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그렇게 살 테냐, 꿈도 없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김 불가꼬프]

글을 시작하면서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 (丹靑), 풍경 (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참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玉座) 위엔 여의주 (如意珠) 희롱하는 쌍룡 (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조지훈 시인의 절창 <봉황수>(1940)는 이렇게 시작한다. 망국의 한과 설움을 품고 찾아든 근정전에서 망연해진 시인은 비어있는 옥좌에 자욱하게 낀 거미줄을 본다. 말 못할 정한과 회한의 정념을 가다듬고 정돈하며 그는 역사에게 시선을 던진다. 쌍룡과 봉황의 대조가 그것이다. 천자의 징표인 쌍룡을 쓰지 못해 봉황으로 갈음해야 했던 조선의 비운.

이준익 감독은 옥좌, 혹은 조선의 최고 권력을 둘러싼 인간군상의 다채로운 양상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그려낸다. 1589년 정여립의 죽음부터 1592년 임진왜란에 이르는 3년을 추적하면서 영화는 당대를 살았던 네 사람의 이야기를 축으로 진행된다. 그들의 인생행로에서 관객은 오늘의 우리를 찾고 어제를 반추하며 내일을 생각한다.

견자와 정학의 꿈

불그스레한 화면에 넘실대듯 강물이 흐른다. 백지의 노랫가락이 흐르고 황포돛배가 유장하게 물살을 가른다. 웃는 듯, 흐느끼는 듯 백지 앞의 사내 표정이 복잡하다. 강가 허연 백사장을 따라 두 사내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육두문자와 쌍말이 오가지만 표정은 밝아 보인다. 이윽히 젊은 사내가 허공에 몸을 솟구친다. 보름달을 향해 칼을 빼든 채.

견자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세도가 한신균의 서자. 아버지에게 기대면 사람인데, 어머니에게 기대면 개가 되고 마는 견주. 그렇게 조선사회는 견주를 견자로 만들었고, 그는 나날이 거칠고 피폐해진다. 그런 견자에게 한줄기 환한 등불로 다가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다. "지금 왕도 서출인데, 평생 그리 살 테냐. 꿈도 없이! 비겁한 놈 같으니!"

견자는 조금씩 아버지와 인연과 세상을 알아간다. 하지만 견자의 꿈이 온전하게 영글기도 전에 가혹한 운명이 닥친다. 행운유수처럼 세상을 떠도는 견자의 두 번째 등불이 정학이다. 앞을 보지 못하되, 누구보다도 명민하게 세상과 인간과 관계를 훤히 꿰뚫는 인물. 그의 꿈은 어리석고 불쌍한 민초를 거두고 왜구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정학의 꿈은 그래서 정여립의 '대동계'와 손을 맞잡는다. '인민구제'라는 대의에 복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학의 이상은 '평등세상'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 반역의 칼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면서 민초를 거두는 것으로 대동세상과 자신의 꿈을 규정한다. 따라서 "칼잡이는 칼 뒤에 숨어야 한다!"는 말은 그의 생각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백지와 몽학의 꿈

황포돛배의 백지 앞에 앉은 사내는 몽학이다. 백지 얼굴이 맑고 평온한데, 몽학의 표정이 어둡고 심상하지 않음은 까닭이 있어서다. 죽음도 두렵지 않을 만큼 몽학을 연모하는 백지는 이제 온전하게 몽학을 앞에 둘 수 있다. 더 헤어질 일도, 가슴 아픈 별리도 없다. 그저 노래하고 지긋한 얼굴로 그를 들여다보면 그뿐. 사랑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몽학은 백지가 안타깝다. 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더욱 쓸쓸하고 괴로운 노릇이다. 그는 '대동계' 수장으로 '평등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역의 칼을 높이 치켜 든 칼잡이다. 썩어빠진 양반사족과 무능한 암군 선조, 그들 앞에 속수무책으로 왜구에게 당하는 조선의 허다한 민초. 그의 반역은 그래서 의미 있어 보인다.

"양반은 권력 뒤에 숨고, 광대는 탈 뒤에 숨고, 칼잡이는 칼 뒤에 숨어야 한다고 했는데, 난 그러기 싫었다."

몽학은 이렇게 일갈하고 큰길로 나아간다. 정학의 은인자중과 대비되면서 몽학의 서릿발 같은 결기와 권력의지는 낭자한 피바람을 몰고 온다. 이제 몽학은 대동과 평등세상을 넘어서 스스로 군왕이 되고자 한다. 그의 꿈이 세상과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몽학과 정학의 대결로 압축되어 선명한 이항대립을 선보인다.

꿈의 충돌과 결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시종일관 꿈을 찾는 사람들의 고단한 여정을 그린다. 서출의 한과 분노를 분출하고 극복하려는 견자의 소박한 꿈.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실현하려는 백지의 사랑꿈. 썩은 조정을 타도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려는 몽학의 꿈. 그런 몽학을 끝끝내 저지하고 민초와 함께하려는 정학의 정갈한 꿈.

서로 다른 빛깔과 향기를 담은 꿈이 더러 어긋나고 마주치며, 더러 쇳소리 내고, 더러는 조화롭게 공존한다. 영화는 그와 같은 양상의 변주를 곳곳에서 재현하며 두 시간 가까운 서사를 이어간다. 그들의 꿈이 종당에 하나의 지점에서 충돌한다. 근정전 장면.

몽학이 칼을 끌면서 줄지어선  품석을 지나 옥좌로 다가간다. 허무와 허적(虛寂)과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다. 부산포에 상륙한 후 불과 보름 만에 한양에 들이닥친 왜군. 왜군과 싸워보지도 않은 채 왕권만을 향해 치달려온 몽학. 대동계란 이름이 무색할 만큼 권력욕에 타올랐던 몽학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장면. 그 시각 근정전은 그렇게 스산했다.

몽학은 자신을 죽이려는 꿈 하나로 칼을 갈아온 인간과 사랑 하나로 그를 따라온 여인을 본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꿈도 마침내 깨져나간다. 근정전 곳곳에 휘날리는 버려진 권력의 끝자락이 남긴 생채기는 처연하다 못해 비참하다. 몽학의 칼질이 온전할 리 없으며, 영화 끄트머리 또한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것이 쓸쓸하고 무상하다.

구름과 달 혹은 해와 바람

"몽학이는 지는 해를 따라 갔는데, 그것이 구름인지 달인지 모르겠다."

몽학의 행방을 묻는 백지에게 정학이 던지는 말이다. 은유로 뒤범벅된 아름답고 간결한 대사의 극치. 박흥용의 동명만화를 영화화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은유로 넘친다. 영화는 직선적이거나 직접적이지 않다. 사고의 행간을 넓히면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만화의 풍요로움을 상찬함은 장르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구름'과 '달'을 해석하는 용어는 상투적이다. 구름은 왜구 내지 임진왜란, 달은 민초 혹은 대동계로 독서한다. 구름에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왕권과 그것을 둘러싼 양반사족의 권력싸움이 더해져야 한다. 달에는 우리의 주인공 백지와 정학과 견자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감독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아귀가 들어맞는다.

'지는 해'를 따라간 몽학은 달이 아니라 구름이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대동세상이 아니라, 자신만의 왕국이었으므로. 왜 그런 허망한 권력을 따라 나섰을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온전하게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구름에 가려진 달, 백지가 모든 것을 꿈으로 돌리고 꿈에서 만나자고 흐느끼는 장면은 그런 까닭으로 오히려 설득력 있다.

달은 해가 있어야 빛난다. 하지만 해가 있을 때 달은 잘 보이지 않는다. 놀라운 역설이다. 스스로 빛나지 못해 해의 힘을 빌어야 하되, 해로 인해 외려 보이지 않는 달의 역설. 어느 철없는 시인은 낮달의 처연함을 노래했다. 하지만 보름달도 구름이 깊으면 보이지 않는다. 먹장구름을 거둬가는 바람은 언제나 맑고 투명하다. 느닷없는 한줄기 구원처럼.

글을 마치면서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 (品石) 옆에서 정일품 (正一品), 종구품 (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에 호곡하리라."

<봉황수> 끝부분이다. 품석 어느 한 자락에도 자신을 위한 자리가 없음을 확연하게 깨닫는 시인의 구슬픈 심사가 선명하게 읽힌다. 지상에서도 울지 못한 봉황새에게 가장 먼 하늘 끝에서 호곡하라는 시인의 정념은 착잡하다. 그래서일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분위기와 인물, 거기서 그려지는 세태와 풍광은 시종 어둡고 우울했다.

하지만 나는 우울을 이겨내기로 한다. 언제 인간들의 역사가 한 번이라도 호락호락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 역사에 호방하고 당당한 대동세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평등세상을 만들어 보았던가. 그것은 결국 다가올 날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나의 흉중을 아프도록 파고들었다.

덧붙이는 글 | 임진왜란이 일어난 달은 음력 4월 13일입니다. 초여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려지는 계절은 가을입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산야가 곳곳에 보입니다. 이것은 마치 <황산벌>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옥의 티입니다. '거시기'가 하염없이 달려가는 시멘트로 포장된 신작로가 생각납니다. 세밀한 접근이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