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윤공(判尹公)이후 후손(後孫)의 번창(繁昌)- (8)
○ 이진택(李鎭宅)
그러나 막내였던 이진택(李鎭宅)이 1780년 문과에 합격하고
지평(持平)·장령(掌令) 등의 요직을 지내고
정약용(丁若鏞)· 채홍원(蔡弘遠)등 당대의 석학(碩學- 학식이 많고 깊은 사람)들과
교유(交遊- 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하는 과정에서
경주 이씨의 문격(文格- 文章의 품격. 문반으로의 높아진 위치)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특히 덕봉공(德峰公)은 말년에 조상 대대의 터전인 방어리(方於里)를 떠나
소정(蘇亭)으로 이주함으로써 경주 이씨 소정 입향조(蘇亭入鄕祖)가 되었다.
덕봉공(德峰公. 휘 진택)은 정조(正祖)∼순조(純祖)년간에 활동한 인물인 만큼
가계(家系)의 연륜이 깊지 못하여
그의 종가(宗家)에 소장(所藏)된 고문서(古文書)의 시기적 상황 역시
18세기 중반을 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학풍이 있는 문반 집안으로 오래된 집안이 아니라서
소장한 고문서들이 시기적으로 오래된 책과 문서가 아니다라는 뜻.)
이진택(李鎭宅)의 자는 양중(養重)이고 호는 덕봉(德峰)으로
1738년(영조14) 경주 방어리(慶州方於里)에서 이운배(李雲培)의 5자로 태어났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15세손이며
조선초(朝鮮初) 정란(靖亂)을 피해 경주 구량리(慶州九良里)로 낙남(落南)한
판윤(判尹) 이지대(李之帶)의 11세손이다.
그는 어려서 이진원(李晉遠. 南厓. 1721∼178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경사(經史-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읽으면 곧 외워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이진원(李晉遠)은 영남의 명유(名儒-이름난 유학자)
이현일(李玄逸. 葛菴)의 증손으로
원래 영해(寧海) 출신이었으나 당시 경주 건천(乾川)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다.
이진원과의 사승(師承- 스승에게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배워서 이어받음)관계를 고려 할 때
이진택은 영남 학통(嶺南學統) 중에서도
이황(李滉. 退溪)→ 김성일(金誠一. 鶴峯)→ 장흥효(張興孝. 敬堂)→
이현일(李玄逸. 葛菴)→ 이재(李載. 密菴)로 이어지는
학봉 계열(學峯系列)의 학통(學統)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진택은 43세 되던 1780년(정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합격하여
승무원부정사,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790년(정조 14)에는 정조(正祖)의 특지(特旨- 임금의 특별한 명령)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1792년에는 *임오의리(壬午義理)를 밝히기 위해
기획·추진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義理疎)에 적극 가담하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가
*임오화변(壬午禍變)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부관 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벰)를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경세론(經世論- 정치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론)에도 조예가 깊어
1793년 대간(臺諫- 간언을 관장하던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재직할 때는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사노비 혁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개혁적인 사상가(思想家)이기도 했다.
1801년(순조 1)에 단행된 공노비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사실상 그의 노력에 바탕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진택(李鎭宅)은 뛰어난 학식, 탁월한 견해
그리고 정조(正祖)의 신임의 바탕으로 중진 관료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관운(官運)이 없어 고관(高官)에 오르지는 못했다.
도리어 정조가 사망하고 노론 집권이 강하되면서
1802년(순조 2)에는 서유방(徐有防)을 두둔하고
이가환(李家煥)에 탁적(託迹- 어떤 일에 몸을 맡김)했으며
정약용(丁若鏞)과 비밀리에 통했다는 이유로
*삼수갑산(三水甲山)에 유배(流配)되었으며
2년 뒤에 해배(解配- 귀양이 풀림)되었으나
그 이듬해인 1805년(순조 5) 68세를 일기로 생(生)을 마감하였다.
교유(交遊)의 범위가 넓었던 그는 채제공(蔡濟恭). 정약용(丁若鏞). 이가환(李家煥).
남경희(南景羲). 이수인(李守仁). 최벽(崔壁). 이정규(李鼎揆). 이정덕(李鼎德).
김한동(金翰東). 신대현(申大顯). 성언집(成彦輯-車대신木). 이인행(李仁行).
채홍원(蔡弘遠). 유규(柳삼수변+奎). 이집두(李集斗). 김희주(金熙周) 등
근기(近畿- 경기지방), 영남(嶺南)의 명사(名士)들과 두루 교유(交遊)하였다.
뒷날 고종(高宗) 연간에 영남 유생(嶺南儒生)들의 노력 속에
1899년(광무 3)년에 비서승(秘書丞)에 추증(追贈)되었다.
묘갈(墓碣)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유승(李裕承)이 찬(撰)했고
묘지(墓誌)는 서상조(徐相祖)가 지었다.
이처럼 이진택은 자신의 직계(26세 몽성 계대)로는
익재공(휘 제현) 이후 최초(最初)의 문과(文科) 합격자로서
당대에 이미 가문의 격을 한층 높여 놓았음을 물론
향후 그의 후손들이 경주 또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주요 가문(家門)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진택(李鎭宅)이후 소정(蘇亭)의 경주 이씨들이 무반가(武班家)의 면모를 일신하고
생원 · 진사시를 통해 학행(學行)을 지닌 선비를 다수 배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 의해 마련된 문한적(文翰的) 기반에 바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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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의리(壬午義理)
-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되다시피 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임오의리(임오화변) 문제를 제기하여 하였는데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신원(伸寃)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討逆]를 취해서
새로운 의리[壬午義理]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義理疎)
- 1792년(정조 16)에 유학 이우를 소두(疏頭)로 한 영남유생 1만 57명이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해 역적을 토벌하자고 주장한 상소이다.
*임오화변(壬午禍變)-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한 내용.
*시노비혁파(私奴婢革罷)
- 1793년 그가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사노혁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삼수갑산(三水甲山)-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한 산골이라 이르던 삼수와 갑산.
함경남도에 있는 오지로 매우 춥고 교통도 불편한 지역이다.
옛날부터 중죄인들을 이곳으로 귀양 보냈기 때문에,
이곳은 한 번 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힘든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자기 일신상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어떤 일에 임하려고 할 때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이다.
山水甲山이 아니고 三水甲山이다.
조선 시대에 귀양지의 하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