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황제 - 주원장
- 고려인 주원장(朱元璋)의 탄생과 황제의 신화 -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章,1328~1398). 안휘성 봉양현 동쪽(옛 지명으로는 호주 종리(濠州 鐘離) 출생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었다.
조선왕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중국의 명(明)나라, 그리고 그 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朱元璋). 통설로는 그가 중국 해변가의 천빈한 출신으로만 막연하게 인식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의 전설이 내려져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그리고 명(明)에서 조선출신 여인들이 왕비가 되고 특히 주원장 자신이 고려여인을 취해 그 소생이 바로 명(明)나라 제3대 황제인 성조 영락제(永樂帝) 즉, 주원장의 넷째 아들 ‘연왕(燕王) 주체(朱棣)’라는 야사는 사실인가? 서민이 황제가 된 사례로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이어 두 번째인 빈농 출신 주원장(朱元璋)의 황제 등극에 대해 농민봉기에 의한 역사적 필연이라고 낮게 평가하기도 하고 농민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반원(反元)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민족을 핍박하던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붕괴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인의 명(明)나라를 당당히 세운 황제 주원장에 대해서만은 유독 여러 이유를 들어 그의 인격과 역경의 행로를 폄하하는 야사가 분분하다. 최근 베이징커지(北京科技) 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을 뽑았다. 과연 그랬다면 무엇이 천하의 주인인 ‘황제 주원장(朱元璋)’을 그토록 방어적인 삶을 살게 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명(明) 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인’ 이었다
주원장의 탄생설화로 역사를 새롭게 밝힌다
주원장(朱元章), 원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과업에 나선 1348년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일본은 갑신정변(1884년)이후 조선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조선의 역사와 언어 그리고 사회사정에 대하여 면밀히 조사 연구해왔다. 그 조사목적이 한국침략을 전제로 한 일이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기문>도 아마 그러한 목적에서 편찬된 하나일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중국에서도 전하지 않은 주원장의 탄생일화가 어떻게 조선에서 전해지고 있었을까, 재삼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놀랄 일은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고려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화라는 것이 사실과는 거리가 좀 먼 황당무계한 전설이기 쉽기에 큰 기대 없이 몇 번 읽어 보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의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하면서, 역사적 침략을 앞세워 한국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과거 정복왕조이었던 여진(女眞) 청나라의 계승인지, 아니면 당, 송, 명의 한족의 역사적 정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아는지 의심이 앞서게 된다. 이 점 한. 중의 역사관(歷史觀)을 확실히 정립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에 이에 관한 자료를 다시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조선기문>을 다시 꺼내어 주원장에 대한 설화를 읽어보니 거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 같이 보여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주원장의 탄생설화는 신화가 아니다. 그것은 먼 옛날 조선의 농촌에서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해오던 전설이 분명하다.
그 전설을 <조선기문>의 편찬자가 채집하여 일본어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널리 읽혀지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이제 필자는 일본어로 기록된 주원장의 탄생설화를 우리말로 전문을 번역하여 일반인들이 알게 하는 동시에 그것의 사실여부를 밝혀 보려는 것이다.
주원장의 탄생과 성장
고려 말 경상도 웅천(熊川)의 내웅산(熊內山) 밑에 주씨집(朱家) 노부부가 오막살이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학식과 도가 높은 스님 한 분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보니 그 집에서 서기(瑞紀)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찾아 들어가 본즉 8순 노부부가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고 있었다. 스님은 노인에게 말하기를 머지않아 이 집에 귀동자가 태어날 것입니다. 라고 일러 주고 그 집을 떠났다.
도전 주행복 그림 ‘산가(山家)’
얼마 후 할머니는 회임하여 10개월 후에 아들을 출산하였다. 그래서 어린아이 이름을 주언장(朱彦長)이라고 하였다. 친척과 마을 사람들은 노부부의 사정을 가엽게 여기고 먹을 것과 의복을 갖다 주어 노부부와 어린아이는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5살 되던 때 고승이 다시 찾아와 말하기를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이 아이를 키울 수가 없으니 산중의 절로 데려가 양육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언장(彦長)은 매우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과 기예가 뛰어났으며 감히 따를 자가 없었다. 언장(彦長)은 15세 때에 절에서 내려와 여러 도를 돌아다니다가 종래 환속하여 장군이 되었다. 조선사람들이 말하는 주원장은 뒷날 명나라를 세워 태조가 된 바로 주원장(朱元璋)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과연 사실을 전하는 실화인지 아니면 어떤 새로운 동기에서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말인지는 지금에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전설이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한중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문제이므로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까지 발표를 주저해왔다. 탄생설화의 가치 주원장(1328-1398)은 정복왕조(征服王朝)인 원나라를 축출하고 명나라를 세운 태조 홍무황제다. 그런데 그의 탄생설화가 어떻게 조선에서 전해져 왔으며 더욱이 놀라운 일은 주원장이 고려출생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 중의 역사는 크게 바꾸어져야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중대한 문제를 한 두 줄의 글로써 결론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해를 두고 이 설화의 문제를 생각해 왔다. 설화나 전설은 사실과 거리가 먼 옛말이기 때문에 자칫 무시되기 쉽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역사적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역사의 초창기나, 새로 나라를 세운 창업의 주, 제왕에 대한 탄생설화는 흔히 신화 또는 전설로 세속에 전하여 오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정사라고 하는 사마천사기(史記)의 초장에 1.) 삼황본기(三皇本紀) 2.) 오제본기(五帝本紀) 3.) 하본기(夏本紀) 등이 있지만 그것들은 신화 또는 전설에 불과하다. 필자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고대에 있어서 신화나 전설은 국사(國事)와 밀접한 관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말하자면 건국시조의 탄생설화 혹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하는 예언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신화 전설은 세속이 서로 전하고 전하여 실사(實事)가 되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 암울한 실정들은 그 전하는 바의 자료의 빈약으로 결국 신화 전설에 의거하여 역사를 작성할 경우가 많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논(論)에서 말하기를 "신라의 박혁거세와 석탈해는 알에서 나왔다고 하고 김알지왕은 하늘에서 금궤에 넣어 내려 보내졌다고 하니 괴이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신화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서 나라의 정사(正史)에 그대로 올려져 있다. 수 백 년 전에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지금에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을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판단하거나 아니면 전하는 설화 전설들이 자료에 의거하여 판단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 설화가 지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그대로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설화의 사실여부를 극명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와 분석이 있어야 하겠다. 첫째 이 설화가 언제 발생하였느냐는 연대측정이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조선기문>이 간행된 1894년 이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청일전쟁(1894년)을 앞에 두고 날조된 유언비언이 아니냐고 의심하겠지만 그것은 설화의 내용과 격이 맞지 않는다. 둘째, 설화가 발생한 지역문제이다. 설화의 주인공인 주원장의 출생지를 분명히 경상도 웅천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숙권의 고사촬요(攷事撮要)의 경상도 편에 보면 웅천(熊川),,,별호(別號) 웅구,웅산(熊口, 熊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숙종 이후에 작성된 지방지나 지도에는 웅천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주원장의 탄생설화를 전하는 경상도 웅천(熊川) 내웅산(熊內山). 제일 높은 산 봉우리 꼭대기에 천자봉 天子峰)’ 바위가 솟아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냈던 1592년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가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런데 설화 자체가 전하는 그 동기와 주제가 너무나 확실하다. 사실 먼 옛날의 설화나 전설은 그 시대에 따라 특수한 패턴을 보여준다. 셋째 설화의 형식이다. 시대에 따라 신화 전설이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여 주고 있으므로 형식에 따른 년대 측정을 가늠하게 된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한국의 신화 전설은 그 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분할 수 있다. 1.) 단군신화와 같이 동물과 짝을 맺는 선사시대의 신화. 2.)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탄생을 말해주는 고대의 난생설화. 3.) 고려왕건 태조의 탄생설화 또는 중국의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옥루몽(玉樓夢)의 주인공 양창곡의 탄생을 말해주는 불교적인 예언 설화. 4.)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이라고 그의 꿈을 해몽한 석왕사의 주지 무학대사가 말한 조선시대의 꿈 해몽 설화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설화의 시대적 특징으로 볼 때 그것은 분명히 고려의 불교적 예언 설화의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을 명태조 주원장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주원장 주원장의 탄생설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는 아직 많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설화자체만을 가지고 분석하여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본격적으로 주원장의 전기를 작성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탄생설화의 진위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하여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관련된 서적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과문한 탓인지 그의 출생과 소년시절을 자세히 말해주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 7월 어느 날 체스트낱 몰 근처에 있는 반센노블 서점에 들렀다가 「Imperial China: 900-1800. By, E,W.Mote. (Harvard Press. 2003) 책 한권을 샀다.
Imperial China, 900-1800. By E. W. Mote
이 책 중에 명태조 주원장의 전기가 실려있는 것을 보고 탄생설화의 진위를 감정하는데 참고가 될 것으로 알고 크게 기뻤다. 주원장의 전기는 "Zhu Yuanzhang: Boy to Young man." Chepter 1; The Young Budhist Novice. Chepter 2; The Wandering Monk. Chepter 3; The Red Turban Uprising.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주원장의 전기는 1949년판과 1965년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1949년판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갓 설립되었을 때의 것으로 재래의 한자로 씌어져 있으며, 1965년판은 중국에서 홍위병의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지금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위 간자(簡字)로써 출판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원장의 전기가 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을 기해서 출판되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 있어서 타민족에 의한 최후의 정복왕조인 청나라가 망한 것은 1911년이다. 그리고 그 후 서구열강의 침투와 일본제국에 의한 1932년의 만주건국,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후 국공합작에 실패한 중국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중국은 아편전쟁(1840년)이후 1945년까지 100년간은 열강의 반 식민지적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이 외세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으로 한족정통의 정권을 수립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1949년이다. 그렇다면 모택동의 신정부는 청조(淸朝)이전의 명나라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러한 뜻에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전기를 급히 출판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제 가장 최근판이며 역작이라고 하는 주원장의 전기와 탄생설화를 대조하여 거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찾아보자. 그런데 필자는 1965년에 출판된 원본을 찾지 못해서 그 영역본을 참고하였다. 영역자의 말에 의하면 "아래의 발췌문은 1965년 판에서 주원장의 Biograpy의 처음 3 Chapter를 번역해 온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주원장의 전기를 읽어 본즉 그가 원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과업에 나선 1348년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반하여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에 대하여는 그 기술이 허술하기가 짝이 없다. 어떤 대목을 보면 그것을 마치 어느 고전에서 얻은 문구를 그대로 부합시킨 것 같은 의심마저 가지게 된다. 전기의 부피가 적지 않아 여기에 그 원문을 다 옮길 수 없어 "소년기에서 청년기"에서 요점만을 추려 그의 소년기의 사정을 살펴 보기로 한다. 전기 작가는 "어린 불교 수련자" 라는 소제목하에서 1340년경 중국의 안휘성 지방을 휩쓴 재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4년 (1344년)에 Huai River (淮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홍수와 가뭄 그리고 메뚜기의 내습, 거기에 더하여 전염병(페스트)이 돌아 큰 재난을 당했다.
1340년대 ‘흑사병’으로도 불리는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plague)가 전 유럽을 강타하여 대 도시마다 시체더미가 쌓이고 한 해에만 500만명 이상이 죽었다. 곧 이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내륙을 덮친 질병과 메뚜기떼로 인한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과거 우리나라도 메뚜기의 피해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 시대에 가뭄과 함께 발생한 메뚜기떼 때문에 백성이 굶주려 구휼하였다는 내용이다.
"여러 해 동안 비는 오지 않았고 심은 곡식들은 타고 말라 노랗게 되고 밭은 거북이등 같이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가뭄에 따른 기우제와 메뚜기 떼가 날아와 곡식을 다 먹어버린 곤충에 의한 재해를 설명하고 있다. 이 대목은 마치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서 그 설명을 듣는 것 같다. 그런데 가뭄이 있자 다음에는 염병이 돌았다. "Haozhou 지방의 Taiping의 Zhonghi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떼거지로 염병에 걸렸다. 여러 나물과 나무껍질로 생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자 곧 죽어 나갔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주원장의 아버지는 이 지방에 농토가 많았고 살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이곳으로 이사왔다. 주원장의 아버지의 이름은 주우시(Zhu Wusi)이며, 어머니는 천 엘밍(Chon Erning)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맏형이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작가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Guzhuang 지방에 Zhu Wusi(우시는 양자강 하구의 지명이다.) 집에서도 반달이 채 못되어 3명이 죽었다. 아버지 Zhu Wusi는 64세에 죽었고 9일째 되던 날에는 장남인 Zhu Chongsi가 죽었고 22일에는 Zhu Wusi의 아내인 Chen Erning이 죽었다. 둘째 아들 Chongliu와 막내 아들 Yuan, Zhang은 부모와 형이 죽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주원장은 너무나 가난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를 돈도 시신을 묻을 손바닥만한 땅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원장이 몇 살 때 부모와 형이 전염병으로 죽는 비참한 일을 당했는지, 전지작가가 밝혀주지 않았고 또 작은형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 후로 부모와 형에 대한 말이 일체 없으니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주원장의 전기에서 그 어릴 때의 사정을 요약하면 주원장은 갓 나서부터 줄곧 앓아왔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절에 데려다가 중이 되게 하려고 결심하였다는 것. 안휘 지방에 전염병이 돌아 늙은 부모와 형이 전염병으로 죽는 참변을 당했다는 것. 그 후로 의지할 곳이 없어서 걸식하며 거지 행각에 나섰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그렇다면 전기작가가 말해 주는 주원장 어릴 때의 형편과 탄생설화가 전해주는 내용이 골자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각사(皇覺寺)의 중이 된 주원장 이 장에서는 주원장이 어떠한 동기에서 중이 되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기작가의 말에 의하면 주원장은 갓 날 때부터 줄곧 앓았기 때문에 살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는 꿈을 꾸었는데 아들아이는 오직 부처님만이 살릴 수 있다는 현몽이었다. 아버지는 주원장을 중이 되게 하려고 절로 찾아 갔으나 절에는 한 명의 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때마침 아이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아기는 정말 울고 있었고, 아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아기는 젖을 먹기 시작하였고 몇 일이 지나자 불렀던 배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아기는 자라면서도 계속 병을 앓았기 때문에 부모를 이만저만 걱정시킨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꿈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아들 주원장을 절에 데려다가 부처님께 바치겠노라고 약속했다. 주원장의 아버지는 아들을 황각사(皇覺寺, Huangju Temple)의 고빈(Gao Bin)스님에게 보내서 중이 되게 하면 몇 년 전 꿈에 있었던 일로 하여 아들을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도 지키게 되고 또한 세끼 밥을 먹을 수 있게 됨으로 그대로 죽는 것보다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의 아버지는 아들을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이행치 못하고 그만 1344년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가족이 전염병으로 죽은 후 의지할 곳이 없어 거지 행각에 나섰던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탄생설화에서 고승이 주원장은 절에서 키워야 한다는 전설로 변한다.
주원장이 어릴 적에는 중팔(重八)이라 불렀다 한다. 전염병과 기근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을 하면서 무예를 익혔다.
탄생설화 주원장전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의 꿈은 주원장은 부처님만이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섭리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어째든 주원장을 절로 데리고 간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사는 왕씨 부부였다. 주원장에게 자주 밥을 주었던 왕씨 부인은 주원장의 딱한 사정을 보고,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면 우선 의식주는 해결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전기의 작가는 「떠돌아 다니는 중」 (Wandering Monk) 이라는 소제목하에서 주원장이 황각사(皇覺寺)의 중이 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왕씨 부부와 주원장은 향과 초 그리고 약간의 제물을 가지고 황각사(皇覺寺)의 고빈스님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머리를 깎고 남이 입던 헌 법복을 받아 입고 합장 배례하는 법과 불공 드리는 절차를 배우며 중이 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전기작가는 주원장이 중이 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Consequently, in the nineth month The Huangju Temple gained a new young novice." 주원장이 황각사(皇覺寺)에 들어가 중이 된 것은 전후사를 감안하여 볼 때 16세로 추정된다. 중이 된 그는 절간의 마루바닥을 닦고 불을 피우고 종을 치고 밥을 짓고 상좌승들이 입던 옷을 빨고 절의 모든 잡일을 도맡아 해야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볼공드리는 예식을 배워나갔다.
주원장이 절에서 온갖 잡일을 하던 시절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가 청소하기 힘들어서 자신이 황제가 된 후에는 사천왕상의 한 발을 모두 들게 했다고 한다. 사진은 베이징 근교의 홍루어쓰의 사천왕상이다. (사진/오마이뉴스 ⓒ김대오)
주원장이 중국의 황각사(皇覺寺) 중이 되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에 있어서 승려는 이조시대의 중과 같은 신분이라 천하게 보였다. 남송의 유신이었던 사방득(謝枋得)은 원나라 때의 인간 존비(尊卑)의 사정을 10으로 구분하여 말하기를......7장(匠)8창(倡)9유(濡)10개라고 하였다. 유목민족인 몽고족 원나라는 유교와 불교 같은 종교에 대해서는 큰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장의 라마교와 천진교(天眞敎), 백운종(白雲宗)은 보호를 받았지만 정토교(淨土敎)의 일파인 백련교(白蓮敎)는 탄압을 면치 못했다. 그러니 시주로 나선 탁발승은 거지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황각사(皇覺寺)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황각사는 집세를 받아 꾸려 나갔다. 그 해에도 재앙이 너무 심했던 것으로 집세를 제때에 받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절의 모든 중은 밖으로 나아가 시주를 받아와야 했다. 절에 들어 온지 50일 밖에 안 되는 풋내기 중 주원장도 밀짚모자를 쓰고 시주그릇을 들고 중 옷으로 차리고 나왔다. 말로는 시주라고 하지만 그것은 구걸이었다. 걸승이 된 주원장은 남, 서쪽이 형편이 조금 낫다는 말을 듣고 그 쪽으로 향해 하염없이 걸었다. 일정한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세끼 먹을 것을 찾아 발길 닿는 데로 떠돌아 다녔다. 전기작가는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So because his only objective was to get enough food survive........ He leaned all the tricks of begging how to sleep in the mountains and in the wilds and to bear all the discomforts of wind and cold." 이후의 전기작가의 말은 믿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주원장은 왜 그렇게 호된 고생을 사서 해야 했는가 이다. 16세이면 세상물정을 어느 정도 알만한데 왜 거지승으로 구걸하면 산과 들판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고생고생 했는가 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위대한 대업을 성취하기 위하여는 원나라의 시조 칭키스칸과 같이 고생고생 하여 위대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언어가 잘 통하지 못했고 그 지방의 지리에 어두웠고 중국의 문화에 익숙치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앞서게 된다. 창업의 꿈은 처음부터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타계하면서 위대한 꿈은 자라게 마련이다. 주원장에게는 불운한 운명을 당하여 7전 8기하면서 그것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은 3,4년 동안(안휘의) 서쪽지방을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천민들과 같이 지내면서 백련교의 신앙을 받아드리고 비밀결사의 일원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주원장이 15세 하산하여 각도를 돌아다녔다고 하는 설화의 내용과 주원장이 중국의 안휘성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의 중이 되었다는 그 시기가 거의 같은 때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Biography of Zhu Yuanzhang (주원장전)는 최근의 역작으로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칭찬하고 있지만,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설명에는 여러 곳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고향산천인 안휘성 지방에서 걸승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3,4년간 방황하였으며, 둘째는 걸식하는 거지중으로 누구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학문과 무예를 익힐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원장은 불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중국의 강남지방으로 들어가 절을 찾아 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라의 최치원 선생도 12세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중국의 당나라로 건너가 학문에 대성하였던 것이 아닌가 주원장, 백련교 비밀 결사의 일원이 되다 주원장은 16세 때 황각사(皇覺寺)에서 나와 탁발승(托鉢僧)으로 걸식하면서 회수(淮水)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서민들의 신앙단체인 백련교의 교인이 되었다. 주원장전의 작가는 주원장의 중국에서의 방랑생활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주원장은 Huaixi(하남의 동쪽, 안휘의 서북)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생활형편과 미신, 종교, 관습 등을 살피고 많은 것을 익히고 배웠다. 이렇게 3,4년 동안 회수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지식의 영역을 넓히고 사회의 맨 하층인 천민들과 사귀어, 그들의 신앙인 백련교 비밀결사의 일원이 되었다." 중국의 송나라는 1127년에 여진족인 금나라에 의하여 망하고 하북의 개봉(開封)에서 강남의 항주(杭州)로 수도를 옮긴 후, 회수(淮水)이남의 영토만을 겨우 보존한다. 이것이 남송(南宋)인데, 남송도 1276년에 몽고의 후비라이(쿠빌라이)에 의하여 멸망하고 이후 90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몽고족의 지배하에 있는 중국인은 비참하기가 이를 때가 없었다. 원나라의 지배층 또한 정복자인 몽고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유목민족이라 정치에 필요한 법전이나 정치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몽고족은 광대한 중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색목인(色目人: 위그루인과 페루샤인을 말함)을 중용하였고, 금나라 치하에 있던 한족을 멸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남지방에 있어서의 백련교는 비밀결사이지만 자연발생적으로 그 세력은 크게 확장되어갔다. 중국에 가서 황각사(皇覺寺) 중이 되었던 주원장이 비밀결사인 백련교의 교도가 되었는데 백련교란 어떤 종파인가, 잠시 알아보고 넘어가자.
모자원(茅子元)이 창립한 교단(敎團)인 백련교(白蓮敎).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했다.
백련교(白蓮敎) – 중국의 비밀결사 남송(南宋)시대 고종의 소흥연간(紹興年間;1131∼62) 초에 쑤저우[蘇州(소주)]에 있는 연상원(延祥院)의 승려인 모자원(茅子元)이 창립한 백련채(白蓮菜)라는 교단(敎團)으로 시작하여 현대까지 계속되었다. 모자원은 천태종(天台宗)의 교법을 흉내내 <원융사토도(圓融四土圖)> <신조(晨朝)의 예참문(禮懺文)><게가사구(偈歌四句)> <불념오성(佛念五聲)>을 만들고, 신도에게는 계율, 특히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지키도록 권했다. 스스로 백련도사라 칭하고 신도를 백련채라 하였다. 백련채(白蓮菜)라 한 것은 신도가 불살생계를 지키고 육식하지 않으며 채소만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 교단은 민중으로 신도가 늘어나 교세가 확장되자 조정의 탄압을 받고 모자원은 유배되었다. 이후 남송시대에 백련채는 마니교·백운채(白雲菜)와 함께 대표적인 사교이단(邪敎異端)이었다. 백련교는 처음에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이었으나, 원(元)나라 말기부터 미륵불(彌勒佛)의 하생(下生)에 따라 이 세상에 번영이 찾아온다는 미륵교와 융합하여, 미륵신앙을 중핵으로 하는 교단으로 변화했다. 명(明)·청(淸)나라 때에도 민중과 결부한 백련교는 그 당시의 위정자로부터 사교라는 이유로 금압되자 자주 반란을 일으켰는데, 1796년부터 9년 동안 계속된 백련교도의 난은 유명하다. 청나라 이후에도 백련교는 여러 분파로 갈라지면서 종교적 비밀결사로서 활동하였다. 근대 중국에서 대부분의 비밀결사는 백련교(白蓮敎)와 관계되어 있다.
중국에 있어서의 불교는 6조 와 당, 송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색외(塞外)민족인 요, 금, 원, 청 등의 정복왕조 시대에는 금지 또는 탄압을 면치 못하는 미미한 존재이었다. 그러므로 백련교는 강남지방에서 민심을 얻어 비밀결사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백련교는 절에 가지 않았으며 빈농들을 주축으로 하는 재가승들이었다. 하지만 백련교는 당, 송 이래 선종(禪宗)과 더불어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정토종의 일파이다. 원래 백련교는 남송 초에 모자원(茅子元)이라는 선종의 승려가 백련사의 혜원(慧遠)의 염불 고사(故事)에 따라 강남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의 결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백련교의 효시이다. 남송 때의 불조통기(佛祖統紀)에 의하면 "백련종은 육식을 금하고 술도 마시지 아니하며 채식주의로 좌선과 염불을 겸행하여 서민층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신자로 하여금 선행과 상부상조할 것을 권면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아왔다. 백련교의 신앙은 석가모니의 사후 일정한 시기에 미륵불이 나타나 현세의 모든 부정과 오락을 말끔히 일소하고 이상세계를 실현한다는 믿음이었다. 한국의 사극<태조 왕건>에서 궁예는 자칭 미륵불이라고 하면서 머리에는 금으로 장식한 두건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를 걸치고 밖으로 나갈 때 언제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말머리와 꼬리는 비단으로 장식하고 동남동녀로 하여금 깃발과 천개의 꽃을 들게 하여 행렬의 앞을 인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2백명의 비구승(독신으로 불도를 닦는 중)으로 하여금 "오마니 반메훔" 라고 하는 범패주문(梵唄呪文)을 외우게 하였는데 "오마니 반메훔"은 불교에서 6도 윤회를 뜻하는 것으로 선악의 싸움에서 선이 승리하여 결국 왕이 된다는 티벳트의 라마교의 신앙적인 주문이다. 어쨋든 한국에 있어서의 미륵사상은 후삼국의 '궁예' 왕에 의하여 처음 전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1271년 남송을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몽고족의 원나라는 백련교를 사교로 취급하여 탄압하였다. 때문에 백련교는 비밀리에 민중 속에 숨어들어 교세를 확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도들의 대다수가 하층 서민들이라 주로 야간에 모여 불사(佛事)를 거행했다. 그리하여 야취효산(夜聚曉散)이라고 하여 정부당국과 기성교단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야간에 모여 범패(梵唄)와 주문을 외우며,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의 일합상(一合相)을 왜곡하여 불륜한 음행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풍기문란 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원나라 때 만들어진 연사보감(蓮社寶鑑)에 의하면 그들은 사람의 육체는 곧 불체라고 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모든 액체는 진귀한 것으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눈물 콧물을 빨아먹고 심지어는 오줌까지 마시면서 그것을 조주차(趙州茶)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백련교에 의한 추잡한 행동이었지만 결코 모든 교도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주원장이 반원(反元) 혁명운동에 나서기 위하여 비밀결사인 백련교의 교인이 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미천하고 곤궁한 사람들의 모임이며 거기에서는 민족차별이나 상하계급 같은 것이 없고 상부상조하는 단체였기 때문에 같이 지내기가 오히려 편했을 것이다. 어째든 16,7세기 소년으로 도둑 떼가 수도 없이 출몰하는 회수지방을 무섭다 하지 않고 혼자서 돌아다닌 그의 대담성은 일찍이 단련한 자신의 무술실력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원장의 한문과 무술실력은 일찍이 경상도의 어느 곳에 있을 때 연마 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중국에서 하층 천민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중국어도 완전히 익히고 어떤 처치에서도 자족하며, 배고픔도 참고 견딜 수 있는 인내와 미천한 생활을 살면서도 순진하고 용감한 기품을 키웠을 것이라고 본다. ‘홍건적(紅巾軍)’과 주원장 중국 사학자들은 명태조 주원장을 전거지, 떠돌이 중, 전 산적, 전 홍건적의 두목 등 그의 악명만을 들어 평하였다. 왜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했을까? 우리 속담에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가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명(明)나라를 세운 대 영웅이라는 뜻에서 하는 말인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거지로 구걸하며 낯설은 타향땅에서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나갈 길을 찾으려고 한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거지면 어떻고 산적이면 어떠한가. 역사적 대업을 이루는 일이라면 반란군의 두목 또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끝이 좋아야 다 좋다는 말이 있다. 주원장은 그저 앞만 바라보고 강남의 여러 지방을 쫓아 다녔다. 그리고 그곳의 민심과 백련교의 비밀활동도 탐지하여 알았다.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다. 주원장은 홍건적의 두목으로 알려진 방국진을 찾아 나섰다. (주원장의 전기작가는 Red Turban Peng Yingyu라 하였음.)
주원장이 찾아간 홍건적(紅巾軍, 홍건군)의 두목 ‘방국진(方國珍)’
방국진은 같은 떠돌이 중으로 1348년 강남의 태주에서 일어나 반원(反元)의 혁명을 일으킨 홍건적이었다. 그는 후삼국의 '궁예왕'처럼 미륵불이 재림하였다고 떠벌리면서 반원혁명에 힘을 모으고 있었다. 방국진(方國珍)은 1315년 태주에서 일어나 온주를 점령하고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주원장이 방국진을 열심히 찾은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의 무술실력을 한번 발휘해 보자는 일념에서일 것이다. 주원장은 여러 방면으로 그를 찾았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내가 주원장의 전기를 세밀히 검토하는 것은 그 전기가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이다. 주원장이 몽고족을 타도하기 위한 반원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외조부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주원장 전기 작가의 말에 의하면 외할아버지는 연세가 아주 높고 학식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는 점쟁이였고 예언자였다는 것이다. 1279년 몽고족의 침략으로 송나라 대군과 같이 남쪽으로 도망한 일을 가끔 얘기해 주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99세까지 사시다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주원장이 어렸을 때는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주원장의 어머니쪽, 즉 주원장의 외가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주원장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그 외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다름아닌 뒤에서 말하는 주원장의 장인 곽자흥의 아버지, 즉 처조부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다. 혹 내가 해석을 잘못 한 것이 아닌가 하여 여기에 영문을 Text를 첨부한다. Guo's father had come to Haozhou as a fortune-teller and seer, There was a landlord there who had a blind daughter with no prospects for getting married. Guo's father had married her....... 곽자흥은 강남에서도 알려진 깡패 두목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산동의 호주 출신으로 점쟁이였다. 일찍히 안휘의 북부로 와서 그곳의 부호의 딸 장님과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곽자흥은 그 둘째 아들이었다.
주원장의 장인 곽자흥(郭子兴). 주원장은 곽자흥(郭子兴)의 딸, 마샤오저(馬小姐)와 결혼했다.
어쨌든 곽자흥은 장님 어머니의 덕택으로 불한당을 만들어 깡패집단을 만들었다가 1351년 안휘의 북부에서 기병하였는데 세력이 수천명에 이르렀다. 곽자흥은 신출내기 주원장을 어떻게 보았는지 자기 양딸(Stepdaughter)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주원장이 어릴때 병약하였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전기작가는 말하기를 "주원장은 키가 크고 검붉은 피부에 억센 코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턱은 이마보다 조금 앞으로 나왔었는데 건장한 체구였다"라고 한다. 그의 초상화에서 보다시피 그는 건장한 풍체와 뛰어난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아마도 주원장의 준수한 인품과 뛰어난 무술실력을 보고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주원장의 부인, 대명제국(大明帝國)의 마황후(馬皇后)
주원장이 황각사라는 절에서 지낸 후 홍건적의 일파였던 곽사흥(郭士興)을 찾아갔다. 곽사흥에게는 마 샤오저(馬小姐)라는 양 딸이 있었는데 고아가 된 친구 딸이라고도 하고 주어 온 딸이라고도 한다. 곽사흥의 집안일은 대소사를 막론하고 마샤오져가 도맡아 하였다. 곽사흥은 주원장을 아주 잘 봐서 마샤오져와 짝지어 데릴사위를 삼았다. 마 샤오져, 그녀가 곧 후일, 대명제국(大明帝國)의 황후 마황후(馬皇后)이다.
주원장은 그를 받아들여 자문으로 기용했다. 그런데 이씨의 출신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는 주원장보다 14세 연상이다. 이씨는 주원장의 자문으로 일하면서 당화와 함께 주원장을 도왔다. 주원장과 당화 그리고 나이가 많은 이씨의 활동을 보면 마치 사극 '해신'에서의 신라 장보고와 정연(鄭年)의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장보고와 정연은 신라 사람이다. 그런데 그들의 고향이 어디였으며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 두 사람은 무예가 뛰어났으며, 특히 정연은 수영을 잘하여 바다에서 헤엄을 쳐 50리를 가도 숨이 차지 않는 굳센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연은 재주가 뛰어나 장보고에게 지지 않았으며 결코 자기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고생을 같이하며 지냈다. 장보고는 중국의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그 무위를 떨쳤는데, 그가 말을 타고 창을 쏘는 무술의 실력에는 능히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주원장(朱元璋)은 군사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다.
1355년 곽자흥이 사망하자 참모총장이었던 주원장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곽자흥의 뒤를 이어 홍건적의 두령이 되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자기수하의 군대와 장인 곽자흥의 군대를 합하여 큰 군단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주원장은 본격적으로 그 세력을 확대해 갔다. 주원장은 군대를 이끌고 양자강 이북의 안휘성으로 진출한다. 안휘성은 우리 한인에게는 귀익은 고장이다. 내가 알기로는 김구 주석의 차남인 김신 장군이 어렸을 때 안휘의 둔계(屯溪)중학교에 다녔고 또한 안휘의 부양에는 우리 광복군 제 3지대가 있어 특별부대를 훈련하 던 곳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1355년 6월 양자강 일대를 장악, 태평로를 취하고 이듬해 1357년 7월 무주를 점령한 다음 거기서 오국공(吳國)公)임을 천명하고 홍건적 혁명의 전면에 나섰다. 홍건적을 평정하고 명(明)을 건국하다 주원장은 홍건적의 일원으로서 다른 홍건적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건국의 대업을 성취한다. 그런데 그의 출세는 장인 곽자흥의 덕택이 크다고 하겠지만 그 보다도 주원장의 탁월한 무술과 출중한 재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렇다 하고, 주원장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홍건적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원나라 순제(順帝)의 초년경 중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난다. 천재지변과 전염병의 만연, 한해의 계속으로 기근, 거기에 더하여 몽고족의 통치에 의한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온 중국인들은 원나라 타도의 구호와 함께 산동과 강남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홍건적(紅巾軍, 홍건군).
홍건적의 난 (紅巾賊-亂)
홍건적(紅巾軍, 홍건군)의 난(亂)은 중국 원(元)나라 말기에 일어난 한족(漢族)의 농민반란이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홍두적(紅頭賊), 홍적(紅賊)이라고도 한다. 이 반란은 이민족 왕조인 원(元)나라를 쓰러뜨리고 한(漢)족 왕조인 명(明)나라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륵(彌勒), 백련(白蓮) 양 교도들이 일으켰는데, 원래 이 양 교단은 별개로 발생하였으나 원(元)나라 말기에 혼합되어 행동하게 되었고, 그 뒤 백련교(白蓮敎)에 통합되었다. 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 영년현(永年縣)의 한산동(韓山童)은 스스로 미륵불의 환생이라는 설을 퍼뜨려 허난[河南(하남)]·안후이[安徽(안휘)]에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1351년 황허강[黃河(황하)] 수리(水利)를 위한 노역부 징발문제로 민심이 동요한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켰다.
이들 반란군을 주도적으로 지도한 것이 백련교이다. 그들 반란군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다녔기 때문에 홍건적이라 하였다. 홍건적 중에 비교적 큰 세력을 가졌던 자는 방국진(方國珍) 유복통(劉福通) 장사성(張士誠) 서수휘 진우량(陳友諒) 한림아(韓林兒) 등이 있다. 1). 방국진은 강남에서 기병하여 먼저 온주를 점령하고, 1352년 3월에 절강성의 태주에서 관군을 대파한 다음 경원지방으로 나아가 그 세력을 떨쳤으나, 1356년 3월 주원장에게 패하여 온주, 태주, 경원의 3주를 주원장에게 바치고 항복하고 만다. 2.). 홍건적의 두목 유복통은 1351년 5월 산동에서 기병하여 방국진을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백련교의 교주인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 송재(宋宰)라고 추대하여 남송의 재기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355년 11월 관군에게 대파된다. 1358년 5월 유복통과 한림아가 연합하여 변양(卞楊)을 공략하여 거기에 근거하고 있다가 1363년 장사성의 부하장수 여진(呂珍)에게 살해된다. 송제라고 자칭하였던 한림아도 1366년 12월에 죽음으로 소위 송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3). 서수희는 1351년 5월 유복통과 같이 기병하여 항주를 공략하고, 점수(漸水)에서 관군에게 패하였으나 안휘의 호주를 점령하고 난 다음 국호를 천완(天完)이라 하면서 황제임을 자칭한다. 그러나 1360년 5월 한왕이라고 자칭하는 진우량에게 살해되고 만다. 4). 진우량은 유복통의 부하로서 1358년 안동을 공략하고 강주로 나아가 서수휘를 친 다음 굴호를 한 이라 하고 황제임을 자칭하였다. 그러나 1363년 7월 주원장에게 패하여 사살되고 만다. 5.) 유복통의 부하였던 명옥진(明玉珍)은 1357년 12월에 성도(成都)를 공략하고 1362년 운남(雲南)으로 내려가 사천(四川)을 점령한 다음 다시 성도로 돌아와 1363년 1월에 국호를 하(夏)라 하고 황제임을 자칭하였다. 그런데 1366년 3월에 그가 사망하자 아들 명승(明昇)이 아버지를 뒤이어 하(夏)나라 황제임을 자청하였다. 명승은 1371년 주원장의 고향친구이며 부하장수인 탕화(湯和)의 군에게 패하여 주원장에게 항복하였다. 명승은 주원장의 특사를 받아 처형을 면하고 고려로 보내졌다. 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설명키로 하겠다.
성도(成都)와 사천(四川)을 점령한 후 국호를 하(夏)라 하고 황제임을 자칭했던 명옥진(明玉珍). 아들 명승(明昇)이 황제를 계승했으나 주원장에게 항복하고 고려에 귀화했다. 명옥진(明玉珍)과 명승(明昇), 고려인의 후예로 짐작되는 관련 기록들이 있다.
6.) 장사성은 1353년 강소성 지방에서 일어나 고우(高郵)를 점령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라 하여 성왕임을 자처하였다. 이지음 장사성이 이끄는 군대는 그 무리가 무려 1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1354년 9월 고려군을 선봉으로하는 승사 탈탈(脫脫)의 관군에게 크게 패하여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여기서 고려군의 원나라 파병에 한 일을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고구려군이 물러간 후 장사성의 세력은 오히려 더 강성했다. 장사성은 고우에서 고려군에게 패한 후 1356년 3월 평강을 점령하고 이어 항주를 장악한다. 그런데 반란군 토벌에 있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고려군이 무슨 이유에서 철군했을까. 사실 알고보면 고려의 원군은 종래 원수로 생각했던 원나라를 돕기 위하여 파견한 셈이다. 그러므로 고려군의 귀환은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유는 압록강을 건너 선천까지 밀고 들어왔다가 최영, 이성계 등에게 패하여 연경으로 도망쳐 버렸다. 어쨌든 주원장은 고려군이 장사성의 군사를 물리치고 강남의 통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1355년 6월에 태평로를 취할 수 있었고 따라서 1356년 4월 방국진의 항복을 받고 그해 7월에 오국공(吳國公)임을 선언한다.
주원장(朱元璋)은 홍건적을 이끌고 내분을 수습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명(明)나라를 창건했다.
홍건적은 최초의 진압 때 한산동을 잃었으나, 유복통(劉福通) 등은 그의 아들 임아(林兒)를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고 안후이에서 송(宋)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전국에 격문을 보냈다. 이에 후베이[湖北(호북)]의 서수휘(徐壽輝), 안후이의 곽자흥(郭子興)·주원장(朱元璋), 허난의 북쇄홍건(北鎖紅巾), 후베이의 남쇄홍건 등이 호응하였지만 내부 분열로 인해 비적으로 전락되었으며 관군과 향토자위군의 반격으로 괴멸되었다. 다만 주원장만 천하를 평정하여 명(明)나라를 창건하였다.
1358년 5월에는 안휘성 영국등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1359년에는 방국진이 점령하였던 절강성의 온주, 태주, 경원의 3주를 통합하였다. 1363년 7월에는 진우량을 공격하여 그를 사살하였다. 1366년에 호주(湖州)를 취한 다음 장사성을 잡아죽이고 오왕(吳王)임을 선언하였다. 이제 주원장은 산동, 안휘, 호북, 강서등 하남일대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하여 서달(徐達)과 이문충(李文忠)을 파견하여 북벌을 시작한다. 그리고 1398년 1월 남경에 정도하여 국호를 대명이라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분이 바로 주원장, 명나라 태조 홍무황제이다. ‘홍건적의 난(亂)’과 여명(麗明) 관계 중국에 큰 변란이 일어나거나 왕조가 바뀔 때 마다 그 여파는 한반도에 까지 파급되게 마련이었다. 1350년 대의 홍건적의 반란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나라에 파병되었던 고려군이 철수하자 홍건적 일파인 방국진과 장사성이 1358년부터 1364년 사이에 각각 4차에 걸쳐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거나 직접 자신이 찾아와서 원조를 청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공민왕은 그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의 정세가 아직 불투명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원.명의 교체과정에 있어서 고려조정은 반원과 친원의 두 파로 나뉘어 국론을 통일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요동으로부터 홍건적들이 대거 밀려들어왔다. 1359년 12월에 홍건적 4만명이 압록강을 건너들어와 평양을 점령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방실, 안유 등 여러 장수가 나아가 평양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타파하였다. 제 1차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살아남은 적군들은 압록강 저편으로 달아났다. 1360년 3월에는 홍건적들이 바다를 건너 서해도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곧 격퇴되었다. 3차로 홍건적은 1362년 12월에 10만명의 대 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지나 개경으로 진격해왔다. 공민왕과 왕비 노국 대장공주는 멀리 안동까지 피난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다행이 이듬해 1363년 정월에 정세운, 안유 등이 군사를 재 정비하여 나아가 홍건적을 격파, 개경을 수복하고 패잔병을 추격하여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혼비백산하여 요동땅으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요동땅에 군집하였던 홍건적들은 완전히 그 세력을 잃고 말았다. 홍건적의 난에 대하여는 김상기 교수님의 「고려시대사 연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명태조 주원장의 고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다.
명(明) 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인으로 추정된다.
주원장이 1371년 6월에 고향친구인 탕화와 부우덕 양장군에게 명하여 명옥진의 아들 하왕 명승을 치게 하였다는 것은 앞서 말 한 바와 같거니와 그는 이듬해인 1372년 1월에 명승과 먼저 항복을 받은 진우량의 아들 한왕 진리, 그리고 남녀 25명을 고려로 보냈다. 주원장은 포로가 된 하왕 명승과 한왕 진리를 처형하거나 또는 멀리 귀양 보내지 않고 왜 연고도 없는 고려로 그들을 보냈던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진짜 중국사람 이라면 그 죄를 용서하여 중국에서 살게 할 것이지, 고려의 장성도 아닌 그들을 고려로 보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필자가 홍건적 반란을 충실히 살펴본 것은 그들 중 하왕 명옥진과 한왕 진우량은 고려인의 후예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내력은 찾아볼 방법이 없다. 그런데 「한국 인명사전」에서 보니 공민왕은 그들을 귀화인이라고 하여 노비와 저택을 하사하여 개경에 살게 하였다. 명승과 진리는 각각 총랑 윤희종의 두 딸과 결혼하여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씨조선의 태종대왕은 명승을 화촉군(華蜀)에 봉하였고 또 충훈록에 올려 그의 공적을 기리게하였다.「한국인명사전」에서 명승과 진리를 귀화인이라고 치부하고 있지만 그들은 귀화인이 아니라 그들이 같은 고려인의 후예였기 때문에 그들을 조국인 고려로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또 한예는 우황초년(1375)에 만주 요동땅에서 도망온 한 사람이 도방(都房)을 찾아와서 고하기를 명태조는 장차 고려에서 처녀, 수재 그리고 한자(내시) 등 각각 1천명과 준마(좋은말) 1천필을 요구해 올 것이라고 하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이 말은 낭설이 아니라 사실로 드러났다. 명태조 주원장은 1391년 4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말 1만필의 구입과 엄인(환관; 궐내 궁중에서 여러 일을 맡아 보는 내시임) 200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왔다. 마필 1만 마리는 조공형식인 무상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가겠다는 것이다. 그같이 많은 말을 요구한 것은 전투에 필요해서 구입해 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안다. 그런데 환관 200명을 보내달라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의 풍속으로 환관은 거세한 남자를 말하는 것인데 그 수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고려는 우선 말 1,500필과 약간명의 환관을 보냈다. 그러나 그 후 국내사정과 여러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명태조의 요구사항이 실천되지 못 하였던 것 같다. 한산군 이색이 1389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귀국 인사차 홍무황제를 알현했다. 그때 홍무황제(주원장)는 이색에게 말하기를 "짐에게 아들이 여럿이 있는데 그대의 고려에 좋은 가정의 낭자가 있으며, 데려다가 혼인을 맺도록 하라."라는 유시를 주어 보냈다. 주원장에게는 전후 황후로부터의 10여명의 왕자가 있었다. 홍무황제는 아들들의 배필을 고려에서 데려다가 자부로 삼겠다는 것이다. 목은 이색은 한산이씨로 찬성사 이곡의 아들이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 연경에 가서 과거 급제한 재사이다. 그의 아들 이색은 백이정, 우탁, 정몽주와 함께 경학의 대가로서 1391년에 한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명태조 주원장도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정몽주와 이색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던 같다. 그런데 왠일인지 모르지만 주원장이 원하는 결혼문제는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어째든 주원장이 고려인에 대한 호감은 특별하였다. 주원장이 고려인에게 배푼 후의는 그뿐이 아니었다. 당시 고려인들이 요동지방을 드나들면서 중국에 밀무역하는 자가 많았다. 이로 인해서 여명간에 문제가 시끄러웠다. 홍무황제는 고려인이 무단 출입하면서 밀무역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事)에게 전지를 내려 고려인인 중국 경내에 들어와 무역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명하였다.
중국 압록강변 호산장성에 중국 명태조 주원장이 남긴 비석. 당시 조선과의 국경을 확정짓는 의미로 주원장이 직접 하사했다. 이 비석 맞은 편으로 불과 10미터 떨어진 곳이 북한-중국 국경이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주원장이 자부들을 모두 고려에서 데려가겠다고 한 사실과 또 궐내에서 시중드는 환관 200명을 고려조정에서 데려가겠다고 한 일이다. 이는 보통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궐내에 시중드는 환관은 모두 거세된 내시로 그 수가 그리 많을 수가 없다. 그런데 200명이나 되는 내관을 모두 고려에서 데려가겠다고 하였다니 그의 신변에 위험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주원장은 1368년에 남경에 도읍하여 대명황제의 옥좌에 오른 다음 원의 잔재를 소탕하고 1390년경에는 중국 전토를 통일하여 정국의 안정을 기하였지만 그는 신분문제로 인하여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결론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맺는 말 걸인 위국왕(乞人爲國王)이라. 거지가 임금이 되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한고조 유방은 패상정장(沛上亭長)으로 모위(冒危) 8년 풍진에 천하를 얻었는데, 홍무황제 주원장은 걸승으로 15년 풍진에 중국천하를 얻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주원장은 대명황제의 옥좌에 오른 후로 주위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 중압감을 시시각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세속난측자(世俗難測者)는 인심이라고 승전의개가 올릴 때는 환호를 올렸지만, 일단 남경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앉아서 천하를 호령할 때는 인심이 많이 달라졌다. 원나라를 타도하는 혁명전에 가담하여 그를 따르던 장졸들은 이제 주원장의 출생과 성장문제를 가지고 비난 조롱하기 시작했다. 주원장의 전기작가는 당시 주원장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Zhu Yuanzhang after he became emperor. “He felt that everyone was trying to destroy him, everyone was ridiculing him, mocking him”-and concludes that after supreme power came into his hands. 주원장의 전기작가 오한(Wu Han 1909-1969)은 말하기를 주원장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파멸시키려 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를 비웃고 조롱한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무엇 때문에 주위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아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아마도 그의 출생과 성장 과정이 애매하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비방과 모멸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그가 황제의 자리로 오른 후로 가까이서 시중드는 중국인 내관들을 믿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위협마저 느꼈기 때문에 200명이나 되는 내관을 이심전심 통할 수 있는 심복을 본국 고려의 조정에서 데려가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주원장의 출생과 그 성장 과정에는 의문점이 많다. 그가 고려 때 한국의 경상도 웅천에서 태어나 4,5세 때 절에 데려가 양육되면서 학업을 익히고 무술을 연마한 다음 15세 때에 하산하여 여러 방면으로 돌아다니다가 장군이 되어 명나라를 세웠다는 조선에서의 전설의 골자는 그의 전기에서 말하는 어릴 때의 성장 과정과는 별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주원장의 15세 이후의 사정을 말해준 것 같이 보인다. 누가 뭐라고 하던 거지이며, 탁발승이 하늘의 뜻을 얻어 명나라를 세우고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명나라의 황제가 된 주원장은 재위 20년에 고려, 조선에 대한 배려와 환심은 각별하였다. 그가 왜 고려인을 그렇게 친근하게 생각했는지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서기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 고종은 3만 8천 명의 고구려민을 강회(江淮) 이남의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강회는 일찍이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하를 건너 왔을 때, 내호아 장군이 강화의 수군 4만명을 이끌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쫓겨 갔는데 바로 내호아 장군의 수군이 출발한 그 곳이다.
수나라 군과의 대 접전을 벌이는 을지문덕 장군.(살수대첩)
수양제의 침입
수와의 1차 전쟁 이후 고구려와 수와의 관계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문제가 죽고 그의 아들 양제가 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다시금 긴장을 고조하였다. 수 양제는 중원을 평정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선대왕인 문제가 못다한 고구려 정복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양제는 고구려에 계속적인 복종을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의연하게 거부하며 불시에 있을 수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612년(영양왕 23) 수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동까지 진입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요동 정복이 여의치 않게 되자 양제는 30만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서쪽으로 침입해 왔다. 이때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은 후퇴를 가장하고 수나라군을 유인하였다. 전쟁 전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에게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구하고 기묘한 계책을 지리를 다하였소. 전쟁에서 모두 이기니 이미 공이 높구려 족함을 알거든 그만둠이 어떻소.(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는 희롱조의 오언시를 보냄으로서 싸움에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수의 30만 대군은 살수에서 치명적 타격을 받고 겨우 2천여 명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 후 수나라는 613년과 614년에 두 차례나 더 침입을 하였으나 그때마다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18년 전쟁으로 인한 경제의 파탄과 민심의 이반으로 말미암아 당에게 멸망하고 만다. 고구려도 또한 전화로 인해 국력이 많이 쇠잔하여 이후 당과의 전쟁 등을 치루면서 더욱 위축된다.
그보다도 우리가 역사를 통하여 잘 아는 산동반도와 양자강 어구인 양주지방은 일찍부터 대외무역이 발달한 문물의 집산지로 상선의 내왕이 빈번하였다. 바다를 사이로 한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의 내왕이 많았던 곳이다. 옛날에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 이름을 드높인 학자와 승려 장군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 중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 천헌성 장군, 신라의 장보고, 백제의 흑지상지, 발해의 대문예등은 중국의 사적에서 특히 그 이름이 유명하였다. 이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주원장도 신라의 장보고처럼 16세 때에 중국에 들어가 대성한 고려인의 후예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지면을 아끼려고 글을 또 줄이다 보니 문장이 거칠게 되어 딱딱하여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주원장의 탄생설화와 가장 최근의 주원장 전기를 대조하여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확실히 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비한 자료를 가지고 탄생설화의 신빙성을 논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더욱이 주원장 전기의 중국어 원전을 보지 못하고 그 영문번역판을 가지고 검토하였음으로 혹 미심적은데가 있을지 모른다. 주원장의 출생과 그 성장과정을 확실히 하기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사실 역사를 바로 안다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바로잡는 일은 한 두줄 글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역사기술은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기 때문에 증거 문헌이나 관계사료의 제시없이 추상적으로 사실을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나 성실히 추구하여 밝혀 놓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학의 책임이라고 하겠다.
- 백 린 (역사학자) http://www.bostonkorea.com/bbs/zboard.php?id=culture&page=6&sn1=&divpage=1&sn=off&ss =on&sc=on&select_arrange=subject&desc=desc&no=128
- 흔적 남기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펌]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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