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9일 정오 평양의 TV에는 지긋한 나이의 상복차림의 남성 아나운서가 침통한 소리로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동지의 서거를 최대의 애도로서 전 인민 전 당원에 고함」이라 발표하였다. 뉴스는 순식간에 세계에 전파되었다. 일본에서도 NHK TV가 정오뉴스를 막 시작하였으나 12시 3분에 다른 뉴스를 중단하고 김일성의 사망을 보도하였다.
평양 중심부 만수대의 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김일성의 동상 앞에는 순식간에 만 여명이 몰려서 울부짖고 땅을 치며 소리 내어 우는 눈물바다로 변했다. 사인을 전하는 「의학적 결론서」가 사망뉴스 30분 후에 공표되었다. (김일성동지의 질병과 사망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 왔었다. 거듭된 정신적인 과로로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하여 심장쇼크를 일으켰다. 즉시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쇼크가 악화하여 1994년 7월 8일 2시에 사망하셨다. 1994년 7월 9일에 실시된 병리해부검사에서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정되었다. (1994년 7월 9일)
신처럼 받들었던 김일성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태에 북한의 인민들은 망연자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수령님은 백세까지 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장수연구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어제까지 원기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왜 이처럼 급작히 죽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은 김일성 사후에 북한을 탈출한 수 십 명으로부터 필자가 얻은 감상의 일단이다. 사인을 둘러싸고도 은밀하게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 체제하에서는 당국의 발표대로 믿는 사람이 압도적이지만 그 중에는 김정일이 죽인 것은 아닌가? 혹은 어떤 쇼크를 주어서 죽게 한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도 소문으로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의학적 결론서」를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먼저 의심스러운 것은 사망한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는 점이다. 김일성은 어디서 죽었는가? 후에 미국에 언론인 오바도퍼가 김일성의 장의식때 북한의 고관과 접촉한 재미한국인기자 문명자씨로부터 얻은 정보라며 묘향산 특각(별장)에서 사망한 것이 밝혀졌다. (2개의 코리아, 공동통신사 p54)
또 한국의 언론이 우종창씨도 김일성 사망 직후에 중국 연변에서 북한의 상층부와 접촉이 있는 중국인의 취재에 의해 이것을 확인하고 있다. (주간조선, 1994년 8월 4일호) 묘향산 특각은 평양에서 북으로 160km. 자강도와의 도경에 가까운 평안북도의 산중에 있다. 풍광명미하여 김일성 마음에 든 별장이다. 김영삼 대통령을 이곳으로 모실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해부는 7월 9일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시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7월 9일의 가장 빠른 시간이 오전 0시에 해부를 실시하였다고 한다면 사망한 7월 8일 오전 2시로부터 22시간 후가 된다. 시체는 그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겠는가? 다음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해부한 날짜는 훗날 사라지고 만다.
사망시간 오전 2시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우종창씨는 사망은 7월 7일 밤 9시부터 10시라고 말하고 있다. 김일성의 장의에 참석한 재일조선총련의 한덕수 의장은 7일 밤에 죽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말하겠다. 사망시간이라는 오전 2시는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는 시간대이다.
측근도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잠들었을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소란스러운 시간은 아니다. 사망원인은 심근경색과 심장쇼크의 합병증으로 되어 있다. 잠자던 심야에 발작에 의한 돌연사라고 한다면 의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우선 떠오른다. 참으로 바라는 시간에 바라는 병으로 죽었다는 느낌도 들지만 일단은 액면대로 긍정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 「의학적 결론서」를 부정한 내용의 기록이 나중에 김정일 공인의 출판물에 나타나게 된다. 김일성 사망 3년 후인 1997년 6월 북한의 문학예술종합 출판사에서 출간된 장편소설 「영생」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앞서 나왔던 「불멸의 역사」라는 김정일을 칭송하는 시리즈 중 한권이다.
저자는 백00과 송상원의 두 사람. 두 사람의 경력도 아무 기록도 없다. 개인명의 책이지만 북한에서는 당의 승인 없이는 개인에게 출판의 자유가 없다. 일반적으로 어느 사회주의국가이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든 극히 당연한 언론출판사의 자유는 없다. 근대민주주의 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교회와 영주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있었던 중세암흑의 나라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중에서도 북한은 최악의 사회주의국가이며 지금은 사회주의국가라 하기에는 주제 넘는 군사적 봉건국가이다. 그러한 나라에서 출판된 책은 모두 독재자 김정일의 의도대로 인민을 언론 통제하는 수단이다.
「영생」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김정일이다. 예로서 개인이 마음대로 김정일에 대한 것을 쓰게 되면 확실하게 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총살당할 것이다. 김정일이 어용작가들에게 직접 이렇게 쓰라고 지시하여 쓰게 한 것으로 실제의 저지는 김정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하고 「영생」이라는 소설을 읽으면 된다.
이미 서술한 것처럼 동경의 백봉사에서 나온 번역본은 중요한 부분이 수정되었기 때문에 인용부분은 원문에 따라 내가 번역하였다. 내용은 1993년 말에서 1994년 7월 20일까지의 김일성 죽음을 애도하는 중앙추도대회까지의 7개월간을 묘사한 글이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1994년 초부터 미·북 핵 대결이나 카터의 조정, 김일성의 죽음 등 실제 사건을 중심으로 쓰고 있다. 김일성 죽음의 전후가 흥미롭다. 전에 전문을 소개한 「의학적 결론서」의 두 군데 내용이 「영생」에서 삭제되었다.
「즉시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쇼크가 악화되고 ····」중에서 「심장쇼크」가 지워졌다. 또 하나의 「1994년 7월 9일에 실시된 병리해부검사 ····」의 날짜가 삭제되고 「그 후 실시된 병리해부검사 ···」로 바뀌어졌다.
「심장쇼크가 악화」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의문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또 당초 발표처럼 병리해부를 7월 9일에 실시했다고 한다면 사망했다고 하는 8일 오전 2시부터 7월 9일의 가장 빠른 시간까지 22시간이나 유체를 방치한 것으로 된다. 그 사이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새로운 의문도 생긴다.
그 의문을 덮어버리기 위해서 날짜를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묘한 일은 다른 데에도 있다. 「영생」의 기술이 「의학적 결론서」와 전혀 맞지 않는다. 「의학적 결론서」에는 김일성의 심장발작 후 즉시 모든 치료를 했고 복수의 의사 진료를 받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영생」에서는 심장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김일성은 오직 혼자여서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로 되어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심장의) 둔통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수령님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리지나 않을가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더욱이 내일 만나기로 약속한 김정일 동지와 못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때 수령님은 왜 그 생각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셨는지?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 이미 창백해진 수령님의 얼굴을 발견이라도 했더라면. 수령님은 혼자였던 것이다. (p398)”
번거로운 경어 투성이의 문장이다. 그 뒤 김일성은 의식의 혼탁 속에서도 한국 대통령과의 회담에 관한 결재문서에 싸인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내고 “고통과 싸우면서 그것을 끝내자 번개 치며 뇌성병력이 요란한 가운데 숨을 거뒀다”라고 끝을 맺었다.
김일성은 왜 의사나 비서 또는 경호원 등 누군가를 부르지 않았을까? 「영생」은 그것에 대해서 평화롭게 잠들고 있는 그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었을 것이다. 수령님은 원래 그와 같은 분이시었다, 혼자 아픔을 견디면서 일을 하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민을 배려하는 화신처럼 묘사하고 있다. 혼자 죽었다는 것은 혹시 의사가 없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된다. 혹은 있기는 있었지만 전화가 끊어졌다든가 하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의혹 속에는 안제나 의사의 문제가 따르고 있다. 다음에 그것을 알아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