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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해설 II" |
[석지명]법화경요점-⑩옷 속에 숨겨둔 구슬 "도달점과 과정이 다르면 빨리 과정을 끝내고 도달점에 이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수행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에는 의주(衣珠)의 비유가 있다. 먼저 살펴 본 삼주설법은 부처님의 가르침, 제자의 고백, 부처님의 인증과 수기의 순서로 이어지는데, 나타나는 수기를 <비유품>의 불난 집 비유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교리적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수기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가 될 성품이 똑같이 갖추어 있는냐의 문제가 떠오른다. 둘째, 수기는 머나 먼 미래세에 일어날 성불을 예언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작은 수행이라도 있으면 그 자체가 성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긴 세월 동안 닦은 후의 성불과 찰나의 수행이 찰나의 성불을 만든다는 말은 어떻게 상충됨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셋째, 수기는 <<법화경>>의 밑바탕을 이루는 꽉 차있다는 사상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오백제자수기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설법제일인 부루나존자의 다겁생래(多怯生來) 공덕을 찬탄하신다. 부루나존자는 과거 90억 부처님의 처소에서 불법을 지키고 능변으로 설법해서 무량아승지의 사람들을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했다고 한다. 부루나존자는 과거와 만찬가지로, 미래에도 설법제일로 불법을 펼 것이며 무량아승지겁이 지난 후에 법명여래(法名如來)라는 이름으로 성불할 것이라고 부처님은 부루나 존자에게 수기를 내린다. 그 자리에서 부루나존자의 수기를 보고 부루나 존자를 부러워하는 나머지 제자들의 마음을 알아보신 부처님은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수기를 내린다. 천이백제자 중 부루나존자가 먼저 수기를 받고 나머지 아라한들이 다 수기를 받았기 때문에 수기를 받은 제자들의 숫자를 정확히 표시하면 천이백제자수기품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천이백제자중에서 특별히 오백제자들이 보명여래(普明如來)라는 같은 이름을 받았기 때문에 <오백제자수기품)이라고 이름했다. 부처님으로 부터 수기를 받은 오백 아라한들은 기뻐 날뛰면서 자신들이 아라한과를 얻은 것을 구경의 열반을 얻었다고 잘못 생각한 것에 대해서 유명한 의주(衣珠)의 비유로 부처님께 사뢴다. 친구집을 방문한 어떤 이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이 때 친구는 나랏일로 잠든 친구를 남겨둔 채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술 취해 잠든 친구가 깨어나면 돈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하고 아주 값비싼 보석을 잠자는 친구의 옷 속에 넣어두고 떠났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그 사람은 옷속에 있는 보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백방으로 비렁뱅이 생활을 하면서 유랑하며 고생을 하다가 먼 훗날 보석을 옷속에 넣어주고 떠난 옛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보석을 넣어준 친구는 그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생하며 유랑한 사람에게 옷속의 보배를 이야기해 준다. 그 보석이 지금도 있거늘 알아보지 못하고 고생하면서 살기에만 바둥댄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냐고 말해 주고 지금이라도 그 보배를 꺼내 팔면 어떤 것이든지 다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오백제자들은 이 의주(衣珠)의 이야기를 부처님께 사뢰면서 자신들이 부처님의 일승법을 알지 못한 것은 마치 그 술취한 이가 옷속의 보배를 알지 못하고 헤맨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 비유에서 술취한 이는 우리 모두를 뜻한다, 보배 구슬은 부처님의 일승법을 의미하고 보배를 넣어 준 친구는 부처님을 뜻한다, 눈앞의 집착으로 보배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미혹으로 참가치의 길을 알지 못한 것과 같다. 보배를 알아보지 못해 고생하며 유랑생활을 한 것은 일승법을 몰라보고 작은 법에 만족해서 유랑한 것과 같다, 보배 구슬을 현재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본래 부처이거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수기란 성불의 기약이므로 부처가 본래대로 이루어져 있거나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야 한다. 부처가 될 성품이라고 하기보다는 본래의 부처로 되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더 생동감이 있을 것 같아서 필자는 본래부처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수기에는 본래 부처나 불성이 있어야 하므로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제자들이 그 수기의 의미를 보배구슬의 비유로 부처님께 고백한 것이다. 의주의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천성적으로 본래 부터 있다는 참다은 삶을 살 수 있는 권리, 자질, 능력, 가치 등을 한꺼번에 나타낸다. 한 마디로 그 보배 구슬은 우리가 지닌 불성이나 우리의 본래 부처를 의미한다. 보배구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굶주려서 헐떡인다. 물질적으로 헐떡거리고 정신적으로 헐떡거린다. 부처님의 수기는 우리에게 한없이 긴 시간의 기다림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무리 긴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그 긴 시간에 대해서 멀다는 생각이나 지루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수행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긴 시간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 에게는 그 긴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 긴 시간이 한 시간이 되던, 억천만겁이 되든 상관이 없다. 도달점과 과정이 다르면 빨리 과정을 끝내고 도달점에 이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수행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래서 억천만억 세계의 억천만억 부처님을 공양한 후에 성불한다고 하더라도 그 긴 시간에 대해서 걱정할 것도 답답할 것도 없다. 그 긴 시간을 일념으로 수행하는 곳에 이미 부처는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행동은 항상 현재에서 이야기되므로 그 현대는 모든 미래세를 다 포함하는 절대 현대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수기를 주실 때 긴 시간 후에 성불하리라는 말씀과 불도를 닦으면 그 수행 자체가 바로 성불이라는 말씀 사이에 상반될 것이 없다. 그 순간의 불도행이 바로 성불이고 그 성불이 바로 영겁 수행이기 때문이다. <방편품>에서 우리는 <<법화경>>의 대의를 나타내는 게송을 읽었다.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즉 '눈앞에 보이는 일체의 사물이 본래부터 열반의 자태와 같은 완전한 모습이라 불자가 도를 행하기만 하면 내세에 부처를 이루리라.' 열반의 자태가 이 현실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대로 열반이니 도를 행하면 내세에 부처를 이룬다는 말씀이다. 진정으로 불법을 받아들이고 <<법화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에게 있어서 이 게송에서의 '내세'라는 것을 현재로 풀이하거나 억천만억겁이 지난 미래로 풀이하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 수행자에게는 현재와 미래가 이미 지워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 한 시간과 억만겁이 지워져 버린, 아니면 그 둘이 하나인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불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수기를 내릴 때는 반드시 긴세월의 시간과 함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수행을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현재에 불도를 닦는 일은 아직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수행 자체가 성불이라는 말씀과 어긋나는 듯이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무량한 숫자의 부처님을 전혀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일심으로 공양할 각오와 자세가 된 사람에게는 한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과 많은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 사이에 전혀 다름이 없다, 한 부처님의 공양속에서 많은 부처님을 공양할 수 있고 많은 부처님의 공양속에서 한 부처님을 공양할 수 있다. 많은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과 한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이 하나가 되어버린 그 경지에서는 처처(處處)의 수행이 바로 성불이 된다. 부처님의 수기를 이해하면서 긴 시간을 지나고 많은 부처님을 공양하는 문지가 있는 그 자리에서 불도를 닦기만 하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말과 전혀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중에 우리는 <<법화경>>의 기본사상인 '꽉 차있다는 사상, 서로 포함하고 있다는 사상, 서로 갖추어 있다는 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다. 즉 현재의 일념은 모든 시간을 다 갖추어 있다는 것, 이 자리의 일념은 모든 공간을 다 갖추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셈이 된다.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물 한가지 한가지는 다른 사물을 다 포함하고 갖추고 있어서 모두 대표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순간, 한 공간의 수행이 모든 시간, 모든 공간의 수행과 성불을 대표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⑪법사의 자격 여래의 일행으로 여래의 방에 들고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야..... <<법화경>>을 읽으면서 수행이 곧 성불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법화경>>은 우리에게 어떤 수행을 하라는 것인지 궁금하다.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불도를 자신의 공덕이나 깨달음을 위해서 닦으면 공덕이 되지만 자신의 수행이나 깨달음을 남에게 전해 주면 바로 전법이 된다. <법사품>에서 말하는 법사란 법을 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법화경>>은 어떤 수행자와 법사를 가르치고자 하는지 그것이 <법사품>의 과제이다. 먼저 <법사품>의 수행내용을 읽어보자. <<법화경>>전체나 <<법화경>>에 있는 한 게송의 구절이라도 수지 독송하고 해설하며 서사하는 사람, 이 경을 듣고 잠시라도 기뻐하는 이는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부처가 되리라. 가만히 한 사람을 위해서 <<법화경>>의 전체나 또는 한 구절만이라도 설한다면 알지어다. 이 사람은 여래의 사절이며 여래의 일행이 되느니라. 하물며 많은 사람을 위해서 설한다면 어떻겠는냐? "약왕아, <<법화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해서 이 경이 있는 곳이라면 탑 안에 별도로 사리까지 안치할 필요가 없나니, 어째서뇨. 이 경속에 여래의 전신이 이미 있기 때문이니라." <<법화경>>을 마음으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면 그 사람은 바로 여래의 사절이고 여래의 일행이며, 여래가 될 사람이라고 때문에 별도로 사리를 모실 필요가 없다고 한다. <법사공덕품>에서는 <<법화경>>을 수지.독송.서사.해설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청정해져서 보통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초능력을 발휘한다고도 한다. <법사품>이나 <법사공덕품>에서 똑같이<<법화경>>을 신봉하는 다섯 가지 공덕이 여래나 여래의 일행이 되는 조건임을 강조한다. <<법화경>>을 신봉하는 다섯 가지 공덕이 여래나 여래의 일행이 되는 조건이라고 하는 말은 이 다섯 가지를 행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공덕을 행하는 사람을 오종법사(五種法師)라고 부른다. 먼저 <<법화경>>을 수지하는 것, 즉 마음으로 받아 지닌다는 것은 몸과 입과 뜻의 삼업 중에서 뜻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것이다. '수지'는 <<법화경>>의 내용을 이루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면에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다음으로 <<법화경>>을 읽고 외우고 해설하는 것은 입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것이요, <<법화경>>을 쓰는 일은 몸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것이다. 오종법사는 몸과 입과 뜻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셈이다. 또 <<법화경>>을 받드는 다섯 가지 방법 중에서 마음속으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는 것은 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수행에 속하며 해설하는 일은 남을 위한 해설은 자기 공부의 수행이 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수지.독송.서사.해설의 오종법사를 말하면서도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에게 추가의 요건을 부과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약왕아, <<법화경>>을 설하는 자는 어떻게 설해야 할 것이뇨. 여래의 방에 들며, 여래의 옷을 걸치며, 여래의 자리에 앉아야만 비로소 이 경을 설할 수 있느니라. 여래의 방이란 대자비심이요. 여래의 옷이란 인욕심이요, 여래의 자리란 온갖 것이 공하다는 도리이니라. 법사가 <<법화경>>을 설하려면 여래의 방에 들고,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그것은 대자비심과 인욕심을 갖추는 것이요, 공(空)의 도리를 철저하게 체달(體達)하는 것이라고 한다. 공의 도리를 체달한다는 말은 지혜를 체달한다는 말과 같다. 공사상은 바로 반야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야와 자비와 인욕을 갖추어야 <<법화경>>을 설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반야는 단순한 반야가 아니라 육바라밀을 지혜에 회향한 반야이기 때문에 결국 육바라밀의 실천을 의미하게 된다. 또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긍극 목표이다. 우리는 육바라밀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고 또 쓰고 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표현이 필요하다. 바로 <<법화경>>의 표현이다. 대자비심.인욕심.공사상을 나타내는 여래의 방. 여래의 옷, 여래의 자리라는 표현이 얼마나 멋있는가. 공과 도리와 차 있는 도리를 완전히 파악한 상태에서, 인욕심과, 자비심으로 중생을 위해서 <<법화경>>을 설해야 한다는 <<법화경>>의 말씀은 너무도 교묘하다. 1단계로 오종법사는 바로 여래의 일행이라고 말한다. 2단계로 <<법화경>>을 설하려면 여래의 방에 들고,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말한다. 3단계로 여래의 방이란 자비심이요, 여래의 옷이란 인욕심이요, 여래의 자리란 공사상과 참사상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우리가 겁에 질리지 않도록 쉽게 말하면서도 교리적으로 중요한 말은 빼놓지 않는다. 우리의 수행이나 전법은 공사상을 깨달은 바탕에서 자비심과 인욕심을 가지고 <<법화경>>을 수지.독송.서사.해설해야한다는 말을 쉽게 돌려서 표현했을 뿐이다. 공사상에 입각한 육바라밀의 실천 그리고 육바라밀의 수행성과를 반야바라밀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 반야부 경전들을 살펴볼 때 여러 번 보았으므로 또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법화경>> <법사품>에서의 수행방법을 들은 우리는'그렇다면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재가불자들이 또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불자들 가운데는 결제(結制)기간 동안에 선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정을 가지고 집에서 살고 있다. 그 재가불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수행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법화경의 수행법 이전에 기본적인 수행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많은 불자들은 하루에 한번이상 기도하거나 참선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어떤 분은 매일 108배 이상의 절을 하는 불자도 있다. 불자라면 누구나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시간에 쫓긴다면 기도 시간을 짧게 잡아서 <<반야심경>>을 한편 외거나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외워도 좋다. 기도 시간이 길으냐 짧으냐가 문제가 아니라 기도 시간을 갖느냐 안 갖느냐가 문제이다. 이 기도 속에는 몸과 입과 뜻의 삼업을 단정하게 가다듬는 일, 불보살님의 위신력과 은혜를 감사하고 찬탄하는 일, 불경을 외우는 일, 참회하는 일, 서원을 세우는 일 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처음 붓글씨를 배울 때는 붓의 움직임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공부하게 되지만 익숙해지면 일필 속에 여러 단계의 동작이 다 들어 있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초보자를 위해서 청정.감사와 찬탄. 독경. 참회. 서원 등을 나누어서 말하지만 합장을 하고 삼배를 올리는 가운데에도 이 기도의 내용들이 한꺼번에 다 포함될 수가 있다. 참회 속에 계율을 비롯하나 육바라밀의 실천에 대한 반성이 있는가 하면 청정과 서원 속에 참다운 삶의 목표에 대한 확인과 새로운 다짐이 들어 있다. 또 불보살을 찬탄하는 가운데 자신이 잡고 있는 삶의 길을 점검할 수 있다. 참선을 주된 수행으로 삼는 불자도 일단 예불시간은 가지게 된다. 참선하는 이들의 예불 속에는 기도의 대체적 절차가 들어 있다. 참선자의 수준의나 취향에 따라서 초보적 명상을 하거나 단전호흡에 초점을 맞춘 수식관을 하거나 화두를 들고 거기에 집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참선수행을 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다. 선지식의 지도를 받지 않은 참선은 자칫 위험한 자기도취나 낮은 수준의 신기로 빠질 염려가 있다. 또 기도를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매일 절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매일 108배 이상 절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은 절이 마음이나 몸이나 신앙에 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힘들여 절하는 가운데 육신의 한계에 대한 분심이 생기고 그 분심 속에서 깨달음의 이상을 찾는 신심이 생긴다. 시간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조절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불자들은 새벽 시간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찰의 정기법회나 기도에 동참하는 일, 교리를 공부하는 일, 불교교양대학을 이수하는 일, 특별수련대회에 참석하는 일, 지역법회나 가정법회에 참석하는 일, 특별 수련대회에 참석하는 일, 경전과 그 해설서를 읽는 일 등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경전의 수지.독송.서사.해설과 상반되지 않는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⑫초역사적인 본래의 부처님 이십세 밖에 되지 않은 자가 백 세 노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내 아들이라고 하고.... 본래의 부처님은 <<법화경>>의 <종지용출품(從地踊出品)>과 <여래수량품>을 중심으로 초역사적인 무량원겁 전에 이미 성불하셨다. <<법화경>>은 어떤 방식으로 초역사적인 부처님을 드러내는지 그 부처님은 어떻게 이세상에 항상 머무시며 부처님의 상주불멸(常住不滅)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종지용출품>에서 <여래수량품> 까지 읽어보자 제자들이 부처님께 사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는 자신들이 <<법화경>>을 지켜 지니고 읽고 베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사바 세계에 본래 있는 많은 보살들이 경을 지키고 전할 것이니 <<법화경>>의 전승과 홍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한신다. 이때에 땅이 진동하여 갈라지면서 그 속으로 부터 무량억천만억의 보살들이 동시에 솟아오른다. 육만항하사 권속들을 대동하고 있다. 항하사, 즉 인도의 히말라야 산에서 시작하는 갠지스강 줄기의 모든 모래수 보다 육만 배 많은 숫자의 권속들을 한 보살 한 보살이 다 거느리고 있다. 그것을 본 부처님의 제자들은 마음속에 의혹이 생겼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성도하고 나서 중생들을 교화한 지 40여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그토록 많은 대보살들을 교화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자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미륵보살이 일어나서 부처님께 여쭌다. 부처님이 되어 중생을 교화한지 40여 년밖에 되지 않은 부처님이 이 처럼 많은 보살들을 이미 제도한 것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사뢰고 유명한 자노부소(子老父小) 즉 어린 아들이 노인을 가리키며 아들이라고 한다는 비유를 든다. 이십세 밖에 되지 않은 자가 백세 노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내 아들이라고 하고 백세 노인도 20세 청년을 가리키며 이분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좀체로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종지용출품>이다. <여래수량품>에 들어가서 세 번의 간청을 받은 부처님은 중생을 교화한지 4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자신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제자들을 교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선남자들아, 이제 분명히 너희들에게 말하리니 나는 백천억 나유타 아승지겁 전에 이미 성불했느니라. 성불 후에는 이 사바세계에 계속 있으면서 중생들을 교화했는데 열반에 든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다방면으로 말할 것일 뿐 실제는 한번도 열반에 든 적이 없었느니라. 어째서뇨. 만약 부처가 오래도록 세상에 머문다고 하면 박덕한 사람들이 선근을 심지 않아 가난하고 천해지며 교만하고 태만해져음서 부처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이어서 부처님는 죽지 않았으면서도 아들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짐짓 죽었다고 소문만 내는 의사의 비유를 소개한다. 지혜가 있고 약에 정통한 의사 아버지가 타국에 간 사이에 그의 자녀들이 독약을 마시고 약기운에 취해서 실성하기에 이르렀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최고의 약방문에 의거하여 그 자녀들을 위해 조제한 영약을 먹이려 하나 그 약을 먹는 자녀들의 수는 적고 먹지 않는 수가 더 많았다. 그러자 의사 아버지는 자녀들이 약을 먹게할 방편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는 자녀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나의 죽음이 멀지 않았으니 내가 죽은 후라도 부디 이 약을 먹고 너희들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거라"며 유언을 남겼다. 이렇게 타이른 아버지는 타국에 가서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의사의 자녀들은 이제는 의지할 곳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떠나기 전의 아버지가 남긴 약을 먹고 그들의 실성한 병을 말끔히 고쳤다. <<법화경>>의 <종지용출품>으로부터 <여래수량품>에 걸쳐서 부처님은 두 가지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래 부처님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본래 부처님이 상주불멸(常主不滅)로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는 것이다. 자노부소의 비유 즉 어버지는 어리고 아들은 늙었다는 비유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구원겁 전에 이미 성불한 본래의 부처님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의사가 짐짓 죽었다고 하는 비유는 그 본래 부처님이 방편으로 죽음을 보일 뿐 이 세계에 항상 머무시면서 중생을 보살피고 중생에게 이익을 주시는 것을 나타낸다. 구원실성의 본래 부처가 상주불멸한다는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부처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불법을 닦지 않고 윤회의 길을 계속 따라가도 영원의 목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업에 의해서 개나 소로 태어나고 또는 지옥에 태어나더라도 우리의 목숨은 항상 그대로 있다. 우리의 목숨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목숨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전체적 의미에서의 목숨이다. 우리가 전혀 다른 모양, 다른 이름, 다른 개성으로 태어나더라도 변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변화된 것을 우리의 목숨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윤회의 세계에도 목숨은 영원하다. 단지 윤회에 빠진 사람은 한 개체의 순간적인 모양을 자기의 목숨으로 삼아서 태어나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하루살이는 하루에 자신의 목숨을 건다. 작은 미생물들도 마찬가지다. 윤회의 목숨은 계속된다.윤회의 순간적인 개체에 목숨을 거는 것이 꼭 생명에만 관계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도 지옥의 마음으로부터 천상의 마음, 부처의 마음까지도 있을 수 있다. 윤회하는 중생은 어느 순간 어느 한곳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중생의 마음을 붙잡는 세계가 십계 중에서 부처의 세계나 성문. 연각. 보살 또는 천상의 세계이면 좋으련만 타성의 업에 빠진 인간을 붙잡는 마음은 대개 성냄의 결과인 지옥의 마음, 탐냄의 결과인 아귀의 마음, 어리석음의 결과인 축생의 마음, 시기심의 결과인 아수라의 마음 등이다. 지옥의 마음에서 축생의 마음으로 넘어가고 축생의 마음에서 아귀의 마음으로 넘어가는 등 각 단체 마다 없어짐과 태어남을 경험한다. 그래서 윤화하거나 말거나 영원한 목숨을 가진 중생들은 목숨을 버림과 얻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여래수량품>에서 상주불멸하는 본래의 부처님은 우리가 본래의 영원한 우리의 목숨을 알아보는 한 예문을 들어 주신다. 우리는 지금 까지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이 있는 한, 본래의 부처를 알아볼 수 있고 본래의 부처로 돌아갈 수 있다는 수기의 이야기를 귀에 못이 막히도록 들어왔다. 불도를 닦으면 부처님과 우리는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량원겁 전에 성불하셔서 이 세상에 항상 머무시는 부처님의 목숨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목숨이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태어남이나 죽음이 없었다. 단지 그 이름이 있을 뿐이다. 달이 호수에 비칠 때 달이 물에 젖지도 않고 호수가 흔들리지도 않는다. 지금 전세계의 인구는 50억쯤 될 것이다. 달이 하나이지만 50억개의 호수에는 50억개의 달이 뜬다. 한 방송국에서 전파를 보내더라도 50억개의 라디오나 텔레비젼이 있으면 50억 군데에서 방송이 나온다. 방송국의 전파는 인위적인 전자파이지만 인연의 실타래 뭉치에서 나오는 목숨의 파장도 무량억의 목숨으로 나타날 수 있다. <<법화경>>의 꽉찬 정신, 공사상을 뒤집어 차 있다는 사상이 된 상호포함. 상호갖춤의 정신이 바로 이렇게 서로 연결된 본래의 생명을 말한다. 부처와 중생이 똑같이 윤회의 모양속에 있지만 중생은 호수에 비친 하나의 달, 방송전파를 전달하는 한 개의 라디오로 자신의 목숨을 삼는다,. 반면에 부처는 하늘에 떠 있는 본래의 달을 알고 본래의 방송국을 안다. 본래의 생명을 안다. 또 일상생활 속에서 육도의 마음을 경험하더라도 윤회하는 중생은 순간의 그림자와 같은 개체를 목숨으로 삼기 때문에 지옥.아귀.축생. 등 악도 마음의 골짜기를 헤매이기도 한다. 반면에 부처는 본래의 생명을 목숨으로 삼기 때문에 불보살 마음의 산능선을 따라 십계를 조망하며 노닌다. 달과 호수, 방송국과 라디오 사이에는 빛을 발하는 것과 빛을 받는 것, 전파를 보내는 것과 전파를 받는 것이 뚜렷이 구분이 되어 있다. 그러나 본래 생명의 세계에는 이 우주 삼라만상 낱낱의 사물이 다 그대로 달이 되고 호수가 되며 방송국이 되고 라디오가 된다. 서로서로 주가 되고 동시에 종이 된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⑬상불경보살 사람들로 부터 욕을 먹어도 끊임없이 "나는 그대를 업신여기지 안니하오니 그대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니라" 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으니.... <<법화경>>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 나오는 상불경보살의 정신은 불퇴전(不退轉)이다. 수행자의 긍극 목표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가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부처로 보는 것이다, 말로만 세상 사람을 부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행동으로 모든 사람들을 지극한 마음으로 존경할 때 그러한 경지에 오른 사람 자신을 부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부처로 보는 수행을 하거나 선근공덕을 쌓거나 여타의 방법으로 불도룰 닦으려고 할 때 갖가지의 어려움이 생긴다, 그러한 장애는 외부적으로 올 수도 있고 내면에서부터 나올 수도 있다. 수행자의 이상과 그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이 다른 이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핍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 같은 어려움을 뚫고 나가야 할지 먼저 상불경보살에 대한 부처님의 소개를 들어 보아야겠다. 과거이 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정법은 약해지고 불교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으니 그때에 아만이 많은 무리들이 큰 세력을 이루고 반면에 누구든지 공경하는 상불경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행자가 있었느니라. 왜 그 수행자를 상불경보살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는 비구. 비구니. 출가. 재가신자에 상관없이 그들을 찬탄하면서 이런 말을 하곤 했느니라. "나는 그대들을 갚이 존경하고 감히 업신여기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그대들은 다 보살의 도를 행하여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니라" 보는 이에게 마다 이런 말을 하매, 그런 말을 듣고 화를 내고 고약한 마음을 품는 이들이 있어서 욕설을 퍼부었니라. "이 머저리, 무녀리 같은 비구는 어디에서 굴러왔는가? 네가 우리에게 부처가 되리라고 하고 수기를 주나, 우리는 이런 거짓된 수기를 믿지 아니하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상불경 보살은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어도 끊임없이 '나는 그대를 업신여기지 아니하노니 그대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니라.'라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느니라. 이런 말을 할 때 대중들이 몽둥이. 기와. 돌을 던지며 때리나 상불경보살은 피해 달아나면서도 멀리 가서 더울 큰 소리로 외치되 '나는 그대들을 업신여기지 아나하노니 그대들은 다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 라고 하니라. 항상 이런 말을 하는 까닭에 아만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언제나 상자, 아니 불자, 가벼울 경자를 써서 상불경보살이라고 이름했느니라." 상불경보살은 무량겁의 기간 동안 <<법화경>>을 설하고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 육근이 청정해지고 마침내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득대세야, 생각이 어떠하뇨. 당시의 상불경보살이란 바로 이 몸이었느니라. 내가 과거세에 이 경을 수지 수지독송하고 해설. 서사하지 아니했던들 이리나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니라. 당시에 상불경 보살을 업신여겼던 자들이란 어찌 다른 자들이랴. 상불경 보살을 업신 여긴 업보를 녹인 후에 상불경 보살과 만난 인연 공덕으로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오늘 이 모임 중에 앉아 있는 보살.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 등이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이 상불경보살로서 수행을 한 공덕으로 빨리 부처를 이루었다고 말씀한신다. 또 상불경 보살을 몰라보고 업신여긴 사람들도 한편으로는 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 과보를 겪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불경보살과 만난 인연공덕으로 마침내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불교의 경전 속에 나타나는 인물중에서 기독교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과 가장 유사한 이는 이 상불경보살이다. 여러분들은 기독교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말씀을 알 것이다. 바로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마저 내놓으라"는 구절이다. 이 말의 본래 취지는 억울함을 당해서 그것을 풀기 위해 상대와 싸우지 말고 더욱 자신을 낮춤으로써 오히려 상대를 감화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왼뺨을 맞고 오른뺨을 내어놓는 행동은 상대에 대한 일종의 도전일 수도 있다. 그렇게 행동하는 마음속에는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아만에 찬 자신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대응만 도전이 아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주의를 주었을 때, 학생이 주의 내용을 들을 생각은 하니하고 엉엉 울기만 한다면 그 울움이 푹력은 이니지만 선생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 된다. 상불경보살의 수행법 역시 왼뺨을 맞고 오른 뺨을 내놓는 태도 못지 않게 상당히 도전적으로 보인다. 만나는 사람 마다 "나는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으니 당신은 반드시 성불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상대가 "건방지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거냐?" 하고 때리면 멀리 도망치면서도 계속해서 "나는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으니 당신은 반드시 성불할 것입니다." 라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외치는 태도는 자기확신에 취한 모습이다. 여기서 상불경보살에게는 본래 부처에 대한 확신에 차있기 때문에 상대가 무어라고 하든, 어떤 경우가 오든, 자신은 바른 일 바른 말을 하는 것이고 상대의 박해는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불교의 경전, 특히 대승불교의 경전 가운데 나오는 인물로 상불경보살 처럼 상대의 핍박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보살은 찾기가 쉽지 않다. <<법화경>>의 많은 곳에 <<법화경>>을 수지독송.서사.해설하는 오종법사에 대한 박해가 거론되기는 하지만 박해가 있으면 내면적으로 삭이고 피할지언정 상불경보살처럼 대응하는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상불경보살의 수행자세는 핍박을 당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정진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부처는 최고의 이상적인 인격이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전부 업신여기지 않기는 쉽지는 않다, 필자는 언제 뒷산에 올라가서 지저분하게 버려진 많은 쓰레기들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산에 올라와 음식을 먹고는 그 쓰레기들을 자신들이 놀았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 가는 그분들, 그분들과 신한국을 말하고 의식 개혁을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필자의 건방지고 신심 없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우리가 신심(信心)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진정한 신심은 모든 사람의 본래부처에 대한 믿음이다. 인류가 다 부처라고 믿는 신심은 그대로 삼보에 대한 신심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이 본래 부처라는 믿음 속에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에 대한 믿음이 당연히 포함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미래 부처라고 생각하면서 공경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 부처의 행동을 할 것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부인과 남편, 부모와 자식, 친척 친지 등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가 아무리 나쁘고 부족하더라도 각각의 상대가 미래부처가 된다. 아무리 나쁜 사람 예를 들면 폭력. 절도. 강간. 살인 등을 억만번 범한 사람에 대해서도 우린 그를 미래 부처로 모시고 공경한다면 그는 반드시 부처로서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에 의해서 행동한다면 우리는 바로 부처가 된다. 모두가 부처로 보이고 그 부처들을 온 힘과 정성을 다해 공경하는 곳에는 부처 외에 다른 이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믿음과 이 믿음에 의한 수행의 성과에 대해서 주의할 점이 있다. 우리가 주변에 있는 모든 미래부처님들을 공경해 모셔서 그들이 부처로 등장하게 되지만 그들의 행동이 반드시 이쪽의 기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부처님으로 모신다면 시어머니가 부처가 되지만 시어머니라는 부처님이 반드시 며느리 맘에 드는 부처의 행동만을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부처님을 모실 때에는 부처님이 나의 기준에 맞게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처님의 움직임과 말씀에 순응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불경보살은 본래 부처나 미래 부처를 알아보는 수행법도 보임과 아울러 내 마음에 드는 부처가 아니라 부처님에 순응하는 나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⑭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미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함은 우리가 지옥의 계단에서 부처의 계단을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옥속 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부처를 보는 것이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줄여서 <보문품>이라고도 하고 독립적으로 <<관음경(觀音經)>>이라고도 한다 <보문품>에서의 주요과제는 관세음보살을 염함으로써 얻어지는 기적적인 가피를 어떻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범어로 아발로키테스바라 이다. 이 범어를 구마라집은 관세음보살로 번역했고 현장법사는 관자재보살로 번역했다. 관자재라는 번역은 자기수행에 중점을 둔 것이고 관세음이라는 번역은 타인의 교화에 중점을 둔 것이다. 아발로키테스바라에는 자리적인 수행과 이타적인 전법의 뜻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리고 보문이란 보문시현(普門示現)을 말하는 것으로 넓은 문 또는 무량의 문호에 관세음보살의 색신이 두루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보문품>의 줄거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무진의야, 만약 무량백천만억 중생이 어려움을 당해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면 관세음보살은 그 음성을 알아듣고 그 고뇌에서 풀려나게 하리라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더라도 난파당하지 않고 처형을 당할 경우에도 칼이 부러지고 수갑을 차더라도 수갑이 끊어지고 도둑을 만나더라도 도둑이 침범하지 못하느니라. 음욕이 많거나 탐심이 많거나 진심이 많거나 우치심이 많아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거나 공양 예배하면 그 모든 미혹을 여의리라. 여러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중의 단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 보살을 염하면 모든 장애가 소멸되리라. 아들을 구하는 이 딸을 구하는 이 등이 관세음보살을 염한다면 그는 원하는 대로 성취하리라. 관세음보살은 방편력으로 무한의 몸을 나투어서 중생을 제도하나니, 왕의 몸, 장자의 몸, 관리의 몸, 여인의 몸, 소녀의 몸, 장군의 몸, 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이 앞에 나타나리라. " <보문품>의 중요한 주제는 한마디로 말하여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외우기만 하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어려움이 없어지고, 마음이 삐뚤어진면 그것이 바로잡아지고 원하는 바가 있으면 원하는대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지금 까지 단순하게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거나 생각을 해서 마음을 맑게하고 공덕을 쌓고 원하는 바를 성취해 오신 불자님들은 계속해서 그런 관점에서 그와 같은 이익을 염두에 두고 <보문품>을 읽으면 되겠다. 그러나 아직 불심이 깊지 않은 이들은 이 <보문품>을 읽고 관세음보살이 무슨 만사형통 도깨비 방망이 인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중시한다고 들었는데, 왜 초능력적인 기적 이야기만 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보문품>은 결코 기적의 이야기도, 초능력의 이야기도, 만사형통 도깨비 방망이의 이야기도 아니다. <<법화경>>이 지금까지 설명해 온 꽉 참의 사상. 만선성불. 구원성불. 본래 부처를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다. 관세음보살, 이 한마디는 <<법화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모든 가르침의 상징이다. 인연법은 자성이 없음을 알려 주고 자성이 없음은 공함을 알려준다. 지옥은 부처를 포함하고 있고 부처는 지옥을 포함하고 있다. 수행을 하지 않고 악업을 지으면 그 악업은 당연히 미혹과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업을 짓는 대신에 수행을 하면 그 수행은 당연히 본래의 법신 부처 자리를 깨닫게 한다. 악업을 짓고 미혹속에 쌓인 사람에게는 삼초이목이 각기 차이가 있다. 하품의 약초와 상품의 약초가 있고 작은 나무와 큰 나무가 있을 경우, 하품의 약초와 작은 나무는 살아야 할 가치가 없고 오직 상품의 약초와 큰 나무만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수행을 하고 지혜를 발하는 이는 비가 똑 같이 내리지만 상중하품의 약초나 대소의 나무가 각기 나름대로 비를 소화시켜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을 본다. 우리 모든 중생이 능력이나 모양이 다르더라도 각기 자신의 능력만큼 수행을 하기만 하면 능력에 상관없이 모두 본래의 부처로 회복된다는 말이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말 한마디가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수행이다. 우리 중생은 현재 지옥에 있거나 아귀속에 있거나 축생속에 있거나 상관없이 본래 <신해품>에서 보이는 부호장자의 상속권자이고 <오백제자수기품>에서 보이는 보배구슬을 가진 사람이고 <비유품>에 보이는 백우거(白牛車)를 받을 사람이다. <방편품>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선근공덕을 쌓을지라도 본래부처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법화경>>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은 우리 모두에게 수기를 주셨다. 우리는 많은 부처님을 공양하고 무량백천만억겁을 지난 후에 성불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의 일심이 영원토록 흔들리지 않고 지금의 수행이 영원토록 계속될 그러한 자세에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부처이다 부처님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서 경의를 표해서 성불하게 된 부처이다. 우리는 1년이나 10년이나, 100년,1000년을 계산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량백천만억겁을 잡아서 부처가 된다. 100년이나 500생의 기간 동안 이리되든 저리되든 그것은 사소한 과정의 문제이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일심은 바로 무량백천만억겁 동안 흔들리지 않을 마음이요, 수행이다. 우리가 지금 일심으로 관세음보살 한마디를 부른다 함은 꽉참의 사상, 우리 마음속에 있는 본래부처.만선성불.부호장자의 본래적 상속권자, 무량백천만억겁 동안 한결 같이 수행한 여래의 본래성불과 상주불멸 등을 한꺼번에 마음에 되새기고 그 실천을 다짐하는 것과 같다. 본래 부처를 알고 있고 무량백천만억겁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해서 관세음보살을 외울 때, 불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서 목숨을 바꾸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 되겠는가 100년의 일생쯤은 일념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불난 집의 비유에서 장자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문밖에 나가면 여러가지 수례를 준다고 말했지만 밖에 나온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백우거를 주었다. 우리가 방편과 진실의 일치를 알고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외운다면 우리는 이미 본래부처라는 백우거를 받은 것이 되지 않겠는가. 관세음보살이이라는 한마디는 우리가 본래부처의 상속권자 자신임을 알았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 상속권자에게 불을 면하고, 물을 면하고 갖가지 어려움을 면하는 것이 무슨 면제가 되겠는가. 불이 있는 그 자리에서, 물이 있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그를 해칠 수 없는 상속권자가 아니겠는가.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불의 십계(十界)를 계단이라고 한단면 사물의 실상을 여실히 보아서 본래의 부처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지옥이라는 단계에 있는냐 부처라는 단계에 있느냐가 아니라 부처 쪽을 향하고 있는냐 지옥 쪽을 향하고 있느냐이다. 우리가 본래부처 쪽을 향하기만 하면 지옥의 계단, 그 자리에서 바로 본래 부처를 누릴 수 있다. 옷속에 보배구슬을 지닌 우리는 낡은 옷을 벗지 않고도 그대로 부자이다. 장자의 상속권자인 우리는 세수나 목욕을 하지 않고도 대부호이다. 관세음 보살을 부른다 함은 우리가 지옥의 계단에서 부처의 계단을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옥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부처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원하는 바는 모두 성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미 보배구슬의 주인이요 대부호의 상속권자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미 무량원겁 전에 성불해서 이 세상을 떠난바 없는 저 <여래수랭품>의 여래와 동일한 일행임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00만불 짜리 잭폿이 터졌음을 알 때, 그 앞에 25센트 짜리 쿼터를 슬롯머신 속에 몇개 넣고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잃는 것이 아니다. 그 잃음은 오히려 얻음이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함은 우리는 이미 불경을 수지.독송.서사.해설하는 오종법사요, 여래의 방에 들고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은 사람임을 의미한다. 인연의 도리를 알아서, 공의 도리를 알아서, 꽉 참의 도리를 알아서 여래의 자리에 앉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이 다 성취가 되고 모든 일이 다 불도가 된다. 잘못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꿈이 꿈임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꿈속에서의 손해는 손해가 아니라 재미이다. 연극이 연극임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연극속의 이익은 이익이 아니다. 재미이다. 세상이 꽉 차 있음을 아는 우리에게 잘못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지옥 속의 본래부처요 본래부처 속의 방편지옥이다. 상불경보살이 모든 사람을 본래부처나 미래부처라고 하는 말이나 관세음 보살이라고 하는 말이 같은 의미이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⑮일곱 가지 비유와 관세음보살 자기의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해서 불도를 닦기만 하면 각기 다른 능력의 사람들이 똑같이 본래부처로 복귀할 수 있다. <<법화경>>에서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외우는 이 일곱가지 비유들을 한꺼번에 떠올리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관세음보살'이라는 한마디에 법화사상 전체가 들어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또 상호 갖춤, 방편과 진실의 일치, 만선성불, 원인과 결과의 일치, 수기, 본래성불, 상주불멸, 본래부처 등을 집어서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한꺼번에 이해하고 관세음보살이라는 말과 함께 되새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에 <<법화경>>의 중요한 비유들을 동시에 상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 법화경에는 예로부터 유명한 일곱가지 비유가 있다. 이 비유들은 어려운 교리를 쉽게 나타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첫째 <비유품>에 화택의 비유 즉 불난 집의, 둘째 <신해품>에 장자궁자의 비유 즉 부자가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방편과정의 비유, 셋째 <약초유품>에 삼초이목 또는 운우의 비유 즉 부처님의 설법이 구름과 비와 같이 내려서 각기 근기에 따라 이익을 본다는 비유, 넷째 <화성유품>에 화성의 비유 즉 방편으로 거짓 성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쉬게 하고 다시 목표를 향해 나가도록 인도하는 비유, 다섯째 <오백제자수기품>에 의주의 비유 즉 옷에 보배구슬이 감춰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찾는 비유, 여섯째 <안락행품>에 계주( 珠)의 비유 즉 제왕이 상투속에 있는 유일한 보배구슬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는 비유, 일곱째 <여래수량품>에 의사의 비유, 즉 의사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짐짓 죽음을 보인다는 비유이다, 일곡가지 비유룰 한문 용어로만 읽으면 화택비유. 장자궁자비유. 삼초이목비유. 화성비유. 의주비유. 계주비유, 의사비유가 되겠다. 이 일곱 가지 비유가 나타나고자 하는 법화사상을 관세음보살이라는 한마디에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비유들의 공통점을 찾아야 하겠다. 물론 이 비유 하나하나는 각기 독특한 상징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공통점으로 일축하기 보다는 비유 전체를 또는 <<법화경>> 전체를 순간 순간에 아주 빠른 필름으로 돌리듯이 떠올리는 것이 이상적이다. 여기서 이 비유들의 공통점을 찾아서 관세음보살리는 말과 결부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방법적으로 비유들의 공통점을 찾는 과정에서 비유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고 원하는 불자들은 별도로 <<법화경>>을 더욱 깊이 공부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곱가지 비유들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을 차근차근 검토해보아야 하겠지만 그 방법은 비유들을 전부 다시 읽어보고 비교하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먼저 공통점이 되는 구절을 만들어 보고 그 비유 하나하나를 그 공통점 구절에 비교하면서 점검하는 방식을 택하겠다. 필자는 이 비유들의 공통점을 '만사(萬事)가 본래오케이(本來OK)이다. 그리고 힘껏 닦기만 하면 본래오케이로 복귀한다.'는 구절로 잡았다. 좀 이상하기는 하겠지만 지금까지 <<법화경>>을 공부해 오면서 본래부처. 제법실상. 본래불성. 본래열반이라는 말들만 쳇바퀴 돌듯이 돌았기 때문에 본래부처. 본래열반. 본래행복의 경지를 '본래오케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선근공덕이라도 닦기만 하면 되고 능력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해서 불도를 닦기만 하면 각기 다른 능력의 사람들이 똑같이 본래부처로 복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힘껏 닦기만 하면 본래오케이로 복귀한다'는 구절을 썼다. 화택의 비유 즉 불난 집의 비유에서, 불난 집으로부터 뛰쳐나와 장자로부터 흰 소의 수례를 받은 아이들은 우리 중생들이다, 흰 소의 수레는 본래오케이를 뜻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불난 집 밖으로 뛰쳐나온 것은 힘껏 노력한 것에 속한다. 그래서 화택비유는 우리들이 힘껏 닦기만 하면 본래오케이로 회복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장자궁자의 비유에서 궁한 아들의 본래상속권은 우리의 본래오케이로 회복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장자궁자의 비유에서 궁자가 장자의 방편을 따라 자기의 능력껏 노력해서 본래 자기 것인 재산 상속권 또는 본래오케이를 회복했다. 삼초이목의 비유는 운우의 비유라고도 한다. 상중하품의 약초와 크고 작은 나무가 각기 능력이 다르지만 평등하게 내리는 비를 각기 나름대러 받아들여서 각기 독특하면서도 다 같이 필요한 약초를 이루는 것은 본래오케이를 의미하고 크고 작은 약초가 나름대로 빗물을 받아 쓰는 것은 각기 자기의 능력에 맞게 힘껏 노력한 것을 뜻한다. 화성의 비유에서 도사는 부처님이요, 도사의 안내를 받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들이다, 보배가 있는 장소는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 오케이 경지이다. 능력에 관계없이 힘껏 노력한 결과 모두 보배의 장소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의주의 비유에서 옷속의 보배구슬은 우리의 본래오케이다. 미혹한 하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주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친구의 도움도 컸지만 본인 자신이 생활대책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찾아 유랑하는 노력조차 없었다면 보배구슬이 있어도 구한 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계주의 비유 즉 상투속 구슬의 비유에 있어서 강국의 왕이 꼭 주어야 할 사람에게 주려고 상투 속에 숨겨둔 구슬은 바로 우리의 본래 오케이이다. 그러나 강국의 왕은 아무에게나 그 구슬을 주지 않는다. 자기 능력껏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만 그 구슬을 준다. 능력이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힘껏 노력하느냐 않느냐의 문제이다. 의사의 비유에 있어서 의사의 자녀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는 지금 생사윤회하는 병에 걸려 있지만 우리에게는 생사윤회의 병을 고치고 본래 오케이로 돌아갈 약을 줄 의사 아버지가 본래부터 있었다. 방편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 발심하는 낮은 근기들도 아버지가 지어준 약을 먹고 생사윤회의 병이 낳았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본래오케이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법화경>>에서 중요한 일곱 개의 비유는 다같이 '만사가 본래 오케이다. 그리고 힘껏 닦기만 하면 본래 오케이로 복귀한다.'는 구절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일곱 개의 각기 다른 비유를 <<법화경>>에 썼듯이 그 비유들은 각기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공통점을 찾아서 압축해본다면 '만사가 본래 오케이다. 그리고 힘껏 닦기만 하면 본래 오케이로 복귀한다' 라는 말이다. 우리는 관세음보살이라는 상징어가 법화사상 전체를 나타낸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법화경>> 전체의 뜻은 너무 광범위하므로 법화사상을 8개의 중요한 비유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복잡하므로 다시 8개 비유의 공통점을 뽑았다. 그렇다면 한마디의 관세음보살은 '만사가 본래 오케이다 그리고 힘껏 닦기만 하면 본래 오케이로 복귀한다'가 되겠다. <보문품>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중생이 어려움을 당해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면 관세음보살은 그 음성을 알아듣고 그 고뇌에서 풀려나게 하리라.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더라도 난파당하지 않고 처형을 당할 경우에도 칼이 부러지고 수갑을 차더라도 수갑이 끊어지고 도둑을 만나더라도 도둑이 침범하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염할 때, 이것은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행 방법이다. 우리로서는 힘껏 노력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은 '힘껏 닦기만 하면 만사오케이로 복귀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함으로써 우리가 선근공덕을 닦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우리의 본래 오케이를 확신한다면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곳에는 만사가 본래 오케이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가 수행을 게을리 함으로써 잠시 미혹했고, 그에 따라 병든 눈에 공화(空花)처럼 헛것이 보이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을 염할 때 본래의 우리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절대로 이상한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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