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해 온 에드워드 윌슨. 이 책은 그 거대한 기획을 총결산한 역저다. 그는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이, 인간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협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서구 학문의 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가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지들 속에 숨어 있는, 그렇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간과했던 지식 통합의 가능성을 찾아내 명확하게 보여 준다.
서구 학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근대 학문과 과학의 모체가 되었던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종교 이론에까지 이르기까지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 속에서 인간의 지적 모험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학문 분과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주요 벽들, 자연과학자와 인문사회과학자의 대립, 마음과 몸의 이분법, 유전자주의자와 양육주의자의 대립, 윤리 규준에 대한 경험론자와 초월론자의 논쟁, 유물론자와 유신론자들의 적대 들을 최신 과학 성과들을 통해 넘나들며 양자들의 종합을 모색한다.
원제 ‘consilience'는 ’함께 넘나듦(jumping together)‘이라는 뜻의 라틴어 'consiliere'에서 가져온 것으로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이자 이 책의 역자인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는 이 책을 옮기면서 이 개념을 ’통섭‘으로 번역하였다. ‘큰 줄기’ 또는 ‘실마리’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삼군(三軍)을 통섭하다.”등으로 쓰이는 경우에도 그 뜻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 또는 “총괄하여 관할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줄거리
1장 '이오니아의 마법'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의 철학자 탈레스가 가졌던 세계는 질서정연하며 몇몇 자연법칙들로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과학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이오니아의 마법’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이 서구 학문의 근본 정신으로 재조명한다.
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에서는 ‘통섭’ 개념을 소개하며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도그마에서 벗어난 통합된 학문이 파편화된 현대 학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역설한다.
3장 '계몽사상'에서는 계몽주의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지성들, 마르키 드 콩도르세,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의 삶과 학문을 살피고 그들이 사상이 현재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에 어떤 식으로 공헌하는지를 살핀다. 또한 계몽주의의 약화와 그에 따라 등장한 낭만주의,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계몽주의와 통섭 세계관의 “완벽한 상극인” 포스트모더니즘적 “몽매주의”의 대표자 자크 데리다를 “문명세계의 다른 곳에서 발전한 마음과 언어의 과학에 대해 마치 췌장의 위치도 모르는 심령치료사처럼 무지하다.”라고 비판한다.
4장 '자연과학'에서는 “서양의 자연과학을 추동해 온 힘”인 환원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에드워드 윌슨은 환원주의를 일종의 “강박증”, “환원적 과대망상증”으로 여기는 일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달리 “자연을 자연적 구성 성분으로 쪼개는 환원주의”를 “과학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높게 평가한다. 그는 환원주의를 기본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과학을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로 정의하며 그 과학의 정의를 진정한 의미에서 실행하고 있는 자연과학에서 지식의 대통합을 향한 기초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5장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서는 저자가 직접 연구한 개미의 의사소통, 신화와 꿈 등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기능하는 뱀에 대한 공포(혹은 혐오), 복잡계에 대한 연구 등의 예를 들어 가며 자연과학에서 인문?사회과학으로 들어가는 길, 인간 본성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길이 크레타 섬의 미로처럼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분자만 한 유전자 수준 미시 세계에서 수십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를 다루는 거시 세계까지 통섭을 이뤄내는 생물학의 예를 들며 지적 미로를 빠져 나가게끔 도와주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음을 보여 준다.
6장 '마음'에서는 인간 정신 과정의 물리적 실재를 연구하고 있는 뇌과학, 신경생리학, 인공 지능(AI) 연구 성과들을 살펴보며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인간 정신 연구에 통합적 과학 연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조명한다.
7장 '유전자에서 문화까지'에서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중요 성과들을 인용하며 유전자의 변화가 문화의 진보가 함께 이뤄졌음을 보여 준다. 인간 및 영장류의 의사소통 연구, 문화의 기본 단위에 대한 연구 등을 통해 유전자의 변화가 문화 발전을 자극하는 신체적 요소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발전한 문화가 다시 그러한 유전자의 변화를 조장하는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인류사를 발전시켜 온 진화 메커니즘임을 보여 준다.
8장 '인간 본성의 적응도'에서는 7장의 논의를 발전시켜 ‘문화에 가장 널리 퍼진 형질들은 그것들을 있게끔 해 준 유전자들에게 진화적 이득을 안겨 준다.’라는 유전적 적응도 가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가족, 짝짓기, 양육, 사회적 지위, 사회적 계약, 근친상간 금기 등 인류학자에 의해 수집되기만 했을 뿐 원인이 구체적으로 탐구되지는 못했던 것들을 유전자?문화 공진화로 설명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증명한다.
9장 '사회과학'에서는 사회과학의 여러 분과,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의 역사를 개괄하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연합 가능성을 모색한다. 윌슨은 이 장에서 분과 학문의 벽 안에 갇혀 있는 사회과학 제분과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근거한 학문으로 사회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 그중 특히 생물학과의 연대가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10장 '예술과 그 해석'에서는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예술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검토한다.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에 근거하여 예술에 생물학적 기원에 대해 조심스레 설명한다.
11장 '윤리와 종교'에서는 윤리의 근거를 초월론적 유신론 설명에 근거하지 않고 현대 생물학과 과학의 성과를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이 장에서 윌슨은 윤리의 기원이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 기원에서 내려왔다는 초월론적 설명과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경험론적 설명을 대조하고, 종교가 진화심리학적 기원을 가진 부족주의(자신 부족의 번영을 최우선으로 하는)의 산물임을 논증한다.
12장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인간의 지적 탐구가 통섭과 대통합을 이뤄 새로운 지적 혁명을 만들어 냈다고 했을 때 그것 속에서 “유황 냄새”가 나지 않는지, 오히려 인류의 터전인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한다. 생명 다양성을 파괴하는 환경 문제, 경제 양극화의 문제, 국제 관계의 악화 등을 검토하면서 세계의 변화 속에서 우리 인류만은, 우리 민족만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은, 우리 가족만은,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면제주의자적 관점을 비판한다.
미디어 리뷰
과학-예술-윤리 넘나들기 | 한겨레 책과 사람 오철우 기자 | 2005-04-30 |
‘세상을 설명하는 진리는 여럿인가?’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학문 통합의 길을 줄곧 제시해온 에드워드 윌슨(79·미국 하버드대학 생물학과 석좌교수)이 자신의 역작 <통섭: 지식의 대통합>(1998)에서 던지는 가장 큰 물음이다. 하나의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에서 다르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다르다면 진리는 여럿이 될 수 있느냐고 그는 반문한다.
그의 대답은 진리는 ‘통일성’을 지니므로 당연히 “지식의 대통합”도 가능하며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과업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라고 주장하는 윌슨은, 이 책에서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애썼던 고대 그리스 사상에 경의를 표하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윤리와 예술의 세계까지 오가며 지식 대통합의 가능성에 문을 두드린다.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대통합 흐름의 상극으로 지목돼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자연과학이 예술·윤리까지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는 통합론은 과학의 길이 위태로워 보이는 현대사회에서 더욱더 필요해진다. 그는 유전자 조작의 시대에 대해, 그리고 갈수록 자연에서 멀어지고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세태에 대해 따끔한 경고를 던진다.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고 오래된 유산을 방기하며 진보라는 이름 아래, 도덕, 예술, 가치를 내동댕이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그는 “이기적 자유지상주의”인 미국 보수주의 운동과는 다른 “진정한 보수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통합은 학문하는 사람들에게만 절실한 게 아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지식의 단가는 점점 낮아져 지식정보의 유통이 넘쳐나는 시대에 통합과 종합은 더욱 귀중한 가치가 된다. “대답은 분명하다. 종합이다.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적절한 정보를 적재적소에서 취합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중요한 선택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갈 것이다.”
윌슨은 30년 전인 1975년 학계에 반향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회생물학>이란 책을 펴내어 인간을 생물학과 진화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해석하는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개척한 바 있다. 생소한 책 제목인 ‘통섭’(通攝·統攝, consilience)은 그의 제자인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가 장대익(과학철학·박사과정)씨와 함께 이 책을 번역하면서 찾아낸 말이다. 그는 옮긴이 서문에서 “내가 원하는 우리말 단어를 참빗으로 이를 잡듯 이른바 ‘서캐훑이’를…1년 넘게 한 끝에 찾은 단어가 통섭”이라며 ‘사물에 널리 통함’과 ‘경계를 넘나듦’이란 통섭의 뜻을 소개했다.
모든 분과학문의 통합 모색 | 조선일보 Books 이한수기자 | 2005-04-30 |
지식의 대통합(The Unity of Know- ledge)을 부제로 달고 있는 야심찬 이 책은 모든 분과학문의 통합적 지식을 모색한다. 원제는 ‘Consilience’. 웬만한 영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이 말은 라틴어 ‘consiliere’에서 온 것으로 ‘더불어 넘나든다’(jumping together)는 뜻을 담고 있다.
역자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적합한 번역어를 찾아 5년간 고심하다 웬만한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통섭(統攝)’이란 용어를 골라냈다. 불교와 성리학, 최한기의 기학(氣學)에도 등장하는 이 말은 ‘큰 줄기를 잡다’ 혹은 ‘총괄하여 관할한다’는 의미다.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기 위해 저술된 원저의 번역어로 매우 적절하게 보인다.
최 교수의 스승인 저자는 개미연구의 권위자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개미’로 퓰리처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학문 전체에 큰 영향을 준 현대의 지성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벽을 허물고 틈을 메우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가졌던 과학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서구학문의 근본정신으로 재조명하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대립, 마음과 몸의 이분법, 유물론자와 유신론자의 적대 등을 최근의 과학성과를 통해 넘나들며 종합을 모색한다.
르네상스 시기 학자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음악·건축·수학·해부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통섭’했다. 이 책은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지식체계를 통합하는 새로운 르네상스시대에 대한 전망을 가늠케 한다.
독일 철학자 칸트의 묘비명에 있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별은 자연과학을, 도덕법칙은 인문학(또는 정신과학)을 상징한다.
생물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에른스트 페터 피셔 독일 콘스탄츠대 교수의 책 ‘인간’과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통섭’은 바로 이 ‘별’과 ‘도덕법칙’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종합적 연구 결과로서 인간을 규명하고 있는 데 비해, ‘통섭’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두 책은 자연과학인 동시에 인간에 대한 연구에 힘입어 점차 인문학을 포섭하고 있는 생물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피셔 교수는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두 개의 영혼’으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들며, 결국 인간 연구는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 자율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 내면의 통합에 대한 연구라고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1543년은 의미심장한 해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가 발표돼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온 동시에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 발표로 인간 내부에 대한 과학적 탐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60여 년간 생물학은 구성요소로 본체를 설명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에 심취해 세포-효소-분자-원자까지 인체를 쪼개고 또 쪼갰다. 그렇게 심연으로 파고들던 인간 내면의 탐사는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밑바닥을 치고 다시 부상하고 있다.
DNA 구조를 발견한 제임스 잡슨의 이 말은 과학과 종교학, 물리학과 심리학의 융합으로서 생물학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이제 생물학은 종교의 영역이던 영혼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세포막에 있으면서 호르몬과 결합하는 수용체나, 위장과 중추신경계에 분포하면서 화학전달물질과 결합하는 신경펩티드는 바로 육체와 정신의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다.
뇌에서 나오는 분자 형태의 ‘BDNF(뇌 유래 신경성장 인자)’는 유전이냐 환경이냐는 해묵은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정상적인 생쥐는 3주간 빛을 보지 못하면 시각을 잃는다. 그러나 BDNF를 활성화시키면 시각이 살아난다. 이는 유전자가 경험의 역할을 대체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시각학습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빛이라는 환경을 만나야 비로소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다. 유전자와 환경이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섭’의 저자 윌슨 교수는 생물학에서 이뤄지는 이런 지적 통합의 경험을 전체 학문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21세기의 학문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양분되고 사회과학은 생물학이나 인문학에 편입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인문학과 과학도 융합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뇌과학, 신경생리학, 인공지능학,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 첨단 학제 간 연구의 성과를 종횡무진 설명하면서 사회학과 인류학, 심지어 경제학까지 자연과학과 통합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윌슨 교수의 지적 통합론은 그 한계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은 20세기 서구 계몽주의와 환원주의의 전통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윌슨 교수는 과학과 형이상학의 통합을 도모한 계몽주의의 꿈을 되살리는 것을 이카로스의 전설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양이 우리 날개의 밀랍을 녹이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높이 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원제는 Die Bildung des Menschen(2004년), Consilience-The Unity of Knowledge(1998년).
통섭 | 경향신문 Book | 2005-04-30 |
올해는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 출간된 지 30년 되는 해. 만물의 영장으로 특별 취급돼온 인간을 다른 동식물과 같은 위상으로 끌어내려 생물학 및 진화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이 책은 인간 본성에 대한 기존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증발시키고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인간행동유전학 등의 통합과학을 발전시켰다. ‘통섭’은 ‘사회생물학’ 출간 이래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두 문화 사이의 거대한 틈을 메워온 윌슨의 노력이 집대성된 책이다.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서구 학문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해 근대 학문과 과학의 모체인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적 모험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아우른다.
파편화된 학문... 그 뿌리는 '통'하느니 | 중앙일보 북리뷰 채인택 기자 | 2005-04-30 |
이 책의 키워드이며 제목으로도 쓰인 '통섭'은 '귀납적인 추론 결과가 서로 일치하거나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더불어 넘나든다'는 뜻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의역한 낱말이다. 옮긴이는 '사물에 널리 통한다'는 통섭(通涉)과 '전체를 도맡아 다스린다'는 통섭(統攝) 모두가 원제와 뜻이 통한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통합.일체화, 중국어권에서는 융통으로 번역됐다고 한다.
지은이는 모든 과학은 원래 자연과학이라는 뿌리 아래 하나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전문화되고 분화되었다고 본다. 그는 자연과학.인문과학.예술 할 것 없이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에는 인간의 유전적인 바탕이 깔려 있으며 이에 따라 모두 일맥상통한다고 믿는다. 즉 통섭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사회과학.인문과학은 물론 심지어 종교의 문제도 두뇌과학, 특히 유전학 같은 인간 본성을 다룬 자연과학을 적용해 해결하거나 설명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모든 지식은 통섭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그늘 아래 하나로 재결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잡다해진 인간 지식을 자연과학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하나로 묶고 미래를 예측가능하게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꿈꾼다.
미 하버드대 생물학 교수인 지은이는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으며 손댄 분야 모두에서 대가가 됐다. 개미학자로 출발, 1950년대에 개미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을 이용해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뒤 생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동물과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을 창시했다.
과학·인문학 융합은 계속된다. | 세계일보 북월드 이보연기자 | 2005-04-30 |
‘통섭(統攝)’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사이에 가로놓인 틈을 메우고자 노력해온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노력이 집대성된 책이다. ‘통섭(consilience)’은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지은이는 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하려는 인간 지성의 위대한 과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책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과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철학 등 인문·사회과학을 섭렵하고 각 학문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핵심 줄기를 잡는다.
그리고 자연과학자와 인문·사회과학자의 대립, 마음과 몸의 이분법, 유물론자와 유신론자의 적대 등 학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주요 벽들을 살펴본다.
과학의 이름아래 학문을 통합하라 | 한국일보 책과세상 김범수기자 | 2005-04-30 |
‘과학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류가 뽑아든 마지막 검이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76)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어조는 시종일관 단호하다. 하기야 근대 이후 자연과학이 인류사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한다면 그의 자신감은 충분히 이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98년 ‘consilience’라는 제목으로 나온 이 책 ‘통섭(統攝ㆍ큰 줄기를 잡다)’에서 그의 시계(視界)는 단순히 과학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과학이 주도해 모든 학문의 통합이 가능할 것이라는 ‘그랜드 플랜’을 제시하고, 그 가능성을 대학생 수준 이상의 교양인에게 이해시키겠다는 훨씬 대담한 의욕을 내고 있다.
그런데 왜 ‘통섭’인가. 윌슨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산림 보존 정책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정부가 있다고 하자. 하지만 정책 합의를 이끌어 낼만한 윤리 지침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나마 있는 몇 가지는 생태학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적합한 과학 지식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숲의 장기적인 가치를 파악하기 위한 기초 지식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을 따지는 경제학도 유치한 수준이며, 생태계가 주는 심리적인 이점은 고려 대상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영역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환경정책’ ‘사회과학’ ‘윤리학’ ‘생물학’은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 전문가, 언어, 분석 양식 그리고 타당성 기준 등도 의심할 여지없이 따로따로 확립되어 있다. 그 결과는 ‘혼란’이다. 현실의 문제는 이 네 영역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겨나는데, 근본적인 분석이 필요한 그곳의 지도(地圖)가 없을 뿐더러 우리를 인도해 줄 개념과 단어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통된 추상 원리와 경험 증거를 가질 수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연과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통섭’ 작업이 최소한 ‘물질세계’에서 만큼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답게 그는 생물학은 물론이고, 물리학 화학 수학 등 기초과학과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철학 윤리학 종교학 같은 인문ㆍ사회과학을 두루 섭렵해 분과 학문들을 가로막는 벽, 자연과학자와 인문ㆍ사회과학자의 대립, 몸과 마음의 이분법, 본성과 양육의 대립 등의 적대를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데리다 같은 철학자를 ‘현란한 몽매주의자’라고 비판하며 시종일관 경험법칙에 의거한 학문의 통합을 강조하는 그는 사회과학이 결국 소멸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과학은 이미 세분화 과정을 계속하여 궁극에는 상당 부분 생물학과 연계되거나 큰 의미의 인문학으로 흡수될 것이다.’ ‘사회생물학’부터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까지 그의 책은 이미 국내에 여러 권 번역 소개됐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 가장 현란한 지적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탄생 100주년인 올해는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출간된지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양식도 생물학적, 유전적 진화과정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은 윌슨의 저서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사회생물학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에서 동물의 일종으로 끌어내려 진정한 이해를 도왔다는 찬사와 함께, 인간 본성을 유전자로 설명하는 환원주의라는 공격도 받았다.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와 조지 윌리엄스 등이 대표적인 사회생물학자인 반면, 윌슨과 같이 하버드대 교수로 있던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은 윌슨-도킨스 진영에 맞서 맹렬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의식이 ‘분자 수준’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는가. 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통섭(統攝)’은 ‘사회생물학’ 이후 윌슨의 학문적 업적을 총괄하는 저술이다. 5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저자는 자연과학-사회과학-인문학을 넘나들며 방대한 학식을 드러내 보인다. ‘통섭’(Consilience)이란 영어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함께 넘나듦’이라는 의미이지만 저자는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과 이론들을 연결해 지식을 통합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전문지식이 파편화돼버렸음을 질타하며 학문 간 벽을 깨는 방법으로 ‘통섭’을 제안한다. 분자 수준의 미시구조에서 범우주적인 통찰,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인식까지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통섭을 통해 ‘하나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 해서 ‘진리를 향한 총체적 방법론’이 손에 잡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책은 윌슨이 30년간 벌여온 ‘신비주의자들과의 싸움’을 총결산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재미있다. 한 구절로 책을 정리하면 ‘환원주의 비판에 대한 재비판’이다. 문장은 매끄럽지만 내용은 도발적이다. 계몽주의의 후계자로서 윌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고 다문화주의와 상대주의를 논박하며 환원주의를 ‘인간의 본능’으로 격상시킨다. “뇌의 메커니즘을 알게 되면 인간 세상도 더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환원주의가 왜 나쁜가”. 윌슨이 누차 강조하는 것은 인류의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는 함께 진행되어왔다고 하는 ‘유전자·문화 공진화(co-evolution) 이론’이다.
학문간 벽을 깨고 자연과학의 성과를 인문학과 사회과학 쪽에서도 받아들일 필요는 분명히 있다. 문제는 윌슨이 주장하는 방식이 여전히 ‘환원주의적 통섭’이라는 것. 그는 “철학은 이제 과학이 되어라”라고 선언하지만, 뇌과학자들조차도 ‘마음’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 윌슨처럼 환원주의를 신봉하지는 않는다.
뇌과학의 최근 성과와 진화론의 여러 가설, 예술과 종교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어 책은 굉장히 재미있다. 한가지 꼭 언급할 것은 윌슨의 제자이기도 한 최재천 교수의 훌륭한 번역. 누구나 과학자가 될 수는 없고 에드워드 윌슨을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지만,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옮긴이 서문은 꼭 읽어보시길. 유려한 문장에 깊은 이해와 고민이 담겨 있어 그 자체로도 하나의 훌륭한 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