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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
파리 | 기온 | 최고 | 6°C | 7°C | 11°C | 14°C | 18°C | 21°C | 21°C | 24°C | 21°C | 15°C | 10°C | 7°C |
최저 | 1°C | 1°C | 3°C | 6°C | 9°C | 12°C | 14°C | 14°C | 11°C | 8°C | 4°C | 2°C | ||
강수량 | 52mm | 48mm | 53mm | 47mm | 63mm | 57mm | 58mm | 52mm | 58mm | 63mm | 58mm | 57mm |
연기온,강수량
개선문
에펠탑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박람회를 위해 에펠이 설계하여 세운 기념탑으로서 파리의 상징적인 기념물이다. 총 3개층 321m의 높이인 에펠탑은 대혁명이 일어난 해인 1789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789개의 계단이 있다. 밤에 조명을 받은 탑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매년 1억 5천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에펠탑을 방문하고 있을 정도다.
에펠탑에는 총 3개의 전망대가 있는데, 제1전망대는 51m, 제2전망대115m, 제3전망대는 274m 지점에 각각 위치한다. 각 전망대에서는 파리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또한 비스듬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에서 전망하는 파리시내도 매우 아름답다. 탑내에는 레스토랑, 기념품 상점, 영화관 및 리셉션이나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는 귀스타브 에펠 홀 등이 있다.
르브르 박물관
793년 대중에게 공개하는 박물관이 된 세계최대의 박물관으로서 그 규모는 약 6만㎡에 달한다. 현재 40여만 점의 예술품들이 그리스-로마, 이집트, 오리엔트, 회화, 조각, 가구 등 8개 부분으로 구분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기원전 2-3세기 작품인 ‘사모트라케의 니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이집트의 ‘함무라비 법전’ 등이 유명하다. 루브르 박물관은 파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지켜주는 대표적인 파리의 상징물중 하나이다. 1989년에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는 나폴레옹 광장의 한복판에 22m 높이로 서 있는 박물관의 입구로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루브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리 피라미드의 내부로 들어가면 강당, 시청각실, 레스토랑, 나폴레옹홀, 각종 상점이 있는 카루젤 뒤 루브르 등이 있다.
성심성당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서 있는 로만 비잔틴 양식의 성심성당(Basilique du Sacre-Coeur 사크레 쾨르 대성당)은 19세기 말 보불 전쟁 후 시민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성당의 하얀 건물이 인상적이며, 특히 중앙에 높이 83m, 폭 50m, 내부길이 100m인 거대한 돔이 있다. 야간에 불빛을 받은 건물은 가히 환상적으로 보인다. 한편 돔에서는 파리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매우 아름다운 전망을 가지고 있다.
몽마르뜨언덕
순교자들의 시체를 쌓아 두었던 언덕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은 몽마르트르는 파리 북동쪽에 있는 130m 높이의 언덕이다. 이 언덕에는 20세기들어 가난하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예술의 거리였다.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사크레쾨르 대사원, 테르트르 광장, 몽마르트르 묘지, 몽마르트르 박물관, 라팽 아질, 모로 미술관 등 수많은 볼거리가 있으며, 거리에서는 무명화가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그림을 팔고 있다.
파리강 유람선 바또무슈
파리시를 관광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세느강의 관광유람선은 바토 무슈(Bateaux-Mouches)와 바토 파리지앵(Bateaus-Parisiens)이 유명한데, 바토 무슈는 알마교 오른쪽 선착장에서, 바토 파리지앵은 에펠탑 바로 옆의 이에나 교 왼쪽 선착장에서, 각각 출발한다.
콩코드 광장
건축가 가브리엘이 1755년부터 20여년에 걸쳐 세운 광장으로서 중앙에는 23m 높이의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있으며, 그 양쪽에 2개의 분수와 여인상들이 광장 모서리를 장식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한 콩코르드 광장은 샹젤리제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개선문에 이르는 전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베르사이유
프랑스 북부 광역 파리지방(IIe De France)이블린 주의 주도로서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떨어진 도시이다. 베르사이유시는 현재 파리시의 교외거주지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이다. 17세기에 루이 14세(Louis XIV)가 건립한 베르사이유궁전(Palace of Versailles)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도시로서, 현재 베르사이유 궁전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서 외국 원수들이 방문했을 때 묵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찬란했던 절대왕권의 상징인 베르사이유궁은 화려함의 극치로서 17-18세기에 프랑스의 정치적 수도이자 통치 본부였다. 베르사이유 시에는 육군 병원과 육군 공병/포병 학교가 있는 중요한 군사도시이기도 하며, 증류주 제조업, 피혁업, 시장용 원예업 등이 시의 주요한 산업이다.
베르사이유의 기후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서 일교차가 매우 크며, 강우량은 적으나 비가 내리는 날이 많다. 여름과 가을에 강수량이 다소 많지만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으며, 연평균 강수량은 700mm 이하이다. 연중 가장 더울 때는 6-9월 사이로서 약 30℃정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며, 가장 추운 시기는 11월-2월 사이인데, 우리 나라에 비해서 온난한 편이다.
베르사이유궁
베르사이유궁은 프랑스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르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명소이다. 베르사이유궁 내의 주요한 볼거리로는 왕의 광장(Cour Royal), 예배당(Chapelle), 그랑 다파르트망(Grans Appartement),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 왕비의 침실(Chambre de la Reine), 정원(Les Jardin),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등이 있다. 베르사이유궁내에는 다양한 종류의 가이드가 있는데, 가이드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광광방법이다. 정문을 지나 궁전 건물에 있는 광대한 왕의 광장 (Cour Royal)이 있는데, 광장의 중앙에 루이 14세의 기마상이 있다. 궁전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볼거리는 주로 2층에 집중되어 있다. 예배당(Chapelle)는 루이 14세가 매일 예배를 드렸다는 곳으로서 1710년에 완성된 프랑스의 건축가 망사르의 걸작품이다. 흰 대리석과 황금빛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제단위의 조각과 천장화가 볼 만하다.
그랑 다파르트망(Grand Appartement)은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건축물로서 일주일에 세 번씩 사치스런 파티가 열렸던 장소이다. 금 장식을 한 구리, 청동, 대리석 등 고급스런 장식의 6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는 그랑 다타르트망과 왕비의 침실을 연결하고 있는 홀로서 길이 75m, 폭 10m, 높이 12m의 넓은 방을 17개의 벽면으로 나누어 578개의 거울로 장식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이다. 아파르트망 드 라 렌(Appartement de la Reine)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왕비의 주거공간으로서 왕비의 침실을 포함하여 접견실 등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전 뒤쪽의 광대한 정원(Les Jardin), 아폴론의 샘(Bassin D' Apollon)은 루이 14세가 정부였던 맹트농 부인과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 지은 별궁이었던 건축물로서 장밋빛의 대리석으로 된 외관과 화려한 실내장식이 매우 매력적이며, 이곳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전망도 매우 아름답다.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은 루이 15세의 요양소로 지어진 작은 성으로서 영국식 정원과 중국식 정원을 혼합한 아늑한 느낌의 정원이 있으며, 정원 한구석에는 아담한 초가지붕 농가를 모아놓은 시골풍 마음이 있다.
프랑스는 산이 없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광활한 평원을 갖고 있다. 육안으로 그 평원의 거리를 가름하는 것은 무리일 정도로 넓고 그 모든 땅이 농경지이다. 과거 역사를 통해 저 넓은 지역을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전쟁을 했다 생각하니 유럽인이나 징키스칸의 후예들이 정복이라는 용어로 내달렸던 전쟁의 규모는 가히 좁은 국토에서 치른 전쟁의 양상과 비교할 수 없겠다 생각되었다. 지금은 도로와 철로가 잘 발달되어 있었고 농수로도 자연환경을 고려했는지 하천을 따라 폭 넓게 관계수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들에는 유채꽃의 노란 채색이 이곳도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 Dijon을 지나 TGV는 계속 달렸다. 거의 점심때가 되어서 우리는 파리에 도착했고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이날은 5월 1일 노동절이어서 노동자들이 휴무하므로 주요 관광서 및 관광장소 출입이 제한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짐을 챙겨서 역의 대합실로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에서 아내는 비가 오고 약간 쌀쌀하니 옷을 두껍게 입으라 하여 가방을 다시 정리하고는 역을 나섰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곧장 식당으로 먼저 갔다. 이곳도 중국집이었다. 내부자리가 비우기까지 밖에서 조금 대기했는데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사진기 충전을 위해서 ‘소켓’ 여부를 문의하니 다행히도 출입구쪽에 콘센트가 있어서 바로 충전을 하였다. 자리가 비우고 우리 일행은 들어가서 식사를 하였다. 여전히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중국집이지만 이곳에서는 시장기 덕분인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배부르고 시간적 여유가 있을뿐더러 사진기 충전까지 마치고 보니 기분이 아주 흡족했다. 식사후에 일행은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가이드’는 키는 조금 작았지만 발음이 분명하고 차분한 남자였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여행의 추억을 간직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관심없이 흘려듣는 듯 했지만 기행문을 쓴다고 생각한 나에게는 그의 사전 설명이 도움이 되었다. 파리는 달팽이 모양으로 구칙되어지고 계획된 도시입니다. 파리입성의 기념으로 그는 ‘에펠탑’전체를 담을 수 있는 장소로 안내했다. 약간 안개가 끼었으나 ‘에펠’탑은 웅장했다. 단체사진과 개별사진을 찍은다음 바로 탑승하여 ‘Bus Tour'를 하였다. 좌측이 ‘시떼섬’입니다. 돛단배 모양이며 파리시의 상징입니다. ‘노틀담 성당’은 1300년대 건물이며 건축소요기간만 182년이 걸렸고 만명까지 수용가능한 대성당입니다. ‘노틀담’은 성모마리아를 가리키며 우리들의 귀부인이란 뜻입니다. 뽕네프는 “뉴 브릿지”란 뜻이며 1600년대 시설입니다. 저곳은 프랑스 학술원이고, 저곳이 ‘루브르 박물관’ 으로 지상과 지하를 통틀어 25km의 코스를 자랑합니다. 각종 유명한 건물들과 시설들이 ‘세느강’ 좌 , 우 안을 끼고 있었다. 저곳은 오르세 미술관으로 100년전에는 기차역 청사였습니다. 콩코드다리는 좌합과 단결을 의미하고, 하원 국회의사당과 프랑스 외무부건물입니다. 세느강의 36개 다리 중 1900년대 프러시아 동맹을 기념하여 세운 알렉산드르 3세 다리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건설되었던 다리가 많이 있습니다.
시테 섬과 생 루이섬 lle de la cite & lle saint-louis
파리의 역사가 깃든 곳을 가보고 싶다면 시테 섬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중심부, 센 강의 한복판에 있는 시테 섬은 파리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명소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중요한 건물과 관청이 많이 있다.
기원전 3세기 경, 파리 시가지가 아직 시테 섬뿐이었을 무렵에는 뤼테티아라고 불렸다. 그 후 로마인들이 들어와서 도로 ㆍ 수도ㆍ 궁전 등을 만들어 놓고 최초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파로스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파리라고 고쳐 불렀다. ‘파리’라는 이름은 간결하면 서 명쾌하고 우아해서 지금의 파리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린다.
◎관광 코스
기원전 3세기경, 파로스 인이 센 강을 왕래하다가 시테 섬을 발견하고 살기 시작한 것이 파리의 기원이다.
시테섬은 파리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지하철역은 시테 Cite 역 하나뿐이다. 지하도 계단을 올라와 좌우를 돌아보면 중후한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프랑스 법조계의 중심인 재판소다. 이 건물의 북쪽 날개 부분의 콩시에르쥬리는 일찍이 혁명 때 처형을 당했던 마리 앙트와네트와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이 처형되기 전까지 지냈던 독방이 있는 곳이다. 재판소 중앙을 향해 오른쪽으로는 생트 샤펠이 우뚝 솟아있다. 이 탑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파리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매우 아름답다.
이 건물 뒤쪽, 시테 섬 앞쪽 끝에 걸쳐 있는 다리가 퐁뇌프 Pont Neuf 다리로 역시 파리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그리고 금은세공 강변 Quai des Orfevres에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오른쪽의 경시청을 가로질러 가면 노트르담 대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파리라기보다는 프랑스의 상징인 이 성당의 앞마당 정원에는 항상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센강을 등 뒤로 하고 정면에 보이는 것이 시립병원 Hotel Dieu으로 이 병원과 노트르담 대성당에 면해 있는 광장에는 파리의 제로 지점을 표시하는 별모양 각인이 새겨져 있다. 파리에서 다른 도시까지의 거리를 몇km라고 할때는 이곳을 기점으로 한다.
이 섬에서 자주 눈에 뜨이는 건축물 가운데는 건축가르 보 Le Vau가 설계하여 17~18세기경에 지은 것이 많다. 부르봉 강변에 있는 로쟁 관 Hotel de Lauzun은 데오필 고티에가 ‘아편 클럽’ 을 만들어 인공낙원을 실현하려고 했던 곳으로 지금은 파리 시가 이를 소유하고 있다. 쉴리 다리 Pont de Sully 부근에 있는 랑베르 관 Hotel Lambert은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옛날부터 생 루이 섬은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왔던 곳으로 지금도 영화배우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이 이곳에 살기를 선망하고 있다. 호화스러운 아파트 앞에는 고급 차가 주차해 있어 파리의 고급 주택가인 파시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 가볼 만한 곳
●노트르담 대성당
지금의 대성당 건물이 있는 곳은 옛날 고대 로마인들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다. 4세기경에 가톨릭이 국교가 되면서 생테티엔 성당을 세웠는데 이 성당이 현재의 대성당의 전신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으로서 개축공사는 루이 7세 때인 1163년에 시작되어 내부가 완성되고 남탑과 북탑, 그리고 서측 정면이 완성되는 데만 5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후 예배당과 외부 등의 공사가 계속 진행되어 실제로 완성된 것은 1330년경으로 거의 20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당시에 세워진 교회들과는 달리 창이 크고, 색이 들어간 스테인드글라스, 거대한 내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늘로 치솟아오른 탑의 웅대함은 중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성당은 수 차례에 걸쳐 수난의 시기를 맞았는데 18세기 가톨릭에 반대하는 자유사상가들 가운데 ‘이성의 시대’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건물 내부와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이 훼손되었다. 그후 프랑스 혁명 때에는 사제가 단두대에 처형당하기도 했다. 가장 피해가 컸던 본당 건물의 수리를 끝내고 복원공사가 완료된 것은 19세기의 중엽, 1864년이었다.
프랑스 혁명 후인 1802년, 나폴레옹은 정식으로 이 대성당을 교회에 반환하였으며 2년 후에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근년에는 드 골 장군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노트르담이란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데 영광과 박해의 파란을 항상 관대하게 받아들이며 의연하게 서 있는 성당의 모습은 엄숙하기조차 하다.
노트르담의 곱추 Notre-Dame de Paris
노트르담의 부주교인 프롤로는 16세가 된 집시의 딸 에스멜다에게 첫눈에 반하여 곱추인 종지기 카지모드에게 그녀를 유괴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에스멜다는 청년 사관훼브스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에 질투를 느낀 프롤로가 훼브스를 죽이자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녀를 사랑하는 카지모드는 그녀 를 사원에 숨겨 주려고 하지만 결국에스멜다는 프롤로에게 저항한 죄로처형 당한다. 그 후 카지모드는 프롤로를 죽이고 자신도 에스멜다의 시체옆에서 목숨을 끊는다. 빅토르 위고의 명작인 이 소설은 어느것 하나도 실제의 일이 아니며 카지모드가 미친듯이 쳐댔던 남쪽 탑의 종은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에 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 뒤에만들어 졌다.무게 15t, 종 방울 무게 488kg인 이 종을 치는 것은 중노동에 가깝다.지금은 사람이 종을 치는 것이 아니라 전기로 작동된다. 이 소설이 간행되었던 시기는 1831년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황폐했던 노트르담의 복구작업이 이루어 지는 실제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기척이 없고 어두침침한 경내와 탑의로 가는 계단에 서 있으면 어디선가곱추 카지모드가 모습을 드러낼 것같은 기분이 든다.
●재판소 Palais de Justice
시테 섬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건물이다. 최고 재판소를 비롯하여 각종 재판소가 자리잡고 있다.
●감옥이었던 콩시에르쥬리 Conciergerie
콩시에르쥬리란 옛 왕궁의 관리자였던 ‘문지기’ 가 있던 곳을 말한다. 건물은 14세기 필립 왕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시저의 탑 ㆍ 은의 탑 ㆍ 본베크의 탑 등 3개의 탑과 3개의 큰 회의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이 유명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프랑스대혁명 후 감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독방은 ‘수인의 복도’와 면해 있는데 그녀는 이곳에서 1793년 8월2일부터 10월16일까지 두달 반을 보냈으며 옆의 독방에는 당통 ㆍ 로베스피에르가 수용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수용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귀족 혁명가 ㆍ 문학가 들이 2,600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뒤발리, 루이 16세의 누이 엘리자베드, 시인 앙드레 셰니어, 옷슈 장군등도 함께 처형되었다.
또한 이곳에 수용된 지롱드파의 롤랑 부인은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라고 말하면서 죽어갔다.
단두대는 대혁명 광장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되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처형이 행해졌다고 한다.
콩시에르쥬리 안에 있으면 여름에도 소름이 끼쳐서 역시 감옥이라는 느낌이 앞서는 곳이다. 아무튼 일반인보다는 위대한 사람이 많이 들어왔던 곳으로 독방이라기 보다는 개인방에 가깝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려면 생트 샤펠 Ste-Chapelle에서
재판소 가운데 정원에 있는 성 루이 왕이 건립한 고딕양식의 예배당 생트 샤펠은 1245년 착공해서 노트르담 대성당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들어가자마자 왼쪽의 좁다란 계단을 올라가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마주하게 된다.
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색유리 그림으로 그려 놓았는데 그 섬세함이나 훌륭한 솜씨는 그야 말로 ‘파리의 보석’이라 불릴 만하다.
○센 강과 다리
센 강 부근을 걸으면 언제나 사람이 그립게 되는 것은 왜일까. 마치 마약 같은 것이 센 강을 뒤덮고 있어 만인을 취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센 강은 프랑스 4대강의 하나로 파리 시내의 중앙을 동서로 흘러일 드 프랑스와 노르망디 지방을 관통한 후 영불해협으로 흘러들어간다.
18세기경, 지반이 단단해서 우물을 파기가 쉽지 않았던 탓에 센 강의 물은 파리 시민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식수 공급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탁선을 타고 이곳에서 세탁도 하고 샤워도 했다. 또 센 강 시테 섬에 있는 시민병원의 폐수가 이곳으로 흘러들어 왔으나 전염병이 번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의 중심인 센 강이 당시에는 생활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센 강에 가설된 32개의 다리는 모두 훌륭한 다리이지만 퐁 뇌프와 퐁 루와얄을 빼놓고는 18세기 말까지 모든 다리 위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1층이 상점, 2층에서 5층까지가 주거지였으나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공기를 오염시킨다 해서 철거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공기가 잘 통하지 않고 막혀 있으면 전염병이 번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퐁 뇌프 Pont Neuf
프랑스어로 튼튼하고 오래간다는 말을 ‘퐁 뇌프처럼(se porter comme le Pont-Neuf)’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라보 다리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 아래로 센 강과 우리들의 사랑이 흐른다…… 인생의 발걸음은 늦고 희망이라는 격렬한 일들이……’ 라는 아폴리네르의 시와 샹송에 나오는 유명한 다리이다.
●알렉상드르 3세다리 Pont Alexandre Ⅲ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놓여진 다리로 앵발리드와 그랑 팔레를 잇고 있다.
이곳에서 보이는 야경은 정말 굉장하다.
●퐁토 샹주 Pont au Change
콩시에르쥬리에서 오른쪽 강변으로 놓인 시인 폴 훼르가 사랑했던 다리이다. ‘퐁토 샹주, 꽃 마을의 밤……그 향기를 풍기는 다리 위를 오고 가는 인파 속에 바라보니 패랭이꽃 장미꽃이 난간위로 흐드러지게 피어 길 바깥쪽까지 폭포처럼 드리워져 있다.……’ 다리 옆에는 꽃시장이 선다.
●투르넬 다리 Pont de la Toumelle
생 루이 섬 중앙에서 왼쪽 강변으로 놓여 있으며 왼쪽 강변 다리 끝에는 최고급 레스토랑 투르왈 달쟝이 있다.
●예술교 Pont des Arts
그 이름에 어울리는 루브르에서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 사이에 걸린 보도교이다.
●비르 아켕 다리 Pont de Bir-Hakeim
2층으로 이루어진 다리로 그 위를 지하철 6호선이 통과한다. 에펠탑을 바라볼 수 있으며
파시와 오른쪽 강변을 연결한다.
●아르슈베셰 다리 Pont de l' Archeveche
노트르담 뒤편에서 왼쪽 강변으로 놓인 다리로 많은 사람들이 멈춰 서서 대성당의 장관에 넋을 잃는다.
개선문에서 루브르로 l' Arc de Triomphe ~ le Louvre
유명한 샹젤리제 대로를 중심으로 루브르 궁(미술관)까지는 파리에서도 드물게 화려한 지역이다. 개선문에서부터 콩코르드와 튈르리 정원, 그리고 루브르 미술관까지 이르는 길을 매우 아름답다. 이 문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샤를 드 골 에트왈 광장 Place Charles de Gaulle-Etoile에는 방사선 모양으로 12개의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전에는 이곳을 에트왈(별)광장이라고 불렀다.
가 볼만한 곳
●올라가 보면 더욱 좋은 개선문 l' Arc de Triomphe
개선문은 이름 그대로 싸움에서 승리한 장군과 군대가 개선하던 문이다.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결국 그의 생전에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 유형의 땅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자 그의 유해가 이곳을 지나 앵발리드 묘소에 묻혔다.
문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개선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벨기에․오스트리아․ 지역 등을 점령한 군대가 이곳을 통과하여 환영을 받았는데, 그들은 개선이라고 했지만 결국 침략이었다. 나폴레옹을 파시스트라고 단언한 사람도 있지만 프랑스인은 이곳을 개선문이라고 부르기보다 애국문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문 안쪽 벽에는 전쟁에 참가했던 600여명의 장군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아버지도 나폴레옹 시대의 장군 중 한 명이었으나 문에 그 이름이 새겨 있지 않아서 위고는 그 불만을 시로 써 놓았다. 그러한 연유로 후에 위고가 작고하자 그의 시신이 그 문 앞에서 하룻밤 안치된 후 국장으로 치러지는 명예를 안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든가 계단으로 오르든가 해서 위로 올라가 보자.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는 곳까지 운행되며 그곳에는 개선문의 역사를 말해 주는 그림․사진․모형들이 진열되어 있고 매점도 있다.
제일 안쪽에 있는 두 개의 조그마한 방에서는 영어와 불어 해설로 10분 동안 비디오를 상영한다. 옛날에 내보낸 뉴스 화면의 다이제스트 같은 것으로 각국의 VIP 방문, 개선문 청소 모습, 나치스의 점령 등의 내용으로 구성된 흑백필름이어서 재미있다.
여기서 좁은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전방으로는 일직선상에 콩코르드 광장과 루브르 궁전이 보이고 뒷면으로는 파리의 부톤 데팡스가 건너다보인다.
●세계의 산책로 샹젤리제 대로
초여름이 되면 마로니에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무성해지고 넓은 차도에는 차가 끊이지 않으며 넉넉했던 보도에는 카페의 테라스가 즐비하게 자리를 잡는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외국 관광객도 파리인이 된 기분이다.
한국인은 여전히 동양적인 차분한 분위기이지만 미국인과 캐나다인은 산책하러 나온 듯한 운동화에 캐쥬얼한 차림이 많다. 독일인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같으며 이탈리아인은 무리를 징 떠든다. 아랍인은 모양새가 부자 같은 멋을 풍기며 영국인은 고상하다. 아프리카 흑인은 조용하면서도 당당하나, 미국 흑인은 농담하느라 정신이 없다. 남미 사람은 어쩐지 애처로워 보이며 아일랜드인의 빨간 모자가 햇빛에 반짝거린다.
카페의 갸르송(급사)은 묵묵히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커피 cafe나 홍차 the, 맥주 biere를 나른다.
이러한 분위기는 ‘샹젤리제 로타리 Rond Point des Champ-Elysees'에 이르면 확 바뀐다. 녹음이 아름다운 공원의 벤치에는 아이들과 함께 온 주부와 직장인 등이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앙 발리드는 350년전 보훈병원이었고 돔이 있는 건물은 성당이었습니다. 군사박물관이며 지하에는 나폴레옹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선문으로 갑니다. 개선문의 높이 50m, 넓이 45m, 25,000t 의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로마의 개선문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대공사였고 광장과 12갈래길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나 있으며 별모양의 ‘샤를 드골 에뜨와르’ 광장이 둘러싸고 있는데 150년전 12갈래 도시를 향하여 도로가 만들어졌습니다. 개선문에서 콩코드 광장까지는 국군의 날 행사시 퍼레이드를 합니다. 개선문과 연결된 ‘샹들리제’ 거리는 ‘메디츠’공주의 산책로였으며 ‘천사들의 뜰’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공사였고 정작 나폴레옹은 워터루전투이후 유배되어 죽고 난 후 이곳을 지났다고 합니다. 샹들리제 거리는 12월의 전기불꽃제로도 유명하고 화려한 장관을 느낄 수 있습니다. ‘LIDO'는 고대공연의 선구자이며 무희들과 뮤지컬 공연으로 유명합니다. 800명을 수용하며 ‘베니스 섬’이름에서 유래합니다. 미국의 ‘라스베가스’ 리도도 이곳 파리를 모방한 것입니다. 29세의 무희가 한창 일할 때이고 35세는 퇴직할 나이가 됩니다. 주고 조명의 효과로 무대에서 생활한다고 보면 됩니다. 오늘은 노동절이라 쉬는 노동자가 많고 이날만은 거리에서 꽃 파는 것이 허용되는데 ‘리게’라는 은방울 꽃으로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의 꽃입니다.
튈르리 공원(튈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루브르 미술관과 콩코르드 광장 사이에 있는 공원. 원래는 루브르 서쪽에 있던 튈르리 궁의 정원이었는데 17세기에 정원사 루 노토르에 의해 정비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잠시 머무르기도 했던 튈르리 궁은 후에 불타 없어졌다. 드넓은 공원은 현재 루브르 견학을 마친 관광객과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된다.
공원의 나무들 사이에는 조각가 마이욜의 브론즈 상과 그리스․로마 신들의 조각상이 놓여 있어 마치 조각 미술관 같다.
프랑스에서는 개는 들어가서 용변까지 보는데 사람은 들어가서 안되는 이른바 ‘출입금지’ 구역인 잔디가 많다. 그러나 이곳은 예외여서 정원에서 일광욕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일광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리볼리 거리 rue de Rivoli에 있는 테라스 Terrasse des Feuillants를 걸어 보는 것도 좋다.
정원에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면 산책로가 나 있는데 인적도 드물고 조금 높은 곳이어서 정원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파리인들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이라든가 60세 안팎의 배가 나온 빨간코의 할아버지가 공을 굴리면서 페탕크를 즐기는 모습도 눈에 띈다.
콩코르드 광장
샹젤리제를 걷다 보면 눈앞에 훤히 펼쳐지는 광장이 나온다. 이집트에서 옮겨 왔다는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 2개의 분수가 있고, 그것을 둘러싼 돌담에 여행자들이 걸터앉아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래 이 광장에는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에 철거되고 단두대가 설치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1,343명의 목숨이 이곳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파리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절에 참혹한 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은 피의 흔적 따위는 전혀 없고, 우뚝 솟은 오벨리스크를 올려다보면 맑고 푸른 하늘만 펼쳐져 있다.
● 루브르 미술관 Le Louvre
1993년에 창립 200주년을 맞이한 루브르 박물관은 폐쇄되었던 리슈류 건물도 개방하여 전시 공간이 대폭 넓어졌다. 관내에는 30만 점에 이르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샹델리제 거리는 2km 인데 약 1km 가 번화가입니다. 버스는 세느강을 따라 이리저리 진행하다가 우리를 ‘개선문’앞에 내리고 버스 대기장소로 갔다. 우리는 광장의 한 켠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경청하였다. 그리고 공식처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자유시간이 주어져서 아내와 나는 500m 의 샹델리제 거리를 걸었다. ‘맥도날드에서 커피’ 한 잔 하기 위해서 바삐 서둘렀다. 샹델리제 거리의 가로수는 정육면체를 꽂아 논 듯 조경이 되어 있었고 끝에서 끝가지 자로 자른듯 심어져 있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잔인한 인간들의 행위이고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작품이다. 거리는 노동절이라서 그런지 많은 인파로 붐볐다. 더욱이 상점안은 번잡하여 마땅히 앉아서 커피한잔 마실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래도 기다렸는데 열이 길게 서있어서 기다리다 집합시간이 다 갈것 같다며 아내가 가나자고 하였다. 우리는 집합 장소인 개선문으로 올라오면서 길가는 믿음이 가는 젊은 커플에게 기념사진을 부탁하여 사진을 찍고 약속장소에 오니 시간이 남았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건물 외벽을 유리로 장식한 건물을 구경하면서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사진으로 담아서 아들의 아이디어에 도움을 주자고 하였다.
몽마르트르
몽마르트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초기 파리의 주교 성 드니가 순교한 땅이라는 뜻으로 순교자의 언덕이라고 하는 뜻과 로마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영혼을 모신 산 몽스 마르스에서 온 말이라는 설도 있다.
유래가 어떻든 19세기 초까지는 풍차가 돌아가는 시골이었던 곳이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주거비와 생활비가 싸서 가난한 화가와 시인, 외국인들이 살게 되었다.
사크레 쾨르 성당 한쪽 곁에는 생 제르맹 데 프레 교회, 생 마르테 데샹 교회에 이어 파리에서는 세 번째로 오래된 생 피에르 교회 Eglise Saint-Pierre가 있다.
이 교회의 정면 근처에 있는 것이 테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이다. 광장은 원래 몽마르트르 지구의 광장으로 3번지에는 옛날 사무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리의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관광객을 상대로 즉석 초상화를 그려 주고 있다. 그 주변에는 아름다운 레스토랑 ․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서부터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생 뱅상 거리 rue-Vincent와 솔 거리 rue des Saules가 만나는 어귀에 포도밭이 있는데 시가지 복판에 있는 것이어서 그다지 수확은 기대할 만한 것은 못된다. 이곳에서는 10월초에 포도주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풍차가 없는 몽마르트르는 김 빠진 맥주 같다고나 할까? 전에는 30여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단 두개뿐이다. 생 뱅상 묘지 Cimetiere St-Vincent의 옆을 통과하여 기라르동 거리 rue Lepic에 르누아르나 고흐의 그림에나 남아 있는 갈레트의 풍차 Moulin de la Galette가 보인다.
여기서 라비냥 거리 rue Ravignan를 내려가면 에밀구도라고 하는 작은 광장 Place Emile Goudeau이 나온다. 여기에 그 옛날 유명한 피카소의 아틀리에 ‘세탁선 Le Bateau Lavoir'이라고 하는 목조 아파트가 있었다.
피카소의 아파트 세탁선
피카소가 연인인 페르나르도 올리비에와 1904년부터 여기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이 싼 아파트를 세탁선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시인인 막스 자코브이다. 가늘고 긴 연립주택 형태로 이루어진 목조건물이기 때문에 걸으면 삐걱삐걱하고 소리가 나고 센 강에 떠 있었던 세탁용 배와 닮았다 해서 붙였다고 한다. 피카소는 여기에서 4년을 지내며 <푸른시대>라는 명작과 큐비즘의 시작이 된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로랑생 ․ 브라크 ․ 앙이 루소 ․ 아폴리네르 등도 자주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이 아파트가 있었던 에밀 구드 광장은 작은 샘물과 벤치, 그리고 마로니에의 잎사귀가 무성하다. 지금도 당시의 가난한 화가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테르트르 광장
생 마르탱 데 생 교회 다음으로 오래된 교회인 생 피에르 드 몽마르트르 교회 Eglise St-Pierre de Montmartre. 이 교회의 서쪽 정면 부근에 있는 것이 테르트르 광장 pl.Tertre이다. 원래 몽마르트르 광장에서 3번지는 관공서들이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화가, 그중에서도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많아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은 상당히 아름답지만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기웃거리면서 지나쳐가는 것이 더 재미있다.
몽마르트르의 예술
몽마크르트에 살았던 예술가
고흐는 화상(畵商)인 동생 테오를 믿고 몽마르트르에 이던 코르몽의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로트렉과 친해진 것도 이 몽마르트르, 그 무렵 드가가 서커서와 무용수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온 그룹에 피카소가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라몽카사스는 풍차를 배경으로 음악가 시티를 그리고 있다. 블랙, 도락, 블라맹크, 루소 등의 프랑스 화가들 사이에 불가리아 출신인 파슈킨도 섞여 있다.
※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1.24.~1901.9.9. 프랑스의 화가. 후기 인상파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뼈가 극히 약했던 그는 14살에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의 성장이 평생 멈춰 버리는 장애를 갖게 된다.
모리스 위트릴로와 어머니 쉬잔의 몽마르트르
몽마르트르 하면 생각나는 것이 화가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모리스 위트릴로의 그림이다.
허물어져 당장이라도 쓰러져 내릴 듯한 낡은 회색의 담벽과 포석이 깔린 길 등 그림에서 본 장면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위트릴로의 어머니 쉬잔 발라동은 원래 서커스 곡예를 하던 자유분방한 아가씨였다. 서커스에서 사고가 난 후 세탁선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몽마르트르 언덕의 화가들이 사는 곳에 드나들게 되어 로트렉과 르누아르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모델로서 포즈를 취하면서 화가로까지 변신했다. 그녀가 낳은 아이인 위트릴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위트릴로가 어린시절에 공상에 빠지곤 했던 돌계단과 언덕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파리의 풍정이 가득한 퍼포먼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반겨주는 퍼포먼스들이 있다. 바이올린이나 오르골을 연주하는 사람들, 새하얗게 칠을 한 채 인형처럼 자리를 잡고 열창하는 가수 지망생...그들은 연기를 공부하는 학생이거나 돈이 필요해서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정이야 제각기 다르지만 푸른 하늘 아래에서 그들이 펼치는 퍼포먼스는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다시 Bus에 올라서 몽마르뜨 언덕을 향해 갔다. 저기는 마로니에 공원입니다. 마홍이라고도 하며 밤나무의 일종으로 흰 꽃이 피면 향기와 꽃이 아름답습니다. 드골 공원, 그랑빨테, 고대이집트의 해시계인 오벨리스크 탑이 콩코드 광장에 있습니다. 1700년 루이 15세 왕의 기마상을 없애고 기요틴의 단두대가 놓여졌던 곳입니다. 나폴레옹 이후 콩코드 광장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단두대의 자리에 인도가 놓여있고 조그만 동상이 있는데 쇠사슬로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동상을 연하여 단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몽마르뜨 언덕은 순교자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드니 DENIS’신부가 순교한 곳이라고 한다. 로마의 신정시대에 ‘디오니시스’ 성인이 이곳에서 순교하여 생드니 성당까지 6km 를 자기 목을 들고 걸어가서 숨을 멈추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화가들의 광장은 800여명의 화가들이 주 3교대로 나와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파리 시민들은 몽마르트르 언덕의 그늘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이 사크레 쾨르 성당이다. 비잔틴 양식으로 된 3개의 새하얀 돔은 빛을 받으며 더욱더 환해져 곳곳에서 아주 잘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성당이 건축된 가장 큰 이유가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때 힘없이 와 있던 시민들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인이 기부한 4,000만 프랑과 40년의 세월을 들려 1919년에 완공했다. 많은 화가들이 이 성당을 그렸으며, 파리를 무대로 한 영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관광객뿐 아니라 파리 시민들도 이 언덕에 올라 파리의 밤풍경을 감상한다. 건축 당시의 예상대로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곳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계단 밑의 테라스에서는 파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보고 싶으면 성당의 돔으로 올라가면 된다.
이들은 관광객들에게 인물화를 잘 그린다면서 접근한다고 한다. 가끔 우리나라도 남산이나 도회지 근처의 관광지에 가면 초상화를 그려준다며 제법 잘 그린 유명 배우들의 초사와를 옆에 놓고 호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었다. 공인의 경우 50₤를 요구하고 야메(?), 인가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 25₤를 요구하는데 가격흥정은 하지 말라고 한다. 화가들에 대한 예우차원이겠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큰 길에서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좁은 상가가 늘어선 거리를 올라서 갔다. ‘몽마르뜨의 사크레 쾨르’ 성당앞 하단부 광장이었다. 다시 모여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소매치기, 고무줄 갖고 다가서는 무리, 조심하다고 알려주었다. 일단의 흑인과 섞인 무리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계단을 올라서 좌측으로 비켜오르니 ‘화가들의 광장’이 나왔다. 그곳에서 ‘가이드’는 다시 설명했다. ‘피카소가 카페에서 춤과 술을 마시던 가게’ 화가들의 그림그리는 곳, 앞의 순교자는 성당(?)그리고 40여분의 시간을 주었고 다시 계단 밑의 광장에 모이기로 하고 해산했다. 우리 부부는 생드니 성당이 있다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았다. 바로 아파트만 있고 계단을 통하여 다른 곳으로 길이나 있었다. 다시 돌아와서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곳을 구경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비가 와서 길이 질퍽거렸다. 더구나 한국 관광객이 중첩되어서 모처럼의 이국적 기분까지도 사라졌다. 우리는 재빨리 벗어나서 예의 ‘피카소 카페’와 위치하는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은 다음 생피에르 Saint-pierre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안은 약간 어두웠으나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다웠으며 제단의 웅장함 나뭇조각의 십자고상등 상당히 오래된 웅장함 나뭇조각의 유서깊은 성당이라고 생각되었다. 내부를 돌아보고 자세한 안내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만은 가볍고 기뻤다. 우리는 바로 옆의 ‘사크레 쾨르’(성심)성당으로 갔다.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들어가니 뒷면에 제단뒤의 커다란 “예수님의 부활”을 그린 제대상을 맞고 그 규모와 장중함에 압도되었다. 우리는 바삐 외부를 돌아보고 일부요원들이 통제하고 있었으나 성당 앞 좌석으로 들어가서 잠시 앉아 묵상을 하고 바로 나왔다. 나오면서 사진 촬영이 통제되고 있었으나 사진을 찍으니 그가 안 된다면서 강력히 제지하고 무어라 하므로 미안하다 하고 그곳 매점에 들러서 기념책자와 엽서를 구입하여 밖으로 나왔다. 사진 촬영이 잘 된다는 곳에서 파리시내 전경을 배경으로 다소 여유 있게 사진을 촬영했다.
샹송이 있는 주점 ‘라팽 아질’
초여름이 되면 무성한 아카시아 잎에 가려져 무심히 지나칠 정도로 작고 볼품없는 샹소니에가 유명한 라펭아질이다. 원래는 ‘캬바레 드 자사생(암살자 주점)’이라는 공포스러운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으나 그 즈음 벽에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있는 토끼가 냄비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을 그린 앙드레 질의 사인 A. Gill을 프랑스어의 Agile(아질)로 바꿔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피카소와 위트릴로가 밤마다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이들은 이름도 없는 가난한 화가였다. 이곳은 ‘들어가면 누구라도, 강한 아편을 들이마시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개성이 강한 주점이다.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그 옛날의 열기가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안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월요일만 빼고 매일 밤 9시부터 새벽2시 사이에 가면 흘러간 샹송을 들을 수 있다. 110F(학생80F)으로 음료수까지 마실 수 있는 저렴한 주점이다.
※앙드레 질의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어 유명한 파리의 유서깊은 카바레 '라팽 아질'은 그림 이름이 날쌘 토끼라는 뜻의 '오 라팽 아질(Au Lapin Agile)'이어서 불리우게 되었다. 예술계를 주름잡던 세기의 화가와 음악가들이 사랑하던 장소로 역사적인 이곳은 아직도 선술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저녁 9시부턴는 순수 비오(Bio) 공연을 하고 있으며 Bio 공연은 마이크 및 어떤 음향 시설도 없이 가수들의 목소리만으로 샹송을 부르는 것을 뜻한다. 오래된 선술집에서 나즈막히 샹송을 듣기 최고이다.
미술
물항아리와 먹다 남은 사과가 있는 바구니 또한 거지아이의 생활 분위기를 만들어주면서 정겨움을 준다. 이렇게 그림세계는 실제의 모습하고는 아주 다른 새로운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미술의 리얼리즘은 현실적인 상태나 상황과는 다른 것이다. 불결하고 추한 리얼리티는 미술을 통해 정감과 아름다움의 리얼리티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자연의 경관을 보고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한다. 그런데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왜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할까?
“실제 실물은 좋다고 하지 않으면서 그림이 실물과 같다고 찬사를 늘어놓은 것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한 이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쨌든 17세기 스페인의 바로크 미술은 리얼리티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과 해석을 내렸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날까지도 미술전문용어로 쓰이고 있는 스페인어 ‘보데곤(bodegon)’ 즉 정물이라는 말은 스페인의 바로크 미술에서 나온 말로, 리얼리티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한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참뜻을 알게 한다.
건축
건축에서도 그리스식 건축양식의 존중, 비례의 엄격한 준수, 장식요소의 적절한 선택, 그리고 무엇보다 절제와 균형이 아름다운 작품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말하자면 적합한 규칙이 취미의 비경이었고, 이를 두고 좋은 취미라 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양식이 탄생했는데 그것은 우아하면서도 유약하지 않고, 강하면서도 둔탁하지 않고, 무엇보다 위엄이 있으며 모든 요소를 적절히 배합하여 균형과 품위와 차분함을 보이는 독자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고전주의(古典主義)’란 늘상 보편적 가치를 논할 때 언급되는 것으로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예술 개념이다. 그래서 이 고전주의를 “옛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 모든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인간성을 풍요롭게 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는 학자도 있다.
17세기의 프랑스 고전주의를 건축에서 보자면,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인 프랑수아 망사르(Francois Mansart : 1598~1666)가 지은 건축물이 우선 예로 꼽힌다. 1642년에 왕실의 재무장관인 르네 드 롱귀(Renè de Longueil)를 위해 지은 주거용 성(城) 현재는 메종 라피트(Maison Laffitte)는 간결하고 질서 있는 공간배치와 구조를 보여주고 있고 장식도 이에 맞게 절제되어 있다.
18세기 미술은 눈의 즐거움과 상상의 기쁨을 주는 세계로 나아가고, 건축과 장식은 안락함과 쾌적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가들로는, 사랑의 향연을 주제로 한 몽상적인 세계의 주인공 와토(Antoine Watteau : 1684~1721)와, 관능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그린부셰(Francois Boucher : 1703~1770), 프라고나르(Jean-Honorè Fragonard: 1732~1806) 등이 있다. 이들 미술가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미술을 로코코 양식이라 부른다.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 두 양식 모두 이성보다 감성에 치중하고 있다는 데에서 같은 줄거리의 미술로 얘기할 수 있으나 거기에는 엄격하고 뚜렷한 한 차이점이 있다. 바로크 미술은 반종교개혁운동에 결부되어 신앙심을 고양하고 종교심을 자극한다는 취지 아래 감동적인 미술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로코코 미술은 바로크에 비교하면 아주 소극적이고 시대적인 취미를 보여주는 감미롭고 향락적이며 섬세한 성격을 보여준다.
베르사유의 정원은 통일된 기획안에 의해 조성되어 명확한 계획성과 통일된 양식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경직되고 틀에 박힌 양식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아폴론 신의 마차><물의 요정들의 목욕><페르세포네의 납치><태양의 말을 치료해주는 두 명의 트리톤>과 같은 분수조각상은 격정적이며 동적인 형상을 보여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준다. 이 놀라움은 바로크풍의 과장된 효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규모와 구상의 거대함에서 연유한다.
내부 벽면과 바닥의 다채로운 대리석, 거울로 장식된 <거울의 방>, 루이 14세 때의 궁정화가 르 브룅(Charles Le Burn: 1619~1690)이 그린 벽화들은 화려하고 이색적인 양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벽화를 보면, <거울의 방>에 있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전쟁 이야기를 담은 천장화를 위시하여 다른 방의 벽화들도 국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서사시와 같은 흐름을 보인다.
프랑스에서 고전주의가 확립됨으로써 부산물로 나온 것이 ‘아카데미’이다. 이미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후기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여 ‘아카데미아 델 디제뇨(Accademia del disegno)’가 발족되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caise)는 1635년에 루이13세 때의 유능한 재상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가 창설했고, 40명 회원들의 임무는 사전을 편찬하는 일이었다. 리슐리외는 철저히 현식적인 정치가로서 왕권 강화와 국력 증대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우렸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루이 14세가 집권하면서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루이 14세 자신이 일단 총명하고 위대한 지배자로서의 모든 자질을 다 갖추고 있었고 재상 콜베르(Colbert:1619~1683)를 비롯한 유능한 보좌관들을 옆에 두고 있어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로 부상했다. 또한 루이 14세의 문화예술에 대한 적극적인 장려로 문화적으로도 유럽에서 최강국이 되었다.
“낭만주의의 근원은 자유에 있다. 자유는 모든 것의 양심을 바꾸어 놓았다. 자유는 사회를 쇄신하였듯이 예술도 쇄신하려 한다. 새로운 국민에 새로운 예술.” 빅토르 위고의 이 말은 프랑스 대혁명과 낭만주의의 등장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해주는 것이다.
새로운 예술의 출발점은 한마디로 ‘감성’이었다. 루소의 “존재한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다. 감성은 삶에 상쾌함을 주고 냉정한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게 한다.”라는 말은 감성의 절대성에 입각한 새로운 미술의 본질을 알려준다.
새로운 미술은 유럽 각국으로부터의 예술적인 영향. 이국적인 요소. 중세적인 요소 등등 여러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어 형성되었다. 들라크루아는 <아이반호(Ivanhoe)>의 작가 윌터 스콧(Sir Walter Scout: 1771~1832), 시인 바이런(John Byron). 화가 컨스터블과 같은 영국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괴테 등의 문학 작품에서도 소재를 따왔다. 또한 이탈리아의 단테의 작품에서도 소재를 따왔다. 또한 들라크루아의 작품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키오스 섬의 학살><알제리의 여인들>, 그로(Antoine Gros: 1771~1835)의 <자파의 흑사병 환자들>, <에일로의 나폴레옹> 등은 당시 사회에 일었던 동방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들라크루아, <알제리의 여인들>,1834,캔버스에 유채, 180X229cm,파리,루브르 박물관
그로,<자파의 흑사병 환자들>, 1804, 캔버스에유채,523X1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는 이미 16,17세기에 인도와 중국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오스만투르크와는 루이 14세 때에 대사급 왕래가 있었으며, 1714년과 1721년에는 페르시아와도 수교가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오는 여행자들은 비단, 도기, 칠기뿐만 아니라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그곳의 이야기책들까지 가지고 들어왔다.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풍물을 폭넓게 알아야 한다는 시대적인 취향이 유행처럼 번져 예술가들도 동방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이집트나 아랍 국가들의 역사적 유적과 풍물도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더군다나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1819년 태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의 <메두사의 뗏목>의 관전 출품과, 1824년 영국 화가들의 파리 전시로 보고 있다. 이것은 문학 부문에서 1827년에 출판된 빅토르 위고의 <크롬웰 서문>과 1830년에 최초로 공연된 희곡작품 <에르나니>에 비교될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1819년에 <메두사의 뗏목>관전 출품에 앞서 제리코는 1812년 관전에 <돌격하는 기마병>을 벌써 출품한 바 있다. 그해의 관전 심사위원장이었던 신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다비드가 이 작품을 보고 한 말은 이미 낭만주의 미술이 바로 곁에 다가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새로운 필치인데 도무지 알 수가 없군!”제리코는 극도로 흥분한 말과 격분한 병사의 동작을 새로운 필치로 담아냈다. 1812년 관전에 출품한 이 <돌격하는 기마병>은 이미 낭만주의 미술의 기본요소인 생동감에 넘치는 감성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제리코가 1819년 관전에 출품한 작품 <메두사의 뗏목>은 우선 그 주제부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818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상선 메두사 호의 참사 사건을 제리코는 마치 현장에서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나타냈다. 이 사건은 우선 모든 사람의 관심이 집중된 시사적인 소재였고, 조난에 따른 참상이 세상을 격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만큼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이념에 맞는 소재였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그로 인해 야기된 추악한 인간상이었다. 한마디로 현실의 참모습이었다. 제리코는 사건의 비극성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 미술애호가들의 취향에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같이 전시된 앵그르(Jean Dominique Ingres: 1780~1867)의 작품 <신격화된 호메로스>와 비교되면서 빈축을 샀다. 미술계에서 여전히 권위가 대단했던 구세대가 새로운 미술의 본격적인 출현을 달갑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리코나 들라크루아의 새로운 미술은 복잡한 인간감정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 진상을 알아보고, 시사적인 것에 접근하고, 예술을 현재의 시대에 개입시키며, 매사에 이색적인 것이 있나 찾고, 감정을 고양시키는 데에 전념했다. 들라크루아는 그 이전 1822년에 이미 지옥에서의 단테와 베르킬리우스 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그 환상적인 성격으로 찬반 논의를 불러일으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대다수의 미술사학자들은 신고전주의 미술이 결코 시대성에 등을 돌린 미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혁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간(L'homme nouveau)"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그 시대 사람들은 전통과 가치를 무시할 수 있는 현대인,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현실의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얘기되고 인간성의 가치 및 그 존엄성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으며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게 되었다. 즉 ‘새로운 인간’이란 사회에 현대성을 줄 수 있는 인간이었다. 여기서 파생된 말이 ‘영웅주의’이다. 이것은 고대의식의 영웅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입각한 영웅이라는 뜻이다. 화가 다비드 ․ 그로 ․ 고야 ․ 제리코 ․ 들라크루아, 문학가 스탕달 ․ 발자크 등의 작품에서는 그러한 영웅주의의 분위기가 짙게 묻어난다.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는 구시대와 신시대의 예술로 갈라지기도 하고, 표현방법, 예술적 형식, 창작의 근거 등에서 서로 상반된 양상을 보이지만, 양자의 공통점은 새로운 인간관이었다. 다비드의 작품 <마라의 죽음>과 <에로스와 미소녀>만 보더라도 이 두 작품은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조각상처럼 뚜렷한 선과 정확한 형태, 단조로운 배경 등으로 고전적인 표현형식을 보이나 고전에 없는 예민한 감수성과 현실 감정이 나타나 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역사적인 상황과 이상적 인간성을 합쳐놓은 작품이다. 다비드는 황제란 모름지기 카리스마, 인품 등을 갖춘 인간, 즉 영웅적 인간이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다비드는 현실에 입각한 이상성을 추구한 예술가였다.
한편 다비드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아들인 제자 그로의 미술은 다비드의 이러한 이원성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 자파의 흑사병 환자들, 에일로의 나폴레옹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 정열적이고 생동적이며 정대한 인물을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프랑스 관전에서는 공개적으로 이질적인 화풍의 미술작품들이 대대적으로 전시되었고 영국 작가들도 이 관전에 대거 출품하였으며 프랑스 ․ 이탈리아 ․ 독일 ․ 스위스 ․ 스페인 ․ 영국 등의 예술이 시 ․ 소설 ․ 음악 ․ 미술 분야에서 서로 교감하고 논평되고 발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이 예술의 시야를 넓혀주고 그 행로를 밝혀주었다는 사실은 예술의 가역성보다 상대성을 중요시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시민혁명인 프랑스 혁명을 거친 후에는 귀족계급 대신 시민계급이 사회 주요 층으로 등장하여 이들의 취미가 곧 19세기의 ‘사실주의’를 낳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들 시민 층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예술양식은, 고도의 교양과 세련된 감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곧 알 수 있는 사실적인 것, 흔한 말로 통속적인 것이었다. 1830년대의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 초상화와 풍경화가 급증한 데에는 이러한 영향이 컸다.
<오달리스크>,1814,에 유채, 91X162cm 파리 르브르 박물관
Fortuny y marsal Mariano Jose Maria Bernardo, Michetti Francesco Paolo, Straka Josef - Odalisque With Palcon
Tanoux Adrien Henri, 드라크-오달리스크, 앵그르 -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
조지폴리로마스크, 코볼드, 페르디난드 커먼
페리뇽, 프란시스코 마스리에라 모노반, 프랑수아 부세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예술가는 예술미를 위하여 자연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 결과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하다는 현대적인 예술관을 낳았다. 앵그르의 생각이 이렇다 보니 정상적인 인체보다 등골뼈가 세 개가 더 많아 보기에도 허리가 유난히 긴 여인을 그리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절대미나 영원한 미는 없다고 하면서 미의 다양성을 주장했다. 또한 개별적인 미에서 보이는 특징은 정념에서 기인한다고 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특수한 정념이 오늘날의미를 만든다고 믿었다. 하지만 앵그르는 자연을 근거로 하여 이를 예술적으로 재창조하였고, 작업할 때 고전적인 조형관과 전통적인 기법을 엄수했다. 이렇게 볼 때 들라크루아와 보들레르가 낭만주의 작가였다면, 앵그르는 낭만적 미술을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쿠르베가 주창한 리얼리즘 미술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나는 내가 보는 것만 그린다." 라고 말한 쿠르베가 1855년 파리에서 개최도시 제2회 만국박람회에서 출품을 거절당하자, 그 옆에다 가건물을 짓고 개인전을 열어 ‘귀스타브 쿠르베의 리얼리즘, 그의 40점의 작품 전시회’라고 쓴 게시판을 내걸었다. 쿠르베의 현실이 우선 현 시대적인 것이고, 현실을 본다는 것은 알기 위한 것이니만큼, 그가 무엇을 어떻게 보고 알았는지는 작품이 답해줄 것이다.
쿠르베 돌깨는 사람들
목욕하는 여인 1853년, 두명의 나부, 잠
농부가족, 동네처녀들, 밀을 거르는 사람들
상처입은 남자. 시골연인들, 챌로이스트
절박한 남자, 잠이든 물레소녀, 쿠르베 자화상
오러낭 저녁시간, 장에서 돌아오는 농부, 씨름꾼
그의 작품들인 <오르낭에서의 매장><돌 깨는 사람들><목욕하는 젊은 여인> 등은 그야말로 ‘있는 현실’을 그대로 담은 그림들이다. 쿠르베가 자신이 본 현실적인 시대의 사람을 그렸다는 것은 시대가 탄생시킨 사람을 자신의 미술로 구체화 했다는 얘기이다.
결국 미술에서 상상력을 철저히 부인하는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고전주의의 이상고 낭만주의의 꿈과 상상의 세계 등에 대하여 일상적인 현실을 내세웠다. 그의 작품 <목욕하는 젊은 여인>만 보더라도, 그림 속의 여인은 전통적인 자세나 이상적인 여체미하고는 거리가 먼 자연스러운 자세에다 건강하고 골격이 뚜렷한 아낙네의 모습이다. 가식도 없고 이상화도 없으며 어떤 틀에도 묶여 있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쿠르베에게는 현실의 모습을 미화하거나 이상화한다거나 하는 것은 위선이고 허위이며 왜곡이었다. 따라서 그의 미술이 갖고 있는 윤리적인 가치나 인간적인 아름다움은 거짓 없이 정직하게 표현하는 데에 있다.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1855년 작인 <화가의 작업실>이다. 그림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좌우로 나뉘어 있고, 중앙에는 풍경이 그려져 있는 커다란 캔버스가 놓여있으며, 그 앞에서 쿠르베가 그림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다. 그의 뒤에는 나체 모델이 서서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고, 옆에서는 한 어린이가 서서 감탄하는 모습으로 그림을 보고 있어, 쿠르베, 여인, 어린이 이 세 명이 화면 중앙을 형성하고 있다. 화면 좌우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양분되어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아낙네. 옷감을 팔고 있는 유태인, 상인 등등. 이러한 뒤샹의 태도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통속적이며 위선적인 세상에 대한 반항정신의 표현으로 모든 것을 무시한 원점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이어서 뒤샹은 1919년에는 다 빈치의 명작 <모나리자>의 복제사진에 콧수염을 그려넣어 <조콩다 엘 아쉬 오 오 퀴 (joconda L. H. O. O. Q)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다.> ‘L. H. O. O. Q를 이어서 발음하면 프랑스 속어로 ‘엉덩이가 뜨거워’ 라는 뜻이 된다. 과거의 미술을 대표한다는 <모나리자>를 이렇게 변형시킨 것은 과거의 기존 가치와 미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으로 예술 그 자체를 비웃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뒤샹, <조콩다 엘 아쉬 오 오 퀴>, 1919. 19.7 X 12.4cm 복제 사전에 연필
이것은 이념 ․ 합리 ․ 질서 ․ 진실 ․ 이성 등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일종의 도전적인 물음이었다. 기성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다다(dada)운동은 일단 여러 예술 활동을 백지로 돌리기 위해서 철저히 파괴를 감행하였다.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미술의 세계는 종래의 사회적 관습이나 합리적 사고에서 본다면 부조리하고 이상하며 놀랍고 낯선 곳이다. 그러나 지난날 이미 낭만주의를 옹호한 보들레르와 입체파 미술의 혁신적인 조형성을 소개한 시인 아폴리네르는 현대미술의 특성을 이상함과 놀라움을 야기하는 것으로 간파하였고, 또한 다다 예술과 초현실주의 예술의 정신적인 힘이 되었던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è Breton : 1896~1966)도 자신의 저서 <초현실주의와 회화 (Le Surrèalismeet la peinture)>(1928년)에서 “놀라움은 항상 아름답고, 놀라운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놀라운 것 이외에 아름다움은 없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관광코스
지하철 Opera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파리가 자랑하는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다. 하지만 바스티유의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 때문에 이곳은 발레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대극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극장에서 정면으로 뻗은 길이 오페라 거리 Avenue del Opera로 센 주의 지사 오스망이 지휘한 도로 계획 가운데서도 걸작 중의 걸작이다. 이 일대는 각국의 은행, 항공회사, 여행사들이 모여 있으며 관광버스에서 내려 면세점으로 들어가는 여행객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길의 막다른 지점인 두 개의 분수가 있는 광장에 팔레 루와얄 Palais Royal과 그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코메디 프랑세즈 Comedie Francaise가 있다.
오페라 하우스를 등 뒤로 하고 카페 드 라 푀의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카퓌신 대로 Boulevard des Capucines가 나오는데 이 길의 막다른 곳에 마들렌 사원 La Madeleine 이 있다. 이 길에도 역시 고급스런 상점들이 많으며 영화관, 극장도 많다.
또 이 길의 오른쪽 중간쯤에는 인기 있는 샹송 가수의 리사이틀이나 쇼로 유명한 올렝피아 Olympia 극장이 있다. 금세기 최고의 가수로 촉망받는 파트라샤아 카스도 여기에서 리사이틀을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14번지는 영화 탄생지로 1875년에 르미에르 형제가 16mm 필름을 최초로 상영했던 곳이다.
오페라 하우스의 왼쪽 길로 조금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접어드는 카퓌신 거리 rue des Capucines의 19번지 (원래는 외무성 건물) 앞에서는 1842년 스탕달이 쓰러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마들렌이라는 말만 들어도 무언가 달콤한 과자를 연상할 정도로 식욕이 왕성하다면 사원 오른편 뒤쪽 모퉁이에 있는 고급 식료품점 포숑 Fauchon에 들러보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마들렌 사원 옆에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마다 꽃시장이 서며 사원의 바로 뒤 토롱셰 거리 rue Toronchet에는 도로테 비스 Dorothee Bis와 가방점 라 바가쥬리 La Bagagerie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세련된 파리인의 센스가 느낄 수 있다.
가볼만한 곳
●발레전문 극장이 되었으나 품격은 옛 모습 그대로인 오페라 하우스 Opera de Paris Garnier
이전에는 포르트 생 마르탱에 있었던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물에 대해 스위스인인 루소는 소프라노 가수의 노래 소리가 쇠가 부딪히는 소리라고 평하고 ‘일반적으로 프랑스인은 유럽의 전 민족 중에서 가장 음악적 소질이 빈약한 민족’ 이라고 비난했다. 또 모차르트도 가수에 관해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를 지르거나 동물이 짖어대는 거 같은 데다 코나 목에서 있는 힘껏 소리를 낸다.’고 부친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당시의 귀족은 오페라 그 자체보다도 호화스러운 무대장치나 화려한 의상, 그리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담소를 즐기기 위해 오페라 하우스에 갔던 것이다. 지금의 오페라 하우스는 그로부터 약 1세기 후에 지어진 것이다. ‘우아한 장소’라는 것을 내걸고 설계도 새롭게 공모하여 171개의 작품 중에서 선정된 것이 샤를 가르니에의 작품이다. 14 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1875년에 완성되었는데 장식, 채색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화려하다.
여행자가 무리지어 모여 있는 입구 앞의 돌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매표소와 안내소, 오페라와 발레에 관한 책 등을 팔고 있는 가게가 있다. 중앙으로 가서 넓은 대리석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퓨티어의 샘물’이 있으며 손님용 원형 홀로 이어진다. 계단을 오르면 광장에 면한 넓은 휴게실이 나오고 앞에는 베니스풍의 모자이크로 장식된 둥근 천장의 거실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화려한 벽걸이 융단으로 꾸며진 전시실이 있다.
극장 내에는 샤갈의 천장화가 있으며 객석에는 들어갈 수 없으나 박스 석에서 내부를 내려다볼 수 있다.
오페라 하우스는 1939년 국영이 되었으며 1989년 바스티유에 신 오페라 극장이 생긴 이래 옛 오페라 하우스는 이제 발레 전문 공연 극장이 되었다. 오페라 하우스발레단을 이끄는 젊은 예술감독 파트릭 뒤라스는<지젤>등의 고전적인 작품에도 새로운 해석을 가미해 참신한 연출로 늘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원래 왕궁이었던 팔레 루와얄의 정원 Palais Royal
루이 13세 때 재상이었던 리슐리외가 자기 소유로 지었던 것을 구 후 루이 13세에게 증정하여 루이 14세 동생 오를레앙 공이 거주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건물 내부에 귀족이나 부자들로 출입이 제한 되었다. 정원만 일반에게 공개되어 서민들은 이곳에서 산책을 즐겼다. 그 속에서 누벨리스트(정보통)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자신의 뉴스거리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는 신문이 없던 시대이므로 결국 이곳에서 귀중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했다. 또 오를레앙 공의 훈령에 따라 이곳은 경찰출입이 금지 되어 있어서 여론은 결국 과격하게 흘러가게 되었는데 프랑스 혁명도 이곳에서 준비되었다고 한다.
오를레앙 공이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이 왕의 정원에 쇼핑 센터를 지었고 사치스런 상점을 비롯해 레스토랑, 카페, 술집은 물론이거니와 카지노와 나폴레옹도 드나들 만큼 고급스런 매춘 장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관능적인 쾌락의 향기는 느낄 수 없으나 죽은 듯이 조용한 정원과 회랑을 파리인처럼 걸어 보는 것도 멋진 일이다. 왕궁은 아파트와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글 유럽여행 프랑스편, 이미지: 구글이미지 검색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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