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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불교
미주한국불교계 발전을 위해 헌신한
남가주한국 불교계의 대모 김소연 약사
글 제니 김(본지 취재 기자)
미국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뛰어난 역량을 가진 여성 불교인이 많다는 것이다. 비구니로 모범을 보이는 사람도 많고, 여성불교학자와 법사, 명상지도자 중에도 여성이 아주 많다. 미주한국불교계에도 동부, 중부, 서부 등 전지역에 훌륭한 여성 신자들이 있다. 미주현대불교에서는 그동안 미국의 주류사회 여성불교인들을 많이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로스 엔젤레스에서 불교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김소연 약사를 소개한다. 김 약사는 미얀마를 비롯하여 미국 내 여러 명상센터를 다니면서 수행을 배웠고, 집에서도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4월 6일 켈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 법보선원(선원장 덕일스님)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소연 약사는 미주현대불교에 1990년대 초반에는 많은 글을 투고도 하고, 때로는 취재도 해주었다. 미주현대불교 로스 엔젤레스 후원회원으로 보시를 비롯하여 많은 구독자들을 소개하였다. 매년 꾸준하게 후원하면서도 한번에 1만달러 등을 수 차례 보시하여 미주현대불교에 재정적으로도 큰 도움을 주었다. 미주현대불교 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와 사찰에도 재정 후원을 많이 하였고 장학사업도 하였다.
- 편집자 주 -
기 자 김소연 약사님, 인터뷰에 응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어떤 계기로 불교에 들어서게 되셨는지요?
김소연 약사 제게는 가슴에 묻은 딸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 오게 된 것은 1971년으로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유학생으로 동부의 워싱턴 디시 (Washington D.C)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같은 유학생인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은행에서 직장생활을 하였지요. 그러던 중에 여섯 살된 딸을 잃게 되었는데, 당시 제가 다니던 대학의 교수님이었던 스리랑카 스님께 종교의식에 대해 여쭈어 보기도하며, 딸 장례식을 한국불교식으로 치루었습니다. 전남편이 부전공으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어서 곁눈질로 불교철학에 대해 잠깐 접하게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잊고 지내고 있었어요.
기 자 본인이 기억하는 불자로서의 신행생활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시나요?
김소연 약사 제가 기억하기로는 1998년경일 겁니다. 엘에이로 옮겨와서도 책으로만 알던 불교였는데, 당시 엘에이 크렌쇼거리에 위치한 대각사의 주지스님인 진각스님께서 금강통신불교대학의 석사과정을 소개하셨어요. 당시 한정섭법사 (나중 활안스님)와 함께 2년 반의 불교기본과정과 법사과정을 이수하고 졸업논문으로 ‘미주 남가주 불교현황’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때 남가주에서 운영되고 있는 한국사찰, 베트남사찰, 티벳명상센터등 여러 사찰을 탐방하면서, 그곳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과 여러 선사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기 자 그동안 여러 단체에서 수행을 하신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수행단체에서 수행을 했으며, 어떤 프로그램 이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소연 약사 그동안 여러 수행단체에서 기회와 인연을 따라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습니다. 금강통신불교대학에서 법사과정을 공부하던 중에 정토회의 법륜스님이 당시 원명법사 (나중에 혜봉으로 개명)와 필란(Phelan)에서 ‘소리명상’으로 5박6일 집중명상을 진행하신 일이 있었어요. ‘자비진언’과 ‘준제진언’등을 하는 중에, 전생과 희열을 체험하는등 매우 강력한 수행체험을 한 경험이 있었지요. 그때 함께한 도반들과 지금도 계속 법우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계속하여, 선지식이 있는 수행센터를 찾아 다녔는데, 샴발라 티벳 명상센터, 틱낫한 스님이 이끄신 ‘녹야원’ (Deer Park Monastery in Escondido, California), 엘에이 달마 젠 센터, 미얀마 쉐오민과 참마 수행센터, 그리고 고엥카 위파사나 명상센터 (죠수아 트리 국립공원내)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습니다.
기 자 본인에게는 어떤 수행방법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소연 약사 ‘진언명상’을 통한 강력한 체험이후, 1999년경 재가불자인 신철순 거사를 초대회장으로 정하고 달마법우회를 조직하여 매달 스님과 법사님들을 모시고 법문이나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김무신(혜광)법사를 통해 ‘위파사나 ‘ 명상을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들을수록 자신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012년경에 미얀마에서 한달간 머물면서 2주간씩 쉐오민과 참매 수행센터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지요. 참매선원에서 ‘걷기 명상’을 주로 하는데, 삼매와 선정체험을 하면서 매우 만족스런 수행경험을 하였습니다. 또한 법사과정 공부를 하던 중에, 당시 West Los Angeles의 La Cienega 거리에 있었던 샴발라 센터에서 ‘시각화 (Visualization)과
통렌명상 (자비명상)’ 을 배우면서 <보리도차제론>과 함께 공부한 것이 제게는 불교의 기초부터 제대로 입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기 자 그렇다면 남가주에는 언제 오시었으며, 어떻게 본래 전공인 약사로서 다시 복귀하시게 되었는지요?
김소연 약사 이혼후에 한 친구가 남가주에 있어서 1980년경에 오게 되었어요. 당시 엘에이카운티에 있는 사회복지과에서 공무원시험을 통해 직원을 뽑았는데, 거기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인터뷰를 통과하여 사회복지요원 자격자로 일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에 친구가 약사시험 공부가 있다는 정보를 주었어요. 동부에서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지요. 준비하여 1996년에 약사시험에 응시하고 합격한 후 약사로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기 자 그러시군요. 그동안 엘에이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미주한인불자사회에서도 ‘윌턴약국’하면 멀리서도 찾아가는 친절한 약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그 약국을 알게 되었으며, 약국의 주인으로 그리고 그 약국에서 은퇴하기까지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김소연 약사 약사 면허를 얻은후에 다른 곳에서 경험을 쌓다가 윌턴 약국에서 메네지먼트를 맡고 있었어요. 사장님이 약국을 인수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도 하시구요. 아직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는데, 가족과 이강준 법사(작고)의 도움으로 2000년에 인수를 하게 되었지요. ‘호사다마’라 했던가요? 인수한지 몇 년 되지 않아 2004년에 담낭암 진단과 함께 수술을 받게 되었어요. 운영을 계속해야하나, 팔아야하나? 많은 고민을 하던 끝에 운영을 계속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대안으로 약사를 고용하여 한 주에 3일간 출근하기로 하고요. 그렇게 22년간 운영하다가 2022년에 적임자가 나타나 매각을 하였습니다. 은퇴후에는 주에 1일씩 나가서 근무를 하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쉬고 있습니다.
기 자 불교에 입문하신 후, 엘에이 달마 젠센터(Dharma Zen Center in Los Angeles), 달마사와 태고사 회주이신 당시 숭산 행원 큰스님과도 인연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숭산 큰 스님과의 일화가 있다면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김소연 약사 2000년대 초 일겁니다. 당시 숭산 큰스님께서 달마 젠 센터에 방문와서 계실 때인데, 마침 제가 한인타운에 가까이 살고 있어서, 한달 동안 아침 5시에 젠센터를 찾아가 큰스님을 독대하였습니다. ‘이뭣고’ 화두 참선의 가르침을 받으며, 10개의 화두를 타파하였습니다. 마지막 화두를 풀어내자, 큰스님께서는 “이놈 봐라! 큰 물건이 될 놈이네!”하시며, 제게 “스님이 되라!”며, 손수 윗옷 고름까지 매주시며 가사를 입혀 주셨습니다. 그 때 얼마나 황송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그 후 한국으로 들어가 여러 사찰들을 방문하여, 스님들의 일상생활을 관찰하며 지냈습니다. 과연 ‘나 자신이 스님이 될 자질이 있는지’ 점검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3가지 관점에서 고찰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들어온 보시금을 보지 않은채, 곧바로 다른이에게 줄 수 있는지 (당시 성철스님은 그렇게 하신다는 일화를 들었읍니다). 둘째로, 보시자의 보시금액에 따라 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셋째로, 비구니로 사찰을 운영할 경우, 어느 거사가 사심없이 도움을 주며 접근을 했을 때, 이성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대답은 ‘아니다!’로 나왔습니다.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재가자로서 불교계의 발전을 위해 돈을 벌어 보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기 자 이사장님께서는 남가주지역의 불교단체 또는 수행단체에 많은 보시를 하신 큰손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보람이 있었던 단체와 아쉬움이 남은 단체가 있다면 간략히 소개바랍니다.
김소연 약사 저는 출가대신 재가자로서 보시하기로 마음 먹은 후 어디든지 인연 닿은 곳은 보시를 하였습니다. 남가주의 여러 한국사찰들과 타민족 명상센터, 틱낫한 스님의 수행센터, 정토회, 엘에이 불교방송, 미주현대불교등 불교를 포교하는 곳은 가능한 마음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1994년에 시작된 미주한미불교방송에 매년 1만불이상씩 보시를 하였으나 운영상의 어려움이 계속되어 결실을 보지 못하고 2009년에 운영권을 넘긴 것입니다.
기 자 김소연이사장님께서는 이민1세로서 삶의 굴곡도 겪으시고, 생사의 고비를 눈앞에둔 암진단도 받으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어떤 수행법으로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요?
김소연 약사 제가 2011년부터 박재욱법사와 함께 약 4년간 엘에이 나란타 불교아카데미에서 ‘불교입문과 치유명상’을 강의하였어요.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동안 꾸준히 치유명상을 해왔던 덕분이었지요.
2004년, 담낭암 진단을 받았는데, 당시 의사는 3년내에 죽을 확률이 95퍼센트라는 절망적인 선고를 내렸어요. 또한 병원 측은 항암치료(Chemotherapy)를 권고했지만 저는 키모테라피로 몸의 기력이 소진되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암수술후에 그동안 배웠던 관상법(샴발라센터에서 배운 시각화)으로 치유하리라 마음먹고 관세음보살이 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고 계시다는 상상을 하면서 가만히 깊게 호흡을 하며, 통렌명상(티벳불교 주고받기 자비명상)을 하기도 했지요. 또 치유된 모습을 강력하게 시각화 하는데, 산타모니카 마운틴의 윌 로저스주립공원(Will Rogers State Park)에서 바다가 보이는 햇살 비치는 곳 (view Point)을 찾아가 양손바닥을 하늘 향해 펴고 걸으며 태양의 밝은 에너지가 양손바닥과 정수리를 통해 내 몸안에 들어와 그 빛으
로 몸의 암덩어리 세포들을 쪼아서 사라지게 하고, 좋은 기운으로 채우고 있다는 시각화를 하여, 내 몸의 세포들은 살아나고 있음을 느끼는 명상을 했어요. 매일 반복하다보니 저의 마음이 평화 롭고 긴장감에서 해방됨을 느꼈지요.
기 자 평상시에 일상적으로 하는 수행방법이 있다면?
김소연 약사 일상에서는 호흡관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상황에 따라 시각화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일이 수행아닌 것이 없으나, 요즈음에 큰 일이 주어지다 보니 기도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보살님의 가피가 간절하게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또한 매주 목요일마다 5마일 이상 걷는 산행을 하는데, ‘걷기 명상’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기 자 현재 덕일 스님을 모시고 법보선원을 인수하는데, 이사장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취임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미주한인불교사회에 법보선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셨습니다. 새 선원장이신 덕일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소연 약사 덕일스님과의 인연은 엘에이 고려사에 다닐 때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당시 현호회주 스님께서 장학기금을 조성하여 불자가정의 학생들에게 소액의 장학금을 매년 전달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수여금 을 받 을 학 생 들 의 의 견 을 들 어 본 결 과 $1,000~$2,000의 소액은 크게 인기를 얻지 못하여, 불교공부를 하는 재가자나 스님들께 공부를 마칠때까지 꾸준히 지원하는 금액과 수상자를 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장학금 기금은 11만불을 분리계정으로 관리하고, 운영비는 별도로 고려사에 보시하기로 하였습니다. 매년 $10,000~ $15,000씩 2018년부터 지불하고 있는데, 1달에 1회 달마법우회에 법문을 하는 조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덕일스
님을 찾게된 것은 미주현대불교 발행인에게 부탁을 하여, UCLA에서 불교학박사과정에 있는 덕일스님의 연락처를 알게되고 첫 모임을 가진후 후원을 하기로 결정하였지요. 이후 고려사에서는 더 이상 달마법우회 모임을 하지 못하고, 달마사로 2019-20년부터 옮겨서 법회모임을 하다가 코비드-19판데믹 기간에는 인근 공원에서 법회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기 자 필자도 초대 회장인 신철순거사님을 모시고 초대 총무를 하며 달마법우회에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25여년 동안 매달 스님과 법사님들을 모시고 법회와 강의를 꾸준히 이어가는 재가 불자모임은 미주불교 신행단체로서는 매우 희유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덕일스님과의 인연이 결실을 맺어 법보선원을 인수하고 선원장으로 취임을 하시기까지 이사장님의 수고가 많으셨는 줄 앎니다. 그 결실인 법보선원을 인수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소연 약사 그동안에는 여러 법사님들을 모셨다면, 덕일스님을 지도법사로 모시면서부터는 스님의 법문을 계속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의 5-6년가량 고려사, 달마사, 그리피스 팍, UCLA 잔디밭에서…코비드-19 판데믹의 영향도 있었지만,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야외에서 계속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2022년 여름부터 엘에이에 있는 저의 개인집에서 매월 법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차에 젊은이들을 모임에 초청해서 활성화를 모색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와 엘에이의 한 식당에서 몇몇 법우들과 덕일스님이 초대되었는데, 그 자리에 마침 정정달 법사님도 오시게 되었습니다. 아마 작년 (2023) 7월경 이었지요. 그 자리에서 정정달 법사님은 “은퇴를 하고 싶은데 마땅한 후임자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라는 말씀과 함께, 여러가지 관련된 현실적 문제를 언급하시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인수 문제가 거론되고, 정정달 법사께서는 덕일스님의 인
품에 반했다고 하시며,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며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이사진을 꾸려 법적인 절차와 재정확보, 건물 개축등 실질적 문제들을 논의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기 자 앞으로 미주여성불교인으로서 미주불교활성화를 위한 계획과 비전이 있으시다면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김소연 약사 덕일스님께서 취임사에서 밝히신 것처럼, 새로운 프로그램을 펼치는데, 적극 지원할 생각입니다. 기존 사찰 운영방식 보다는 회원제를 도입하여, 경조사나 주제별 명상/요가/기체조/자살방지 프로그램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에게 할인을 해 주며, 선원의 운영은 재가자회원들의 적극참여로 운영하고, 선원장께서는 프로그램 계발, 법문, 경전공부, 학술연구등 불교포교에 전념하실수 있도록 이원화 할 것입니다. 재정문제로 인해 고민하실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기본 방침입니다. 미주불교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령화시대로 연세많은 불자들이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선원에 나오기가 힘든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패밀리 데이’같은 전가족이 참여하는 날을 만들어 가족끼리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날을 정하려 합니다. 젊은세대와 타민족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생활불교등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혜택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실행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로, ‘걷기명상’은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공원이나 바닷가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선원을 방문할 경우에도 할 수 있도록 정원을 꾸밀 것입니다. 구상중인 프로그램들은 인연에 따라 변화는 것이라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구체적인 것은 없지만, 여건이 만들어지면 하나씩 도입해 보고 싶습니다.
법보선원의 운영방침은 “맑고 밝은 단순한 선원” 에서 흔들림 없는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법우님들을 돕는 것입니다.
기 자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새 선원장을 맞이한 법보선원에 무량한 부처님 광명과 가피가 함께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일시 : 2024.04.08
장소 : 김소연 약사 자택 (미소당), 엘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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