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평화를 바랐던 피카소(1881~1973)
♬ 카치니의 아베마리아/이네싸 갈란테
프랑스 남동부의 지중해 지역 두 도시 앙티브(Antibes)와 발로리(Vallauris)에는 각각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이 두 미술관은 특히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인연을 지니고 있는데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과 <전쟁과 평화>가 이곳 발로리에서 그려졌고 특히 <전쟁과 평화>는 이곳 발로리예배당 벽화로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도에 이 그림을 그렸다. 1950년에 발생한 '신천 학살' 혹은 '신천군 사건' 소식을 듣고 나서 그린 작품이다.
신천 학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의 1/4에 달하는 35,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신천 학살이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자 당시 서구 사회는 경악했다. 피카소가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그렸던 것처럼, 신천 학살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평화주의자였으며 전쟁을 혐오하였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발로리에서 그렸으나 현재는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오랫동안 피카소의 그림 속에 갇혀 있던 신천군 사건이 한국에서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2001년 소설가 황석영이 신천군 사건을 소재로 한 '손님'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이 소설에서 신천군 사건은 기독교 우파와 좌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벌어진 일로 묘사됐다. 지난 2006년 한겨레신문이 인용한 이북5도민회 산하 신천군민회의 '10·13 동지회’는 신천군 사건, 혹은 신천 학살은 '신천군내 반공청년들'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동지회 회원 중 한 명은 "미군이 오면 빨갱이를 살려둘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에 나선 것"이라고 증언했다.
신천 학살을 주동한 반공청년단은 신천군 사건보다 먼저 벌어졌던 제주 4.3 사건에서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서북청년단'과도 흡사하다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단체들이 모여서 1946년 11월에 창단한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들은 씨를 말려야한다며 제주도로 들어가 학살극을 벌였다. 서북청년단 회원이자 이승만의 친위대였던 안두희는 1949년도에 백범 김구를 살해했다.
이승만 정부를 대신해 손에 피를 묻히고 날뛴 그들은 한국의 나치친위대였다. 서북청년단은 한국에서 재현된 독일의 나치 친위대라 할 정도로 부끄럽고 끔찍하며 창피한 역사다. 2014년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목표로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하면서 사회적 우려를 높이기도 했다. 단체는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이 의거’라고 주장하는 글을 극우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일베)에 올려 사회적 비난을 받은 데 이어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를 위한 노란 리본을 철거하려다가 저지당하기도 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이 그림은 프랑스 남부 발로리 라는 마을 예배당 입구에 있는 그림.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에는 도자기 작업으로 유명한 도시 발로리에서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제작했다. 항상 전쟁과 폭력에 반대한 피카소는 발로리에서 작업하는 동안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 당시 한국전쟁이 막 발발한 때라 기왕이면 예배당을 역사적인 '평화의 전당'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피카소는 12세기에 건축돼 1791년 프랑스 혁명 이후 사용이 중지된 발로리 성의 예배당에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피카소의 대작 <전쟁과 평화>(La Guerre et La Paix)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 국립박물관'으로 불리는 이 예배당은 발로리 도자기 박물관 및 피카소도자기박물관과 함께 위치해 있다. 입구로 들어가면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예배당 깊숙이 들어가면 왼쪽의 '전쟁'과 오른쪽의 '평화', 그리고 원래의 예배당 문을 막아버리고 '세계의 4부분'이 전시되어 있다. 검정, 노랑, 빨강, 그리고 하얀 인류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떠받치고 있는 이 패널(Panel)은 '전쟁'과 '평화'를 잇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전쟁'의 하얀 방패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프랑수아 질로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그려져 있고 '평화'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박물관의 안내 팸플릿에는 "이 시기의 피카소는 특별히 한국의 평화를 염원했다"고 적혀있다고 한다.
평화
전쟁 3년이란 긴 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완성된 이 작품은 1954년 이 예배당에 영구적으로 설치되었지만 한국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휴전상태에 있다. 이 조그만 한반도에 180만 명이라는 세계에 유례없는 군사밀도로 60년 동안이나 산업 인력을 낭비하고 있는 어리석은 민족에 대해서 지하에 있는 피카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피카소 찬양하면 반공법 위반 1969년 6월 9일자 <경향신문>
한 장의 옛 신문 사진이 요즈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회자되고 있다. <신문 내용>
서울지검공안부(최대현 부장검사 김종건 검사)는 9일 상오 불란서 화가 「피카소」를 찬양하거나 그의 이름을 광고 등에 이용하는 행위는 반공법4조1항 (국외공산계열의 동조찬양, 고무)위반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차로 크레온 제조업자인 삼중화학 대표 박진원씨(45)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또한 동사제품「피카소·크레파스」등의 광고를 금지시키고 판매중인 상품의「피카소」이름을 지우도록 지시했다. 검찰에 의하면 삼중화학은 68년 10월부터 크레파스, 포스터 칼러 등을 제조, 「피카소」라는 상표를 붙여 팔아왔다.
검찰에 의하면「피카소」는 좌익화가로서 1944년 국제공산당에 입당, 소련에서「레닌」평화상을 받았으며 한국동란때는「조선의 학살 」 「전쟁과 평화」 등 공산당을 선전하는 작품 활동을 해왔다. 검찰은 이밖에도 코메디언 곽규석씨가 사회를 본 모 민간 TV쇼 프로에서 「피카소」라는 별명의 이름을 등장시킨 제작자들을 조사하는 한편 곽씨가 좋은 그림을 보고「피카소」그림같이 훌륭하다고 말한 이면도 캐고 있다.
곽규석씨는 조사를 받고 훈방되었지만,
삼중화학은 자사의 크레파스 이름을 '피카소'에서 '피닉스'로 바꿔야 했다.
이런 만화같은 일을 벌였던 검찰도 낯 뜨거웠던지 '피카소의 예술을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논하는 것은 괜찮으나, 피카소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찬양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고의가 인정될 때는 반공법 위반이 된다'고 설명했다는 것.
피카소를 좋아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던 시절, 그때의 기사가 지금 누리꾼들 사이에 다시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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