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손가락이 허전해서 보니 무엇이 없어진 것 같다. 눌린 자리만 있고 반지가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이게 어디로 갔나. 허둥지둥 뒤졌다. 아차 당구장 장갑에 끼여 빠졌구나 싶어 서둘러 달려갔다. 벗어놓은 장갑 상자를 엎어놓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려 살폈다. 나타나지 않자 치던 자리를 요리조리 구석구석 알뜰히 찾아봤지만 간 곳이 없다.
주인에게 청소하면서 봐달라 부탁했다. 방안 옷가지 위아래 주머니에 있나 샅샅이 넣어봐도 있을 기미가 없다. 책상 위와 모서리며 침대 좌우 아래 이불을 들썩거려도 감쪽같다. 손 씻을 때 세제를 써서 미끄러워 빠져나가지 않았겠나 해서 세면대를 둘러봤다. 구멍으로 들어갔으리라 생각이 들어 떨그럭거리니 아들이 도와줬다.
무거운 사기 커버를 들어 올리고 나사를 풀어제꼈다. 꼬불꼬불한 파이프 매듭 쇠를 풀려니 그대로 부서져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무슨 쇠붙이가 이러나. 새까만 찌꺼기가 뭉글뭉글 나온다. 물이 잘 안 빠졌다. 이제야 보니 머리카락과 끈적한 것들이 가득 차서 거의 막혀가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고치려 했는데 반지 덕분에 잘됐다.
다 엉망으로 버려놨으니 고쳐야 했다. 무슨 쇠가 흙덩이처럼 부서지나. 돌리는 나사가 쇠붙인데 손으로 돌리기도 전에 나무껍질처럼 떨어져 나온다. 보이지 않는 덮어씌운 곳이라고 그런 자재를 써도 되나. 가당찮은 시설이 못마땅하다. 밝고 앞서가는 오늘날인데 이래도 되나. 망가뜨렸으니 이걸 어쩌나. 당장 사용해야 하는데 철물점에 들러 부품을 구하고 반지도 찾을 겸 목욕탕을 찾아가 볼 요량이다.
거추장스럽던 옛것보다 더 좋은 세면 설비가 나와서 샀다. 아들과 엎드려 맞춰보면서 겨우 완성했다. 빼내는 데도 어려웠다. 무엇이 박혀 꼼짝달싹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맞춰놓고 보면 물이 줄줄 새어 다시 손보기를 여러 번이다. 알고 보니 손쉬운데 처음이어서 서툴기 짝이 없다.
그나저나 없다. 여기에 들앉아 있지 않겠나 여겼는데 야단났다. 다 뜯어내 펼쳐놓고 뒤적거렸지만 찾을 수 없다. 험상궂게 어지럽혔다가 고쳤어도 곧 들통이 날 것이다. 아내가 알면 칠칠치 못하다 한 소리 들을 게 뻔하다. 그런데 요것이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니 언제 없어졌는지도 짐작이 안 간다. 그저 감감하다. 조금 헐거워져서 붙어있는 게 전만 못하다. 걸핏하면 나간다. 바람이 났나.
늙바탕에 살이 빠져선가 헐겁더니 스르르 나앉길 잘한다. 늘 차고 있으니 붙어있을 줄 알았지, 이리 몰래 사라질 줄이야 생각이나 했나. 일일이 만져보고 괜찮은가를 무슨 수로 다져나가나 성가시다. 무심코 지내다 이렇게 되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별것 아닌 게 왜 자꾸만 들먹거려질까.
목욕탕에서 반짝거리는 게 있어 웬 금지환일까 하며 주웠다. 보니 내 것이 빠져 굴러다녔다. 또 한번은 등밀이 순번을 기다리며 앉았는데 손이 머쓱하다. 어디로 빠져나갔다. 급히 앉았던 자리를 두리번거렸다. 목욕하던 사람이 놀라 같이 하수구며 의자 밑을 더듬거렸다. 뒷바닥에서 해끗하게 나타나 겨우 찾았다.
조심해서 목욕할 때마다 약지에서 좀 굵은 중지로 꽂았다. 잘 챙겨 나다녔는데 오늘 그만 나를 버린 채 저 혼자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다. 막막한 게 통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며칠 전 리모컨을 떨어뜨려 주우려고 화단을 오르내렸다. 미끄러지면서 헛짚어 나뭇가지에 손가락을 다쳤다. 그때 빠져나갔나 별별 꿍꿍이를 해보지만 미치지 않는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건데 호들갑을 떨까. 부산을 피운다. 명지 레포츠 센터에 들러 매표원과 탕 관리자를 만나 알아봐도 그런 건 못 봤단다. 급한 김에 아무렇게 입고 나왔다가 매서운 영하 날씨에 달달 떨다가 들어갔다. 여기 있네. 깜짝 놀라 소리치는 아내다. 리모컨이 소파 구석에 있는 걸 찾았다. 모포 털 때 창밖 13층 아래로 떨어진 줄 알았는데 거기에 처박혀 있을 줄이야. 반지야 그렇게라도 엉성하게 나오렴.
아내와 똑같이 만든 한 돈짜리 18금에 팔각 유리를 박은 결혼 35주년 기념품이다. 귀한 보석처럼 빛난다. 유난히 반짝거려 어찌 그러냐고들 물어본다. 수십 년 끼고 품고 살았으니 그 정이 얼만데 있을 땐 모르다가 잃고 나니 이리 섭섭해 견딜 수 없다. 눈에 아른거리고 자꾸만 손을 만져본다. 똑같이 만들면 되지 그까짓 것을 같고 그러느냐 할지 모른다.
당구장 소쿠리를 뒤엎고 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왜 그러냐고 주인이 놀란다. 화장실을 들쑤셔놓고 바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놨다. 방의 옷걸이를 죄다 흔들어 어수선하다. 책상이며 침대까지 다 들춰봤다. 요것이 어디로 갔나. 잠을 잘 수가 없다. 곰곰이 뒤척이다 까라졌다. 아까워서 자꾸만 어른거린다. 짠한 마음이다.
하찮은 무정물이 마음을 사로잡아 갈피를 못 잡는다. 그 바람에 화장실 세면대가 번듯해졌다. 막혀 후줄근하던 것이 속 시원하게 터져 내려간다. 그 안에 있을 거라며 나오리라 여겼는데 시꺼먼 냄새 고약한 찌꺼기만 뒤엉켜 나왔다. 보잘것없고 하잘것없는 것에 이끌리고 매달려 된통 뒤숭숭한 하루를 보냈다.
첫댓글 재밋게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살 점 떨어져 나간 것처럼
섭섭 하셨겠어요
세면대 잘 고쳤으니 그래도 건진게 있어요
설비 부르지 않고 대단하십니다
금값이 장난이 아닌데...
아내에게 한 말 들었어요.
수십 만원 하는 걸 잃었다고
어디서 곧 나타나제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