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준 책 '서울은 깊다' 읽을 겨를이 없었겠지. 안스러울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에 "내가 그걸 읽을 겨를이 있겠냐?"하면서 내쉴 한숨이 귀에 걸린다.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라는 카피를 책머리에 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역사라는 학문의 재미를 느꼈어. 핸드폰이 있고 없고, 전깃불이 들어오고 들어오지 않고, 기관총이 있고 없고 등등 기타 등등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사람과 사람을 나누는 틀, 그 안에서 툭탁거리기도 하고 서로 비위를 맞춰 가며 지내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어쩌면 그리 비스무리한지 몰라.
제목처럼 이 책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과거를 탐사해. 하지만 그 탐사의 종착은 결국 서울의 오늘이기도 해. 우리가 신경둘 것도 없이 당연히 여기는 장소와 습관과 일상이 실은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는 과거와 맞닿아 있다는 걸 새삼 깨우쳐 주고 과거라는 이름의 거울에 우리의 현재가 신기할이만큼 선명하게 비쳐지고 있음을 증명해 주거든.
지은이 자신 이렇게 얘기하기도 해. "데자뷔! 역사에서 컨텍스트가 반복되는 적은 없지만 텍스트는 자주 반복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대중의 오래된 믿음을 뒷받침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신기했던 '텍스트의 반복' 하나를 소개해 줄까 해. 알다시피 조선 왕조는 과거 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했고 관리로 등용했지. 과거 급제는 양반들의 꿈이자 신분 상승의 유일한 관문이었고. 그런데 이 과거 제도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한 번 볼까. 전우용 교수의 텍스트를 빌려 와 본다.
-------------------------------------------------------- "....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하여 학연으로 혼맥으로 끼리끼리 뭉친 서울의 대관 나리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못하는 일이 없었고 안하는 짓이 없었다. 특히 시골의 인재를 빨아 올리는 빨판 구실을 해 왔던 과거 제도가 심각하게 망가졌다. 시험 문제 빼돌리기, 답안지에 표시하기, 대리시험 등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
조선 시대의 과거를 온갖 종류의 '입시'에 비유해도 무방할 듯 해. 조선 시대 과거판에서 벌어진 부정 행위들이 마치 환생이라도 한 듯 대한민국 입시판에서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잖아? 얼마 전 김포외고 교무과장이 자기네 학교 입시 시험 문제를 빼돌린 것이야 빙산의 일각이겠지. 심심하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대리시험이나 감독관과 짜고 치는 고스톱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문제는 요런 '불법행위'가 아니야. 컨닝도 실력이라고, 나름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조마조마 간이 콩알만해지고 등줄기가 찌릿찌릿한 불안감을 감수해야 하잖아. 조선시대 서울의 대관 나리들은 그것마저 싫었던가봐.
------------------------------------------------------ "그러나 부정과 불법에는 위험이 따랐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법이 필요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서울 문체와 시골의 문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의 경화 자제들은 시골 유생들이 배우기 어려운 새로운 문체를 배웠고 출제자들은 그에 합당한 문제를 냈다.
서울 선비들은 사륙문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유행한 한문 문체,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에 사륙문이라 불린대) 을 익혔으나 시골 선비들은 그를 제대로 배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경화 거족들(서울에 뿌리내린 명문 세족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급제할 수 있는 길을 넓혀주었고, 그럼으로써 자기들만의 서울, 자기들만의 나라를 만들어 나갔다. 정교하게 고안된 과거 제도의 여과장치를 거치면서 '명가의 자제는 날 때부터 다르다'는 생각이 퍼져나갈 공간도 넓어졌다." ------------------------------------------------------
아하, 우리 시대의 잘나가는 족속들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게야. 돈1억 2억 갖다 바치면서 심약한 우리 애한테 죄의식 안겨 줄 일이 뭐 있겠어.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내 새끼들과 천한 것들의 새끼들을 일찌감치 구분해 버리면 되는 거야. 실력이 증명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입을 막을 방도만 있으면 되는 거야.
우리 시대의 사륙문은 다름아닌 "영어 몰입"이 되겠지. 한 달에 기백만원의 '영어 유치원'에서 네이티브 스피커들과 어울리며 자라고 맘 내키면 한 몇 년 해외 연수를 다녀온 '인재'와 냉장고에 단어장 붙여 놓고 애플 엘리펀트 읽으며 영어 시작한 '둔재'가 어찌 상대가 되겠어. 사륙문 능란히 써 내리는 서울 선비들같은 인재(?)를 사륙문이 뭔지도 모르는 시골 선비들이 대적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국제중학교"까지 내려 왔겠지. 국제중학교에 갈만한 아이들의 출신성분을 따지면 가히 옛날의 '경화 벌열 가문'의 환생이라 할 만 하니까. 보수적인 교육위원회조차 신중하라는 국제중학교를 무슨 수를 써서든 내년 3월 문을 열겠다고 우겨대는 교육감의 머리 속에는 "명가의 자제는 날 때부터 다르다"는 생각으로 미어터지고 있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어릴 적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은 아이들은 "정교하게 고안된" 여과장치를 거치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하게 되겠지. 엄마의 정보력과 아버지의 경제력, 내지는 할아버지의 경제력으로 만들어지는 인재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조선 시대의 서울 출신 양반들처럼 시골뜨기들을 무시하며 자기들끼리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자신들의 세상을 굳혀 나가겠지. 전우용 교수의 설명을 더 들어 볼까.
-------------------------------------------------------- "서울 사람들에게 시골 사람은 옷차림과 행동거지 뿐 아니라 말투에서도 심지어 외모에서까지도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갖는 '타자'들이 되었다. 어렵게 과거의 관문을 뚫고 새로 도성민의 자격을 얻은 사람들도 향산(鄕産)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각 지방의 인재와 문화를 용해하여 새로운 서울 사람, 문화를 만들던 국초의 활기는 사라졌다. 경화 벌열 (서울 지역의 유력 가문)로 누대에 걸쳐 권세를 누려 온 자들만이 서울내기로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다......
'당상 이상과 삼사의 반열에 시골 출신이 없다"는 점이 불안한 현실로 인지된 것은 현종 때부터의 일이었는데 영조대에 이르면 아예 과거 합격자 가운데 시골 출신들이 가뭄에 콩나듯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결혼 정보 업체 직원에게서 강남 출신들은 강남 출신이 아니면 만나려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어. 그 직원이 그렇게 변명해 주더군. "우월감이라고 오해하진 마세요. 그냥 문화 차이가 좀 있어요. 아무래도 편한 게 좋지 않겠어요?" 허기사 수백년 전부터 같은 조선 사람을 "옷차림과 행동거지 말투와 외모에서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는데 발 디디고 사는 땅값부터가 몇 배의 차이가 나는 인종과 인종간에 차이가 늘면 늘었지 줄기야 하겠어.
사법고시 합격자들의 20%인가가 한 특목고 출신들이라는 뉴스를 본 적 있어. 그 학교 출신 변호사가 자랑스레 인터뷰하더군. 자기의 든든한 인맥에 대해서 말이야. 그 인맥은 날로 두터워질 것이고 뒤질세라 다른 특목고들도 '인재'들을 끌어모으게 되겠지. 그리고 당연히 그들 심산유곡의 이무기들은 개천의 미꾸라지와는 달라도 크게 달라질 게야. 애달픈 것은 덩치는 이무기는 고사하고 구렁이는 커녕, 거미줄에 걸려 죽을 것 같은 실뱀들이 이무기 대열에 끼어 보겠다고 덤비다가 옆구리가 터질 거라는 거.
상고 졸업하고 사법고시 패스한 변호사가 대통령을 넘보는 일도 그렇지만, 풀빵 장사하면서 학자금을 벌어서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미담도 가물에 콩이 아니라 동지섣달 새싹만큼도 보기 어려워지겠지. "당상 이상과 삼사의 반열에 시골 출신이 없었던" 것처럼 "몇 급 공무원과 법조 삼륜과 대기업 부장급 이상과 이른바 '신의 직장' 중에서 특목고 출신이 아닌 자들 씨가 마를"때가 곧 올 거 같단 말이지. 어느 특출한 아이가 그 그룹에 끼지 않고 성공(?)을 일궈 내더라도 "촌놈" 취급을 면하기가 과연 쉬울까.
조선이 끝내 고루하고 비루하게 망한 데에는 이른바 경화벌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대물림하기 위해 출세의 경로를 독점할 뿐만 아니라 그 독점을 아예 시스템으로 굳혀 버림으로써, 타 지역의 인재와 문화가 섞이는 것을 완벽히 차단한 것도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을 듯 해. 정약용이 상소하기를 "정여립의 난 이후 호남은 버림받았고 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도 그렇고,서북 사람은 원래부터 그랬고 개성, 강화 사람도 그렇고, 도대체 전하의 자식들은 기호 지역의 선비들 뿐이냐?"라고 물었다는 얘기도 그렇고, 정조도 이렇게 한탄을 했다고 하거든. "급제를 차지하는 자들은 모두 남산과 북악 사이의 집안 자제들 뿐"이라고 말이야.
아마 그때에도 '남산과 북악 사이의 집안' 출신들이 거의 전부 다인 신하들은 엎드려서 이렇게 외쳤을 거야. "실력이 그런 걸 어찌하겠나이까. 과거 성적이 말해 주지 않사옵니까.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다양한 인재를 보다 폭넓은 방식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좁은 깔대기를 통해 입맛대로만 빨아들이는 나라가 건강할 리는 만무해. 그래도 조선의 왕들은 "끼리끼리 감독관도 되고 출제자도 내고 응시생도 되는" 과거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그를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시도라도 했었는데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그 "끼리끼리" 리그를 구축하지 못해서 기갈이 난 듯 한 게 다를 뿐이야.
정조가 한탄을 한 뒤 얼마 안 가서 경화벌열 정치의 절정인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조선은 안동 김씨 일문에 의해 말아먹히게 돼.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가서 어떤 출신들이 그 세도를 부리는 걸 보게 될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우리의 인재들은 조선의 경화벌열들과는 달라서 그 실력을 백성들을 위해 관대하게 쓰게 될 거라? 퍽이나........ 퍽(Fuck)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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