마…….”
“그래 안다…….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초상화 마저 그려 내일 아침에 갖다주고 돈을 받자. 내일은 수업료를 꼭 낼 수 있을 게다.”
“엄마! 그것뿐이 아니고…… 아니야, 그만두겠어, 역시 엄만 모르는 게 좋을
거 같애.”
딸애가 머뭇대며 돌아서 나가려 했다.
“얘가…… 무슨 말인데 그러니?”
“아, 아냐. "
딸애는 휑 부엌 밖으로 나가버렸다. 수예품이다 뭐다 또 학교에 내야 될 돈이 있는 모양이라고 여가는 생각한다.
아이들은 수업료 외에 학교에 내는 돈은 마치 자기들의 잘못으로 생긴 지출인양 죄지은 얼굴들로 머뭇거렸고, 여자는 그러는 아이들이 안스러워서 뼈를 저리우곤 했다.
―ㅡ그래…… 오늘도 밥을 새우자…… 무슨 일이 있어도, 초상화는 완성해야
한다.
여자는 지난밤을 하얗게 새운 것을 억울해 했다. 그러나 남자를 원망하고 저
주할 마음의 겨를도 없었다.
여자는 마음이 점점 조급해져서 몸을 빨리 놀렸다.
저녁 설겆이를 아이들에게 닿기고, 여자는 초상화를 들고 앉았다. 그러나 이미 그 시간도 아홉시에 이르고 있어 넉넉한 시간은 못되었다.
여자는 마냥 쓰린 눈동자와 자꾸만 허물어지려 하는 천근이나 됨직한 피로한 몸뚱이를 곧추세우려 손을 움직여나갔다. 그러나 초조감 탓인지 마음보다 손 먼저 달려가서 뜻대로 잘 표현되지가 않았다.
――제발…… 오늘은 곱게 들어와 곱게 잠들어주었으면……
열시가 넘고 열한시에 접어들면서 여자의 가슴은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느 때 같으면, 그러니까 그 전날 심하게 폭음한 다음날은 간이 녹아든다고
끙끙대며 술을 마시지 못했는데 이날은 또 그렇지 않을 모양이다.
―ㅡ제발…… 제발……
여자는 잠시 연필을 놓는다.
초상화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밤 내로 끝내야 한다는 조급함과, 밤이 깊어갈수록 남자에의 불안감이 점점 고조되어 손끝이 떨렸기 때문이었다.
지난 밤 같이 시댄트벽 구석에 달팽이처˙럼 웅크러들지도, 마당에 나가 달밤체조도 하지 못하고 연신 뛰는 심장을 억제하며 초상화 그리기에만 집중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심장과 손끝이 함께 죄어들고 떨리는 것이었다.
여자는 안절부절못했다.
좋은 컨디션으로 밤을 새워 그린다 해도 다음날 아침까지 완성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인데 이토록 결박하고 불안정된 상태속에선 도저히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자는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곧추앉았다. 양손을 맞잡아 힘주어 주무르곤 연필을 집는다.
“덩…….”
열한시 삼십분을 알리는 괘종의 짧은 한점 소리가 뜨 다시 여자의 손에서 연필을 떨어뜨리게 했다.
여자는 미친 듯 몸을 털고 일어났다. 부엌으로 내달았다. 찬장구석에서 소주
병을 꺼냈다. 언젠가 남자가 오버주머니에 찌르고 들어온 것을 숨겨놓은 것이었다.
여자는 2홉들이 병에 삼분지 일쯤 남은 소주를 병째로 임에 대고 들이켰다.
목구멍과 뱃속이 타는 듯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여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병
을 비운다. 그리고 큰 숨을 몰아쉰다.
잠시 후면 술기운이 전신에 돌 것이었다. 그리고 기분이 느긋해질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터트려지고 말 것 같은, 극도로 치닫는 불안감이 점차 쓰러질 것이었다.
여자는 몇번 이런 경험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한밤중 체조도, 물구나무서기로도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았을 메 소주를 마시고 효과를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소주를 마시면 남자의 그 지겨운 술냄새, 시궁창냄새도 맡아지지 않았고 두들겨 맞아도 통증을 못 느꼈다. 그러나 여린 근육이 알콜에 마비되어 통증을 못 느낌으로하여 여자는 흠씬 두들겨맞기도 했었다.
여자는 부엌에서 잠시 서성거리다 봉당으로 나섰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었다. 2홉들이 병에 삼분지 일이나 남아 있는 술을 깡그리 마셨는데도 옛날같이 금방 취하지가 않았다.
목이 타고 속이 화끈거렸으나 정신상태는 더욱 명료해지는 것이었다. 다만, 빠개질 듯 고통스럽던 두통과 극도로 죄어들던 심장이 조금씩 느슨해짐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혈관이 확장되고 근육과 신경줄이 알게 모르게 이완되어 극한상황으로 치닫던 두려움이 경미하게나마 스러지는 듯한 기분만으로 여자는 소주를 마신 효과를 음미했다.
여자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기 전인, 정확하게 열두시 오분 전에 남자가 대문
을 박차고 들어섰다.
여자가 숨을 꿀꺽 들이마신다.
전신에 찬물을 끼얹는 섬뜩함이 돌연히 몸에 부딪쳐왔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서슬이 보통이 아니었다. 술 농도는 행패부리기에 아주 적절한 상태였
고 희번득이는 눈빛이 마치 무엇인가 노리고 들어서는 살기등등한 기세였다.
“싸 앙년들…….”
남자가 마루 분합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혔다.
여자는 황망하게 남자를 부축하며 앞질러 안방문을 열어준다. 그 행동이 입속의 혓바닥만큼 잽쌌다.
“이 쌍년들이 아비가 들어왔는데도 한 년도 안 나와? 엉.”
“제발. 제발 조용하세요! 아이들 모두 잠들었어요. 자, 이렇게 앉으세요, 제가 친지 올릴께요.”
“이거 놔. 쌍년, 자식쌔끼덜 어케 교육시켰길래 이 모양이야? 야, 이년들아, 애비 왔어.”
남자가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건넌방의 딸 셋이 쏜살같이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셋은 모두 잠옷차림이거나
내의 바람이었다.
아이들은 잘 훈련된 병사들 같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셋은 방문 앞에 나이순대로 나란히 기립했다. 표정들은 겁에 질려 굳어진 채.
“아무짝에도 쓰잘데 없는 년들, 또 한 년은 어디 갔어?”
다섯 살박이 막내가 남자발치의 이블 속에서 잔뜩 움츠리며 눈을 깜박거린다.
“야 이년아, 일어나. 네 년은 고추달렸냐? 자빠졌게.”
남자가 아이의 둥께를 발로 찼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트리며 발딱 일어나 세째딸 다음에 가서 선다. 여자의 몸뚱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불에 비스듬히 기대어, 나란히 기립시킨 겁먹은 딸들에게 눈알을 부라리는 남자를 여자는 조용히 웅시한다.
“이 쓰잘데 없는 년들아, 내일부턴 어느 년도 가게에 얼씬도 하지 말란 말이야. 가시나년들이 들락거리면 재수없어 장사 안된다 발이다, 알아들었냐?”
남자의 뜻밖의 명령에 아무도 얼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큰딸이 다부진 결심이라도 한 듯 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
“아버지 말씀 좀 삼가주세요. 우리가 쓰잘데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보셔야조. 우리가 사내 아이가 되지 못한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아버지는 기억하셔야 된다구요.”
“아니, 이년이 가게에 나오지 말라는데 무슨 딴소리야? 아니, 뭐가 어쨌다고?”
남자가 움직거렸다. 팔을 휘두를 모양이었다.
그러자 둘째딸이 여자를 흘끔 바라보곤 앞으로 나섰다.
“아버진 너무하세요. 왜 가게에 우리들을 못 나오게 하나요? 우리가 나가서 안될 일이 있어요? 오늘처럼…… 아버지 수유리아줌마란 여자와 입맞추는 것을 볼까봐 그래요?”
남자가 입을 쫙 벌렸다.
여자는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았다. 계속 남자를 응시하며, 낮에 부엌에 들어와 머뭇대던 들째딸의 의중이 무엇이었던가를 짐작한다.
“아니 뭐라구? 무슨 엉뚱한 수작이야? 이노무 가시나가, 아니 이게.”
둘째딸의 뺨에서 찰싹 소리가 터지는가 하자 남자의 주먹이 미친 듯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비호같이 내달아 남자의 몸뚱이를 얼싸안고 뒹굴었다.
“이 웬수야, 차라리 날 죽여라. 못 먹여, 못 입혀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데
무슨 낮짝으로 이렇게 자식까지 달달 볶냐.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아. 차라리 날 죽여, 죽여!”
아이들이 자그르르 울고 여자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오냐, 이 싸, 싸앙년. 죽, 죽여주마, 이 싸앙년!”
그러나 남자는 마구 내뱉는 독설만큼 팔다리를 휘두르지 못했다. 여자가 자못 결사적으로 남자의 양팔을 껴안아 조였고 큰딸 둘째딸이 합세하여 남자의 몸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광란한 듯 날쳤다.
남자는 붙들고 울며불머 애원하는 아이들에게 제 힘껏 발길질 주먹질을 하고 또 붙들리곤 했다.
“아버지, 아버지. 엄마 이거 놔, 엄마, 엄마.”
큰딸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둘째딸의 입귀에서도 피가 흘렀다. 다섯 살박이 막내딸이 또 발길에 체여 벽구석에 나뒹굴어지며 자지러졌다.
“이 쌍년들. 말짱 죽여부릴끼다.”
여자는 주먹세례를 받으면서도 남자의 시뻘건 눈에서 살기를 읽는다.
“너, 너희들 어서 피해라. 나, 나가라…….”
여자는 돌연히 머리의 피가 아래로 싹 빠져내리는 헛함과 함께 심한 현기증을 느낀다.
―안돼…… 안돼…… 내, 내가 힘을 잃으면…… 아, 아이들…… 아……하나님.
여자는 자신의 의식까지 첨차 마멸되어감올 느끼며 사력으로 안간힘을 다한다. 남자를 꺼이꺼이 부여잡는다.
그러나 여자는 끝내 남자의 몸뚱이에서 떨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서 왕왕대다가 잦아들었다.
칠흑 같은 망막속이 서서히 하얗게 바래어짐을 여자는 본다.
그러다가 여자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여자는 알지 못했다.
여자는 상체를 뱐쯤 일으켰다.
의식을 잃기 이전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침과 함께 또다시 심장이 스멀스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이 왔다.
환한 형광등 아래 펼쳐진 방안풍경은 한마디로 요지경 속이었다.
격렬한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들판의 시체들처럼 제각기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어 있는 아이들과 남자…… 큰딸과 둘째가 얼굴에 핏자국을 남긴 채 그녀를 간호하고 있었던 듯 여자 다리 옆에 웅크렸고, 세째딸의 어깨 위엔 남자의 한쪽다리가 얹혀져 있었다.
막내는 캐비닛 앞에서 혼자 잠들어 있었다.
―휴…… 하나님……
여자는 방바닥이 꺼질 듯한 긴 숨을 뿜어낸다.
언젠가처럼 잠시 졸도했던 그녀를 딸 둘이 열심히 주무르며 간호했음을 짐작한다.
그녀의 기절에 놀란 남자가 횡설수설 지절대며 슬그머니 횡포를 멈추었을 것이었다.
“덩, 덩, 덩.”
죽은 도시의 한복판에 흡사 악마의 괴성같은 시계불 소리가 세 번 터졌다.
여자는 다시한번 천천히 방안을 휘둘러본다.
아침까지 끝내 완성하리라던 초상화판이 한쪽벽 구석에 물구나무를 서 있고,
피를 닦은 듯한 횐 타올이 방문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막내가 어깨를 흔들며 추슬렀다. 미처 울음이 채 끝나지 않았는지 간간이 소리를 섞어 흐느끼기도 한다.
여자는 상체를 움직거려 세째딸의 어깨에 얹혀진 남자의 다리를 끌어낸다.
“으음…… 씨팔…… 싸앙년…….”
더러운 물건을 집듯 손끝으로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아채어 내동댕이치자, 그 서슬에 남자가 잠꼬대하듯 주절거렸다.
여자는 심층 밑바닥에 오래도록 압착되어 그 형태조차 변모되던 증오의 불씨가 느닷없이 원형 그대로 불쑥불쑥 불어남을 느낀다. 지독한 악취를 물씬물씬 풍기며 걷잡을 새 없이 그 덩치가 커짐을 느낀다.
여자는 내버려둔다. 이미 그것의 덩치는 자제(白制)의 선을 넘쳐 범람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여자의 충혈된 눈이 활활 타올랐다. 저주와 원망과 혐오가 범벅이 되어 하나
의 결정체를 이룬 듯, 여자의 안광은 투명한 얼음살처럼 번뜩이기도 했다.
여자의 머릿속과 가슴은 파멸 직전의 상태로 들끓었다.
여자는 몽유병 환자처럼 시선을 한 곳에 집중시킨 채 일어섰다. 비칠거렸다.
한 발짝을 옮겨, 남자의 발치에 나뒹굴어진 넥타이를 손아귀에 움켜쥔다.
그리고 남자를 내려다본다.
남자가 움직거렸다.
여자가 홈칠 놀란다.
여자는, 남자의 꿈틀거림이 그녀의 혼을 빼고 살속의 피를 빨아내려 또아리
치고 있는 독사의 몸짓이라 생각한다.
독니빨에 찍혀 삼켜지기 전에 탄탄한 마직 넥타이로 삼각 대가리를 졸라매어버리면, 졸라매어버리면 그녀와 아이들이 삼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몸뚱이에서 이십 년을 끓다 식다 녹아든 내장들이 다시 활활 불붙는 중오의 불덩어리 속에 더 녹아나지 않으려면, 불길이 어딘가로 빠져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방이 밀폐된, 꽉 막힌 벽속에서 스무 해를 자글자글 끓고 볶여지는 불안, 공포, 증오, 체념, 자기혐오 등 이런 범벅된 불덩어리들이 외부로 터쳐지지 않
는 한 여자는 더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을 달구고…… 피를 말리고…… 어린 가슴들의 선혈조차 빨아내
는…… 독사, 독사……너를……
여자가 남자의 목에 넥타이를 감는다. 느슨하지 않게 두 번 돌린다.
그리고 넥타이의 끝을 양손에 돌돌 휘감아쥐었다.
여자가 눈을 감았다.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가만히 있었다.
부스스한 퍼머머리칼을 경련하듯 파르르 흔들며 다시 전율한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여자는 휘청대며 넥타이 양끝을 손아귀에서 힘없이 떨군다.
단 일초도 손아귀에 힘을 넣지 못하고, 뒤로 벌렁 자빠졌다.
“으어엉, 우아아, 우아아!”
여자가 느닷없이 울부짖었다.
양팔을 허공에 들고 주먹을 불끈 쥐어 힘을 주며 괴성을 지루기 시작했다.
음흉한 동물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마른하늘에 날벼락 때리는 깨지는 소리 같기도 한 기성을 여자는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었다.
“아으으, 우아아, 우아아!”
그 기성 사이로 자글자글 끓는 열기가 조금씩 묻어나가고 있음을 여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독사를 살해하지 못하는 뼈를 후비는 울분을, 폭사하고픈 자기혐오를 견더내지 못할 뿐이었다.
“아으으으, 아으으…….”
몸뚱이를 오그려붙이고 파들파들 악을 쓰는 여자의 핏빛 괴성에, 새벽은
감짝깜짝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고 있었다.
-끝-
2016년 3월 2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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