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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6.1.PM2시)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시방 보살들의 찬탄
오늘도 화엄경 한 단락 공부하겠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수미정상게찬품, 수미정상에 부처님이 올라가시니 시방에서 많은 보살들을 이끌고 온 대표보살이 각각 열 개의 게송으로서 부처님의 경지를 찬탄하고 있다.
6) 동남방 선혜(善慧)보살의 찬탄
이시(爾時)에 선혜보살(善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선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1) 부처님을 보다
희유대용건(希有大勇健)하신 무량제여래(無量諸如來)여
이구심해탈(離垢心解脫)하사 자도능도피(自度能度彼)로다
희유하시고 크게 용건(勇健)하신
한량없는 모든 여래여
때를 여의고 마음이 해탈하시어
스스로 제도하고 저들도 제도하셨네.
부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보았다.
희유하시고 크게 용건(勇健)하신
한량없는 모든 여래여
때를 여의고 마음이 해탈하시어
번뇌를 다 떠나고 근심 걱정 온갖 갈등 다 떠나고 마음이 해탈하시어 모든 장애로부터 모든 고통으로부터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마음이 벗어나 있다.
마음이 어떤 문제에서 벗어나고, 마음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그것이 해결된 것이다. 경계를 해결하려고 해봐야 그것은 답이 안 된다.
예를 들어서 10억을 가진 사람이 ‘아 1억만 더 가졌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자. 1억을 어쩌다가 가지게 되어서 11억이 되었다. 그러면 더이상 필요를 느끼지 않는가 하면 사람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11억을 채우게 되어도 또 마음에 해결이 안 되고, 더 필요한 것이 있고, 또 더 필요한 것이 있다. 늘 그렇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마음에서부터 해결을 하고 그다음에는 11억을 갖든지 20억을 갖든지 아니면 설사 줄어들든지 그것은 관계가 없다.
마음으로부터 이미 해결이 됐다면, 모든 문제를 여읜다.
마음이 해탈했다면, 그다음은 바깥 경계가 불어나든 줄어들든 상관이 없다. 경우 따라서 불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고, 줄어들다가 불어나기도 하고, 불어났다가 줄어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아
스스로 제도하고 저들도 제도하셨네
스스로 문제 해결을 했고, 스스로 제도하고, 다른 사람도 제도하셨네, 그것이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는 자리이타(自利利他)다. 불교는 늘 그렇다. 자신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그런 이치를 가지고 이롭게 하는 것, 내가 인과의 도리를 잘 알아서 그대로 편안하게 순리대로 살고 있다면, 그러한 이치를 다른 사람에게 인연 닿는 사람, 가까운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그 이치를 깨우쳐 주어서 그러한 이치로써 이익을 얻게 한다. 그것이 자리이타, 이타자리다. 다른 사람에게 이롭게 하고 또 나에게도 이롭게 한다. 부처님을 본 입장이 그렇다.
‘부처님은 이러한 분이었구나’ 선혜보살이 본 부처님의 경계이다.
참 훌륭하다. 우리가 불교를 안다, 불교를 보았다, 그것을 어떻게 정리하겠는가? 어떻게 간단하게 표현하면 되겠는가? 각자대로 다 소견이 있을 것이다.
한 쉬운 예로써 ‘나는 화엄경에서 안심입명을 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럴 수도 있겠고,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내가 믿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에게서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럴 수도 있겠다. 다 좋은 내용이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가지고 나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일, 그것을 꼭 잊어서는 안 된다.
아견세간등(我見世間燈)의 여실부전도(如實不顚倒)가
여어무량겁(如於無量劫)에 적지자소견(積智者所見)이로다
내가 보니 세간의 등불이
실상과 같아 전도되지 아니하고
한량없는 겁에
지혜를 쌓은 자의 보는 바와 같도다.
내가 보니 세간의 등불이
실상과 같아 전도되지 아니하고
세간의 등불이 누구인가? 부처님이다.
한량없는 겁에
지혜를 쌓은 자의 보는 바와 같도다
한량없는 겁에 지혜를 쌓은 자, 부처님이다. 한량없는 세월 동안 지혜를 쌓은 분이 부처님이다. 그런 분을 나는 이렇게 보았다, 하는 뜻이다.
그래서 세상의 등불이 되고, 세상의 등불이 되면 사실을 사실대로 전도되지 않게 보고 안다. 거기에 맞춰서 살아간다. 참 훌륭한 이치다.
(2) 법을 보다
일체범부행(一切凡夫行)이 막불속귀진(莫不速歸盡)하나니
기성여허공(其性如虛空)일새 고설무유진(故說無有盡)이로다
모든 범부의 행은
빨리 다하는 대로 돌아가지만
그 성품은 허공과 같을새
그러므로 다함이 없다고 말하네.
모든 범부의 행은
빨리 다하는 대로 돌아가지만
범부의 행은 다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 모두가 바닥이 난다.
그 성품은 허공과 같을새
그러므로 다함이 없다고 말하네
그 성품 본성은 허공과 같다. 허공 속에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그 구름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따라서 부침하고 또 온갖 희노애락을 일으킨다. 이것이 범부들의 행이다.
지제설무진(智者說無盡)이나 차역무소설(此亦無所說)이니
가성무진고(自性無盡故)로 득유난사진(得有難思盡)이로다
지혜로운 자는 다함이 없다 말하나
이것도 또한 말할 것이 없으니
자체의 성품이 다함없는 까닭에
부사의한 다함이 있음이로다.
지혜로운 자는 다함이 없다 말하나
이것도 또한 말할 것이 없으니
다함이 없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자체의 성품이 다함없는 까닭에
본성이 다함이 없는 까닭에
부사의한 다함이 있음이로다
불가사의한 다함이 있다. 다함이 있는 경지와 다함이 없는 경지, 이러한 것을 우리가 잘 분별해서 이해해야 한다.
소설무진중(所說無盡中)에 무중생가득(無衆生可得)이니
지중생성이(知衆生性爾)하면 즉견대명칭(則見大名稱)이로다
다함이 없다 말한 가운데는
중생도 얻을 것이 없나니
중생의 성품이 그런 줄 알면
곧 큰 이름 가진 이를 보게 되리라.
다함이 없다 말한 가운데는
중생도 얻을 것이 없나니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경지는 중생이라고 할 것이 없다.
중생의 성품이 그런 줄 알면
곧 큰 이름 가진 이를 보게 되리라
큰 이름을 가진 이는 누구인가? 부처님이다. 중생의 성품이 그런 줄 안다.
다함이 없다 말한 가운데는 중생도 얻을 것이 없다.
중생이라는 것도 중생이 중생이 아니다. 공한 것이다.
중생이라고 할 것도 없다.
또 다른 입장으로 볼 것 같으면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不及衆生是三無差別) 중생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여기에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름보다는 중생이 중생이 아니다, 본래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다, 라는 의미다.
(3) 이익을 이루다
무견설위견(無見說爲見)이요 무생설중생(無生說衆生)이니
약견약중생(若見若衆生)을 요지무체성(了知無體性)이로다
봄이 없는데 본다고 말하고
중생이 없는데 중생이라 말하니
보는 것과 중생이라는
자체의 성품이 없는 줄을 알지니라.
우리가 ‘아 저 사람은 중생이다’ 뭘 가지고 그렇게 꼬집어서 말할 수 있겠는가?
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고정된 실체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편의상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 중생으로 본다’ 중생이라고 말한다, 편의상 그냥 가짜로, 아니면 임시방편으로 지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한 사실도 꿰뚫어 알아야 한다.
임시방편으로 본다느니, 보지 않는다느니, 중생이라느니, 부처라느니 하는 것임을 걸림없이 볼 줄 알아야 된다.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때 어린아이지 성장하면 어린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말은 벌써 어느 사이에 없어졌는지 없어져 버린다. 편의상 어린아이 때 어린아이라고 부를 뿐이다.
능견급소견(能見及所見)의 견자실제견(見者悉除遣)하고
불괴어진법(不壞於眞法)하면 차인요지불(此人了知佛)이로다
보는 것도 볼 것도
보는 이도 다 제하여 보내고서
진실한 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이 사람이야말로 부처를 알리라.
보는 것도 볼 것도
보는 이도 다 제하여 보내고서
볼 것과 내가 능히 보는 것, 볼 대상, 보는 사람, 다 제거해서 보내고서
진실한 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이 사람이야말로 부처를 알리라
부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도 소견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능히 보는 나, 볼 경계, 보는 자, 이것은 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다 그런 사실을 안다. 진실한 법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 사람이야말로 부처를 알리라.
약인요지불(若人了知佛)과 급불소설법(及佛所說法)하면
즉능조세간(則能照世間)이 여불노사나(如佛盧舍那)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을 알면
곧 능히 세간을 비춤이
노사나 부처님과 같으리라.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을 알면
부처님도 알고 부처님이 설하신 법도 알게 되면
곧 능히 세간을 비춤이
노사나 부처님과 같으리라
부처님과 같다. 그도 또한 세간을 환하게 꿰뚫어 비출 수 있다.
(4) 공덕을 정진혜보살에게 미루다
정각선개시(正覺善開示) 일법청정도(一法淸淨道)하시고
정진혜대사(精進慧大士)가 연설무량법(演說無量法)하시니
정각(正覺)께서는
한 법의 청정한 도를 잘 열어 보이시고
정진혜대사는
한량없는 법을 연설하시네.
여기는 공덕을 정진혜보살에게 미루는 대목이다.
정각(正覺)께서는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께서는
한 법의 청정한 도를 잘 열어 보이시고
법의 청정한 경지를 잘 열어 보이시고
정진혜대사는
한량없는 법을 연설하시네
청정한 도를 열어 보이는데 정진혜보살은 한량없는 법을 연설한다. 아주 장단이 잘 맞는 관계다, 그런 표현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경지를 잘 아는 보살은 장단이 잘 맞는 관계다. 우리도 이러한 이치를 제대로 깨달아서 마음이 툭 트이면 부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출 수도 있다.
선사들의 표현에 보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과 더불어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장단을 맞춘다’ 는 표현들이 있다.
여기 정각께서는 한 법의 청정한 도를 잘 열어 보이시고 정진혜대사 즉 정진혜보살은 한량없는 법을 연설하신다, 이렇게 표현한 것이 그런 이치와 맞다.
약유약무유(若有若無有) 피상개제멸(彼想皆除滅)하면
여시능견불(如是能見佛)이 안주어실제(安住於實際)로다
있다거나 있지 않다는
그러한 생각 모두 소멸하면
능히 부처님께서
실제(實際)에 안주하심을 보리라.
중요한 내용이다.
있다거나 있지 않다는
있다고 하는 경지, 있지 않다고 하는 경지, 예를 들어서 어떤 사물을 우리가 볼 때 ‘있다’ ‘아니야 저건 공한 것이야’ ‘내 인생은 이렇게 확실하게 있는 것이야’‘아니야,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야, 나라고 하는 것은 있지 않은 거야’라는 입장을 취한다.
다 그럴 만한 이치가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 모두 소멸하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이고, 또 있다고 해도 맞는 말이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모두 소멸할 것 같으면
능히 부처님께서
실제(實際)에 안주하심을 보리라
실제가 무엇인가? 진리의 상태다. 진리의 경지에 항상 계신다. 알고 보니까 내가 있다고 하는 안목과 있지 않다, 없다고 하는 것을 다 쓸어버리고 나니까, 청소하고 나니까, 역시 부처님이 그러한 경지에 계시는구나, 그야말로 부처님과 더불어 맞장을 뜰 수가 있고, 부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부처님과 차를 같이 나누고, 부처님과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산책을 할 수 있는 수준에 당도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근사하다.
우리가 ‘있다, 있지 않다’고 하는데 우리들 자신도 사실 있다고 하지만 그 있다고 할 것이 크게 못 되는 면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반야심경에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눈도 귀도 코도 없다. 색성향미촉법도 없다, 전부 없다고 해놓았지 않은가?
그런 것을 없다고 할 때는 있다고 하는 경지를 소멸하는 것이고, 또 없다고 하는 없는 것마저도 소멸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생각을 모두 소멸하면 ‘아 부처님이 역시 그런 상태에 계시구나. 실제에 안주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없음을 부정한 것은 허망하던 현상이 모두 활발발하게 살아나는 진여생명으로서의 현상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다. 진공이 묘유며 묘유가 진공인 이치를 부처님과 보살이 함께 보인 소식이다. 이것이 실제(實際)에 안주한 삶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7) 서남방 지혜(智慧)보살의 찬탄
이시(爾時)에 지혜보살(智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지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1) 자신을 이끌어 대중에게 권하다
아문최승교(我聞最勝敎)하고 즉생지혜광(卽生智慧光)하야
보조시방계(普照十方界)하야 실견일체불(悉見一切佛)이로다
나는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곧 지혜의 빛을 내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모든 부처님을 다 보았네.
나는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곧 지혜의 빛을 내어
화엄경이 가장 훌륭한 가르침임에 틀림없는데 우리 역시 그것을 자꾸 공부해서 지혜의 빛이 발현되어야 할 것이다. 지혜의 빛이 나야된다. 그리고 그 지혜의 빛으로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그 지혜로써 온 시방세계를 환히 꿰뚫어 보는 빛을 비추어서
모든 부처님을 다 보았네
깨닫고 나니까 너도 깨달은 사람 그도 깨달은 사람 나도 깨달은 사람 모두가 다 깨달은 사람이다.
제가 심청전 이야기를 자주 한다.
심봉사가 눈을 뜰 때 어떤가? 심봉사가 딸 심청이가 저기 있다고 하자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어디 보자 나의 심청 우리 딸 심청이 어디 보자’하고 하니까 버쩍 눈을 뜬다. 심봉사가 눈을 뜨는 순간 어떤가? 맹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였는데 그 잔치에 온 모든 맹인들이 여기도 쩍 저기도 쩍 음식을 먹다가도 쩍하고 술을 마시다가 쩍하고 화장실에 가다가도 쩍하고 오다가도 쩍하고 그저 같이 싸움질을 하다가도 쩍하고 어떤 중생들의 삶속에서도 모두 다 쩍하고 눈을 뜨더라, 하는 이야기다.
잔치에 참석하고 내려가는 사람도 쩍하고 뜨고, 올라오는 사람도 쩍하고 뜨고, 잔치가 있는 줄도 모르는 맹인들 마저도 쩍하고 눈을 뜬다.
그것이 심청전의 하이라이트다.
근사하지 않은가? 그것이 뭔가? 화엄도리다.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곧 지혜의 빛을 내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모든 부처님을 다 보았네
이것이 심청전의 마지막 대목과 같다.
심봉사가 눈을 뜰 때 모든 사람들이 잔치에 왔던 사람, 잔치에서 돌아가는 사람, 잔치가 있는 줄도 모르는 맹인, 모든 맹인이 다 눈을 뜨는 도리 그 한순간,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 장황한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심봉사가 눈이 먼 사람으로서 부인을 잃고 장례를 치루고 돌아와서 장례를 치루었는지 금방 치루고 왔는데도 한순간 착각을 하고는 집에 부인이 있는 걸로 알고 부엌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심청이 어머니를 부르고 이웃 동네 마을 집에 가서 심청이 어머니를 부르고 하는 장면은 사람들의 슬픔을 한껏 자아낸다. 심청이를 업고 동냥을 다니면서 젖을 먹이는 일이라든지 심봉사 눈을 뜨게 해주려고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해서 심청이가 중국 상인들에게 팔려가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이야기라든지 아주 장황하고 길고 긴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것은 사실 마지막에 심봉사가 잔치에 와서 눈을 뜨는 그 장면을 이야기하려고 그렇게 긴 이야기를 썼던 것이다.
심봉사가 눈을 뜰 때 모든 맹인들이 다 눈을 뜬다, 그것이 화엄의 도리다.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제가 그런 화엄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네 줄로 표현했다.
‘이것이 화엄경 사구게다’해서 성화스님은 거기에 맞춰서 화엄체조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많이 알려졌다.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라는 내용이다.
(2) 인집(人執)을 말하다
차중무소물(此中無少物)이요 단유가명자(但有假名字)니
약계유아인(若計有我人)이면 즉위입험도(則爲入險道)로다
이 가운데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거짓 이름만 있으니
만약 나와 남이 있다고 생각하면
곧 험한 길에 떨어지리라.
이것도 눈을 뜨는 소식, 맹인이 눈을 뜨는 소식이다.
이 가운데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거짓 이름만 있으니
만약 나와 남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다 남이다. 우리는 평생 나다 남이다 너다 나다 그저 나 남 나 남 그것만 따지고 그 경계에서 목을 매고 살았다. 나와 남이 있다고 생각하면
곧 험한 길에 떨어지리라
중생 생활이 거기에서 펼쳐진다. 내가 있고 너가 있다는 그 생각 하나에서 중생의 험한 인생살이가 전개된다.
(3) 법집(法執)을 말하다
법집이라고 하는 것은 경계에 대한 집착이다. 앞에 아집은 사람에 대한 집착이다.
제취착범부(諸取着凡夫)가 계신위실유(計身爲實有)하나니
여래비소취(如來非所取)라 피종부득견(彼終不得見)이로다
모든 것에 집착하는 범부들이
몸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니
여래는 취할 바가 아니라
저들은 마침내 볼 수 없으리라.
모든 것에 집착하는 범부들이
몸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니
여래는 취할 바가 아닌 경지인데 집착하는 범부들은 모든 것에 집착을 한다.
우리 어리석은 범부들은 부처님에게 집착하고 부처님을 취하고 보살을 취하고 그저 좋다고 한다.
그런데 취할 바가 아니라고 했잖은가?
그래서 범부들은 마침내 취할 바가 없는 경지를 볼 수 없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어떤 경지를 가지고서, 어떤 사물이나 음성을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그는 영원히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라고 금강경에서도 말했다.
여래는 취할 바가 아니라
저들은 마침내 볼 수 없으리라
화엄경을 통해서 소견을 바로 세우는 것이 참 중요하지만, 금강경만 꿰뚫어서 우리가 잘 알고 있어도 그 열쇠로써 불교 곳곳의 이치를 다 열 수가 있다.
저도 금강경은 잘 읽지만 그렇다고 또 화엄경 공부 잘하다가 ‘아유 금강경 쉽고 간단하다’해서 금강경으로 바꾸자는 전도된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차인무혜안(此人無慧眼)하야 불능득견불(不能得見佛)일새
어무량겁중(於無量劫中)에 유전생사해(流轉生死海)로다
이 사람은 지혜의 눈이 없어
능히 부처님을 보지 못할새
한량없는 겁 가운데
생사의 바다에 유전(流轉)하리라.
이 사람은 지혜의 눈이 없어
능히 부처님을 보지 못할새
몸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몸을 실제로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지혜의 눈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임시방편으로 몸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이것은 헛것이다. 물거품이다. 꿈속에서 우리가 이러고 저러고 하는 것이다’ 라고 알아야 어느 정도 소견이 든 사람이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지혜의 눈이 없으면 능히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우리들 자신의 진실도 보지 못한다.
한량없는 겁 가운데
생사의 바다에 유전(流轉)하리라
부처님을 진실로 보는 것이나 내 자신을 진실하게 보는 것이나 같은 경지이다.
유쟁설생사(有諍說生死)요 무쟁즉열반(無諍卽涅槃)이니
생사급열반(生死及涅槃)을 이구불가득(二俱不可得)이로다
다툼이 있어 생사(生死)라 말하고
다툼이 없으면 곧 열반이라 한다.
생사와 열반을
두 가지 다 얻지 못하네.
갈등, 다툼이라고 하는 것은 다툴 쟁(諍)자 말로써 이러고 저러고 ‘있다 없다’‘너다 나다’ 하는 갈등이다.
그것이 있어서 생사가 있게 되고, 그것이 없으면 다툼이 없으면 곧 열반이다. 조용해진다.
그것을 아주 가까이로 이끌어다가 우리가 생각해 보면 누가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가린다, 그래서 하루종일 옳다 그르다 옳다 그르다 하면서 다툰다고 하자. 그러다가 그 다툼이 어느 순간 딱 끊어져 버린다. 다투다 가만히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또 옳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만 그 순간 말이 끊어져버리면 그것이 조용해지는 열반이다. 그러면 다투던 생사나 조용한 열반 이 두 가지가 다 없는 것이다. 참 신기한 이치 아닌가. 다투는 일도 없고, 다툼이 끊어진 일도 없다.
다툼이 없을 것 같으면 그것을 열반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열반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조용한 경계라고 할 것도 없다. 본래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본래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툼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갔으니까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런 경우를 많이 겪는다.
그런 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데 미련해서 수없이 그런 경험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약축가명자(若逐假名字)하야 취착차이법(取着此二法)하면
차인불여실(此人不如實)이라 부지성묘도(不知聖妙道)로다
만약 거짓 이름을 따라서
이 두 가지 법에 집착하면
이 사람은 실답지 못하여
성인의 묘한 도리 알지 못하리.
만약 거짓 이름을 따라서
생사니 열반이니 하는 것이 전부 거짓 이름이다.
이 두 가지 법에 집착하면
생사 열반 그 어느 말이든지 그 말에 집착할 거 같으면
이 사람은 실답지 못하여
성인의 묘한 도리 알지 못하리
약생여시상(若生如是想)호대 차불차최승(此佛此最勝)이라하면
전도비실의(顚倒非實義)라 불능견정각(不能見正覺)이로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내어
이 부처님이 가장 수승하다 하면
전도되어 참뜻이 아니라
능히 정각을 보지 못하리라.
만약 이러한 생각을 내어
이 부처님이 가장 수승하다 하면
이러한 생각이 무엇인가? 거짓 이름으로 되어있는 생사와 열반이다.
전도되어 참뜻이 아니라
능히 정각을 보지 못하리라
바른 깨달음의 경지, 그것을 보지 못한다.
(4) 깨달음을 말하다
능지차실체(能知此實體)의 적멸진여상(寂滅眞如相)하면
즉견정각존(則見正覺尊)이 초출어언도(超出語言道)로다
능히 이 실체의
적멸한 진여의 모습을 알면
곧 정각존(正覺尊)이
언어의 길에서 벗어났음을 보리라.
능히 이 실체의
적멸한 진여의 모습을 알면
우리가 마음 마음 하지만 사실 마음자리는 텅 빈 것이다.
텅 비어서 고요한 것이 우리 참마음이다. 그것이 진여의 모습이다. 그래서 여기서 적멸한 진여의 모습을 알면, 우리 마음은 텅 빈 것이 마음의 실체다 라고 알면
곧 정각존(正覺尊)이
정각의 존, 바른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이
언어의 길에서 벗어났음을 보리라
부처님은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어도 그 말의 경지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다. 초출되어 있다. 뛰어나 있다.
그러니까 방편으로 경우에 따라서 이런 말씀도 하시고 저런 말씀도 하시고 걸리지 않고 모두 상반되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마음대로 하지 않는가.
우리는 상반되는 말을 못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상반된 말을 자유자재로 하신다. 아예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본자리가 적멸한 진여의 모습을 부처님은 잘 알고 계시니까 늘 그 자리에 안주해 계신다. 늘 그 자리에 안주해 계시면서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는 경지다.
언어설제법(言語說諸法)이면 불능현실상(不能顯實相)이요
평등내능견(平等乃能見)이니 여법불역연(如法佛亦然)이로다
말로써 모든 법을 말하면
능히 참모습 나타낼 수 없고
평등하여야 능히 보나니
법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다네.
말로써 모든 법을 말하면
능히 참모습 나타낼 수 없고
말은 한계가 있는 것이 되어놔서, 부처님도 부득이 하게 말씀으로써 법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러니까 ‘말 쫓아가면 안된다’는 말씀을 참 잘 쓴다.
‘말 쫓아가지 마라, 말 쫓아가면 안 된다’
말은 어떤 진리의 실체를 한 10분의 1정도 표현을 할까? 그러니까 말 쫓아가면 번번이 속게 되는 것이다. 능히 참모습을 나타낼 수 없고
평등하여야 능히 보나니
조용히 가라앉아야 보나니
법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다네.
법도 그렇고 부처라고 하는 사실도 또한 그와 같다.
정각과거세(正覺過去世)와 미래급현재(未來及現在)하사
영단분별근(永斷分別根)이실새 시고설명불(是故說名佛)이로다
과거 세상과 미래 세상과
현재 세상을 바로 깨달아
분별하는 뿌리를 영원히 끊었을새
이러한 까닭에 이름을 부처님이라 하네.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한 이치를 깨달아 시간성에 대한 분별을 끊어서 멀리 초월하여 영원을 누리면 곧 부처님이라 한다.
과거 세상과 미래 세상과
현재 세상을 바로 깨달아
과거 미래 현재 이것의 실상을 바로 깨달아
분별하는 뿌리를 영원히 끊었을새
과거다 미래다 현재다 이것을 분별하고 사는데 그 분별을 영원히 끊어버릴 것 같으며
이러한 까닭에 이름을 부처님이라 하네
부처님은 영원성에 계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과거다 현재다 미래다 과거다 미래다 현재다 늘 그 말에 속아서 그렇게 말에 휘둘리고 있는데 참 언제나 그런 시간성의 차별, 이것을 뛰어넘을는지.
그래서 이름을 부처님이라 하네. 이 경지가 바로 우리가 이르러야 할 경지다.
오늘 화엄경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
본래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다.
편의상 그렇게 부를 뿐. 거짓 이름인 것이다.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_()()()_
심봉사가 눈을 뜰 때 모든 맹인들이 다 눈을 뜬다, 그것이 화엄의 도리다..._()()()_
능히 이 실체의 / 적멸한 진여의 모습을 알면
곧 정각존(正覺尊)이 / 언어의 길에서 벗어났음을 보리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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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