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방침은 임시정부의 기본 시책을 말하는 것인데 행정부에서 계획한 것을 의정원(議政院)에서 기조연설(基調演說) 형식으로 발표한 것이 네번 있었고, 시정 방침을 짜임새 있게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 하나 있었다. 먼저 의정원에서 기조연설 형식으로 발표한 것을 보기로 하겠는데 이것은 임시정부 초기의 시책 변화와 독립운동의 변천 과정(過程)을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
처음의 것은 1919년 5월 11일 국무원 위원 조완구(趙琓九)가 발표한 것이고1)두번째의 것은 같은 해 7월 8일 당시 내무총장(국무총리 대리 겸직) 안창호(安昌浩)가 발표한 것,2)세번째의 것은 1920년 3월 2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揮)가 발표한 것,3)네 번째의 것은 1922년 3월 2일 당시 국무총리(서리) 신규식(申圭植)이 발표한 것이다.4)
모두 의정원에서 발표한 것인데 다음 페이지의 표와 같이 비교해 본다.
여기의 비교표를 보면 우선 1919년에 발표한 것은 어느 것이나 당면한 문제에 국한 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1919년의 것이 그러한 데에 비하여 1920년의 것은 보다 광범한 분야에 걸쳐서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임시정부가 기대했던 것처럼 한국의 독립이 인정받지 못하여 독립운동을 장기적으로 수행해야 했기
1. 인구세의 징수. 2. 애국금의 모금 3. 공채의 발행 4. 독립운동 기간에는 예산과 결산을 행정부에 일임함.
1. 인구세 징수의 강화.
노동 (勞動)
1. 노동사무의 정치
사법 (司法)
1. 보통법원·특별법원의 설치. 2. 민·형사 관계의 법률 편찬. 3. 사법제도의 조 사.
1. 임시 심판처의 설치.
때문에 취해진 조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동휘가 발표한 시정 방침의 내용은 국무원에서 검토한 것을 의정원에서 발표하였는데5)그 후에 다시 정리하고 다듬어서 임시정부 활동의 기본 지침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1922년에 발표한 것은 1920년에 발표한 시정방침에 의하여 임시정부가 활동한 후 2년 뒤의 것이니 일단 반성해 본 것이기도 하며, 또 당시의 형편에 적합한 새로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① 내정 및 교통
1919년 조완구와 안창호가 연설한 내용에서는 별반 시책이 없던 것으로 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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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창호 일기, 1920년 2월 26일. ≪안도산전서≫ p.659∼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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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되는 것은 인구조사와 교통기관의 설치 문제이다.
그런데 1920년의 시정방침에는 국내외 동포와의 유기적 연락을 계획하고 있으며 독립운동에 대한 통할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외의 교통·통신 기관의 설치와 독립운동에 대한 통할은 이미 1919년에 실시하고 있기는 했지만 1920년 시정 방침에서 강조되고 있었던 점은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따른 조처였을 것이다. 그것은 국내외 국민의 행동 통일을 말하고 있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임시정부 내정의 가장 중심이 됐던 것은 독립운동의 통할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22년의 것을 보면 독립운동의 통일과 인재(人才)를 집중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1920년 발표할 때 이미 지적된 통일과 통할이라는 문제가 원만히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완전독립이니 절대독립이니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당시에 한국의 자치(自治)와 위임통치(委任統治) 문제가 독립운동 방략(方略)을 논의하는 데 크게 부각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② 외교
1919년의 것은 거의 외교 시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하여 임시정부가 얼마나 큰 기대를 가졌던가 하는 점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런데 1920년의 시정방침에서는 강화회의나 국제연맹이 아니라 세계 열강 혹은 신흥국가를 상대하고 있으니 이것 역시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따른 조처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22년의 것에는 국제연맹도 열강도 신흥국가도 아니고 세계 일반에 대하여 외교적 유대 강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한 실망에 이어 태평양회의(1921. 11. 11~1922. 2. 6)에 대하여 실망한 후였기 때문일 것이다.
③ 군사
1919년에는 독립전쟁에 대하여 각오 혹은 노력이라는 대단히 의아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강화회의를 비롯한 외교 활동에 치중했던 탓이겠다. 그러나 1920년의 시정 방침에서는 독립전쟁에 대하여 철저히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역시 내정·외교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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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도 1920년의 것을 거의 되풀이하고 있는데 그것은 1920년의 계획이 더욱 진전해야만 됐기 때문일 것이다.
④ 교육 및 문화
1919년의 계획은 교육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었는데 그것은 단기적 계획이었기 때문 일 것이고 문화에서도 외교적 선전 자료로서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편찬한다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1920년과 1922년의 것은 교육에 대하여 초등 교육은 의무 교육으로, 고등 교육은 외국 유학을 통해서 실시하기로 계획하고 있다. 이것도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따른 계획으로서 민족적 역량을 기르기 위한, 즉 실력 배양을 도모하고 있었던 계획이겠다.
⑤ 재정
임시정부의 재정은 거의 재원 확보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재원의 주축은 인구세와 애국금에 두고 있으며 1920년부터 공채(公債) 발행을 계획하고 있다. 재원 확보의 여부는 독립운동의 성공 여부와 직결되었으므로 임시정부로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922년에는 인구세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애국금과 공채 발행문제는 어떠한 한계점에 다달아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1920년 시정 방침에서 예산과 결산은 독립운동 중에 행정부가 전담한다고 말한 것은 의정원에서 토의하면 독립운동의 비밀이 누설될 위험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⑥ 사법
1919년의 시정 방침에서 사법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파리강화회의 등 1차세계대전의 사후 처리에서 한국 문제가 어떻게 처리될는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920년부터는 임시정부가 장기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니,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법 행위에 대하여 계획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각종 법원의 설치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임시정부가 별도로 사법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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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1922년에는 임시 심판처라고 하는 특별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추측 된다.
끝으로 노동에 대한 항목이 있는데 이 항목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1919년 9월 임시정부의 개조(통합)에 의하여 소위 한성정부의 행정부서와 같이 조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20년 이동휘의 시정 방침 연설에서 노동사무는 중지한다고 밝혀졌으니 독립운동 기간 중에 당연한 조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임시정부의 시정 방침은 1919년에는 당면 문제에 국한하여 단기적 계획으로 나타나 있고 1920년에는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광범한 계획이 마련되어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20년에 그와 같이 장기성 있는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1919년 9월의 헌법이 그해 4월의 헌법에 비하여 보다 정돈된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22년의 시정 방침은 임시정부의 기본 시책에는 별로 변화한 점이 없으며, 단지 몇 가지 현실적 필요에 따라 변경된 점이 있을 뿐이다.
앞에서 말한 임시정부의 시정 방침은 모두 행정부가 의정원에서 행하는 기조연설 형식으로 발표된 것이다. 그런데 1920년 3월 2일 국무총리 이동휘가 연설한 시정방침은 곧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임시정부 기본 방침으로 확정되었는데,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으나 의정원에서 발표한 것보다 체제가 정리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시정 방향 또는 독립운동의 방략을 이해하는 데 한층 도움이 되는 것이다.
시정 방침이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활동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은 조선총독부의 기록과 같이6)이상(理想)에 그친 것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계획이었으므로 이상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 그 시정 방침을 소개해 두니 검토해 보면 알 일이지만 극히 이상적이었던 것은 사법 활동의 대부분의 계획과 화폐 제조 계획뿐이었고 그 외에는 거의 없다. 단지 재정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비행기 사용, 항해 사업, 무선 전신의 시설, 기차·선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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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총독부 경무국 ≪상해 재주(在住) 불령 선인(不逞鐥人)의 동향≫(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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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양곡의 준비와 자금의 적립, 실업 및 금융기관의 설치 등이 뜻대로 안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은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을 통해서 미진했다고 하면 후기에 이르러 거의 원만하게 실현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정방침]
내정
제1항 통일 집중
내외에 있는 국민을 연락 통일하여 중앙에 권력을 집중하고 아(我) 민족 전체로 하여금 일치 행동케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침을 실시.
① 연통제 실시
국내에는 각 도 각 군에 연통제를 실시함.
② 민단제 실시
국외 각지에는 거류민단제를 실시함.
③ 각 단체 연락
내외의 각종 단체를 명세하게 조사하여 정부의 주의(主義) 범위 내에서 행동시킨다.
④ 인물 연락
내외 각지에 있는 민간에서 유력한 인물에 정부의 의(薏)를 양해시키고 피등(彼等)의 의사를 수집합.
⑤ 인물 집중
각지에서 명망이 가장 높은 인원을 정부 소재지에 합동시켜 자순 기관을 설치하고 군국대사를 협의 진행케 함.
⑥ 선전원 파송
선전기관을 분치하여 선전 방법을 강구하고 내외 각지에 선전원을 분파하여 각지 인민으로 하여금 정부의 주의에 일치케 함.
⑦ 반도처치(反徒處置)
통일을 장애하는 부분이 생길 시는 덕의로써 권유하고 그래도 준수하지 않을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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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此)를 성토하여 국민에 취향을 명시함.
⑧ 시찰 파견
국내·국외에 수시 시찰원을 파견하여 연통제 급(及) 거류민단을 시찰 지도함.
⑨ 기관보 간행
신문·잡지를 간행하여 내외 각지에 주의를 선전 보급케 함.
제2항 대적(對敵)
개전의 준비 완성까지는 우선 헌재로서는 일본 통치를 절대 거절하고 완전 독립의 의 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을 실시함.
① 시위운동
필요의 시기에 국내 각지에 시위운동을 계속케 함.
② 납세 거절
일반 국민으로 하여금 일본 총독에게 일체 세금을 불납케 함.
③ 소송 거절
일반 국민으로 하여금 일본총독부 소속 관청에 소송 급 기타 교섭을 단절케 함.
④ 관공리 퇴직
일본총독부 소속의 한인 관공리로 하여금 일체 퇴직케 함.
⑤ 일본 연호·기장폐지(欺掌廢止)
일반 인민으로 하여금 일본의 연호와 기장 사용을 폐지케 함.
⑥ 일화배척장려(日貨排斥獎勵)
일반 국민에게 일화배척을 장려함.
⑦ 일인 법령 거절
이상 7개조 이외 혹 일본의 법령을 거절하는 등 사(事)의 시위에 적합한 행동을 탐구 실시함.
⑧ 임시작탄사용(臨時炸彈使用)
필요로 인정할 시기에는 작탄 등으로 적괴 급 창귀(倀鬼)를 격살(擊殺)하고 혹은 기(其) 영조물(營造物)을 파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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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국내 감사대(敢死隊) 조직
국내에 모험심 있는 청년으로 감사대를 조직하여 일(一)은 국민에게 이상 제반 행위를 고취하고, 이(二)는 모든 일에 선봉이 되게 함.
⑩ 국외 감사대 조직
국외에 있는 청년으로 감사대를 편성하고 내지(內地)에 잠파(潛波)하여 전절 동양(同樣)의 행동을 취하게 함.
⑪ 국내 각 교파·보부상 기타 각 단체를 사용하여 이상 행사에 주동이 되게 함.
⑫ 비행기 사용
비행기로서 국내 각지에 윤회하여 정부의 명령을 널리 보급하고 인민의 사상을 격발시킴.
제3항 교통
국내·국외 가 기관과 민간의 교통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을 실시함.
① 통신 기관 급 체전인(遞傳人)
각지에 통신 기관을 치(置)하고 체전인을 분치하여 각종 서류를 전달함.
② 항해 사업 시설
기선 급 범선으로 항해업을 시설하여 내외에 직접 왕래를 괸리하게 함.
③ 무선 전신·전서구(傳書鳩) 등의 시설
필요한 지점에 무선 전신·전서구 등을 비밀히 설치하여 통신을 민속하게 함.
④ 내지정황탐사(內地情況探査)
통신기관·체전인으로 하여금 탐정의 임(任)을 겸대시켜 각지 정황을 탐사케 함.
⑤ 기차·선박 고용
국내의 유지 청년으로 하여금 기차 급 선박의 고용으로 하여 비밀 통신을 담당케 함.
제4항 교육
목하 독립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교육에 진력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점차 실행함.
① 교과서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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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를 편찬하여 아동 교육에 구급(具給)함.
② 의무 교육 실시
각지 가능한 지점에 학교 설립을 장려하고 의무교육제를 실시케 함.
③ 관리 양성
임시관리양성소를 분치하고 정무를 담당할 인재를 준비함.
④ 긴요 사용에 관한 기술의 습득을 위하여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함.
⑤ 서적 간행
직접 혹은 간접으로 위인·열사의 전기와 모험 급 애국적 소설 등을 간행하여 국민의 충렬한 지기를 조장케 함.
군사
제5항 개전 준비
독립운동의 최후 수단인 전쟁을 대대적으로 개시하여 규율적으로 진행하고 최후 승리를 얻을 때까지 지구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준비의 방법을 실행함.
① 군사 적재 소집
군사상 수양과 경험 있는 인물을 조사 소집하고 군사 회의를 열어 작전 계획을 준비함과 아울러 각종 군사 직무를 분담 복무케 함.
② 국외의용병(國外義勇兵) 모집 훈련
아령(俄領)·중령(中領) 각지에 십만 명 이상의 의용병 지원자를 모집하여 다음과 같은 결속 훈련을 함.
가) 대오편성(隊伍編成)
응모한 병사로서 대오를 편성하여 장관이 이를 영독(獰毒) 지휘함.
나) 병사의 직무급 야학(夜學)
응모한 병사로서 각기 직업을 평시보다 일층 면려(勉勵)하게 하고 각지에 야학을 개설하여 일반 병사로 하여금 의무·취학케 함.
다) 군인의 학과
각지 야학교에서는 군인의 상식과 군인의 정신을 계몽하여 군안의 질서와 기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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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등에 관하여 교수하고 가능한 지점에는 병식 체조를 실시함.
③ 사법부 분치
중․아령 각 구역에 사법부를 분치하여 응모한 병사를 통솔하고 군사교육을 감독케 함.
④ 군사 사단(私團) 조사
이미 인민의 자의로서 성립한 군사적 기관을 조사하여 군무에 예속케 함.
⑤ 국민 의용병
국내 각지의 지원 의용병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고 각 지방의 요새에 은휴(隱休)케 함.
⑥ 사관학교 설립
중․아령 급 정부 소재지에 가능한 방편을 취하여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을 양성케 함.
⑦ 비행기대 편성
미국에 가감(可堪)할 청년을 선발하여 비행대를 조직하고 비행기 제조와 비행 전술을 학습케 함.
⑧ 작탄대 편성
내외체 모험 청년을 선발하여 작탄대를 편성하고 자탄 제조 급 작탄 사용술을 학습케 함.
⑨ 외국사관학교 유학
중국 급 구미 각국에 교섭하여 무관학생을 파견함.
⑩ 전시 긴요 기술 학습
총명한 청년을 선발하여 포창술(砲槍術)·화차 기관수 등 그 외 전시에 긴요한 기술을 학습케 함.
⑪ 군물(軍物) 수입 교섭
미국·노국(露國) 기타 외국에 교섭하여 군물 수입을 준비함.
⑫ 준비 양곡
국내 급 중령 주요 지점에 무역상의 명의로서 양곡을 준비하여 전시에 공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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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군사 선전원 파견
군사선전대를 치하여 선전 방법을 강구하고 각지에 선전원을 파견하여 전투적 정신을 고취하고 부분적 무통일 무조직의 망동을 발하지 않도록 함.
⑭ 군법·군규 제정(軍規制定)
군법과 군규를 제정하여 군대의 질서 급 규율을 엄하게 함.
외교
제6항 세계에 대한 선전
세계 열국으로 하여금 대한의 독립이 세계 평화 유지상 필요함을 깨닫게 하여 아(我) 민국에 동정케 하도록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선전을 실행함.
① 선전 사무 확장
선전부를 확장하여 일본의 침략주의가 세계 평화의 화근이 되는 이유와 한국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에 관한 사실과 한국의 독립이 세계 평화에 필요하고 한족의 자격이 독립 국민으로서 충분함을 실증하는 등의 자료를 수집하여 민활하게 선전함.
② 선전원 파견
동아(東亞) 급 구미 각국에 선전원을 파견하고 혹은 연설에, 도서에, 혹은 제국의 신문·잡지에 저작가·연설가 등을 이용하여 주의를 선전함.
③ 정당·교회 급 각 단체 이용
동아 급 구미 자국의 정당·교회 급 기타 단체를 이용하여 여론을 환기시킴.
④ 원동(遠東) 거류 미인(美人) 사용
원동에 있는 자국 신문 급 저작가·선교사 등과 의사를 소통하여 선전을 방조케 함.
⑤ 한·중 친목회를 조직
중국에 한·중 친목회 혹은 타의 명의로서 회를 조직하여 선전 급 기타의 사항에 활동하고 타 각국에는 가능한 방편에 따라 차를 실행함.
제7항 조사
선전의 자료와 외교의 진행에 공용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서 내외의 조사를 실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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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내지 급 일본에 관한 조사원을 밀파하여 독립운동 진행의 정황 급 일본의 이에 대한 의사 급 요행을 조사케 함.
② 국제문제·열국정책·세계사조·심사급 관계 신문·잡지 수집, 세계 각국의 신문·잡지에 게재된 한·일 관계에 대한 논평, 열강의 정책 급 국제 문제, 세계 사조 등에 관한 사항을 수집하여 심사함.
③ 각국 정계 대아(對我) 의사 탐사(探査)
세계 각국 정계 인물의 한국 독립에 대한 의사 여하를 탐사함.
④ 일본에 밀탐을 파견하여 관료와 군벌의 대륙 급 태평양 정책 급 군사 계획의 여하를 탐사케 함.
제8항 교섭
아 민국에 특수한 관계가 유(有)한 제국과 상호 제휴하고 타 열국에도 동정을 얻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교섭을 실행함.
① 중국 외교단 편성
중국 외교에 적당한 인원을 선발하여 중국 외교단을 편성하고 중국 남북 정부 급 각 성장(各省長)급 독군(督軍)과 교섭하여 중국 지방으로 하여금 아 민국의 정부 행동 급 군사 준비에 편의를 얻도록 기도(企圖)하고 중국사관학교에 아국 청년을 입학시켜 아민국[약 10여자 불명(十餘字不明)]과 중국의 연합 행동을 취하도록 요구함.
② 노국에 교섭원 파견
노국 외교에 적당한 인원을 선발하여 노국 내정을 주밀히 시찰하고 유력한 기관에 교섭하여 군기 급 군수품의 공급과 우리 민국이 일본과 개전의 시에 후원하도록 요구함.
③ 몽고에 교섭원 파견
상당한 인원을 몽고에 파견하여 아 민국이 일본과 개전의 시 원조케 함.
④ 일·미전쟁 촉진 급 군사 원조 요구
미국에 파견한 외교원으로 하여금 미국과 교섭시켜 미·일전쟁을 촉진하고 아 민국에 대하여 군자·군기 급 군수품의 대여를 요구함.
⑤ 외국 차관 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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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 있는 대자본가에 교섭하여 차관을 얻도록 함.
⑥ 일본을 꺼리는 제국에 특별 교섭, 오스트리아 혹은 기타 일본의 무력주의를 규탄하는 나라에 교섭하여 한국 개전의 시 한국의 후원이 되게 함.
⑦ 독일에 교섭원 파견
독일에 상당한 인원을 파견하여 군사상 기술자를 고입(雇入)하고 군기 급 군수품을 차입케 함.
⑧ 영·불·이(伊)에 교섭
영·불·이 3국에 대하여 한·일 전쟁의 시 아 민족에 동정이 있도록 교섭함.
⑨ 신흥약소국과 교섭
새로 흥하는 약소국 등에 교섭하여 인재와 군기 급 군수품을 아 민국에 원조케 함.
⑩ 중·일 주재 외교관에 교섭
중국 급 일본에 주재한 각국 외교관과 교섭하여 아 민국에 동정이 있게 함.
⑪ 국제연맹에 독립 승인 급 참가 요구
국제연맹회에 대하여 대사를 파견하여 독립 승인을 요구하고 아울러 한국이 국제연맹에 참가하게 되도록 요구함.
재정
제9항 수입
금회 대업의 제반 경비는 금전이 있은 후 성공하게 되므로 상당한 금력을 준비하기 위하여 다음의 방법으로 재정을 수입함.
① 인구세 징수
국내·국외 일반 인민에 인구세를 법률에 의하여 징수하고 연통부와 거류민단으로 하여금 이를 행하게 함.
② 애국금 의연(義捐) 수합(收合)
국민의 지원에 의하여 납부한 애국금을 수합하고 유지의 외국으로부터 의조(義助)하는 것을 수합하는 것도 가함.
③ 공채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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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국인에게 공채권을 발매하여 다수의 재정을 수입키 위하여 다음의 방법에 의함.
가) 재산 조사
연통부 급 거류민단으로 하여금 본국 인민의 소유 재산을 명세하게 조사시킴.
나) 재산 등급에 의한 공채 발매
일반 인민의 소유 재산 등급에 의하여 다음의 비율로서 공채권을 매수케 함을 득함.
5천원 이상 1만원 소유자는 40분의 1, 1만원 이상 5만원 소유자는 30분의 1, 5만원 이상 십 만원 소유자는 20분의 1, 십 만원 이상 5십 만원 소유자는 10분의 1, 5십 만원 이상 1백 만원 소유자는 5분의 1, 4천원 이하 자는 수의(隨意)로 함.
④ 공채 난매(亂賣) 불허
공채권을 난매하는 일이 없이 연통부 급 거류민단으로 하여금 이상 3절의 조례에 의하여 발매케 함. 단, 외국인에는 차한(此限)에 부재함.
⑤ 공채 발매인 상여
공채를 발매할 인원에 대하여는 수입액의 10분의 1 이내를 상여함.
⑥ 임시소득세 납금
일반 국민으로 하여금 각기 소득에 비례하여 매월 혹은 매년에 납금케 하고 지주급 영업자는 소득의 30분의 1 이내, 노동자 급 소작인은 50분의 1 이내에 정함을 득함. 단, 미령(美領) 혹은 기타 노동 활동이 풍부한 지방에서는 20분의 1 혹은 30분이 1의 내에서 행함을 득함.
⑦ 외국 차관
1억원 이하의 범위로서 외국 자본가 혹은 정부로부터 차관함을 득함.
⑥ 실업급 금융기관 설치
국내에서 수합한 재정을 이전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본국·상해 간에 실업기관을 별설(別設)하고 금융기관을 점차 실시함.
제10항 예산
재정의 수입 급 지출에 조정의 예산이 없으면 재정은 그 궤도를 실(失)하고 사업을 성취하지 못한다. 이를 위하여 예산을 편성하고 다음과 같은 조건에 주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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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예산·결산 정부 전임
의정원에 요구하여 독립운동 기간에는 예산 급 결산을 정부에 전임케 함.
② 매월 지출 조정
총예산에 의하여 매월의 지출을 조정하고 수입액이 예산액에 미치지 못할 시는 차의 비례에 따라 지출액을 감축함.
제11항 적립
적(敵)의 장애 기타의 관계로서 재정 수입의 도(途)가 단절하면 정부를 유지하지 못하고 대업의 진행이 중단된다. 이에 비(備)하기 위하여 정부 존폐(存廢)에 관한 이외에는 절대로 이를 사용하지 못함.
제12항 화폐 제조
척지(尺地)라도 광복한 시는 민국의 정화(正貨)를 통용케 할 필요가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금일 이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타일 갈(渴)에 임하여 정(井)을 파는 한탄을 면하지 못하므로 지금부터 우선 지폐 1억원 이상 제조하려 함.
사법
제13항 사법 실시
독립운동 진행 중 질서 유지 급 광복을 달성한 후 사법 행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행함.
① 보통 법원 간단 구성
보통 법원을 간단히 구성하고 급(級)을 2로 분함.
② 특별 법원을 간단히 구성하여 제14항 제2조에 기재한 제죄(諸罪)를 심판함.
③ 임시 감옥 설치
임시 감옥을 설치함.
④ 민·형사 법률 편찬
민사·형사에 관한 간략한 법률을 편찬함.
⑤ 세계 사법 제도 조사 참작
세계 각국의 사법 제도를 조사 참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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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항 상벌
광복 사업에 대한 충의를 장려하고 반도를 징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포상과 징벌을 시행함.
① 근로자 포상
국민간의 공채 응모 기타 기부 등으로 다수의 금전을 정부에 납입한 자 급 광복사업에 훈로(勳勞)가 특히 현저한 자를 조사하여 기념장 혹은 포상장으로 이를 상함.
② 반도 징벌
적탐으로서 죄악이 현저한 자 급 동화책(同化策)의 수괴인 자·국가의 명령을 절대 복종하지 않는자·안신(安身)을 위하여 적국에 이거(移去)한 재산가 급 절대 독립 이 외의 행위 있는 자를 심사하여 형벌을 시함.
제2절 국내 독립운동의 통할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던 독립운동을 통할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러기 위하여 국내에는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하였고 해외의 동포 사회에는 거류민단(居留民團) 혹은 그에 준한 기구를 설치하여 통할하였다. 그리고 통할의 성과를 올리기 위하여 조사원(調査員)·선전원(宣傳員)·특파원(特派員)을 보내서 민심을 임시정부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임시정부의 내정(內政)에 속한 것으로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실시하였으며 내무총장이 관할한 것이다.
1. 연통제의 실시
(1) 연통부의 설치와 수난
연통제는 국내에 실시된 지방 행정제도로서 임시정부의 국내에 대한 기본 조직이었다. 실제는 정보의 통신과 재정 자금을 모집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것은 임시정부 초창기의 내무총장이던 안창호(安昌浩)가 1919년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한 직후부터 추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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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그해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
주로 국내의 교통 통신과 행정조직으로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던 남만주 지방에도 설치되어, 순전한 통신 기관이었던 교통국과 더불어 임시정부의 하부 조직으로 독립운동 전개의 기반이 되었다.
1919년 7월 10일 연통제 실시가 공포된 후, 10월 17일 그의 관제(官制)가 발표되어 11월 30일에는 서울에 임시 총판부의 설치를 보면서 국내에 그 조직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역시 그해 12월 1일에는 교령(敎令) 제2호로서 연통제가 개정 공포되었고 12월 8일에는 연통제 활동을 구체화하는 ‘도(道) 사무 분장 규정’이 내무부 부령 제2호로 공포되었다.1)
그러한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던 동안에 국내에서는 연통부의 각급 기관이 설치되고 있었다. 서울에 총판(總瓣), 도에는 독판(督瓣), 군과 부에는 군감(郡監)과 부장(府長), 면에는 면감(面監)이 연통부의 일을 맡았던 것이다.2)
그런데 연통부의 설치는 평안도·황해도·함경도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경기도·충청도에는 일부 지방 밖에 그 실현을 보지 못하였고 강원도·경상도·전라도의 경우는 거의 설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통부가 설치되지 못한 지방에서는 그것과 거의 비슷한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서 연통부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강원도의 전역과 충청도 및 전라도 일부 지역에는 대한독립애국단이 조직되어 연통부 활동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경기도와 그 외 경상·충청·전라도에서 청년외교단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 혹은 대한적십자회의 활동이 연통부의 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본편 제2장 제1절 참조)
그리고 연통제는 당초 국내에만 설치하고 해외 동포 사회에는 거류민단이나 그에 준한 조직으로서 독립운동을 통할하려고 했는데 1920년 10월에는 만주 지방에도 실시하였다. 그것은 남만주 지방에 동포가 많이 살았으므로 국내와 같은 방법으로 통할할 계획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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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민족운동연감≫(해방 후 프린트 본) 7월 10일~12월 8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III p.44 및 p.35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임정편 II. p.47.
2) 앞의 주석의 각 자료에 당시 13도 중 황해도가 누락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자료의 오식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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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시하자마자 일본군의 만주 출병(出兵)으로 인하여 뜻대로 안 되었다. 원래 해외 동포 사회에 대하여 연통제를 실시하려고 했던 곳은 만주보다 시베리아가 앞선다. 시베리아 동포 사회에 대한 연통제 실시 문제는 1920년 3월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에서 그 지방 총판으로 임명하려던 최재형(崔在亨)이 피살되어 그만 연통부 설치가 좌절되었던 것이다.3)
이 무렵에 만주의 동포 사회에 대한 통할 기구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국민회(國民會)가 북간도 지방을, 한족회(韓族會)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서간도를 맡고 있었는데 임시정부는 이것을 다시 연통부 조직으로 개편하려고 했던 것 같다.
만주지방에서 연통제가 실시된 것은 10월부터였지만 이것이 추진된 것은 그해 여름부터였다.
임시정부가 만주, 특히 북간도지방에 연통부를 설치하려고 했던 이유는 일반적으로 동포가 많아 국내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1919년 말에 함경북도 연통부 조직이 대 수난을 겪은 후, 국내 연락의 근거지를 만들자는 이유가 컸던 것 같다. 평안도 방면은 안동교통국을 통하여 쉽게 연락을 취할 수 있었는데 함경도 방면은 비교적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 5월 임시정부에서는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을 북간도에 파견할 때 함경북도 독판부와 비밀 연락을 취하도록 지시하였다. 1920년 5월 8일자로 된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재비발(財秘發) 제120호 공문에 의하면 안정근·왕삼덕에게 함경북도와 연락하는 권한을 위임했다는 구절이 있고, 독판부 재무사장(財務司長) 선임을 재촉하고 있다.4)재무총장이기에 연통제 전반에 언급하지 않았겠지만 이것을 계기로 함북 독판부 회령군(會寧郡) 직원 정희용(鄭熙鎔)·나성호(羅聖鎬)·최방연(崔放衍) 등과 연락하여 함경북도 독판부 강화책이 추진되었다. 이 때 북간도에 총판부(總瓣府) 설치 문제가 논의되어 그 실현은 10월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무렵에 회령군 정희용·나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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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창호(安昌浩) 일기(日記), 1920년 3월 16일 및 4월 1일 기사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 II.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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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방연 등 10여 명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그들의 조사에 근거한 일본문서에는 임시정부에서 한성총판부 설치를 포기하고 만주에 총판부를 두어 연통제 총 본부로 삼으려는 계획이었다고 수록되어 있다.5)
한성총판부의 설치가 뜻대로 안되었던 것은 안창호의 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북간도 총판부가 설치되어 평안도 지방까지 통할한다6)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으나 함경도 지방에 대한 연락 근거지로서 이용하려고 했던 점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성취되어 막 활동을 개시할 무렵에 일본군이 북간도를 침략하여 동포를 살륙하는 소위 간도사변(間島事變)이 일어났고 회령군 직원도 거의 체포되니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상에서 연통부 설치 상황을 보았다. 그러면 그와 같은 과정에서 나타난 몇가지 주목되는 점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연통부의 설치는 평안도·함경도 등 국내의 북부 지방에는 비교적 순조로웠는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순탄하지 않았다. 남부 지방에서는 각종 독립운동 단체가 연통부를 대신하고 있었다.
② 연통부는 독판부와 군(郡)의 조직에서 끝난 경향이 짙다.
③ 연통제는 1921년에 거의 붕괴되었는데 그것은 일제에 발각되어 무참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④ 활동의 면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선전 활동과 자금 수합, 그리고 독립운동의 정보수집 및 보고로서 큰 공로를 남겼다.
⑤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한 것은 교통국의 업무와 중복되었으나, 그와 같이 통신이 일원화되지 않았던 점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는 처지에서 오히려 이득이 되었던 것이다.
⑥ 국내 각도에 독판을 배치한 것에 비하여 만주지방에 총판을 배치한 것은 만주지방 독립 운동의 중요성과, 그 지방 동포 사회의 통할을 쉽게 하려는 의도와, 또 그 총판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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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총독부 경무국 ‘인구세 징세에 관한 건’(대정 10년 2월 7일 고경(高警) 제 1313)
6) 주요한 ≪안도산 전서≫ p.639 및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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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독판부를 어느 정도 통할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⑦ 연통제의 조직 중 군감이 가장 핵심적 위치에 있었는데 군감에 임명된 사람은 지방의 명망자·사립학교 교사·교회의 목사·불교의 승려들이 가장 많고 혹은 당시 현직 군수도 있었다. [연통부 명단 참조]
이상과 같은 연통제의 실시는 임시정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반면 그에 종사한 사람들의 수난은 컸다. 일제는 임시정부의 기반이 되는 연통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전 경찰력을 동원하였으니 연통부 종사자로서 고초를 당한 사람은 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연통부 관계자의 수난에 대하여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919년 9월 평안남도에 특파된 유기준(劉基峻)이 연통제 관계 서류를 압수당하여7)연통제의 내막이 탄로되었던 것을 출발로 앞에 말한 것과 같이 1920년 9월에 함경북도 회령(會寧)의 연통부 관계자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함경북도의 연통제 조직은 1919년 11월 30일 나남(羅南)사건을 계기로 독판부원과 군감 전원이 피검되어 어디보다 먼저 전도적(全道的)인 수난을 당하였다.8)그리고 12월 31일에는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의 관계자가 피검되었고,9)특히 이듬해 1920년에는 평안도 일대에 수난이 계속되어 7월에는 의주군(義州郡) 통신원 양승업(梁承業)이 피검됨에 따라 연통제 조직이 탄로되어 평북 각 군·면의 관계자는 모두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평안도 방면 연통부 종사자들은 그전부터 관여하고 있던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대한청년단연합회 활동에 전념하였고, 또 광복군(光復軍) 총영(總營)에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어 1921년에는 연통제가 붕괴되어 임시정부의 국내에 대한 통할도 몇 곳에 남아 있던 교통국 조직이나 선전원 혹은 특파원이나 국내의 애국 단체의 활약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연통제의 붕괴는 독립운동의 통할을 어렵게 만든 것은 물론 독립 운동의 자금 수합(收合)을 못하게 만들어서 임시정부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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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민족운동연감≫ 1919년 9월 9일 조.
8)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1년 11월 30일 조.
9) ≪조선민족운동연감≫ 1919년 12월 31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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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부 관계자들의 수난에 대해서 여기서 그 전부를 소상히 밝힐 수는 없다. 연통부에 관계한 사람이면 해외에 망명한 사람 외에는 전부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그러니 다음 항목에서 연통부 관계자의 명단을 소개하니 그것을 통해서 수난을 짐작하기로 하고, 연통부 관계를 명확히 알기 위하여 그 규정을 먼저 첨부해 둔다.
[임시지방 연통제(聯通制)]
국무원령 제1호 (개정·교정 제2호)
1919년 7월 10일 (1919년 12월 1일)
제1조 지방에 다음의 도를 둔다.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북도·경상남도·평안남도·평안북도·강원도·함경남도·함경북도. 도의 위치 급(及) 관할 구역은 내무총장이 이를 정한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또는 동포 사회에 대한 통할을 하기 위하여 만든 상설기구는 연통부·교통국 그리고 거류민단이었는데 국내에 설치한 것은 연통부의 각급 기관과 교통국이었다. 그런데 연통부와 교통국의 차이점은 주관 부처가 연통부는 내무부의 소관이었으나 교통국은 교통부의 소관이었다. 그리고 연통부는 지방행정기관으로서 통신업무와 임시정부 자금 수합의 업무를 맡았는데, 교통국은 통신기관으로서 정보를 수집 연락하는 등 통신 업무에 치중하면서 재정 자금의 수합 업무도 수행하였다.
(1) 교통국의 설치와 조직
교통국의 설치도 임시정부 초창기에 계획한 것이다. 그것은 1919년 5월 12일 국무원 위원 조완구(趙琬九)의 시정 연설에서 밝혀졌다.10)그리하여 그 해 5월에는 국내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평안북도 신의주 건너 만주의 안동(安東)에 교통부 안동지부가 설치되었다. 안동지부의 위치는 안동 시내 북감자(北坎子)에 있던 아일랜드 사람 조오지엘쇼우(George L. Show)가 경영하던 이륭양행(怡隆洋行)의 2층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국내 정보를 활발히 통신하며 독립운동의 연락자로서의 구실을 맡고 있었는데, 안동 교통 지부장 격이던 공남해(孔南海) [일명 양대평(揚大平)] 보고에 다음과 같이 기구를 편성하였다고 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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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1절 기본 시책 1항 참조.
11)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1년 9월 10일 조(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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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안동 교통지부는 국내의 각 군에 국(局)을 설치하고 각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설치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해 10월 17일 안동교통사무국으로 명의가 변경 되면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의 교통 사무만을 관장하게 되었다.12)
안동교통국은 원래 국내의 통신 연락을 위하여 설치된 것이지만, 후에는 만주지방의 통신 업무도 관장하고 있었다. 만주 지방의 것은 통신국으로 불리웠던 모양인데 이러한 것은 1919년 7월 30일 안동교통부의 통신 제26호에 만주의 관전(寬甸)통신국에서 임시정부의 직접 감독을 청원해 왔다는 보고 내용을 봐서 알 수 있다.13)그러나 관전통신국에 있던 김두만(金斗萬)이 그 해 10월 4일부터는 평안북도 강변(江邊) 8군 지방 교통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아, 만주 지방 통신 업무는 독립운동 단체에 넘어가고 압록강 부근의 정보통신은 강변 8군 지국에서 담당한 것 같다. 강변 8군 지방 교통 지국의 활약은 독립군의 활동이 격렬하던 지방이었기 때문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안동교통사무국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만을 관장하게 된 10월 17일 이후부터는 함경도 지방에 별도로 교통사무국이 설치되었다.
이와같이 교통국의 조직 및 기구에 대한 개편은 몇 번 있었는데 1919년 5월 12일 조완구의 시정 방침 연설과 더불어 안동교통부가 설치된 후 8월 20일에는 ‘지방교통국 장정’이 국무원령 제2호로 공포되었고(설치후 공포), 9월 25일에는 홍성익(洪成益)이 정식으로 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0월 17일에는 안동교통사무국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920년 1월 13일에는 위의 지방교통국 장정이 개정 공포되었다.
이 때 안동교통사무국의 관할 구역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으로 한정하여 함경도 지방과 분리시켰는데 그것은 1920년 7월 10일 안동교통사무국이 일본의 습격을 받고 또 안동교통사무국의 활동을 보호해 주던 죠지쇼가 이튿날 체포되어 교통 업무가 큰 타격을 받고 보니 그렇게 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현명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오지쇼우가 곧 보석되어 다시 활기를 띠었다.
남부지방에 대해서도 교통국을 설치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뻔한 일이고 또 그의 흔적으로 1920년 5원 31일 경상남·북도에 교통국을 설치하러 갔던 김태규(金泰圭)가 체포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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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조선민족운동연감≫ p.43
13) ≪조선민족운동연감≫ p.31(1929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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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14)그러나 교통국의 설치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러한 것은 연통부 설치의 경우와 비슷하여 주목을 끈다.
[임시지방 교통사무국 장정][국무원령 공포, 1919년 8월 26일]
제1조 교통부 우전 사무를 위하여 중요 지점에 임시교통사무국을 치함. 국(局)의 위치는 교통총장이 차(此)를 정하되 그 관할 구역은 현행 연통제를 준거함. 임시지방 교통사무국은 아직 내왕인원(來往人員) 접제(接濟)의 사무를 겸장함.
제2조 임시지방 교통사무국의 직원은 다음과 같음.
국장(局長) 1인 : 국무를 통할하며 국원을 감독함.
참사(參事) 2인 : 국장의 지휘 하에서 일반 국무를 장리함.
서기 : 상관의 명령을 종(從)하여 서무에 종사함.
통신원 : 상관의 명을 종하여 통신 내왕에 종사함.
제3조 임시지방 교통사무국장은 교통총장의 허가를 득하여 다시 지국을 설(設)함을 득함. 임시지방 교통사무지국에는 지국장 1인, 서기·통신원 각 약간인을 치(置)하며 그 직권은 전조에 의거한 지국장의 관위(官位)는 본조(本條)의 참사를 예겸(例兼)함.
제4조 국장·지국장 급(及) 참사는 교통총장이 이를 명하고 서기 이하의 직원은 국장이 자행 선정함.
제5조 본 장정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함.
[임시지방 교통사무국 장정] (개정)[교령 제2호 1920년 1월 13일]
제1조 교통부 우전 사무를 위하여 중요 지점에 임시교통사무국을 치함. 국의 위치는 교통총장이 차를 정하되 그 관할 구역은 현행 연통제를 준거함. 임시지방 교통사무국은 아직 내왕사원(來往使員) 접제의 사무를 겸장함.
제2조 임시지방 교통사무국의 직원은 다음과 같음.
국장 1인 : 국무를 통할하며 국원을 감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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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조선민족운동연감≫ p.109(1920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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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 국장의 지휘하에서 일반 국무를 장리함.
서기 : 상관의 명을 종(從)하여 서무에 종사함.
통신원 : 상관의 명을 종하여 통신 내왕에 종사함.
제3조 임시지방 교통사무국장은 교통총장의 허가를 득하여 필요한 지점에 다시 지국을 설(設)함을 득함.
임시지방 교통사무국에는 지국장 1인, 서기·통신원 각 약간인을 치(置)하며 그 직권은 전조에 의거함.
제4조 국장·지국장 급 참사는 교통총장의 보천(保薦)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서기 및 통신원은 교통청장이 차를 임명함.
제5조 본 장정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함.
(2) 교통국의 활동
교통국은 연통부보다 먼저 설치되어 임시정부 초기에 특히 많은 정보를 수집 보고하였다. 그리고 교통국의 조직이 안동교통사무국과 함경도사무국이 있어서 각 군의 교통국을 관장하고 있었다고 해서 임시정부에 보고할 때도 그 체제를 따라 단계적으로 보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각군의 교통 지국에서 직접 임시정부에 보고했던 것은 연통부의 경우와 같다.
교통국의 활동은 통신 업무가 본래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만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에 소개한 교통국의 기구에서 ① 금전 모집 ② 통신 ③ 인물 소개의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으려니와 따라서 교통국의 활동은 ① 정부 자금을 모집하는 것 ②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것 및 임시정부의 지령을 전달하는 것 ③ 교통국의 조직 및 독립운동을 위한 인물 소개와 연락을 하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실제의 경우를 보면 문서(文書)의 전달 뿐 만 아니라 무기(武器)의 수송 전달 같은 일도 맡았던 것이다.15)
이와같이 상해와 만주, 상해와 국내, 만주와 국내를 연결하는 통신 업무를 담당하여 특히 안동교통국에는 무기의 수송까지 맡아 왔으며 오고가는 독립운동자의 체류지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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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일제의 외무성 아시아국에서 작성한 ‘대정 9년 작성 쇼우 사건 개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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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지의 구실도 하였다. 3·1운동 후 국내 혹은 만주에서 상해로 모여 간 독립운동자의 길을 안내하고, 조오지쇼우가 경영하던 이륭양행은 상선(商船)을 제공하여 특히 국내에서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하는 독립운동자가 상해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게 했던 것이다.16)그리고 안동교통국은 임시정부의 공식 업무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모든 독립운동자와 그 운동 단체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면서 독립운동 전반에 관계하기도 했다.17)
안동교통국의 활동은 사무국장 홍성익(洪成益)이 1920년 1월 24일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참살당하여 한때 업무 활동이 순조롭지 못한 일도 있었으나 교통국 설치후, 1920년 7월 10일 오학수(吳學洙)사건을 계기로 조오지쇼우가 검거될 때까진 약 1년 동안은 활동이 활발하였고 다음에 조오지쇼우의 피검으로 인하여 잠시 침체하였으나 그 가 그 해 11월 19일에 보석(保釋)되어 안동으로 다시 돌아오니 안동교통국의 활동도 다시 활기를 띠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오지쇼우가 검거되기 전처럼 활발하지 못하였던 것은 물론인데, 1922년 8월 8일 이륭양행의 고용원 김문규(金文奎)가 검거되어 영·일(英日)간에 국제 문제까지 일어나니 교통 업무를 숨길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의 (3) ‘이륭양행’ 항목 참조]
일제의 기록에는 이륭양행에서 떠난 교통국은 안동 시내 2·3개소에 비밀연락소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수록되어 있다.18)
안동교통사무국 관할 내 교통 지국의 활동으로는 의주(義州)교통지국과19)강변 8군 교통국의 것이 가장 활발하였다. 특히 강변 8군외 활동은 만주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방이어서 어디의 교통국보다 중요했고 따라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변 8군이란 압록강변에 있는 삭주(朔州)·창성(昌城)·벽동(碧潼)·초산(楚山)·위원(渭原)·강계(江界)·자성(慈城)·후창(厚昌)을 말하는데 그 곳은 만주 지방에 근거를 둔 여러 독립군의 활동이 치열하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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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백범일지(白凡逸志)≫ p.257.
17) 안동 영사관경찰서 ≪선인상황(人鮮狀況)≫ p.p.13~17.
18) 앞의 ≪선인상황≫ p.36.
19 ≪조선민족운동연감≫ p.3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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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의 교통국에서는 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소상히 보고했으며, 또 압록강 건너 만주 지방의 동향도 보고했다. 따라서 강변 8군 교통국의 인물은 오동진(吳東振)·김두만(金斗萬)처럼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이 많아, 후일 ‘대한청년단연합회’와 ‘광복군총영’을 조직하여 활동하게 되었다.20)
교통국의 활동 내용이 재정 자금의 모집·통신 업무·인물 소개 등이었다고 해도 본 임무는 통신 업무였다. 때문에 활동면에 나타난 것도 통신 업무가 많았는데 통신 방법에 있어서는 대체로 우편 연락이었고 우편 연락에는 암호 가사용되었다.21)그리고 1920년 5월 양준명(梁濬明) 사무국장 때부터는 역체식(驛替式) 진전법(進傳法)도 사용되었는데22)이것은 국내에서 우편 연락이 불편하기 때문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함경도 방면을 통할했던 함남교통사무국의 활동도 국경지대의 정세를 보고하여 자 못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함남교통사무국의 활동은 1921년에 활발하였다. 그 해 10월 교통부 훈령 제10호로서 임명된 직원 명부를 보니23)사무국장에는 윤병용(尹秉鏞)이었는데 함경도 각 지방에 설치되어 활동한 교통지국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지국은 군(郡)에 설치되고 면(面)에는 교통소(所)가 설치되는 것이 원칙인데 여기는 국경과 가까와 독립군의 활동이 치열했기 때문에 어떤 곳에는 마을에 국(局)이 설치된 경우도 있었다.
이륭양행은 아일랜드 사람 조오지엘쇼우가24)경영하던 무역회사 겸 중국의 태고선복공사(太古船福公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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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강변 8군 교통국의 활약상은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1년 후기부터 2년에 걸쳐 무수히 발견되니 여기에 그 전부를 밝힐 수 없다.
21) ① 앞의 책 p. 131.
②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릭운동사≫ 자료 2, 임정편 p.129.
22) ≪조선민족운동연감≫ p.109.
23) 앞의 책 p.218.
24) 조오지엘쇼우(George L. Show)의 이름은 소지영(蘇志英) 혹은 쇼우로 알려져 있고, 일제의 경찰 문서에는 지엘쇼우(G. L. Show)로 나타나 있다. 1969년 춘천성심여자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아일랜드 출신 오록(0’ Lock)신부(神父)가 조오지엘쇼우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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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점이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은 이륭양행의 2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는데 이륭양행을 경영하던 조오지엘쇼우는 사무국의 사무실을 빌려 주는 한편, 독립운동자를 숨겨주기도 하고 또 상해로 오고 가는 독립운동자에게 배를 제공하여 편의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혹은 독립운동자나 그 단체의 중요한 문서와 물건 등의 화물도 수송하여 주었고, 자기의 이름으로 우편물의 왕래를 담당하는 등 온갖 힘을 쏟아 독립운동을 옹호하였다. 때문에 일제의 경찰은 조오지엘쇼우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가진 외교수단을 다했으나 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구나 이륭양행은 안동의 옛 시가지에 있어서 영사관 경찰권이 미치지 않아 독립 운동자에 대해서도 손을 쓸 수 없는 형편이어서 일본과 영국의 두 영사관 사이에는 이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교섭이 오갔다.
조오지엘쇼우는 아일랜드 사람인데 아일랜드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로 있던 때이니 그를 영국인이라고도 기록하지만 그의 고국이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처지나 독립운동자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 여자가 그의 부인이었으니 일본인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외무성에서는 그의 행동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25)
‘① 1919년 11월 이강공(李堈公)사건을 지원했다.
② 만주 독립 운동자에게 무기 수송.
③ 임시정부의 비밀문서 전달.
④ 이륭양행의 일부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제공함.
⑤ 일본의 외교 교섭에 의하여 봉천(奉天)에 있는 영국 총영사가 그에게 주의할 것을 시달했음에도 여전함.
⑥ 1920년 5월 임시정부 요인이 이륭양행 소속 선박 계림환(械林丸)을 타고 상해에서 안동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영국 총영사의 양해를 얻어 체포하려고 하지 조오지엘쇼우가 거절하여 체포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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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일본외무성 아시아국 ≪쇼오사건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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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그 후 계속하여 검거된 독립 운동자는 주의 이륭양행을 근거로 활동하였다는 증거를 얻었음.
⑧ 1920년 7월 11일 오학수(吳學洙)사건이 일어났는데 오학수 등 12명은 이륭양행에 숨어 있었고 권총·폭탄·화약 제조기 및 원료도 계림환에 실어서 가져와 이륭양행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탐지한 일제의 경찰은 마침 국내에 들어 온 조오지엘쇼우를 신의주에서 검거하였다. 그 후 이것은 영국과 일본정부간에 외교 문제로 되어 그 해 11월 19일 보석되었고, 1924년 3월 7일에는 공소가 취소되었다.
그는 보석 기간 중에도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당시 안동영사관 경찰의 기록을 보면26)11월 19일 보석된 후 다시 안동교통사무국을 이륭양행에 설치케 하여 편의를 제공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는데 이륭양행에 고용되어 있던 김문규(金文奎)가 1922년 8월 8일에 독립운동자로서 검거되니 조오지엘쇼우도 지원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조오지엘쇼우가 보석될 때 영국측이 그를 안동에서 떠나게 한다는 약속을 일본정부와 했기 때문이었다.
조오지엘쇼우는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 공로 훈장이 수여되었다.27)
3. 조사원·특파원·선전위원회의 활동
임시정부가 국내의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또 통할하는 것은 교통국이나 연통제의 조직망을 통하여 실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교통국과 연통제의 활동상황을 파악하는 등 특수한 임무를 가진 사람을 임시정부에서 직접 파견하기도 했다.
혹은 국내 거주자에게 특수 임무를 부과하는 수도 있었다. 이러한 예는 국내에 대해서만 취해진 조처가 아니라 해외 동포 사회에 대해서도 취해졌던 것이다.
(1) 조사원의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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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안동영사관 경찰서, ≪선인상황≫
2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III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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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원(調査員)은 국내 각 지방의 유력자(有力者)·재산가(財産家)·학교·종교 실태 등을 조사하기 위하여 임명하였는데 각 군에 몇 명씩 두었다. 그리하여 조사원은 조사된 사항을 임시정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국내의 실태를 파악하며 또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펴는 기반을 터득하려고 조사했던 것이다.
1919년 11월에 작성한 조사원 명부를 보니 조사원 중에는 이미 상해에 가 있던 서병호(徐丙浩)·신채호(申采浩)·김구(金九) 같은 인물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고향의 것을 기록하여 제출하도록 했으나, 대부분 국내에 있던 사람을 임명하여 조사케 하였다. 조사원은 대개 우리가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점으로 보아 조사원에 임명됨으로써 임시정부와 관련을 맺어 이것이 인연이 되어 상해로 가서 활약하게 됐던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원의 배치가 국내의 모든 군에 가능치 못하였던 것은 비밀히 했던 일이니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각 고을의 조사원을 소개하여 둔다.28)
국내 조사원 명단
[원전 ≪조선민족운동연감≫대로 옮기느라고 재편성이 필요한 것도 그대로 수록했음]
경기도
경성(京城)
박은식(朴殷植)
수원(水原)
안평재(安平載)
여주(驪州)
엄항섭(嚴恒燮)
이천(利川)
조덕진(趙德津)
가평(加平)
양승환(梁昇煥)
파주(坡州)
배병헌(裵炳憲)
김웅권(金雄權)
용인(龍仁)
오조영(吳祖泳)
개성(開城)
현상건(玄相健)
최근우(崔謹愚)
시흥(始興)
윤육(尹堉)
고양(高陽)
박용의(朴容義)
백준(白浚)
양주(陽州)
이화재(李華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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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조선민족운동연감≫
- 300 -
경상남도
하동(河東)
이중렬(李仲烈)
밀양(密陽)
김대지(金大地)
진주(晋州)
조기홍(趙琪洪)
이영(李榮)
김한경(金漢景)
울산(蔚山)
신주극(申周極)
산청(山淸)
유경환(柳璟煥)
이한근(李漢根)
충청남도
공주(公州)
김성만(金聖萬)
정환범(鄭桓範)
논산(論山)
신형철(申瑩澈)
보령(保寧)
이철원(李哲源)
아산(牙山)
이종락(李鐘洛)
부여(扶餘)
권인채(權仁采)
당진(唐津)
이응준(李應俊)
한병동(韓秉東)
천안(天安)
유치근(兪致根)
대전(大田)
이강하(李康夏)
예산(禮山)
이명제(李明濟)
충청북도
영동(永同)
민충식(閔忠植)
청주(淸州)
신채호(申采浩)
신동식(申東植)
충주(忠州)
홍진(洪鎭)
괴산(槐山)
김태규(金泰珪)
황해도
재령(裁寧)
최두현(崔斗顯)
최철(崔哲)
김근하(金根河)
금천(金川)
한응종(韓應鐘)
장연(長淵)
서병호(徐丙浩)
김보연(金甫淵)
신천(信川)
김구(金九)
안정근(安定根)
- 301 -
충청북도
제천(堤川)
황학수(黃學秀)
전라남도
광주(光州)
한남수(韓南洙)
제주(濟州)(도)
장기찬(張基讚)
영광(靈光)
김철(金澈)
전라북도
전주(全州)
박완(朴浣)
이양호(李良湖)
옥구(沃溝)
송정욱(宋鼎頊)
송강선(宋剛瑄)
금산(錦山)
정해면(鄭海冕)
박찬영(朴贊永)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김귀현(金貴賢)
허성수(許聖壽)
전흥(田興)
동래(東萊)
김달해(金達海)
한운(韓雲)
하동(河東)
이원열(李元烈)
평안남도
강서(江西)
임필은(任弼殷)
박지명(朴址明)
진남포(鎭南浦)
이수남(李水南)
중화(中和)
한진교(韓鎭敎)
대동(大同)
차정신(車廷信)
명순조(明舜朝)
장신국(張信國)
평원(平原)
한영권(韓永權)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이현수(李賢壽)
장만호(張萬鎬)
영천(永川)
권우경(權寓京)
안동(安東)
이옥(李鈺)
칠곡(漆谷)
장지필(張志必)
예천(醴泉)
전용덕(田龍德)
경주(慶州)
최완(崔浣)
의성(義城)
박건(朴建)
- 302 -
황해도
영주(榮州)
정수(鄭銖)
해주(海州)
황덕행(黃德行)
장규황(張圭煌)
함세인(咸世仁)
연백(延白)
편덕렬(片德烈)
평안북도
정평(定平)
이경화(李敬華)
김하원(金河源)
영변(寧邊)
장송암(張松岩)
태천(泰川)
백동규(白東奎)
용천(龍川)
김성일(金誠一)
장송재(張松裁)
장경순(張敬順)
강계(江界)
유상규(劉相奎)
황해도
신천(信川)
이치준(李致俊)
은율(殷栗)
전재순(田在淳)
정기익(鄭基翼)
송화(松禾)
오기용(吳淇容)
안윤재(安允在)
봉산(鳳山)
김석황(金錫璜)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도인권(都寅權)
임창준(林昌俊)
진남포(鎭南浦)
옥관빈(玉觀彬)
유기원(劉基援)
용강(龍岡)
김창세(金昌世)
김작준(金昨濬)
강서(江西)
곽기호(郭驥浩)
강원도
삼척(三陟)
김영숙(金永叔)
영월(寧越)
김진우(金振宇)
강릉(江陵)
신태집(辛台集)
함경남도
함흥(咸興)
김성근(金聲根)
황진남(黃鎭南)
오영정(吳英政)
- 303 -
북청(北靑)
이순진(李舜鎭)
정평(定平)
김홍제(金弘提)
평안남도
평원(平原)
손우식(孫禹植)
평안북도
선천(宣川)
차균상(車均相)
오정은(吳正殷)
주현칙(朱賢則)
의주(儀州)
고일청(高一淸)
이우필(李祐弼)
최동작(崔東昨)
조병준(趙秉準)
철산(鐵山)
박현환(朴賢煥)
정상빈(鄭尙斌)
엄항해(嚴恒海)
창성(昌城)
강제희(康濟羲)
정주(定州)
선우혁(鮮于爀)
함경북도
경성(鏡城)
주영숙(朱永淑)
경원(慶源)
한수원(韓洙元)
전승묵(田昇黙)
부령(富寧)
전임증(田壬增)
전기풍(田基豊)
회령(會寧)
유홍구(劉洪九)
성진(城津)
김현택(金現澤)
경흥(慶興)
이병권(李秉權)
평안북도
강계(江界)
전용영(田龍永)
강원도
철원(鐵原)
김정흡(金正洽)
오세덕(吳世德)
이건병(李建秉)
함경남도
정평(定平)
이춘숙(李春塾)
함경북도
명천(明川)
동임(董林)
경성(鏡城)
지용수(池用洙)
김치백(金致百)
경흥(慶興)
박장훈(朴長勳)
- 304 -
함경북도
경성(鏡城)
방문철(方文哲)
길주(吉州)
김성하(金成河)
김만석(金萬石)
(2) 특파원의 활동
특파원(特派員)을 파견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기 때문에 특파원의 임무도 각양각색이었다. 1919년에 파견된 특파원은 대개 임시정부수립에 대한 계몽과 선전·임시정부의 정책 계몽·독립사상의 고취·연통제 및 교통국의 설치·국내 지도자와의 협의·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정세 파악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1920년 이후의 특파원은 연통제 혹은 교통국의 활동 상황을 시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통할하기 위하여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홀륭한 효과를 거두었는데 특파원의 활동도 그 효과에서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임시정부 초창기 국내의 민심을 임시정부로 집중시키는 활동은 연통제와 교통국이 설치되기 전이었으니 특파원에게 기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9)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2년 3월 10일 기사에 선전위원회가 설치된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선전위원회 위원장이던 안창호의 일기를 통해 보면 그렇지 않다.
원래 선전 사무는 1919년 9월 2일 국무원의 결의에 의하여 국무총리[당시 안창호가 대리]의 직속 하에서 전여제(全輿濟)가 맡고 있었다.30)
그런데 정부 개조 후 1919년 11월부터 안창호가 국무총리 대리 및 내무총장의 자리를 물러나 노동총판을 맡게 되었는데 앞의 시정 방침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제1절 참조) 노동부의 일은 중지하였으니 안창호는 실제 아무 부서에도 속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에 안창호는 선전부 조직을 계획 추진하여 결국 선전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가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장에 피선된 것은 1920년 1월 19일의 일인데 그의 일기(日記)를 검토해 보면 1월 14일부터 선전대 조직 문제가 언급되어 있고, 그해 8월까지 계속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어서 선전위원회 설치 과정에 대하여 비교적 명확한 것을 알 수 있다.31)
설치 당시 안창호와 함께 주관한 사람은 정인과(鄭仁果)·손두환(孫斗煥).이유필(李裕弼)
_______________
30) ≪독립≫(1919. 9 .6)
31) 주요한, ≪안도산 전서≫ p.62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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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金澈) 등인데 처음에는 내무부와 군무부에 속한 선전위원회를 계획하다가 후에 내문부와 외무부에 이관시켰으나 외무부의 것은 조직이 지연되어 내무부 소관 선전위원회만 절차를 밟았다. 외무부의 것은 구미위원회와 파리위원부가 거의 맡고 또 그 외의 지역에 선전 업무가 필요할 때는 그때그때 선전원을 파견하였다.
선전위원회가 맡은 업무는 국내와 해외 동포 사회에 임시정부의 시책을 선전하여 국내외 동포로 하여금 임시정부에 협조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자니 임시정부의 특파원이나 조사원이 국내 혹은 만주·시베리아로 출장할 때는 선전원의 임무를 부과하여 효과를 거두려고도 했지만 선전위원회 자체에서 많은 위원을 확보하여 주로 국내에 파견하여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안창호의 일기를 통해 보면 방문하는 청년에게 거의 빠짐없이 선전위원회의 업무를 소개하고 가입을 권장하고 있고, 국내에 파견할 때는 자기와 함께 사진을 찍어서 그것을 증명에 대신하고 있다. 이리하여 국내에서도 특히 평안도·황해도 방면에 지방선전대가 조직되어 연통부·교통국과 더불어 임시정부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평안도·황해도 방면의 선전대 활동은 연통부(독판부)와 교통국의 활동과 서로 힘이 합쳐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때문에 1920년 여름부터 이 지방 선전 활동의 통합 체제가 추진되었다.
그 추진 내막은 다음과 같다. 이 지방의 독판부와 교통국의 간부들은 일본경찰을 피하여 남만주에서 별도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청년단연합회에도 선전부가 있어서 국내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대한청년단연합회와 주로 평북독판부는 이신동체(二身同體)였던 것이다,
그리고 청년단은 남만주에서 독립단 등과 같이 대한광복군 총영을 결성했고, 이 작업에는 안창호가 깊이관여하고 있었다. 이럴 때 안창호는 선전부의 통합을 제의했던 것이다(1920년 6월 20일).
당시 남만주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김승만(金承萬)·안병찬(安秉燦)·김승학(金承學)·이탁(李鐸) 등은 안창호의 영향을 많이 받던 때였기에 안창호의 뜻대로 추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선전위원회에서 만든 지방선전대는 청년단연합회 또는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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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영의 선전부에서 조직한 국내 선전대와 통합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문제는 다음에 재론할 기회가 있으니[본장 제15절] 여기에서 멈추고 당시 지방선전대의 조직 상황을 밝혀 둔다.32)
지방선전대 조직표
도명
선전대 명
대장
임명 연월일
대원
평안북도
의주(義州)선전대
김정원(金定源)
1920. 6 14
2명
의주 제1선전대
이경집(李景楫)
1920. 6. 14
의주 제2선전대
문규삼(文奎三)
1920. 9. 17
2명
벽동(碧潼) 제1선전대
김낙준(金洛濬)
1920. 8. 4
13명
벽동 제2선전대
이정호(李貞浩)
1920. 8. 4
13명
창성(昌城) 제1선전대
이필호(李弼瑚)
1920. 8. 4
13명
창성 제2선전대
문석진(文錫珍)
1920. 8. 4
15명
삭주(朔州)선전대
강종문(康宗文)
1920. 8. 4
11명
용천(龍川)선전대
김백홍(金白鴻)
1920. 9. 24
철산(鐵山) 제1선진대
정주영(鄭周永)
1920. 9. 24
2명
철산 제2선전대
김홍식(金弘軾)
1920. 9. 24
평안남도
평양(平壤)선전대
이하영(李河榮)
1920. 9. 24
8명
진남포(鎭南浦)선전대
차대륜(車大倫)
1920. 9. 20
1명
강서(江西) 제1선전대
송익주(宋翼周)
1920. 9. 20
황해도
재령(載寧)선전대
이승길(李承吉)
1920. 8. 13
신천(信川)선전대
이창화(李昌華)
1920. 8. 13
송화(松禾)선전대
서광호(徐光浩)
1920.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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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① ≪조선민족운동연감≫
② ≪한국독립운동사≫ III,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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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長淵)선전대
박상설(朴相卨)
1920. 8. 13
은율(殷栗)선전대
오득인(吳得仁)
1920. 8. 13
옹진(瓮津)선전대
이경호(李京浩)
1920. 8. 16
해주(海州)선전대
지정신(池貞信)
1920. 9. 20
4. 독립운동의 지도
앞에서 연통부·교통국·조사원·특파원·선전대 조직과 그 활동에 대하여 살펴봤는데 이러한 것들은 임시정부의 지방행정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동시에 일본 통치에 항거하는 기본 조직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각기의 임무는 약간씩 달랐다고 할지라도 엄격히 분업화하여 활동할 수 없는 것이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에 연통부의 직원이 교통국의 사업을, 선전원이 연통부의 직원이나 조사원의 사업을 눈앞에 놓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아서 위의 각 기관이 했던 일은 ① 정보의 수집과 통신 ② 임시정부의 선전 ③ 재정 자금의 갹출 ④ 항일 활동의 지도 등의 네 가지가 주요 임무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네번째의 것인 일본통치에 대한 항거를 지도하는 문제가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1) 일본에 대한 비협조 운동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임시정부의 시정 방침에 보면(제1절) 대적(對敵) 관계에서 독립전쟁의 준비가 완성될 때까지 우선 현재로서는 일본 통치를 거부하면서 완전 독립의 의지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열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시위운동 ② 납세 거절 ③ 소송 거절 ④ 관공리 퇴직 ⑤ 일본 연호와 기장 폐지 ⑥ 일화(日貨) 배척 장려 ⑦ 일인 법령 거절 ⑧ 임시 작탄 사용 ⑨ 국내 감사대(敢死隊) ⑩ 국외 감사대 조직 ⑪ 국내 각 단체 이용 ⑫ 비행기 사용
이와 같이 되어 있는데 이것을 분석해 보면 ⑦항까지는 국내에서일본 통치를 받고 있는 동포로 하여금 행동케 하는 비협조 운동이고 ⑪·⑫항은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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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이고 ⑧·⑨·⑩항은 당초부터 이러한 방법을 쓰자는 것이 아니라 ⑦항까지의 일을 수행할 때 그것을 일본 관헌이 무력으로 간섭하고 탄압할 터이니 그때 그 관헌과 관청을 상대로 작탄을 사용하고 감사대, 즉 결사대(決死隊)의 활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만주에서 국내 진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독립전쟁의 성격이니 이와 다른 것인데 국내에서 작탄 사용과 감사대의 활동을 처음부터 시도하면, 일본의 감시만 엄중하여져 연통부·교통국·특파원·조사원·선전원의 활동과 앞의 ⑦항까지의 비협조 활동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 당시 임시정부 각료의 생각이었다.33)때문에 상해 애인리(愛仁里)에서 작탄 사고까지 일으킨 김성근(金聲根)이 국내에 잠입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노백린(盧伯麟) 군무총장 같은 사람은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으나 노백린은 초기에 미국 여행 관계 등으로 임시정부 내에서 큰 활동이 없었으며, 군무차장 김희선(金羲善) 같은 사람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각료가 앞에 말한 순서에 의하여 일본 통치에 항거하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그러한 태도는 1920년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시찰할 때를 계기로 변경되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밀접한 연락을 가진 남만주의 광복군총영에서 국내에 감사대를 파견한 사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제4절 제4항 참조] 또 1920년부터 국내의 각 비밀 조직이 붕괴되어 작탄 사용의 시기가 점점 박두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은 작탄이나 감사대의 문제보다 ①항에서 ⑦항까지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근대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던 약소민족의 독립 운동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세계사적 통례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중에서 시위운동·납세 거절·관공리 퇴직·일본 연호와 기장 폐지 등은 국민의 애국심과 독립을 위한 의지 여하에 따라 많이 좌우될 수 있는 문제이나, 소송 거절·일화 배척·일인 법령의 거절 등은 현실 생활과 밀접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에 대신할 어떤 조치가 없으면 장기적 기간에서는 실현하기 힘드는 문제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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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안창호 일기 ≪안도산 전서≫ p.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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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후자의 경우 실현이 어렵다는 것은 그러한 운동은 대중의 호응을 필요로 하는 현실 생활상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그것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조직한 국내의 각종 기구와 단체를 통하여 일본 통치에 대한 비협조(非協助) 운동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위운동은 곳곳에서 일어났고 그 외의 것도 부분적이나마 효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이 전개되면 일본 관헌의 탄압과 취체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1920년부터는 작탄 활동이나 감사대의 활약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작탄 활동의 시기에 반도처치(反徒處置) 문제가 함께 제기됐던 것은 물론이다.
(2)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과 지도
임시정부는 동포 사회를 통할하기 위하여 국내에는 연통부·교통국 등을 설치하였고 해외에는 거류민단과 그에 준한 기구를 이용하여 통할하고 있었는데 그와 같은 기관의 활동을 보강하고 또는 공백 상태를 메우기 위하여 곳곳의 특수성에 맞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지도하기도 했으며, 또 이미 조직된 단체를 지도하기도 했다.
해외의 경우에 독립 단체가 임시정부의 관여 여부에 관계없이 수 많은 것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2장 제2절 참조], 국내의 경우는 특히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단체가 많았으며 그것 중에는 연통부나 교통국의 업무를 맡고 있었던 것도 적지 않았다.
대동단(大同團)·대한청년외교단(大韓靑年外交團)·대한민국애국부인회·대한애국부인회·대한독립애국단·대한국민회·의용단(義勇團)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제2장 제1절 제4항 참조]
제3절 해외 동포 사회의 통할
독립운동의 통할에 있어서 국내에 대한 통할은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하여 비밀 조직을 통한 통할이었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해외 동포에 대한 경우는 그런 점은 거의 없었으나 만주·시베리아·중국 본토·미주·구주(歐洲)에 많은 인원이 흩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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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있었으니, 서로 간의 거리가 멀어 통할이 쉽지 않았다. 교통·통신의 문제도 그것이지만 살고 있는 곳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제 조건이 달라서 일률적인 통할이 불가능했고 또 곳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그곳에 간 이유와 목적이 제각기 달랐고 또 본국 혹은 임시정부와 서로 떨어진 거리가 다른 것 때문에 통할의 방법도 달라야 했다.
1. 거류민단제의 실시
거류민단제(居留民團制)는 처음에 법령이 공포되기도 전에 상해에서 실시하고 있었는데 1920년 3월 16일 국무원령 제2호로 거류민단제가 공포되어 추가로 인준을 받은 셈이다.
정부에서 거류민단제를 법령으로 제정할 때는 해외 동포 사회를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통할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각 지역 동포 사회의 특수 조건 때문에 일률적인 실시는 안 되었다. 거류민단제가 처음부터 동포 사회의 통할 기구로 잘 운영된 곳은 상해였고, 만주 지방은 독립군 활동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임시정부의 양해 하에 군정서(軍政署) 등이 거류민단 조직을 대신하고 있었으며, 미주 지방에는 역시 임시정부의 양해 하에 대한인국민회가 대신하고 있다가 후에 일부 지역에서는 거류민단(교민단) 조직으로 개편한 곳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거류민단제가 정부의 계획대로 실시된 곳은 상해뿐이었는데 먼저 거류 민단제의 규정에 따라 그것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살핀 후에 상해 거류민단에 대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거류민단제는 해외 동포 사회를 통할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체로서 임시정부의 지방 행정 단체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내무총장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 조직되고 운영되었다. 거류민단제의 규정을 보면 제3조와 제4조에 ‘조직과 해체 및 경계(境界)에 관한 것은 내무총장이 처리한다.’라고 규정하고 명칭과 사무소의 위치 변경까지 내무총장의 허가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제31조부터 제34조까지 거류민단 운영을 감독하는 규정이 있는데 감독의 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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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하게 규정함은 물론, 임시정부의 특수성 때문에 내무총장은 거류민단 직원에 대한 징계 처분으로 과태금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명시해 뒀다.
거류민단의 업무에 관해서는 제2조에 법령 또는 관례에 의하여 거류민단에 속한 공공 사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막연하게 규정하고 있으나 제12조에 거류민단 의사회(議事會)에서 결정할 항목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어서 거류민단 업무 활동의 윤곽을 알 수 있다.
① 거류민단 조례 급 규칙 제정 또는 변경에 관한 일
② 독립 운동에 관한 일
③ 세입·세출 예산을 정하는 일
④ 결산 보고를 인정하는 일
⑤ 교육·위생·소방 급 교통에 관한 일
⑥ 병원(兵員) 모집에 관한 일
⑦ 의용대 조직 및 빈민 구조에 관한 일
⑧ 기본 재산 및 적립 금곡(金穀)의 설치·관리 급 처분에 관한 일
⑨ 거류민단의 과금(課金)·사용료 및 부역·현품의 부과, 징수에 관한 일
⑩ 거류민단 부채에 관한 일
⑪ 세입·세출 예산으로 정한 외에 새로이 의무를 부담하는 일
⑫ 거류민단에 관계된 소송 급 화해에 관한 일
그리고 거류민단의 조직에는 집행 기관과 의결 기관이 있었는데 집행 기관은 단장·총무·간사·서기가 맡아 운영하고[제17조] 또 거류민단의 규칙과 조례에 의해서 학무위원회 혹은 의경대(義警隊) 같은 것도 두었다.
의결 기관은 의사회를 말하는데 의사회의 규모는 거류민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 달랐다.[제9조]
임시 거류민단제는 해외 동포 사회의 지방 행정 기구였기 때문에 거류민단 자체가 그 관할 구역을 다시 나누어 구(區)를 설치할 수 있게 하였다.[제27조]
그러면 거류민단제는 해외 동포 사회를 통할하는 기본적인 것이었으므로 그 조문(條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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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해 둔다.
[임시 거류민단제]
[국무뭔령 제2호 (1920.3.16)≪독립신문≫ 및 ≪한국독립운동사≫ 자료2 임정편 참조]
제1조 외국에 거류하는 민국 인민의 청원 우(又)는 상태에 의하여 내무총장이 광복사업에 필요로 인할 시 일정한 구역내에 거류하는 민국 인민으로서 조직하는 거류민단을 치함.
제2조 거류민단은 법인으로 하여 관의 감독 하에서 법령 우는 관례에 의하여 거류민단에 속한 공공 사무를 처리함.
제3조 거류민단의 폐치(廢置)·분합 우는 경계의 변경에 관한 사항은 내무총장이 정함.
제4조 거류민단의 명칭 우는 사무소 위치를 변경코자 할 시는 내무총장의 허가를 요함.
제5조 거류민은 거류민단의 선거 급 피선거의 권리를 유(有)하며 거류민단의 명예직을 담임하는 의무를 부(負)함.
제6조 거류민은 거류민단의 영조물을 공유하는 권리를 유(有)하며 거류민단의 부담을 분담하는 의무를 부함.
제7조 거류민단은 거류민단 조례 급 규칙을 정함.
제8조 거류민단에 의사회(議事會)를 치함.
제9조 의사회 의원은 거류민이 선거함.
의원의 정수는 다음과 같음.
① 거류민 5백인 미만의 거류민단 15인
② 거류민 5백인 이상 1천인 미만의 거류민단 20인
③ 거류민 1천인 이상 2천인 미만의 거류민단 25인
④ 거류민 2천인 이상의 거류민단 30인
제10조 의사회의 조직·의원 선거 급 임기에 관한 필요 사항은 거류민 조례로써 정함.
제11조 의사회 의원은 명예직으로 함.
제12조 의사회에서 결정할 사건의 개목(槪目)은 다음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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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거류민단 조례 급 규칙 제정 우(又)는 변경에 관한 사(事)
② 독립운동에 관한 사
③ 세입·세출 예산을 정하는 사
④ 결산 보고를 인정하는 사
⑤ 교육·위생·소방 급 교통에 관한 사
⑥ 병원모집(兵員募集)에 관한 사
⑦ 의용대 조직 급 빈민 구조에 괄한 사
⑧ 기본 재산 급 적립금곡(積立金穀)의 설치 관리 급 처분에 관한 사
⑨ 거류민단의 과금(課金)·사용료 급 부역·현품의 부과징수(賦課徵收)에 관한 사
⑩ 거류민단 부채에 관한 사
⑪ 세입·세출·예산으로 정한 외에 신(新)히 의무를 부담하는 사
⑫ 거류민단에 관계된 소송 급 화해에 관한 사
제13조 의사회의 의원 중에서 의장 1인을 선거함.
제14조 의사회는 단장이 소집함. 의원 3분의 1 이상의 청구가 유할 시에도 단장이 소집함을 요함.
제15조 의사회에 서기를 치하고 의장에 예속하여 서무를 처리함.
서기는 의장이 임면함.
제16조 의사회 회의에 관한 필요 사항은 회의 규칙으로써 정함.
제17조 거류민단에 아래의 직원을 치함.
단장 1인
총무 1인
간사 약간인
서기 약간인
제18조 단장 급 총무는 의사회에서 선정하되 임기는 만 2개년으로 함.
제19조 간사 급 서기는 단장이 임명함.
제20조 거류민단 직원은 명예직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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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但) 지방 상황에 의하여 유급(有給)함도 득함.
제21조 단장은 거류민단을 대표하며 총할(總轄)함.
제22조 단장은 의사회의 의결이 기(其) 권한을 월(越)하거나 법령에 위반커나 공익을 해하는 것을 인(認)할 시는 감독 관청의 재결(裁決)을 청함을 득함.
전항의 경우에는 기 의결 사건은 집행함을 부득함.
제23조 단장은 직원을 지휘 감독하며 차(此)에 대하여 징계함을 득함. 징계 처분은 견책 우는 10원(元) 이하 과태금으로 함.
제24조 총무는 단장을 보좌하며 단장이 유고할 시에 대리함.
제25조 간사는 단장의 지휘를 승(承)하여 각기 담임 사무를 장리함.
제26조 서기는 서무에 종사함
제27조 단장이 사무 처리상 필요로 인할 시는 의사회의 의결을 경(經)하여 관할 구역을 구분하여 각 구에 구장을 치함.
제28조 구장은 의사회에서 선정하되 임기는 만 2개년으로 함.
제29조 구장은 단장의 감독을 승하여 해구(該區)에 속한 거류민단 사무를 처리함.
제30조 구의 폐치(廢置)·분합 우는 경계의 변경, 기타 필요 사항은 거류민단 조례로써 정함을 득함.
구의 명칭 우는 사무소 위치를 변경코자 할 시는 의사회의 동의를 요함.
제31조 거류민단 감독 관청에 관한 규정은 내무총장이 정함.
제32조 감독 관청은 감독상 필요한 명령을 발(發)하며 우는 처분함을 득함.
제33조 감독 관청은 의사회의 해산을 명함을 득함.
의사회가 해산할 경우에는 2개월 이내에 의원을 선거함을 요함.
제34조 감독 관청은 거류민단 직원에 대하여 징계함을 득함.
징계 처분은 견책 50원 이하의 과태금 우는 해직으로 함.
징계에 의하여 해직된 자는 2개년간 거류민단의 공직에 피선, 우는 임명함을 부득함.
제35조 본령 시행의 기일은 내무총장이 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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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해 거류민단
상해에는 거류민단제의 법령이 공포되기 전부터 대한인 거류민단이 조직되어서 동포 사회의 자치 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에서 1970년 3월 16일 거류민단제의 법령을 공포하였다는 것은 동포 사회에 이미 존재한 자치 기관을 합법화하고 아울러 그 자치 기관을 통하여 동포 사회를 통할하려고 했던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때문에 만주와 미주에 대한 통할도 이미 존재한 동포 사회의 자치 기관을 인준함으로써 거류민단제에 대신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상해 거류민단이 조직된 내력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1)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은 처음에 교민친목회(僑民親睦會)라는 이름으로 상해에 거류하는 동포의 정의(情誼)를 두텁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19년 3월 3일 정안사로(靜安寺路) 중국학생회관에서 고종 황제의 봉도식(奉悼式)을 거행함에 고종 황제의 독살설과 동경 유학생의 독립선언에 대한 소식, 그리고 국내의 3·1운동에 대한 소식이 전해져 이날 모인 1백여 명은 감격한 분위기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를 조직하기로 합의한 후 규칙 기초 위원 10사람을 선정하였다.
3월 16일 같은 장소에서 교민친목회 회칙을 통과시키고 회장에 신헌민(申獻民)을 선출하니 당시 회원은 3백 45명이며 입회비 1원, 월 회비 20 전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구국 의연금을 모집하니 1천 1백 40 원이었다.
6월에 신헌민이 왜경에 체포됨에 회장은 고일청(高一淸)이 계승하고 교회에서 관장하던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친목회의 소관으로 옮겼다.
9월 22일에 소집된 총회에서 명칭을 대한인민단(大韓人民團)이라 고쳐 단장에 여운형(呂運亨)을 선출했다.
1920년 1월 9일 총회에서 상해 대한 거류민단이라 고치고 단장에 여운형, 총무에 선우혁(鮮于爀), 간사에 김보연(金甫淵)·임재호(任在鎬)를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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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신문≫ 1920. 4. 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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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20년 3월 16일 거류민단제가 공포되고 4월 20일부터 그 효력을 발생한다는 시행령이 내무부령 제1호로 발표되니 그 후 내무부의 감독을 받는 기관으로 전환하였다.
1920년 4월 8일 현재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의 운영 실태를 보면, 19명으로 구성된 의사회가 있고 집행 기관으로 총무 밑에 서무·회계·교육·구제의 4과(課)를 두었으며 간사가 각 과의 일을 맡았다. 그리고 상해 동포 사회를 남일구(南一區)·남이구(南二區)·남삼구(南三區)·동구(東區)·서구(西區)·북구(北區)의 6개구로 나누어 각 구에서 구장이 통신·납세 등 말단 사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이 때 거류민단에서 조사한 동포의 인구 실태는 총 5백 38인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되어 있다.
성별 연령
남
여
계
비고
19세 이상 18세 미만 계
367 47 414
91 33 124
458 80 538
본문에는 18세 이상으로 나타나 있음
그런데 상해는 독립 운동자의 내왕이 많던 곳이어서 인구의 변동이 극히 심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임시정부의 활동성 여하에 따라서 모였다가 헤어지는 사람이 많았던 것은 뻔한 노릇이다. 상해 동포 사회의 인구 변화는 거류민단의 의사원 수를 보면 대강 짐작이 갈 수 있는데 그것은 거류민단제 규정에 의하여 5백인 미만일 때는 15명, 5백인 이상 1천인 미만일 때는 20명의 의사원을 선출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제9조]
앞의 ≪독립신문≫ 기사에서 [주석1)참조] 1920년 4월 8일 현재 17명의 의사원으로 5백 38명의 인구인데 일제 상해영사관 경찰부 ≪조선민족운동연감≫에 보니 1920년 7월 26일조에는 의사원이 13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동년 11월 9일조에는 다시 17명으로 회복되었는데 7월 26일의 것은 특수 사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간주하면 1920년 전후하여 상해 동포 사회의 정착 인구는 5백 명은 넘고 1천 명은 안 되었다. 그런데 1921년 4월에 조사한 일본 경찰의 통계에는 7백 명으로 나타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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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총독부 경무국 ≪재외 불령선인의 근황≫(대정 10년) SP No. 45 # 141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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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역시 ≪조선민족운동연감≫ 1927년 10월 24일조를 보면 15명, 1928년 9월 8일 조에도 15 명이니 5백 명에 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상해 거류민은 임시정부 요인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기에 상해 거류민단의 운영도 거의 임시정부 요인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거류민단 의사원도 거의 중앙 정부의 요인이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가 해외 동포에 대한 통할이 어렵던 특히 1925년 이후에는 상해 거류민단 운영에만 국한되었던 한 때도 있었다.
상해 거류민단의 활동 중 임시정부의 지방 행정을 수행했던 점은 물론이지만 때로는 정부의 일을 맡아서 수행한 경우도 없지 않았는데 거류민단 자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의경대(義警隊)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것과 학무위원회를 두어서 특히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운영했던 것은 괄목할 내용이었다.
임시정부가 직접 해외 동포를 통할하며 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해외 동포 사회의 각 지방에 통할 기구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던 제도는 훌륭한 것이었고 특히 상해거류민단은 임시정부를 직접 뒷받침했다.
말단 기관으로 동포 사회를 6개구로 나누어 구(區)를 두었던 것 중 세 개의 남구(南區)는 그 후에 통합하여 본구(本區)로 하였고 1920년 10월 7일에는 내무부령 제4호로서 거류민단제에 자치적 성격을 강화하여 교민단제(僑民團制)로 개편하고 거류민단제는 내무부령 제5호로 폐지하였다.3)
3. 그 외 동포 사회의 통할
당시 세계 각처에 우리의 동포가 많이 있었으나 통할을 필요로 하던 지역은 시베리아와 만주 그리고 미주(美洲)였다. 그 외 중국 본토와 유럽에도 동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 본토의 경우 임시정부 초기에는 거의 상해에 모여 있었고 북경(北京)에 약간 있어도 그 중심 인물들이 박용만(朴容萬)처럼 임시정부에 당초부터 참여하지 않아 통할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상해 외의 중국 본토에는 곳곳에 소수 인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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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민족운동연감≫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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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져 있었으나 단체 조직을 통한 통할이 필요할 만큼 모여 살지는 않았다.
유럽에도 극히 소수의 동포가 있어서 거류민단 같은 조직을 구성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프랑스에는 1919년 11월 19일 35명의 노동자가 이민해 와서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파리위원부의 통할을 받고 있었다.4)
해외 동포 사회에서 동포가 많이 살면서도 임시정부의 통할을 받지 않았던 곳은 시베리아 지방이었다. 그것은 1919년 임시정부의 개조 혹은 통합 과정에서 그들의 뜻대로 안 되었다는 이유로 연해주 지방 지도층 인물이 임시정부에서 이탈했던 탓도 있고 또 소련정부에서 그들의 혁명 수행 및 대일(對日) 외교상의 관계 때문에 한국 동포의 활동을 강력히 통제하고 있었던 탓이겠다.
그러나 시베리아에는 20만을 넘는 동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인적 자원이나 재정 자원의 면에서 결코 가볍게 생각할 곳은 아니었다. 더구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진주하여 소련혁명을 방해하고 있어, 한국 동포는 항일 전선에서 소련 볼셰비키군대와 연합하여 있어서 독립전쟁이 대단히 유리한 전망을 보여 주고 있던 당시였으니 임시정부는 꾸준히 시베리아의 독립운동 통할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0년 3월에는 민사기관(民事機關)과 군사기관(軍事機關)을 설치하여 민사는 최재형(崔在亨), 군사는 유동열(柳東說)에게 통할토록 하는 계획도 있었고, 4월에는 연통제에 의한 총판부를 설치하여 총판에 최재형, 부총판에 김치보(金致甫)를 임명하자는 계획까지 있었으나5)최재형이 곧 피살되고 비교적 임시정부와 가까울 수 있는 지도층의 세력이 쇠퇴하여 끝내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국민의회조차 공산당의 조직에 포용되어 임시정부와 더욱 거리가 멀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는 제4절 중 ‘소련에 대한 외교’의 서술을 참고하기 바란다.
미주 지방에 대한 통할은 임시정부의 양해 아래 1910년 5월 10글 이래 미주의 동포 사회를 관장하고 있던 대한인국민회가 맡아 거류민단을 대신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그 대한인국민회를 통하여 미주의 동포 사회를 통할하고 있었는데 재정의 일부는 워싱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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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랑스의 한인국민회에 관한 것은 다음 ≪파리위원부의 활동≫(제4절)을 참조.
5) ≪안창호일기≫ 1920년 3월 16일 및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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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위원부가 관장하여 심상치 않은 혼선이 야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구미위원부도 임시정부의 기관이고 보면 다소의 문제는 있었더라도 동포 사회 통할은 비교적 순조로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2장 제2절과 제3장 제2절 및 제4절 제1항 참조]
1922년 3월에는 대한인국민회의 분규로 말미암아 하와이에 대한인 교민단이 창설되어 그것이 동포사회를 통할하였고, 그 후 미국 본토의 일부 지방에도 교민단이 조직되었다.
아무튼 통할 단체는 국민회가 됐든 교민단이 됐든 해외 동포 사회 중에서 가장 임시정부의 통할을 순탄하게 받은 셈이며 그에 따라 임시정부 재정면에서 많은 지원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미주의 동포 사회는 임시정부의 재정 자원의 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 만주의 동포 사회는 독립전쟁의 인적 자원의 면에서 귀중하였다. 그것은 만주에 1백만 이상의 동포가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또 만주는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와 가장 가까이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신 국내 진격전을 계속 벌이고 있는 독립운동 단체가 많았다. 때문에 임시정부로서 해외 동포 사회를 통할하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만주였다.
임시정부와 만주 동포 사회와의 관계에 대하여는 다음[제2장 제2절] 만주 동포 사회의 지원 활동을 언급할 때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초창기의 통할 문제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만주 동포 사회는 지역을 북간도(동만주)와 서간도(남만주)로 나누어 통할하였다. 인구가 많아서 반으로 나누었고 지리의 차이가 있었고, 동포의 주민이 북간도는 함경도 북쪽이어서 함경도민이 많았고 서간도는 평안도 북쪽이어서 평안도민이 많아 두 지역으로 나누어 통할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그런데 만주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임시정부의 관여도 있었지만 거의 자체적으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임시정부의 통할을 받으려고 했다.
북간도의 경우를 먼저 보면, 대한국민회와 북로군정서가 그렇다. 대한국민회는 구춘선(具春先) 등 기독교 신자와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등 독립군 지도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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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민족운동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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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하여 영도되었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 등에 의하여 영도되었다. 두 단체의 명칭으로 보면 앞의 것은 민사기관이요, 뒤의 것은 군사 단체로 오인하기 쉬운데 임시정부에서는 그렇게 만들려고 종용도 해 봤으나 안 되고, 두 단체는 모두 민사와 군사를 겸하고 있었다. 단지 각기 단체가 담당하고 있는 지역이 달랐을 뿐이다. 때문에 국내 진격전을 비롯한 독립 전쟁에는 각기 성과가 많았지만 임시정부와의 행정적 연결은 모호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행정적 통할을 강화하기 위하여 1920년 10월부터 국민회 관할을 연길(延吉)·화룡(和龍)·돈화(敦化)·액목(額穆)현으로 정하여 간북(間北) 남부 총판부를 설치하고, 북로군정서는 왕청(汪淸)·혼춘(琿春)·동녕(東寧)·영안(寧安)·목릉(穆稜)으로 정하여 북부 총판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총판에서는 각기 단체의 책임자인 구춘선과 서일을 임명하였다.6)그러나 이것은 때마침 혼춘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말미암아 뜻대로 안되었다. [본장 제2절 제1항 참조]
서간도는 대체로 요령성(遼寧省) [奉天省] 방면인데 여기는 당시에 한족회(韓族會)가 동포 사회를 대표한 단체였다. 한족회는 이탁(李沰)·이진산(李震山)·여준(呂準) 등에 의해서 지도되었고 소속 군사 기관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있었다. 한족회는 처음에 임시정부와 독립하여 있었으나 1919년 11월 17일 타협을 보아 임시정부의 통할을 받기로 했다.7)
그 후 이 지방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조직되었고 그것은 다시 대한독립단과 연합하에 대한 광복군 총영으로 발전하였는데 광복군 총영의 조직에는 임시정부가 강력히 관여한 것이어서 임시정부의 통할을 잘 받고 있었다. [본장 제5절 제3항 참조]
그러나 한족회·대한청년단연합회·대한광복군총영 어느 것이나 임시정부의 행정조직으로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1920년 12월 4일 임시정부에서는 이 지방에 간서(間西) 총판부를 설치하고 여준(呂準)을 총판으로, 김형식(金衡植)을 부총판으로 임명하여 연통부 조직을 실현하려고 했다.8)그러나 이 무렵은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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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독립신문≫ 1921년 3월 26일 3면 (위임 통치문제)·1919년 11월 20일 2면
7) ≪독립신문≫ 1919. 12. 25 1면 및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1년 11월 17일조.
8) 앞의 책, 대한민국 2년 12월 4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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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암아 어수선할 때였으니 계획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제2장 제2절 제2항 참조]
제4절 외교 활동
대체로 1931년 이전까지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을 비롯한 유럽에 대한 외교와 미국·소련·중국에 대한 외교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일반적 외교 원칙과 그 원칙의 변화를 먼저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1. 외교 방침
임시정부는 처음에 파리강화회의에 전 외교력을 집중하였으나 그것이 당초의 뜻과 다른 결과를 초래하니 국제 정세를 참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교의 방향을 돌려 활동하였다.
① 처음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 독립의 승인을 얻고 동시에 대한민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독립의 보장)
② 그것이 뜻과 같지 않아서 국제기구를 통한 독립의 보장은 포기하고, 다음에는 열국 정부가 개별적으로나마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교섭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의 승인)
③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장기적 포석에 의하여 각국 정부와 민간 지도자를 상대로 선전 외교를 폈는데 이것은 당장 독립의 보장이나 승인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지원을 획득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독립운동의 지원)
이와같이 임시정부의 외교는 처음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활동에서 출발하여 다음에는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는 정도로 후퇴하였고 다시 독립 운동의 지원을 받는 데로 옮겨 가는 3 단계의 변화를 가지고 있다.
3·1운동 직후 즉 임시정부 초창기에는 임시정부의 지도자 뿐 만 아니라 거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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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자들은 1차세계대전의 전후(戰後) 처리를 하는 파리강화회의 혹은 국제연맹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이 실현될 것으로 어느 정도 믿고 있었던 것은 그 때 여기저기서 생겨난 정부 조직의 선포문 혹은 결의안이나 창립 장정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해)의 임시 헌장 선포문 제7조에서 ‘……인류의 문화 급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이라고 명시했고, 아울러 이미 파리에서 외교 활동을 벌이고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전권 대사의 임명장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12일 국무원 위원 조완구(趙琬九)의 시정연설과 7월 8일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의 시정연설에서도 어느 분야보다 외교 활동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한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에 대한국민의회(연해주) 결의안에서도 제3항에 ‘불란서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송하여 우리의 독립운동과 정부 건설의 승인을 요구하며 국제연맹에 참가를 주장함’이라고 밝혔으며, 아울러 윤해(尹海)·고창일(高昌一)을 대표로 파리에 파견했던 것이다.
다음에 소위 한성정부를 성립시킨 국민대회 결의안 제3항을 보면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할 인원을 선정할 것’이라고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승만·이동휘·안창호·김규식·박용만·노백린 등 거물 급 인사를 대표로 선정하고 있다.
다음에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 장정 제15조에 ‘민국은 국제연맹의 일원으로서……’라 규정하고, 제23조에서 ‘육해군 군비는 국제연맹의 결과를 기다려 이를 실행함’이라고 했다. 이것은 국제연맹에 가입할 것을 당연한 것으로 규정한 것인데, 제23조의 규정은 만일 우리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는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 관계를 규정한다니 강화회의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1)
이상과 같은 임시정부 혹은 그 외 독립운동 지도자의 심사는 1925년 3월 31일 ≪독립신문≫ 사설에서 ‘민국 원년에 만세를 부를 때, 미국의 윌슨을 정의 인도의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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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 p.86. 김원용 ≪재미한인50년사≫ p.452, ‘독립운동에 관한 불온문서 발견의 건’ (대정 8년 4월 13일, 고경 제1127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임정편 II. p.p.1~7 및 p.397과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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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天神)으로 알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대한 독립의 허가장(許可狀)을 내린다고 몽상하던 그 때는 벌써 지나갔다’고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몽상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외교 방침은 장기적(長期的) 독립운동에 적합한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즉 세계 열국 정부에 대하여 개별적인 외교 공세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케 함과 동시에 일본의 부당성을 인정토록하는 방침으로 변경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정부로 승인을 받는 데에는 국제법상 어려운 점이 있어서 이것도 난관에 봉착하였다.
1910년의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이에는 국제법상 계속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즉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망명 정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국제법상 일정한 영토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효성 있는 독립정부를 수립하였을 때 국가가 탄생하는 것으로 보는데 임시정부의 경우 실효성 있게 통치권이 행사되는 정부로 열강이 인정하기에는 힘들었던 것이다.2)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승만(李承晩)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김규식을 전권 대표로, 이관용(李灌鎔)을 부대표로 임명하였다는 것을 통고하는 동시에 1882년 한·미조약 제1조에 근거하여3)미국은 한국 문제에 중재역을 맡아 줄 것을 요구 하였다. 이와 같은 요구는 1919년 6월 14일·16일·27일 계속되었는데4)윌슨의 미국정부는 냉담하기만 했다. 이승만은 미국 외에도 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정부의 수반에게도 비슷한 요구를 했으나 하등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중국 광동정부(廣東政府)의 손문(孫文)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구하니 ‘프랑스 조계(祖界) 안에서 수립되어 그 곳에 있는 정부를 승인하기는 어렵다. 조선 영토 안이면 어디라도 좋다. 신의주(新義州)이건 청진(淸津)이건 단 며칠이라도 행정권을 행사하기만 한다면 곧 승인할 것이다’5)라고 한 것도 역시 그러한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영국·에스토니아 국회에서도 한국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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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기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지위’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p.643.
3) 국회도서관 ≪구한말 조약 휘찬≫ 중권 p.288.
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p.818.
5) 여운홍 ≪몽양 여운형≫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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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된 바 있었으나 이와 같이 임시정부가 세계 각국으로부터 승인 받고자 한 외교 방침이 순조롭지 못하여 외교 활동의 방향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국제적으로 지원하게끔 교섭하는 동시에 일본을 고립시키는 선전 공세의 방침이었다. 1919년의 외교가 파리강화회의와 국제 열강에 대하여 한국의 독립과 정부 승인을 위하여 전개되었는데, 1920년부터는 제3단계의 외교를 폈다. 그것은 1920년 3월 2일 국무총리 이동휘의 시정 방침 연설에서 잘 나타나있다. [제1절 참조] 그 시정 방침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열강에 대하여 독립운동이 지원받을 수 있는 외교 공세를 펴기로 하였다. 세계 열강 중에서도 미국과 중국과 소련에 대한 외교가 임시정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위의 세 나라가 모두 한국과 일본을 중심한 극동 지역에 세력을 뻗고 있어서 국제 정치상의 역학 관계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었고 또 우리의 해외 동포가 거의 그 세 나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임시정부의 외교는 그 초창기에는 강화회의와 강화회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윌슨 정부에 대한 활동에 주력하였고,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세계 열강 특히 미국·소련·중국에 대하여 정부 혹은 민간에 대한 개별적인 외교 공세를 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와 1921년 태평양회의(워싱턴 회의)에서 한국의 요구가 묵살되어 그 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에 실망한 나머지 외교의 화살을 소련으로 돌린 한 때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당시의 소련이 약소민족에 대하여 강렬한 빛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정적 현상에 불과하였고 임시정부의 장기적 외교 경향은 주로 미국·소련·중중에 대하여 독립운동의 지원을 얻기 위한 활동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외 임시정부가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었기 때문에 조계 당국과의 관계, 또 여운형(呂運亨)의 동경행차(東京行次) 같은 특수한 것도 있다.
이와 같은 외교 활동은 임시정부가 곳곳에 외교위원부틀 설치하거나 외교 위원을 파견하여 활동케 했는데 이것은 항목을 달리하여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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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외교에서 주의할 것은 위임통치(委任統治)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임시정부 수립 직전에 이승만이 발언한 것인데 이것 때문에 이승만은 많은 규탄을 받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절대 독립을 외교 방침으로 굳혔던 것이며 간혹 일본의 자치령(自治領) 이야기도 있었으나 조금도 용납되지 않았다.
끝으로 외교 관계 서술에서 미국과 중국에 대한 것은 순전히 외교 관계만을 수록하였고 소련과 유럽에 대한 것은 그 지방 동포 사회의 동향을 약간 첨가하여 뒀다. 그 이유는 제 2장 ‘동포 사회의 지원 활용’에서 소련과 유럽 지방의 동포 사회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또 소련의 동포 사회 동정(動靜)은 외교 관계를 이해하기 전에 어느 정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이다.
2. 외교위원부의 설치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의 활약이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원래 외교위원부의 설치 문제는 미국 동포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1919년 3월 15일 미주·멕시코·하와이 재류 동포 전체 대표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켰을 때 제5항에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한다고 밝혀져 있으니 이것이 외교위원부 설치의 연원이 될 것이다.7)
그리고 4월 14일부터 열린 한인자유대회(연합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에서는 제2항에서 ‘구미 각국에 대한민국 외교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함’이라고 규정하여8)미주 나름으로 구미 외교부 설치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4월 25일에는 필라델피아에 서재필이 주관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부가 설립되어 주로 한국의 독립 운동을 선전하고 있었는데 특히 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친우회를 조직케 하여 후원토록 했던 사업은 괄목할 일이다.
한편 이승만을 국내에서 발표한 이른바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의 자격으로 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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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재미한인 50년사≫ p.363.
8) 앞의 책,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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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워싱턴에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설치하여 외교 활동을 펴다가 8월 25일에는 한국위원회를 조직하고 다시 9월에 그 명칭을 구미위원부로 고쳤는데 구미위원부는 외교 사무 뿐만아니라 구미 각지에서 임시정부의 행정을 대행하고 특히 미주에서 출납되는 정부 재정을 관리하였으니 임시정부의 분견소와 같은 것이었다.9)
그런데 9월 11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에는 구미위원부가 필라델피아의 통신부와 파리위원부를 흡수하여 통할하니 명실 공히 임시정부 외교의 중추가 되었던 것이다.
구미위원부의 조직은 위원장 밑에 선전부와 재정부를 두고 있었는데 구미위원부가 재정 관계를 관장하는 문제 때문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충돌하여 말썽이 된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미주 동포 사회를 분열시킨 점은 구미위원부의 빛나는 외교 활동에 반하여 오점이기도 했다. [제3장 제1절 참조]
이러한 구미위원부는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되자 그 직후인 4월 10일 행정령 제1호로 폐지되었는데 이승만은 이것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1928년에 해체하였다. [주석 9) 참조]
파리위원부는 강화회의 대표단에 의해서 설치되었다. 김규식(金奎植)이 처음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파견된 입장에서는 파리위원부를 설치할 형편이 못되었지만 그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가 대표단의 정위원(正委員)으로 활약할 즈음에 위원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 때 부위원(副委員)은 이관용(李灌鎔)이었고 서기장은 황기환(黃玘煥)이었는데 강화회의가 끝난 후 1919년 8월 8일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나니[미국에서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활악] 이관용이 위원장의 직무를 대리하였다.
그러다가 10월 10일 이관용이 사직하고 파리위원부는 구미위원부의 직할 기관으로 흡수됨과 아울러 황기환이 정식으로 서기장에 임명되어 위원장 직무를 대리하게 되었다. 황기환은 런던 주재 위원으로도 활약하였고 태평양회의 때는 미국에 건너가서 이승만과 서재필의 활동을 돕기도 했는데, 1923년 4월 18일 뉴우요오크에서 심장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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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재미한인 50년사≫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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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하니 파리위원부도 자연 해체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이 외교위원부는 처음에 미주 동포들이 독립운동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 것을 추진하였는데, 그 후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 혹은 대통령 자격으로 직접 설치했던 것이다, 상해의 임시정부에서는 1920년 3월 19일에 비로소 국무원령 제3호로써 ‘임시 외교원제’를 공포하였고, 그 해 9월 2일에는 그것을 국무원령 제5호로 폐지하고, 교령 10호로 ‘임시 주외 외교위원부 규정’을 공포하여 사후에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였다.10)
구미위원부와 파리위원부 그리고 런던 주재 위원에 대해서는 앞에 말하였으니 생략하고 그 외 지역의 외교 위원만 밝히면 다음과 같다.11)
북경 주재 노령 우수리 주재 북경 주재 북경 주재 동삼성 외교 위원장 동삼성 외교 위원
한세량(韓世良) 위혜림(韋惠林)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이탁(李鐸) 오덕림(吳德林)
3. 파리위원부의 활동과 유럽에 대한 외교
(1)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
파리에서 외교 활동이 전개된 것은 1차세계대전 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기 때문인데 여기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하여 전후 세계를 새로 정비할 기미를 보여서 당시 식민지 하에 있던 약소민족에게 큰 기대와 주의를 끌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민족 지도자들 사이에는 3·1운동 전부터 강화회의에 대처한 외교 활동이 추진되어 상해에서는 1919년 2월에 이미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김규식(金奎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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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선민족운동연감≫ p.117.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III.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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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의 중앙 샤토당 가(街) 36호에 한국민대표 관을 개설하고 또 통신국을 부설하였다. 그는 미국인 헐버트(Hulbert)의 도움을 받으며 일하다가 스위스에 유학 중이던 이관용(李灌鎔)을 초청하고 독일에 있던 황기환(黃玘煥)이 파리에 오니 함께 일하게 되었다. 또 상해에서 김탕(金湯)·조소앙(趙素昻)·여운홍(呂運弘)이 와서 힘을 모으니 대표단이 강화되어 더욱 활기를 띠었던 것이다.12)
한편 미국에 있던 동포나 소련에 살던 동포도 파리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미주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은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민찬호(閔瓚鎬)였는데 미국 정부에서 여권을 내주지 않아 떠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대한 국민의회에서는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을 그 해 2월에 파리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들은 소련 국내가 혁명으로 혼란했기 때문에 소련 북쪽으로 돌아 노르웨이·영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은 9월 26일이니 강화회의가 끝난 뒤였다.
결국 파리에서 활동한 것은 상해에서 파견한 대표단의 활약뿐이었는데 김규식은 미주의 국민회에 요구하여 국민회로부터도 대표 위임장을 받았다.
이러한 때에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임시정부에서는 4월 13일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그 신임장을 발송하니13)이 때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에 한국통신국((Bureau D’Information Coréen)을 설치하고 4월 26일부터 유럽 각 신문에 독립운동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홍보(弘報)(Circulaire)≫를 간행하며 우선 한국의 처지와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일에서 출발하였다.14)
한편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그리고 소위 한성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선출된 이승만은 두 정부에서 모두 수반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에 워싱턴에서 자의로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개설하고, 외교적 이점을 고려하여 대통령의 직함으로 미국정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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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파리통신국 ≪구주의 우리사업≫ p.17.
13) ≪조선민족운동연감≫ p.9.
14) 이옥 ‘삼일운동에 대한 불·영의 반향’(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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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하는 일방, 파리에 주재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4월 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는 서재필(徐哉筆)을 중심으로 한인자유대회가 열려 임시정부의 활동과 김규식의 파리 외교를 지원키로 하고, 한국통신국(Korean Information Bureau)을 설치하여 특히 미국정부와 미국인에게 한국의 처지를 이해시키는 데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처럼 임시정부 초창기의 외교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활동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5월 10일에는 한국의 역사·문화·독립·국제적 지위 및 3·1운동, 임시정부의 성립, 일본제국주의 정치 등을 선명하고 한·일 합방의 폐지와 대한민국의 국가 주권을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20개 항목의 공고서(控告書)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아울러 각국 정부에도 발송하였다.
그리고 5월 24일과 6월 11일에는 강화회의 의장 끌레망소(George Clemenceau)에게 한국의 정당한 요구를 승인하도록 노력해 줄 것을 바라는 서한을 발송하였고, 6월 14일과 16일에는 윌슨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런데 강차회의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더니 결국 강화회의의 사무총장 두사다(Dussata)와 화이트(White)의 이름으로 한국 문제는 세계대전 이전의 문제로서 강화회의에서 취급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 앞으로 국제연맹에 물어 보라는 뜻의 회답을 보내 왔다.15)
냉정한 회답이었다. 한국 대표단에게 발언의 기회도 주지를 않았다. 파리통신국의 ≪구주의 우리사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16)
‘그러나 윌슨의 14개조를 기초로 한 평화회의는 유야무야의 사이에 소멸되고, 다만 유럽의 전쟁 당사국 간의 승패 문제만 해결함을 주장하게 된 평화회의는 한국민의 요구를 여하히 동정한다 하더라도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전국민이 움직여 독일·오스트리아와 싸우지 아니한 이상은 더 거론의 재료 될 기회를 얻기 무망이라. 인하여 2천만의 혈성으로 기대하던 바요 동시에 세계 평화의 일대 요건인 한국 문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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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삼일운동에 대한 불·영의 반향’ (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기념논집≫ p.553.
16) ≪구주의 우리사업≫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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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리에 일단락을 고하다.’
그 해 12에 발표한 김규식 대표의 보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17)
‘①…… 한일 합방의 폐지와 국가 주권 승인을 요구하였으나 평화회의에서 공식 회답이 없었다.
② 평화회의에서 승전국의 이권 다툼으로 윌슨의 평화 원칙 같은 것은 논의도 안 되어 한국 문제가 상정되더라도 유럽의 악소국 문제처럼 처리될 희망은 없었다.
③ 각국 대표 중에 한국 문제를 동정하는 사람은 많으나 승전국의 하나인 일본의 반대가 심하여 공식으로 토의할 수 없었다.
④ 한국 문제가 평화회의에서 토의되지는 못하여도 선전 효과는 컸다.’
이와 같이 강화회의에서는 한국 문제에 대한 토의도 없었고 한국 대표단에게 충분한 회답도 없이 6월 28일 대독(對獨)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6월 27일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강화조약에 대하여 대한민국 국민은 하등의 책임을 질 일이 없다고 하는 무책임 선고서를 강화회의 서기국에 제출하였고, 이승만은 파리에 있던 월슨 대통령에게 비슷한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강화회의의 종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김규식은 꾸준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6월 30일에는 미국 대표단에게, 7월 28일에는 프랑스동양정치연구회와 프랑스국민정치연구회에서, 7월 31일에는 다시 프랑스동양정치연구회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설명 혹은 연설회를 개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8월 8일 김규식이 김탕·여운홍을 대동하고 미국을 향해 떠났으니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이관용·황기환이 주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국제연맹과 그 외의 국제단체
강화회의에 대처한 외교 활동은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실망은 컸으나 그것을 통하여 3·1운동과 임시정부에 관한 선전 효과는 대단히 컸다. 강화회의가 끝난 후에 김규식은 8월에 미국으로 갔고, 이관용은 10월에 스위스로 돌아갔기 때문에 황기환이 파리위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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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재미한인50년사≫ pp. 369~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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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을 대리하여 프랑스·영국 그리고 각종 국제회의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주관하였다.
① 국제연맹에 대한 활동
강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의 냉담한 태도에 크게 실망한 임시정부 및 그 대표단의 외교 방침은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강화회의가 한국 문제를 해결은 커녕 토의도 하지 않았고, 극동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산동반도의 독일 이권을 일본에 넘겨줌으로써 일본의 침략 정책을 지원한 이상, 강화회의의 산물인 국제연맹에 대하여도 기대를 걸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한국 문제에 동정적으로 나올만한 미국과 소련이 참가하지 않은 국제연맹이고 또 민족 자결주의 같은 인류의 정의보다 현실적인 국가 주권과 국제 질서를 존중하는 국제연맹이니 임시정부로서 외교의 초점을 국제연맹 보다 각국 정부에 대한 개별 접촉, 혹은 민간 외교의 방면으로 돌렸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상해에서는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9년 7월 의정원 제5회 회의에서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에 대한 토의가 있었고 제출 안건 작성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8월과 9월에 있었던 제6회 회의 때는 헌법 개정 관계로 분주한 가운데서도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 관계 토의가 있었다.18)그러나 상해에서도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가 큰 기대를 걸 수 없다는 점을 곧 알게 되었다.
국제연맹에 대하여 기대를 걸지 않았던 점은 1920년 7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제1차 총회에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19)
그러나 파리위원부는 유럽에 대한 외교를 담당하고 있어서 국제연맹에 대하여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특히 국제사법재판소가 설치될 무렵에는 더욱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것은 파리통신국의 ≪자유한국≫ 1920년 11월호에 ‘국제연맹에 대한 기사(Pour La Société des Nations)’를 싣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데서 짐작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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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임시의정원 기사록(紀事錄)≫ 제5·제6회집 참조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에서)
19) ≪자유한국(La Coree Libre)≫ No, 7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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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20)
‘많은 사람들은 이 기구를 통해서 국가간의 평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우리 모두 이 국제연맹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제연맹의 서비스를 통해 우리 모두가 보호되고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뇌성벽력과 폭풍이 몰아오고 있는데 국제연맹의 훈풍(薰風)이 그를 몰아낼 것이다. … 각자의 차례가 올 것이니 너무 성급히 굴지 말고 기다리자. …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국제연맹이 참으로 정직과 정의로써 일할 때까지 한국이 인내와 신뢰로서 기다렸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글을 보면 당시 국제연맹에 실망한 나머지 그를 공격하고 흑평하던 우리 국내외 지도자에게 신중한 주의를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파리위원부에서는 1920년 4월 23일 쌍모레어에서 열린 강화회의(국제연맹) 최고회(이사회)에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을 조사하여 줄 것과 한국독립안을 토의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고, 10월 12일 이탈리아의 밀랑에서 열린 국제연맹옹호회에 윤해·이관용이 참가 활동하였는데 그 결과로 1921년 6월 10일 옹호회가 다시 제네바에서 열렸을 때 한국 문제가 정식으로 토의되어 각국 대표의 관심을 끌었다. 또 밀랑의 모임 직후에는 프랑스에서 ‘한국민 국제연맹 개진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② 국제사회당 대회
1919년 7월부터 제네바에서 25개국 대표가 모여 열렸는데 파리위원부에서는 8월 4일 조소앙·이관용을 대표로 파견하여 활동케 한 바, 8월 9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21)
1) 본회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승인할 일.
2) 본회로부터 대표를 파견하여 동아 정세를 조사케 할 일.
3) 본회에서 동서로 연락하고 혁명을 촉진케 할 일.
그 회의가 끝난 후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서 국제 사회당 집행위원회가 10개국 대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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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자유한국≫ No. 7. PP.173~176.
21) ≪독립신문≫ 1919년 10월 28일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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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렸는데 조소앙은 여기에 참석하여 ‘각국 대표가 스위스에서 가결된 한국 독립 승인 문제를 본국 국회에 제안하여 통과토록 한다.’는 결의를 채택케 하였고, 따라서 부라쎌에 있던 국제사회당 본부에서는 이듬 해 4월 대한민국정부의 성립과 대한이 독립국임을 승인하도록 국제연맹과 열강에 대하여 요구하게 되었는데 상해의 ≪독립신문≫에서는 이 사실을 4월 6일 호외를 돌려 크게 알렸다.22)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석했던 조소앙은 네델란드를 거쳐 영국·덴마아크·단치히 자유시·볼틱 3국을 경유 소련을 다니면서 외교 활동을 전개한 후 1921년 12월에 상해로 돌아 왔다.23)
③ 국제적십자총회
1921년 1월 15일 이관용은 대한적십자사의 대표로24)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적십자 총회에 참석하여 한국적십자사의 독립을 요구하는 한편 한국에서의 일본의 포악성과 간도(間島)에서의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학살 만행을 폭로하며 적십자 정신에 의하여 규탄 하였다.25)
(3) 파리위원부의 선전 외교
1919년 10월부터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이 위원장 대리를 맡아 일하면서 런던 주재 위원으로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폈는데 연해주 국민의회에서 파견한 윤해와 고 창일이 9월 26일에 도착하여 힘을 합쳐 주로 선전 외교에 힘썼다.
10월 17일에는 프랑스 인권옹호회 간부회의에 한국 문제를 설명하였고, 1920년 1월 4일 국제화평촉진회 주최로 열린 프랑스에 있는 중국 각 사회 단체 연합 대회에서는 윤해·고창일의 환영회를 열고 1910년 할일 합방 조약의 취소와 한국 독립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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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독립신문≫ 1920년 4월 8일 2면.
23) ≪독립신문≫ 1922션 2월 20일 2면.
24) ≪독립≫(독립신문), 1919년 9월 9일 4면과 1921년 2월 17일
2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III. p.242.
이 문헌에는 대한적십자회 대표 이관용이 국제적십자총회에 참석한 것을 1920년으로 수록하고 있는데 ≪독립신문≫ 1921년 2월 17일 3면에는 1921년에 참석하였다고 나타나 있다. (제2장 제2절 제1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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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월 8일에는 프랑스 인권옹호회와 같이 한국 및 중국 문제 대 연설회가 열려 파리대학 샬레(Challaye) 교수, 중국인 사동발(謝東發)·무떼(Moutét)하원 의원이 한국 실정을 소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위원부의 통신국 사업으로 1919년 4월 29일부터 선전지로서 ≪홍보≫를 발간하여 11월 29일까지 계속하였고, 9월에는 ≪한국의 독립과 평화≫란 책자 6천 5백 부를 프랑스 글로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1920년 4월부터는 역시 프랑스 글로 ≪자유한국≫이란 월간지를 번번히 1천부씩 만들어 한국과 한국의 독립 운동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끝에는 1920년 12월에 국한문 혼용으로 ≪구주의 우리사업≫이란 책자를 간행하여 파리위원부를 활약상을 일목요연하게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와 같은 파리위원부의 활약으로 한국 문제에 어둡던 유럽 사람들에게 큰 관심과 동정을 불러 일으켜 임시정부의 선전 외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파리위원부 통신국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의 1백 33개 신문에서 한국 문제를 4백 23건을 게재하였으며 영국을 제외한 유럽 각국 신문에서 확인한 것만 49개의 신문에서 94건을 보도하였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외교의 불모지에서 이룬 성과는 굉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 여론은 유럽 각국 정계에 비등하여 특히 영국 하원과 프랑스 상원에서는 빈번히 한국 문제를 토의하였다. 로마 교황도 한국인의 자유와 행복을 기도한다는 글을 위원부에 보내왔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과 평화’를 읽은 이탈리아 하원 의원 스까노(Scano)는 격문을 보내오는 등 위원부 활동의 성과는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4) 프랑스의 한인국민회
프랑스에는 한국 동포가 극히 적은 곳이었다. 그런데 러시아혁명 후 연합군으로서 북러시아에 출병하였던 영국군이 철병할 때 무르만스크(Mourmannsk)에서 2백 명의 동포가 영국으로 왔는데 파리위원부에서 인수하려고 꾸준히 노력하였으나 대부분 일본에 넘어 가고, 그중 35명만이 파리위원부가 인수하여 프랑스정부와 교섭한 후 프랑스 쉬이프에 정착토록 하였다. 그 후 영국에서 10여 명의 동포가 합쳐져 40여 명이 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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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26)
쉬이프에 도착한 것은 1919월 11일 19일의 일인데 그들은 도착한 날로 한인국민회를 조직하니 이것이 유럽에서 한국인 단체로는 처음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노동자로서 전후(戰後) 복구 사업에 고용되어 있었다. 공사 현장의 임시 건물에서 합숙하며 노동으로써 푼푼의 돈을 모아 6개월 후에는 6천 프랑이란 거액을 파리위원부에 보내서 독립운동에 쓰도록 하였다.27)
그 뒤에 프랑스에는 유학생 약 10명이 합쳐 50여 명의 국민회가 되었는데 1920년 3·1절 기념식 광경은 처절하기만 했다. 그 때 국민회장은 허정(許政)이었다. [앞의 주석 참조]
(5) 영국에서의 외교 활동
영국에 대한 외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20년 10월 3일 파리위원부 서기장 항기환이 런던 주재 외교 위원으로 임명된 뒤부터의 일이다.
황기환의 활동 외에도 앞에서 말한 대로 조소앙이 영국 하원 의원을 상대로 벌인 교섭,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1921년 6월 20일에 그 해 7월 13일로 만기되는 영·일 동맹을 계속하여 체결하지 않도록 교섭하는 것 등이 있기는 했으나28)정부간의 교섭은 큰 반응이 없었고 민간 외교에서 큰 성과를 보았다. 민간 외교에서 좋은 성과를 거들 수 있었던 것은 런던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지의 기자로 1904년 후 두 번이나 한국을 다녀가 1908년에는 ≪한국의 비극≫을 저술하였고, 1차대전 전에는 ≪런던 타임즈≫의 주간(主幹)도 역임한 바 있는 매켄지(F. A.Mckenzie)와 ≪조선의 부흥≫을 쓴 그레이브스(J. W. Graves)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레이브스는 국제사회봉사회를 통하여 한국에서 기독교도가 박해를 받고 있는 모습과 일본의 폭정을 선전하여 친일적인 영국인의 편견을 많이 시정하였고, 특히 매켄지는 앞에 쓴 ≪한국의 비극≫을 재정리하고 또 3·1운동의 양상을 첨가하여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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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① ≪구주의 우리 사업≫ p. 27 및 p.51.
② 현규환(玄圭煥) ≪한국유이민사(韓國流移民史)≫ 상 p.815.
27) ≪독립신문≫ 1920년 5월 11일 2면.
28) ≪독립신문≫ 1921년 8월 15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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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하여 미국 및 영국에 널리 보급시킴으로써 한국에 대한 이해를 크게 높였다. 그 책의 한 토막을 소개하여 둔다.29)
‘정치가들에게도 한 마디 얘기해야겠읍니다.… 한국 문제로 전쟁도 각오해야겠느냐고 여러분이 나에게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읍니다. 오늘날 꿋꿋하게 행동한다면 마찰이 생기기는 하겠지만 위험은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나약하게 행동하면 여러분은 거의 틀림없이 30년 내에 극동 지방에서 큰 전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양 여러 나라 중에서도 그 전쟁에서 가장 큰 부담을 질 나라는 미국일 것입니다.’
그는 3·1운동 후 세계 열강이 한국 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이미 세계2차대전을 예언하고 있었다. 그리고 1908년 ≪한국의 비극≫에서 이미 일본의 만주 침략과 중국 침략을 예언하고 있다. [앞의 주석 참조]
한편 영국의 하원에서는 1919년 7월, 1920년 4월 그리고 8월에 헤이데이(Heyday)·그룬디(Grundy) 의원을 중심으로 한국 문제가 토의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한국에 대한 영국 내의 여론이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포착하여 황기환은 매켄지와 협의하여 1920년 10월 26일 대영제국 한국친우회(親友會)를 결성케 하였다.30)
한국친우회는 영국하원 의사당 6호실에서 결성하였는데 국회의원 17명, 에딘버러 대학장 등 학자 6명, 신문기자 4명, 교회 목사 9명, 귀족 3명 등 모두 62명이 모여 결성했다.
이날 로버어트 뉴우만(Robert Newman) 의원이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관하였고, 매켄지가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규탄하는 긴 연설이 있은 다음 조온워어드(Jhon Word)가 제안하는(크리포드 박사가 대독)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① 한국내 사회·정치·경제·종교에 대한 현황을 널리 선전할 것.
② 한국인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의 회복을 지원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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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광린(李光麟) 역 ≪한국의 독립운동≫ p.227.
30) ≪구주의 우리사업≫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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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한국인의 신앙의 자유를 옹호할 것.
④ 한국에서 정치하 종교적으로 박해받은 사람과 과부와 고아를 구조할 것.
이날 회의에서 한국친우회 역원을 선출하였는데 회장에는 로버어트뉴우만, 명예 서기는 월리엄, 명예 회계는 하이스롭, 간사로 조온워어드·페리·매켄지 등 7명을 선출하였다.
이상으로 유럽에 대한 외교 활동의 서술을 끝맺겠는데 유럽에서의 외교 활동은 1919년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게 되자 파리를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20년 후기부터 그 중심지는 런던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1921년 태평양회의 관계로 황기환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꾸준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던 매켄지도 ≪시카고 데일리 뉴스(Chicago Daily News)≫지로 옮겨 미국으로 건너가니 영국에서의 활동도 전만큼 활발치는 못하였다. 그러나 황기환이 뉴우요오크와 런던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1923년 4월 18일 심장병으로 사망하니 유럽에 대한 외교도 다시 한산하게 되었다.
4. 구미위원부의 활동과 대미 외교
구미위원부는 앞의 제2항 ‘외교인원부의 설치’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의 자격으로 1919년 9월에 이미 8뭘 25일 설치한 한국위원회를 고쳐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에 상해에서 정부가 개조(통합)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니 구미위원부의 조직을 강화하여 기왕에 있던 한국통신부(필라델피아)와 파리위원부를 흡수하여 명실 공히 구미 각지의 외교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구미위원부의 권한과 직무에 대하여 발표한 것을 보면 외교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구미에서 임시정부의 사무를 대행하도록 되어 있다. 발표한 직무와 권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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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재미한인50년사≫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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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집정관 총재는 적임자 3인을 자벽하여서 구미위원부를 조직함.
② 구미위원부의 직무는 구미 각지에서 실행할 정부 행정을 대행함.
③ 구미위원부는 미주에서 출납되는 정부의 재정을 관리함.
④ 구미위원부는 필요할 때마다 예산안을 정부에 제출하며 미주에서 정부에 바치는 의연금·공채금 기타의 세납들의 일체 재정을 수합하여 위원부 명의로 은행에 임치함.
⑤ 재정 출납의 일체 행사는 반드시 집정관 총재의 승낙을 얻어서 이행함.
⑥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위원의 택선은 위원부의 공천을 받아서 집정관 총재가 임명함.
⑦ 구미위원부 위원의 임기와 출척은 집정관 총재가 자의 처단함.
⑧ 집정관 총재는 직권상 책임으로 위원부 사업을 지도함.
이상에서 보면 구미위원부는 임시정부의 대행 기관이며 대통령 직속 기관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대행 기관이면서 정부 내 어느 부처의 감독도 받지 않는 기관인데 그것이 의정원에서 만들어질 것이 아니라 당초 집정관 총재의 자격으로 이승만이 만들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고, 때문에 미주 동포 사회에서도 많은 물의가 있었다.32)
그러나 정부 대행 기관으로서 구미위원부의 활동과 여러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에 살피기로 하고[제3장 제1절 제2항 참조] 여기서는 구미위원부의 외교 활동에 대해서만 검토하기로 한다.
(1) 초기의 대미외교와 그 변질
3·1운동 직후 혹은 임시정부 초창기의 외교는 앞에 파리위원부의 외교 활동을 서술할 때 말한 바와 같이 강화회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에 대한 외교에서는 3·1운동 자체에 대한 중재를 요구하는 활동도 일부 지도자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그것은 1919년 3월 11일 이승만·정한경이 필라델피아에서 당시 미국 국무장관 서리에게 보낸 전문과 16,17일 경 파리에 있던 윌슨 대통령에게 3·1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일본의 만행을 중지시키도록 중재하여 달라는 전문을 보낸 사실로 알 수 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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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재미 한인 50년사≫ p.p.378~386.
33)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p.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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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회의에 대한 외교 활동을 미국에서 시작한 것은 4월 5일 국민회 총회장 서리 백인규가 미국 국무장관에게 파리의 김규식 대표를 외교적으로 승인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 처음인데, 그 후 6월 14·16·27일에 집정관 총재 이승만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이탈리아·중국 그리고 강화회의 의장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김규식을 정식 대표로 인정해 달라는 서한 또는 전문을 발송하는 활동에서 본격화되었다.34)
미국에서의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는 미국정부나 윌슨 대통령이 강화회의에 대하여 영향력을 발휘해 줄 것으로 기대하여 미국정부에 대한 활동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집정관 총재(대통령)가 워싱턴에 있었던 점과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점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태평양 정책은 1905년 7월 태프트·가쓰라 비밀 협정이 말하듯이 전통적으로 친일적이었고, 당초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3년 캘리포니아 헤멭 농장의 한국 노동자 11명이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쫓겨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국민회에서 미국무성에 교섭한 결과, 그 해 7월 2일 재미 한인에 대한 문제는 공사(公事)나 사사를 막론하고 일본 관리를 통하지 않고 한인사회(대한인국민회)와 교섭한다는 국무성의 발표가 있었고35)1914년 4월 6일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 총회’가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36)그 후 한국인들은 미국 혹은 그의 정부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1918년 윌슨 대통령이 전후 수습 방안 중의 하나로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니 동포 사회에서는 미국정부에 큰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정부와 윌슨 대통령은 동포 사회에서 파리에 파견할 대표에게 출국 허가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냉담하였다. 위원부의 활동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냉대를 비롯한 미 국무성 관리들이 비협조적 태도로 처음부터 파란과 모멸을 느껴야 했다. 윌슨 대통령은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여 달라는 진정에 대하여 그것을 일고의 고려 가치조차 없다는 듯 각하한 것이다. 이와같은 윌슨 대통령의 태도는 그가 민족자결주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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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독립운동사≫ 제3권 p.p.818~820.
35) ≪재미 한인 50년사≫ p.116.
36) 앞의 책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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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일본의 세력과 협조를 도모하는 동양 평화의 계획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합법성 인정으로 방해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37)
이와 같이 윌슨 대통령과 미국정부의 태도에 하등의 기대를 할 수 없게 되자, 구미위원부는 장기적 안목에서 미국의 일반 시민이나 지도자를 상대로 한국 독립 운동과 일본의 만행을 선전하는 방법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미국 사회의 여론에 의해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얻자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특히 언론인·종교 지도자·상하 의회 의원의 동조를 얻어 선전 외교에 큰 성과를 보았다.
(2) 위원부의 선전 활동
미국에 있어서 우리의 선전 외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만든 한국통신부의 활동에서 비롯된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확정되던 1919년 9월 전의 선전 외교는 한국통신부의 주관으로 수행되었는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구미위원부의 조직을 확대하여 한국통신부와 파리위원부를 흡수하니 한국통신부의 선전 활동도 명목상 워싱턴에 있던 구미위원부의 통할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통신부는 그러한 일이 있기 전부터 이미 한국의 처지를 미국 사회에 호소하며 1919년 6월부터는 오하이오(Ohio) 주에서 학생들이 발간하던 ≪한국문헌(Korean Publication)≫을 이어받아 ≪한국평론(Korean Review)≫이란 월간 잡지를 간행하여 한국 독립 운동을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선전 외교가 그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이나 동포 사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개별적인 활동은 3·1운동이 미국에 전해지자 곧 시작되었던 것이나 미국에서 계획적인 기구로서 출발한 것은 한국통신부가 처음이었고, 또 선전 외교를 목적으로 발간한 책으로 ≪한국평론≫이 대표적이었다.
구미위원부가 선전 외교로 그 방향을 바꾸었던 때는 위원부의 고문 프레드 A. 돌프는 물론 변호사인 조온 W. 스테커와 ≪인터내셔날 뉴우스 서어비스(1.N.S)≫ 기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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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III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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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제름 월리엄즈를 보강하여 활동하였다.38)
구미위원부의 활동 내용은 선전용 간행물을 배부하는 일, 일본의 만행을 언론 기관에 선전하여 미국 언론지로 하여금 미국 시민에게 알리게 하는 일, 헐버트 혹은 스코필드 같은 한국 독립운동과 깊은 인연을 가진 선교사로 하여금 강연회를 열어 선전하는 일 등이었는데 이 결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친우회가 생겨났고 미국의회에서도 격렬한 토론까지 가져올 정도의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일본 측에서도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재정적인 면과 선전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있음을 말하고, 특히 선전 활동에 대하여는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고 지적하고 있다.39)
그러면 먼저 구미위원부를 중심하여 미국에서 배포된 선전용 간행물을 보면 다음과 같다.40)
먼저 조선총독부 경무국 조사에 의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데 설명은 생략하겠다.
① ≪한국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 켄달(C. W. Kendall)
② ≪한국의 재흥(The Rebirth of Korea)≫ 신흥우(申興雨)
③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 매켄지(F.A.Mckenzie)
④ ≪북미 합중국의 동양정책(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 헨리정[정한경(鄭翰景)]
⑤ ≪한국의 부흥(The Renaissance of Korea)≫ 그레이브스(Joseph Naddington Graves B.D.)
⑥ ≪한국의 어린 순교자(Little Martyrs of Korea)≫ 박영일(朴永一)
⑦ ≪한국정세(The Korean Situation)≫ 걸리크(Dr. Gulrick)
⑧ ≪아시아에 있어서의 독일(The Germany of Asia) ≪맬라티(V. S. Mallath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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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한국독립운동사≫ p.248.
39) 조선총독부 경무국 ‘미국 및 포와 지방에 있어서의 불령선인의 상황’ 대정 10년 3월(SP No.45 # 143 p.57).
40) ① 앞리 Sp No.45 # 143 p.p.58~69 ②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III p.p.847~851 ③ 앞의 ≪독립운동사≫ 제3권 p.810 ④ 손보기 ≪3.1운동에 대한 미국의 반향≫(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p.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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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탄압주의 (Japanese Swordship of Korea)≫ 돌프(Fred. A. Dolph)
⑩ ≪제1차 한국 의회(First Korean Congress)≫ 구미주차위원부 홍보국
⑪ ≪한국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 나다니엘페퍼(Nathaniel Peffer)
⑫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포학(Japanes Atrocities in Korea)≫ 워싱턴 우드워어드 빌딩 732(발행소)
⑬ ≪일본의 대한(對韓) 강권외교(Japanes Diplomacy and Force in Korea) 신한민국(국민회) 북미 지방 총회
⑭ ≪한국개람(Brief for Korea)≫ 돌프(Fred. A. Dolph)
⑮ ≪평화회의(The Peace Conference)≫ 김규식·정한경 등이 각국 대표에게 보낸 글 수록
(16) ≪극동에 있어서의 부채와 신용의 대조(Balancing Debits and Credits in the Far East)≫ 돌프(Fred. A. Dolph)
(19) ≪한국 국민의 요구(The Desire of Korean People and Nation)≫김규식(金奎植)
(20)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매켄지(F. A. Mckenzie)
(21) ≪조선의 독립(The Independence of Korea)≫프랑스 파리의 조선독립운동선전기관(발행소)
이상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조사한 것인데 다음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제3권 제12편 ≪미주 방면의 운동≫에 수록되어 있는 것 중, 위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만 보면 다음과 같다.41)
(22) ≪한국의 사실(Case for Korea)≫ 정한경(鄭翰景)
(23)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for Korea)≫ (16면) 구미위원부 홍보국
(24) ≪민족 자결을 위한 한국의 호소(Korea’s Appeal for Self-Deter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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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제12편 ‘미주 방면의 운동’은 미국에서 이 방면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이정식(李廷植) 씨가 집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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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면) 무어(J. E. Moore)
(25) ≪신한민보≫≪격일간의 신문≫ 대한인국민회
(26) ≪한국정세≫(The Korean Situation) (125면) 기독교연합회 동양선교부 다음에 이상 두 문헌에 없는 것으로 주석 40)에서 밝힌 바의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에서 발견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27) ≪한국친우회(League of Friends of Korea)≫
(28) ≪조선의 정치와 종교(Politics and Religion in Chosen)≫
(29) ≪한국 문제의 다른 측면(Other Side of the Korean Question)≫ 프랑크(Smith H. Frank)
이것 외에 단편적인 것은 많이 있겠으나 생략한다. 그리고 국사편찬위회의 자료에서는 조선총독부의 것만 취급하고 있으니 생략한다. 이와 같은 단행본이나 팜플레트는 당시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보다 상세하게 소개하여 선전 외교에 큰 도움을 줬는데 그 중에서도 동양 선교부에서 발간한 ≪한국의 상황≫은 미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것이 특별히 큰 파문을 일으킨 이유는 미국기독교연합회의 선교부이고, 그것은 유력한 공식 단체인데 미국이 기독교 국가이니만치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을 발간하기에 앞서 선교부에서는 일본정부에 통고했으며 일본의 원경(原敬) 수상은 한국 통치를 개혁하겠다는 변명의 회답까지 한 사실을 보아도 동양선교부의 미국 내 및 국제적 영향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행본에 못지않게 잡지와 신문에서도 한국 문제를 실어 선전외교의 효과를 올렸는데, 잡지의 경우 1919년의 것만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42)
① 필라델피아 대회 결의문 ‘미국에 대한 한국의 호소’≪네이션(Nation)≫ 4월 19일호
② 이승만 ‘한국의 실정’ ≪뉴우리퍼블릭(New Republic)≫ 5월 17일호
③ 서재필 ‘한국에서의 일본’ ≪세계무역보(World Trade Review)≫ 10월호
④ 매켄지 ‘한국의 일본화’ ≪극동순보(Far Eastern Fortnight)≫ 12월 8일호
⑤ 페퍼(Nathaniel Peffer)는 ≪뉴우리퍼블릭≫과 ≪스클리브너(Sclibner’s Magazine)≫에 계속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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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앞의 ≪독립운동사≫ 제3권 p.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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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선세트(sunset)≫ 10월호
⑦ ≪리터러리다이제스트(Literary Digest)≫ 5월 3일호
⑧ ≪세계선교회보(Missionary Review of World)≫ 6월호
신문에 게재된 사실은 말할 수 없이 많고 다양한 것이었던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1919년 3월부터 1921년 9월까지 미국 안에서 한국을 동정한 잡지와 신문들의 논설과 소식 등의 기사가 9천 7백 2건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43)이에 비하여 일본을 동정한 기사도 있었는데 50건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인류 양심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으나 당시의 국제 정치상의 풍토로 본다면 구미위원부의 선전 외교가 크게 작용한 탓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3) 미국에서의 반응
이상과 같이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중심한 임시정부의 대미 외교는 당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매혹한 탓으로 미국 행정부에 총력을 집중하였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후에는 선전 외교의 방향으로 그 화살을 돌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미외교는 임시정부 초기 외교 중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인데 대미 외교의 성과 혹은 대미외교에서 나타난 반응을 정리해 보면 다음 네 가지로 묶어 볼 수 있겠다.
① 미국 행정부의 반응
② 미국 의회에서 나타난 반응
③ 언론계의 동향
④ 일반 민간 지도자의 반응.
위에서 행정부 및 언론계의 반응에 대하여는 이미 언급하였다. 이제부터 미국 의회에서 나타난 반응과 민간 지도자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는데 그 중에서 민간 지도자들이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또는 그들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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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① 앞의 ≪재미 한인 50년사≫ p.395.
② ≪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자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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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 외교를 담당해 주다시피 한 활동은 영국에서 있었던 한국친우회의 활동과 중국에서의 한중 호조사(互助社)의 활동과 더불어 임시정부 외교사상 괄목할 일이다.
당시 미국 행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한국 친우회를 비롯한 각처에서 나타난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긍정적 반응으로 한국 문제는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자못 희망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 한국인은 제2차세계대전 중 카이로와 포츠담회담때 한국독립안이 채택된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연합국의 조처가 패전국 일본에 대하여 한갓 보복 수단으로 취해진 조처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① 한국친우회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주관하던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톰킨즈 박사(Dr. Floyd W. Tomkins) 등 미국의 유력한 인사와 손을 잡고 ‘한국의 독립 사업을 원조하고 한국 안에서 당하는 일본의 압박과 학정을 항의하며 한국의 실정을 선전’44)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서재필은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의 처지에서 한국독립운동을 도울 수도 있어서 미국인들만으로 조직된 한국친우회에 그 자신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톰킨즈 박사 등을 앞에 세우고 실제 중추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국친우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조직된 것은 1919년 5월 16일의 일인데 11명으로 구성된 이사회(理事會)가 주동적 역할을 맡아 있었으며 그 후 미국 각처 17~19개소에 한국친우회의 증설을 보아 회원 1만 명을 헤아렸다.45)[일본 문서에는 3천 명]
친우회의 활동은 한국 실정을 미국의 대중 사회에 널리 알려서 한국독립운동의 동정적 기반을 굳게 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각처의 여론은 미국 행정부와 상·하 양원에 전달되어 정부간의 외교 교섭에도 큰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
친우회의 모임 자체가 선전적 효과로 보아 큰 것이었는데 인쇄물의 배부는 물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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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앞의 ≪재미 한인 50년사≫ p.376.
45) ① 앞의 ≪독립운동사≫ 제3권 p.816.
② 앞의 ≪한국독립동사≫ III p.250
③ 임병직 ≪임정에서 인도까지≫.
④ 조선총독부 경무국 ‘미국 및 포와 지방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상황’ 대정 10년 3월(Sp. No.45 # 143. pp.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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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강연회에서 얻은 선전 외교상의 성과는 매우 컸다. 당시 선교사 화이팅(A.C.Whiting) 같은 사람이 2백66회의 강연을 했다는 사실, 그 외 미국 의회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질 때 한국을 위하여 발언하는 의원은 거의 실증적인 자료를 놓고 신랄하게 일본 및 미국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공박했다는 사실 등이 증명해 준다. 한국친우회의 활동에 대하여는 이미 본 ≪독립운동사≫ 제3권에 근래 미국정부의 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서 새로운 자료를 찾아 검토하면서 이정식(李廷植) 교수가 상세히 서술한 것이니 여기에서는 이만 줄인다.46)
② 미국 의회에서의 반응
미국 의회에서 논의된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하여는 당시 상해의 ≪독립신문≫ 기사와 미국의회의사록(Congressional Record [Senate])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의회의사록 기사에 따를 수 밖에 없다.47)
한국 문제는 미국 의회의 성격상 상원에서 주로 다루어졌는데 1919년 6월 30일에 처음으로 논의되어 그 후 1921년까지 늘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의회에서 한국 문제를 비롯하여 아일랜드·필리핀·이집트 등 약소민족 문제가 토의된 것은 거의 국제연맹 문제에 곁들여 논의된 경향이 짙었으나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에 적극적으로 긍정적 태도를 취하는 데 반하여 의회에서는 부정적 태도가 지배적이었고, 아울러 의회에서는 국제연맹을 공격하고 또 국제연맹에 가입을 반대하는 발언 내용에는 거의 한국의 참상을 소개하고 한국독립운동을 동정하는 내용과 더불어 미국의 극동 정책을 공박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발언 자료는 구미위원부나 한국친우회에서 제공하여 선전 외교에서 일보 전진하여 정치적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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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앞의 ≪독립운동사≫ 제3권 p.p.815,817.
47) 참고 문헌
① 앞의 ≪독립운동사≫ 제3권 p.p.820∼823.
② 앞의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p.p.545∼549.
③ 앞의 ≪재미 한인 50년사≫ p.394.
④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III p.252.
⑤ ≪독립신문≫ 1920년 3월 30일 2면, 6월 1일 1면과 4면, 1921년 1월 15일 4면.
⑥ ≪미국상원의사록(Government Printing Office, Congressional Record (Senate))≫ 58 : 2·3·4·6·7 및 59 : 8 및 60 : 1 및 62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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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 문제에 대하여 특히 인류애를 발휘하여 의회에서 토론하고 있던 의원은 스펜서(Spencer)·포인덱스터(Poindexter)·노리스(Noris)·메코믹(Mecomick)·프랜스(France)와 하원의 메이슨(Mason)이었는데 토의 내용은 광범하게 1905년 후 일본의 한국 침략 시 미국 극동 정책의 기만과 과오에 대한 비판에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 및 3·1운동의 참상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다루면서 자유정신과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반대하는 발언 내용에서 국제연맹이 한국 문제 같은 것도 해결 못하는 무력한 것, 오히려 중국에서의 독일의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것으로[산동문제] 일본의 한국 지배를 공고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지원해 주는 국제연맹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있다.
이와 같이 미국 의회에서 보인 한국 문제에 대한 반응은 기대할만한 것이었고, 실제 구미위원회나 상해에서도 큰 기대를 가지고 주시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회에서도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은 반대하면서 한국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의원이 과감하지 못하고 현실적이며 근시안적인 정치상의 계산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상정되면 외교위원회에 돌려 사실상 보류시켜 버리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거니와 1920년 3월 아일랜드 문제와 함께 한국 문제가 상정되었을 때 한국 문제가 34대 46으로 부결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부표를 던진 9명의 의원과 기권표를 던진 16명의 의원은 그 후 구차스러운 변명으로 한국 문제를 동정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으나48)그 뒤에도 상원에서 커다란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미국 정치인의 통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밟는 동안 임시정부의 선전 외교의 측면에서는 굉장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으며 미국 행정부의 태도에 비한다면 의회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 의회에서 한국 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토의하지 않고 국제연맹 혹은 미국의 극동 정책과 더불어 토의한 것은 수 없이 많았던 일이었는데 이것이≪연합통신(U. P. : United Press)≫[U.P.I.의 전신]을 통하여 세계 각처에 전파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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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독립신문≫ 1920년 6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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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갔으니 국제 여론에도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
(4) 미국의원단의 극동 시찰
1차 대전의 전후(戰後) 처리에서 가장 잘못된 것 중의 하나가 극동 문제였다. 한국 민족의 호소를 묵살했던 것은 물론, 중국에 있어서 산동 반도에서의 독일의 이권을 일본에 넘겨줌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지원하고 보장해 줬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임시정부로부터 공박을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중국정부나 중국 혁명 영수 손문(孫文)으로부터도 신랄한 공박을 받아야 했다. 베르사이유 체제에 있어서 극동 지역의 논란은 미국 의회에서 크게 비등하여 국제연맹에 가입을 반대하는 발언에서는 거의 극동 문제 처리의 오류를 들추고 있었다.
이에 미국 의회에서는 극동 지역 시찰단이 관광단이란 명목으로 조직되어 1920년 여름 중국과 한국의 여러 곳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 민족은 강화회의나 미국측이 한국 독립 문제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던 것을 생각하여 이미 그들에 대한 기대는 퇴색한 때였으나, 약소민족의 처지로서 독립을 위하여 보탬이 되는 것이라면 작고 큰 일 혹은 쓰고 단 일을 고르거나 주저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상해와 국내의 지도자가 긴밀히 연락하며 외교 공세를 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외교 공세를 펴면 그에 못지않게 일본 측에서도 공세를 취하는 것인데 이런 경우 일본은 표면적으로 공세를 취하지만 우리는 일본의 눈을 피하여 비밀히 계획을 추진하여야 했다. 일본측에서는 ‘조선인이 일본 통치에 만족한다.’ 는 것과 ‘일본 통치의 결과 모든 면에서 조선 사회가 발전하였다’고 하는 연극을 꾸며서 시찰단을 현혹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시찰단을 최대로 환영하면서 ‘일본의 부당한 지배와 포악성’ 그리고 ‘새로 만든 도로(道路)를 보고 그 도로를 만든 일본의 진정한 동기와 ……… 문명식의 감옥을 보고 그 곳에 갇혀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애국자 또는 기독교도’49)라는 점을 파악케 하여 한국독립운동에 유리한 결론을 갖고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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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대한 전국 인민 대표의 ≪진정서≫ 내용에서. (조선총독부 ‘미국 및 포와 지방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상황’ [Sp No.45 # 143 p.p.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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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임시정부는 미국의원시찰단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안창호가 그 위원장을 맡아 6월 28일에는 환영 및 외교 예산 1만 1천 4백 원을 계산하기에 이르렀다.50)
그리고 정인과(鄭仁果)·여운형(呂運亨)·이희경(李喜儆)·여운홍(呂運弘)·이유필(李裕弼)·서병호(徐丙浩)·김순애(金淳愛)·황진남(黃鎭南)·신국권(申國權)·임춘희(任春熙) 등을 위원으로 선임하여 8월 5일 상해에 시찰단이 상륙하여 중국에 머무는 동안, 곳곳을 따라 다니며 진정서를 전달하는 등 외교 공세를 전개하였다.51)
한편 안창호는 오희문(吳熙文)·김인근(金仁根) 등을 국내에 파견하여 양기탁(梁起鐸)·이상재(李商在) 등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고 국내와 상해를 연락하던 사람 중에 당시 동아일보사의 장덕준(張德俊)이 있었는데 그는 통신원을 가장하고 북경에 머무르면서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였고52)또 북경에서 여운형·황진남과 함께 시찰단을 방문하여 영문으로 만든 ① ‘한국 헌법’ ② ‘한일관계’ ③ ‘일본인의 여러 불법 행위’의 책자를 제공하며 일본의 한국 통치 실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53)
그리고 만주에서는 광복군 총영의 오동진(吳東振)이 김영철(金榮哲)을 단장으로 하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국내에 파견하였으니 이 결사대는 관공리의 퇴직과 일제에 대한 협조를 단절하라는 선언문 4만 매를 살포하는 한편, 8월 3일에는 평양의 평안남도 경찰부를, 15일에는 신의주 철도 호텔을, 9월 1일에는 선천(宣川)경찰서를 공격하여 한국 독립 운동의 증거를 보였다.
원래 9월 24일 사찰단이 서울에 도착하면 모든 관공서를 폭파할 계획이었으나 그것은 성공하지 못하였다.54)
시찰 의원이 만주 봉천을 출발하여 8월 24일 서울에 들어왔는데 그들이 통과할 때 경의선(京義線) 철도 연변 의주(義州)·곽산(郭山)·안주(安州)·개성(開城) 등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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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조선민족운동연감≫ p.111(1920. 6. 28).
51) ① 앞의 책 pp.113∼115(1920. 8. 5∼20).
② 안창호 일기 1920년 8월 15일부터 20일까지 (주요한≪안도산 전서≫(p.p.768∼771).
52) 앞의 Sp No.45 # 143 p.33.
53) ≪조선민족운동연감≫ p.114(1920. 8. 16).
54)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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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시위가 있었고, 선천의 미국인 선교사 윤산온(尹山温)은 ‘대한독립승인청원서’를 의원들에게 전달하였다.
서울에서는 대한중흥단(大韓中興團)의 지도로 시장의 문을 일제히 닫고 무언의 시위에 들어갔으며, 8월 25일에는 종로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환영 대회가 베풀어졌다. 그러나 당초 여기에 참석키로 된 의원들이 일본경찰이 신변을 보증 못한다는 협박으로 말미암아 불참하고, 단지 해리스 의원만이 참석하였다. 8백 명의 군중은 해리스 의원을 맞아 환영 대회를 열었는데 그것도 종로 경찰서장이 진두지휘하는 40명의 경찰에 의해서 방해되고 말았다.55)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벌인 외교 활동은 미국 의원들에게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여 의례적이었을지 몰라도 한국 독립 문제에 동정적 태도와 언질을 남겼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동경을 경유할 때 그곳에서 일본의 집중적인 외교 세례를 받고 돌아갔으니 서울에서 생각했던 때와 심경의 변화가 없었던지 모르겠다. 하여튼 극동 시찰의 결과가 미국에서 전환을 이룰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5)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 활동
1921년 한국의 독립 문제를 호소할 수 있는 기회가 또 다시 왔는데 그것은 그해 11월 11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인 소위 워싱턴회의였다.56)이 회의는 미국의 하아딩(W. G. Harding) 대통령이 주선한 것인데 해군 군비 축소 문제와 태평양지역 문제(원동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열린 것이다.
1919년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에서 실패한 임시정부 또는 구미위원부는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실망도 컸지만 태평양회의는 특히 태평양 지역의 원동(遠東)[동북아시아] 문제를 토의한다는 국제회의였으니 외교 능력을 총동원하고 집중하였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7월 25일부터 그 대책을 협의하기 시작하였고, 구미위원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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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① ≪한국독립운동사≫Ⅱ p.p.109∼110.
② 애국동지회, ≪한국독립운동사≫ p.p.234~36.
③ ≪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26일자 사설 및 9월 14일자.
56) 11일은 1차대전 전몰장병묘지참배, 12일은 각국 대표의 기조연설, 14일부터 토의가 시작되었다. ≪독립신문≫(1921년 11월 19일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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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자 통신 제30호에서 ‘한일 양국이 대 판결을 할 기회를 놓치지 말자. 대한 국민들아 ! 1921년 11월 11일 워싱턴 만국 대표자회, 이 기회를 !’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태평양회의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 또 그 기대는 단순히 선전적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니라 한국 독립 문제를 직접 다루어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기대했다는 사실은
① 7월부터 상해나 워싱턴에서 그 대책이 논의되었고
② 상해에서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가 8월 13일에 결성되어 8월 중 3회의 총회를 열었고, 그 해 12월 22일까지 9회의 간사회와 여러 차례의 강연회를 열었으며
③ 후원회는 규칙을 만들고 예산을 세워 적극적인 모금 운동에 나섰고 홍진(洪震)을 간사장으로 하는 중진급 간사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선전(宣傳)≫을 발간했고
④ 국무회의에서도 여기에 대비한 문서를 닦고 의정원에서는 대통령 이승만을 대표로 구미 위원장 서재필을 부대표로 선출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⑤ 뉴우요오크에서도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자금 모집 등 각 방면의 활동이 전개되었고
⑥ 선전 외교상의 효과라면 같은 무렵 세계 신문 대표회도 열렸는데 그 모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등을 종합하면 쉽게 판단이 갈 것이다.57)
즉 구미위원부와 파리위원부가 1919년 이래 벌인 선전외교는 미국과 영국에 한국친우회까지 조직되었고 아울러 한국 문제는 세계 문제로 올라서게 되었으며 미국 의회에서는 몇 차례 정식 의안으로 상정되어 논의되었고, 또 각종 국제회의에서도 큰 관심을 표시하고 있던 당시였으니, 그러한 때에 태평양회의가 열린다는 것은 강화회의 당시에 비교하여 임시정부 외교에서 유리한 계산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임시정부 혹은 독립 운동자는 태평양회의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고 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서재필을 대표로, 정한경을 서기로, 미국인 돌프와 토머스(Charles S. Thomas)를 고문으로 하고 영국 주재 외교 위원 황기환을 불러 일을 돕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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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조선민족운동연감≫ p.p.194~210(1920년 7월부터 12월까지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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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활동을 폈다.
활동의 구체적 내용은 미국과 아시아 동포 사회에서 태평양회의에 대한 인식을 높이며 활동 경비를 모금하는 일방, 각국 대표단 특히 휴우즈(국무장관)를 단장으로 하는 미국 대표단이 우리의 요구에 동조토록 접촉하기도 하며, 각종 진정서를 전달하면서 우선 한국 대표단이 참석 발언하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한국 대표단이 태평양회의에 대한민국의 ‘요구서’를 제출함은 물론 미국 대표단에게도 정식 공한을 발송하고, 한편 외교후원회에서도 선언서를 전달하였으며 국내의 각계각층을 대표한 한국 인민의 진정서 ‘한국 인민 치(致) 태평양회의서’를 보냈다.58)
그리고 한·중호조총사(韓中互助總社)와 한·중협회(韓中協會)에서도 결의문과 전보를 전달하였다. [본 절 제6항 참조]
태평양회의는 1922년 2월 6일까지 열렸는데 그 동안 상해의 외교후원회와 구미위원부가 총동원된 한국대표단의 활약은 치열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래 약소민족의 문제 때문에 열린 회의가 아니라 강대국의 이권 재조정 문제로 열린 회의였으니 한국 민족의 기대와 소망은 파리 강화회의 때와 다름없이 묵살되고 말았다.
이 회의 결과로 임시정부 혹은 한국 민족 운동자가 가지고 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 국가에 대한 기대는 거의 완전한 실망으로 변하였다. 강화회의의 결과가 그러했고 국제연맹이 그랬기 때문에 이미 그들에게 실망한 바이었으나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다시 한번 기대를 걸었던 것도 사실인데 여기에서도 또 냉대 받고 한국의 요구가 묵살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일본제국주의의 본질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상황에 대하여 공격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그들은 대전 중에 선포한 고귀한 이상을 어느덧 포기한 채 약소국가를 권력으로 통치하려는 완력 정치의 존속을 그대로 시인하고 있다59)’고 통탄하였고 당시 하와이에서 열린 세계 기자 대회에 참석했던 동아일보사 김동성(金東成)은 ‘종래 미국 및 그 외 외국인이 조선 독립을 찬조 동정하는 것 같은 태도는 성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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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① ≪독립신문≫ 1921년 11월 19일 1면과 2면 및 11월 26일 3면 및 1922년 1월 1일 2면.
② 대정 11년 ≪조선치안상황≫ 2 (Sp No.45 # 150 p.p.256∼268).
59) 앞의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p.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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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 것이 아니라 필경 종교 선포의 수단’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60)그리고 ‘평화사업이라 하며, 인도 사업이라 하며 약자는 그 회의 그 사업에 대한 지위가 회사의 용인과 같았다. 어떠한 발언권이 유하였으며……’61)라는 ≪동아일보≫의 논설문 등, 이러한 데서 태평양회의 결과에 대한 한국인의 심정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 활동이 즉시에 기대했던 결과는 거두지 못했어도 세계에 대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이 형식적이거나 감상적이 아닌 점을 실증하였고, 또 선전 외교상의 효과로 본다면 수확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워싱턴회의에 제출된 여러 가지 한국 관계 문서는 그 후 ‘군축회의에 대한 한국의 청원’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국회 인쇄물로 간행되었던 것도62)그것의 한 보기일 것이다. 그런데 태평양회의가 한국에게 유리한 결말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임시정부로서는 가능한 외교 수단을 다했기 때문에 도리가 없었던 일이지만, 외교적으로 실패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대내적으로 독립운동 거리에 심각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내각 총사퇴·의정원과 대통령의 대결, 의정원에서의 정부 개혁에 대한 논의, 국민대표회 추진 운동 등 대단히 혼란한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제3장 제2절 제1항(4) 및 제3절 제1항 참조]
5. 소련에 대한 외교1)
(1) 대소 외교의 특수성
임시정부 초창기의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와 소련과의 외교 관계에는 다른 나라와의 경우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수한 점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그 특수성을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두 정부 간에 외교 관계가 예상 외로 빨리 성립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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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앞의 Sp No.45 # 150 p.p.326∼328.
61) 정언생(鼎言生) ‘평화의 장래가 여하’ (≪동아일보≫ 1922년 2월 12일 1면).
62) 앞의 ≪독립운동사≫ 제3권 p.829.
1) 임시정부와 소련과의 관계는 그 자료의 제한 때문에 모호한 점 또는 해석이 구구한 것이 가장 많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구구한 것을 모두 고증할 겨를은 없다. 특히 연대·인명·지명 등은 책마다 다르게 표시된 것이 많은데 여기서는 특별한 것을 제외하고,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제1권과 제2권(아시아문제연구소 발행)을 주로 참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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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임시정부 일방적 외교가 아니라 쌍방이 모두 외교 관계 성립을 추진하고 있던 점.
세째, 국제 관계 때문에 서로 비밀외교를 하고 있던 점.
네째, 외교 관계에서 공산당이 중매적 역할을 맡아 있던 점.
이상과 같은 특성을 보다 상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두 정부 간의 외교관계를 빨리 성립시킨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겠는데 임시정부와 소련정부와의 외교관계 성립이 다른 나라와의 관계보다 빨리 이루어졌다면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임시정부에 공산당 세력이 크게 관여하고 있었던 것.
② 초기의 임시정부 지도자가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던 것.
③ 파리강화회의와 태평양회의를 통해서 서방 국가에 실망하여 반사적으로 소련에 접근한 것.
이와 같은 요인이 한·소 관계를 빨리 성립시킨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에 공산당 세력이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물론 이동휘(李東輝)가 국무총리로 있었던 것을 말한다. 이동휘에 대해서는 그가 공산주의자인가 아닌가 하는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공산주의의 초보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라도2)그는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당수였고, 그가 국무총리로 취임하기 전에 이미 한인사회당 당수로서 소련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국무총리에 취임한 후에도 소련 볼셰비키사상에 철저한 박진순(朴鎭淳)과 박애(朴愛) 등이 이동휘의 참모격으로 상해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것 등을 고려하면 재론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자가 국무총리를 맡고 있어서 말하자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연립 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것이 임시정부가 소련과 접근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촉진시킨 첫 번째의 이유가 되었던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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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① 여운형(呂運亨) 조서(調書) p.510 및 p.514.
② 이만규(李萬珪) ≪여운형 투쟁사≫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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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한·소 관계를 촉진한 이유가 되었던 것은 3·1운동 후, 사상적으로 급격한 전환 시기를 맞이하여 임시정부 지도층 인사의 사상이 방황하고 있었던 경향이다. 이것은 당시 한국 민족 지도자 전반에 걸친 특징이기도 하며 한국 독립 운동의 단면을 엿보게도 하는 것인데 지도층 인사가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 주는 몇 가지 실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광수(李光洙)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지적할 수 있다.
‘동양 평화의 견지로 보건대 위협이던 아국(俄國)은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라고 말한 점에서 이광수를 비롯한 당시 동경 유학생들의 소련을 보는 눈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이 1920년 폐간됐던 때 안창호·정인과(鄭仁果)·황진남(黃鎭南)이 프랑스 영사를 방문하여 사후 수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프랑스 영사가 ≪독립신문≫은 독립에 관한 것만 아니요 사회주의를 선전하니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난 ≪독립신문≫ 논조(論調)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3)
그리고 1919년 3월에 조직된 서울의 대동단(大同團)이 그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점4)[제2장 제2절 참조] 그리고 박은식(朴殷植)이 그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소련을 가리켜
‘전제 정치를 전복하고 각 민족에게 자유와 자치를 선포하며 극단의 침략주의에서 극단의 공화주의로 일변하였으니 이것이 세계 개조의 첫 번째 동기였다’5)
고한 것, 그리고 임시정부 군무총장이던 노백린(盧伯麟) 같은 사람이 상해에서 청년들에게 볼셰비키 혁명을 돕는 시베리아 전선에 갈 것을 권유하고 있는 점6)등이 사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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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한 ≪안도산 전서≫ p.753(안창호 일기).
4) 조선 출판 협회 ≪조선병합10년사≫ p.509.
5)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p. 59(1946년 서울신문사).
6) 김홍일 ≪나의 증언≫ (≪한국일보≫ 1972.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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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을 나타내고 있던 실례일 것이다.
이와 같이 지도층이 사상적 정립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독립운동의 자세가 확립되지 못하여 민족주의·자유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의 언저리에서 방황하고 있었으니 대중의 동향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소 외교 관계의 성립에서 또 하나의 촉진제가 되었던 것은 파리강화회의와 특히 태평양회의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한국 문제를 냉대하자 실망하여 민족주의자들도 소련에 관심을 쏟고 또 기대를 걸었던 점이다. 이것은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 대표 대회에 참석한 김규식(金奎植)이 미국 기자에게 ‘우리가 미국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졌으나 이제 실망한 나머지 이곳에나 희망을 걸어 보려고 하는 뜻에서 참석하였다’7)라고 말한 토막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앞에서 국제연맹과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를 서술할 때 이미 말한 바와 같이≪본절 제3항과 제4항≫ 월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당시 국제회의에 대한 큰 기대가 허무하게 됐을 때 독립운동자는 물론 국내에서도, 그리고 친미적(親美的) 인물의 대표자 이승만까지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 대하여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리고 1920년 미국의원단이 중국에 왔을 때, 북경에 파견된 안창호는 8월 17일 북경대학 학장 채원배(蔡元培)와 회담한 석상, 8월 19일 미국의 주중 대사를 지낸 바 있는 레인치(Paul Reinsch)와 회담한 석상, 그리고 1921년 2월 3일 노백린(盧伯麟)과 만나 시국 대책을 논의한 자리에서 임시정부는 소련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8)
그런데 한편 소련에서는 원래 유럽 공산화에 주력하다가 여의치 않아 1920년부터는 아시아로 그 방향을 돌려 특히 아시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극렬한 찬사와 지원을 공언하고 있었다.9)그리고 1920년 7월과 8월의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는 약소민족 또는 식민지 문제에 대한 토의와 결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1920년 9월에는 중근동회의(中近東會議), 1921년 1월에는 소련 내의 터어키계제민족공산주의회의(土耳其系諸民族共産主義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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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p.549
8) 앞의 ≪안도산 전서≫ p.p.769~774.
9) 앞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제1권 p.p.157~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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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에는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를 열어서 코민테른대회에서 결의한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구체화하고 있었다.10)
이럴 때에 임시정부는 강화외의와 태평양회의를 통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에 실망하였으니 반사적으로 소련에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상적인 이유가 아니라 독립을 쟁취하려는 일념에 불타고 있던 때였으니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약소민족의 동향을 포착한 소련은 태평양회의 종막에 즈음하여 극동 인민 대표 대회를 열었으며 한국 독립 운동자들은 다시 이 회의에 기대를 걸고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김규식을 비롯하여 많이 참가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소련이 약소민족에 대하여 매혹적인 정책을 채택한 데에는 소련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 일반 이론에 입각한 국제 혁명 노선이었고, 현실적으로는 특히 시베리아 문제 때문이었다.
국제 혁명 노선으로 보면 소련이 피압박 민족이나 피압박 계급과 연합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에 있어서 일단은 일본 통치를 제거한다는 점에서 소련과 임시정부의 요구가 합치되었다. 그리고 소련은 시베리아 문제에서 당시 시베리아에 한국인 동포가 약 20만이나 거주하고 있었으니 우선 이 한인(韓人) 사회에 대한 볼셰비키 혁명의 필요가 있었다. 또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 반대 세력인 여러 갈래의 백군(白軍)이 강하게 저항을 하고 있던 때였는데, 여기에 일본군이 진주하여 그 백군을 지원하고 있어서 시베리아에서 소련의 혁명 과업이 암초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진주는 한인 사회에도 심각한 반응을 불러 일으켜 시베리아와 만주는 물론, 상해에서도 독립군이 시베리아로 몰려가 항일 전선을 구축하여 활동하니 소련으로서는 당장 한국독립군의 힘을 빌려야 했다. 이러한 소련의 계산은 1922년 말 일본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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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소련은 혁명 직후에도 1917년 11월 8일 ‘평화에 관한 법령’ 11월 15일 ‘러시아 인민의 권리 선언’ 12월 3일 ‘러시아 및 동방의 전 이슬람 근로자에게’라는 발표를 통해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선언과 같은 것이 있었으나 그 때는 아직 전쟁중이어서 널리 알려지지도 못했고, 전쟁 후에도 소련의 단독 강화 및 소련의 대외 정책 때문에 연합국(영·불·미·일)이 소련에 진주한 사태가 벌어졌으니, 약소민족으로서 소련에 관심할 수 없었으며 국제문제에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 정책에 관심을 쏟았는데 이때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니 크게 기대를 걸었던 것임. (앞의 책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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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퇴하고 백군을 소탕했을 때 고려공산당을 해체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완전히 통제했던 사실이 증명한다.
하여튼 처음에는 일본군의 진주와 더불어 한국인의 독립을 위한 반일적(反日的) 요구와 소련의 혁명을 위한 반일적 요구가 현실적으로 일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소 외교의 성립을 촉진하였는데 이러한 두 정부의 요구에 의하여 성립한 외교 관계이기 때문에 한·소 외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에 대한 임시정부의 일방적 외교와는 달리 한·소 쌍방적 상호적인 외교 관계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소련은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1917년 단독 강화를 계기로 연합국으로부터 고립되었고, 과거의 러시아 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을 폐기함으로써 국제 신의를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에는 영·불·일·미국 군대가 소련에 진주하여 레닌 정부는 위급한 지경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소련에 한국 임시정부가 공공연히 접근한다는 것은 국제 외교상 고려할 문제였다. 그리고 소련도 한국독립군을 공공연히 지원하여 일본에게 시베리아 진주의 구실을 보태어 준다는 것도 고려할 문제였다.
여기에서 두 정부는 비밀 외교란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것이 대소 외교의 세번째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 소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달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소련은 그 원대한 목표를 인하여 한국 임시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에 접근시켜야 하는 점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한·소 외교에서는 정부와 정부가 직접적으로 교섭하는 외교가 아니라 공산주의 단체를 매개자(媒介者)로 한 외교 관계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과 그 대표인 이동휘는 한·소 외교 관계를 독점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혹자는 대미 외교에 있어서 구미위원부의 위치를 대·소 관계에 있어서 한인사회당의 위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나 구미위원부는 대행자(代行者)였지 매개자는 아니었다.
그러면 한·소 외교 관계를 이해하자면 먼저 당시 공산주의 단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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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고려공산당의 동향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대소 외교는 공산주의 단체를 매개자로 하여 수행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로서는 직접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원했지만, 소련이 국제 공산주의의 노선을 좇는 이상 어느 나라의 정부보다 그 나라의 공산당을 중시할 것이고, 더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처럼 통치권의 효력이 본국에 미치고 있지 않는 경우에는 공산당에 비중을 더욱 크게 두었을 것이다. 또 임시정부에 관여하고 있던 이동휘를 중심한 한인사회당도 대소 외교를 독점하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1920년 1월 22일[혹은 1919년 10월]11)국무위원들이 모스크바 외교원으로 안공근(安恭根)·여운형(呂運亨)·한형권(韓馨權)을 선임하였는데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한인사회당 당원인 한형권만을 보냈고 같은 무렵 정예 당원인 박진순(朴鎭淳)·이한영(李漢榮)·박애(朴愛)를 파송하여 힘을 모으게 하는 한편,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토록 했던 사실이 입증한다.
그러면 임시정부의 대소 관계 그리고 소련의 자금 문제와 소련이 개입된 국민대표회와 민족연합전선 문제를 파악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와 소련 사이에 개재하고 있던 한인사회당 혹은 그 후신인 상해의 고려공산당과 그에 맞서 있던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당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어느 것이나 소련이 관여하여 1918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르쿠츠크에서 먼저 조직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두 곳의 공산당이 1922년 코민테른에 의해서 해체될 때까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은 연표를 만들어 놓고 검토하기로 한다. 연표에 국민대표회 관계를 첨가해 둔 것은 임시정부와 대소 관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문제에 관한 상세한 것을 여기서 살필 수는 없으니 다음의 표를 보면서 몇 가지 기억해 두어야 할 것만 지적해 둔다.
①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湖) 서쪽에 있으며 1919년 3월 2일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이 결성된 후에 그의 동양 비서부가 설치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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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주석 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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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에 관한 연표
상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비고
1918. 6. 26. (하발로프스크) 한인사회당(그레고리노프의 후원)
1918. 1. 22 (이르쿠츠크)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 지부
소련 볼셰비키 당의 주선으로 창설
※ 1919. 4. 25(블라디보스톡) 한인사회당 대표자 대회. ※ 1919. 9. 당수 이동휘가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어 상해에 감(한인사회당이 실제 상해로 옮긴 셈). ※ 후원자 그레고리노프 사망 (1919. 8. 28).
1919. 9. 5(이르쿠츠크) 전 러시아 한인공산당 ※ 명목상 독립단체로 발전함(스미야스키의 후원)
한인사회당에서 코민테른 제1차 대회에 참석하여 자금을 얻어 오다가 이르쿠츠크에서 9. 10. 한인공산당에게 뺏김(이때부터 두 파의 충돌이 계속됨).
※ 1920. 1.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원조 자금 운동.
※ 시베리아 전체 한인 사회에 선전 활동
1920. 3. 블라디보스톡에 이동휘 계통의 한인사회당이 생겼는데 1919. 7.에 만든 당을 개명한 것임.
1920. 5. (상해) 공산주의자 그룹(모스크바 외교의 성공과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대비하여 조직함) ※여운형·신채호·조완구·안병찬·조동호·김두봉 등이 참가
1920. 7(이르쿠츠크) 전로 고려공산당(고려 공산 단체 제1차 대표자 대회를 열고, 그전까지 이르쿠츠크에 한정됐던 것을 전 러시아의 한인공산당으로 확장함)
※ 모스크바에서 상해파가 우세함 (1920. 여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상해파 박진순이 한국 공산주의 단체 대표로 참석). ※ 1920. 7 대한국민의회가 전로 고려공산당의 영향 하에 들어감.
고려공산당 (소련의 자금 문제로 상해에서 이탈한 사람을 규합하여 전 러시아공산당 제1차 공산주의자 대회를 열고 개편 개명함).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 고려부 설치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당과 이신 동체.
유시 참변이 일어나고 극동공화국 원동부 한인부 몰락함.
※ 1921년 여름부터 이동휘는 모스크바와 시베리아에서 세력 만회를 위하여 활동.
1921. 7. (상해)고려공산당 상해 지부(여운형·김성겸·조동호 등인데 소련 자금 문제로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이탈함)
※ 모스크바·시베리아·상해에서 이르쿠츠카 고려공산당이 우세함. ※ 1221. 6. 코민테른 제3차 대회.
※ 1922. 5. 10. 국민대표회 준비위원회 (상해) (여운형의 개입) 1922. 5~7. 임시 연합 간부 회의 (치타) (두 파의 통합을 위한 4인 대표 회의인데 그해 11월에 국내 대표를 포함한 연합 대회 개최에 합의).
1922. 1. 21.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 ※ 소련은 한국 민족의 연합 전선을 종용함. ※ 코민테른에서 두 파의 고려공산당 통합에 직접 개입.
1922. 11. (베르흐네우진스크)고려공산당연합대회(대표 자격·표결 문제로 실패함)
1922. 12. 두 파의 고려공산당에 대한 해체 명령 (코민테른)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민족부 극동 총국 블라디보스톡 지부 고려국 설치(극동 총국에 소속하는 작은 부서로 전락함).
※ 고려국은 1924. 3. 조직국으로, 그리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의 결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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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1. 3. 국민대표회
6. 7. 한국정부(국민대표회 창조파의 단독 정부)
1923. 8. 창조파의 한국정부를 러시아에 설치하려고 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윤해·신숙 등 40명이 추방당함.
※ 한형권이 소련 자금을 가지고 1922. 11. 상해로 옴 (국민대표회 자금으로 이용 함). 소련에서 민족 운동의 연합전선을 모색하여 지원함.
있었고, 한인사회당의 시베리아 근거지가 됐던 치타는 이르쿠츠크보다 동쪽에 있으며 극동공화국의 서울이었다. 극동공화국은 소련이 혁명의 전략상 시베리아 동부 지방을 다스리는 나라로 건설하여 두었는데 1922년 말 시베리아에서일본군이 철수하고 또 볼셰비키 반대 세력이 소탕되니 소련정부에 통합되었다. [11월 3일]
② 이르쿠츠크의 한인 지도자는 김철훈(金哲勳)·최고려(崔高麗)·오하묵(吳夏默) 등인데 모두 볼셰비키이즘으로 무장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의 한국인이란 거의 러시아에 귀화한 사람이었다.
한인사회당의 지도자는 이동휘(李東輝)·박진순(朴鎭淳)·박애(朴愛) 등인데 이동휘는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의 동포 사회에서 민족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박진순·박애는 소련에서 훈련 받아 볼셰비키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이다.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상해에 있던 때 박진순은 소련을 내왕하며 외교를 전담하고 있었으며 박애는 시베리아 문제를 맡고 있었다.
③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가 설치될 무렵[1918. 1. 22] 시베리아에는 그와 같은 성격의 공산주의 단체가 여러 곳에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소련 볼셰비키당의 소속 기관으로 그 지방 한인 사회에 볼셰비키 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제1차적 임무였다.
그런 데에 비하여 한인사회당은 설치될 때 볼셰비키당의 그레고리노프와 이동휘가 손을 잡고 만들어[1918. 6. 26] 실제 성격면에서도 소련과 한국인의 공동 작품이라는 점이 강했다. 즉 소련에서 그레고리노프를 앞세워 이동휘를 포섭하여 한인사회당을 결성케 한 이유는 당시 한국인에게 명망높은 이동휘로 하여금 볼셰비키혁명에 힘을 모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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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으로써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20만 한인 사회에 대한 혁명을 쉽게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또 시베리아에 진주하여 있는 일본군과 그의 지원을 받는 볼셰비키 반대 세력을 소탕하는 데 항일 전선을 펴고 있는 한국독립군을 참가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동휘를 비롯한 한국인의 입장으로는 일본과 대항하고 있는 볼셰비키혁명군과 협혁하여 항일 전쟁을 수행하면 한국 독립에 보다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시베리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완성되는 것은 1922년이었으니 그 동안 일본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공통된 목표가 볼셰비키당과 한국독립운동자를 합류케 하였다. 1922년 시베리아에서 일본군이 철수하고 볼셰비키의 반대 세력이 소탕되었을 때 소련이 고려공산당을 해체해 버린 것은 그 성격을 대변한다.
④ 그러나 소련에서는 한인 사회의 볼셰비키화를 위하여 노력을 꾸준히 쏟았는데 그것은 한인사회당 창당 때부터 볼셰비키 사상에 철저한 박진순과 박애 등을 참여시킨 것을 보아 알 수 있고, 실제 한인사회당의 실력자는 박진순과 박애였다. 그리고 이동휘가 아무리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한인사회당 창설 이후 평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⑤ 이르쿠츠크의 한인 지부는 소련 공산당의 한 기관으로 출발하였으니 소련 공산당의 유력자인 스미야스키의 지도 하에 전 러시아(全露) 한인 공산당을 조직하여 독립된 단체를 갖게 되었고, 1920년 7월에는 시베리아 내 한국인 공산 단체를 규합하고 대한국민의회를 포용하여 전 러시아 고려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시베리아 동부에 군림하던 한인사회당이 상해로 옮겨 갔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시베리아 전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⑥ 상해로 옮겨 온 한인사회당은 소련의 신임을 획득하면서 공산주의 그룹을 만들어 은밀히 여운형 같은 유력한 인물을 포섭하는 한편 시베리아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⑦ 시베리아에 대한 한인사회당의 계획은 이르쿠츠크의 전 러시아 고려공산당을 흡수하는 데에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0년 10월 극동공화국의 서울인 치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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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원동부에 한인부를 설치하여 시베리아에서 이르쿠츠크와 맞섰다. 이렇게 되니 이르쿠츠크에서도 그에 맞서 그곳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에 고려부(高麗部)를 설치하니 시베리아에서 두 공산주의 단체는 주도권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⑧ 극동 공화국은 소련 혁명의 전략으로 건설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시베리아 동부를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 곳의 원동부(遠東部)란 극동공화국내 볼쉐비키당의 최고 기관인데 시베리아의 볼셰비키혁명 수행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르쿠츠크는 극동 공화국 영역 밖에 있으며 그곳 동양 비서부는 형식상으로는 코민테른의 기관이었다. 그리고 어떤 영문인지 몰라도 원동부에서는 한인부를, 동양 비서부에서는 고려부를 각각 지원하고 있었다.
⑨ 한편 한인사회당은 1921년 1월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하고 치타의 한인부를 지원하며 일크츠크에 대항했으나 한형권의 소련 자금 문제로 상해에서 많은 비난을 받고 이로 말미암아 유력한 당원을 잃었으며 이동휘도 국무총리를 사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⑩ 이 무렵[1921. 2. 22] 치타에서 한인부를 지원하며 공산주의 선전 활동을 펴던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이 창설되었는데 이 한족공산당은 이르쿠츠크의 전러시아 고려공산당에 명분상으로 대항하기 위하여 만든 가공적 기관으로 추측하는 설이 있는가 하면12)상해의 고려공산당을 이동휘가 상해에서 떠나는 것을 계기로 치타로 옮긴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13)어느 것도 분명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 때는 이동휘 세력이 곤경에 빠져 쇠퇴기에 접어들 때였고 그러한 쇠퇴를 만회하려는 활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한족 공산당이 나타난 것은 틀림없다. 한족 공산당 관계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문창범(文昌範)·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 임시정부에 비협조적이었던 비공산주의자의 이름이 그 간부 진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다.
⑪ 이 때 이르쿠츠크에서도 상해에서 이탈한 안병찬·여운형 등을 포섭하여 상해의 고려공산당에 맞서 이르쿠츠크의 전 러시아 고려공산당을 상해와 같은 이름의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하고 개편하였으니[1921. 5.] 여기에서 고려공산당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伊市)파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⑫ 이리하여 두 파의 경쟁은 시베리아에서 이르쿠츠크의 고려부와 치타의 한인부를 앞세운 싸움으로 변하여 결국 알렉세예프스크의 혈투[자유시 참변]를 빚어낸 끝에 치타의 한인부가 몰락하였고, 앞서 상해에서도 상해파 고려공산당[한인사회당]이 세력을 잃었으니 이 기회에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은 상해지부를 결성하였다.
⑬ 이동휘는 모스크바에서 그의 세력을 만회하려고 노력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코민테른에서는 두 파의 통합을 종용했으며 나중에는 직접 개입했으나 실패하니 두 파의 고려공산당을 모두 해체시키고 말았다.[1922. 12.]
⑭ 그 후 코민테른에서는 극동 총국 블라디보스톡 지부에 고려국이란 작은 부서를 두어 한국 공산주의 문제를 직접 관리하더니 1925년에 조선공산당의 창설과 더불어 한국 문제는 조선공산당에 넘겼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공산당은 모두 코민테른에는 하나의 그룹(Group)으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조선공산당이 비로소 독립된 공산당으로 등록되었다.
(3) 소련정부의 태도
앞에서 대소 외교의 특수성을 말할 때, 임시정부와 소련은 상호간에 부정적 요인도 있었으나 보다 긍정적 요인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외교 관계를 비교적 용이하게 성립시켰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두 정부간의 관계에는 소련이 계획하고 있는 공산주의 혁명 과제와 시베리아 문제 때문에 임시정부 일방적 외교가 아니라 두 정부의 상호 긍정적 외교였으며 또 국제 관계상 비밀 외교였고, 여기에는 고려공산당이 중매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두 정부 사이에는 비밀 협약이 이루졌고 소련에서는 자금을 지출했으며, 코민테른에서는 한국 공산주의 단체 대표를 비중 높게 대우하였다.
그러면 먼저 한국 임시정부와 소련정부 사이에 맺어진 비밀 협약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한·소 협약은 1920년 파견된 한형권(韓馨權)이 레닌 정부와 교섭하여 체결한 것인데 두 정부 간에 공산주의 운동 관계에 대한 조항 외에는 시베리아에서 당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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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현실적 군사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4)
① 조선 정부는 공산주의를 채택하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선전 사업에 종사한다.
② 노농 정부는 동양에 공고한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여 한인의 독립 활동을 원조할 것임.
③ 시베리아에 있어서 조선 군대의 훈련과 집결을 이에 필요한 군수품은 노농 정부에서 제공할 것임.
④ 시베리아의 조선 군대는 노농정부에서 지정한 노국(露國)사관 지휘 하에 두고 시베리아의 일본출병군에 대항하는 장차의 행동에 관하여는 노농정부와 공동 동작을 취할 것임.
⑤ 이상의 사무를 관리하기 위하여 노·선(露鮮) 양국 연합국(局)을 설치하고 동국 위원은 양국 정부에서 임명할 것.
⑥ 조선정부에 의하여 영수되는 군사 보급과 기타 원조는 장차의 적당한 시기에 보상될 것임.
이상과 같은 내용인데 이 한·소 협약은 비밀 협약이고 정부간의 협약인데 한인사회당(공산주의 그룹)이 중개되어 체결한 것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로서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약 체결의 당사자인 한형권은 임시정부의 신임장을 가지고 갔던 대표였으나 실제는 공산주의 운동 관계에 집념해 있었고, 원래 국무회의에서 대표로 선임한 안공근·여운형을 제외하고 이동휘가 단독으로 밀파한 한형권이었으며, 그 위에 한·소 협약이 체결된 직후 소련의 자금 문제로 상해 정계가 소란하였으므로 한·소 협약은 임시정부 주변에서 각광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1920년 12월 10일 일본의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 한·소협약을 보도하자, 그해 12월 30일 상해에서 발간되던 중국계 ≪대륙보(大陸報)≫를 통하여 임시정부가 그것을 부정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15)
그리하여 협약의 내용도 기록마다 구구하고 뿐만 아니라 한형권 대신 박용만(朴容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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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조선총독부 경무국 ‘조선과 과격파주의라고 제목한 신문 기사’ (앞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p.295).
15) ≪조일신문(朝日新聞)≫ 1920년 12월 10일 (앞의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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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였다고 하는 말까지 있었다.16)그리고 채근식(蔡根植)은 치타의 극동정부와 독립군 사이에 맺어진 것이라 하고, 일본군대의 정보를 인용한 ≪동아일보(東亞日報)≫에서는 극동정부와 문창범(文昌範)의 조선독립의용군과 맺었다고 보도했다.17)이와 같이 한·소협약이 절차와 내용의 정보가 구구했던 것은 그것이 원래 비밀 협약인데 체결된 후 임시정부의 수용(受容)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소련정부 사이에는 한국 독립 운동을 지원하는 군사협약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할 것이다.
다음에 소련정부가 자금 지원을 한 문제인데 이것은 항목을 달리하여 말하겠지만, 당시 소련의 형편으로 재정 지원을 했다는 사실은 한국 독립 내지는 한국 공산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금 지원은 코민테른의 명의로 지출된 것도 있다고 하지만 당시의 코민테른인 자금이란 곧 소련정부의 자금으로 봐도 억지가 아닐 것이다.
소련의 자금이라면 상해에 들어 온 것이 두 번 있었는데 첫번째의 것은 1920년 한형권이 40만 루불을 받아서 김입(金立)의 손을 통해 상해에 들여온 것으로 이것은 이동휘가 독단으로 처리하여 어디에 쓰여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음에 가져 온 것은 1922년 11월 한형권이 윤해(尹海)와 더불어 20만 루불을 가져온 것인데 이것은 국민대표회 경비로 쓰여졌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련정부에서 국민대표회 경비로 허락한 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할 수 있다.
1922년이라면 고려공산당의 양파가 완전히 분열하여 소련은 두 파의 통합을 위하여 직접 개입하고 있던 때이다. 그러나 두 파의 공산당은 상해에서는 거의 그 기반을 잃고 모두 시베리아에서 다투고 있었다. 그러니 소련에서는 그 두 파의 통합을 모색하여 시베리아를 근거한 한국인의 공산당을 재건하려고·하는 한편, 1922년 초 극동인민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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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임시정부 재정 조달을 위한 미·일·노 사회주의자와 제휴 및 한·아(韓俄) 공수 동맹’ [대정 9년 12월 17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에서.
17) ①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p.101.
≪동아일보≫ 1921년 4월 26일 3면.
③ 김홍일(金弘壹) ‘자유시 사변 전후’(사상계 1965년 2월호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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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부터 임시정부를 민족연합전선으로 개편하려고 여운형 등에게 종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민족연합전선의 구축이라는 점도 크지만 상해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만회라는 점에서 큰 뜻이 있는 것이다.
소련이 민족연합전선을 종용했다는 것은 극동인민대회에서 레닌이 축하 연설을 할 때, 한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것이 한국 문제 해결의 방법이라고18)언급한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거니와 그 대회에서 채택한 한국문제결의안에서 ‘상해임시정부는 명칭만 과대(誇大)하고 실력이 그에 따르지 못하여 지금까지 경과에서 유감이 허다하므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19)는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소련이 한국임시정부를 민족연합전선으로 개편할 것을 종용하고 있을 때 마침 상해에서는 국민대표회가 추진되고 있었으니 여기에 20만 루불의 자금을 투입한 것이었다.20)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소련정부는 시베리아에서는 그들의 현실적 계산이 크게 작용했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공산주의의 국제적 혁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는 그 제1차적 단계로서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을 지원하려고 했고 그러한 의미에서 임시정부의 외교적 접근에 친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여운형(呂運亨) 조서(調書)≫에 ‘레닌이 “한국은 옛날에 문화가 발달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민도(民度)가 낮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실천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레닌의 주장은 내가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주장과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다’21)고한것은 그와 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920년 여름 제2차코민테른대회에서 레닌이 “코민테른은 식민지 및 반식민지 여러 나라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일시적으로 타협도 하고 더 나아가 그것과의 동맹도 맺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된다”22)고 연설한 대목은 한국 임시정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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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여운형 조서≫ p.34.
19) 앞의 책 p.p.34~35.
20) 앞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p.401.
21) ≪여운형 조서≫ p.582
22) 앞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 인용한 ≪레닌전집≫ 앞 31의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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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기본 태도를 천명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4) 소련의 자금 문제
소련은 정치자금을 3차에 긍하여 한인사회당 혹은 임시정부에 지원하여 주었다.
① 제1차 자금
제1차 자금은 1919년 8월 한인사회당에게 주어진 자금으로 이것은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선임되기 전이니 임시정부와는 간접적으로도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한인사회당에서 1919년 25월 25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표자 대회를 열고 박진순·이한영·박애를 사절단으로 선임하여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제1차 대회에 참석하면서 원조 자금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8월 5일 모스크바를 떠나 상해로 오다가 9월 10일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등의 전 러시아 한인 공산당에게 뺏기고 말았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는 여기에서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때 가져온 돈의 액수에 대하여 4백만 루불이니 얼마니 하는 말이 구구하나 그것도 여기에서 따질 필요가 없는 성질의 것이니 생략한다. 단지 이 때부터 이르쿠츠크의 한인공산주의자와 상해의 공산주의자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② 제2차 자금
제2차 자금에 대하여는 말썽이 많으면서도 극히 중요했고, 또 지금까지도 그 내력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그것은 우선 임시정부에서 대표 선임 과정이 분명하지 않고 임시정부에서 선임한 사람과는 달리 모스크바에서 활약한 사람이 많았고, 모스크바에서 교섭한 경위를 모르고 또 원조 자금의 액수가 불분명하고 자금의 운반 경위가 확실하지 않으며, 자금을 처리한 내역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제2차 자금 문제에 대한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그 정보를 늘고 정리한 오늘날의 책 내용도 모두 다르다.23)
그런데 이 문제는 따로 계획하는 ≪민족문화운동사≫에서 상세하게 밝혀질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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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① ≪한국독립운동사≫ Ⅳ p.p.55∼57.
②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p.p.740∼745.
③ 앞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p.p.19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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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할 수 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소련에 비밀외교원으로 여운형·안공근·한형권을 선임한 것은 1920년 1월 22일(혹은 1919년 10월)24)이었는데 이동휘가 소련 외교를 임시정부가 아닌 한인사회당이 독점하려고 당원인 한형권만을 보냈으며 한형권은 늦어도 1920년 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활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동휘는 다른 용건으로 간 박진순·이한영·박애도 한형권과 같이 일하게 했는데, 이한영은 먼저 상해로 돌아와 그해 5월에 결성했던 공산주의자 그룹 조직에 종사하였고, 박진순과 박애는 7·8월에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하여 활약하였다. 한편 한형권은 박진순 등의 도움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신임장으로서 레닌 정부와 교섭하여 ‘한·노비밀협약’을 맺고, 2백만 루불의 원조를 약속받았다.
그리하여 한형권은 1920년 10월 2백만 루불 중에서 60만 루불을 받아 가지고 20만 루불은 모스크바에 예금해 놓고, 40만 루불만 가지고 상해로 향하였는데 도중 치타에서 김입(金立)과 만나게 되었다.
김입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하러 모스크바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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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소련 밀파 외교원 선임에 대하여 세 가지 기록이 있다.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2년 4월 25일과 10월 6일 기사에 1920년 1월 22일 안공근·여운형·한형권을 선임한 것으로 나타나 있고, ≪안창호 일기≫ 1920년 1월 22일 기사에는 국무회의에서 여운형·안공근을 밀송(密送) 외교원으로 결정했다고 나타나 있는데, 앞에 소개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p.p. 196∼198에서는 한형권이 겨울에 이미 모스크바에 있었다는 근거 등에서 밀파 외교원의 선임 시기는 1919년 10월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생각을 해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스크바 밀파 외교원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1920년 1월 22일인데 안공근·여운형만을 선임하였으나 당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한형권을 비밀히 보냈던 것이다. 이동휘가 한형권을 보낸 시기는 1월 22일 보다 다소 앞설 수도 있다. 그것은 안창호의 일기에서 1월 15일에 소련 밀파외교원 인선 문제가 이미 나오고 있으니 이동휘는 미리 조치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또 ≪안창호 일기≫ 1월 26일과 1월 28일 기사에 이동휘가 여운형 등의 소련 밀파를 정지하자고 계속 주장한 것을 보아(주요한 ≪안도산 전서≫ p.p.635∼636) 이동휘는 임시정부의 결정 전후 자기 개인행동을 취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앞에 1919년 10월에 결정했다는 것은 11월 3일에 각 총장이 취임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힘든 일인 것 같고 11월과 12월에는 여운형의 동경 행차 문제로 상해가 시끄러울 때였으니 그 여운형을 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임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국무회의에서 정식으로 결정된 것은 1월 22일 안공근과 여운형을 선임한 것으로 추측이 가는데 ≪조선민족운동연감≫에 한형권까지 포함하여 3인을 선임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그 책이 1932년에 자료를 모아 정리한 책이니 이것저것 종합한 데서 온 착오가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는 1921년 4월 25일에 한형권이 소련행 여비를 신청했다는 식의 착오가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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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일행들과 치타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는 이미 끝난 때였으니 김입은 모스크바로 갈 필요가 없었다.
이리하여 한형권이 가져오던 자금은 김입에게 전달되었고, 김입이 그것을 그해 12월에 상해로 가져왔던 것이다. 한편 한형권은 남은 돈 때문에 모스크바로 갔고, 박진순은 상해로, 그리고 박애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치타에서 한인사회당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극동정부 원동부에 한인부를 설치하고 시베리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밟아 제2차 자금이 들어 왔으나 이동휘 등은 그 사실을 전연 비밀에 붙이고 오로지 공산주의 운동에만 사용하였다. 중국과 일본 및 대만공산당 운동에도 흘러 들어갔고, 국내에도 장덕수(張德秀) 등 유력한 인사에게 공산주의 운동자금으로 전해졌다.
이것을 알게 된 임시정부 요인은 이동휘를 규탄하게 되었고, 여운형·안병찬 등 이동휘와 같이 공산주의자 그룹을 만들고 있던 사람들도 반발하여 결국은 임시정부의 분열을 낳았고 상해 독립 운동 거리에 큰 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을 계기로 이동휘는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를 사임하였으며 김입은 임시정부 경찰국장의 명령을 받은 오면직(吳冕稙) [일명 양여단(楊汝丹)]·노종균(盧鍾均) [일명 김동우(金東于)]에게 사살되었다.
③ 제3차 자금
제2차 자금이 레닌이 약속한 금액 중 그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임시정부에서는 나머지 1백 40만 루불을 받기 위하여 관심을 쏟았던 것은 물론, 김규식(金奎植)이 직접 레닌 정부와 교섭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25)
제3차 자금이란 한형권이 당초에 60만 루불을 받은 것 중 20만 루불을 모스크바에 예치하였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데 이것은 그 후 이동휘가 찾으려고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2년 11월 한형권이 상해로 운반하여 국민대표회 활동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이것이 제3차 자금인 것이다. [제3장 제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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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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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
극동인민대표대회는 개회되기 전 준비 과정에서는 극동피압박인민대회(極東被壓迫人民大會)의 명칭으로 추진되었고, 원래 1921년 가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 그런데 변경하여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에서 열렸으며 피압박 인민이 아닌 일본 대표가 참석한 데에서 명칭도 극동 인민 대표 대회로 변경하였다.
명칭과 장소는 어떻든 이 대회는 극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과제를 토의하는 대회로서 특히 한국과 같이 식민지하에 있는 곳에 대하여는 독립 운동의 과제가 일차적으로 논의되었으니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 대회가 1922년에 열린 것에는 국제 정세의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었다. 즉 1921년 가을부터 열린 워싱턴의 이른바 태평양회의가 거의 끝나고 있는 때에 극동인민대표대회를 열었는데 태평양회의에서는 약소민족의 요구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아 한국과 같이 그 회의에 기대를 걸었던 민족은 미국 및 서방 세계에 대하여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던 때였다. [제4절 제4항 참조]
이러한 기회를 포착해서 극동 인민 대표 대회를 열어 이득을 얻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이고, 여기에 많은 한국인이 참가하였던 것은 그러한 계산을 허무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 대회는 한국·중국·일본·몽고·자바·러시아 등의 지역에서 144명의 대표로 구성되었고, 한국 대표는 23개 단체에서 선발한 52명이었는데 상해와 국내의 주요 인물은 이동휘·박진순·여운형·김규식·나용균(羅容均)·김시현(金始顯)·장건상(張建相)·박헌영(朴憲永)·임원근(林元根)·김태연(金泰淵)·김원경(金元慶)·권애라(權愛羅)이며 그 중에서 김규식·나용균·김시현·권애라·김원경은 민족주의자로 분석된다.26)이 처럼 다수의 민족주의자가 참석하고 있는 것은 김규식의 말대로 ‘우리가 미국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졌으나(태평양회의) 이제 실망한 나머지 이곳에나 희망을 걸어 보려고 하는 뜻에서 참석하였다.’ [주석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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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앞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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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대회에서 채택한 한국 문제에 관한 결의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 한국에는 공업 발전이 미약하여 계급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계급 운동은 시기가 빠르다.
② 한국의 대다수 주민이 저수준의 농민이니 이들이 공명하는 민족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계급운동자(공산주의자)는 이 운동을 지도하여야 한다.
③ 상해임시정부는 명칭만 과대하고 실력이 이에 동반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유감이 허다하므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 [주석 19) 참조]
위의 결의문은 공산주의 혁명 이론에서 그 단계적 전략을 이해하고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원래 1920년 여름에 있었던 코민테른 제21차 대회에서 레닌이 강조한 것을 한국 문제에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결의문에서 한국 독립 운동에 두 가지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농민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 역량을 성장시키는 것이고 하나는 임시정부의 개편 작업이다. 전자는 여기에서 언급할 겨를이 없고 후자는 민족 연합 전선의 문제로서 이미 약간 언급했지만, 다음에 국민대표회를 서술할 때 재론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대표회가 실패하고 말았으니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 계획한 임시정부의 연합 전선 구축을 위한 개편 작업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초 이 대회에서는 한국 문제에 대한 관심을 크게 나타내었다. 그것은 144명의 대표 중 52명이 한국 대표였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1920년 7월 19일부터 열린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도 중국 대표가 그렇지 못했는데 한국 공산주의자 대표 박진순은 결의권을 행사하는 169명의 대표 중의 하나였다는 점을 아울러 고려하면 소련이 한국 공산주의 혁명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많은 복선을 안은 한·소 관계에 대한 글을 맺는다. 한·소 관계에서 처음부터 한인사회당이 중간에 개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켜 결국은 공산주의 단체도 분열하여 해체의 운명에 이르렀거니와 그 여파는 임시정부에 미쳐서 그 운명을 위태롭게 하였다. 소련은 1922년에 공산당의 재건과 1924년 임시정부의 연합 전선 구축을 위하여 어느 정도 힘을 기울였으나 허무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23년 후기부터는 외교 교섭이 거의 끊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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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에 대한 외교
임시공부가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중국 자신이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남의 문제를 도와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고, 또 하나는 중국이 남북으로 갈리어 북쪽에는 북양 군벌을 중심한 북경정부가 있었으며, 남쪽에는 손문(孫文)을 중심한 광동정부가 있어서 서로 대립하여 있었는데 북경은 북경대로 광동은 광동대로 또 많은 문제를 안고 혼란이 거듭되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그들은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남북의 어느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었다. 광동의 호법(護法)정부는 임시정부의 정치 노선과 비슷하기 때문에 가까와질 가능성이 있었으나 우리 동포가 만주에 1백만 이상이 거주하고 있으며 또 만주 동포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니 현실적으로 북경정부 혹은 동삼성(東三省) 즉 만주 집권자와의 관계가 중요하였다.
여기에 임시정부의 대중 외교에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공동 운명이 있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양국 정부의 관계는 우호적인 가운데 맺어져 있었고 민간에서도 한·중호조(韓中互助) 운동이 전개되어 자못 바람직하였다. 그러면 먼저 중국의 정치 정세부터 파악하여야 할 것 같다.
(1) 중국의 정치 정세
중국은 특히 1894년 청·일전쟁에 패배한 후 열국의 제국주의가 노골적으로 침략하여 중요한 항구를 조차하고 국내의 철도 및 광산권을 장악하는 등 형세가 비관적이었다. 일본은 1904년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국 침략을 더욱 본격화하여 중국에서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반식민지(半植民地)의 상태에서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는데 혁명 후 원세개(袁世凱)의 독재는 중국의 정치 전세를 더욱 악화시켰고, 그가 죽은 뒤 결국 북경정부와 광동정부의 두 정부가 양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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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도 그랬지만 1928년 장개석(蔣介石)이 북벌을 완성할 때까지 남북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원래 1913년부터 원세개와 손문이 대립하여 중국 남부에서는 황흥(黃興)을 중심으로 원세개 토벌군을 일으켰다. [제2혁명] 그러나 실패하고 손문·황흥 등은 망명하였다. 1914년에는 원세개가 군주제를 모색하는 것을 계기로 다시 남쪽에서 원세개 토벌군이 일어나니 이를 제3혁명이라고도 한다.
원세개는 제위(帝位)에 오르지도 못하고 이윽고 사망하니 부총통으로 있던 여원홍(黎元洪)이 1916년에 총통을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여원홍·풍국장(馮國璋)·서세창(徐世昌)·여원홍·조곤(曹錕)이 대총통을 차례로 계승하더니 1924년 말에는 단기서(段祺瑞)가 임시 집정으로 정권을 잡았고, 1926년에는 장작림(張作霖)이 집권하였다가 1928년 장개식(蔣介石)의 북벌로 북경정부는 그 막을 내렸다.
북경정부에서 위와 같이 집권자가 교체되었던 것은 직예(直隸)·안휘(安徽)·동삼성(東三省)[만주]의 군벌을 배경으로 벌어진 권력 다툼의 결과였는데, 이정권 다툼에는 국가간의 전쟁을 방불케하는 싸움이 네 번이나 있었다.
한편 광동정부(국민당정부)는 북경정부에 항쟁하면서 손문을 중심으로 강력한 정당정치를 구현했는데 정당은 원래 국민당(國民黨)·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으로 이어 오다가 1919년에는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는 동안 내부의 알력과 북경정부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으나 1924년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민족·공산주의의 연합 정당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1925년에 손문이 북경에 단 기서와 협의하러 갔다가 사망한 후, 한 때 혼잡하더니 1926년에는 장개석이 실권을 장악하고 북벌을 착수하였다. 이 때부터 국민당 내에서 공산주의자와 장개석의 민족진영이 대립하였고, 민족진영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하나는(좌파) 공산당과 합류하여 무한정부(武漢政府)를 세우고, 장개석은 이듬해인 1927년에 북벌을 수행하면서 남경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1928년에는 북경을 점령하여 북벌을 완성하였는데 당시 북경정부의 집권자였던 장작림은 퇴각하여 원래의 근거지인 동삼성(만주)으로 가다가 그 해 6월 4일 일본의 흉계에 의한 열차 폭발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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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을 완성한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는 곳곳의 반대 세력을 진압했다. 특히 1930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서 1931년 서금(瑞金)에 공산당이 세운 중화 소비에트임시정부를 공격하니 1934년에는 연안(延安)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만주, 즉 동삼성 방면에서는 장작림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이 순열사(巡閱使)를 계승하여 동삼성 [흑룡강성·길림성·요령성(봉천성)]의 정계를 정비하였는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점점 그 본성을 나타내니 장학량은 장개석과 타협하여 국민당과 결속하니 만주에도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세우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 책에서 임시정부 초기라고 규정한 1919년부터 1931년까지의 중국 사정은 대단히 혼란한 정치 정세였고 여기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비롯한 열국의 경제적 침략이 겹쳐 있었으니 이른바 반식민지로서 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2) 광동정부에 대한 외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문제 때문에 우리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고 또 남북의 대립과 정치적 파쟁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정계를 정돈하는 문제가 눈앞에 가로 놓여 있어서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하여 관심을 쏟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 임시정부에서도 중국에 대하여 미국이나 소련처럼 독립 운동을 지원해 줄 것으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하여 같은 피해자로서 공동 전선을 펴 주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것은 북경정부나 광동정부나 혹은 남경정부에게나 마찬가지의 희망이었다. 특히 국민당정부는 정치 이념이 한국임시정부와 상통하였기 때문에 상호간 협력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외교적 유대를 강화할 것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10월에 국무총리 대리로서 외무총장을 겸임하고 있던 신규식(申圭植)을 특파 대표로 파견하여 광동의 국민당정부와 교섭하게 하였다. 신규식은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하였고,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조직을 통하여 광동정부의 인사들을 전부터 잘 알고 있던 형편이어서 정계의 요인과 접촉하면서 11월 3일에는 당시 광동정부의 총통 손문을 만나 다음과 같은 외교 문서를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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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호법정부(護法政府)[광동정부]를 대중화민국정통정부로 승인하며 아울러 그 원수와 국권을 존중함.
② 대중화 호법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③ 한국 학생을 중화민국군관학교에 수용하여 교육할 것.
④ 5백만 원을 차관하여 줄 것.
⑤ 조차 지대를 허락하여 한국독립군을 양성케 할 것.
이상에서 실질적인 이익이 되는 ③·④·⑤항은 아직 세력이 약한 광동 정부로서 사실상 조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나 미구에 제3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이와 같이 실질적 소득이 당장에는 없었으나 11월 18일 광동정부가 북벌서사(北伐誓師) 전례식을 거행할 때, 손문이 임시정부의 대표를 정식으로 접견하니 외교상 정식 절차를 밟은 셈이다.27)그러므로 임시정부에서는 1922년 2월에 외무부 외사국장 박찬익(朴賛翊)을 광동에 주재시켜 광동정부와의 외교 업무를 담당케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임시정부와 광동정부 간의 공식적인 외교 성립으로 본다면, 이것은 임시정부와 소련정부간의 외교 성립에 이어 두번째로 성립한 공식적 외교 관계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즉 소련과의 외교 관계에서도 불투명한 곡절이 있었고 ≪본 절 제5항 참조] 광동정부와의 관계에서도 절차상 모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한국임시정부에 대하여 그만한 대우와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경우가 공식적으로는 없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러한 정도에서 외교적 의의를 강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광동정부와 그러한 정도까지라도 외교 관계가 성립한 것은 그해 9월 27일 광동에서 한·중협회(韓中協會)가 성립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임시정부 초창기에는 손문도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거부하였다. [본절 제1항]그러던 손문이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접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태평양회의를 앞두고 중국 각처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가 생기고 아울러 상해에 한·중 호조 총사(總社)가 결성된 것에 이어 광동에서 한·중협회가 조직된 일련의 정세와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중협회의 중국측 인사는 광동정부와 밀접한 사란들이었던 점을 기억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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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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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가 있을 것이다.[후술]
(3) 북경정부에 대한 외교
임시정부의 중국에 대한 외교에서 가장 긴밀한 문제는 만주, 즉 동삼성지방의 동포 사회 및 독립운동에 가로 놓인 여러 문제였다.28)
그 여러 문제란 일본과 중국 관리가 공동으로 한국 동포 사회와 독립운동에 대하여 취체함에 따라 생긴 문제들이었다. 만주에 거류하는 동포는 임시정부가 직접 담당하지 못하는 독립 전쟁을 맡고 있었으며, 1백만 이상을 헤아리고 있었으니29)임시정부로서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차 임시정부가 만주 동포 사회에 가로 놓인 외교적 현안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면 만주 독립 운동은 보다 큰 효과를 올렸을 것이며, 또 만주 동포 사회에 대한 임시정부의 통할도 쉬웠을 터인데 내외 여건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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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만주의 동포 사회는 중국과 일본 관헌의 취체로 말미암아 이중적 고초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경정부 혹은 동삼성 집권자들은 당초 3·1운동 때 중국이 만주의 3·1운동을 진압해 주는 대가로 일본이 만주에서 가진 여러 이권을 어느 정도 양보할 줄 알고, 3·1운동을 정치석 흥정물로 이용하려고 했으나 국내외의 도덕적 여론에 의하여 물러섰다. 그런데 후에는 일본이 만주에서 계속되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만주 침략의 눈치를 보이면서 독립운동자의 취체를 하여 마침내 중국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1920년 10월 혼춘사건을 계기하여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인한 동포 사회의 참상은 중국의 양해 없이 저지른 만행이라 하더라도 그 후 1920년 10월에는 ‘일·중(日中)협동 토벌에 관한 협정’ 1921년 2월에는 ‘중·일협정’ 1925년 6월에는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차례로 체결되어 한국인은 거주이전(居住移轉)·무기휴대(武器携帶)·집회결사(集會結社)의 자유를 잃게 되었고 국제관례에 없이 정치범까지 인도할 것을 약속하기에 이르렀으니, 독립 운동 뿐 아니라 일반 동포 사회에 주는 영항이 컸던 것이다.
① 추헌수(秋憲樹) ‘1920년대 재만 한인에 대한 중·일의 정책’(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p.p.579∼591.
②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권 ≪무력전투사≫ 참조
29) 만주 재류 동포의 인구 통계는 다음과 같다.
① 1921년 조선총독부 조사에는 60만 5천 88인(조선총독부 경무국 [대정] 10년 ‘재외 불령선인의 근황’, Sp No.45 # 141)
② 1930년 전후 통계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p.236)
동삼성 입적 한족 동향회 조사 1백30만인≪만주신문≫조사 81만1천6백 29인, 남만철도 조사 78만 3천1백87인, 척식회사 조사 73만 6천2백66인, 일본영사관 조사 61만9천2백76인·중국 방면 조사 54만5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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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북경정부의 외교 정책이 일관성을 잃고 있었던 점.30)
② 북경정부와 동삼성 집권자들이 임시정부 혹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점.31)
③ 북경정부가 일본의 정치·경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점.32)
④ 북경정부가 일본의 중국(만주) 침략을 우려하여 임시정부와 만주의 한국독립운동단체를 경원했던 점.
⑤ 임시정부도 북경정부에 일본 세력이 맴돌고 있다든지 정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 등으로 경원했던 점.33)
⑥ 북경정부는 자체 내의 정치 혼란으로 만주의 장작림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
⑦ 임시정부가 강화회의·국제연맹·미국·소련 등에 대한 외교 활동에 쫓기어 만주 문제에 관심할 여력이 없었던 점.
이와 같은 이유로 임시정부와 북경정부 사이에 원만한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못하였고 그런 가운데 동삼성 순열사(巡閱使) 장작림은 한국인의 독립 운동에 대하여 날이 갈수록 취체를 강화하니 중·일 양국의 취체를 받으며 독립 운동을 수행해야 하는 만주(동삼성) 동포들의 상황은 참담하기만 했다.[주석 28) 참조]
등삼성 관헌의 취체는 1925년 소위 삼시협정(三矢協定)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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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장 중요한 이유는 끊임없는 정권 교체 때문이었다.
31) 3·1운동에 대한 중국인의 반응도 만주나 북경에서 큰 차 없이 도덕적인 동정은 하면서도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고 자기들의 정치적 흥정감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거의 같았다.
①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p.p.687∼715.
② 이용범(李龍範) ‘3.1운동에 대한 중국의 반향’ (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p.p.533∼540)
③ 추헌수(秋憲樹) ‘1920년대 재만 한인에 대한 중·일의 정책’ (앞의 책 p.p.579∼591)
32) 일본은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이긴 후, 1905년 청·일조약, 1909년 간도협약, 1915년에 21개조 조약을 차례로 체결하면서 요동반동·간도지방·남만주와 내몽고에 그들의 세력을 부식하고 1915년 이후에는 북경정부에 차관을 제공하여 경제면에 크게 침투했으며, 1차대전 때는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靑島)를 중심한 산동 반도 남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북경 정부 요인 중에서 단기서(段祺瑞)와 같이 친일 정객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33) 1921년 2월 북경정부의 오패부(吳佩孚)·풍옥상(馮玉祥)의 사신이 와서 한국 청년을 그들의 군대에 편입시켜 훈련케 하자고 제안해 왔는데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위하여 그 이상 좋은 기회가 없겠으나 거절하였다. (안창호의 일기 1921년 2월 3·4·5·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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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말미암아 독립운동이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중국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인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무장 단체를 만들어 독립 운동한다고 소란을 피우니 근대 주권 국가의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더구나 일본이 그것을 빙자하여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하는 형편이니 한국인에게 관용을 베풀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만주를 떠나면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감행할 곳이 없다. 한국인은 중국인에게 좀 미안한 일이지만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만주를 놓칠 수는 없었다.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1백만의 동포가 거류한다는 데서도 그랬다.
그리하여 어떤 취체에도 불구하고 한국 동포는 그 곳에서 활동하였고 임시정부에서도 사소한 문제는 독립 운동 단체에 일임하고 큰 문제에 대해서는 북경정부와 동삼성 관리들에게 가능한 외교 공세는 모두 취했던 것이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에 출병하여 한국인에 대하여 학살이 감행될 때는 특파원과 통신원을 통하여 실황을 조사하는 한편 ≪독립신문≫에 게재하여 일본의 만행을 천하에 규탄함은 물론이었지만 중국 언론계로 하여금 함께 규탄토록 하였다. 그리고 신규식·박은식·안창호·여운형·신익희·선우혁(鮮于爀)을 광동정부와 북경정부에 파견하여 중국정부의 협조를 교섭하면서 일본 침략에 대한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34)
더구나 이 무렵에 ‘중·일 협동 토벌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니 임시정부는 북경정부를 인도(人道)에 벗어난 처사라고 공격하며 항의하였다. 그리고 1921년 2월에 중·일간에 국경선(압록강·두만강)에서 독립운동자를 공동 취체하는 협정이 체결됨에 그해 5월 한구(漢口)의 한·중호조사의 지원까지 받아서 항의하여 동삼성에서 계획한 협정 조문을 완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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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① ≪독립신문≫ 1920년 12월 18일 2면, 19일 3면, 25일 4면, 12월 18일부터 1921년 2월 5일까지 사설.
②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제30장.
③ 조선총독부 경무국 대정 9년 12월 1일(고경 제38079호) ‘간도사건에 관한 회의’ 및 12월 4일(고경 제38480호) ‘상해 간도 독립운동자의 대중국 활동’.
④ ‘여운형 북경행 문제’ (대정 12년 12월 12일 상해 시전(矢田) 총영사의 보고문).
35) ①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Ⅳ p.206.
② 추헌수 ‘1920년대 재만 한인에 대한 중·일의 정책’ (중국 외교부 문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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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25년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어 만주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의 타격은 말할 나위 없다. 그리고 1927년에 안창호가 만주로 간 기회에 길림(吉林)에서 5백 명의 독립 운동자가 집회한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조종을 받은 길림성 관리가 안창호를 비롯하여 3백여 명을 체포 감금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일본정부와 치열한 외교 경쟁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36)
북경정부를 상대한 임시정부의 대중국 외교는 1928년에는 끝났다. 1928년의 북경정부는 장작림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광동정부의 장개석에게 패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1930년 전후 북벌을 완성하니 만주의 장학량도 남경정부에 합세하여 임시정부의 대중 외교는 한결 쉽게 되었다. 그러나 외교 절차는 북경정부 당시보다 쉽게 되었지만, 또 새로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4) 남경정부와 소위 ‘동삼성 한교 문제’
장작림의 뒤를 이어 만주의 집권자가 된 장학량은 1930년에 ‘토지조례’와 ‘입국조례’를 공포하고 또 한인공산당에 대한 취체를 강화하니 한국인은 독립운동과 일반 생활에서 전례 없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당시 만주의 혼란한 사회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과 중국국민당이 1930년부터 공산당과 싸워야 했던 사정을 미루어 보고 아울러 한국인 독립운동자 중에는 공산주의자가 많았다는 당시의 형편을 고려한다면 그와 같은 조처에 어느 정도 이해는 가게 된다. 그러나 규정대로 실시한다면 독립운동은 치우고라도 가만히 살 수도 없는 처지에 도달할 것이니, 임시정부가 비록 그 형세는 쇠퇴하여 기력을 잃고 있었지만 이것을 방관한다면 임시정부의 존재 가치가 의심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남은 힘을 다 여기에 쏟았던 것이다.
장학량의 정책을 구체화하여 각 성(省)과 현(縣)에서 1930년 전후에 발표한 한인 공산주의자 취체 혹은 단체 활동을 금지하는 규정들은 여기에 모두 밝힐 수 없고37)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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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①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p.p.140∼143.
② 애국동지원호회 ≪한국독립운동사≫ p.p.272∼274.
③ 본편 제2장 제2절 제2항과 제3장 제5절 제1항 참조.
3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5 자료편 p.p.666∼67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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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와 입국 조례만 소개해 둔다.38)
[토지 조례]
① 귀화(歸化) 한인으로서 토지를 구입할 경우에는 일본의 위탁이 없는가를 내사할 것.
② 한교의 토지 조차(租借)에 대하여는 집조(執照)를 요할 것.
③ 집조 기한은 1년으로 하고 매년 이를 서환(書換)할 것.
④ 집조를 받을 경우에는 중국인 또는 귀화 후 3개년이 경과한 한인의 보증을 요할 것.
⑤ 한교에게 토지를 대여한 자는 국토 도매죄(盜賣罪)에 의하여 처벌할 것.
⑥ 수전(水田) 경영 초(初) 한교를 고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기한을 정하고 관서에 제출할 것.
⑦ 귀화 한인에 대하여는 절대로 한복 착용을 금지할 것.
⑧ 위의 각 항을 위배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
[입국 조례]
① 무릇 한인으로서 국경에 들어 온 경우에는 중·일 관헌의 호조(護照)의 휴대를 요한다. 또 공안국에 등기한 후 한인 3명 이상의 보증이 있어야 하며 만약 이것이 없으면 입경을 불허한다.
② 각 현 정부는 잠시 한인의 입적을 정지하여야 한다.
③ 일정한 직업이 없는 한교는 경 외로 축출하여야 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인은 머슴으로 들어가기조차 힘들게 구속하였고 중국에 귀화도 못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옷 입는 문제까지 간섭하기에 이르렀고, 직업 없는 자는 축출한다니 독립운동자가 발붙일 곳도 없게 만들었다. 원래 한국 동포가 만주로 이주한 것, 또 그곳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했던 것은 중국정부에서 묵인해줬기 때문이었으며 한국 동포들은 중국인 또는 중국정부가 지원해 줄 것까지 기대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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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임시정부 발행 ≪동삼성 한교 문제≫에 관한 일본영사 보고’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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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러나 중국도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는 딱한 사정에 놓여 있어서 한국 임시정부와 독립 운동 단체는 중국에 대하여 지원까지 기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이 국내 문제를 어느 정도 정비하게 됐던 1930년에 이르자 앞의 것과 같은 한국인 혹은 한국 독립 운동을 새로 구속하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1930년 10월 30일 ≪동삼성한교문제(東三省韓僑問題)≫라는 책자를 만들어 한국인과 한국 독립 운동의 처지를 상세히 기록하여 남경정부와 장학량에게는 물론, 당시 국민당 간부 및 중국 정계 요인에게 전달하며 대대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삼성 한교 문제≫에 수록된 내용은 한국인이 만주(동삼성)에 이주한 유래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에 희망 사항을 열거하고 있다.39)그 내용을 상세히 밝힐 수는 없으니 그 목차만 열거해 두지만 목차만 보아도 대체의 내용과 이 책을 만든 의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서론 ② 동삼성한국교포의유래(東三省與韓僑之歷史的觀察) ③ 한일합병후한국교포의이주상황(韓日合倂後韓人與東三省之移住) ④ 한국교포의현황(東三省韓僑之現況) ⑤ 일본제국주의와동삼성의장래(日本帝國主義與東三省之將來) ⑥ 최근발생한동삼성의한교사건(最近發生之東三省韓僑事件) ⑦ 삼민주의와동삼성한교의권리문제(三民主義與東三省韓僑之權利問題) ⑧ 한교의최저한의희망조건(韓僑最低希望條件)
이상과 같은 목차에 의하여 꾸민 이 책은 그 내용면에서 대단히 과학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특히 제4항에서는 각처의 인구를 명시하여 총계 1백 30만으로 밝히고, 이와 다른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 ≪만주신문≫·남만철도주식회사·일본영사관·중국의 기관·동삼성입적(入籍) 한족동향회 등의 통계도 함께 나타내고 있으며 호수(戶數)와 경작 실태·교육·납세 등 각 방면의 상황을 수록하여 한·중·일과의 관계에서 부당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5항에서는 만주에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21종류의 특권을 열거하여 제국주의 침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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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 Ⅱ p.p.23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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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주의를 환기시켰고, 제6항에서는 한·중 양측이 피차 오해할만한 사건을 그 날짜와 장소를 밝히며 진상 설명하고 ‘토지조례’와 ‘입국조례’가 반포된 뒤 한국 동포들이 무참히 축출당하고 있는 현상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끝으로 희망 사항으로
① 남경정부는 길림돈화사건에 대하여 관대히 처리하여 무고히 잡혀간 한국 교포를 석방하여 줄 것.
② 한국 교포를 축출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민중의 한국인 배척 행위를 제지하여 줄 것.
③ 남경정부의 토지법을 개정하고 금년에 반포한 토지 조례 3·4·5·6·7조와 입국 조례 제 3조를 취소할 것.
④ 한국 독립 운동자는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일본경찰에 의해서 체포 구금되거나 일본에게 인도하는 폐단을 없앨 것.
⑤ 무고한 피해자를 조사하여 그 피해자와 그 유족을 위무할 것.
⑥ 이미 중국에 입적한 한국인에게는 ‘삼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차별 대우를 하지 말 것.
⑦ 입적하지 않은 한인 교포에 대해서도 한·중 관계와 한국독립운동의 과도기적 특수 사정을 참작하여 적과 내통한 자 혹은 범법자를 제외하고 일본인으로 대우하지 말 것.
⑧ 한인 교포 관계 사무 기관을 설치하고 교포의 교육·산업·자치 등에 관한 처리를 신중하게 이행할 것.
이렇게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자는 그대로 외교 문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30년 11월 중국국민당 제4차 집행위원회가 열릴 때는 장학량도 남경(南京)에 오게 되니 조소앙과 박찬익은 위의 문서를 가지고 장개석·장학량과 접촉하여 ‘적당한 조처를 강구하겠다.’는 중국측의 회답을 받았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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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상해 총영사 ≪재호(在滬) 민족파 대표의 남경정부에 대한 청원≫ (소화 5년 12월 8일 외무대신 앞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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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31년 5월 남경에서 국민당 전당대회 성격의 국민회의가 열렸는데 임시정부에서는 안창호·박찬익(朴賛翊)을 보내서 국민회의 동삼성 대표 의원과 손을 잡고, 앞에 소개한≪동삼성 한교 문제≫책자를 각 의원에게 분배하고 한국 동포에 대한 처우 개선을 교섭하는 한편, 조소앙이 기초한 국민회의에 대한 한국임시정부의 선언문을 전달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정부와 국민당의 지원을 교섭하였다.41)
이러한 과정을 밟으면서 소위 동삼성 한교 문제는 좋은 방향에서 해결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는데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의 본격적 침략을 맞아 이른바 만주사변을 당하게 되니 자연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중 외교 관계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임시정부나 독립운동 단체와 중국의 각급 정부의 사이는 물론, 양국 국민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일본의 갖은 술책이 항상 개재하고 있어서 때로는 서로 오해하여 충돌하고 유혈 참극까지 나타낸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만주에는 당시 한국 동포가 1백만이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충돌이 없을 수 없겠으나 일본의 밀정·영사관·각종 회사·경찰·관동군 등에서 계획적으로 술책을 꾸며 한국인과 중국인이 싸우게 만든 예가 허다하였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만보산(萬寶山)사건이었다.42)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본 편찬위원회에서 따로 계획하는 ≪무력전투사≫에서 소상하게 밝혀질 것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상과 같이 중국에 대한 외교는 초기에 광동정부와 북경정부 그리고 동삼성 집권자에 대하여 파상적으로 전개했던 것인데,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정부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남경에 있던 국민당 정부만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폈다.
그러나 남경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그리고 한국 임시정부의 쇠퇴 및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운동자의 좌경(左傾) 때문에 조심스럽게 관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 내 김구(金九)를 비롯한 민족주의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한·중 관계는 전격적으로 호전하여 1937년 중·일 전쟁에 임하여는 한·중연합전선을 이루어서 1945년 제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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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상해 총영사 ≪국민회의에 대한 임시정부 대책에 관한 건≫(소화 6년 5월 18일 보고)
42) ① 이강훈(李康勳) ‘독립운동반세기’ (강원일보 1972년 5월 18일자).
② 앞의 ≪무장독립운동비사≫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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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5) 한·중호조운동
한·중호조운동은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등이 전개한 민간운동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부 간의 외교가 아니라 민간 외교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호조 운동을 비롯한 민간 외교의 성과가 초기에는 중국 남부에서 볼만한 것이었는데 중국 남부는 당시 한국임시정부와 이념이 같은 광동정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민간 외교의 성과는 임시정부 선전 외교의 측면에서 값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민간 외교가 활발히 전개된 것은 1921년 태평양회의를 대비한 활동 때부터였다. 즉 1921년 9월 22일 상해에서 중국 제로(諸路) 상계(商界)연합회가 열려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건의문을 채택하였는데 그 건의문 중 제9조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으며43)같은 해 11월 30일 상해의 학생 회관에서 중화민국 전국 국민 외교 대회가 열렸을 때는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5개조의 건의 전문 중 제2조에 한국 독립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44)이와 같은 것은 임시정부가 벌인 선전 외교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비슷한 처지에 놓인 중국 국민의 호조 정신의 발로라 하겠다.
그 무렵 한·중 국민의 호조 운동은 한·중호조사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이것을 영국이나 미국의 ‘한국친우회’와 비교해 생각하면 한·중호조사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한국친우회는 외국 사람에 의한 단체지만 한·중호조사는 양국 국민이 합력한 단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중호조사는 상해에서 1921년 4월, 신익희(일명 왕해공(王海公))·이유필(李裕弼)과 중국인 주검추(周劎秋)·오산(吳山)·심중준(沈仲俊)이 마음을 모아 만들었고 그 보다 앞서 1921년 3월 17일에는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이우민(李愚珉)·황영희(黃永熙)가 중국인 구배기(具培基)·하민범(賀民範)·구수어(仇數魚)·도의(陶毅) 등과 같이 만들었고, 1922년 성도(成都)에서도 이기창(李基彰)이 주선하여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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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조선독립운동연감≫ 대한민국 3년 9월 22일 조 p.200.
44)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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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한·중호조사를 만들었다.45)그리고 확실한 조직 일자는 모르나 1921년 5월 전에 한구(漢口)에서도 한·중호조사가 만들어졌다.46)한·중호조사는 대개 선전부·통신부·경제부를 두고 활동하였는데 무엇보다 중국인에게 한국독립운동을 이해시킨다는 점에서, 즉 선전 외교의 측면에서 뜻있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한·중호조사의 회원으로 한국인은 임시정부 요인 혹은 독립 운동에 관계하던 사람이었지만, 중국인은 특히 학교 교원이 많이 가담하고 있다. 선전 효과면에서 좋은 한·중호조사이니 임시정부에서도 적극 추진하였던 흔적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1921년 3월 12일부터 8월 10일까지 황영희·조중구(趙重九)를 외무부 선전원에 임명, 중국 남부 주요 도시를 순회토록 하여 우리의 독립 운동을 선전 이해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는데47)이 때에 한·중호조사가 많이 생기게 됐던 것을 미루어도 알 수 있다. 임시정부의 그러한 계획은 태평양회의를 앞두고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상해 한·중호조사를 중심한 한·중 호조 총사(總社)는 태평양회의에 11개조로 된 극동 문제에 대한 제안 선언을 제출하기도 했다.48)
한·중 호조 총사는 1921년 8월에 생긴 것인데 중국 내 각 성(省)에 있는 한·중호조사를 연합하여 효과적인 활동을 기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한·중 호조 총사는 상해에 두고 한국인과 중국인 각각 10명씩의 평의원을 선출하여 운영토록 하였는데, 한국 측 평의원은 김홍서(金弘敍)·김규식(金奎植)·이탁(李鐸)·여운형(呂運亨)·김문숙(金文淑)·한진교(韓鎭敎)·윤현진(尹顯振)·서병호(徐丙浩)·김철(金澈) 등이었다.49)
한·중호조사가 각처에서 조직되더니 한·중 호조 총사로 발전하고, 또 태평양회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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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① ≪조선민족운동연감≫ p.212.
② 애국동지회 ≪한국독립운동사≫ p.363. 두 책에서 연대와 이름이 다른 것은 앞의 책을 따랐음.
46) 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 p.587
47)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3년(1921) 3월 12일조부터 8월 10일조까지(p.p.176~195).
48) ① ≪독립신문≫ 1921년 8월 15일 4면.
② ‘중·한국민 호조 총사 태평양 회의에 대한 제안 선언’(대정 10년 9월 조선총독부 경무국 ‘재외 불령선인의 근황’ Sp No.45 # 141 p.16 및 120).
49) ≪독립신문≫ 1921년 8월 15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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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하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자, 호법정부의 서울인 광동(廣東)에서도 한·중 호조 운동이 일어나 9월 27일 한·중협회가 조직되었다. 한·중협회는 광동정부의 국회의원 등 유수한 인사가 참가하여 회원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하며 한·중협회의 이름으로 태평양회의에 요구 조건을 전보로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규탄한 것으로 3개 조항으로 되었다.50)
7. 기타 특수 관계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것, 유럽에 대한 것, 미국·소련·중국에 대한 것으로 묶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묶음에 넣을 수 없는 특수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임시정부가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었기 때문에 그 조계 당국에 대한 외교 활동과 말썽 많던 여운형의 동경(東京) 행차 문제이다.
프랑스 조계 당국에 대한 외교는 유럽에 대한 외교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도 생각하겠으나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 안에서 이루어진 외교 관계이며, 근본적인 문제 외에는 프랑스 본국 정부와 거의 관계하지 않고 조계 당국이 독자적으로 임시정부와 관계하였기 때문에 성격이 다르고, 여운형의 동경 행차는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행차가 아니니 외교 활동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여운형이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거나 또 임시정부의 위치를 한국 독립 운동이라는 커다란 움직임의 구심점으로 평가해 보면 여운형의 동경 행차를 임시정부의 대일 외교라고는 할 수 없어도 외교 활동에서 나타난 특수한 사건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1) 프랑스 조계 당국과의 관계
임시정부가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었고 또 프랑스 조계에는 한국 동포가 많이 살고 있어서 독립운동 관계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았다. 프랑스 당국과의 관계는 물론, 중국인이 많으니 그들과의 관계, 일본의 끊임없는 침투, 또 전차(電車)는 영국의 것인데 한국인이 전차 차장 노릇을 가장 많이 했으니 그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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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독립신문≫ 1921년 11월 11일 3면과 11월 19일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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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등 일반 민형사(民刑事) 문제가 여러 나라의 이해(利害)와 얽혀 외교 관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고 한국 동포는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고난도 한없이 겪었다.
이렇게 딱한 처지에 있던 임시정부와 한국 동포에 대하여 만일 프랑스 조계 당국이 일본 영사관 경찰과 야합하여 한국의 독립 운동을 방해했다면 상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했을 것이다. 혹 간의 예외는 있었더라도 대개 일본 경찰의 손이 뻗치게 되면 사전에 알려줘서 미리 조처할 수 있었다.51)때문에 일반 범죄 같은 것도 독립운동자의 특수한 처지를 고려하여 프랑스영사관에서는 외교 절차를 밟아 관대한 처분을 취해 주었다.52)그리고 1925년 후 상해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점점 활발해질 때는 그것을 제지하기 위하여 조계 당국으로부터 상당한 감시가 있었으나, 민족주의 인사에게는 전과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운동을 제지한다는 것이 독립 운동 전반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어서 1927년 7월 20일 김구(金九)는 프랑스 영사(領事) 메이리엘에게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보아 프랑스 당국은 협조적이었다.
그리하여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초부터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간접적으로나마 도와주던 프랑스 조계 경찰의 부책임자인 사비에가 10년 동안의 근무를 마치고 1928년 본국으로 돌아가매, 임시정부에서는 당시 가장 재정이 곤란하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기념품을 전달하여 고마움을 나타냈다.53)
프랑스영사관의 협조적 태도는 1920년 2월과 4월에 독립 운동자의 부주의로 작탄(炸彈)이 폭발한 사건이 있었던 때도 독립운동자의 특별한 처지를 이해하여 관대한 처분을 했다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54)
(2) 여운형 등의 동경 행차 문제
여운형 일행이란 여운형·장덕수(張德秀)·최근우(崔謹愚)·신상완(申尙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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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① ≪백범일지(白凡逸志)≫ p.272
② 조시원(趙時元)·정화암(鄭華岩)·조경한(趙擎韓) 등 상해 독립 운동자의 공통된 증언임.
52) 김홍일 ≪나의 증언≫(한국일보 1972년 3월 5일 및 7일자 3면)
53) ‘임시정부 간부와 상해 프랑스 관헌과의 관계에 관한 건’(소화 3년 9월 15일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
54) ① 주요한 ≪안도산 전서≫ p.645 및 p.p.692∼697.
② ≪조선민족운동연감≫ 1920년 4월 29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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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데 이들은 1919년 11월 14일 일본의 교섭을 받아 동경으로 행차하였다. 일본이 여운형에게 교섭해 오기는 두 달 전부터였다고 하는데 여운형은 하의도(荷衣島)에 갇혀 있던 장덕수를 보석 받아 동경으로 갔다.
여운형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일본정부에 대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한국 민족의 의사를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일본정부도 그것을 듣자는 것에 의도가 있다고 했다.55)
그러나 이것 때문에 상해의 독립 운동 분위기가 물 끓듯 분주하였다. 원래 여운형의 일행이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이동휘·안창호·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 등 총장들은 대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휘를 제외한 각 총장들은 동경 행차의 이해득실을 속단하지 못하여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독립신문(獨立新聞)≫에서도 그 일행의 과거 독립 운동 공적으로 보아 역시 신중하게 결과를 기다리자는 뜻으로 논평하고 있다.56)
일본정부에 대한 정면적 외교 문제는 원래 그 해 8월에 임시정부 안에서 논의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8월에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있던 대한민국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에서 임시정부에 건의서를 전달했는데 건의 사항 제4항에서 ‘일본정부에 외교원을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정면으로 요구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그 해 9월 8일 당시 국무총리 대리였던 안창호는 ‘생각하여 행동할 것임’이라고 회답했던 것이다. [제2장 제1절 제3항 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참조]
이러한 청년외교단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일본 경찰에 발각된 것은 11월 27일부터 12월 3일 사이의 일이니 일본정부가 여운형을 초청한 것은 그러한 내막을 알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임시정부는 이미 청년 외교단으로부터 건의를 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여운형의 동경 행차를 모르는 척 했을 가능성도 있다. 청년외교단의 건의가 임시정부에 얼마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청년외교단의 요구에 의하여 조소앙(趙素昻) [조용은]을 외교 사절로 파리에 파견했던 사실을 기억한다면 쉽게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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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독립신문≫ 1919년 11월 15일자 2면.
56) 앞의 신문 1919년 11월 20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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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여운형 일행이 정부 대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갔다는 구실로써 임시정부 안에서는 표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상해 일반 독립 운동자들 사이에서는 큰 문제로 등장하여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많았다. 그들이 일본으로 갔다는 소문이 나자 그 이튿날 유호(留滬) 임시 국민 대회 발기회가 조직되어 17일에는 거류민단 사무소에서 국민 대회가 열려 여운형 일행을 논박하고 국민 대회 선포문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선포문 내용에 관하여 분명한 결정이 없어서 선포문 발표를 둘러싸고 분란이 일어나니 아마도 이승만(李承晩)의 위임 통치 문제 혹은 그의 대통령 선출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이후 가장 큰 시비 논쟁으로 등장하였을 것이다.58)
그것은 신채호(申采浩)·원세훈(元世勳)·한위건(韓偉健)·정해리(鄭海里)[일명 鄭東吾] 등은 여운형 일행을 민의에 반대한 국적으로 규정하며 사형을 주장하고, 그 외 대부분의 사람은 신채호 등의 과격한 발언을 오히려 공박하니 독립 운동의 분위기가 자못 심상치 않았다. 아무튼 여운형 일행은 동경에서 국빈으로 대접받고, 제국 호텔에서 내외 기자단과 그 곳 평화협회 간부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 운동의 정당성은 웅변한 좋은 열매도 맺었으나 그로 말미암아 상해 독립 운동 거리를 격동시키고 분란이 일어나게 될 것은 예상도 못했던 모양이다.
한편 여운형의 제국 호텔에서의 연설은 장덕수가 통역했는데, 이것을 일본 현지 신문이 대서특필로 보도하니 일본 정계도 발칵 뒤집어졌다. 일본측에서 보면 저희들 식민지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이 동경에 와서 그들의 척식국 장관 고하(古賀廉造)·육군대신 전중(田中義一)·내무대신 상차(床次竹二郞)·체신대신 야전(野田卯太郞)·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수야(水野鍊太郞) 등 각료급과 면담하는가 하면, 내외 기자 등을 모아놓고 강연했다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국회에서는 외교 문책이 논의되고 사태가 험악하여져 여운형 일행을 상해로 돌려보냈다.59)
원래 이것은 일본척식국 장관이 주동하여 일본기독교청년회와 상해의 프랑스선교단을 교량으로 일을 꾸몄던 것이다. 구태여 여운형을 초청한 것은 그가 외무총장 박용만(朴容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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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Ⅰ 분책 p.207. 고경 제34301호 대정 8년 12월 3일.
58) ≪독립신문≫ 1919년 11월 27일 2면 및 12월 2일 2면 및 25일 2면.
59) ①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54.
② 제44회 ≪일본국회의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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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하지 않은 가운데 외무차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일본 수상 원경(原敬)의 속셈에는 무력으로 통치하는 한계를 면해 보려는 의도와 한국독립운동을 잠시 제지시키고 혹은 한국 지도자를 이간시키려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외 기자를 참석시킨 것을 볼 때 궁지에 몰린 국제 여론을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환시켜 보자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임시정부에서는 여운형이 돌아온 후 국무총리 포고 제1호로써 문책한 것을 철회하고 1919년 12월 29일 포고 제2호로써 ‘독립에 위반되는 행동이 없으므로 여운형 일행의 전과(前過)를 특사함을 일반 국민에게 포고’하였다.60)
제5절 군사 관계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 중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한 것이 있었다면 만주 지방에 있던 여러 독립군 단체가 산발적이면서 계속적으로 국내 진격전을 벌인 것과 일본군의 만주 출병에 따라 청산리(靑山里)싸움 및 봉오동(鳳梧洞)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쟁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정부가 직접 작전을 지휘하여 벌인 전쟁은 아니었다. 엄격히 말하면 명분만은 임시정부 산하 단체에 의하여 수행된 독립 전쟁이었다.
한국독립운동사라는 큰 테두리에서 독립 전쟁을 간추려 본다면 네 토막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만주를 무대로 국내 진격전을 끊임없이 계속한 독립군의 무력 항쟁이고, 또 하나는 시베리아에서 소련의 볼셰비키혁명군과 손을 잡고 주로 시베리아에 진주한 일본군을 상대한 독립군 투쟁이고, 또 하나는 국내에 근거한 독립군 단체의 활동과 곳곳에서 감행된 산발적인 작탄(炸彈) 활동이고, 마지막 하나는 중·일전쟁 후 중국군과 연합하여 대일전쟁을 수행한 광복군의 활동이다.
이렇게 보면 임시정부가 직접 통할한 독립 전쟁은 중·일전쟁 후의 것이다. 그리고 독립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낙양(洛陽)군관학교 문제도 1933년이 돼야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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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독립신문≫ 1920년 1월 10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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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된다. 그런데 제2편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이란 1931년까지로 구획하고 있으니 1933년 이후의 것이라면 여기서 언급할 문제가 아니라 이 책 제3편과 제4편에서 상론될 것이다.
시베리아의 독립군은 좀 특수한 성격이 있는데 아무튼 1922년까지 독립군의 성격을 띠우고 활약하였다. 만주의 경우는 낙양군관학교로 독립군 지도자가 간 후에는 공산주의 독립군의 게릴라 활동이 다소 있었으나 거의 1933년에 일단락 짓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시베리아나 만주 지방 그리고 국내의 독립군 활동과 대부분의 작탄 활동은 임시정부가 직접 관여한 것이 아닌데 어떻든 이러한 것은 별책 ≪무력전투사≫에서 취급하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임시정부로서의 군사 계획이나 초기에 설치한 바 있었던 무관학교(武官學校) 관계 혹은 임시정부 외곽 단체의 군사 활동 등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그 한계를 잡겠다.
1. 초기의 계획
초창기 임시정부에서는 군사 활동에 대한 것은 만주와 시베리아의 독립군 단체에 거의 일임하고 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를 만주 혹은 시베리아로 옮겨 가자는 그곳 독립군 단체의 주장에 대하여 독립전쟁의 관점보다 국제 외교상의 처지에서 상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였고, 그리고 서간도의 한족회와 타협할 때 국내 무장 광복 운동의 기지로서는 만주가 적당하므로 독립전쟁 주도권은 자연 만주에 근거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가 장악하게 되었다. 만주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산하 단체로 서로(西路)와 북로(北路)의 2대 주력 단체도 처음에는 군정부라고 호칭하다가 한 나라에 복수 정부가 있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여 서·북군정서라고 개칭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만주나 시베리아의 독립군 단체가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인 사관학교 문제·비행대 편성 문제·군사 법규의 정비 등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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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임시정부 초창기에는 파리강화회의 및 미국에 대한 외교와 연통부 교통국을 통한 국내 독립 운동을 통할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또 임시정부가 1919년 11월부터 안정되었기 때문에 1920년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육군임시군제(陸軍臨時軍制)’·‘육군임시군구제(陸軍臨時軍區制)’·‘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군사경위근무조례(軍事警衛勤務條例)’·‘경위근무세칙(警衛勤務細則)’·‘군무부임시편집위원부규정(軍務部臨時編輯委員部規定)’을 만들어 군사 활동의 기초가 되는 제반 규정을 정비하였다.1)위에서 무관학교 관계 규정은 실현을 보았으나, 그 외의 것은 실제 적용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니 그 내용을 일일이 검토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원래 그러한 법규는 당장 실현하려고 만들었다기보다 준비 체제로 만든 것이었지만, 후에 그것을 적용하려고 해도 뜻대로 안 되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초부터 너무 대 규모의 계획을 수립하여 흡사 정상적 국가의 군사 편제와 같이 만들려고 했던 점이고, 둘째는 재정적인 곤란이었고, 세째는 임시 군구제에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임시정부는 서간도(西間島) 군구(軍區)·북간도(北間島) 군구(軍區) 그리고 시베리아를 강동(江東) 군구(軍區)로 한 3개 군사 구역으로 나누어 임시정부 군무부를 정점으로 군사 체제를 갖추려고 했으나 임시정부가 그 방면 동포 사회를 만족할 만큼 통할하지 못하였고 또 그 방면 독립군 단체의 내적 사정도 복잡했었는데 일본군과 그 첩자들의 끊임없는 공격 때문에 그러한 체제를 만들었다고 해도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 체제를 만들 수도 없었다. 따라서 각처의 독립군은 계통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고 독립군 단체는 그때그때 상황 변화에 따라 이동하면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동포로서 독립군을 편성하려고 했던 흔적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1920년 초에 무관 학교를 개교하여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청년으로 독립군 장교 교육을 시작한 것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외 1920년 1월 24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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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임정편 Ⅱ p.p.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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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된 군무부 포고 제 1호2)그리고 그 포고를 지원하기 위한 1920년 2월 14일 ≪독립신문≫ 사설에서 국민개병(國民皆兵)을 논하고 있는 점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군무부를 만주로 이동시켜서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로 계획한 적도 있다. 이것은 1920년 2월 23일부터 열린 제7회 임시의정원에서 윤기섭(尹琦燮)·왕삼덕(王三德) 등이 제안하여 통과한 ‘군사에 관한 건의안’에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은 ① 금년 5월내에 군사회의를 소집할 것 ② 군무부를 만주로 이동할 것 ③ 금년 내에 만주에서 10~20개 연대의 보병을 훈련할 것 ④ 금년 내 사관·준사관 1천 명을 훈련할 것 ⑤ 금년 내에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보병 10개 연대를 출동시킬 것 등으로 되어 있다.
파리강화회의와 미국에 대한 기대가 실패하자 오로지 독립 전쟁에 의한 방법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계획이 나왔을 것이다.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한 뒤에야 세계가 움직이겠고,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당한 후에야 국민의 단합이 완성하리라’라고 윤기섭은 ‘군사에 관한 건의안’의 제안 설명에서 울면서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위의 건의안의 의정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통과하였으나 당시 군무차장 김희선(金羲善)의 말대로 뜻은 좋으나 재정 문제로 실현할 수가 없었다.3)그러나 오늘날 생각하면 만주의 독립 운동 단체를 포함한 군사회의를 소집하는 제1항과 군무부를 만주로 이동한다는 제2항의 건의는 실현해 볼만도 한 일이었다.
2. 각종 군사 교육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것으로 군산 관계 법규를 정비했던 일과 군사 관계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군사 관계 법규에 대하여는 앞에서 지적한 것이니 재론하지 않겠다. 군사 교육에 관한 것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임시 육군무관학교의 설치이고, 하나는 비행대 편성 문제를 중심한 비행사 양성소이고, 또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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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①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2년 1월 24일조 (p.89).
② ≪독립신문≫ 1920년 2월 24일 1면.
3) ≪독립신문≫ 1920년 4월 3일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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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때의 위생병(衛生兵)을 양성하기 위하여 간호학교를 설치한 것이다.
(1) 임시육군무관학교
무관학교가 언제 설치되었는가 하는 문제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독립신문≫의 기사를 표준해서 말하면 무관학교는 ‘임시육군무관학교 조례’에 의하여 상해에 설치한 것인데 1920년 3월 20일 그 첫 개교식을 거행하였다.4)그 후 5월 8일 첫 졸업식을 가졌으며5)12월 24일에는 제2회 졸업식이 있었다.6)
그런데 안창호의 일기에는 1920년 1월 18일 손두환(孫斗煥)·김보연(金甫淵)과 더불어 육군 사관학교 확장 문제가 논의되었고, 2월 16일과 17일에는 육군 사관 학생들이 성훈(成薰)의 가택 수색 문제로 당시 내무부 경무국장이던 김구(金九)가 사퇴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5월 8일 첫 졸업식을 취재한 ≪독립신문≫ 기사에서 졸업생은 19명이었다고 하며[3월 20일 입학생은 40명] ‘기정(旣定)의 계획대로 6개월의 업을 필하고 거(去) 5월 8일 오후 4시 ○○거류민단 내에서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다’라고 나타나 있는데 계획대로 6개월 교육을 했다면 3월 20일 개교식을 했다는 기사와 모순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먼저 일을 하고 후에 제도적 형식을 구비한 연통제·교통국·외교 위원제 등 허다하였다. 그렇다면 이것도 그와 같은 경우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렇게 보아서 무관학교(육군사관학교)는 늦어도 1919년 말에 개교한 것으로 판단된다. 무관학교는 사관 후보생을 교육하는 곳이다. 때문에 당시 상해에 있던 청년으로 일반 학교와 중국의 각처 군관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사람으로 무관(장교)이 되려고 희망하는 청년은 모두 무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독립 전선에 헌신할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가끔 과격한 행동을 저질러 문제가 된 때도 있었다. 앞에 본 바와 같이 2월 16일 경에는 성훈의 집을 수색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4월 23일에는 13명의 학생이 박승문(朴承文)·장승조(張承祚)·장신국(張信國)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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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립신문≫ 1920년 3월 23일 2면.
5) ≪독립신문≫ 1920년 6월 10일 2면.
6) ≪독립신문≫ 1921년 1월 1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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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으로 도인권(都寅權) 교관의 배척 운동도 벌였고,7)6월 9일에는 나창헌(羅昌憲)·김기제(金基濟)·황학선(黃學善) 등이 주동하여 내무부 청사에 들어가 난동한 일도 있었다.8)
그러나 무관학교는 김희선·도인권을 중심으로 착실히 운영되어 그 졸업생을 국내와 일본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펴게 하였고9)남만주에 있는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 단체인 대한광복군 총영에 배치하여 독립전쟁에 참전토록 하였다.10)
그러면 무관학교 관계를 보다 상세히 알기 위하여 임시육군무관학교 조례를 소개하여 둔다.
[임시육군무관학교 조례]
제1조 육군 무관은 중등 이상의 학력이 있고 연령이 만 19세 이상 30세 이하의 대한민국 남자로 하여금 입학케 하며 초급 장교 됨에 필요한 교육을 수(受)함을 목적으로 함. 단(但) 본교 교장이 특히 수학의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자는 연령에 불구하고 입학을 허할 수 있음.
제2조 학교의 교육을 분(分)하여 교수급 훈육으로 하고 기 강령은 군무총장이 이를 정함.
건항의 교칙은 전조의 교육 강령에 의하여 교장이 기안한 후 군무총장의 인가를 수하여 정함.
9) 조선총독부 경무국 ‘무관학교 졸업생 일본 파견의 건’ (대정 10년 [1921] 1월 28일 고경 제2389호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에서]).
10) 안창호 일기 8월 10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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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조 부관은 교장의 명을 승하여 교중의 서무에 종사함.
제6조 군사학 교관은 군사학 각과의 교수를 분담함.
제7조 기술 교환은 학도의 마술·검술 급 유도 등의 훈육을 담임하고 교구(校廐) 도장에 관한 일체 사항을 장리하며 마필(馬匹)의 교련을 담임함.
제8조 군사학 급 술과(術科) 이외의 교관은 각기 소정의 교수를 분담함.
제9조 학도대장은 학도대를 통솔하여 학도의 훈육을 감독하고 각 중대장으로 하여금 훈육을 담당케 함.
단, 교장이 사고 있을 때에는 이의 대리를 함.
제10조 학도대 부관은 학도대장의 명을 승하여 대중의 서무에 종사함.
제11조 중대장은 학도대 구대장을 지휘하며 중대 학도의 훈육을 담임케 하고 기 성적에 대한 책임을 부함.
제12조 학도대 구대장은 학교 훈육의 제 과목을 분담하며 학도의 일상 궁행(躬行)을 감시하고 분담한 훈육에 대하여 책임을 부함.
제13조 주계·군의 급 서기는 교장의 명을 승하여 각기 분담 사무를 장리함.
제14조 학도의 수학기는 만 12개월로 함.
제15조 학도의 제 급료는 별도 정하는 바에 의함.
제16조 학도는 재학 중 총(總)히 교장의 관리에 속함.
제17조 학도는 청원 퇴학할 수 없음.
제18조 학도 중 다음 사항의 1에 해당하는 자는 퇴학을 명함.
① 학술의 예습이 불량하고 실제 수학의 식력(識力)이 부족하여 졸업의 가능이 없는 자.
② 군기(軍紀)를 문란케 하고 우(又)는 법칙을 범(犯)하여 죄상이 중한 자.
③ 품행 불량으로 개전(改悛)의 가망이 없는 자.
④ 상이 질병에 인하여 수학 불능한 자.
⑤ 졸업 시험에 낙제한 자.
제19조 전조 제1·제4·제5항에 의하여 퇴학을 명한 자로서 장래의 가망이 있는 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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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認)한 자는 차회(次回) 입학기에 입학을 재허(再許)할 수 있거나 또는 차기 학도와 공히 수학케 할 수 있는 자로 인(認)한 자는 퇴학을 명하지 않고 차기 학도에 편입할 수 있음.
제20조 학도 중 질병 기타 부득이한 사고로 인하여 수업 기내에 소정의 학술을 수료치 못하고 혹은 졸업 시험을 수(受)하기 불능한 자로서 학업을 중지중에 있는 자는 계속(繼續)을 명할 수 있음.
제21조 제19조 내지 제20조에 해당하는 자가 있을 시는 교장은 기 사유를 구보(具報)하며 군무총장이 이를 재정(裁定)함.
제22조 졸업 시험을 종(終)하였을 시는 교장은 각 교관·학도대장 급 중대장을 집합하여 회의를 개(開)하고 성적을 고사(考査)한 후 급제자의 예서(例序)를 정하고 군무 총장의 인가를 수하여 졸업증서를 수여함.
제23조 졸업생은 참위(參尉)에 임명하며 대부속(隊附屬) 혹은 기타의 근무를 명함.
제24조 학도에게는 2주간 이내의 하기 급 동계 휴가를 여(與)할 수 있음.
제25조 교관·중대장·구대장은 교육상 장해가 없을 정도에서 교장의 승인을 득하여 타의 근무를 겸행할 수 있음.
제26조 학도의 연습상 필요할 경우에는 교장은 근방의 사령관과 협의하여 기 단체를 사용할 수 있음.
제27조 내지(內地) 급 외국 거류지에 재(在)하여는 육군 초급 장교를 양성할 목적의 학교는 총(總)히 본 조례를 적용함.
부칙
제28조 본 조례에 규정한 군무총장의 직권은 참모본부 성립과 동시에 참모총장에 전속(轉屬)함.
제29조 본 조례는 공포의 일부터 시행함.
(2) 비행대 편성 문제와 그 양성소
다음에 1920년에는 비행대 편성 문제가 대단히 활발하게 대두하고 있었다. 비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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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 문제는 1920년 1월과 2월 비행기 구입 문제를 놓고 구체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1월 14일에는 당시 상해의 영자(英字) 신문 ≪대륙보≫ 기자 에벤츠와 비행기 종류 및 구입 절차에 대하여 협의하였고, 그 후 계속 추진하여 2월 2일부터 19일까지 거의 매일같이 미국인 비행기 기수 에드먼이란 사람과 보다 구체적 협의를 하였다.11)
그런데 비행기의 구입 계획은 직접 독립전쟁의 전투용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주요 임무는 국내에 선전문을 살포하는 것과 각처에 있던 독립군 단체 혹은 각처의 동포 사회와 연락을 신속히 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던 것이었다.
어떻든 이것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처음에 미국인 에드먼을 통하여 조사한 결과 당시 임시정부로서 구할 수 있는 것은 1백 50마일 밖에 비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자금 문제도 겹쳐 좌절되고 말았다.
상해에서 비행대를 편성하려고 하던 문제는 미주에서 비행사양성소 설치 문제와 동시에 추진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비행대 편성은 계획대로 안 되었으나 비행사양성소는 일단 뜻을 이루게 되었다.
비행사양성소는 1920년 2월 20일 미국 캘리포오니아주(州) 월로우스에 설치하였다. 당시 미국에 건너갔던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과 김종린이 발기하여 한인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는데 그해 5월에는 비행기 2대를 구입하여 미국인 기술자 1인과 한국인 비행사 6인으로 교관단(敎官團)을 구성하였으며, 처음에 양성소 학생은 19명이었다. 그 후 1922년 6월에는 학생이 41명에 달하였으며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비행기도 5대에 이르렀고, 비행기에는 무선 통신의 장비도 갖추었던 것이다.12)
이 양성소는 동포의 재정 지원에 의하여 유지하였는데 그 후 독립전쟁이 예상대로 되지 않았으니 원래 목적한대로 독립전쟁의 실전에 적용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 양성소 관계자는 다음과 같다.
총재 김종린(金鍾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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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안창호 일기 1920년 1월 14일부터 2월 19일까지 참조.
12) ① 김원용 ≪재미한인50년사≫ p.350.
②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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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 노백린(盧伯麟)
서기 강영문(康英文)
재무 이재수(李在秀)·신광희(申光熙)
감독 곽임대(郭臨大)
간사 진영규·윤응호·양순진·임치호·이암·마춘봉·이운경·한성준·이진섭
비행사 노정민·박낙선·우병옥·오임하·이용선·이초
(3) 위생병의 양성
이것은 대한적십자사에 부설한 간호원 양성소를 말하는데 1920년 1월 31일 개교하였다. 이것은 독립전쟁에 대비한 위생병으로서 간호원을 양성한 것이었지 다른 의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한적십자사를 서술할 때 재론하겠다.[제2장 제2절 제1항]
이상과 같이 독립전쟁의 준비를 위한 임시정부의 노력은 육군무관학교를 중심하여 다각적으로 추진되어 어느 정도 희망적인 효과도 보았으나, 1921년부터 안으로 군사 통일회와 국민대표회 문제가 대두하였고 밖으로 태평양회의 문제가 박두하여 임시정부는 독립전쟁 준비에 힘을 쏟을 여유를 잃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격동기를 맞아야 했으니 임시정부로서 다시 군사 활동에 손을 쓰게 되는 것은 1933년 낙양(洛陽)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 설치 문제가 중국 정부에 의하여 조처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13)
3. 임시정부의 외곽 단체
임시정부가 직접 관장하고 있던 독립군 단체는 초기에는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외곽 단체는 많았다. 특히 만주에 있던 한족회(韓族會)와 그의 군사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그리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임시정부 초창기의 산하 단체로 만주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이고 대한청년단연합회와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이고, 그 후 육군주만(陸軍駐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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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채근식 ≪무장독립운동사≫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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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參議府)만은 임시정부의 직할 단체이다.[제2장 제2절 제2항 참조] 그리고 상해에 있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도 독립 전쟁의 준비 단체로서 임시정부 외곽 단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것은 대표적인 것만 열거했는데 이것 외에도 보다 적은 규모의 것이 많았다. 그런데 위에서 한국노병회 외에는 만주에 있던 독립군 단체였는데 그 중에서 대한광복군 총영은 그것이 조직될 때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의 통할을 받던 단체였다. 그리고 한국노병회는 조직할 때 국민대표회를 눈앞에 둔 정치적 복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독립 전쟁 준비 단체였다는 점에 한국노병회의 제2차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의 두 단체는 여기서 간단하게라도 검토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1) 대한광복군 총영
대한광복군 총영은 남만주(서간도)의 대한청년단연합회·대한독립단·서로군정서 등의 간부와 임시정부 군무차장 김희선이 안창호의 지도를 받으며 1920년 여름에 만든 독립군 단체였다. 임시정부의 방계가 아닌 직속 기관으로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단체는 이 것 뿐이었던 것 같다.
대한광복군 총영의 설치 문제는 1920년 5월 7일 상해에서 안창호·김희선·이탁(李鐸)이 논의한 것이 처음이었고, 6월 중에는 남만주에서 대한독립단과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대가 합쳐 대한광복군 총영을 결성하였던 것이다.14)그 후 점차 조직이 확대되고 국내에 대한 작탄(炸彈) 활동과 진격전을 감행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특히 조직한 직후 미국 의원단이 국내를 시찰할 때 곳곳에서 작탄 활동을 벌여 일본 통치에 항거하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을 실증적으로 보여 줬다. 그 후 11월 15일에는 국내에 공채(公債) 모집권을 임시정부로부터 허락받아 재정의 독립을 얻어 활동하다가 1921년 8월 남만주 일대 군사 단체 통합 운동이 이루어질 때 통의부(統義府)로 결속하였다.15)
이상은 대한광복군 총영의 변천 과정을 간략히 살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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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① 안창호 일기에 5월 7일부터 8월 10일까지 광복군 총영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것이 계속 발견된다.
② 앞의 ≪무장독립운동비사≫ p.61.
③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181.
15) 앞의 ≪무장독립운동비사≫ p.p.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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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노병회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는 1922년 10월 28일 결성한 단체였는데 중심 인물은 김구(金九)와 여운형(呂運亨)이었다고 한다.16)
한국노병회가 결성된 배경에는 좀 복잡한 정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로 상해 정계가 대단히 어수선할 때였기 때문이다.[제3장 제2절 참조]
그러나 그와 같은 정치적 복선에도 불구하고 한국노병회는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크게 벗어나지 않고 많은 공적을 남겼던 것이다. 이것이 원래 발기된 것은 1922년 10월 1일이었는데 군인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을 목적한 단체였다. 처음에 김구·조상섭(趙尙燮)·김인전(金仁全)·이유필(李裕弼)·여운형(呂運亨)·손정도(孫貞道)·양기하(梁基瑕) 등에 의해서 10월 1일 발기되었고 21일에는 박은식(朴殷植)·한태규(韓泰珪)·김홍서(金弘敍)·김현구(金鉉九)·박걸(朴傑)·이용재(李龍宰)·김두만(金斗滿)·최준(崔濬)·조동호(趙東祜) 등이 함께 하여 총 16명이 취지서와 회칙을 만들고 28일에 발기총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노병회는 김구를 이 사장으로 선임하고 경리부(經理部)·교육부·노공부(勞工部)를 설치하고 향후 10년 동안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할 것과 1백만 원 이상의 자금을 만들 것을 목표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국노병회는 보통 회원과 특별 회원 모두 40명에 불과하였으나 회원이 임시정부 혹은 상해 정계의 거물급 인사였기 때문에 그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였다. 중요한 업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1922년 12월에는 이동건(李東健)을 하남성(河南省) 한전군사강습소(邯戰軍事講習所)에 유학시켰고 백설서(白雪瑞)를 북경학생단(北京學生團)에, 주문원(朱文源)·윤장원(尹章元)을 개봉병공국(開封兵工局)에 파견 학습케 하였다.
② 1923년 1월에는 공국선(孔國宣)을 북경학생단에, 정진국(鄭鎭國)을 한전군사강습소에 유학시켰고
③ 그해 5월 6일 제9회 이사회에서는 여운형을 하남성 낙양(洛陽)에 있는 오패부(吳佩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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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① ≪무장독립운동비사≫ p.189.
②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1권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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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을 방문하여 군대의 장교와 공병(工兵) 양성을 협의하도록 결의하였다.
④ 1924년 6월에는 최천우(崔天祐)·채군선(蔡君仙)·박희곤(朴熙坤)을 낙양학생단에 유학시켰다.
⑤ 1924년까지 13명의 유학생을 파견하여 공국선·백설서 등은 이미 교육을 마치고 상해로 돌아왔으며 군자금도 중국 원화(元貨)로 3백 69원에 이르렀다.
⑥ 1927년에는 군관학교 지원자 모집과 한국노병회 선전을 위하여 남만주 각지에 파견원을 보냈다.
이와 같이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는데 당초에 계획한대로는 되지 않았다. 우선 군자금의 조성이 여의치 않았고, 군대 양성에도 순탄할 수 없었다. 1923년 이후 상해 정계는 혼란을 거듭했고, 특히 1927년부터 유일당(唯一黨) 결성 문제에 영향을 받아 1928년에는 김구·윤기섭(尹琦燮) 등의 중심 인물이 탈퇴하니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17)원래 한국노병회는 10년 기한부 단체였으니 1932년 10월이면 자동적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13일에 열린 제10회 정기 총회는 10년 만기의 청찬 총회로서 그해 10월 28일 해산 총회를 갖기로 하고 해산하기 위한 모든 절차를 마쳤던 것이다.18)
제6절 교육과 공보
1. 교육
임시정부 시정 방침 내정(內政) 제 4항에서 교육에 대한 방침을 밝혀 놓고 있는데 독립 운동의 통할과 재정이 계획대로 철저히 안 되었기 때문에 교육에 힘을 쏟을 만큼 충분한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시정 방침에 명시된 것을 보면 ① 교과서 편찬 ② 의무 교육 실시 ③ 관리 양성 ④ 유학생 외국 파견 ⑤ 서적 간행 등 다섯 항목인데 그 중에서 계속적인 노력을 한 것은 의무 교육의 실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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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앞의 ≪무장독립운동비사≫ p.191 (김구는 1929년에 제명됨. ≪조선민족운동연감≫ 1929년 11월 19일 기사).
18) ≪조선민족운동연감≫ 1932년 4월 5일과 4월 13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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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교육이라고 해도 오늘날의 것과 비교한다면 미치지 못한 점이 많겠으나 아동 교육을 위하여 꾸준히 인성(仁成)학교를 운영해 온 것은 임시정부의 업적으로 봐야 한다. 인성학교가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에서 운영한 것이지 임시정부에서 운영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으나 거류민단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본장 제3절 제1항] 임시정부의 지방 행정 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 거류민단에서 운영한 인성학교라 할지라도 임시정부가 운영한 것으로 귀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실제로 인성학교 운영을 담당한 사람이 모두 임시정부에 관여하던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임시정부의 교육 활동 안에 인성 학교 운영을 포함시켜 잘 못된 것 같지 않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 때 동포 사회의 학교라던 인성 학교 뿐만 아니라 곳곳에 많이 있었다. 특히 만주 지방 동포 사회에는 어디보다 많이 있어서 민족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임시정부가 직접 관여한 학교를 이야기하는 것이니 인성 학교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인성학교는 임시정부 수립 이전부터 상해에 있었다. 원래 상해 한국인 교회에서 운영하던 것인데 1919년 3월 16일 거류민단의 전신인 교민친목회(僑民親睦會)가 조직되어 [제3절 거류민단 관계 참조] 그 친목회에서 인수한 것이고, 그 해 9월 22일 교민친목회가 대한인 거류민단으로 개편될 때 역시 인성학교는 거류민단이 맡아 운영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거류민단에서는 행정 부서로서 교육과를 두어 관할하기도 했고 혹은 학무위원회를 두어 보살피기도 했다.1)
그러면 인성학교 상황에 대하여 ≪독립≫ 혹은 ≪독립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1919년 9월 13일 3면 ‘인성학교 현황’
‘추기(秋期) 수업을 시작한 아(我) 인성학교의 현상에 취(就)하여 보건대 학생 수는 전기 보다 증가되어 남학생 10명, 여학생 9명 합(合) 19명인데 연급별(年級別)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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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① ≪독립신문≫ 1920년 4월 8일 2면.
② ≪조선민족운동연감≫ 1923년 8월 25일·11월 24일·12월 4일·26일·77일·1924년 1월 12일·31일·3월 3일·6월 7일·9월 23일·12월 18일·1929년 8월 8일 기사 참조.
‘상해인성학교는……경비 궁핍으로 근근히 지내 오던 중 금번 친목회를 대한인민단으로 변개하는 동시에 학교도 독립하여 손정도(孫貞道) 씨가 교장이 되어 열심 노력하시는 중 일전에 보창로(寶昌路) 강녕리(康寧里) 2호로 이전하였는데 교장 이하 교사 제씨(諸氏)의 활동으로 크게 확장되리라 한다.……’
○ 1920년 3월 25일 3면 ‘인성학교 상황’
‘작년에 제1회 필업식을 거행한 상해한인인성학교는 거류민단의 사업으로 현 의정원 의장 손정도 씨를 교장으로 하여 발전을 계획 중인데 거월(去月)에는 소년극을 북경로 18호에 개최하여 호(好) 성적을 득하고, 기구 기타의 설비는 착착 진행중으로 전도가 괄목할만하다. 금년 신학기에는 아령(俄領) 급(及) 중령(中領)으로부터 고 안 중근 씨의 자질(子姪)과 권진오(權振五) 씨의 자제, 또 학무총장 김규식(金奎植) 씨의 자제가 동교에 입하여 면학 중이라. 해교(該校)의 현황을 듣건대 현재 학급은 4이요, 유치급(幼稚級)을 특설하였고 학생수는 30이라. 학과는 국어·국사·본국 지리·한문·산술·이과·수공(手工) 외에 3·4년급에는 영어를 가(加)하다. 직원으로는 손교장 이하에 학감 김태연(金泰淵), 남(男) 교원 윤종식(尹宗植), 여교원 정애경(鄭愛敬)·김연실(金蓮實) 제씨인데 대학 혹은 중학 출신이요……’
○ 1920년 6월 1일 ‘학생작품전람회’
‘거(去) 29일 오후 8시부터……참석인은 남자 50명 여자 20. 남녀 학생 40명이더라. 교장 손정도씨 사회로……’
○ 1922년 9월 20일 3면 ‘인성학교 개학기’
‘인성소학교는 본래 교민단(거류민단)에서 직접 관리하여 오던 것을 중간에 유지회(維持會)란 기관을 두어 학교를 민단으로 분리하여 유지회로서 관리하다가 스스로 해산하고 그 사무를 다시 민단으로 인계하였는데 교장 안창호 씨는 사면하고 김종상(金鍾商) 씨로 대선하였다가 김 씨가 또 사면하고 전 유지회장(維持會長) 김인전(金仁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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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가 교장으로 선거되어 추기 개학을 본월 22일로 정하였다는 김교장의 통지서가 기히 발표된 고로 학교 계속 문제로 오래 불안 중에 있던 재학 학도들과 그 부형들은 환희 불감한다더라.’
○ 1923년 7월 21일 3면 ‘인성학교 졸업식’
‘……금년 제4회의 졸업식과 진급식을 지난 9일 하오 2시 삼일당(三一堂)에서 거행하였는데 교장 도인권(都寅權) 씨의 사회로……졸업생의 성명은 다음과 같더라. 현보□(玄保□)[13]·정흥순(鄭興淳)[13]·김영애(金永愛)[13]·옥인섭(玉仁燮)[12]’
위의 기사 외에도 수학여행·학예회·연극 등의 기사가 보이는데 생략한다.
이상과 같은 ≪독립≫ 혹은 ≪독립신문≫의 기사를 통하여 1919년 이후 3,40명의 아동을 모아 국민학교 교육 과정을 부과하여 1923년에는 제4회 졸업생을 배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인성 학교는 거류민단[교민단]에서 맡고 있다가 유지회를 만들어 경영하기도 하면서 재정 관계로 상당한 난관을 겪었음을 위의 기사로서 짐작할 수 있으나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던 동안 꾸준히 끌고 나왔던 것이다.
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 제2과에서 발간한 ≪조선민족운동연감≫을 통해 보면 1923년 8월 25일부터 인성학교 교장을 당시 상해 거류민단장 이유필(李裕弼)이 겸임하여 인성학교를 강화하기 위하여 11월 24일에는 교민단 의사회(議事會)에서 인성학교 규칙을 제정하고 12월에는 거류민단 학무위원회 조례를 제정하는 동시에 상해 거류민에게 경비를 모금하기도 했다.
1924년에 들어서자 국내의 동아일보사에서 1천 1백 44원(元)을 보내 와서2)인성학교 운영의 전망이 밝아져 학무위원회를 강화하여 의무 교육 실시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해 3월 3일부터는 인성학교 교장을 민단장과 분리하여 조상섭(趙尙燮)을 임명하였다. 교사도 전임을 3명, 시간 강사 2명을 채용한 것으로 보아서 아동 수도 상당히 많았던 것 같고, 이 때가 인성학교의 재정면에서는 가장 활기 있던 시기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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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민족운동연감≫ 1924년 1월 12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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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해 12월 18일부터 다시 민단장이 교장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계속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1925년 이후에는 임시정부 자체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난을 겪고 있었으니 인성학교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교육에 대하여 인성학교 문제를 제외하고 유학생의 알선 문제 등이 다소 있었으나 계획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또 군사 관계 교육이 있었으나 이것은 앞에 제5절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 외 교과서 편찬과 서적 간행은 재정상의 이유로 뜻과 같지 않았다.
2. 공보 활동
임시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공보(公報)를 발행하여 의정원의 결의 및 국무위원의 활동 상황을 알렸으며 상해에 있는 동안에도 수 많은 인쇄물을 발간하였다.3)
그런데 임시정부 공보 활동의 주축이라면 ≪독립신문≫일 것이다. 그리고 간행물의 대표적인 것은 ≪한일관계사료집≫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이 항목은 ≪독립신문≫과 ≪한일관계사료집≫에 대한 설명으로 대신하겠는데, 하나 기억할 것은 임시정부의 외교 기관이던 구미위원부에서는 ≪한국평론(Korea Review)≫을 월간으로 간행하고 있었으며, 파리위원부에서는 ≪자유한국(La Coree Libre)≫을 역시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것이나 ≪독립신문≫과 함께 임시정부 공보 활동으로서 큰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유한국≫은 1921년에 끝났지만, 파리위원부에서는 1920년 12월에 ≪구주(歐洲)의 우리 사업≫이란 책자를 간행하여 유럽에 대한 외교를 정리하기도 했다.
구미위원부에서는 ≪한국평론≫ 외에≪필라델피아 대회 의사록≫[82면]을 간행하는 등 많은 간행물을 발간했던 일은 이미 제4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데 구미위원부나 파리위원부에는 각기 통신국이 있어서 공보 활동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구미위원부와 파리위원부의 공보 활동이상해의 ≪독립신문≫과 다른 것은 주요 목적이 외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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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민족운동연감≫의 끝 ‘압수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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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하여 선전 외교로서 효과를 거두자는 점이다. 때문에 구미위원부 통신국의 간행물은 영문으로 되어 있고, 파리위원부 통신국의 것은 프랑스 어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1) 독립신문
우리 나라 근대 민족 운동 과정에서 독립신문은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한말 독립협회 사업으로 발간한 ≪독립신문≫이요, 하나는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윤익선(尹益善)·이종린(李鍾麟)·장종건(張琮健) 등이 비밀 신문으로 발행한 것이요, 다음이 여기에서 살펴보게 될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간행한≪독립신문≫이요, 또 하나는 임시정부가 중경(重慶)에 있던 때 김승학(金承學)이 주간(主幹)으로 발행한 주간지인 것이다.4)
상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은 임시정부의 기관지로서 처음에 독립(獨立)이란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기관지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한글 활자 관계로 지연되어 1919년 8월 21일에 그 첫 호를 세상에 내 놓게 됐던 것이다.
사장 겸 편집부장에는 이광수(李光洙)였고, 기자로는 조동호(趙東祜)5)·차이석(車利錫)이었으며, 경리는 이영렬(李英烈)이 맡았다.
처음 독립이란 이름으로 발간하던 것을 ≪독립신문≫이라고 고친 것은 1919년 10월 25일 제22호부터인데 그것은 일본이 프랑스 영사 당국에 계속 항의하였기 때문이었다.
≪독립신문≫은 1920년 초부터 경영난에 봉착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사의 경영난은 1920년 4월 10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사고(社告)를 통해 봐도 알 수 있다.
‘……신문 대금 4만 원은 원래 한푼도 수입되지 못하고, 또 적립한 자본이 없으매…이제는 애국 동포 제위에게 읍원(泣願)할 길 밖에 없사오니, 동포여, 다소를 불구하고 독립신문을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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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준(崔濬) ‘독립신문의 사명’(≪독립신문≫ 중앙 문화 출판사 간행 영인본 서문).
5) 조동호(趙東祜)는 많은 기록에 조동우(祐)로 나오는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Ⅲ p.49에서 호(祜)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지훈(趙芝薰)이 보관하던≪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를 고려대학교에서 영인할 때 조지훈(본명 趙東卓)은 조 동우라고 원문에 수록된 것을 조동호로 고쳤다. (경북 경찰국, ≪고등경찰요사≫ [고려대학교 간행 영인본] pp.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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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고가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영업부장 이영렬, 출판부장 주요한(朱耀翰)의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운영 진용도 처음보다 보강한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의 운영난에 대해서는 안창호의 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6)이러한 어려움은 1920년 5월에 이르러 해결되었다. 즉 안창호·김승학·이영렬·신우현·장기초 등이 자금을 내어 독립신문사를 합자 회사로 발전시켜 곤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독립신문≫은 독립 운동에 큰 몫을 맡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프랑스영사관에 모든 외교 수단을 동원하여 ≪독립신문≫을 폐간토록 교섭을 끈질기게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0년 6월 24일 제86호를 발간하고 정간처분을 받았다.7)
그 후 임시정부에서 프랑스영사관에 꾸준히 교섭을 했으나 당시 프랑스 당국에서는 ‘≪독립신문≫을 봉쇄한 것은 내심으로 미안하나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봉쇄하였고, 또 이 신문은 독립에 관한 것만은 아니요 사회주의를 선전하니 더욱 허락할 수 없고’8)라는 태도를 가지고 쉽게 복간(復刊)을 허락하지 않았다.
≪독립신문≫이 사회주의를 선전했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말이다. 그것은 ≪독립신문≫의 논조와 기사를 검토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시 ≪독립신문≫이 그러한 경향을 용납하고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회주의도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독립 운동자에게 적극적인 거부를 받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임시정부의 조직이 사실상 민속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립 형태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인사회당의 당수 이동휘(李東輝)가 국무총리를 맡고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박진순(朴鎭淳)·박애(朴愛) 등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제4절 참조]
세째는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등이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것도 이미 제4절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이광수를 비롯한 당시 지도자가 세계적 사상 조류와 사회주의를 바로 이해할 수 없었든지, 아니면 사상적 태도가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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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안창호 일기 1920년 1월 14일 기사(주요한 ≪안도산 전서≫ p.622).
7) 안창호 일기 1920년 6월 24일 기사.
8) 앞의 것 1920년 7월 19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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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의 논조가 일관성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경향은 국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독립신문≫의 내용 때문에 프랑스영사관에서 복간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드디어 성공해서 12월 18일부터 제87호로서 복간하게 되었다.
그런데 1921년 6월 1일부터 8월 14일까지 또 정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광수·이영렬이 변절하여 일본 관헌과 타협, 국내로 돌아갔으므로 운영 담당자 체제에 혼란이 왔고 그 위에 재정 난관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독립신문≫에서는 ‘사고로 인하여 간행이 지연’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9)
이러한 때에 김승학(金承學)이 자금을 내어 ≪독립신문≫을 이어 가니 이 때 운영진용도 다시 편성하였다.
사장에 김승학, 주필 박은식(朴殷植), 편집국장 차이석, 기자 김문세(金文世)·박운갑(朴雲甲) 외 3명, 발송부장 백기준(白基俊), 인쇄부장 고준택(高俊澤) 외에 부원으로 중국인 2명이 있었다.
1922년 5월에는 김승학·백왕운·장기초 등이 자금을 증가하여 한문판도 내어, 중국인 장흑지(張黑池)로 하여금 중국 주요 기관에 무료로 배부한 한 때도 있었으니 선전 외교의 몫도 담당한 셈이다.
≪독립신문≫은 원래 ≪독립(獨立)≫이란 이름으로 나왔다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독립신문(獨立新聞)≫으로 고쳤는데 1924년 [대한민국 6년] 1월 1일부터 한글로≪독립신문≫이라 고쳐 발간하였다. 그러다가 김승학 사장이 남만주(南滿洲)의 참의부로 옮겨 감에 최천호(崔天浩)가 임시로 맡았으나 얼마 못가서 1928년 문을 닫았다.10)
그 동안 임시정부가 재정난에 봉착하여 있었기 때문에 ≪독립신문≫도 자금 관계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다음에 나타난 것과 같이 발간을 못한 달(月)도 있고, 또 때로는 한 달에 한 번 발행한 일도 있었던 사실이 말해 주고 있다. 다음에 표시한 통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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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독립신문≫ 1921년 8월 15일 1면 ‘사고(社告)’.
10) ① 애국동지원호회 ≪한국독립운동사≫ p.359.
②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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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9월까지의 것인데 그 후의 것은 조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5년 후의 임시정부는 대단히 미약한 활동을 보이던 때였고 따라서 ≪독립신문≫도 그러한 시기였으니 1925년까지의 통계로서 ≪독립신문≫ 발행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독립신문≫ 발행 통계11)
월년
발행 호(號)
회수
비고
1919
8
1-3
3
8월 21일 창간호로서 ≪독립≫을 발행함.
9
4-15
12
10
16-23
8
10월 25일부터 ≪독립신문≫으로 고침.
11
24-30
7
12
31-33
3
1919년 33회 발간.
1920
1
34-41
8
2
42-48
7
3
49-59
11
4
60-71
12
5
72-80
9
6
81-86
6
6월 25일부터 정간.
12
87-88
2
12월 18일부터 복간 1920년 총계 55회.
1921
1
89-92
4
2
93-95
3
3
96-100
5
4
101-104
4
5
105-109
5
6월 1일부터 정간.
8
110-
1
8월 15일 복간.
10
111-113
3
9월 휴간.
11
114-116
3
12
117-118
2
1921년 총계 30회.
1922
1
119-
1
2
120-
1
_______________________
11) 이 통계는 중앙문화출판사의 영인본에 의한 것임.
- 414 -
3
121-122
2
4
123-
1
5
124-127
4
6
128-130
3
7
134-134
4
8
135-138
4
9
139-141
3
10
142-144
3
11
145-147
3
12
148-149
2
1922년 총계 31회.
1923
1
150-154
5
2
155-
1
3
156-158
3
4
159-
1
5
160-
1
6
161-
1
7
162-
1
9
163-164
2
8월 휴간.
10
165-
1
11
166-
1
12
167-168
2
1923년 총계 19회.
1924
1
169-170
2
2
171-
1
3
172-173
2
4
174-
1
5
175-
1
6월 휴간.
7
176-
177호부터 182호까지 보관된 것을 찾지 못함.
※1925년 2월까지
7
-182
1924년 총계 8~14회.
1925
3
183-184
2
5~9
185-189
5
4월 휴간. 190호부터 보관한 것 찾지 못함.
- 415 -
(2) 임시사료편찬회
임시사료편찬회는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역사 전적(典籍)으로 구비하자는 의도와 한국의 독립운동을 바르게 국제적으로 이해시킨다는 선전 외교의 의도에서 만들어진 기관인데 당시에는 뒤의 의도가 보다 강하게 작용한 것 같다.
사료 편찬 사업의 계획은 1919년 5월 12일 제4회 의정원에서 국무원 위원 조완구(趙琬九)가 시정 방침을 밝힌 가운데 외교 항목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7월 8일 제5회 의정원에서 안창호가 밝힌 시정 방침에서도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방침에 의해서 임시사료편찬회를 두게 되어 다음과 같이 부서 조직을 했다.12)
이 편찬회는 1919년 7월 2일 조직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을 시작하여 그 해 9월 23일에 끝남과 동시에 편찬회도 해체하였다.13)
임시사료편찬회의 사업은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여 출판하는 일인데 이
_______________
12) 애국동지원호회 ≪한국독립운동사≫ p.p.344∼345.
13) ① ≪조선민족운동연감≫ 1919년 9월 8일과 9월 23일 기사.
② ≪독립≫ 1919년 9월 30일 3면 (≪독립≫ 15호인데 3면에는 일자 표시가 30일이 아니고 29일로 나타나 있음).
- 416 -
사업에 따라 흩어진 사료를 모아 정리하게 됐다는 것은 임시정부의 공보 혹은 문화행정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을 일이다. 그리고 박은식이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지혈서(韓國獨立運動之血史)≫도 임시사료편찬회가 주선한 책이었다.
≪한일관계사료집≫은 오랫동안 찾지 못하였는데 최근 미국 컬럼비아대학 극동도서관에서 발견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14)
이 책은 네 권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1백질을 출판하였다. 3월 1일에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의 광전절후(曠前絶後)한 포악과 학살이 행하나 세계는 2천만을 망각하고 한족에게 관한 보도와 평이 의곡되어 이를 시정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이광수가 서언(序言)[대한민국 원년 8월 20일]에서 밝히고 있듯이 ‘본서는 4대부로 성(成)하니 제1부는 고대부터 병자수호조약(1876)에 이르는 한일 관계를, 2부는 병자수호조약 이후부터 합병(合倂)까지, 3부는 합병부터 금년(1919) 2월까지의 일본의 대한(對韓) 관계, 4부는 3·1운동 이후’를 서술하고 있다.
이상으로 공보 활동에 대한 기술을 끝맺겠는데 한 가지 첨가하여 말해둘 것은 임시정부의 문헌을 8·15 해방 후 13 상자로 묶어 가져 왔는데 6·23사변 때 분실했다는 사실이다.15)
제7절 재정(財政)
이상에서 임시정부 초기[1919∼1931]의 활동 상황으로 내정·외교·군사·교육·공보 활동에 대하여 살펴봤는데 그러한 것이 잘 됐든 못 됐든 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데는 재정적 뒷받침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초기 활동의 마지막으로 재정 활동을 검토하기로 한다.
1. 재정 방침의 성립
초창기 임시정부의 당면한 과제는 임시정부의 조직 및 구성 문제와 외교 활동 문제
_______________
14) 국사편찬위원회 윤병석(尹炳奭) 씨에 의하여 발견됨(≪조선일보≫1972년 2월 29일).
15) 애국동지원호회≪한국독립운동사≫ p.p.381∼386.
- 417 -
그리고 재원 확보를 위한 재정 문제였다. 때문에 초창기 임시의정원에서는 주로 이상의 세 문제가 가장 많이 논의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시정 방침을 발표한 것은 1919년 5월 12일과 7월 8일의 것이 있으나 이것은 극히 간략한 것이고, 체제를 갖추어 발표한 것은 1920년 3월 국무총리 이동휘가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정 방침도 그것이 발표되기 전, 의정원에서 논의한 내용을 옮겨 놓거나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였다. 의정원에서 재정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1919년 5월 2일 제4회 회의가 열리고 있던 때의 일이다.1)
임시의정원 의장의 요구에 의하여 각도 대표 의원 오의선(吳義善)·홍진(洪鎭)·김동형(金東瀅)·박용각(朴容珏)·장도정(張道政)·이원익(李元益)·손두환(孫斗煥)·조정(曺檉)이 각기 의견을 발표했는데 그것을 종합 정리해 보면, 내외공체(內外公債)의 발부·의연금 수합·세금의 징수 등을 재원으로 하고 재정통일기관을 설치하여 각지에 특파원을 파송해서 거두어들이는데, 불복하는 경우는 강제 수단을 강구하도록 조처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시 장도정을 비롯한 9인 위원회가 종합 정리하여 재원 방안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의연금·인두세·내외 공채였고 의정원에서는 이것을 토의 가결하였다.
임시정부의 재정 방침은 이것을 주축으로 하여 성립되었는데 그 해 5월 12일 조완구가 발표한 시정 방침 중 재정에 관한 것과 7월 8일 안창호가 발표한 것 모두 의정원에서 결의한 것보다 발전했거나 변질한 것이 없고, 1920년 이동휘 국무총리가 발표한 내용도 의정원에서 결의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었다.
이동휘가 발표한 내용은 전반적으로 장기성을 띤 것이었기 때문에 인구세·애국금·공채 외에 임시소득세[십일세(十一稅)]의 징수·외국 차관·실업 및 금융 기관의 설립 등 몇 가지 문제가 첨가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경유하여 1차적으로 1920년 3월에 재정 방침이 착립되었고 그것은 시일이 지나면서 다소 변경되기도 했는데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재원
_______________
1) ≪임시의정원 기사록(紀事錄)≫ 제4회집 ‘각도 선출 의원의 재원 방침에 대한 의견’.
- 418 -
① 의연금(義捐金) 및 애국금(愛國金)
② 인구세(人口稅)
③ 소득세(所得稅)
④ 국채(國債)
⑤ 내외공채(內外公債)
⑥ 외국차관(外國借款)
⑦ 실업(實業)을 통한 수입
(2) 재원 확보의 방법
① 자금 수합원(收合員)의 활동
② 재정 관계 법규 정비와 징수 규정 공포
③ 1920년 3월 1일부터 의연금 및 애국금 수합원제를 폐지하고 지방자치단체(연통부·거류민단 등)에 위임함.
④ 1920년 4월 6일부터 국내에는 연통부에, 국외에는 주외 재무관을 임명 담당케 함.
⑤ 미주(美洲)에서는 처음에 대한인국민회가, 후에는 구미위원부가 담당함.
(3) 예산과 결산
① 1920년 3월 2일 이동휘 국무총리는 예산에 대하여 행정부에 일임해 달라고 시정 연설에서 강조한 후 분명한 결정이 없었다.
② 1919년 7월 14일 의정원 제 5회 회의에서 첫 결산 보고가 있었으나 대략적인 것만 밝히고 있음.2)
③ 예산 결산은 독립운동의 비밀이 외부에 누설된다는 이유에서 의정원 외의 외부에 공개하지 않다가 1928년부터 공개했음.3)
_______________
2) ≪임시의정원기사록≫ 제5회집 ‘예산·결산위원회의 보고’.
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Ⅲ p.436.
- 419 -
2. 의연금 및 애국금
의연금(義捐金)에 대한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처음 나온 것은 1919년 5월 2일 제 4회 의정원 회의에서 각도 대표 의원이 재원 확보 방안을 발언할 때였다. 그리고 애국금(愛國金)에 대한 말은 국내의 3·1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1919년 3월 15일 미주의 대한국민회가 주관한 대한인 전체 대표회 때 그 결의안 제4항에서 처음 발견된다.4)
그런데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연금 모집이 인구세 및 내외 공채의 모집과 더불어 가결되었는데, 인구세와 내외 공채는 법적 절차를 밟은 후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5월 6일과 9일 회의에서 5월 2일의 결의에 의한 각도 대표 의원에게 구급 의연금 모집 위원을 선정하니 다음과 같다.5)
경기도 여운형(呂運亨)·박희선(朴熙善)·민제호(閔濟鎬)
충청도 신정(申檉)·오익표(吳翼杓)
경상도 윤현진(尹顯振)·김홍권(金弘權)·조동진(趙東珍)
강원도 신우(申祐)·최정집(崔廷楫)·박찬영(朴賛英)
평안도 김승만(金承晩)·김재희(金載熙)·윤원삼(尹愿三)
그런데 의연금의 모집 방법은 역시 제4회 회의록 ≪기사록(紀事錄)≫을 보니 각 의원이 먼저 내고 다음에 국내에 모집 위원을 파견하고, 그리고 상해에 오는 동포에게 받자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결정된 의연금은 임시정부의 초창기 자금 학보의 재원으로서 국내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모금하기도 하고 상해에서 각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연금이란 명칭은 점점 애국금이란 이름으로 바뀌어졌는데 그것은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에서 의연금을 모금하여
_______________
4) 김원용 ≪재미한인50년사≫ p.363.
5) ① ≪임시의정원기사록≫ 제4회집 ‘구급의연금 모집 방법에 관한 결의와 그 위원 선거’
② ≪조선민족운동연감≫ 1919년 5월 6일(연감에는 다소 틀린 곳이 있다. 중령(中領)의 조정과 황해도의 손두환은 당시 의원으로서 해당자가 없다고 보고한 사람이며 충청도의 이명교는 홍진의원이 추천했으나 부결된 사람인데 그 세 사람을 수록하고 있다).
- 420 -
보낼 때, 3월 15일 대표자 대회에서 결의한대로 애국금이란 명칭으로 송금해 왔고, 5월 25일 그 국민회 회장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하면서 애국금 명칭을 많이 사용하게 됐으며, 또 의연금 중에는 미주 동포가 보내오는 애국금이 가장 많았으니 자연 애국금이란 이름이 의연금의 명칭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3월 국무총리 이동휘가 밝힌 시정 방침에서 애국금이란 이름으로 확정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니까 실질상의 성격은 애국금이나 의연금이나 같은 것이다.
애국금은 미주동포가 많이 보냈고 다음은 국내 동포가 보낸 것이 많은데 이것을 모집 위원 혹은 수합원(收合員)이 모금하여 상해의 임시정부 금고까지 가져오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때문에 임시정부에서는 1920년 2월 24일 재무부 포고와 재무부 훈령 제1호를 발표하여 그 해 3월 1일부터 애국금을 납부함에는 당해 관청에 직접으로나 혹은 단체나 친신인(親信人)을 경하여 납부할 것을 일반 동포에게 포고하였다.6)그 후 국내에서는 연통부 조직을 통해서 애국금 수합 업무가 수행되고 있었다.
한편, 미주에서는 애국금을 대한인국민회에서 담당하여 수합하고 송금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내외 공채를 발행하면서부터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와 대립하여 약간의 문제를 일으켰다.
1919년 7월 제5회 의정원 회의 때 ‘대한민국 독립 공채 발행 조례’를 통과시키는 한편, 미주에서 공채를 발행하는 것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승만의 요구에 의하여 그에게 위임하였는데7)이승만은 그 해 9월 4일 공채표를 발행하고 5만 달러의 몫을 미주 동포에게 배당하면서 대한인국민회가 맡고 있던 애국금 제도의 폐지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국민회와 구미위원부의 대립이 심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에서 명확한 통고가 없으니 대한인국민회에서는 그대로 애국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고8)미주부인회에서도 애국금을 모아 보냈는데9)이와 같은 미주 동포의 애국금은 임시정부
_______________
6)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8면 (중앙문화출판사 영인본 p.196).
7) 앞의 기사록 제5회집 ‘외국공채발행권을 국무총리 이승만에게 위임하자는 임시정부 제안에 대한 가결’.
8) 앞의 ≪재미한인50년사≫ p.p.378∼386.
- 421 -
끝까지 재원의 큰 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끝으로 임시정부의 재원 확보 계획은 다양하게 꾸며졌으나 1927년 국민대표회 소동이 있은 뒤부터는 거의 미주 동포가 보내 주던 애국금 혹은 인구세에만 의지하고 있어서 재정 규모가 극히 작아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본절 제5항 ‘예산과 결산’ 참조]
3. 인구세 및 소득세
인구세는 1919년 6월 15일 공포한 임시정부령 제3호 임시 징세령과 재무부령 제1호 인구세 시행 세칙에 의하여 징수하는 세금인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정원 제4회 회의 때 논의한 문제였다.
그리고 소득세는 이동휘 국무총리가 밝힌 시정 방침에는 나타나 있으나 법적 조처가 강구되었다는 문헌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 납부한 사례는 있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에게 보내 온 편지이다.10)
‘본시 평안북도 구성(龜城) 인으로 아령(俄領) 해삼항(海蔘港) 거류 5개년이온 바,……정부 설립된 달부터 오식솔(五食率) 3인이온바, 매인두(每人頭)에 금화 1원씩 작년 4월부터 금년 4월까지 36원과 작년도 사업 결과, 순이익금 중 1십분지1(十分之一)인 금화 1백 원을 미국 홍콩은행으로 납부……정부가 한성에 들어가도록, 국가가 영광스러운 세계 제1위를 점령하도록 매년 납부하기로 맹약하옵고……’
위의 편지는 블라디보스톡에 살던 장재한(張載翰)·장신일(張信一) 부자의 글이다. 여기에서 당시 소득세가 납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인구세에 대하여는 위의 편지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이것은 임시정부 재원의 기본을 이루는 성질의 것이니까 그 법규를 먼저 검토하기로 한다.11)
_______________
9) ≪조선독립운동연감≫ 1920년 2월 24일.
10) ≪독립신문≫ 1920년 4월 10일 2면.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2 임정편 Ⅰ p.67.
- 422 -
[임시징세령] [1919년 6월 15일 임시정부령 제3호]
제1조 본령에 규정된 세의 명칭은 인구세라 함.
제2조 본령은 대한국민인 만 20세 이상의 남녀에 적용함.
제3조 본 세율은 1년 1인에 금화 1원으로 함.
제4조 본세는 연 2기로 분정(分定) 징수키로 함.
제5조 본세 징수에 관한 세칙은 재무부에서 정함.
제6조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함.
[인구세 시행 세칙] [1919년 9월 15일 재부부령 제1호]
제1조 본세는 연 2기로 분(分)하여 징수함.
제2조 본세 납입기는 6월 말일과 11월 말일로 정함.
제3조 본세 징수 관서는 납입기에 앞서 30일 내에 납입.
제4조 자치 단체가 설정된 지방에서는 자치 단체가 징세 사무를 집행할 수 있음.
제5조 민국 원년도 징수는 2기를 합하여 본년 8월 말일 이내에 납입기를 정함.
제6조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함.
위의 시행 세칙에 따라 1920년 4월 6일에는 ‘인구세 징수 사무 취급 규정’을 만들어 국내에는 각도 독판부에, 해외에는 거류민단 같은 자치 단체에 인구세 징수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각 단체에서 인구세를 징수할 때 단체의 장이 취급하지 않고, 각도 독판부의 경우는 재무사장(財務司長)이 취급토록 규정하였고[취급 규정 제3조] 해외의 경우는 1920년 4월 7일자 ‘임시주외재무관서제’를 재무부령 제 1호로 공포하여 재무관이 담당토록 하였다. 즉 처음에는 특파원을 통해서 인구세를 징수하던 것을 1920년 4월 6일부터 자치 단체에 위임하였는데 국내에서는 독판부 재무사장이 취급하고 해외에서는 임시정부에서 임명한 재무관이 담당하여 징수하고 또 송금케 하였다.
이렇게 했다면 남만주의 북간도처럼 국내와 같이 연통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은 어떻게 처리했던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독립 운동 통할을 위하여 1920년 10월에 남만주에 총판부를 설치하였지만[제2절 참조] 재무 관계는 주외 재무관서제에 의하여 재무관을
- 423 -
임명하여 담당케 했던 것이다.12)
이상과 같이 인구세 징수를 위하여 임시정부에서 몇 번의 제도 변경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일본관헌의 악착같은 감시 속에서 독립 운동을 위한 재원 확보를 도모하자니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에 ≪독립신문≫에 게재된 1923년 11월 5일 재무총장 이시영의 포고문을 옮겨서 인구세 징수 실태를 중심한 재정 상황을 파악코자 한다.13)
‘원년 이래로 정부 재정 수지 상황을 일반 동포에게 포달치 못함은 주위의 사정이 아직 허락치 않음이라. 수지의 숫자와 개인별의 표기는 타일(他日) 기회를 대(待)하여 명시하려니와 대략 수지된 지방을 개별하면 안으로 서로(西路) 일대와[평안도·황해도 지방] 밖으로 미주 미령(美領)의 동포가 혈한을 갈수(渴輸)하여 내외 정비(政費)를 부담하였고, 2년도에 지(至)하여는 국경의 교통이 두절되고 재미 동포의 경제가 실패될 뿐 아니라 순사망공(循私忘公)의 시비로 금전의 공헌이 단절되고 유독 미령 일우(一隅)의 응원이 있었으나 [이승만의 독단으로 미주에서 갹출되는 돈을 구미위원부에서 거의 썼으나, 이것 때문에 동포 사회에 혼란이 일어났던 것을 설명한다] 또한 종종 장애로 단절이 무상하였고, 3년도에 지하여는 내외 형세를 우형(旴衡)하여 인방에 1천만의 차관이 예정되었으나 내부의 불충이 원인되어 다만 2백만 원을 차득(借得)하고도 운수(運輸)의 불편으로 40만 원을 시험적 대래(帶來)한 것이 그 시 정추(政樞)를 총리한 자로서 동인인 국무원을 기만하고 사인(私人)과 공모하여 차금으로 정국 전복을 획하며 본말(本末)에 암(暗)하며 이욕(利慾)에 훈(薰)한 국무원(員)과 기타 중요 직원을 유매(誘買)하여 혹 퇴직케도 하며 또 그 퇴직을 권하여 정부 자체가 절이(折弛)되기를 모(謀)함이 안으로 각파의 분쟁을 계(啓)하고, 밖으로 국제의 신용을 추(墜)케 하여 [소련의 자금 문제와 이동휘·한형권·김입 등의 장난을 공격한 것임 (제4절 중 ‘소련에 대한 외교’를 참조)]정부의 재정 진로는 더욱 경색(梗塞)되었다. 그 후 한형권(韓馨權)은 교통의 불편함을 이용하여 다시 인방[소련]을
_______________
12) ≪조선민족운동연감≫ 대한민국 2년 기타의 4(其他之四).
13) ①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3면.
② 포고문 중에서 괄호 안에 쓴 것은 필자의 주석임.
- 424 -
기(欺)하고 20만 원을 비밀 지래(持來)한지라 만일 차시에 모모 인사[안창호·여운형 등]가 광명정대한 제책(諸策)으로 정경대원(正徑大原)을 좇게 하였으면 아무리 명완(瞑頑)한 자라도 거악취선(去惡就善)의 망(望)이 혹 있었을 지어늘 도리어 차를 기화(奇貨) 삼아……소위 대표회[국민대표회]라는 비용에 쇄융케 하여……정부는 전후 금액에 한푼 입관(入款)이 없은지라.……동포여, 금일 정부사업의 식미(式微)된 원인을 아는가.……정부는 정부의 정부가 아니요 국민의 정부라 흥체진퇴의 책무가 뉘게 있나뇨. 각각 양심에 조(照)하여 성력을 주합(湊合)하여 납세 사상을 장려하며 급공용의(急公勇義)의 미범(美範)을 선작하여 경낭도상(傾囊倒箱)의 필요를 각오하므로 정부의 근기를 확고케 하여 행복의 영락이 함취 함을 힘쓸지어다.’
이상의 글에서 1923년 말까지의 재정 사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그 후 특히 1927년부터 1920년까지의 상황은 다음과 같은 당시의 예산서와 결산서가 있다.
4. 국채·독립공채·외국차관
앞에 말한 의연금 흑은 애국금, 그리고 인구세와 소득세가 임시정부 재원의 기본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상해에 있는데 징수 대상지는 국내·만주·미주·시베리아 등지이니 임시정부와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곳에 따라 징수 사무 집행이 다르고 또 순탄하지 않아 여러가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순탄하더라도 그것에서 얻는 수입으로서 임시정부 재정에 흡족한 충당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임시정부는 국채 및 독립공채와 외국차관을 통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국채나 공채나 차관은 임시정부가 돈을 빌려 쓰는 것이다. 정부가 돈을 빌려 쓴다는 것은 구태여 재정적 효과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빌려 준 사람과 나라는 임시정부에 대하여 그만큼 관심을 갖게 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논의가 있더니 1919년 7월 제5회 의정원 회의 때, 16일부터 19일까지 국채와 독립 공채에 대한 조례를 심의 통과하였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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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원의 그와 같은 입법 조처는 미국에 있던 이승만 국무총리의 재가(裁可)문제, 그리고 임시정부의 개조(통합) 문제 등으로 공포가 늦어져 새로운 정부의 각 총장이 취임한 후인 11월 20일에 법률 제3호로 공포하였다.15)
공포된 법률은 ‘국채통칙(國債通則)’과 ‘독립공채조례(獨立公債條例)’인데 국채통칙은 실제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므로 그 내용 검토를 생략하고, 독립 공채 조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그 조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립공채조례] [법률 제3호 1919년 11월 20일]
제1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공채를 모집하되 기채(起債) 정액은 4천만 원으로 하고 명칭은 대한민국 원년 독립 공채라 함.
제2조 본 공채의 이율은 연 1백분지 5로 정함.
제3조 본 공채 증권은 무기명 이자표부(利子票付)로 하되 액면 금액은 1천 원·5백 원·1백 원의 3종으로 함.
제4조 본 공채의 본금은 대한민국이 완전히 독립한 후 만 5개년 후부터 30년 이내에 수시 환상하기로 함. 기 환상 방법은 별(別)로 재무총장이 정함.
제5조 본 공채의 이자는 매년 6월에 부급(付給)함.
제6조 본 공채의 발행 가격은 증권 액면 금액으로 함.
제7조 본 공채의 응모 청약 기한은 대한민국 원년 8월 1일부터 동(同) 11월 말일까지로 정함.
단(但) 필요로 인할 시는 재무총장이 차(此)를 연장함을 득함.
전항 규정은 제10조의 기한, 제11조의 기간에도 차를 적용함.
제8조 응모자는 응모 액수 급(及) 기 주소·성명을 상기한 청약서에 청약액 매(每) 1백 원에 대하여 5원의 보증금을 첨부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 상해 공채 관리국 또는 재무총장이 지정 공채 모집 위원에게 교부함을 요함.
단 보증금에는 이자를 부(付)치 아니함.
_______________
14) ≪의정원기사록≫ 제5회집 ‘국채 통칙 및 공채 발행 조례에 관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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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조 본 공채의 응모 액수가 수요액을 초과할 시는 기 청약서를 접수한 일시의 순차로 증권을 교부하여 수요액에 달한 후 지(止)하되 약(若) 기 일시가 동일할 시는 기청약액을 비례로 감하고 증권을 교부함.
제10조 모입 결정(募入決定)은 대한민국 원년 12월 15일 내로 정하고 기 지(旨)를 응모자에게 통지함.
제11조 전조의 규정에 의하여 모입 결정의 통지를 수(受)한 자는 하개(下開) 기별에 의하여 납금함을 요함.
단 보증금은 제1기 납금에 충당함.
제1기 대한민국 원년 12월 15일 5 원(증권 액면 1백 원에 대하여)
제2기 대한민국 원년 12월 15일로부터 30일까지 45 원(증권 액면 1백 원에 대하여)
제3기 대한민국 2년 1월 3일로부터 말일까지 50원(증권 액면 1백 원에 대하여)
제12조 응모자의 사유에 의하여 전조의 기별을 불구하고 증권과 교환하여 액면 금액을 일시에 납교(納交) 함을 득함.
전항의 경우 또는 제2기 교납기 내에 전부 납금을 완료한 자에게는 증권면(證券面) 1백분지 1을 감하고 납입함을 득함.
제13조 본 공채의 교납금은 연대한 자가 유(有)할 시는 교납 기일의 익일로부터 헌납일까지 액면 1백 원에 대한 4전의 비례로 이자를 징수함.
교납 기한 후 3개월을 경과하여도 교납치 아니할 시는 기 응모 청약을 무효로 하고 기왕 교납한 금액은 민국정부의 소유로 함.
제14조 본 공채의 응모자가 제2기의 납금을 요(了)한 시는 기명 가증권(記名假證券)을 교부하였다가 전액을 완납한 후 원증서(原證書)와 상환함.
제15조 제13조 제2항에 의하여 무효된 가증권을 소지한 자는 속히 차를 재무부 공채관리국에 반환함을 요함.
제16조 가증권을 궐실(闕失), 혹 멸실(滅失)한 자는 2인 이상의 보증을 입(立)하고 기 사실을 전조(前條)관리국에 증명한 후 대가증권(代假證券)을 청구함을 요함.
_______________
15) ≪독립신문≫ 1919년 12월 25일 1면과 27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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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항의 청구가 유한 후 가증권을 발견한 자는 속히 기지(其旨)를 전항관리국에 보출(報出)함을 요함.
전항의 경우에 기왕 대가 증권을 교부한 시는 원가 증권을 반환함을 요함.
제17조 본 공채는 외국인도 응모함을 득함.
제18조 본 공채의 응모액이 1만원 이상에 달한 자에게는 특별포장(特別褒章)을 수여함.
제19조 본 공채 본리(本利)의 변상을 청구치 아니할 시는 본금은 환상기로부터 만 10개년, 이자는 부급기일(付給期日)로부터 만 5개년을 경과하면 차를 변상치 아니함.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된 것인데 제7조에 보면 모집 기간이 1919년 8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공포한 것이 11월 20일이니 임시정부에서는 11월 30일 재무부령 제2호로서 그 기간 연장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연장 기간은 1920년 11월 30일까지니 만 1년이었다. 그리고 제11조의 기간도 각기 만 1년 씩 연장하여 공포하였다.16)
한편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19년 7월 18일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 허가를 받아 9월부터 별도로 공채표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7)
[공채표 발행 규정]
① 공채표 발행 액수는 5백만 달러로 정함.
② 제1차로 25만 달러의 공채표를 발행함.
③ 공채표의 종류는 10달러·25달러·50달러·1백 달러·1천 달러의 5종을 발행함.
④ 공채표의 환상 기한은 미국이 한국정부를 승인한 후 1년 안에 한국 서울에서 재무총장이 지불하되 이식은 연 6푼으로 정함.
위의 공채표의 발매는 미국 동포 사회에 대하여 애국금 징수를 중지시키면서 효과를 올리려고 힘써서 다른 지역보다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로 대한인국민회와 뜻하지 않은 알력이 생겨 독립운동 추진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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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p.71.
17) 앞의 ≪재미한인50년사≫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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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서 공포한 독립 공채 조례는 공포한 후에도 그 실시를 지연시켜 오다가 공채 모집에 착수한 것은 1920년 4월부터의 일이다.18)
1920년 1월 20일에는 ‘임시공채관리국관제(臨時公債管理局官制)’를 공포하여 공채 발행 사무를 관장하는 관리국을 설치하고, 해외 동포 사회에 대해서는 4월 7일 공포한 ‘임시주외재무관서제’에 의하여 재무관을 임명하고 4월 17일 ‘공채모집 위원 규정’을 공포하여 공채 모집을 위한 체제를 갖추었다.19)
그 중에서 공채모집 위원 규정을 보면 전반적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을 소개하여 둔다.
[공채모집 위원 규정] [재무부령 제1호 1920년 4월 17일]
제1조 공채 모집 위원은 도(道)에 도위원, 부군(府郡)에 부군 위원을 치(置)함.
임시 주외(駐外) 재무 관서를 설치한 지방에는 재무관은 도 위원의 예에 의하고 관내 구역을 담임한 위원은 부군 위원의 예에 의하여 직무를 행함.
제2조 도 위원은 공채 관리국장의 지휘를 승(承)하여 부군 위원을 감독함.
제3조 도 위원은 부군 위원이 모집한 금전을 수합(收合)하여 공채 관리국장이 지정한 인(人) 급(及) 장소에 납교하고 차를 해도(該道) 독판(督辦)에게 보고함.
제4조 부군 위원은 도 위원의 지휘에 의하여 공채 모집에 종사함.
제5조 부군 위원은 모집한 금전을 지체없이 도 위원에 납부함.
제6조 부군 위원은 타위원의 담임 구역에서 모집함을 부득함.
전항을 위하여 모집한 자는 기 모집한 금액을 해구역(該區域)을 관할하는 위원이 모집한 것으로 인(認)하고 면직의 처분을 위함도 있음.
18) ≪독립신문≫ 1920년 4월 29일 1면(독립공채모집)과 2면(독립공채모집에 관한 재무총장 담화).
19) 앞의 자료집 2 p.p.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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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조 도 급 부군의 모집 구역은 현재 행정 구역에 의함.
단 1 위원이 수부군(數府郡) 겸관함을 득함.
제10조 공채는 다음의 표준에 의하여 모집함.
① 1만 원 이상 재산 소유자는 그 재산의 30분의 1.
② 5만 원 이상 재산 소유자는 그 재산의 20분의 1.
③ 10만 원 이상 재산 소유자는 그 재산의 10분의 1.
단 1만 원 이하 재산 소유자는 수의(隨意)로 함.
제11조 전조 표준은 부군 위원이 기 담당 구역 내에 재(在)한 1만 원 이상 재산 소유자를 예선(預先) 조사 보고하여 도 위원은 차를 심사 확정함.
제12조 공채 모집 위원은 기 부담한 공채증권이 손실될 시는 여하한 경우를 물론하고 그 책임을 부(負)함.
제13조 다음의 경우에 해당한 자에게는 그 금액 수를 계(計)하여 제10조 표준액의 일부 우(又)는 전부를 감소 혹은 면제함.
① 정부 재무부에 애국금 우는 충의금을 연납(捐納)한 자
② 공채관리국에 공채를 직접 응모한 자
단 본인의 원(願)에 의하여 응모함은 차한(此限)에 부재함.
제14조 부군 위원은 그 모집 상황을 매월 1차 이상 필히 해도 독판 급 도 위원에게 보고함을 요함.
제15조 도 위원을 경유하여 다음의 제건(諸件)을 공채 관리국장에게 보고함을 요함.
① 부군 위원의 모집 상황표(제2호 양식)
② 모집금 수납표(제3호 양식)
③ 당일 현재 공채증권 잔매수표(殘枚數表) (제4호 양식)
제16조 부군 위원은 그 직무를 완료 우는 불능할 시는 다음의 제건(諸件)을 도 위원을 경(經)하여 공채관리국장에게 보고함.
① 모집의 일반 상황
② 응모자 주소·성명·금액·공채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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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공채증권 잔매수 급 번호
④ 모집금 수지표
제17조 도 급부군 위원이 공채 관리국장에게 보고한 외에는 필히 해도 독판을 경유함이 가함.
제18조 부군 위원은 제10조 표준액의 모집에 노력하되 만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응키 난(難)한 자 급 응모할 자력이 유(有)하고도 3차 이상 권고하되 완거(頑拒)하는 자는 그 사실을 구(具)하여 해도(該道) 독판 급 도 위원에게 보고하고 도 위원은 공채 관리국장에게 보고하여 정부의 처분을 대(待)함.
제19조 공채 모집 위원은 응모 자력이 유한자에게 대하여 무기로서 협박함은 부득함.
제20조 도 위원은 그 관내의 모집 예상 액표를 조제(調製)하여 공채 관리국장에게 보고함을 요함.
제21조 도 급 부군 위원은 하시(何時)든지 그 모집 상황 급 문서를 임시 공채 관리국 직원 급 총장의 명을 대(帶)한 검찰원의 사열에 공함이 가함.
제22조 외국인에게 모집하는 위원은 공채 관리국장이 차를 직할함.
제23조 도 급 부군 위원에게 그 모집한 성적에 의하여 상당한 상여금을 급(給)함.
제24조 본령은 대한민국 2년 4월 17일부터 시행함.
다음에는 외국 차관에 대하여 검토할 차례인데 임시정부가 외국에 대하여 차관을 요청한 것은 1931년 이전에는 미국·중국[광동 정부]·소련에 대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미국과 광동정부에 대한 차관 교섭은 뜻대로 안되고 소련에 대한 차관은 어느 정도 성공 단계까지 갔으나 이동휘(李東輝)·한형권(韓馨權)·김입(金立) 등이 공산주의 운동에 사용해 버렸고[제4절 제5항 ‘소련에 대한 외교’ 참조] 일부는 다음 제3장에서 언급하게 될 국민대표회의 경비로 충당하여 임시정부에는 한 푼도 입금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임시정부 초기 활동 기간 중 외국 차관은 결과적으로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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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산과 결산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수행하고 있었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예산과 결산을 평상시의 정부처럼 소상하게 밝힐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예산과 결산을 공개하면 독립 운동의 내막을 일본에게 알려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가 예산·결산을 공개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선 1920년 3월 제7회 의정원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동휘가 시정 방침을 발표할 때 밝혔다.[제1절 참조]그리고 그 때 재무부에서는‘예산·결산의 정부위탁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였다.20)이 위탁안은 처리하지 못한 채 의정원은 폐회하고, 제8회 의정원회의가 1921년 2월 28일에 소집되었으나 다시 토의되지 않고 넘어가니 실제 예산·결산은 상세하게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앞의 제6절 끝에서 말한 바와 같이 8·15 해방 후 임시정부의 문헌을 가지고 돌아왔으나 6·25 당시 분실하여 임시정부의 예산과 결산은 영영 모르게 되었다.
예산과 결산 중에서 그 윤곽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은 1927년 이후 공개된 것이 있다.21)이것을 통해서 수입 상황과 지출 상황을 연도별로 비교해 본다. 이것은 1927년
세입
연 도 세입 항목
대한민국 9년(1927)
10년(1928)
11년(1929)
12년(1930)
비고
인구세
394.07
353.50
278.00
321.06
9년도의 것은 8년도의 것 일부 미납분이 포함되어 있음
애국금
872.00
377.00
889.57
-
인지 수입
2.00
2.00
-
-
과년도 수입
61
2.00
-
-
전년도 추월
-
10.27
44.76
89.80
잡수입
-
65.80
-
-
가입금
166.61
164.52
53.00
99.65
불용품대
10.00
-
-
-
가출반환(假出返還)
-
-
-
37.00
계
1,445.29
975.09
1,265.33
547.51
_______________
20) ≪독립신문≫ 1920년 4월 3일 2면
21) 앞의 ≪한국독립운동사≫ Ⅲ p.p.436~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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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출
연도 세출 항목
대한민국 9년(1927)
10년(1928)
11년(1929)
12년(1930)
비고
직원 급여
19.60
143.00
123.00
36.00
고인 급여
172.00
144.00
135.00
-
잡급(雜給)
-
18.35
-
-
가옥세
396.00
277.80
494.20
213.80
도서 및 인대(印代)
63.64
27.05
15.64
29.00
비품
1.20
2.00
16.00
-
소모비
98.41
36.00
31.58
30.00
수선비
2.40
44
1.70
-
문구비(文具費)
12.64
-
2.90
-
통운비(通運費)
61.39
56.02
5.03
5.40
여비
33.51
-
50.00
-
잡비
32.93
35.85
15.48
30.00
교제비
121.30
54.00
90.00
45.00
기밀비
152.45
23.00
-
90.00
징세비(徵稅)
-
4.00
-
-
구휼비(보조비)
134.00
-
30.00
32.00
구채(舊債) 상환
-
26.82
30.00
-
가입(假入) 상환
133.55
82.00
57.00
-
계
1,435.02
930.33
1,097.53
511.20
(930.33)
(1,097.53)
(511.20)
( ) 안의 것은 원문의 숫자인데 9년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수입과 지출을 비교하니 착오가 없다.
부터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활동 상황을 파악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앞의 세입·세출표를 보고 먼저 세입을 검토하면 다음 사항에 주의가 갈 것이다.
① 세입은 인구세와 애국금이 대본을 이루는데 9년도(1927)에는 총 세입의 87.6퍼센트 10년도에는 74.92 퍼센트, 11년도에는, 92.19 퍼센트, 12년도에는 애국금의 수입이 없고 인구세 뿐인데 58.64 퍼센트이니 재원은 거의 여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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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세입에서 부족한 것은 매년 가입금(假入金)으로 충당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실제상 적자 예산으로 봐야 할 것이다.
③ 10년도에 잡수입이 다소 있었으나 다른 해에는 전연 없었으니 10년도의 잡수입이란 어떤 사업에서 얻은 것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보면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세입은 인구세·애국금에만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임시정부가 당초 재원으로 생각했던 국채 및 공채와 외국 차관이니 실업에 의한 수입 같은 것은 뜻대로 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출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세출의 대본은 가옥세인데 9년도 27.59 퍼센트, 10년도 29.86 퍼센트, 11년도 45.03 퍼센트이다. 12년도 41.83 퍼센트이니 세출에서 차지한 비중이 컸다.
② 다음이 직원 급여·고인(雇人) 급여·잡급 등의 인건비의 지출이 9년도에는 13.35 퍼센트, 10년도 30.85 퍼센트, 11년도 23.51 퍼센트, 12년도에는 세입이 적어서 고인 급여가 지출되지 않아 직원 급여만 지출됐는데 7.04 퍼센트이다.
③ 이렇게 보면 인건비와 가옥세를 제외한 일반 경상비는 얼마 안 된다. 가옥세를 제외한 일반 경상비는 9년에 59.06, 10년에 39.29퍼센트, 11년에 31.46퍼센트, 12년에 51.13 퍼센트이다.
④ 물론 인건비조차 충분히 지출되지 못한 형편이었는데 12년[1930]에는 고인 급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용인(傭人) 하나도 채용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이었다.
⑤ 그러나 인건비를 제외한 일반 경상비도 가옥세를 제외하면 몇 푼 남지 못했다.
특히 11년과 12년에는 인건비와 가옥세에 거의 지출하였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재정 관계로 활동을 중단한 형편에 도달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1949년 김구(金九)의 장례식 때 엄항섭(嚴恒燮)의 조사(吊辭)가 떠오른다. ‘선생님 상해에서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의 배추 잎을 주어 먹던 생각이 납니까’라는 구절이 실감나는 임시정부의 세입·세출이라 하겠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는 세계적으로 경제의 공황기를 전후한 시기였으니 정상적 정부도 어려웠던 때라, 임시정부의 재정적 곤란은 말할 나위 없겠다. 더구나 당시는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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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의 문제로 쇠퇴 일로를 걷던 때였으니 재언이 필요 없다. 그것은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잘 나타나 있다.22)
임시정부의 재정 형편이 호전되는 것은 윤봉길(尹奉吉) 의거 후 임시정부 활동 전반에서 활기를 띠게 되는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특히 제2차 대전 당시, 중경(重慶)에 있던 때는 외국 원조가 거액으로 있었으므로 예산 규모도 크게 불어났다. 지출내역을 보니 임시정부 요인의 생활도 한층 유족하게 됐음을 알 수 있다.23)
_______________
22) 김구 ≪백범일지≫ p.290.
23) 대한민국 24·25·26년도 ‘예산결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1 임정편Ⅰ pp.580~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