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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만남이 이뤄지는 방문 진료
“이제 우린 살았어요.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40대 중반 태수(가명) 님은 뇌병변장애로 거동이 어려워 집에 머물고 있다. 10년 가까이 보건소 의료진이 때때로 찾아와 필요한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런데 보건소 사정으로 더 이상 찾아오기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 진료를 하는 우리에게 연락을 주셨다. 태수 님과는 대화를 하지 못하고 눈으로 인사했다. 나를 맞이한 분은 그의 어머니였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해 고생한다고 했다. 약이 얼마 남지 않아 며칠간 약을 복용하지 않고 아껴두었다.
태수 님과 말로 대화하진 못했지만, 그의 반가운 표정에서 내가 아주 폐를 끼치진 않았다고 느꼈다. 그저 필요한 약을 처방해드렸을 뿐인데 어머니께서 연신 살았다고 하시니 송구했다. 더 이상 의료인을 만나지 못한다는 걱정이 공포로 느껴졌을까? 코로나 시기 태수 님을 데리고 사람들로 붐비는 병원에 찾아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보건소에서 오랜 기간 찾아주었지만 더 이상 못 온다는 소식은 그들에겐 절망이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만났다. 그저 연락받고 찾았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전했다. ‘살았다’고 하시니 의사의 본분을 다한 듯하여 모처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 가본 태수 님의 집을 나와 하염없이 걸으며 생각했다. 무엇이 그들을 살았다고 느끼게 했을까? 무엇이 우리를 아파도 살아가도록 격려할까? 두 번째 방문하는 길에 갑작스럽게 소나기를 만났다. “선생님, 비가 많이 오는데… 죄송해서요.” “걱정 마세요. 지금 찾아뵐게요.” 첫 번째 방문 때는 부슬비가 내리더니 두 번째 방문 땐 우산이 있어도 옷이 다 젖을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태수 님을 방문한 일은 비와 함께 기억될 듯하다. 날씨가 어떻든, 또 찾고 찾으며 고민을 이어가보리라.
사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경우가 별로 없는 의사다. 방문 진료로 만난 분들 중에는 말기 질환과 노쇠로 임종을 앞둔 경우가 꽤 많다. 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이 상황에서 내 역할은 환자의 마지막 길을 보호자와 상의하여 잘 찾아가는 일이다. 위급한 순간에 적절한 처치를 하고 세심하게 진찰한 뒤 상황을 설명해드리면 임종을 앞둔 절망적인 순간에도 보호자분들은 때로 안도한다. 죽음을 막지 못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무리하게 처치하기보다 간단한 수액 처치나 통증 조절을 통해 편안히 지내도록 돕는다.
그리고 나를 대면하는 보호자의 마음을 살핀다. 환자분은 말이 없는 경우가 많아 보호자분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게 된다. 그간 투병 과정에서 무엇이 힘들었는지, 짧지 않은 헤어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후회는 없었는지.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듣고, 진찰 소견을 말씀드리고 조심스럽게 앞으로의 경과를 설명한다. 한 번에 다 설명하진 않고 방문할 때마다 덧붙여간다. 하루가 될 지, 한 달이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시간을 뜻깊게 보낼 수 있도록 돌본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대화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최대한 많이 소통하길 당부한다. 나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며 마음을 정리하시기도 한다. 내가 적극적으로 할 일은 별로 없다. 조금이라도 남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길 바랄 뿐.
설령 임종이 가까워도 만나서 대화하며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다음을 계획한다. 일단 찾아가기, 객관적인 상황 파악, 진실된 소통 그리고 또 찾아가기. 생각보다 단순하고 간단한 일이다. 이 과정 가운데 영원한 이별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이별을 감내할 힘도 얻는다. 이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삶을 다시 그려본다.
2018년 3월 필자가 쪽방진료를 하고 있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청년들과 함께하는 지역 공동체 활동
2019년 3월 방문 진료만 하는 작은 의료기관인 건강의집의원을 설립했다. 남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주로 노쇠, 질병 및 손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만났다. 코로나 시기에도 꼭 필요한 진료를 전달하기 위해 우리 의료진은 움직이고 있다.
건강의집의원을 설립하게 된 계기는 동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면서부터였다. 병원 속 의사로 살기보다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2014년부터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주민들 속에 살며 작은 상가 공간을 마을 사랑방 삼아 공동체 활성화, 청소년 교육, 지역재생, 돌봄, 축제 행사 기획, 문화예술 활동 등을 잡다하게 벌였다. 그렇게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몇몇 청년들도 만났다. 이들과 함께 살게 된 나는 청년 주택을 위탁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엔 지속가능한 자립 모형을 만들기로 마음을 모아 초기 자금 20만 원으로 로컬엔터테인먼트협동조합을 설립했다.
협동조합의 처음 목표는 축제 행사를 위한 물품을 저렴하게 대여하여 지역 내 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하겠다는 것이었다. 동네 곳곳을 누비며 천막과 테이블을 깔고 축제, 행사를 치르며 나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강적을 만났다. 대면 활동이 금지된 마당에 축제는 무리였다. 야심차게 구비했던 천막과 테이블은 창고에 격리되었다. 초기 창업자인 나와 진우와 철우는 번민했다. 어렵게 명진, 현지, 민정까지 나를 뺀 5명의 상근자가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는데 당분간 손가락 빨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2014년에 활동을 시작하여 뜻을 모아 창업을 한 것이 2018년이고 월급다운 월급을 받은 때가 2020년이니 잠시 월급 받는 기분만 낸 셈이다. 생존을 위해 진우와 철우는 자발적으로 월급을 받지 않기로 했다. 어렵게 5명이 함께 힘을 모았는데 여기서 무너지기엔 억울했다.
협동조합을 설립할 때 우리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다 보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을까’를 사훈으로 삼았다. 능력 있는 활동가들은 정치인들과 합심해 멋진 건물을 짓고, 큰 예산 사업도 하고, 물리적 변화를 시도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혼자 사는 어르신들 이삿짐을 나르거나 동네 청소를 하기로 했다. 축제나 행사를 해도 누군가는 테이블을 놓고 천막을 치고 음향 시설을 깐다. 최소 행사 시작 3시간 전에 준비하고, 끝나고도 2시간 이상 정리한다. 우리에겐 행사를 준비하며 물건을 옮길 때가 지역과 생생하게 만나는 시간이었다. 지역 내 소규모 행사에서 그런 일을 기쁘게 할 업체는 없었다. 축제를 즐기거나 잠깐 와서 마이크 잡고 인사하기만 좋아한다.
우리가 월급을 줄이고 공존하기로 한 선택 또한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인지도 모른다. 경쟁을 외치는 사회에서 공존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는 함께하는 일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다행스럽게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공모했던 몇 가지 사업에 선정되어 어려운 고비는 넘었다. 최근에는 온라인 공론장을 열어 청년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하고 주민들과 코로나 이후 지역 공동체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다. 코로나와 같은 시국이 다시 찾아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선택을 반복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공존을 선택했던 경험은 회사가 망하더라도 청년들의 앞날에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몇 년 이것저것 해보니 우리에게 혁신적인 사업 모델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음을 절실히 느꼈다. 우리에게 밀레니얼 세대다운 재기발랄함도 부족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함께하고 있다. 함께하다 보면 절망의 순간에도 길을 찾아가리라. 우리가 지역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없지만,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서로를 돌보며, 동료의 일자리를 지키며,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를 돌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코로나 시기, 사람과 만나서 소통하는 일은 부차적으로 취급된다. 한때 주로 어르신들이 모여 쉬던 정자와 거리 운동 시설에 공사 현장이나 범죄 현장에서 볼 법한 접근금지 테이프가 칭칭 감겼다. 마치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임이 범법행위가 돼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어르신들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걱정이겠지만 일상적인 만남의 금지가 또 다른 고립감을 느끼게 할까 걱정이다. 그저 서로 기쁘게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이전에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모였던 날의 감정이 회복되길 바란다. 그 감각마저 잃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의료인을 만나지 못한다는 공포는 죽음에 비견할 만했다. 이웃과의 단절을 죽음과도 같은 고통으로 느낄 어르신들이 마음 한편에 자리한다. 다행히 연결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갈 희망을 얻었다. 누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아마도 기꺼이 월급을 나눠 공존을 선택하는 동료들이거나, 가까이서 힘겨운 하루를 감내하며 이어가는 이웃들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 공존하는 관계는 설령 죽음을 앞두었을지라도 살아갈 힘을 준다. 함께 존재하며, 함께 살아가고 싶다.
병원 속 의사로 살기보다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2014년부터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주민들 속에 살며 작은 상가 공간을 마을 사랑방 삼아 공동체 활성화, 청소년 교육, 지역재생, 돌봄, 축제 행사 기획, 문화예술 활동 등을 잡다하게 벌였다.
효율을 말하는 혁신이 외면하는 것들
고통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아픈 이를 마주하는 일은 특히 어렵다. 말기 질환을 겪는 환자를 만나면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떠올리는 일만큼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있을까. 우리는 분명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보편의 경험이다. 그저 먼저냐 나중이냐 차이일 뿐이다. 용기 있게 아픔을 마주한다면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데 힘을 얻을 수 있다.
최근 의료 기술의 발전은 대면하지 않고서도 치료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원격의료 서비스를 통해 진료를 받고 필요한 약이 택배로 전달된다. 돌봄 로봇이 어르신들의 외로움을 달랜다. 위기의 순간에는 응급 콜이 자동으로 울린다. 비대면 사회에서 아픔을 첫 번째로 마주하는 존재는 곁에 있는 이가 아니라 기계이다. 불필요한 대면을 줄여 효율적일 수 있다. 아픔을 마주하지 않도록 설계된 체계는 혁신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픈 이들의 집에 찾아가며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이 ‘찾아오는 이’를 기다린다는 점이다. 하루 몇 시간씩 곁에서 식사를 돕고 대소변 처리를 도와주는 돌봄 노동자의 손길이 없다면 하루를 살아내기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픔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가난과 질병으로 낙오한 이웃들을 잊는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건강 정보와 의료 지식을 흡수한 전자 기기만 곁에 있다. 결국 모두가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까지 속고 또 속는다. 기술의 수혜를 주도적으로 향유하는 부유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혜택을 누리겠지만 정신 차리면 나와 나의 가족이 아플 때 손잡아주는 이 없는 현실을 마주한다.
자신을 속이지 말자고들 한다. 주어진 상황에 외면하지 말고 맞서라고 한다. 자기 계발서에 나올 법한 말들이지만 지금 우리는 대면할 용기를 내야 한다. 누가 배송해주는지 알 필요가 없는 새벽 배송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과로하고 사망했다. 음식을 배송하는 라이더는 인공지능의 지시에 서두르다 사고가 난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전 세계가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나만 잘살 수 없다. 선진국이 누리는 부는 개발도상국의 가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연결된 세상을 마주한다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서로를 마주하지 않도록 설계된 체계에서 우리는 건강할 수 있을까? 충분한 시간을 통해 천천히 살면 덜 아프게 살아가지 않을까?
천천히 사는 일은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세심한 배려는 미리 헤아리는 마음과 먼저 움직이는 몸에서 나온다. 게으르고 빠른 세상. 아픈 이를 외면하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혁신의 세상이었나? 그런 거짓말은 들통나게 되어있다. 지금이라도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건강의집의원 내부.
어떤 혁신보다 중요한 ‘반복된 만남’
코로나 시기 아픈 이들의 집을 드나들며 생사의 고통을 함께하고 청년들의 생존과 지역 활성화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동안 열심히 해왔으니 이만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말이 서로의 마음에서 읽혔지만 되도록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방문 진료를 전적으로 하는 병원, 지역의 빈틈을 메우는 청년들의 활동이 커다란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경제구조의 근본적 변화, 정책 변화를 통한 좋은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우리는 그저 이렇게 가장 아픈 이들을 돌보고자 하는 작은 마음으로 움직였다.
좋은 체계는 사회의 가장 아픈 이가 고립되지 않고 돌보아지는 체계라고 생각한다. 외형이 어떻게 갖춰지든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탈락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 아닌가? 코로나로 인해 배제된 사람들, 감옥 같은 시설에 갇힌 사람들이 드러났다. 돌봄 공백을 주목한다면,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상황을 비대면 기술로만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 기술의 진보가 존재의 연결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좋은 체계를 만들고자 노력하기 이전에 소외된 이를 대면해야 한다. 찾고 또 찾아야 한다. 반복된 만남에서 시작해 체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사실 반복된 만남이 가능해지는 순간은 좋은 체계가 자리 잡는 시점인지 모른다.
공존을 선택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외면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경쟁의 장에 오른 사람들은 주목받지만 이미 사회에서 필요 없다고 취급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는 것이 세상의 어떤 혁신보다 중요한 일이다. 효율의 논리로 대체될 문제가 아니다. 혁신과 효율을 말하면 굉장히 진보적인 사람,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진보한 세상은 가난과 질병 속에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삶은 본디 고통스럽고 힘겹다. 희망이 없어 절망한다. 서로를 돌보며 살아갈 수 있다면. 편하고 빠른 거짓 혁신이 아니라 불편하고 느린 진짜 세상을 맞이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지만 선뜻 용기를 내기 어렵다. 그래도 찾아가볼 수밖에.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을 하다 보면 어느덧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지 누가 알겠는가?
“서로를 돌보며 살아갈 수 있다면. 편하고 빠른 거짓 혁신이 아니라 불편하고 느린 진짜 세상을 맞이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지만 선뜻 용기를 내기 어렵다. 그래도 찾아가볼 수밖에.”
첫댓글 일단 찾아가기, 객관적인 상황 파악, 진실된 소통,
그리고 또 찾아가기..
생각보다 단순하고 간단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
쉽지가 않습니다..선뜻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삶을 다시 그려봅니다.
정말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편하고 빠른 거짓 혁신이 아니라
불편하고 느린 진짜 세상을 맞이할 용기를 가지고..
우리 함께 존재하며,
함께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