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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전주에서 발견된 푸른색 표지의(청장가승의) 족보는 현존하는 咸李의 최초의 족보다.
족보사실록에서 언급한 함풍이씨 문중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인 청장가승(푸른색 표지의 족보) 원본이 작년11월에 발견되어 그 내용을 확인한바 푸른색 겉표지에 한자로 ‘함풍이씨족보’ 라고 쓰였고 시조는 이광봉이라 적혔다. 그러므로 함풍이씨나 함평이씨의 모두 족손들은 본관이 함풍이씨이고 시조는 이광봉祖임이 확실해졌다.
족보사실록을 내가 14년 전인 2009년 6월 15일에 국역(번역)을 마치고 책으로 발간했었다. 그 당시 이사직祖가 사실록에서 언급 하시기를 푸른색 표지의 청장가승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송림소첩과 같이 세계(世系)가 처음에(1世) 부원군(光逢)을 기록한 것과 같이 청장가승에도 처음에(1世) 부원군을 기록한 것과 똑같이 만들어졌다고 적었다. 대개 족보(족보, 가승, 가첩)는 갈색이나 흙색의 표지가 일반적인데 표지가 푸른색이라 해서 국역할 당시 많은 의문을 갖게 했었는데
이 청장가승 원본이 작년 11월 전주에서 발견되어 내가 미국 시카고에 머물 때 사무총장 광범 종친이 전송해준 사진 확인한바 이사직祖의 말씀대로 푸른색 표지의 가승(일명 청장가승)이었다. 2023년 2월 2일 귀국해서 이창범 회장님이 주선하셔서 2월 24일 오후 5시에 이창범 회장님, 이정수 수석부회장님, 이광범 사무총장님, 이길현 총무부장님과 일산 모 음식점에서 만나 새해 인사 겸 반주를 하며 담소하는 과정에서 이 귀한 청장가승 복사본 1부를 기증 받았다.
이 청장가승을 집에서 내용을 확인해 보니 오래된 족보라 얼룩지고 글자도 선명치 못했지만 읽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내용 겉표지에는 함풍이씨 족보라 한자로 크게 썼다. 다시 첫 장에 함풍이씨족보(咸豊李氏族譜)라 중간 크기로 쓰고 그 아래 방주(旁(傍)註: 주석)에 기록하기를 함풍이란 지금의 함평을 말하는데 함평은 함풍과 모평이 합하여 함평이 되었다.(咸豊卽今咸平盖合咸豊牟平二縣爲咸平) 라고 적어 함풍이란 지명은 지금의 함평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 함평은 조선조 태종(이방원) 때 함풍과 모평을 합하여 함평이라 하였음.)
이어서 기록하기를 옛날에 족보가 있었는데 이춘령祖가 전라도사가 되었을 때 빌려가서 반납이 되지 않았다.(古有族譜李春齡爲全羅都事時借去未推)라고 기록했다. 1587년 정해년에 죽곡대부(李長榮)가 양양부사로 있을 때 세계(世系:족보를 말함)를 응망집에서 베껴서 나왔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또한 이일은 대단히 오래된 일이다.(丁亥年間竹谷大父爲襄陽府使時世系謄書於應望家而未爲完備大是久事) 라고 기록 되었다. 이 내용은 이 청장가승이 옛날 족보와 똑 같다는 의미다.
응망(應望)祖는 춘령(春齡)祖의 아들로서 영광의 죽곡대부가 양양부사시절 양양의 응망 집에서 족보를 베껴 나왔고 이 족보를 누군가 다시 베껴 작성한 것이 바로 이사직祖가 말하는 이 청장가승이다. 이 청장가승도 죽곡대부가 베껴 쓴 족보같이 똑같이 미완의 족보다. 내가 확인한바 이춘령 전라도사가 첫 페이지(쪽) 이면에 양양거성족세계(襄陽居姓族世系)라 쓰고 浩 -吉元 -守誠 -蕃 -春齡 -應望 -.....등으로 기록한 걸 보면 이 족보를 양양 이춘령祖가 작성하고 아들인 응망이 보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계도는 蕃자祖 이하 양양필선공파 가계도로서 즉 1500년대에 함풍이씨 종손가인 필선공파가 이 원 족부를 보관한 것이다. 다시 이 원 족보를 당시 양양부사로 계시던 영광의 죽곡대부 이장영祖가 그대로 베꼈었다. 이 족보를 후에 어느 족손이 그대로 베껴 청장가승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방주에 이 내력을 소상히 기록했다. 이를 통해서 이 청장가승(족보)이 이춘령祖의 족보와 똑 같음을 알 수 있다. (*족보의 등서(謄書:베끼는 것)는 오자 탈자 없이 원본과 똑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咸李 족손들은 본관이 함풍이씨이고 시조는 부원군 이광봉祖가 확실해졌음을 이 청장가승으로 증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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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록에서 언급한 소위 청장가승에 기재된 ‘시조 이광봉’ 의 방주가 한자로 표기되어 현대인들이 읽기가 어려워 내가 그 방주를 국역(번역)하여 모든 족손들이 우리들의 할아버지의 기록을 이해토록 아래와 같이 게재하니 참고 바랍니다. 이전의 시조 광봉祖의 방주(傍註)와 무엇이 다른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청장가승의 세로형태의 한자로 써진 기록을 가로형태로 변형하여 기재합니다.
始祖 李光逢 :
忠肅王庚寅以上護軍如元賀改元丁巳爲平理壬午夏四月爲三司使終爲開國功臣封府院君
. 前朝大匡輔國崇祿大夫開國佐命功臣咸豊府院君
. 忠肅王夏四月爲三司使
. 聚西海道觀察使羅文奎之女卽大匡輔國一等功臣府院君宗禮十二代孫也本羅州
시조 이광봉 :
충숙왕 경인년에 상호군직책으로 원나라와 같이 元나라가 됨을 축하하고 정사년에 평리가 되고 임오년4월에 삼사사가 되어 종래는 개국공신 부원군에 봉해졌다.
. 고려조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 개국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이 되시고
. 충숙왕조 여름4월에 삼사사가 되시고
. 서해도 관찰사 나문규의 딸과 혼인한 즉 나문규는 대광보국1등공신부원군 나종례의 12대손으로 본관은 나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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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시조부군, 연, 안저, 안상 할아버님 시제는 매년 춘3월 첫 번째 술(戌)자가 들어간 날에 시제를 지낸다고 족보에 적혀 있고요 양력으로 4월경인데요. (예시 ; 甲戌, 庚戌, 壬戌 등 戌자가 들어간 3월 달 첫 번째 술(戌)일)
올해부터는 춘3월 첫 토요일인 25일에 시제를 모신답니다.
옛날에는 이곳이 영풍면 백천동이고 산 이름은 곤봉산 아래라고 하네요. 참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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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평이씨 초보가 숙종 1688년 무진년에 처음 무진보를 만들 때 청장가승이 누출되지 않아 광봉의 방주가 누락되었다. 그러나 무진보는 홍성본과 부안본이 있는데 부안본에 누락된 함풍부원군의 방주를 함풍부원군 광봉조의 지각 있는 후손들이 방주에 기록하여 홍성본을 만들었다. 그러나 홍성본에는 이광봉 방주에 충숙왕 11년에 삼사사 좌명공신 함풍부원군 할머니는 서해도관찰사 문규의 딸이다. 라고만 기록되었다. 청장가승에서와 같은 자세한 기록은 없고 선대에서 전하는 말을 그대로 방주에 기록했다.
* 청장가승이 아닌 나주 송림파의 소첩가승이 있는데 이 소첩가승에 인좌(仁佐)에 이르러 형제가 7人 이라 기록되었다. 이것을 확인한 분이 이사직祖인데 이 소첩가승은 후에 분실되었다. 소첩가승을 작성한 분이 죽곡대부(李長榮) 조카 되시는 린(璘; 조영(兆榮)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시다. 아마도 경파에서 이 소첩가승을 인좌 7형제를 인정하지 않아 수거하여 없애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1807년에 경파는 포고령을 내려 전국의 족보를 수거하였었다.
위 기록으로 보아 전주에서 발견된 청장가승은 1688년 무진보가 작성 될 때 까지 누출되지 않은 이 청장가승이 최초의 족보가 맞는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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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조 1742년 임술년에 임술보 만들 때 처음으로 광봉祖의 방주가 기록되었는데 첫줄에 ‘중간세계가 실전(失傳)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고려 충선왕조에서 상호군 동지밀직사사 충숙왕조에서 삼사사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이 되셨다고 적었다. 그 다음에 배(配)를 부인(夫人)으로 표기하고 부인은 금성나씨인데 묘소는 금성산 아래에서 실전되었다. 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황당한 기록은 “무진보에서 시조(이언)에 이르게 상계(上系:계통을 올리다)치 못한 것을 임술보에서 4대(언-화-상문-순지)의 연계가 함께 누락된 것을 살피고 신중하게 보체를 갖춰 경향제종의 합의아래 다시 (임술보에) 기록한다.” 라고 적었다. 즉 광봉祖의 상계는 이순지-이상문-이화-이언이다.
여기에서도 청장가승의 광봉祖의 상세한 방주는 기록되지 못한 것을 봐도 청장가승은 1742년에도 누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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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조 1807년 정묘년에 정묘보를 만들 때 처음으로 광봉祖 방주에 벽상 삼한삼중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이라 기록하고 배(配)는 금성나씨 밀직부사 영걸(英傑)의 딸이라 기록했다.
이것을 봐도 청장가승에 ‘부원군 광봉祖의 배위는 문규의 딸이다.’ 라고 기록되었는데 1807년도 까지 청장가승이 누출되지 않고
2022년 11월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 확실하다.
내가 무진보, 임술보, 정묘보를 증거 하여 청장가승이 함이(咸李) 최초의 족보임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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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본에는 없고 홍성본에서 무진보 孫秀 방주에 기록하기를 咸平宗人草譜則仁問以(光逢)爲先代以孫秀爲子而無蘘三言二代遍考他譜之編錄且從諸宗之考證以此修正焉이라 했다. 국역(번역)하면 ‘함평 종친들의 처음족보에 보면 인문(仁問: 淑의 아들 7형제 중 한분)은 광봉으로 선대를 삼고 손수를 아들로 삼았으나 양(蘘:부르는 이름)과 삼언(三言:부르는 이름) 2대가 없어서 다른 족보의 기록을 참고하고 모든 종친들의 고증과 의견을 쫓아서 이와 같이 수정한다.’ 라고 썼다.
이는 부안본에는 광봉祖의 함자만 기록하고 홍성본은 광봉을 기재하고 방주를 기록했다 그리고 인문(仁問: 숙(淑) 祖의 아들7형제 중 한분)의 아들이 양(蘘)이고 손자가 삼언(三言)이고 증손이 손수(孫秀)인데 이 손수의 방주에 기록된 인문은 광봉으로 선대를 삼았다는 내용에서 光자逢자를 누군가 지워버렸다. 경파들이 삭거한 것 같다.
1600년대 후반에 무진보 만들 때 경파와 향파간에 다툼이 심한 것을 무진보에서도 발견된다.
이즈음 청장가승이 나타났다면 바로 불태워 없어졌을 것이다.
청장가승을 누출하지 않고 보관 관리해주신 죽음공 장손가 선조님에게 감사드리고 현재 관리하시는 문엽 봉진 종친에게도 고맙다는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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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험난한 왕권다툼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발휘하신 시조부군의 인생승리를 배웁시다.
시조부군의 시제를 공지하고 민성종친이 손수 시조묘역의 잡초를 제거하는 등 시조할아버님을 존경하시는 후손들로서 시조부군의 삶의 시기인 그 당시 고려왕조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아시는 것도 시조 광봉 할아버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몇 자 적어봅니다.
고려는 초대 왕건이 서기914년에 즉위하고 34대 공양왕 1392년에 멸망함으로서 통치기간은 475년간이었다. 고려왕들은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까지 역대 왕 34명중 절반 이상이(18명) 쫓겨났다. 조선은 두 차례의 정난과 반정으로 태조(이성계), 정종(이성계 장남), 단종, 연산군, 광해군 모두 4명이 왕위에서 쫓겨났다. 쫓겨난 왕을 비교하면 고려는 18명인데 조선은 5명이다. 고려가 그만큼 왕권이 불안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이유는 몽골족인 원나라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고 무신정권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우리들의 시조이신 함풍부원군 이광봉祖가 생존하던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시대 고려의 왕권은 어떠했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우선 고려왕조는 적자(장남)계승이 드물었다.
1대 왕건과 2혜종 3정종 4광종은 형제지간이고, 5경종과 6성종은 사촌지간이고, 7목종은 당숙인 8현종에게 양위하고, 9덕종, 10정종, 11문종도 형제지간이다. 그리고 12순종, 13선종, 14숙종도 형제지간이고, 18의종, 19명종, 20신종도 형제지간이고, 21희종과 22강종은 4촌지간이고, 28충혜왕과 29공민왕이 형제지간이고, 29충목왕과 30충정왕이 형제지간이었다. 이 왕권사이에 고려왕씨가 김씨왕조가 될 뻔한 사건과(천추태후와 김치양사이의 아들을 왕위에 옹립하려던 사건) 이씨왕조가 될 뻔한 사건(17대 인종이 왕위를 외할아버지 이자겸에게 양위하겠다고 선포한 사건)이 있었다.
광봉 할아버지가 탄생하실 때 임금인 고려 23대 고종(高宗1213~1259))은 한편으로는 무신통치를 끝낸 임금이면서 동시에 고려를 몽골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임금이기도 하다. 특히 그를 이어 즉위한 원종(元宗1259~1274))은 원나라 황제의 딸들을 맞아들임으로써 고려를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사위나라)으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다. 원나라를 모시기 시작한 첫 번째 임금이라 원종(元宗)이라 했을 것이다.
이후 충(忠)자 돌림 임금들이 들어서게 된다. 15년을 재위한 원종에 이어 원나라 황제의 딸 홀도로게리미실(제국대장공주)과 혼인한 25대 충렬왕(忠烈王1274~1308))은 질투심 강한 왕비를 제외하면 누구도 두려워할 게 없었기 때문에 34년간 무탈하게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한 차례 파란을 겪기는 했다.
충렬왕 23년(1297년)에 충렬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원나라에 머물던 세자 익지례보화(훗날의 충선왕)가 귀국해 어머니를 위한 피의 복수를 벌인다. 심지어 아버지가 총애하던 무비를 비롯해 수십명의 아버지 측근들을 제거해 버렸다. 세자는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라는 자부심으로 황제의 사위에 불과한 아버지(충렬왕)를 무참히 짓밟은 패륜아였다. 이듬해에는 8개월 동안이긴 하지만 아버지를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세자였던 충선왕은 아버지 충열왕 생존시에 충렬왕을 내몰고 8개월 동안 왕위를 하고 물러나 있던 자로서, 아버지인 충렬왕 사망하자 '또다시'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이 무비를 죽인 뒤 아버지를 위로 한다며 들여보냈던 과부 출신의 숙창원비 김씨를 자기 부인으로 삼은 것이었다. '황제의 외손'인 26대 충선왕(忠宣王)은 부인인 보탑실련(계국대장공주)도 외면하고 야속진이라는 평범한 몽골(혹은 여진)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가 1313년 왕위에 오른 27대 충숙왕(忠肅王1313~1330)이다.
그런데 충숙왕은 아버지인 충선왕이 죽고 즉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재위기간(5년) 내내 원나라에 머물던 충선왕이 귀국종용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들 충숙왕에게 선위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의 권력은 여전히 충선왕에게 있었다. 충선왕은 고려 사람이 아니라 원나라 사람이었다. 훗날 충선왕은 원나라 황실의 권력관계 변화로 티베트로 유배를 가는 고초를 겪는다. 이때 이광봉, 권한공, 최성지 등이 호종했다.
한편 충숙왕은 재위 3년째인 1316년 쿠빌라이의 손자 야선첩목아의 딸 복국장공주와 혼인함으로써 황실과의 유대를 강화해 나름의 권력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충숙왕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이미 충선왕에게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낸 홍규의 다른 딸이 그의 부인이었다. 충선왕 충숙왕 부자는 부자지간이면서 동서(同壻)지간이기도 했다.
덕비(德妃)로 책봉된 홍씨와 충숙왕 사이에서 28대 충혜왕(忠惠王)과 31대 공민왕(恭愍王) 형제가 태어난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는 치열한 암투로 각각 두 번씩 왕위를 오르내려 복위(復位)라는 말을 낳게 한다. 충숙왕(1313~1330년) 충혜왕(1330~1332년) 충숙왕 복위(1332~1339년) 충혜왕 복위(1339~1344년).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어 충혜왕의 두 아들 29대 충목왕과 30대 충정왕으로 잠시 내려갔던 왕위는 1351년 31대 공민왕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의 이성계나 이방원도 모두 공민왕 때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를 내치고 형 정종을 내치고 조선 3대왕위에 오른다. 이 모두가 고려에서 내려온 왕권 다툼의 현실을 학습한 윤리적 패륜이었다.
고려왕권 다툼이 반복되는 험난한 시기에 살아남는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고난을 이기고 벽상벼슬(정1품)까지 오르신 우리시조 할아버님의 인생승리는 지금의 후손들도 본 받아야 할 인생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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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가승 연(延)자 할아버님의 방주(傍註) 기록이 밝혀져 공지합니다.
延 - 贈 嘉善大夫判禮賓寺事 로 밝혀졌습니다. (*가선대부는 종2품 품계입니다.)
(연 – 증가선대부판례빈시사) 증(贈)_ 추증한다는 뜻임
가선대부(嘉善大夫)는 조선초기 1392년 7월에 새롭게 관제를 제정할 때 설치된 품계로 연(延)자 할아버님은 충숙왕이 1330년에 사망하고 62년 후인 1392년에 고려가 멸망했으니 고려 말까지 생존하시고 후에 조선조 초기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추증되신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서 한자인 ‘寺’는 -여기서 이 한자는 절이라는 이름의 ‘사’자가 아니라, 관청의 이름의 ‘시’자로 읽습니다. 즉 ‘시’(寺) 는 공무를 집행하는 기관을 가르킵니다.
(예시 – 고려시대 관청 9 시(寺) 1. 전의시(典儀寺)- 제사(祭祀), 증시(贈諡)
2. 위위시(衛尉寺)- 의물(儀物), 기계(器械) 장관= 경(卿)
3. 태복시(太僕寺)- 여마(與馬), 구목(廐牧)
4. 예빈시(禮賓寺)- 빈객(賓客), 연형(燕亨)
5. 종부시(宗簿寺)- 왕족 및 조속의 보첩(譜牒)을 맡음.
6. 대부시(大府寺)- 재화(財貨)와 늠장( 藏)을 맡음.
7. 사농시(司農寺)- 저적(儲積)을 맡음.
8. 대리시(大理寺)- 형옥(刑獄)을 맡음.
9. 광록시(光錄寺)- 주례(酒禮), 선수(膳羞)를 맡음.
조선시대에 종부시(宗簿寺), 내자시(內姿寺) 등 많은 관청의 이름에 사용되었음.)
연(延)자 할아버님은 – 고려조에서 ‘문과 급제(及第)하시고 중현대부 또 봉익대부 밀직부사 진현관학사 상호군’를 역임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은 지난 2/24일 기증받은 청장가승에 연자 할아버님 방주가 흐릿해서 알 수 없다고 단톡방에 올렸는데
이광범 사무총장께서 2월27일 이메일로 사진을 전송해 줘서 어렵게 판독이 되었습니다.
이메일을 3월1일 아침에 열어보고 확인해서 판독되었습니다.
시조光逢 할아버님과 연(延)자 할아버님은 우리 咸李 성을 가진 자는 모두 같은 할아버님이시기에 이 분들의 역사적 기록은 글자 한자 한자 후손으로서 반드시 확인하고 알아야 할 기록으로 방주의 글자가 오랜 세월 속에 묻혀 지워져서 판독이 어려워 안타까웠는데 광범종친이 사진을 보내줘서 이 문제가 해결되어 너무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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