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비로
가을이 한결 더 청량해졌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피아니즘을 떠올리게하는
영롱한 날씨다.
들머리 접어들며
유난히 곱게 물든 담쟁이를 찍으러갔다가
뜻밖에 개를 만났다.
어느 분이 당부했던
다 어스러진 슬래이트 지붕은 찍지도 못한 채
자꾸 짖어대는 백구를 뒤로하고
사립문 사진 한장 얼른 찍고
달아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개짖는 소리가 그치자
곧 이전 보다 더 무거운 고요가 찾아왔다.
무거운 고요...
참 가을에 어울리는 단어다.
들머리
한시간 이십분 가량을 물기 머금은 흙길을
올라갔다.
길이 미끄러워
된비알을 오르면서도
경사길을 타박할 여유가 없었다.
아주 짧은 구간을 제외하고는
정상 조금 못미쳐까지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산이랴.
등산이 힘들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문구이다.
이 소박한 글귀 하나가
오늘도 어김없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山菊
감국은 잎이 달고
산국은 잎이 쓰다
단풍색이 깊어졌다.
지난주 해인사 단풍보다 색상이 더 풍성하다.
그러나 황홀한 秋色의
붉은 단풍잎이나 주홍빛의 개옻나무 잎은 덤성 덤성 눈에 뛸뿐
물푸레 나무의 노란잎만 극성스럽레 산을 차지하고있다.
성미 급한 떡갈나무들은
작은 바람에도 소스라지게 놀란듯
우슬 우슬 낙엽을 떨구는데
가을 가뭄에 오갈진 누른 잎들이
쇠녹이 쓴듯 누워져 더 할 수 없이 궁곤스럽다.
산님들이 미끄러운 경사길을 온 힘을 다해 올라 온다.
어디 초등학교 몇회 동기들이
기념으로 등산을 왔는지 주위가 갑자기 소란해진다.
노골적이고 거친 언사에 이어
절제되지 않은 웃음이
막걸리 냄새에 뒤섞여
산중에 퍼진다.
유유상종이라
모임의 즐거움을 이해 못할 바 아니나
초등학교 수준으로 퇴행한 정신은
누가 나서서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멀리 금수산의 영봉이 아련히 보인다.
오늘에야
충주호 방향에서 금수산을 바라 보게되었다.
몇년 전 금수산을 오르며
은빛의 뱀처럼 눈부시게 햇살을 되비추던 충주호를 바라 본 적이있다.
여기서 보니 금수산 산봉우리가 생각보다 훨씬 날렵해 보인다.
지친 몸으로 계단을 타고 금수산 정상을 올랐던 일이 생각난다.
저녁하늘에 걸린 만삭의 보름달도 생각난다.
그날 산머리를 못찾아 고생을 하였지만
비탈 진 바윗길을 오르느라 흘린 땀과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을 안고 돌던
가을 호수의 감성적 정취를 생각하면
꽤 만족할만한 산행이었다.
한폭의 진경 산수화같이 아름다운 충주호
충주호 물길을 막기전에는
이곳이 남한강이었던 샘이다.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이 정선, 영월을 돌아 예까지 흘러 온 것이니
어디 그 물이 예사 물이랴.
이 물들이 두물머리 양구 땅으로 흘러 북한강과 합수되어
한강물이 되는구나.
그 많은 백성 다 먹여 살리는
민족의 젖줄이 되는구나.
빛은 멀리 달아나는가
혹은
다가 오는가.
비단빛 가을을 안고
청라로 몸을 감은 강물이 흐른다
이 물길 위로 구담봉, 옥순봉 그림자
조용히 떨어져 누우면
머지않아 저 호수도 단풍빛에 물들리라.
멀리 첩첩히 이어진 실루엣을 따라
용캐 물길을 내며 빠져나가는
강물의 신비로움이
일찌기 본바없는 佳景이라
몰래 수업을 빠져 나온 소년처럼
들뜬 마음을 가눌 길 없다.
비온 후 따스한 날씨탓에
천지 사방이 물기로 가득하다.
이 비에 세상은 곱게 물들것이나
그리움에 흔들리는 마음은 어찌하랴.
그런 마음 이미 지니고 왔기에
지닌 채 산을 올랐기에,
구름을 살짝머금은 원경이
마치 막 목욕을 하고 나온
처녀의 목덜미처럼 아름다와 보인다.
금수산-가은산-안목산
발길을,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
물리지 않는 풍경
국토의
오장 육부를 굽이 도는 그리움이 가득한 풍경.
제비봉에서
아련하니 아프다
가을 그늘이여
고개 너머 걸린 구름
보고있어도 그립긴 마찬가지다.
秋陰 뒤로
아직도 성글게 남아있는 사랑.
산과 하늘이 만나는 그 언저리 어디쯤 있을
사랑의 그림자.
언젠가 나도 산머리에 걸린 그리움이 될지.
월악산이 왜 저리 멀리 보여야 하는지
월악산을 한번도 오르지 못한 나로서는
도무지 산과 산 사이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
기묘한 모양의 푸른 연봉들이
새끼새의 이소를 바라보는 어미새처럼
나를 기다리는듯하다
나도 한번 월악산을 오르고 싶다.
충주호반으로 빠져들듯한 암능과 인파
집단 자살을 하는 레밍처럼
한떼의 인파들이 충주 호반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간다.
바람도,가을도 마침내 저 모습으로 호수에 들게되리라.
호수는 그 숱한 세월의 그림자 머금 채
거울처럼 눈부시게 존재하리라
마치 싫어서 밀어버리기라도 한것처럼
월악산이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장회 나루
장회 나루 옥순봉 인근에는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 깃던
두향의 묘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 못할 사랑이야기다.
그러기에 다소 작위적으로도 느껴지지만
일설에 밤 퇴계와 낮 퇴계는 많이 달랐다한다.
그러기에 두향이는 열여덟 풋사랑에 연을 메어
그 숱한 세월을 왜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보냈단 말인가.
사랑을 앞에 두고도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것이
그들 사랑의 존치 방식이었다면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린 그들 사랑이
오늘따라
허무해 보일 뿐이다.
산비탈 결진골에
쑥부쟁이 꽃 속 차게 피어있더니
그 많든 가을꽃들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유리알같은 바람
한 소끔 눈물을 쏟고 가면
세상은 어느새 여물어진 풍경.
내 삶에도
바람이 들고
비가 내려
물빛처럼 여물어져 간다면
내 다시 기다림을 두고
하늘을 닦는 일도 없을 터인데.
올해 단풍이 이르다 해도
여기서 만난 단풍빛은 그저 그렇다.
누가 뭐래도
단풍은 곰삭은 묵은지처럼
농익어야 제맛이다.
아직도 밍숭거리기만한 호수 저편의 산색을 바라보다
발아래
풍경에 그만 빠지고 만다.
단단한 단애,
푸르고 매끄러운 능라와도 같은 물길.
무언가 흉중을 꿰뚫고 쏟아드는 청량감.
오려에 남은 풋나락 냄새를
아직 떨구지 못한 청춘의 미련인줄 알았는데
풍경에 빠져 여전히 울렁이는 내 가슴이 대견해
나는 도무지 카메라에 손을 놓지 못한다.
빠르기로 말할라치면
세월만한게 또 없거늘
물위에
흰 생채기를 내며 지나가는 저 배는 또 무엇인가.
신선한 가을 바람 영접하며
내 마음 또한 여물기를 기도하나니
나는 가을이 남긴 모든것들 앞에
熟慮를 바친다.
36번 국도가 호수 위를 시원하게 달린다.
"네,아마추어가 탈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암능이
제비봉 능선입니다"
과연 그랬다
근거는 희박해도
제일 아름다운 능선임에는 틀림없어보였다.
단성면 안목산
같은 풍경을 두고 시각을 달리하며
계속 사진을 찍기는
옥정호 붕어섬 이래 처음이다.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특별히 담아둘 풍경이 없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세상은 말없이 그냥 세상일 뿐이다.
밀었다 당겼다
풍경을 두고 섣부른 장난질을 해봐도
도무지 不動인것은 내 마음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이 더없이 거칠고 척박하다.
대패질을 하듯
내 마음을 더 깍아내야 할 모양이다.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암능구간을 내려오는 산님들
누구와 다시 오고픈 산이있다.
험하지 않으면서도
내레이션이 가득한 풍경.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 후 기 -
잘 해감한 조개살로 끓인 맑은 조개국처럼 깨끗한 호수.
호수의 이미지에는 언제나 그리움과 안정감이 동시에 깃들어있다.
이 두가지 심리적 정제과정을 겪으며
나는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암능을 타고
호수로 내려왔다.
호수는 저자처럼 시끄러웠으나
내가 오늘 느낀 아름다움의 가치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나는 마치 소중한것을 숨긴 채
은거하려는 도인처럼
황급히 그 곳을 빠져나왔다.
호수는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마치 큰 물고기의 눈처럼
비어 있었다.
가을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기분이어서인지
패색이 짙어가는 야구조차도 담담했다.
The September Song Of A Boy - Yuichi Watanabe
첫댓글 멋지고 아름답네요. 고맙습니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단풍이 물드는 충주호반과 산군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단풍은 온 몸으로 느끼면 더욱 아릅답습니다
가히 절경입니다.
대한 민국 구석구석 좋은곳이 많습니다
오르지 않는다면 산이 아니겠지요....즐감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풍경이든 농익은 사람들이든
가을은 늘 길 위에서 머물고만 싶네요
가을은 멜란코리를 느끼는 남자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길을 떠나면서 가을을 느끼면 더욱 감사한 삶이 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