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제 말기를 거쳐 8·15 광복을 맞은 격동기 박병래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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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와 박병래(앞줄 오른쪽). 김구가 안고 있는 소녀 딸 김효자를 김구 서거 후 박병래가 키워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
몰려드는 환자 진료에 여념이 없는 속에서 성모병원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1930년대 말, 사회적으로는 점차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1894년 청일 전쟁과 1904년의 러일 전쟁, 그리고 1931년 만주 사변의 승리를 통해 한껏 사기가 고조된 일본은 드디어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켰고 계속해서 동남아 전 지역을 장악하려는 침략 야욕으로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다.
조선 전국이 일본의 전쟁 야욕에 휘말려 온갖 고통을 받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천주교회도 점차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환자 진료라는 특수한 활동을 이유로 박병래는 흔들림 없이 성모병원을 운영해 갔다.
성모병원 분원, ‘성요셉병원’ 개원
일본은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교회에 대해서도 강압적 정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런 정책의 하나로 일제 당국은 용산에 있던 예수성심신학교를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로 강제 폐교하려 했다. 속셈은 이곳을 일본군 시설로 활용할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때 이 건물의 원래 주인이었던 성심수녀회가 서둘러 이 시설을 요양원으로 변경 운영하겠다고 신청을 했고, 이어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와 상의를 거쳐 이 신학교 건물에 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하기로 했다.
노기남 주교로부터 성모병원 분원 설립 계획 지시를 받은 박병래는 서둘러 건물을 임시 개조하는 등 많은 노력 끝에 결국 1944년 이곳에 분원인 ‘성요셉병원’을 개원한다.
분원이 문을 열자마자 환자들이 밀어닥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박병래는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틀에 한 번씩 명동에서 분원이 있는 용산으로 가서 진료해야 했다.
드디어 1945년 8월 성모병원도 환희의 해방을 맞이한다.
광복의 기쁨을 맞은 나라 전체가 희망으로 들끓었고 특히 그동안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투쟁해 온 정치인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암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박병래와 성모병원은 이런 사회 변화와 무관하게 더욱더 바빠졌다.
제대로 된 공공 의료 시설이 없던 당시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 파탄으로 많은 국민이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들을 앞장서 돌보아야 했던 성모병원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더 빛을 발휘했다.
개원 10주년 기념과 ‘방지거 사베리오 의료회’의 설립
1946년 5월 11일, 박병래는 성모병원 개원 1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팎의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라리보·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교회 어른들과 장면 박사를 포함한 평신도 인사들, 그리고 미 군정청 관계자들까지 참석해서 축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박병래 원장의 평소 폭넓은 활동을 보여 주는 일이다.
다음 해인 1947년 4월에는 성모병원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의료인 모임인 ‘방지거 사베리오 의료회’(‘서울가톨릭의사회’의 전신)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도 맡았다.
당시 서울에는 천주교 신자 의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물론, 치과의사, 간호사 등 관련 분야 의료인 20여 명을 모두 아우르는 모임으로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회원들의 신앙과 사회봉사 활동을 모임 결성의 목표로 했다.
어쩌면 박병래는 자신이 한국 천주교 신자 중에서 가장 먼저 서양의학을 접한 의사라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나라 천주교 의료 사업을 정착시키는 일에 자신이 앞장서야 한다는 결심을 했을 것이다.
사실, 한국 사람 중에는 구한말에 일찍 미국에 건너가 의사가 된 서재필이나 김점동 같은 주로 개신교 의사가 몇 명 있었고,
1900년대 초 서양식 의료 기관이었던 ‘제중원’과 ‘대한의원’에서도 도제식 의학 교육을 통해 소수의 한국인 의사들이 양성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졸업한 경성의학전문학교가 1916년에 설립되어 의사들을 배출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박병래는 이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박병래는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의사였던 셈이다. 이런 자의식이 박병래로 하여금 교회 의료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실천 의지를 갖게 했던 것이리라.
또한, 박병래는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이 시기에 성 프란치스코회 재속회원으로 가입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본받아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삶을 살기로 맹세한 것이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과의 인연
1945년 광복을 맞고 성모병원은 다음 해 1946년 개원 10주년을 맞으면서 박병래는 직원들과 함께 점점 자신감을 가지고 병원을 운영해 간다. 그러나 사회는 혼란했다.
1948년 남한만의 정부를 수립하지만 사회는 전혀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격동과 혼란 시기에 박병래에게 있었던 운명 같은 아름다운 일화 한 가지는, 백범 김구(1876~1949) 선생과의 인연이다.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귀국 뒤 성모병원에서 탈장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김구 선생의 며느리 안미생(수산나)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박병래를 존경하는 며느리의 소개로 박병래를 믿고 찾은 것으로 보인다.
퇴원 후에도 박병래는 김구 선생 왕진을 위해 경교장엘 자주 들렀다. 당시 박병래는 어떻게든 김구 선생을 천주교로 입교시키고 싶었다.
몸이 아플 때면 늘 성모병원을 찾았던 김구 선생에게 실제로 수녀들을 통해 입교 권고를 했고, 그럴 때면 언제든 자신도 죽기 전에 천주교에 입교할 생각이라는 언약도 했다고 한다.
특히, 국사에 바쁜 김구 선생이 미국에 가 있던 며느리를 대신해서 어린 손녀 효자(孝子)를 돌보는 것을 본 박병래는 그 손녀를 자신이 양육하겠노라고 제안한다.
효자는 김구 선생의 며느리이자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의 딸이다. 박병래에게는 마침 효자와 같은 나이 또래의 딸도 있었기 때문에 함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실제로 이때부터 박병래는 효자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 때까지 20년 이상 친딸처럼 데리고 살았다.
박병래는 1949년 6월 26일 낮에 일어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명동성당에서 주일 12시 미사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와 잠시 입원 환자들을 회진하고 점심을 먹으려는 순간 김구 선생 비서로부터 급한 전화 연락을 받는다.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곧 경교장으로 달려가 이미 그곳에 와 있던 적십자병원 이기섭 외과 과장과 함께 강심제를 놓고, 총탄을 맞은 부분의 피를 거즈로 닦으며 인공호흡을 시도했지만, 김구 선생은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김구 선생의 사망을 확인한 박병래는, 현장에 같이 간 간호 수녀들과 함께 김구 선생의 시신을 깨끗이 닦고 염습(殮襲)을 마친 다음 곧장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베풀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박병래는 그 엄청난 사건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김구 선생에게 세례를 줄 생각을 하고 실제로 대세까지 베푼 것이다.
김구 선생이 암살된 후, 사회는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매일 청년들의 데모가 이어지고 국회도 싸움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써부터 북한에서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박병래도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매일 몰려드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부 수립 이후 정세 불안까지 겹쳐 힘들게 지내던, 1948년과 1949년은 사실 박병래 개인적으로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부인 서경이(徐景伊, 마르티나)가 1948년에, 외아들 노영(魯永, 미카엘)이 1949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특히 겨우 열다섯 살이던 아들 노영을 결핵성 뇌막염으로 잃고 나서 박병래는 한동안 거의 넋을 잃은 사람이 되어 살았다.
오직 매일 미사에 참여하면서 하느님께 위로를 받으며 견뎌내야 했다. 그렇게 1949년을 보내고 1950년 봄을 맞은 박병래는 성모병원과 성요셉병원 환자 진료를 하며 바쁜 생활 속에 묻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