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서 KTX 첫 차를 타고 남원역에 내리니 바로 인월 가는 버스가 들어오는군요.
인월까지는 약 5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하는군요.
기사님은 매 정류장 예정도착시간에 맞춰 운행하느라 좀처럼 속력을 올리지 않으시는군요.
이제는 낯이 익어진 남원 시가지를 요리조리 돌아 이백면을 거쳐 여원치를 넘습니다.
정말이지 이 여원치는 운봉읍과 남원시내를 잇는 교통의 요지임에 틀림없습니다.
보통 백두대간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구분하였고 신라와 백제를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이 지역만큼은 특별히 예외인 지역입니다.
백두대간 동쪽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마한이 백제에 복속된 이후 지금까지 줄곧 전라도로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김선신(1775 ~ ? )의 두류전지에는 "운봉은 지리산의 뒤편 허리등성이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고도를 헤아려 보면 3분의 1 정도에 위치하여 항상 운기雲氣가 조망을 가린다 하여 운봉이라고 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운봉을 지나면서 비전마을을 보고 황산과 피바위를 보면 이내 인월입니다.
인월에 내리자마자 먼저 해야할 일은 밥집을 찾는 일입니다.
다행히 터미널 옆 허름한 식당이 문을 열었군요.
콩나물 국밥을 시켜 먹고는 서둘러 식당을 나옵니다.
지도 #1
08:30
터미널 옆 아직 인월 시가지는 조용합니다.
인월교로 가야죠.
돌아서서 좌틀하면,
정면으로 덕두산1151.5m이 보이는군요.
앞에 보이는 민박마을이 달오름 마을입니다.
옛날 인월 그러니까 구인월은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하죠?
지리태극종주 혹은 지리서부능선종주를 마치고 내려오는 산꾼들의 땀에 절은 싱싱한 얼굴을 만날 것만 같습니다.
08:33
마을 입구에서 좌틀하면 람천 방죽길이 나옵니다.
지난 2구간을 마친 곳이죠.
이 방죽길을 따라 지리산 둘레길 제3구간이 시작됩니다.
람천이라....
영진지도에는 광천이라 표기되어 있군요.
지리산에서는 수많은 물줄기가 흘러내리지만 위에서 언급한 김선신은 두류전지의 流水經편에서 지리산의 물줄기를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지리산 서쪽의 물로 장수 수분재에서 발원한 섬진강과 동쪽의 물로 운봉에서 발원하여 함양, 산청, 단성을 지나 남강이 되는 물 그리고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청천이 됐다가 남강이 되는 물"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 동쪽의 물을 정리해보자면,
백두대간 산줄기는 백두산을 떠나 금강산 ~ 설악산 ~ 덕유산을 지나 지리산권에 진입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남원시 운봉읍, 주천면,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고리봉1305.4m에 이르러 북동쪽으로 가지를 하나 치게 된다. 이 줄기가 소위 지리서부능선 혹은 지리서북능선이라고 하는 줄기다. 이때 백두대간과 이 지리서부능선 사이에 골이 하나 형성이 되고 그 골을 따라 물줄기가 생기게 됨은 자연의 섭리이다. 이때 ⓵주천면 쪽으로 흐르는 물은 원천천이 되어 요천으로 흡수된 다음 섬진강이 되고, ⓶운봉읍으로 흐르는 물은 주촌천이 되며, ⓷산내면 쪽으로 흐르는 물은 만수천이 된다. 지금의 산내면 원천리와 삼화리 입석리 일대의 옛 지명은 만수동 또는 내원동이었다. 그러니 만수천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고, 지리산 일만 골짝의 물길이 모였다고 하여 만수천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 만수천의 그 이전 이름은 “황계黃谿"였다. 여기서 ⓵원천천은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물이니 논외로 하고 ⓶주촌천은 둘레길 1구간 행정리에서, 서부능선 상의 세걸산에서 내려오는 람천에 흡수되어 이후 람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계속하여 람천은 인월을 지나면서 백두대간 봉화산 부근에서 발원하는 풍천을 흡수하고는 성삼재에서 내려오는 만수천을 받고, 이후 백무동의 덕천천, 칠선계곡과 국골의 의탄천을 더 받아 임천이 된다. 덩어리가 커진 임천은 특히 용유담에 이르러 엄천으로 불리며 흐르다 산청군 생초면에 이르러 경호강이 되어 남강으로 흡수된다.
이렇듯 지리산 반야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람천, 임천, 엄천으로 불리는 샛강들은 지리산의 한 축을 이루는 천혜의 자연경관이다. 섬진강이 백사장을 이루고 황포돗대가 떠있는 강다운 대하大河의 진정한 모습이라면, 지리의 북동쪽을 흐르는 이 샛강들은 강의 이미지 보다는 골짝을 감아 흐르는 전형적인 살여울의 모습을 하고 있어 물굽이마다 한 폭의 동양화이고 여울목마다 역사와 전설이 서려 있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월에서 경호강까지 실측거리 약 34키로인 작은 하나의 산골짜기 샛강을 두고 여울목마다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은 산세를 닮아 기개가 드높은 지역민들의 고집이 베인 하나의 지리산 풍류를 엿볼 수 있음직도 하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나오는 샛강과 이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이 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이 지역에서는 인월에서 산내까지를 광천, 산내에서 마천까지가 만수천, 마천에서 용유담까지를 임천臨川, 용유담에서 산청 경호강이 만나는 생초의 강정리까지가 엄천嚴川이라고 부르는데 임천과 엄천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본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
참고로 황계黃谿는 유몽인(1559 ~ 1623)의 유두류산록에도 나오는 이름입니다.
안내판을 보고,
오늘 둘레길을 시작합니다.
좌측으로 람천이 흐르고 우측의 논은 농사를 준비하느라 쟁기질은 이미 마무리 된 상태입니다.
앞에 보이는 산과 이 둘레길의 사이에 람천이 흐르고 있으니 이 길은 우측으로 휘어져 걷게끔 되어 있겠군요.
정면 우측 인월농공단지 뒤로 769.9봉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줄기는 그 뒤 좌측에서 올라오는 임천지맥 줄기와 투구봉1032.5m에서 만나겠죠?
이따 볼 수 있을 겁니다.
좌측이 임천지맥에서 갈라져 람천으로 잠기는 가지줄기들 그리고 우측이 지리서부능선 자세히는 덕두산이니 세걸산 등에서 가지쳐 내려오는 잔가지들입니다.
그러니 산줄기들은 항상 물로 잠기면서 그 맥을 다하게 됩니다.
대간이나 정맥 그리고 지맥枝脈의 이런 잔가지들을 여맥餘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측으로 구인월이 보일즈음 그 뒤로 태조 이성계의 황산698.7m이 보입니다.
저 황산은 역사적으로 참 의미 있는 산입니다.
산줄기사山經史로 볼 때에도 여원치와 더불어 상당히 중요한 곳이죠.
지난 구간에서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08:43
좌측에서 풍천이 이 람천으로 합류되는 모습을 봅니다.
백두대간의 봉화산에서 내려온 물입니다.
조금 전 물줄기 족보를 따져볼 때 나왔던 물줄기입니다.
우측으로 경애원이라는 노인요양시설이 보이고....
그 앞으로 구인월에서 나오는 도로와 합류하는 삼거리가 보입니다.
쉼터를 만들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도로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으니,
09:32
좌측으로 중군교가 보이는,
중군마을입니다.
예전 이성계가 왜군을 쳐부술 때 인솔하던 부대 중, 중군이 주둔하였던 곳이라 하여 중군 마을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즉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8월 현 군산의 진포에서 나세와 최무선에게 대패(진포대첩)를 한 왜구의 잔당이 상주를 거쳐 남하하여 주둔하고 있던 곳이 인월과 운봉 부근이었다.
이때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임명된 삼도 도원수 이성계는 백두대간 여원치에 주둔하고 있던 붕, 꿈을 꾸게 된다.
소복을 한 여인은 이성계에게 왜구를 격퇴할 작전을 들려준다.
심상치 않은 꿈이라 판단한 이성계는 그 꿈의 내용대로 작전을 수행하여 황산전투(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때 인월에서 산내, 반선으로 도망가던 왜구 잔당을 쫓던 부대가 상군上軍, 그리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부대가 중군으로 그들이 주둔하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얘기가 된다.
부언하자면 상군에 쫓긴 왜구들은 일본으로 도망가기 위해 뱀사골을 통하여 화개재로 오른다.
그러고는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지금의 연하천 ~ 영신봉 ~ 천왕봉 루트로 진행한다.
가는 도중 영신봉 아래 영신암에 들러서는 가섭상에, 천왕봉의 성모사에 들러서는 성모석상의 목을 각 훼손하였다.
훗날 점필재 김종직이나 유몽인 등이 이를 회상했다.
중군마을로 들어가,
시멘트 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 나옵니다.
우측 산등성이에는 촌로村老가 이른 시간에 봄을 준비하고 계시고....
09:14
좌측으로 둘레길 아래로는 '주랑흙집 팬션'이 하룻밤 유숙을 유혹합니다.
둥그렇게 흙으로 만든 게 특이해 보이는군요.
그러고는 바로 삼거리를 만납니다.
지도 #1의 '나'의 곳입니다.
이곳이 상신암 코스와 선화사 코스로 갈리는 곳이죠.
예전 지도에는 황매암으로 되어 있는데 최근 선화사로 그 이름을 바꿨습니다.
상신암 코스는 아까 중군리에서 진행하던 도로와 연결되는 평이한 길이니 산길 코스인 선화사 코스를 따르기로 합니다.
거리상으로는 0.7km가 더 멀지만 소요되는 시간과 체력 소모는 그보다 더 할 것입니다.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는 그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좌측을 보니 사진 우측으로 백운산904.1m이 쫑긋 솟아있고....
09:24
둘레길은 선화사를 비켜 지나가게 유도하지만 어차피 만날 거.....
예전의 황매암인 선화사를 봅니다.
개쉬키 두 마리가 하도 시끄럽게 짖어대면서 쫓아와서 들어가기를 포기합니다.
09:32
잘 정비된 부드러운 둘레길은 이내 삼거리를 만나 좌틀합니다.
둘레길 주변은 지난 겨울 보수공사를 하였는지 잡목제거는 물론 안전 시설도 확충되어 있었습니다.
09:41
산허리를 돌아 지도 #1의 '다'의 곳 언덕에 오르니,
바로 아래 시멘트 도로가 보입니다.
이곳이 지도 #1의 '라'의 곳으로 여기서 아까 헤어졌던 상신암 루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화살표는 빨간색 두 개에 검은색 하나입니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백련암을 보냅니다.
상당한 고지에 있을 백련암에 오르면 바로 뒤가 덕두산이니 그 뒤로 서부능선을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둘레길은 백련암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바로 좌측으로 떨어집니다.
'직진할 경우 알바이니 돌아가라'는 안내판도 군데군데 잘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면 지리서부능선 바래봉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하나를 만나는데 이곳에는 무인판매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수성대인데 예전에 외성外城을 지키는 수성군이 잠시 머물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는 하는군요.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설명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중군마을에 영향을 받아 '군軍'을 또 써먹은 느낌입니다.
천막 안에는 먹걸리통 하나와 김치통 하나 그리고 막걸리잔 몇 개가 놓여 있군요.
대포 한 잔에 2,000원이니 마셨으면 돈 내고 가라는 취지군요.
수성대 전경.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둘레길을 따라 분위기 있게 걷습니다.
10:11
쉼터 시설이 되어 있는 고갯마루 즉 배너미재舟踰岾를 넘습니다.
이 배너미재는 운봉이 바다였을 때 배가 넘나들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운봉의 백두대간에서 지리서부능선이 갈리는 고리봉1305.4m과 그 아랫마을인 주촌리舟村里 그리고 이 주유재가 하나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듯하군요.
그런데 사실 남원의 진산이라고 하면 남원 사람들은 이 고리봉을 치는 게 아니고 남원시 대강면과 금지면의 면계에 있는 고리봉710.1m을 꼽습니다.
요천지맥상의 앞의 삿갓봉624.3m과 그 뒤 볼록 나온 게 고리봉인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남원 자체가 배모양이어서 홍수가 날 경우 남원이 떠내려 갈 염려가 농후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봉우리가 배모양을 한 남원의 선수船首를 매어두는 역할을 하는 산이라고 합니다.
고리봉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니 이 배너미재를 억지로 한자어 舟踰岾로 표기한 것에는 의문이 가는군요.
아까 보았던 백운산이 다시 보이니 바로 옆이 이따 지날 등구재입니다.
좌측 뒤로 드디어 임천지맥의 투구봉1032.5m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니 이제부터 인월면을 떠나 산내면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니 아직도 남원입니다.
남원땅이 무지 넓군요.
일성콘도 뒤가 꾀꼬리봉391.1m이니, 둘레길은 바로 그 좌측으로 진행할 겁니다.
장항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당산나무를 만납니다.
노루목과 장항.
같은 말이죠.
노루목을 한자로 쓰면 獐項이니까 말입니다.
걸음을 빨리하여 내려온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 곳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붙어있다. 이는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노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럴까?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를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만한 곳도 아닌 곳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 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늘’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獐)’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란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이름들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64쪽'
장항동은 지리산 동쪽의 산수 기운이 모인 곳이다. 장항동은 남명 조식의 문집에도 실려 있고 또 겸재 하홍도가 읊은 시도 있다. 우선 조선말의 유학자 월촌月村 하달홍의 시를 한 번 들어볼까? 그는 장항동을 이렇게 노래했다.
天秋日暮肅無雲 가을 하늘 해가 지고 구름 없이 맑은데,
洞別巖奇絶世紛 골짜기를 구분지은 바위 기이하여 어지러운 세상과 끊어주네.
禹稷若知山水趣 우와 직이 만약 산수 맛을 알았다면
無人陶鑄舜乾坤 아무도 순임금의 세상 만들지 못했으리.
이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항동은 그윽하고, 깊고, 고요하며 인적이 없어 우왕이나 직왕이 이 장항동을 알았더라면 이곳에 푹 빠져 세상살이도 잊었을 정도로 적막하기까지 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계속해서 하달홍의 얘기를 들어보자.
“금년 봄 내가 두류 동쪽 기슭에 놀러 갔을 때 장항동이라고 하는 곳을 물어보았지만 산속 늙은이나 마을 노인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잃어버린 것 같아 몹시 서운하였다. 대원암에서 자는데 벽에 쓰여진 시를 보고는 비로소 바로 여기가 장항동임을 알았다. 암자 앞에 장항치가 있어 그런 이름을 얻은 것 같다. (대원암은) 강희(1662-1722)연간에 승려 운권이 세웠다고 법우화상이 말하였다. 암자의 북쪽에는 계곡물이 부딪쳐 폭포가 쌓여 있고 (폭포의) 웅덩이는 맑고 투명하며 거울 같은 바위는 모두 흰색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뻐하여 종일토록 떠나지 못하게 한다. 또 양쪽 계곡은 푸른 산이 천길 벼랑으로 서 있어, 추연히 선생의 기상을 다시 보는 것 같다. 두류에는 숨어 있지만 칭할 만한 곳이 많은데 한녹사의 삽암이나 최문창의 쌍계 같은 곳이 그것이다. 신라‧고려 이래로 그윽한 곳을 찾는 무리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지만, 이 골짜기를 특별하게 뛰어난 곳으로 여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며, 반드시 명옹이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그래서 이 땅과 선생의 조우遭遇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다만 대원암만 알고 장항동은 모르니 이 땅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땅의 행‧불행에 관하여 진실로 사무치는 감정이 있는 자이며, 또 선현이 이곳에 남긴 아름다운 향기가 사라져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에 기록한다.”
여기서 선생은 남명 조식을 말하며 한녹사는 고려 때의 한유한韓惟漢을 말하는데 한유한은 벼슬을 마다하고 가족과 함께 지리산에 숨어들은 인물로 도교사상과 연관하여 하동 악양을 지날 때 자세히 볼 것이다.
진양지는 장항동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삼장리 탑동塔洞 서쪽에 있다. 골짜기 입구가 아득하고 깊어 30여 리나 된다. 산수가 기이하고 험준하여 산속에서 더욱 절경인 곳이다. 시내는 지리산 동쪽에서 발원하는데 구름에 스며들고 바위에 부딪히며 동쪽 삼장리로 들어간다. 10여 명이 앉을만한 반석이 있다”
이 반석과 관련하여 송정 하수일은 '유덕산장항동반석기'에서 “덕천서원에서 시내를 건너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자 장항동이 있었다. 위아래에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곧은 모습이 화살 같았다. 여기에서 작은 암자를 지나 동북쪽으로 수십 보를 걸어가니 네모지고 넓으며 평평한 반석이 있었다. 좌우에 물을 두르고 있었는데 패옥佩玉이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예전에 남명이 소 옆구리처럼 생긴 지리산을 답파하면서 여기에서 시를 짓고 이곳을 사랑했다. 이런 까닭으로 제군이 사모하여 곧은 소나무를 보면서 그분의 기상을 우러렀고 패옥 같은 물소리를 들을 적에는 그분의 말씀을 상상했다.”고 적었다.
- 필자 주) 德山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남명의 “소 옆구리 운운"은 남명이 유두류록에서 산행을 마치고 난 후, 함께 산행을 한 일행들과의 헤어짐 그리고 지리산에는 들었으나 자신의 뜻한 바를 일구어 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등을 표현한 말이다.
즉 남명의 "누렁 소 옆구리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했고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가 바로 그 글귀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
장항마을 입구의 시멘트 도로.
둘레길은 좌틀합니다.
그런데 우틀하면 지리산 신선둘레길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군요.
여기서 시작하여 팔랑마을 거쳐 바래봉으로 진행하거나, 반선을 거쳐 달궁까지 걷는다는 길인데....
이 남원에는 OO길, XX길....
길이 너무 많이 생겨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이 길을 따라 우측으로 올라가면 산내교를 건너 오는 861번 도로와 만나게 되고 그 길은 곧 반선 ~ 달궁 ~ 성삼재로 이어지게 됩니다.
구례 ~ 천은사 ~ 성삼재로 이어지는 도로라는 얘깁니다.
둘레길은 좌틀하여 장항교를 건넙니다.
람천을 건너 60번 도로를 건넙니다.
우측으로 산내우정교육원이 크게 세워져 있고,
지도 #2
우체국 건너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뒤를 돌아보면 조금 전 내려온 길과 그 뒤로 지리서부능선의 바래봉과 덕두산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바래봉 좌측으로 흐르는 줄기가 사실은 앞으로 휘어 오면서 984.3봉을 거쳐 람천까지 내려오는 인월면과 산내면의 면계面界가 되는 줄기입니다.
조망은 그 덕두산 아래 백련암까지 확인할 수 있는 기쁨이 있군요.
우측으로 달성서씨 가족묘를 지나고,
이동식 기지국과 일성 콘도가 있는 꾀꼬리봉을 지나면,
11:06
매동마을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틀합니다.
11:17
그렇게 서진암 삼거리로 오릅니다.
이 삼거리가 중요하죠.
여기서 서진암으로 올라가 좌틀하여 백장암으로 가거나 우틀하여 금강대 ~ 서룡산 ~ 투구봉으로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뒤로 미룹니다.
이제부터는 온전하게 산길로 접어듭니다.
아직 장사를 시작하지 않는 무수한 안내판들을 보고 진행합니다.
호젓한 소나무 숲을 지나면서 물이 조금이라도 흐르는 곳이었다면 존 바에즈가 생각났을 거라는 생각도 하고....
11:37
임도를 만나 우틀한 다음,
좌측 매점에서 좌틀하고,
그러면 정면으로 백운산과 등구재가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나라에 백운산은 참 많기도 합니다.
지리산만 해도 저 백운산과 광양에 있는 호남정맥의 백운산 그리고 7구간 정도에 지날 백운계곡의 백운산516m도 있죠.
우측으로는 지리북부능선의 삼정산 줄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작은 시멘트 도로를 따라 매점 하나를 지나면,
새단장을 서두르고 있는 전원주택 단지를 지납니다.
여기서 살면 지리산을 늘 보고 살 것이니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노후에 이쪽으로 이사를 오면 어떨까 하는 망상을 하며 지납니다.
11:49
지도 #2의 '마'에서 크게 좌틀합니다.
거의 270˚ 정도로 틉니다.
다시 삼봉암 갈림길에서 우틀합니다.
등구재가 가까워져 옵니다.
등구재는 이 부근에 있다 지금은 폐사된 등구사로 인해 생겨난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삼봉암이 훌륭한 절터이니 혹시 예전의 등구사 터에 새로 진 게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함양군수로 있던 1472년 8월 14일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지리산 산행에 나섰습니다.
예전 말로는 유람이었지만 그 유람이 산으로 들어오면 현대어로는 등산 아니겠습니까?
천왕봉 ~ 영신봉 등을 들르고는 백무동으로 하산하였습니다.
선생이 훌륭하게 4박 5일 일정의 산행을 마치고 귀가를 할 때 지났던 루트가 바로 이 길입니다.
등구재를 넘어 오도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이쯤 되면 조의제문 사건으로 35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탁영 김일손(1464~1498) 선생이 생각날 법도 합니다.
탁영 김일손은 1489년 4월 14일 정여창, 김형종 등과 함께 산행을 나섰습니다.
천령天嶺 그러니까 지금의 함양을 출발한 세 사람은 등구사에 도착합니다
"불룩하게 솟은 산의 형상이 거북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우뚝한데 그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가 북쪽에서 그 속으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위에 두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우리는 동쪽 사찰에 묵었다."
14박 15일이라는 긴 일정을 소화한 산행이었습니다.
등구재로 오르는 길 우측으로 펼쳐지는 다랭이논들도 농사 준비가 한창입니다.
다락논이라고도 하는 다랭이논은 고단한 옛 지리산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필리핀 이푸가오Ifugao 지방의 계단식 논보다야 못하겠지만 상당한 규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18세기 이후 전쟁이나 전염병 그리고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대부분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의 가난한 농민들로 그들은 벼농사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이 있는 10˚ 내외의 경사 지역이 그들이 찾는 곳 1순위였습니다.
그러고는 돌로 논둑을 쌓았고 논면은 점토를 져다 날라와서 다져 넣었습니다.
이런 논들을 특히 '구들논'으로 부른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논모양이 등고선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생기게 되는데 결국 농로와 수로 역시 그에 따라 같은 모양으로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산에서 내려오는 찬물이 농사에 부적합하므로 수로를 따라 고이거나 흐르는데 시간이 걸리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 수온을 높여 냉해를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혜의 산물입니다.
참고로 찬물과 참물에 대해서는 지난 17-1구간을 하면서 수한마을에서 얘기한 바 있습니다.
11:59
우틀하고,
좌측으로 드디어 투구봉1032.5m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마천방향을 보고.....
좌측으로 상황소류지를 지나,
삼봉산으로 향하는 임천지맥을 보면서 걷는데,
멀리 눈에 덮힌 천왕봉이 보입니다.
조금 당겨봅니다.
그렇군요.
천왕봉은 아직도 그 계곡에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12:12
완전히 중황마을을 빠져나오면서,
논과 비닐하우스를 봅니다.
마지막 민가와 식당이 있는 곳을 지나니,
12:32
좌틀하면 삼봉산으로 올라 임천지맥에 닿을 수 있고 우틀하면 백운산 ~금대봉 ~ 금대암으로 이어지는 루트입니다.
그런데 김일손은 등구재 ~ 금대암 루트를 이용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등구재는 경상남도 함양과 전라북도 남원을 가르는 도계道界 역할을 하는 고개입니다.
이제부터는 남원을 버리고 함양군 마천면으로 들어섭니다.
금대암으로 가는 길.....
지도 #3
마천면 창원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낙엽송 군락지입니다.
바닥의 푹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류지 하나를 지나고....
좌측 끝의 움푹 파인 곳이 오도재이고, 그 윗봉우리가 법화산 갈림 삼거리봉992.9m입니다.
오도재에는 지리산 제1관문이라는 멋진 시설물이 있습니다.
법화산은 오도재 좌측의 임천지맥에서 벗어난 있는 봉우리로 용유담의 엄천과 어울려 화산12곡으로 유명한 봉우리이지만 사실 별 볼품은 없습니다.
유유자적하게 내려오면,
12:45
시멘트 임도가 나오는데 화살표는 좌측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마 우측길은 민원의 대상이 되는 길인 듯 싶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사유지인 듯 싶군요.
지주가 둘레길로 이용하는 걸 반대한 모양입니다.
좌틀합니다.
우측으로 천왕봉이 다시 보이는군요.
좌측으로 진행하는 줄기가 바로 지리동부능선이면서 덕천지맥이기도 하고, 지리태극종주 루트이기도 하며 신산경표에서는 웅석지맥이라고 부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천왕봉은 중봉, 하봉을 거쳐 쑥밭재를 지나,
와불산臥佛山1213.9m으로 내려와 의탄리나 운서리 혹은 동강리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 와불산 바로 앞쪽으로 독녀암으로 불리는 '함양 독바위'가 명백한데 사진으로는 그저 뿌옇게만 보입니다.
점필재 김족직 선생은 저 바위를 지나면서
"내 일찍이 산음(산청)을 오가며 이 바위를 바라보았는데, "고 하여 여러 봉우리와 함께 우뚝 솟아서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보였다." 고 하였죠?
"전하는 말에,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하여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돌을 쌓아 놓은 것이 여태 남아 있었다."고 하여 그 유래도 설명하였습니다.
저 동부능선에는 독바위가 하나 더 있죠?
'진주 독바위'라고....
악양 뒷편에 있는 지리남부능선에 있는 삼신산 옆의 독바위는 '하동 독바위'라고 부르고....
와불산은 말 그대로 누워 있는 부처님의 형상을 한 산인데 그 참모습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송전리의 견불사입니다.
마을로 치자면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동네가 바로 휴천면 문정리의 견불동이라고 하는데 제가 들렀을 때는 조망이 안 되는 날씨였고 주민들에 의하면 자신들도 제대로 못 봤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견불사니 견불동이니 하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고 저 와불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똑똑한 어느 스님이 붙인 이름이겠죠.
외딴 집을 지나,
지리 주릉을 다시 봅니다.
좌측에 천왕봉부터 우측의 영신봉까지만 보이는군요.
13:18
음 드디어 임천지맥의 맹주 삼봉산1186.7m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백운산 지나 금대산851.5m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상당히 뾰족합니다.
창원마을은 외곽으로 통과하게끔 길이 개설되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예전에 마천면에서 거둔 세금과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 창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웃 원정마을과 합쳐지면서 창원마을이 되었습니다.
이정표를 따라 외곽으로 빠집니다.
개인 사당을 지나 당산나무를 봅니다.
지리산과 백운산 등을 조망하기에는 더없이 좋으나 오늘은.....
지리산 천왕봉까지.....
13:28
아까 등구재에서 내려와 우틀하지 못하게 진입금지 표시가 되어 있던 곳.
만약 우틀했으면 이리로 내려왔을 겁니다.
좌측부터 금대산 우측 끝봉우리가 백운산.
중황리에서 보던 백운산의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마을 우측으로 다시 돌아나가면서,
좌측 삼봉산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는 임천지맥은 가운데 오도봉에서 뒤로 넘어 지안치 쪽으로 떨어집니다.
오도봉에서 우측으로 계속가는 줄기는 우측 끝 오도재를 넘어,
법화산 삼거리봉으로 진행합니다.
그러고는 뒤로 넘어가 법화산으로 진행하는데 여기서는 관측이 안 되는군요.
다만 934.7봉으로 나온 줄기를 따라 견불동으로 내려가는 수도 있습니다.
상당한 급경사를 각오하여야 합니다.
우측을 따르고....
좌측 등구재에서 삼봉산으로 올라가는 줄기.
삼봉산 ~ 오도산 ~ 오도재.
오도재 ~ 934.7봉.
와불산.
중앙 우측의 천왕봉까지....
14:03
소나무 숲을 빠져나와,
우리나라 최장계곡인 그 이름도 아름다운 칠선계곡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의탄리 추성동으로 들어가는 곳이죠.
의탄과 추성동은 이따 4구간에서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좌측으로 돌을 쌓아놓은 돌창고를 지나는데 360.2봉을 작살내고 있는 채석장 소리 때문에 영 시끄럽기만 합니다.
우측으로 창암산924.9m을 봅니다.
저 창암산은 지리산 제석봉에서 내려오는 줄기입니다.
제석봉1809m ~소지봉1499.1m ~ 망바위 ~ 장구목을 지나 창암산으로 떨어지는 약8km 정도가 되는 줄기입니다.
좌측으로는 백무동, 우측으로는 칠선 계곡을 보며 내려오는 이 줄기는 조망은 별로 없어도 능선을 밟는 이들을 언제든지 유혹하는 코스입니다.
숲속을 빠져나와 채석장을 보면서,
멀리 왕산까지 바라봅니다.
나마스테 카페를 지나고는 이내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
이내 금계마을에 있는 금계 쉼터 앞에서 3구간을 마무리하고 옆 슈퍼에서 캔맥주 한 통을 사서 목을 적십니다.
14:27
4구간은 저 다리를 건너가서 시작을 해야겠죠.
맥주를 마시면서 다리를 건넙니다.
첫댓글 지리산 둘레길 인월에서 금계구간이군요.
언제 진행하신건지 ?
연무는 끼었지만 지리주능선도 드러납니다.
한번쯤 다녀가고픈 곳이기도 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 이용하여 다녀왔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모임때는 꼭 참석해야 되는데 걱정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