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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대한의 뿌리 역사 문화, 홍산문화의 비밀
권성호 기자
반만년 역사, 배달겨레를 말하고 다니면서도 정작 그 문화의 원류가 무엇이고,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대한의 뿌리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답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대한의 뿌리 문화인 홍산문화에 담긴 문화 코드의 비밀을 밝혀본다.
한국은 중국에 사대했던 조선시대를 넘어서면서 일제의 지배를 받고, 이후 미국이라는 외세의 개입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미국이라는 힘의 영향 아래에서 기독교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해 왔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사대사상이 우리 정신 속에 뿌리깊이 박히고, 일제시대 이후로 우리 역사와 정신사가 말살된 상태에서 미처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서양문명의 홍수에 다시금 정신을 팔린 것이다. 조선시대의 중국 사대주의가 서양 사대주의로 대상만 바뀌었다. 아직도 우리는 정신문화에서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문화 사조는 불행히도 역사학에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과거의 찬란한 역사와 문명을 이야기하면, ‘국뽕’, ‘환빠’로 무조건 매도당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이름인 대한민국의 ‘한’이 무슨 뜻인지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는 학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뿌리 역사가 송두리째 왜곡되고 뿌리 뽑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것처럼, 우리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시작되었다고 계속 가르쳐야 할까? 과연 정말로 우리의 과거가 비참하고 자랑하지 못한 문명이었을까? 우리 대한의 뿌리 문명의 비밀을 밝혀 보자.
요하문명과 홍산문화
지금 중국의 국경은 만리장성 바깥 만주까지도 포함한다. 청나라 때 국경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경이 청나라 이전의 국경이나 문화 권역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청나라 시기만 해도 만주는 신성한 땅이라 하여 한족漢族의 출입이 금지되고, 만리장성 바깥은 한족의 영역 바깥 야만지역으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이 만리장성 바깥 지역에서, 소위 제5의 문명이라 불리는, 20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굴이라 할 ‘홍산문화’가 발굴되어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소위 홍산문화라 불리는 이 문명은 요즘 학계에서 ‘요하문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세계 주요 문명이 강의 이름을 따라서 황하문명, 인더스 문명 등으로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은 홍산문화로 많이 알려진 이 문화권은 광의의 홍산문화(요하문명)와 협의의 홍산문화(우하량·홍산 중심 문화)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요하문명 발굴과정과 발견자
요하문명 발굴은 일본인 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때여서, 일본인이 이 지역 연구를 먼저 시작한 것이다. 도리이는 1908년에 적봉 일대를 조사하여 60여 곳에서 신석기 유적을 발견하였다. 이후 스웨덴 지질학자 안데르손(John Gunnar Andersson, 1874~1960)이 1921년에 후홍산문화라 일컬어지는 ‘소하연문화’ 유적을 발견했다. 이어서 프랑스 신부 리상(Emile Licent)과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 1920년대에 채도 조각을 발견하였다. 저명한 철학자인 양계초의 둘째 아들 양사영梁思永이 1930년 말에 2개월간 조사를 마치고 대대적인 발굴을 계획했지만 만주사변으로 좌절되었다. 요하문명이 20세기의 세계적 발굴이 된 계기는 1970년대에 내몽골 적봉 지역에서 C자 모양 옥룡이 발견된 것이다. 이 유물은 중국의 상징인 용을 형상한 것으로 여겨져서 중국학계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했다. 초기에는 발굴된 유적과 유지가 적었지만, 지금은 홍산문화만 해도 1천여 곳 이상 발굴되었다. 요하문명은 현재 황하 유역의 ‘앙소문화仰韶文化’와 함께 중국 문명의 양대 시원으로 여겨진다.
홍산문화의 성격
홍산문화의 성격은 우실하 교수의 『고조선 문명의 기원과 요하문명』에 잘 정리되어 있다. 내용의 핵심만 정리해 본다.(위 책 56~58쪽)
1 홍산문화 단계에서 발달된 농경사회로 접어든다. 2 동북아시아에서 최초로 ‘계단식 적석총’이 나타난다. 아울러 ‘돌무덤’이 많이 나온다. 3 우하량 유지遺址에서는 제단·여신전·적석총 즉 이른바 총묘단塚廟壇이 나오므로 당시에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본다. 4 옥 유물이 풍부하게 발굴되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에 옥기시대를 넣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5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동銅 제품 중 하나인 ‘동 귀고리’가 발견된다. 6 다양한 옥기가 부장품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권력이 분리되고 신분 계급이 나뉜 사회였다. 7 홍산인들은 편두 관습이 있었다. 8 이 외에 복기대 교수는 홍산문화에서 천문 관측 유적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국가 단계의 홍산문화
여러 시기의 문화권 중 우하량에서는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총묘단塚廟壇이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동기 시대에 와서야 국가가 출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낡은 학설이 되었다. 금속 문명이 없던 아메리카 대륙의 잉카는 지금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화려한 문명을 자랑했고 국가로 부를 수 있는 사회였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불리는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는 특이한 문화를 보여준다. 흔히 거주민이 정착하고 나서 문명이 생겼다고 하는데, 괴베클리 테페는 주변에 농경과 주거의 흔적이 전혀 없다. 이 문명 발굴로, 농경과 정착에서 문명이 생겨났다는 기존 학설이 깨지고, 종교적인 문제로 사람들이 모여서 연 문명이 먼저 생겨났다는 학설이 대두되었다. 신을 섬기기 위해 제단을 건설하고 문명을 건설한 것이 괴베클리 테페 유적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거대한 제사 유적이 나타나면 국가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석한다. 축구장보다 큰 우하량의 제천 유적을 근거로 학계는 홍산문화를 국가 단계의 문화로 해석한다.
중국 학계에서는 우하량 유적에 대해서 ‘신비의 왕국’, ‘고국古國’으로 부르고 있다. 그들 문헌에는 홍산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갑자기 나타난 이 문명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 문화의 성격은 『환단고기』를 통해서만 정확하게 풀 수 있다.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홍산문화의 존속 기간은 약 1,500년이고 환웅족과 웅족이 결합해서 탄생한 ‘배달’의 존속 기간은 1,565년이다. 우하량에서 발견된 여신과 제사 유적, 곰의 턱뼈와 곰 발 소조상은 이 문화를 배달과 연결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중국은 우하량의 곰 관련 유물을 근거로, 요하문명을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족黃帝族의 발생지로 주장한다. 『사기』에 황제가 ‘유웅有熊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되고 우리는 안 될 이유가 있는가? 중국이 하면 옳고 우리가 주장하면 허무맹랑한 ‘국뽕’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 문제는 추가 발굴과 후속 연구를 통해서 더 검증이 필요하다.
역사는 전쟁이다.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서 교육하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축소해 버리고 없다고 한다. 어째서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주장하면 안 되고, 외국이 심어준 중화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한국과 인류의 시원문화
요하문명은 최고 9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히 인류의 뿌리 문화, 시원문화이다.
요하문명의 존속 시기를 보면 요하문명에서 발견된 문화 요소는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문화의 뿌리임을 알 수 있다.
1) 천원지방 제천 유적
우하량 유적에서 발견된 총묘단 유적은 전방후원前方後圓,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모양을 하고 있다. 천원지방은 글자 그대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하늘의 덕성은 원만하고, 땅의 덕성은 방정하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의 덕성을 닮아 천지와 하나 되려 한 선조의 문화의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천원지방 구조는 강화도 참성단과 일본의 15세 응신천왕 왕릉에까지 이어진다.
3단으로 된 원형 제단은 현재 중국 자금성의 천단과 대한제국의 원구단에서도 볼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문화 DNA가 전해진 것이다. 이런 제단에서 제사를 올린 대상은 하늘의 최고신인 상제上帝였다. 그래서 요하문명은 우주의 최고신에게 제사를 지낸 뿌리 문화라 할 수 있다.
2) 용봉문화의 원류
요하문명에서 용봉龍鳳 문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의 대통령 문양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한국의 상징은 봉황이고, 중국의 상징은 용이다. 중국이 요하문명을 적극 발굴하게 된 계기도 요하문명에서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유물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용봉문화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용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용은 천자에 비유된다. 제천단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낸 문화라면, 용과 봉은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사장, 대행자를 상징한다. 용봉문화를 다른 말로 하면 ‘천자天子 문화’이다. 천자는 ‘천제지자天帝之子’가 그 본래 말이다. 동방족은 예로부터 자신을 상제上帝의 아들로 여겼다. 그 상징이 바로 용봉 문화인 것이다. 편의상 앞에서 용을 중국의 상징, 봉황을 한국의 상징이라 했지만, 본래 용봉문화는 동이족 문화였다. 중국의 왕대유王大有는 『용봉문화의 원류』라는 책에서, ‘용봉문화 모두 동이족이 그 뿌리’라고 했다.
용봉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분은 태호복희씨와 염제신농씨이다. 일반적으로 두 분을 중국인으로 알고 있지만 중국 역사책에도 분명히 동이족으로 나와 있다. 이 용봉문화는 요하문명인의 이주에 따라 멀리 유럽, 아메리카까지 전해졌다.
3) 3수 문화와 칠성 문화의 원류
한국인만큼 3을 좋아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3에는 다양한 문화 코드가 존재한다. 한국인은 하늘의 최고신을 삼신상제三神上帝 또는 삼신三神이라고 불렀다. 신이 셋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의 신이 세 가지 덕성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에 삼신상제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3수 문화의 원형도 요하문명에 보인다. 또한 칠성문화의 원형도 나타난다.
4) 수행문화의 원류
요하문명에서는 반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모은 수행하는 모습과 입을 벌리고 주문 수행을 하는 모습의 토기도 많이 발견된다. 이런 토기를 보면 당시 요하문명인들의 정신세계가 무엇을 지향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다급해진 중국과 동북공정
중국 사람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주변은 오랑캐라 여겼다. 이른바 중화사상이다. 전통적으로 만리장성 바깥은 중화민족의 문화권역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땅이었다. 만리장성은 무엇인가? 장성의 바깥은 중국 땅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미개한 족속이라 여긴 요하 유역에서 황하문명보다 1천 년 이상 빠른 신석기문화가 확인되었다. 이에 당황한 중국은 동북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 등을 통해서 이 지역의 문명을 중국의 시원 문명으로 끌어들였다.
이제 요하문명은 중국과 동북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명이 되었다. 미국 학자들까지 함께 발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홍산문화를 연구하려 하지 않는다. 홍산문화가 단군조선과 연결되는 면이 많은데도 오히려 우리와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다. 홍산문화를 제대로 연구해 보지도 않고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부정을 위한 부정은 올바른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요하문명 전문가인 우실하 박사는 국내 학계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비파형동검이 분포하는 만주와 요서 지역을 ‘고조선의 세력 범위’로 본다. 이렇게 고조선의 문화권역으로 인정하면서도 이 지역에서 발견된 요하문명이 우리와 상관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는 사이 중국에서는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중국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족黃帝族이라 주장하면서 요하문명을 중국 시원문명으로 끌어안았다. 이런 중국의 행태를 묵인하면 요하문명은 중국문명이 되고, 요하문명 지역에 있었던 단군조선과 단군조선을 이은 부여, 고구려, 백제도 중국의 아류가 될 뿐 아니라, 한국이 중국에서 발원한 국가 즉 속국이 되어 버린다.
동북공정은 이미 완료되어 전 세계에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 학계에서는 국민 세금을 들여 만든 지도에 중국의 한사군漢四郡을 한반도에 있었다고 표시하였다. 더욱이 한국사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버드대에까지 가서 발표하고 왔다. 우리 고대사와 문화를 중국에게 송두리째 빼앗기는 이런 사태에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홍산문화는 우리와 무관한가?
복기대 교수는 요하문명이 요서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여 발전한 문화라고 밝혔다. 후대에 앙소문화에서 영향 받은 것도 있지만 그 기원은 자체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통형 질그릇이 소하서문화에서 먼저 시작된 점, 둘째 옥기 역시 소하서문화에서 시작해서 홍산문화로 이어진 점, 셋째 돌을 사용한 무덤 양식은 이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고유한 문화 요소라는 것이다.
우실하 교수는, 중국 학자들이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존재했다고 하는 ‘방국 단계의 대국’이 단군조선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요하문명은 주변 문명과 교류하고 앙소문화에 영향을 주어서 중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그 문화가 한반도 쪽으로는 전해지지 않은 것일까? 중국 고고학의 원로인 쑤빙치蘇秉琦 박사는, 요하문명이 앙소문화와 주고받은 문화의 길을 ‘Y자 벨트’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우실하 교수는 ‘A자 문화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요하문명이 중국과 한반도 모두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우 교수에 따르면, 소하서문화와 흥륭와문화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빗살무늬토기는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고 만주와 한반도로 연결된다고 한다. 또 흥륭와 문화에서 보이는 옥결玉玦은 동이족의 분포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된다. 석관적석묘, 토광적석묘 같은 돌무덤은 전형적인 동이족의 묘제이고, 계단식 적석총은 고구려, 백제, 가야, 일본으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골복骨卜 문화, 천지인 관념, 원방각圓方角 관념이 동이족과 공통된다. 특히 3수 세계관은 중국 신선사상에 그대로 전승되고, 우리의 선도, 풍류도, 대종교, 천도교 등의 고유 사상과 민족종교에 그대로 전승된다.(『고조선 문명의 기원과 요하문명』, 675~677쪽)
역사 독재 시대의 종말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요하문명은 중원으로도 전해졌지만, 문화의 핵심 요소는 한반도 쪽으로 더 많이 전해졌다. 그런데도 이 문명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가? 과거의 찬란했던 문명을 말하는 것은 유사역사학이 아니다. 역사는 결코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식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났다. 정보 전달 수단이 놀랍게 발전한 세상에서는 어떤 집단이 정보를 독점하여 세상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다. 그리하여 역사가 강단사학자의 전유물인 ‘역사 독재’ 시대도 끝나게 된 것이다.
대한인大韓人들이 식민지 유산(colonial legacy)과 문화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대한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역사광복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어둠의 역사, 자기비하의 역사를 청산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들이 뿌리 문화의 비밀을 밝히고 원형문화를 회복하는 진정한 한국인으로 거듭나야 할 때이다.
첫댓글 한국인이 젤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