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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 輿地圖書
○己卯式帳籍準。 기묘식장적준。
영조 35년 1759년 (기묘) 기묘년 식년에 작성된 호적대장의 기록과 대조하여 확인하였다.
영조 연간에, 왕명으로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55책으로 편찬한 {전국 읍지}.
내용 요약
『여지도서』는 1757년∼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이다. 읍지라고도 한다. 총 55책이며 필사본이다.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 진지 1개 등 313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 행정구역 중 39개 읍의 읍지가 누락되어 있다.
편찬된 지 200년이 지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편을 위해 왕명으로 각 읍에 읍지를 올려보내도록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읍지마다 거리와 방위 등이 정확히 기록된 대축척지도가 첨부되어 지도와 읍지가 밀접하게 결부돼 있고, 면·리 또는 읍별로 가호수와 남녀 인구수를 상세하게 기재한 점이 특징이다.
내용
55책. 필사본.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 監營誌 6, 兵營誌 7, 水營誌 3, 統營誌 1) 및 1개의 진지(鎭誌) 등 총 313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제1책∼제5책 : 경기도, 제6책∼제13책 : 충청도, 제14책∼제17책 : 강원도,
제18책∼제21책 : 황해도, 제21책∼제30책 : 평안도, 제31책∼제35책 : 함경도,
제36책∼제49책 : 경상도, 제50책∼제55책 : 전라도로 결책되어 있다.
당시의 행정구역을 상고하면 읍지가 수록되지 않은 결읍(缺邑)이 보이는데, 전라도 · 경상도 · 경기도 · 충청도 등지에서 39개읍의 읍지가 누락되었다.
경기도에서는 한성부(漢城府) · 개성부(開城府) · 파주목(坡州牧) · 고양군(高陽郡) · 적성현(積城縣) · 수원부(水原府) · 안성군(安城郡) · 양천현(陽川縣) · 김포군(金浦郡) 등 9개읍 및 경기도 총론 · 경기도지도 · 경기감영 · 병영의 지지,
충청도에서는 정산현(定山縣) · 온양군(溫陽郡) · 청안현(淸安縣) 등 3개읍의 읍지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전라도에서는 남원부(南原府) · 담양부(潭陽府) · 제주목(濟州牧) · 대정현(大靜縣) · 정의현(旌義縣) · 만경현(萬頃縣) · 임피현(臨陂縣) · 정읍현(井邑縣) · 전주부(全州府) · 익산군(益山郡) · 김제군(金堤郡) · 금산군(錦山郡) · 고부군(古阜郡) · 진산군(珍山郡) · 금구현(金溝縣) · 여산부(礪山府) 등 16개읍 및 전라도총론 · 전라도지도 · 감영 · 우수영 · 좌수영 · 병영의 지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울산부(蔚山府) · 양산군(梁山郡) · 영천군(永川郡) · 흥해군(興海郡) · 사천현(泗川縣) · 삼가현(三嘉縣) · 의령현(宜寧縣) · 하동부(河東府) · 산음현(山陰縣) · 안음현(安陰縣) 등 11개읍의 읍지가 결본이다.
각 읍지의 내용구성은 강역(疆域) · 방리(坊里 : 戶口 포함) · 도로(道路) · 건치연혁(建置沿革) · 군명(郡名) · 형승(形勝) · 성지(城池) · 관직(官職) · 산천(山川) · 성씨(姓氏) · 풍속(風俗) · 능침(陵寢) · 단묘(壇廟) · 공해(公廨) · 제언(堤堰) · 창고(倉庫) · 물산(物産) · 교량(橋梁) · 역원(驛院) · 목장(牧場) · 관애(關阨) · 봉수(烽燧) · 누정(樓亭) · 사찰(寺刹) · 고적(古蹟) · 총묘(塚墓) · 진보(鎭堡) · 명환(名宦) · 인물(人物) · 한전(旱田) · 수전(水田) · 진공(進貢) · 조적(糶糴) · 전세(田稅) · 대동(大同) · 봉름(俸廩) · 군병(軍兵) 등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편찬은 1757년 홍양한(洪良漢)이 임금에게 아뢴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팔도 감사에게 명을 내려 각 읍에서 읍지를 올려보내도록 하였다.
그 뒤 김응순(金應淳)과 이은(李溵)이 홍문관에 있을 때 이를 개수하였다고 하나, 현존하는 『여지도서』는 누락된 군현이 많고 결책 순서 등으로 보아 홍문관에 비치되었던 본이 아니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 읍지의 호구조의 기준 연도가 1759년(己卯帳籍)인 점으로 볼 때, 1760년 이후에 수집된 읍지들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의 편찬 목적은 편성된 지 270여 년이 지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수(改修) · 속성(續成)에 있었다.
『여지도서』는 『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하면서 방리 · 제언 · 도로 · 전결(田結 : 旱田 · 水田) · 부세(賦稅 : 進貢 · 糶糴 · 田稅 · 大同 · 均稅) · 군병(軍兵) 등의 항목이 첨가되어 사회 · 경제적인 내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16세기 후반이래 대두된 새로운 읍지 편찬의 경향을 정리하고 종합한 것으로 18세기 읍지의 종합적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방리 · 도로 · 부세에 관한 제 조항 및 각 읍 읍지의 첫머리에 수록된 채색지도이다.
일반적으로 읍지의 제일 첫머리에 기재하던 건치연혁조보다도 방리조를 앞에 위치시킴으로써 당시 읍지 편찬자들이 이를 중시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반 읍지의 방리조에는 면(또는 里)의 명칭과 위치를 기록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여지도서』에는 면 · 이 또는 읍별로 가호수[編戶]와 남녀 인구수를 상세하게 기재한 점이 특징이다.
『여지도서』에 보이는 또 하나의 변화는 도로조이다.
도로조는 이 시기에 신설된 항목으로서, 그 위치도 건치연혁조보다도 앞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항목 배열 순서 및 내용의 상세함을 통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도로가 중시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도로의 중요성이 커지고, 지역간의 교류가 증대되면서 지역간 및 지역내의 구체적인 유통망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조세 수취와 관련된 진공 · 조적 · 전세 · 대동 · 균세 · 봉름 등이 각각 독립 항목으로 설정되는 변화가 보인다.
조세량의 정확한 파악과 수납은 국가의 지방 통치력 및 중앙 재정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읍지에서 이에 관한 기록의 비중이 18세기 중엽 이후 점차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여지도서』에는 읍지 편찬의 역사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룩됨을 볼 수 있다.
각 읍의 첫머리에 각 읍별 채색지도가 부착되어 있는 점이다.
여지도(輿地圖)와 서(書)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여지도서』라는 서명을 붙일 정도로 지도가 중시된 것이다.
각 읍지마다 거리와 방위 등이 정확한 대축척지도가 첨부되어 지도와 읍지가 밀접하게 결부된다.
읍지의 내용을 지도로 도식화함에 따라 읍지의 내용에 정확성이 증가되고, 지도의 이용으로 당시 사람들의 공간적 인식에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여지도서』는 공시적 기록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전국에 걸쳐 동일한 시기에 작성된 읍지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8세기 중엽의 지방 사회를 전국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고전총간 > 여지도서 >江原道 강원도 寧越府 영월부
原州鎭管所屬寧越府。 원주 진관소속 영월부。
東至忠淸道永春縣界五十八里, 南至永春縣界二十四里,
충청도 영춘현은 동쪽으로 58리, 남쪽으로 영춘현경계는 24리,
西至堤川縣界四十五里, 北至平昌郡界四十四里。
제천현은 서쪽으로 45리, 평창군은 북쪽으로 44리。
西距京四百三十七里, 五日程。 한양(경성)은 서쪽으로 437리, 5일 정도 거리。
西北距監營一百六十里, 二日程。 강원감영은 서북쪽으로 160리, 2일 정도 거리。
坊里 방리
府內面 부내면 *編戶(편호) : 호적에 등록된 집
永興里。 自官門南距一里。 編戶二百二十二。 男三百八十九口, 女三百九十五口。
영흥리。 관아 남쪽 1리。 편호 222호。 남 389명, 여 395명。
芳節里。 自官門西距十里。 編戶七十五。 男九十九口, 女七十九口。
방절리。 관아 서쪽 10리。 편호 75호。 남 99명, 여 79명。
尙德里。 自官門南距五里。 編戶六十四。 男九十七口, 女七十九口。
상덕리。 관아 남쪽 5리。 편호 64호。 남 97명, 여 79명。
上下松里。 自官門西距三里。 編戶七十八。 男一百二十八口, 女二百四十九口。
상하송리。 관아 서쪽 3리。 편호 78호。 남 128명, 여 249명。
上東面 상동면
蓮池里。 自官門東距十里。 編戶九十五。 男一百四十七口, 女一百八十九口。
연지리。 관아 동쪽으로 10리。 편호 95호。 남 147명, 여 189명。
禾羅里。 自官門東距四十里。 編戶三十六。 男九十七口, 女八十九口。
화라리。 관아 동쪽 40리。 편호 36호。 남 97명, 여 89명。
梨木里。 自官門東距六十里。 編戶五十。 男一百五十六口, 女一百六十五口。
이목리。 관아 동쪽 60리。 편호 50호。 남 156명, 여 165명。
德阜里。 自官門東距一百三十里。 編戶一百二十四。 男二百九十九口, 女二百九十七口。
덕부리。 관아 동쪽 130리。 편호 124호。 남 299명, 여 297명。
下東面 하동면
正陽里。 自官門南距十里。 編戶四十三。 男一百九十八口, 女一百五十三口。
정양리。 관아 남쪽 10리。 편호 43호。 남 198명, 여 153명。
蜜洞里。 自官門南距四十里。 編戶八十五。 男三百四十五口, 女二百四十二口。
밀동리。 관아 남쪽 40리。 편호 85호。 남 345명, 여 242명。
內直里。 自官門南距六十里。 編戶一百五十三。 男三百七十五口, 女二百七十八口。
내직리。 관아 남쪽 60리。 편호 153호。 남 375명, 여 278명。
注文里。 自官門南距七十里。 編戶三十五。 男四十三口, 女四十七口。
주문리。 관아 남쪽 70리。 편호 35호。 남 43명, 여 47명。
川上面 천상면
三玉里。 自官門東北距二十里。 編戶九十二。 男一百八十六口, 女一百七十二口。
삼옥리。 관아 동북쪽 20리。 편호 92호。 남 186명, 여 172명。
巨雲里。 自官門東北距三十里。 編戶六十四。 男九十四口, 女八十四口。
거운리。 관아 북쪽 30리。 편호 64호。 남 94명口, 여 84명。
巨山里。 自官門東北距四十里。 編戶三十九。 男八十七口, 女九十六口。
거산리。 관아 동북쪽 40리。 편호 39호。 남 87명, 여 96명。
北面 북면
磨差里。 自官門北距三十里。 編戶一百四十二。 男二百八十七口, 女二百八十七口。
마차리。 관아 북쪽 30리。 편호 142호。 남 287명, 여 287명。
貢己里。 自官門北距四十里。 編戶九十六。 男一百四十口, 女一百五十六口。
공기리。 관아 북쪽 40리。 편호 96호。 남 149명, 여 156명。
德田里。 自官門北距四十五里。 編戶六十四。 男一百十四口, 女九十六口。
덕전리。 관아 북쪽 45리。 편호 64호。 남 114명, 여 96명。
西面 서면
北浦里。 自官門西距二十五里。 編戶四十五。 男一百十一口, 女二百十五口。
북포리。 관아 서쪽 25리。 편호 45호。 남 111명, 여 215명。
甕山里。 自官門西距四十里。 編戶一百二十八。 男二百三十八口, 女二百七十一口。
옹산리。 관아 서쪽 40리。 편호 128호。 남 238명, 여 271명。
新川里。 自官門西距四十里。 編戶一百十四。 男一百五十二口, 女一百六十三口。
신천리。 관아 서쪽 40리。 편호 114호。 남 152명, 여 163명。
龍井里。 自官門西距四十五里。 編戶一百三十六。 男二百二十三口, 女一百七十三口。
용정리。 관아 서쪽 45리。 편호 136호。 남 223명, 여 173명。
南面 남면
楊淵里。 自官門南距三十里。 編戶一百三十四。 男三百八十七口, 女二百九十三口。
양연리。 관아 남쪽 30리。 편호 134호。 남 387명, 여 293명。
土橋里。 自官門南距四十五里。 編戶二百二十二。 男三百七十八口, 女三百二十二口。
토교리。 관아 남쪽 45리。 편호 222호。 남 378명, 여 322명。
○己卯式帳籍準。 기묘식장적준。
영조 35년 1759년 (기묘) 기묘년 식년에 작성된 호적대장의 기록과 대조하여 확인하였다.
*己卯式 (기묘식): 기묘년(己卯年)에 시행된 식년(式年)을 의미. 조선 시대에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호구를 조사하고 호적을 새로 작성했는데, 이를 '식년'이라고 불렀다.
*帳籍 (장적): 관청에서 보관하던 호적대장(戶籍臺帳)을 뜻한다.
*準 (준): 대조하여 정확하게 일치함을 확인했다는 뜻이다
道路 도로
*자(自): ~로부터 (출발점)
*관문(官門): 관아의 정문. 즉, 그 지역의 중심지인 고을 관아가 있던 곳을 의미
*지(至): ~에 이르기까지 (도착점).
自官門東至蓮池里十里,
관문(관청의 정문) 동쪽으로부터 연지리(蓮池里)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10리이다.
自蓮池里至禾羅里三十里,
연지리(蓮池里)로부터 화라리(禾羅里)까지는 30리이다.
自禾羅里至梨木里二十里,
화라리(禾羅里)로부터 이목리(梨木里)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自梨木里至德丘里七十里, 三陟界。
이목리(梨木里)로부터 덕구리(德丘里)까지는 70리(里)이며, 이곳은 삼척(三陟)과의 경계이다.
自官門南至正陽里十里,
관문(관청의 정문) 남쪽으로부터 정양리에 이르기까지의 거리가 10리이다
自正陽里至蜜洞里三十里,
자양리(正陽里)로부터 밀동리(蜜洞里)까지의 거리는 30리이다
自蜜洞里至內直里六十里, 忠淸道界。
밀동리(蜜洞里)로부터 내직리(內直里)까지는 60리이며, 이곳은 충청도(忠淸道)와의 경계이다.
自官門東北間至三玉里二十里,
관문(官門)의 동북방 사이로부터 삼옥리(三玉里)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自三玉里至巨雲里二十里, 삼옥리로부터 거운리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自巨雲里至巨山里二十里, 平昌界。 거운리로부터 거산리까지는 20리이며, 평창과의 경계이다.
自官門北至磨嗟里三十里, 관문(官門) 북쪽으로부터 마차리(磨嗟里)까지의 거리는 30리이다.
自磨嗟里至貢己里二十里, 마차리(磨嗟里)로부터 공기리(貢己里)까지는 20리(里)이다.
自貢己里至德田里十里, 平昌界。
공기리(貢己里)로부터 덕전리(德田里)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10리이며, 이곳은 평창(平昌)과의 경계이다
自官門西至北浦里二十五里, 관문 서쪽에서부터 북포리에 이르기까지의 거리가 25리이다
自北浦里至甕山里二十里, 북포리에서부터 옹산리에 이르기까지의 거리가 20리이다.
自甕山里至新川里二十里, 옹산리(甕山里)로부터 신천리(新川里)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自新川里至原州酒泉界二十里, 路向監營。
신천리(新川里)로부터 원주(原州) 주천(酒泉) 경계까지의 거리가 20리(二十里)이며, 감영으로 향하는 길이다.
自官門南至楊淵里三十里, 관문(官門) 남쪽으로부터 양연리(楊淵里)까지의 거리는 30리이다.
自楊淵里至土橋里二十五里, 忠淸道堤川縣界。
양연리(楊淵里)로부터 토교리(土橋里)까지는 25리이며, 충청도 제천현(堤川縣)과의 경계이다.
建置沿革 건치연혁
本高句麗奈生郡。 新羅改奈城郡。 高麗改今名, 屬原州。 恭愍王二十一年, 以鄕人宦者延達麻實里在大明, 有功於國, 陞爲郡。 本朝因之。 恭靖王元年, 自忠淸道來隷本道。 肅廟二十年, 以追封莊陵, 陞爲府。
本高句麗奈生郡。新羅改奈城郡。 高麗改今名, 屬原州。
본고구려내생군。신라개내성군。 고려개금명, 속원주。
영월군은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내성군으로 고쳐 원주에 속하게 하였다.
*통일신라 시대 : 경덕왕(景德王) 때 한식(漢式) 지명 체계로 정비하면서 내성군(奈城郡)으로 개칭.
*고려 시대 : 이후 태조 시기에 이르러 영월(寧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恭愍王二十一年, 以鄕人宦者延達麻實里在大明, 有功於國, 陞爲郡。 本朝因之。
공민왕이십일년, 이향인환자연달마실리재대명, 유공어국, 승위군。 본조인지。
공민왕 21년에 본향(고향) 사람인 환관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대명(명나라)에 있으면서 나라에 공을 세웠으므로, (그 고향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조선(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 명나라 조정에 가 있던 고려 출신 환관(내시). 당시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 많은 고려 출신 환관들이 중국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모국인 고려의 외교적 이익을 도왔다.
*유공어국(有功於國): "나라에 공이 있다"는 뜻으로, 연달마실리가 명나라에서 고려의 국익을 대변하거나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했음을 의미한다.
*승위군(陞爲郡): "올려서 군으로 삼았다"는 뜻. 전통 시대에는 왕실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나오면 그 인물의 고향(본관)을 상으로 승격시켜 주는 제도가 있었다.
恭靖王元年, 自忠淸道來隷本道。(공정왕원년, 자충청도래례본도。)
공정왕(정종) 원년(1399년)에, 충청도로부터 와서 본 도(강원도)에 소속되었다.
*恭靖王 (공정왕): 조선 제2대 국왕인 정종(定宗)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정종'이라는 묘호 대신 '공정왕'으로 불렸다.)
*隷 종 례' 또는 '종 예'. 주로 노예, 하인, 종 또는 어디론가에 속해 있다는 의미
*元年 (원년): 임금이 즉위한 첫 번째 해로, 공정왕 원년은 1399년이다.
*自忠淸道 (자충청도): 충청도로부터라는 뜻.
來隷本道 (내례본도): 본 도(여기서는 기록의 주체인 강원도)에 와서 소속(예속)되었다는 뜻이다.
肅廟二十四年, 以追封莊陵, 陞爲府。(숙묘 24년, 이추봉장릉, 승위부。)
숙종 24년(1698년)에 장릉(莊陵)을 추봉(追封)함으로써, (영월을) 도호부(府)로 승격시켰다.
*以 (이): ~로 인하여, ~로 써 (이유나 수단을 나타냄).
*陞爲府 (승위부): 고을의 격을 '부(府, 구체적으로는 도호부)'로 승격(陞格)시켰다는 뜻이다. 당시 영월군(郡)이었던 행정구역이 영월도호부(都護府)로 격상되었다.
郡名 군명
奈生, 奈城, 寧越。 내생, 내성, 영월。
形勝 형승
刀山繚繞, 錦水淸漪。(도산료요, 금수청의。)
칼날 같은 산들은 사방으로 둘러쳐 있고, 비단 같은 강물에는 맑은 잔잔한 물결이 이네.
*刀山 (도산): 칼날처럼 뾰족하고 험준하며 기개 있는 바위산들을 비유.
*繚繞 (료요): 산맥이나 길 등이 얽혀서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모습.
*錦水 (금수): 비단처럼 아름답고 맑게 빛나는 강물.
*淸漪 (청의): 맑고 잔잔하게 일어나는 물결.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원재(圓齋) 정추(鄭樞, 1333~1382) 선생이 강원도 영월(寧越)의 아름다운 산수를 예찬하며 지은 시
정추(鄭樞) : 1333~1382.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권(公權), 호는 원재(圓齋)이다. 인척인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의 죄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큰 고초를 당하였고,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발탁되었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가 1382년에 병사하였다. 문재로 이름이 있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한 당대의 명필이었다.
刀山繚繞松杉月 (도산료요송삼월)칼 같은 산들이 둘러싼 곳, 소나무와 전나무에 달은 비추고錦水淸漪草樹煙 (금수청의초수연)파란 물결 이는 비단 같은 물과 풀, 나무에는 안개가 자욱하네
不待主人披鶴氅 (부대주인피학창)주인이 학창의(신선이 입는 옷)를 풀어헤치며 맞이하길 기다리지 않아도
風流堪作畫圖傳 (풍류감작화도전)이 대자연의 풍류는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 후세에 전할 만하구나.
城池 성지
正陽山城。 在府東十里。 今廢。 정양산성。재부동십리。금폐。
莞澤山城。 在府東二十里。 今廢。 완택산성。 재부동이십리。 금폐。
정양산성은 관아(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지금은 회폐(폐지)되었다.
완택산성은 영월관아(부)의 동쪽 20리 거리에 있다. 지금은 무너져 내려 사용하지 않는다.
*[영월 정양산성(寧越 正陽山城)] : 삼국 시대(고구려 또는 신라)에 축조된 석축 산성,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사적 제446호]로 지정.
구조: 남한강 유역을 내려다보는 정양산(해발 430~565m) 정상부에 위치하며,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겹성 구조를 취하고 있다.
*완택산성(莞澤山城)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산274번지 일대의 완택산(해발 916.1m) 정상부에 유적이 남아 있다.
규모와 형태: 완택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7개의 봉우리를 감싸며 쌓은 남북으로 긴 형태의 산성이다. 총 길이는 약 900m~1km(기록상 3,477척)이며 돌을 쌓은 석축과 흙을 쌓은 토루가 섞여 있다.
역사적 의의: 1290년(고려 충렬왕 16년)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哈丹)의 무리가 영월에 침입했을 때, 고을 주민들이 이 산성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官職 관직
府使。 文正三品。
○置其屬: 座首一人, 別監二人, 軍官三十人, 衙前十五人, 知印六人, 使令五名, 軍牢四名, 官奴七名, 官婢六名。 莊陵參奉。 二員。
도호부사 정3품 문관에 그 소속 직원을 두었으니,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15명, 지인 6명, 사령 5명, 군뢰 4명, 관노 7명, 관비 6명이다. 장릉(莊陵)의 참봉(參奉)은 2명(員)이다.
*부사(府使)는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인 도호부(都護府)를 다스리던 종3품 문관 관직
전국 44개 지역에 설치된 도호부(都護府)의 수령,
관찰사(종2품)의 지휘를 받았으며, 일반 군수(종4품)나 현감(종6품)보다 높은 지위
*직제 및 인원 구성
좌수 (座首) — 1명 향청의 우두머리. 지방 고을의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아전)를 감찰.
별감 (別監) — 2명 좌수를 보좌하는 향청의 차석 관직.
군관 (軍官) — 30명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무관.
아전 (衙前) — 15명 지방 관청의 행정 실무를 맡은 향리.
지인 (知印) — 6명 관청의 도장(관인)을 관리하고 문서 전달을 맡은 하급 이속.
사령 (使令) — 5명 심부름이나 잔심부름을 하던 관청의 하인.
군뢰 (軍牢) — 4명 군대에 소속되어 형벌 집행이나 죄인 구금을 맡은 하급 군인.
관노 (官奴) — 7명 관청에 소속된 남자 노비.
관비 (官婢) — 6명 관청에 소속된 여자 노비.
山川 산천
鉢山。 在本府五里。 自平昌斗滿山南麓來, 爲邑主脈。 莊陵外靑龍。
蓬萊山。 在府東三里。 自平昌斗滿山來, 爲邑靑龍。
聖人巖。 在蓬萊山下。
泰華山。 在府南十六里。 自原州獅子山東麓來, 爲邑案山。
會稽山。 在府東十里。 自三陟太白山西麓來, 爲莊陵案山。下麓有胎峯。
栗峙山。 在府北三十里。 黃腸封標。 周回二十里。
刀山。 在府西五里。
亭子巖。 在府北四十里。 有於羅淵。 三峯盤峙水中。
紫煙巖。 在府東十里。 一巨巖蹲錦獐江中, 上可坐數十人。
立巖。 在府北十里。 三峯削出淸冷上流邊。
落花巖。 在錦江亭東十餘步。 絶壁斗起。 下有深湫, 卽端廟侍女、從人投江處。 有小碑。
錦獐江。 在府東一里。 自旌善下流。
淸冷浦。 在府西八里。 端廟遷于此, 至今遣址宛然。 源出江陵五臺山。 有禁標碑。
金鳳淵。 在府南四里。 錦獐江及淸冷浦合流南。 自永春下流京江。
鉢山。 在本府五里。 自平昌斗滿山南麓來, 爲邑主脈。 莊陵外靑龍。
발산。 재본부오리。 자평창두만산남록래, 위읍주맥。 장릉외청용。
발산(鉢山)은 영월 관부(官府)에서 북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다.
평창 두만산(斗滿山)의 남쪽 기슭에서부터 산줄기가 내려와
영월 고을의 주맥(主脈, 진산)을 이룬다.
단종의 능침인 장릉(莊陵)의 외청룡(外靑龍)이 된다.
*발산 (鉢山):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에 위치한 높이 674m의 산. 영월읍 북쪽에 솟아 있으며 모양이 바루(스님의 식기)를 엎어놓은 것 같아 발산이라 부르며, 삼각 모양을 띠고 있어 '삼각산'으로도 불리는 영월의 진산(鎭山)이다.
*주맥 (主脈): 평창의 두만산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의 지맥이 영월읍까지 이어져 이 고을을 지키는 가장 중심적인 산줄기가 되었다는 풍수지리적 설명이다.
장릉 외청룡 (莊陵 外靑龍): 조선국 제6대 왕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을 기준으로 볼 때, 동쪽(왼쪽)에서 능침을 겹으로 둘러싸며 보호하는 바깥쪽 산줄기(외청룡)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蓬萊山。 在府東三里。 自平昌斗滿山來, 爲邑靑龍。
봉래산。 재부동삼리。 자평창두만산래, 위읍청용。
봉래산은 관부(영월관아)의 동쪽 3리 거리에 있다.
평창의 두만산(斗滿山)으로부터 산맥이 이어져 내려와,
영월고을의 청룡(左靑龍)이 된다.
*府東三里 (부동삼리): 여기서 '부(府)'는 당시의 행정구역인 영월도호부의 관아를 뜻한다.
*自平昌斗滿山來 (자평창두만산래):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산줄기(맥)가 평창의 두만산을 거쳐 영월의 봉래산까지 이어져 왔다는 산맥의 내력(용맥)을 설명.
*爲邑靑龍 (위읍청룡): 풍수지리에서 주산(主山)을 중심으로 좌측(동쪽)에 길게 뻗어 고을을 보호하는 산줄기를 좌청룡(左靑龍)이라 한다. 즉, 봉래산이 영월 읍치를 동쪽에서 감싸 안으며 바람을 막아주고 기운을 모아주는 중요한 풍수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聖人巖。 在蓬萊山下。(성인암。 재봉래산하。)
성인암(聖人巖)은 봉래산(蓬萊山) 아래에 있다.
泰華山。 在府南十六里。 自原州獅子山東麓來, 爲邑案山。
태화산。 재부남십육리。 자원주사자산동록래, 위읍안산。
태화산(泰華山)은 영월 관아(府) 남쪽 16리(약 6.4km) 거리에 있다. 원주 사자산(獅子山)의 동쪽 기슭에서부터 산맥이 흘러왔으며, 영월 고을의 안산(案山)이 된다.
*자원주 사자산 동록래 (自原州獅子山東麓來):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산줄기(풍수 용어로 내룡)의 계보를 설명. 당시 원주목에 속했던 '사자산(현재 영월 무릉도원면과 원주 신림면 경계의 구봉대산·사자산 일대)'의 동쪽 기슭에서 산맥이 이어져 내려와 태화산을 이루었다는 맥락이다.
*위읍안산 (爲邑案山): 풍수지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안산(案山)은 고을의 중심(혈자리)이나 관아에서 바라보았을 때, 책상(案)처럼 앞을 알맞게 가려주어 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감싸주는 나지막한 앞산을 뜻한다. 즉, 태화산이 영월이라는 고을을 풍수적으로 보호하고 완성해 주는 핵심적인 앞산 역할을 하고 있음을 기록한 것이다.
💡 문중의 배경이 되는 태화산(해발 1,027m)은 현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한강이 산자락을 굽이쳐 흐르는 영월의 대표적인 명산 중 하나이다.
會稽山。 在府東十里。 自三陟太白山西麓來, 爲莊陵案山。下麓有胎峯。
회계산。 재부동십리。 자삼척태백산서록래, 위장릉안산。하록유태봉。
회계산(會稽山)은 영월 관아(府) 동쪽 10리 거리에 있다. 삼척 태백산의 서쪽 기슭에서부터 산줄기가 내려와, 장릉(莊陵)의 안산(案山)이 된다. 산자락 아래에는 태봉(胎峯, 왕실의 태를 묻은 봉우리)이 있다.
*회계산(會稽山):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
중국의 유명한 회계산(우왕의 무덤이 있는 곳)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단종의 능침인 장릉을 마주 보는 풍수적 위치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案山(안산): 풍수지리학에서 집터나 묘 자리(혈)의 맞은편(앞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을 말한다. 즉, 회계산은 단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앞을 바라보았을 때 정면을 받쳐주는 중요한 풍수적 산이다.
*胎峯(태봉):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항아리에 담아 묻었던 봉우리이다. 회계산 아래에 이러한 왕실 관련 태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栗峙山。 在府北三十里。 黃腸封標。 周回二十里。
율치산。 재부북삼십리。 황장봉표。 주회이십리。
*율치산(栗峙山): 율치산은 (영월군 북면과 평창군 미탄면 경계에 있는 밤치재/밤재 인근의 산)
재부북삼십리(在府北三十里): 영월 관아로부터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
황장봉표(黃腸封標): 궁중에서 관(棺)을 짜거나 재해·건축 등에 쓰던 최고급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벌목을 금지하는 표식(황장금표)을 세워 봉인하였다.
주회이십리(周回二十里): 그 금표로 둘러싸인 봉산의 둘레는 20리에 달한다.
*정리율치(栗峙): 우리말로 '밤치' 또는 '밤재'라고 부르는 고개와 그 일대의 산을 뜻한다. 과거 이 지역에 큰 밤나무가 많아 유래된 지명이다.
*황장목(黃腸木): 소나무 중에서도 중심부(심재)가 짙은 황색을 띠고 단단하며 썩지 않아, 조선 왕실의 재궁(왕과 왕비의 관)이나 궁궐 건축에만 사용하던 최고급 소나무.
*황장봉산(黃腸封山) 제도: 국가가 황장목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특정 산을 지정하고 민간인의 출입과 벌목을 엄격히 금지한 산림 보호 제도이다. 그 경계에는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바위 각자나 비석을 세웠다.
영월 지역은 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조운(뗏목)을 통해 한양으로 나무를 운반하기 수월했기 때문에, 이 율치산 외에도 수주면 법흥리 등 여러 곳이 황장봉산으로 지정되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刀山。 在府西五里。(도산。 재부서오리。)
도산(刀山)은 부(府)의 서쪽 5리에 있다.
亭子巖。 在府北四十里。 有於羅淵。 三峯盤峙水中。
정자암. 재부북사십리. 유어라연. 삼봉반치수중.
정자암(亭子巖)은 영월 관청(부)에서 북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에는 어라연(於羅淵)이 있는데, 세 개의 봉우리가 물속에 서려 솟아 있다.
*정자암(亭子巖):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놀던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세 신선이 놀았다고 하여 보통 삼선암(三仙巖)이라 부른다.
*재부북사십리(在府北四十里): 당시 고을의 중심지(영월부 읍치)로부터 북쪽으로 약 16km(4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는 거리 설명이다.
*어라연(於羅淵): 영월의 동강 줄기에 있는 한강 상류의 유명한 여울(못)이다.
과거 문헌에는 '어라연(於羅淵)'으로 기록되었으나, 현재는 '고기가 비단결처럼 아름답게 노니는 연못'이라는 뜻의 어라연(魚羅淵)으로 한자가 바뀌어 쓰이고 있다.
단종이 승하한 후 그 혼령이 이곳의 비경에 반해 신선처럼 머물려 하자, 수많은 물고기들이 비늘을 반짝이며 반겼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삼봉반치수중(三峯盤峙水中): 물 한가운데에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둥글게 서려 웅장하게 솟아 있는 [어라연의 독특한 지형적 아름다움]을 묘사한 구절이다.
현재 이 일대는 빼어난 천혜의 비경과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명승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紫煙巖。 在府東十里。 一巨巖蹲錦獐江中, 上可坐數十人。
자연암. 재부동십리. 일거암준금장강중, 상가좌수십인.
자연암(자줏빛 안개 바위)은 관아(영월부) 동쪽 10리에 있다. 한 덩이의 거대한 바위가 금장강(동강) 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인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자연암(紫煙巖): '자줏빛 안개 서린 바위'라는 뜻으로, 영월 동강 변에 위치한 명승지 바위.
*재부동십리(在府東十里): 영월부 관아 기준으로 동쪽으로 약 10리(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는 의미.
*금장강(錦獐江): 영월 동강(東江)의 옛 이름 또는 동강의 특정 구간을 부르던 명칭이다.
비단 '금(錦)' 자와 노루 '장(獐)' 자를 쓴다.
*준(蹲): '웅크릴 준' 자로, 바위가 강 한가운데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상가좌수십인(上可坐數十人): 바위 윗부분이 평평하여 수십 명의 사람이 올라앉아 경치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넓다는 것을 나타낸다.
立巖。 在府北十里。 三峯削出淸冷上流邊。
선암. 재부북십리. 삼봉삭출청령상류변.
선암(선바위). 관부(고을 중심지)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세 개의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이 청령포(또는 청령강) 상류 강가에 솟아 있다.
*立巖 (선암/선바위): '서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전국 여러 곳에 동명의 바위가 있으나 본 문맥은 '영월 청령포 인근의 삼봉(서릿바위/선바위)'를 뜻한다.
*在府北十里 (재부북십리): 고을의 관청(부) 중심지로부터 북쪽으로 약 4km(10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는 거리 표시.
*三峯削出 (삼봉삭출):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마치 칼로 깎아낸 듯이 가파르고 장엄하게 솟아오른 모습을 묘사한다.
*淸冷上流邊 (청령상류변): '청령(淸冷)'은 단종의 유배지로 유명한 영월의 청령포(淸泠浦) 일대를 흐르는 맑고 차가운 강물의 상류 가장자리에 바위가 있다는 의미이다.
落花巖。 在錦江亭東十餘步。 絶壁斗起。 下有深湫, 卽端廟侍女、從人投江處。 有小碑。
落花巖(낙화암)。 在錦江亭東十餘步(재금강정동십여보)。 絶壁斗起(절벽두기)。 下有深湫(하유심추), 卽端廟侍女(즉단묘시녀)、從人投江處(종인투강처)。 有小碑(유소비)。
낙화암은 금강정(錦江亭) 동쪽으로 10여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絶壁)이 가파르게 솟아 있으며,
그 아래에는 깊은 소(湫, 연못이나 물굽이)가 있다.
이곳은 바로 단종(端廟, 단종의 묘호)의 시녀와 시종들이 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현재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이 기록은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이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승하하자, 그를 모시던 궁녀와 시종들이 슬퍼하며 동강(금장강)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순절한 비극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부여 백마강의 낙화암처럼, 영월의 낙화암도 충절을 지킨 이들의 넋이 꽃처럼 떨어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정 (錦江亭):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정자. 내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낙화암 비석 (落花巖 碑): 1742년(영조 18년) 영월부사 홍성보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절벽 위에 '낙화암' 비석을 세웠다. 현재의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것을 1912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민충사 (愍忠祠): 낙화암 인근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시녀와 시종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지내는 사당인 민충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錦獐江。 在府東一里。 自旌善下流。(금장강。 재부동일리。 자정선하류。)
금장강(錦獐江)은 영월 관아(府) 동쪽 1리에 있다. 정선(旌善)에서부터 흘러내려 온다.
💡 금장강(錦獐江): 현재 영월을 지나가는 동강(東江)을 부르던 옛 명칭. 비단 '금'자에 노루 '장'자를 써서 강줄기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이름.
부(府): 당시 영월의 행정구역 단위인 '영월도호부'를 뜻한다. 관아 동쪽 바로 가까이에 강이 흐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정선하류(自旌善下流): 이 강의 물줄기가 강원도 정선에서부터 시작되어 아래로 흘러온다는 의미. 동강은 정선군과 영월군을 잇는 강줄기이다.
淸冷浦。 在府西八里。 端廟遷于此, 至今遣址宛然。 源出江陵五臺山。 有禁標碑。
청냉포。 재부서팔리。 단묘천우차, 지금견지완연。 원출강릉오대산。 유금표비。
淸冷浦。 在府西八里。청령포는 영월 관부(官府)에서 서쪽으로 8리 떨어져 있다.
端廟遷于此, 至今遣址宛然。단종(端廟)께서 이곳으로 유배(이동)되셨는데, 지금까지도 그 유적(남겨진 터)이 또렷하다.
源出江陵五臺山。(청령포를 흐르는 강의) 수원은 강릉 오대산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有禁標碑。이곳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비가 있다.
*淸冷浦 (청령포):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에 위치한 명승지.
동·남·북 3면이 서강(남한강 상류)의 거센 물줄기에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칼처럼 날카롭다는 도산(刀山)이 험준한 암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배가 없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천혜의 감옥과 같은 곳이다.
*府 (부): 영월도호부(寧越都護府)를 의미. '府西八里'는 영월 관아(현재의 관풍헌) 기준으로 서쪽 약 3km 지점이라는 뜻.
*端廟 (단묘):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묘호가 정해지기 전(숙종 대에 복위되기 전)이나 민간에서 단종을 높여 부르던 칭호이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禁標碑 (금표비): 1726년(영조 2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당시 도호부사 윤양래가 자신의 녹봉으로 세운 금표인데,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를 보호하고 백성들의 무단출입 및 동식물 채취를 제한하기 위해 세운 '청령포 금표비(淸泠浦 禁標碑)'를 말한다.
金鳳淵。 在府南四里。 錦獐江及淸冷浦合流南。 自永春下流京江。
금봉연。 재부남사리。 금장강급청냉포합류남。 자영춘하류경강。
金鳳淵 在府南四里 (금봉연 재부남사리): 금봉연(金鳳淵)은 영월 관아(府)에서 남쪽으로 4리 떨어진 곳에 있다.)'금봉연'은 현재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일대,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합수거리에 위치한 깊은 소(淵)의 옛 이름).
錦獐江及淸冷浦合流南 (금장강급청령포합류남): 금장강(錦獐江, 동강)과 청령포(淸冷浦, 서강 줄기)가 남쪽에서 합류하는 곳이다.(영월을 흐르는 두 큰 물줄기인 동강(당시 명칭 금장강·금障江)과 단종의 유배지로 잘 알려진 청령포를 끼고 도는 서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형적 특징을 나타낸다.)
自永春下流京江 (자영춘하류경강): 영춘(永春)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려가면 경강(京江, 서울의 한강)에 이른다.(충북 단양군 영춘면 방면에서 흘러온 남한강 상류의 물길이 이곳을 거쳐 최종적으로 한양의 한강(경강)까지 연결되는 주요 수로(水路) 교통망임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는 이 물길을 통해 강원도 지역의 세곡이나 목재를 뗏목에 실어 서울로 운반했다.
*금봉연(金鳳淵):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영월의 두물머리(합수정)에 있던 깊은 소(沼)이다.
예전에는 이무기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물이 깊고 푸르렀다고 전해진다.
*금장강(錦獐江): 영월 동쪽을 흐르는 강으로, 오늘날의 동강을 일컫는 옛 지명이다.
청령포(淸冷浦): 영월 서쪽을 흐르는 서강 줄기가 휘감아 도는 감입곡류 지형으로,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유배되었던 명승지이다.
영춘(永春):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지역으로, 영월의 남한강 상류 방향에 위치한 이웃 고을이다.
姓氏 성씨
嚴。 土姓。 辛。 土姓。 高。 橫城。 宋。 懷德。 金。 榮川。 尹。 坡平。 劉。 淸風。 丁。 義城。 洪。 南陽。 申。 高靈。 琴。 奉化。
엄。 토성。, 신。 토성。, 고。 횡성。, 송。 회덕。, 김。 영천。, 윤。 파평。, 유。 청풍。,
정。 의성。, 홍。 남양。, 신。 고령。, 금。 봉화。
風俗 풍속
患難相救, 淳博見稱。(환난상구, 순박견칭。)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구제해 주었으며,
성품이 순후(淳厚)하고 학식이 넓어 사람들로부터 기림(칭찬)을 받았다.
*구절은 주로 조선시대 문집의 행장(行狀), 묘지명(墓誌銘), 또는 특정 인물의 전기(傳記)에서 고인의 훌륭한 덕성과 행실을 기릴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앞 구절(患難相救)은 마을 공동체나 친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재산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도왔던 사회적 실천과 이타성을 강조한다.
*뒤 구절(淳博見稱)은 개인의 내면적 인품이 순수하고(淳) 학문적 깊이가 깊어(博) 지역 사회와 유림에서 학덕을 겸비한 인물로 인정받았음을 나타낸다.
陵寢 능침
莊陵。 在府北五里。 丁丑十月二十四日酉時運訖, 戶長嚴興道葬于鉢山西麓冬乙旨辛坐乙向。 中廟朝遣官致祭。 宣廟朝, 遣官致祭, 因監司鄭澈狀啓, 命封墓立石。 光海朝, 建祠宇, 增定守墓人四名。 位版書曰: “魯山大君神位夫人宋氏配。” 令本道差參奉二員, 輪回守直。 孝廟朝遣官致祭。 顯廟朝遣官致祭。 肅廟朝戊寅, 追諡端宗, 改封莊陵。
莊陵。 在府北五里。 장릉은 부(府)의 북쪽 5리에 있다.
丁丑十월二十四日酉時運訖 (정축십월이십사일유시운흘) 정축년(1457년, 세조 3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사이)에 (단종의) 운명이 다하시어(승하하시어)
戶長嚴興道葬于鉢山西麓冬乙旨 (호장엄흥도장우발산서록동을지) 호장(戶長, 영월의 지방 관직) 엄흥도(嚴興道)가 발산(鉢山)의 서쪽 기슭 동을지(冬乙旨)에 장사 지냈다.
*辛坐乙向 (신좌을향): 신(辛) 좌에 을(乙) 향으로 눕혔다. 전통 풍수지리에서 묘자리의 방향을 말한다. 24방위 중 '신(辛)'방향을 등지고 '을(乙)'방향을 바라보도록 묘를 썼다는 뜻으로, 쉽게 말해 남서쪽을 등지고 북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안치했다는 의미이다.
中廟朝遣官致祭。 (중묘조견관치제。 )중종 조정(中廟朝)에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宣廟朝, 遣官致祭, 因監司鄭澈狀啓, 命封墓立石。
(선묘조, 견관치제, 인감사정철장계, 명봉묘입석。) 선조 조(선조 재위기)에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감사(관찰사) 정철의 장계(보고서)로 인하여 무덤을 봉하고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역사적 배경과 맥락
(조선왕조실록 선조 14년 기록) 조선 제6대 왕 단종은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영월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오랜 기간 무덤의 격식을 갖추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정철의 장계 (1580년~1581년): 강원도 관찰사(감사)로 부임한 송강 정철은 영월에 있는 노산군의 묘가 돌보는 이 없이 황폐해진 것을 보았다. 이에 "비록 강등되었으나 군(君)의 신분이니 품제에 맞게 무덤을 가꾸고 비석을 세워야 한다"는 취지의 장계를 올렸다.
선조의 명령: 선조는 이 보고를 합당하게 여겨 왕자(王子)의 예에 준하여 무덤을 크게 봉하고(封墓) 비석을 세우도록(立石) 지시했다.
치제(致祭): 정비가 끝난 후, 선조는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승지(근신)를 영월로 직접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여 영혼을 위로했다.
이 사건은 훗날 숙종 대에 이르러 노산군이 '단종'으로 완전하게 복위되고, 그의 무덤이 현재의 영월 장릉(莊陵)으로 승격되는 중요한 역사적 발판이 되었다.
光海朝, 建祠宇, 增定守墓人四名。(광해조, 건사우, 증정수묘인사명。)
광해군 재위 시절(광해조), 사우(祠宇·사당)를 건립하고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4명을 추가로 배정(증정)하였다.
*光海朝 (광해조): 광해군 재위 기간(1608~1623)을 뜻한다.
*建祠宇 (건사우):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사당)을 짓다.
*增定守墓人四名 (증정수묘인사명): 무덤을 관리하고 지키는 사람(수묘인 또는 수총인)을 기존보다 4명 더 늘려서 배치하도록 지정했다는 뜻
位版書曰: “魯山大君神位夫人宋氏配。”(위판서왈: “노산대군신위부인송씨배。”)
"위판서에 이르기를: '노산대군의 신위는 부인 송씨를 배향(합설)한다'라고 하였다.“
*신원의 과정 (노산대군): 성종, 선조, 효종, 현종을 거치면서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특히 현종 대에 이르러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추봉하고, 영월의 묘소를 수축하며 신주를 모시는 예법(위판서)을 정리하게 된다.
이후 숙종 24년(169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단종(端宗)'이라는 시호와 묘호를 받아 왕의 자격을 완전히 회복했다.
令本道差參奉二員, 輪回守直。(령본도차참봉이원, 윤회수직。)
해당 도(道)에서 참봉(參奉) 관원 2명을 임명하여, 서로 교대로 당직을 서며 지키도록 명했다.
*輪回守直 (윤회수직): 번갈아 가며 당직을 서서 지키게 하라.
참봉 2명을 임명하여 공백이 없도록 24시간 교대로 근무(숙직)를 서라고 지시하는 내용
孝廟朝遣官致祭。 顯廟朝遣官致祭。 肅廟朝戊寅, 追諡端宗, 改封莊陵。
孝廟朝遣官致祭 (효묘조견관치제) 효종(孝宗) 조정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설명: 효묘(孝廟)는 효종을 뜻합니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을 위해, 효종 시기에 이르러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顯廟朝遣官致祭 (현묘조견관치제) 현종(顯宗) 조정에도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설명: 현묘(顯廟)는 현종을 뜻합니다. 효종에 이어 현종 시기에도 영월의 노산군 묘소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이어갔다.
肅廟朝戊寅, 追諡端宗, 改封莊陵 (숙묘조무인, 추시단종, 개봉장릉) 숙종(肅宗) 조정 무인년(1698년)에, 단종이라는 시호를 추모하여 올리고 (묘소를) 장릉으로 고쳐 봉하였다.
설명: 숙묘(肅廟)는 숙종을 뜻한다. 숙종 24년(1698년, 무인년)에 이르러 마침내 노산군의 왕권을 공식적으로 복위시키고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올렸으며, 무덤 역시 군의 무덤인 '노산묘'에서 왕릉의 격식인 '장릉(莊陵)'으로 격상하여 새로이 봉했다.
胎峯。 在府南十里, 正陽山下麓。 今上癸酉元孫阿只氏胎峯。
태봉。 재부남십리, 정양산하록。 금상계유원손아지씨태봉。
태봉(胎峯)은 영월부(府) 남쪽 10리 거리의 정양산(正陽山) 아래 기슭에 있다. 지금의 임금[今上, 즉 정조]이 계유년(1753년)에 원손 아기씨(元孫阿只氏)였을 때 조성한 태봉이다.
*今上(금상): 문장이 기록될 당시 재위 중이던 왕을 뜻한다.
1752년(임신년)에 태어나 1753년(계유년) 정월에 태를 묻은 정조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지리지는 정조 재위 기간(1776~1800년) 중에 찬술된 영월부의 기록이다.
*癸酉(계유, 1753년): 정조는 1752년 9월 22일(음력)에 태어났으며, 조선 왕실의 법도에 따라 약 5달 뒤인 1753년(계유년) 정월 21일에 이곳에 태를 봉안(장태)했다.
*元孫阿只氏(원손아기씨): 정조는 탄생 당시 영조의 세자였던 사도세자(장조)의 아들이었으므로, 왕의 손자인 ‘원손(元孫)’ 신분이었다.
'아기씨'는 왕실 태생의 어린 자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위치(府南十里 正陽山下麓): 영월 관아(영월부)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정양산(현 계족산) 아래 기슭을 말한다.
역사적 배경과 현재 : 정조가 즉위한 후 이 아기태실은 국왕의 태실에 걸맞게 석물(돌난간, 거북좌대, 비석 등)을 갖춘 가봉태실(加封胎室)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일제가 전국에 분포한 조선 왕실의 태항아리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안하면서 영월의 태실은 파괴되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이후 영월군에서 발굴 조사를 거쳐 정양산 중턱에 정조대왕 태실 및 태실비(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壇廟 단묘
社稷壇。 在府西三里。
文廟。 在府東二里。
城隍壇。 在府北三里。
厲祭壇。 在府北五里。
彰節祠。 在府北三里。 歲乙丑, 因魯山大君墓改修之役, 監司洪萬鍾與郡守趙爾翰議克協通, 告一道添助事力。 建祠列享六臣朴彭年、成三問、李塏、柳誠源、河緯地、兪應孚, 以故戶長嚴興道腏食。 故有八賢祠, 歲辛亥建于彰節祠壇內, 爲生六臣金時習、南孝溫、李孟專、元昊、趙旅、成聃壽、權節、鄭保妥靈之所。 歲辛酉, 因朝令, 毁撤祠宇, 埋置位牌。 遺址尙存。
愍忠祠。 在府東三里, 落花巖上。 封莊陵後, 忌辰及寒食使戶長祭殉節人於此。 今上戊寅, 因特敎, 改建祠宇。
壇廟 단묘 : 신령, 자연신, 조상 또는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제단(壇)과 사당(廟)을 아울러 이르는 말
社稷壇。 在府西三里。(사직단。 재부서삼리。)
사직단은 (조선 시대 당시 부의 관청이 있던 곳에서) 서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
*사직단(社稷壇)의 의미, 사(社): 땅의 신을 뜻합니다. 직(稷): 곡식의 신을 뜻합니다.
목적: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국책 제단입니다.
전통적 배치 원칙 : 좌묘우사(左廟右社): 도읍을 건설할 때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왕실 조상의 사당)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배치했다.
서쪽 위치: 임금이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기준에서 우측이 서쪽이 되므로, 사직단은 대개 관청이나 궁궐의 서쪽에 위치하게 된다. 문장 속 '재부서(在府西)'라는 표현 역시 이 원칙에 따라 사직단이 고을 관아의 서쪽에 설치되었음을 보여준다.
文廟。 在府東二里。(문묘。 재부동이리。)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부(府)의 동쪽 2리 거리에 있다.
城隍壇。 在府北三里。(성황단。 재부북삼리。) 성황단(城隍壇)은 부(府)의 북쪽 3리에 있다.
*성황단(城隍壇): 성황신(도시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
*부(府):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 중 하나인 '부'(예: 전주부, 경주부, 강릉부 등)의 중심 관아를 뜻한다.
*북삼리(北三里): 관아 중심지로부터 북쪽으로 3리(약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는 의미.
🔍 역사적 배경 정보
*성황 신앙: 조선시대에는 고을의 수령이 부임하면 가장 먼저 성황단에 찾아가 고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위치적 특성: 성황단은 주로 고을 관아 주변의 나지막한 산이나 고개, 혹은 북쪽처럼 음기가 강하거나 방어가 필요한 방위에 주로 설치되었다.
厲祭壇。 在府北五里。(여제단。 재부북오리。)
여제단은 (고을) 관부에서 북쪽으로 5리(약 2km) 떨어진 곳에 있다.
* 여제단은 음성의 기운이 강한 영혼을 위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보통 고을 중심지에서 떨어진 북쪽 교외에 세워졌다.
*조선 시대에 제사를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억울한 원혼(여귀, 厲鬼)과 전염병 등으로 비명횡사한 귀신들을 달래기 위해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줄여서 여단(厲壇)이라고도 부른다.
彰節祠。 창절사。
불의에 항거하고 대의에 따라 비장하게 최후를 마친 충신의 절개를 길이 표창한 사당
彰節祠在府北三里 (창절사재부북삼리): 창절사는 영월부(府) 북쪽 3리에 있다.
歲乙丑 (세을축): 을축년(숙종 11년, 1685년)에,
因魯山大君墓改修之役 (인노산대군묘개수지역): 노산대군(단종) 묘소를 고쳐 짓는 공사(역사)로 인하여,
監司洪萬鍾與郡守趙爾翰議克協通 (감사홍만종여군수조이한의극협통): 감사(강원도관찰사) 홍만종과 군수 조이한이 의논하여 뜻을 잘 모으고 서로 소통하여,
告一道添助事力 (고일도첨조사력): 온 도(강원도)에 알려 역사(공사)의 힘을 보태어 돕도록 했다.
建祠列享六臣朴彭年、成三問、李塏、柳誠源、河緯地、兪應孚, 以故戶長嚴興道腏食。
사당을 세워 육신(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을 차례로 제향하게 하고,
以故戶長嚴興道腏食。 옛 호장 엄흥도를 배식(함께 제사 지냄)하게 하였다.
故有八賢祠,(고유팔현사,)옛날에 팔현사가 있었는데,
歲辛亥建于彰節祠壇內(세신해건우창절사단내)신해년(1731년)에 창절사 단내(壇內)에 세워
爲生六臣金時習、南孝溫、李孟專、元昊、趙旅、成聃壽、權節、鄭保妥靈之所。
(위생육신김시습、남효온、이맹전、원호、조려、성담수、권절、정보타령지소。)생육신인 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원호, 조려, 성담수와 권절, 정보의 신령을 위로하는 곳으로 삼았다.
歲辛酉, 因朝令(세신유, 인조령)신유년(1861년)에 조정의 명령으로 인해
毁撤祠宇, 埋置位牌。(훼철사우, 매치위패。)
사당 건물을 부수고 철거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遺址尙存(유지상존) 옛터(유적)가 아직 남아 있다.
*영월 창절사 (彰節祠)건립 목적: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85년(숙종 11년)에 노산군 묘우 옆에 처음 세웠다.
배향 인물: 사육신(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을 비롯하여 생육신(김시습, 남효온), 엄흥도, 박심문 등 총 10인의 충신을 모시고 있다.
역사적 가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강원도 내 사당 및 서원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
주요 구조: 강당(강학공간), 동무·서무, 사당(제향공간)과 더불어 독특한 2층 누각 문루인 배견루(拜鵑樓)를 갖추고 있다.
愍忠祠。 在府東三里, 落花巖上。(민충사。 재부동삼리, 낙화암상。)
민충사(愍忠祠)는 조선 시대의 사당으로, 부(府)의 동쪽 3리(里) 지점, 낙화암(落花巖) 위에 위치해 있다.
封莊陵後, 忌辰及寒食使戶長祭殉節人於此。(봉장릉후, 기진급한식사호장제순절인어차。)
장릉(莊陵)을 봉한 후에, 기일(忌辰) 및 한식(寒食)에 호장(戶長)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순절인(殉節人)들을 제사 지내게 했다.
*호장(戶長): 고려·조선 시대 지방 관청의 향리직 중 가장 높은 우두머리이다. 조정에서 직접 관리를 매번 보내기 어려울 때, 국가적인 제례나 관리를 대신하여 지역의 최고 향리인 호장에게 제사를 주관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今上戊寅, 因特敎, 改建祠宇。(금상무인, 인특교, 개건사우。)
지금 임금(정조 22년) 무인년(1798년)에 왕의 특별한 명령(特敎)으로 인해 사당(祠宇)을 고쳐 지었다.
*愍忠祠 (민충사): '충성을 슬퍼하고 기리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영조가 단종을 위해 순절한 이들의 정절을 기리며 직접 이름을 지어 내린(사액) 사당이다.
*영월 민충사 (寧越 愍忠祠) 개요
지정 번호: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77 (금강정 및 낙화암 인근)
건립 시기: 조선 영조 18년(1742년) 왕명으로 건립
📜 역사적 배경과 건립 이유
단종의 유배와 승하: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노산군(단종)은 영월 청령포 등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1457년(세조 3년) 10월 24일, 결국 영월에서 1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녀들의 순절: 단종이 승하하자 그를 가까이서 모시던 시녀와 종인 등이 주군을 향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사당 앞 금강(동강) 절벽인 낙화암(落花岩)에서 물로 몸을 던져 순절했다.
사당의 건립: 후대 영월 주민들이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가, 1742년(영조 18년)에 정식으로 사당을 세웠으며 1758년에 ‘민충(愍忠)’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해마다 이들이 순절한 음력 10월 24일에 제향을 올린다.
公廨 공해
客舍。 二十六間。
衙舍。 四十八間。
鄕廳。 十間。
訓鍊廳。 六間。
軍器廳。 五間。
客舍。 二十六間。(객사。 26칸。)
객사(客舍)는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청 건물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외국 사신이나 중앙 관리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
객사의 기본 구조
정당(正堂): 중앙에 위치하며 왕의 전패를 모시는 가장 신성한 공간.
동익헌/서익헌(東/西翼軒): 정당 좌우에 붙어 있는 건물로, 관리들이 숙소로 사용했다.
衙舍。 四十八間。(아사。 48칸。)
아사(衙舍)는 조선 시대 지방 관아가 있던 공무 수행 및 관원 집무 공간을 뜻하며, 총 48칸(間) 규모이다.(48칸은 조선 시대 중소 규모 군현(현감이나 현령이 다스리던 고을)의 표준적인 관아 크기이다.)
鄕廳。 十間。(향청。 열칸。)
향청(鄕廳)은 조선 시대 각 고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치 기구(유향소)의 청사이며, 십간(十間)은 그 건물이 10칸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향청(鄕廳): 조선 시대 지방관(수령)의 권력 남용을 막고, 향리들을 감시하며,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그 지역 양반들이 조직한 자치 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다른 이름입니다.
訓鍊廳。 六間。
훈련청(訓鍊廳):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거나 행정 업무를 보던 곳. 훈련도감은 본영 외에도 도성 내 여러 곳에 분소(분청) 형태의 훈련청을 두었다.
육간(六間): 건물의 규모가 6칸이라는 뜻.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을 '칸(間)'이라고 하며, 6칸은 정면과 측면의 기둥 배치를 조합한 건물 규모를 나타낸다.
軍器廳。 五間。
군기청(軍器廳)은 조선 시대에 군기(무기 및 군수품)의 제조, 보관, 관리를 담당하던 임시 관청 또는 현지 집무 공간을 뜻한다.
오간(五間)은 해당 건물의 규모가 앞면(정면) 5칸 크기임을 나타낸다.
조선 왕조의 공식 중앙 관청은 군기시(軍器寺)이나, 특정 군사 요충지나 행궁, 영문(營門) 등에서 군기를 특별히 관리하기 위해 이보다 작은 규모의 군기청을 별도로 설치하여 운영했다.
堤堰 제언
제언(堤堰)은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물길을 막아 만든 둑(제방)과 저수지(방죽)를 통틀어 이르는 전통 수리 시설
倉庫 창고
邑倉。 二十六間。
東倉。 在府上東面梨木里。 自官門六十里。 十二間。
社倉。 在府下東面蜜洞里。 自官門四十里。 十五間。
西倉。 在府南面楊淵里。 自官門三十里。 十六間。
邑倉。 二十六間。 (읍창。 26칸。)
고을 관아에서 관리하는 곡물 창고(읍창)의 규모가 총 26칸이다.
東倉。 在府上東面梨木里。 自官門六十里。 十二間。
東倉 (동창): 동쪽 창고는,
在府上東面梨木里 (재부상동면이목리): 영월부의 상동면(上東面) 이목리(梨木里)에 있다.
自官門六十里 (자관문육십리): 관아의 문(관문)으로부터 60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十二間 (십이간): 건물의 규모는 12칸이다.
社倉。 在府下東面蜜洞里。 自官門四十里。 十五間。
社倉 (사창): 마을 단위로 운영되던 곡물 대여 및 구휼 창고이다.
在府下東面蜜洞里 (재부하동면밀동리): 그 부(府)의 하동면 밀동리 마을에 위치해 있다.
自官門四十里。(자관문사십리。)관청의 문(관문)으로부터 거리가 40리이다.
十五間。 규모는 15칸이다.
物産 물산
石鐵, 黃楊木, 五味子, 紫草, 人蔘, 茯苓, 訥魚, 餘項魚, 錦鱗魚, 淸蜜。
석철, 황양목, 오미자, 자초, 인삼, 복령, 눌어, 여항어, 금린어, 청밀。
黃楊木(황양목) : 회양목,
자초(紫草) : 지치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지치의 뿌리를 말하며, 예로부터 약재나 천연 자줏빛 염료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한방에서는 자근(紫根)으로도 부르며, 동의보감 등 전통 의학에서는 성질이 차고 독이 없으며 열을 내리고 독을 푸는 효과가 탁월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도의 명물인 '진도 홍주'의 붉은 빛을 내는 원료이기도 하다.
복령(茯苓) : 베어낸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여 자라는 구멍장이버섯과 진군류의 건조된 균핵(버섯 덩어리)이다. 한의학에서 '사시신약(四時神藥)'으로 불릴 만큼 성질이 평하고 독이 없어 널리 쓰이는 대표적인 약재이다.
訥魚(눌어) : 잉어목 잉어과의 민물고기인 ‘누치’를 뜻한다.
餘項魚(여항어) : 조선시대 기록에서 열목어(熱目魚)로 추정되는 민물고기 명칭
금린어(錦鱗魚) : 민물고기의 제왕이라 불리는 쏘가리의 또 다른 한자 이름. '비단(錦) 옷을 입은 것처럼 화려한 비늘(鱗)을 가진 물고기(魚)'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청밀(淸蜜) : 불순물을 걸러내어 맑고 깨끗하게 만든 꿀을 뜻하는 한자어
橋梁 교량
驛院 역원
延平驛。 自官門北距四十里。 大馬一匹, 騎馬二匹, 卜馬一匹, 吏十四人, 奴十五名, 婢五名。
楊淵驛。 自官門西距三十里。 大馬二匹, 騎馬三匹, 卜馬三匹, 吏二十九人, 奴十九名, 婢二十二名。
龍井院。 自官門西距四十里。 六間。
延平院。 自官門北距四十里。 六間。
延平驛。 自官門北距四十里。 大馬一匹, 騎馬二匹, 卜馬一匹, 吏十四人, 奴十五名, 婢五名。
연평역(延平驛)은 관문(官門, 고을 관아)으로부터 북쪽으로 40리 떨어져 있다. 큰 말(大馬) 1필, 타는 말(騎馬) 2필, 짐 싣는 말(卜馬) 1필이 있으며, 역리(吏, 아전) 14명, 남자 노비(奴) 15명, 여자 노비(婢) 5명이 있다.
楊淵驛。 自官門西距三十里。 大馬二匹, 騎馬三匹, 卜馬三匹, 吏二十九人, 奴十九名, 婢二十二名。
양연역(楊淵驛)은 관문(관아의 정문)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큰 말[大馬] 2마리, 타는 말[騎馬] 3마리, 짐 싣는 말[卜馬] 3마리가 있다. 역리(驛吏, 행정 사무를 보는 아전)는 29명이다. 역노(驛奴, 남자 노비)는 19명, 역비(驛婢, 여자 노비)는 22명이다.
마필(馬匹) 종류
대마(大馬): 몸집이 크고 건장한 말로, 주로 고위 관원의 이동이나 중요 공무에 사용되었다.
기마(騎馬): 일반 관원이나 역졸들이 타고 다니던 말.
복마(卜馬): 공물이나 짐, 문서 등을 실어 나르던 짐말. (卜은 '짐 실을 복'으로 쓰임)
신분 및 인력
리(吏): 역의 행정 사무와 말 관리를 총괄하던 중인 신분의 역리(驛吏)를 의미.
노(奴) / 비(婢): 역에 소속되어 잡일을 하던 공노비인 역노비(驛奴婢)이다.
龍井院。 自官門西距四十里。 六間。
용정원(龍井院)은 관문(고을의 중심지 또는 관청)에서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6칸 규모의 국립 여관(원)이다.
*원(院): 조선 시대 공무로 출장 중인 관리들에게 숙식과 말(馬)을 제공하던 공공 숙박 시설.
延平院。 自官門北距四十里。 六間。
연평원은 관문(관아의 정문)에서부터 북쪽으로 40리 거리에 있다. 규모는 6칸이다.
牧場 목장
分養馬二匹, 七月受來, 翌年三月上納。(목장 분양마이필, 칠월수래, 익년삼월상납.)
목장에서 나누어 기르는 말(분양마) 2필은, 7월에 인도받아 와서 이듬해 3월에 (조정에) 바친다.
關阨 관애
蜜積藪。 在府南距一里。
高德峙。 在府北距四十五里。
角斤峙。 在府西距十里。
分德峙。 在府北距十里。
關阨 관애 : 군사적으로 중요한 길목에 만든 요새나 관문
蜜積藪。 在府南距一里。(밀적수。 재부남거일리。)
요새(관문)인 밀적수는 고을 관아의 남쪽으로 1리 떨어진 곳에 있다.
高德峙。 在府北距四十五里。(고덕치。 재부북거사십오리。)
고덕치(고개)는 영월관아(부)에서 북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에 있다.
角斤峙。 在府西距十里。(각근치。 재부서거십리。)
각근치(角斤峙)는 영월관아(府)에서 서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다.
分德峙。 在府北距十里。(분덕치。 재부북거십리。)
분덕치(分德峙)는 영월관아(府)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다.
烽燧 봉수
樓亭 누정
觀風樓。 在客館東。 十二間。
錦江亭。 在府東二里, 錦獐江岸絶壁上。 宣德戊申知郡金復恒建, 歲久傾圮, 甲子郡守李野重建。
觀風樓。 在客館東。 十二間。
관풍루(觀風樓)는 객사 동쪽에 있으며 규모는 12칸이다.
錦江亭。 在府東二里, 錦獐江岸絶壁上。 宣德戊申知郡金復恒建, 歲久傾圮, 甲子郡守李野重建。
錦江亭。 在府東二里, 錦獐江岸絶壁上。
금강정은 관아 동쪽 2리, 금장강(錦獐江) 기슭의 절벽 위에 있다.
宣德戊申知郡金復恒建, 歲久傾圮, 甲子郡守李野重建。 선덕 무신년(1428년, 세종 10년)에 지군(知郡) 김복항(金復恒)이 건립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던 것을 갑자년(1684년, 숙종 10년)에 군수 이야(李野)가 중건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1684년(숙종 10)에 찬술한 금강정기(錦江亭記)에 의하면, “李侯子三。嘗立朝正言。廢錮累年矣。旣而時事更新。群賢彙征。而侯又抹摋於時世。與君平相棄之矣。영월군수(寧越郡守) 이무(李堥, 자 子三)는 일찍이 정언(正言)으로 조정에 나아갔으나 금고(禁錮)를 당한 지가 여러 해 되었다. ” 즉 영월군수 이야(李野)가 아닌 이무(李堥)이다.
寺刹 사찰
報德寺。 自官門北距五里, 在莊陵東。 左有泛鍾樓。 七十六間。
大乘菴。 自官門東距六十里。 十七間。
石臺菴。 自官門東距九十里。 十二間。
靈隱菴。 自官門東距九十里。 七間。
隱神菴。 自官門東距三十里。 六間。
興敎菴。 自官門南距三十里。 五間。
禁夢菴。 在報德寺上。 七間。
水雲菴。 自官門北距四十里。 三間。
報德寺。 自官門北距五里, 在莊陵東。 左有泛鍾樓。 七十六間。
보덕사(報德寺)는 관문(관아 문)에서부터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있으며, 장릉(莊陵)의 동쪽에 있다. 왼편에는 범종루(泛鍾樓)가 있다. (전체 건물은) 76칸이다.
大乘菴。 自官門東距六十里。 十七間。
大乘菴 (대승암)은 관문(고을의 관아 문)으로부터 동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규모는 17칸이다.
石臺菴。 自官門東距九十里。 十二間。
석대암(石臺菴) 암자는,
자관문동거구십리(自官門東距九十里): 관청 문(관아)으로부터 동쪽으로 90리 떨어져 있으며,
십이간(十二間): (건물의 크기가) 12칸이다.
靈隱菴。 自官門東距九十里。 七間。
영은암(靈隱菴)은 관문(관청 문)에서 동쪽으로 90리 떨어져 있다. 건물은 7칸이다.
隱神菴。 自官門東距三十里。 六間。
은신암(隱神菴)은 관문(官門)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6칸 규모이다.
*隱神菴 은신암 이란? '신령이 숨어 있는 암자'라는 뜻
興敎菴。 自官門南距三十里。 五間。
흥교암(興敎菴)은 관문(관청의 정문)으로부터 남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5칸 규모이다.
禁夢菴。 在報德寺上。 七間。
금몽암은 보덕사 위쪽에 있다. 일곱 칸 규모이다.
*이름의 유래
전설에 따르면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기 전, 대궐에 있을 때 꿈속에서 한 암자를 보았다고 한다. 이후 영월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이곳에 와보니 '꿈에서 본 그 암자'와 똑같이 생겨서 '꿈을 금한다( 禁夢, 또는 꿈속의 암자)'라는 뜻의 금몽암(禁夢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보덕사와의 관계
본래 신라 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지덕암(旨德庵)이었으나 단종의 원당(願堂, 명복을 빌던 법당)이 되면서 금몽암으로 불렸다.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고 장릉(莊陵)이 정비되면서 장릉을 수호하는 원찰로서 아래쪽에 크게 지은 절이 바로 지금의 보덕사이며, 금몽암은 현재 보덕사의 부속 암자로 등록되어 있다.
水雲菴。 自官門北距四十里。 三間。
수운암은 관문(관아의 문)에서부터 북쪽으로 40리 떨어져 있으며, 규모는 3칸이다.
古跡 고적
陸末淵。 在府東內直里六十里。 諺傳郡豪嚴庇家其傍, 放牝馬于淵側。 龍出而交, 産一駒, 步驟絶群。 淵後爲大水所湮。
於羅淵。 在水雲菴下。 世宗十三年, 有大蛇, 或游躍於淵, 或蜿蜒于渚。 一日遺蛇於石磧上, 長數十尺, 鱗甲如錢, 有兩耳。 邑人拾鱗以聞, 遣權克和驗之。 克和泛舟中淵, 暴風忽作, 竟莫得其跡。 後蛇亦不復見。
陸末淵。 在府東內直里六十里。 諺傳郡豪嚴庇家其傍, 放牝馬于淵側。 龍出而交, 産一駒, 步驟絶群。 淵後爲大水所湮。
陸末淵。 在府東內直里六十里。 육말연(陸末淵)은 관부(영월 관아) 동쪽 내직리(內直里) 60리 거리에 있다.
諺傳郡豪嚴庇家其傍, .민간에서 전해지기를, 고을의 부호인 엄비(嚴庇)가 그 못 곁에 살았는데,
放牝馬于淵側。 암말을 연못가에 풀어놓아 길렀다.
龍出而交, 産一駒, (어느 날) 용이 못에서 나와 암말과 교접하여 망아지 한 마리를 낳았는데,
步驟絶群。 달리는 모습이 무리 중에서 단연 뛰어났다.
淵後爲大水所湮。 이 연못은 훗날 큰 홍수가 나서 물에 잠겨 메워졌다.
*郡豪嚴庇 (군호엄비): '고을의 세력가(부호)인 엄비'라는 뜻. 영월 엄씨(嚴氏) 가문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지역의 강력한 토착 세력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牝馬 (빈마): 암말을 뜻한다.
步驟絶群 (보취절군): 걸음걸이와 달리는 기상이 다른 말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는 의미로, '용마(龍馬)'의 탄생을 묘사한다.
大水所湮 (대수소인): '큰물(홍수)로 인해 메워진 바가 되었다'는 뜻, 현재는 지형의 변화나 홍수로 인해 연못이 사라졌음을 기록한 것이다.
於羅淵。 在水雲菴下。 世宗十三年, 有大蛇, 或游躍於淵, 或蜿蜒于渚。 一日遺蛇於石磧上, 長數十尺, 鱗甲如錢, 有兩耳。 邑人拾鱗以聞, 遣權克和驗之。 克和泛舟中淵, 暴風忽作, 竟莫得其跡。 後蛇亦不復見。
於羅淵。 在水雲菴下。어라연은 수운암 아래에 있다.
世宗十三年, 有大蛇, 或游躍於淵, 或蜿蜒于渚。세종 13년에 큰 뱀이 있었는데, 어떤 때는 못(연못)에서 헤엄치며 뛰놀고, 어떤 때는 물가에서 꿈틀거리며 기어 다녔다.
一日遺蛇於石磧上, 長數十尺, 鱗甲如錢, 有兩耳。하루는 자갈밭(모래톱) 위에 허물을 벗어 놓았는데(또는 뱀이 누워 있었는데), 길이가 수십 척에 달했고 비늘은 엽전 같았으며 두 귀가 있었다.
邑人拾鱗以聞, 遣權克和驗之。고을 사람이 그 비늘을 주워 조정에 보고하니, (임금이) 권극화(權克和)를 보내 이를 조사하게 했다.
克和泛舟中淵, 暴風忽作, 竟莫得其跡。권극화가 못 한가운데로 배를 띄우자 갑자기 폭풍이 불어닥쳐, 끝내 그 흔적을 찾지 못했다.
後蛇亦不復見。그 뒤로는 뱀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鎭堡 진보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함경도(咸鏡道)ㆍ평안도(平安道)의 북방(北方) 변경(邊境)에 있던 각 진(鎭)을 이르는 말.
人物 인물
辛廉。 高麗恭愍朝, 官至漢城尹。
嚴守安。 以郡吏登第。 爲人有膽氣, 所至有能聲。 官至副知密直事。
辛永孫。 廉之曾孫。 本朝登第, 官至黃海道觀察使。 子仲琚、季琚具登第。
辛廉。 高麗恭愍朝, 官至漢城尹。(신렴。 고려공민조, 관지한성윤。)
신렴(辛廉)은 고려 공민왕 조에 관직이 한성윤(漢城尹)에 이르렀다.
*官至漢城尹 (관지한성윤): '관직이 한성윤(한양부윤)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고려 시대에는 한양이 '한양부(漢陽府)'로 불렸기에 정확한 당시 관직명은 한양부윤(漢陽府尹)이었으며, 조선 시대의 한성판윤이나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과 유사한 직책이다.
嚴守安。 以郡吏登第。 爲人有膽氣, 所至有能聲。 官至副知密直事。
엄수안。 이군리등제。 위인유담기, 소지유능성。 관지부지밀직사。
엄수안(嚴守安)은 고을의 아전(향리)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사람됨이 담력과 기개가 있었고, 부임하는 곳마다 일을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관직은 부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2. 구절별 핵심 의미와 역사적 배경
① 以郡吏登第 (고을의 아전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다)
배경: 엄수안(嚴守安)은 영월군(寧越郡)의 향리(아전) 출신이었다.
고려 시대 제도에 따라 향리의 자식 중 세 명 중 한 명은 관직에 나갈 수 있었기에 서리로 시작하여 원종 때 과거(문과)에 당당히 급제하였다. 이는 신분적 한계를 능력으로 극복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② 爲人有膽氣 (사람됨이 담력과 기개가 있다)
배경: 그의 '담기(膽氣, 대담한 기개)'는 《고려사》 열전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원나라 사신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려던 무신정권 권신 김준 일파의 음모를 간파하고, 이를 타이르고 저지하여 국가적 재앙을 막았다.
임연의 아들 임유무가 백성들을 강제로 섬과 산성으로 이주시키려 할 때도 원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이를 막아내는 등 권력자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단이 있었다.
③ 所至有能聲 (부임하는 곳마다 일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배경: 그는 동경(경주) 판관, 충청·전라·경상도 등지의 지휘사, 서경(평양) 유수 등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비록 권력층과 영합하여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걷어 연회를 베풀었다는 일부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국가의 행정 업무를 매우 신속하고 유능하게 처리하여 가는 곳마다 행정적 능력을 높이 인정받았다.
④ 官至副知密直事 (관직이 부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배경: 밀직사(密直司)는 고려 후기 왕명의 출납, 궁중 숙위, 군사 기밀을 담당하던 핵심 최고 기관(과거 중추원)이다.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는 이 밀직사의 고위 재상직(종2품~정3품 계열)으로, 지방 향리 출신으로서 중앙 정계의 요직과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음을 뜻한다.
엄수안(嚴守安)은 능력 위주의 고려 중·후기 사회에서 향리 출신이라는 배경을 딛고 대담한 기개와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동적인 인물이다.
辛永孫。 廉之曾孫。 本朝登第, 官至黃海道觀察使。 子仲琚、季琚具登第。
신영손。 염지증손。 본조등제, 관지황해도관찰사。 자중거、계거구등제。
신영손(辛永孫)은 신염(辛廉)의 증손자이다. 조선(본조)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황해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아들인 신중거(辛仲琚)와 신계거(辛季琚)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忠臣 충신
嚴興道。 本朝本郡戶長。 端廟運訖, 興道哭泣備棺, 翌日率吏民營葬。 其族黨懼有禍, 爭止之。 興道曰“爲善被禍, 吾所甘心”云云。 肅廟二十五年戊寅, 追贈工曹佐郞。 今上十九年壬戌, 加贈工曹參議, 三十五年戊寅, 加贈工曹參判。 己卯夏, 因傳敎, 旌門自淸州移建于彰節祠南。
엄흥도는 본조(조선) 본군(영월군)의 호장(戶長)이었다. 단종의 국운이 다하자(서거하자), 엄흥도는 통곡하며 관을 마련했고 다음 날 아전과 백성들을 이끌고 장례를 치렀다. 그의 친족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앞다투어 그를 말렸다. 이에 엄흥도가 말하기를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다면 나는 달게 받겠다"라고 하였다. 숙종 25년(기해년, 1699년)에 공조좌랑으로 추증되었고, 금상(영조) 19년(임술년, 1742년)에 공조참의로 가증되었으며, 영조 35년(무인년, 1758년)에 공조참판으로 가증되었다. 기묘년(1759년) 여름, 왕의 전교(명령)에 따라 정문(旌門, 정려문)을 청주에서 창절사(彰節祠) 남쪽으로 옮겨 세웠다.
孝子 효자
辛永淑。 高麗朝。 丁母憂, 啜粥終三年。
고려 시대의 인물인 신영숙(辛永淑)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을 마시며 상례를 온전히 마쳤다.
*丁母憂 (정모우): '어머니의 상(장례)을 당하다'라는 뜻의 전통 관용구이다.
(丁은 만날 정, 憂는 근심 우 자로 상사(喪事)를 뜻함)
*啜粥終三年 (철죽종삼년): '미음(죽)을 마시며 3년 상을 마쳤다'라는 뜻이다.
啜(마실 철): 마시다, 훌쩍이다. 粥(죽 죽): 미음이나 죽. 終(마칠 종): 끝내다, 완수하다.
三年(삼년): 유교식 전통 부모상 기간인 3년상(만 27개월)을 의미한다.
💡 문맥적 의미와 역사적 배경
유교 문화권에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거친 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화려한 음식을 멀리한 채 오직 미음(죽)만 먹으며 묘소 옆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것은 최고의 효행으로 여겨졌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불교적 풍습이 강해 3년상을 엄격하게 지키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이처럼 유교식 예법에 따라 '철죽종삼년(啜粥終三年)'을 행한 인물들은 가문의 영광으로 기록되거나 나라에서 효자 정문(旌門)을 받아 역대 문헌에 이름이 남게 되었다.
烈女 열녀
允分。 本朝。 事跡逸。
㗡之。 日守林莫山妻也。 夫死, 謂人曰: “吾亦從死, 穿壙須闊。” 葬夫日, 梳沐更衣, 縊殯側。 中廟朝命旌閭。
允分。 本朝。 事跡逸。(윤분。 본조。 사적일。)
직분(역할)은 타당하나, 우리나라(조선 또는 고려)의 역사 기록에서 그 구체적인 행적(사적)이 누락되어 사라졌다.
㗡之。 日守林莫山妻也。 夫死, 謂人曰: “吾亦從死, 穿壙須闊。” 葬夫日, 梳沐更衣, 縊殯側。 中廟朝命旌閭。 조선 중종 때의 대표적인 열녀인 일수림(日守林) 막산(莫山)의 아내에 대한 기록으로 이 구절은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정절을 지킨 여성이 국가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은 사실을 담고 있다.
㗡之。 (힐지)'힐지(㗡之)'는 사람의 이름(성명).㗡 (음역자 잇), 之 (갈 지) , 사람의 순우리말
日守林莫山妻也。 (일수림막산처야)일수림(日守林) 지방에 사는 막산(莫山)의 아내이다.
夫死, 謂人曰: “吾亦從死, 穿壙須闊。” (부사 위인왈 오역종사 천광수활)남편이 죽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 또한 따라 죽을 것이니, 무덤의 광중(시신을 묻는 구덩이)을 파되 모름지기 넓게 파라." 하였다.
葬夫日, 梳沐更衣, 縊殯側。 (장부일 소목경의 액빈측)남편을 장사 지내는 날, 머리를 빗고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빈소 곁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中廟朝命旌閭。 (중묘조명정려)중종(中廟) 조정에서 명을 내려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마을 정문에 정문이나 정표를 세우던 일)를 가문하게 했다.
〔新增〕 孝子 〔신증〕 효자
嚴敏道。 天性至孝。 四歲失怙, 號擗如成人。 奉母至誠, 定省惟勤, 甘旨不匱, 未離側。 病篤禱天, 得蘇者三。 旣沒, 廬墓啜粥。 肅廟朝戊子命旌閭。
조선 시대의 효자 엄민도(嚴敏道)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타고난 효성으로 어머니를 지극히 모셔 숙종 재위 시절 정려(효자문)를 받았다는 내용.
엄민도(嚴敏道)는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失怙) 성인처럼 가슴을 치며 소리 내어 울었다(號擗). 어머니를 받듦에 지극 정성을 다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살피는 문안 인사(定省)를 오직 부지런히 하였으며, 맛있는 음식(甘旨)이 부족함이 없게 하였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하늘에 기도를 올려 세 번이나 살아나시게 했다(得蘇者三).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며(廬墓) 미음만을 마셨다(啜粥). 숙종(肅廟) 조정 무자년(1708년)에 정려(旌閭)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문장별 상세 풀이
嚴敏道, 天性至孝. 엄민도는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四歲失怙, 號擗如成人.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성인처럼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失怙(실호): 아버지를 잃음 (아버지를 의지할 '호'라 부름).
號擗(호벽): 소리 내어 울부짖고(號) 가슴을 치다(擗).
奉母至誠, 定省惟勤, 甘旨不匱, 未嘗離側. 어머니를 받듦에 지극정성을 다했고,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오직 부지런히 했으며, 맛있는 음식을 거르지 않고 늘 풍족하게 대접했고, 일찍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定省(정성): 밤에 잠자리를 정하고(定) 아침에 안부를 살핀다(省)는 뜻으로, 부모에게 드리는 아침저녁 문안 인사.
甘旨(감지): 맛 좋은 음식.
不匱(불궤): 핍절되지 않음, 부족함이 없음.
病篤禱天, 得蘇者三.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지자 하늘에 기도하여, (어머니가) 다시 깨어나 살아나신 것이 세 번이나 되었다.
得蘇(득소): 깨어남을 얻다, 다시 살아나다.
旣沒, 廬墓啜粥.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살며 미음을 마셨다(3년 상을 치름).
廬墓(여묘): 부모의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살며 무덤을 지키는 것.
啜粥(철죽): 미음이나 얇은 죽을 마심 (상주로서 소박하고 절제된 음식을 먹음).
肅廟朝戊子命旌閭. 숙종(肅廟) 대(朝) 무자년(1708년)에 정려를 내리도록 명했다.
肅廟(숙묘): 조선 제19대 왕 '숙종'을 뜻함.
戊子(무자): 숙종 34년(1708년)에 해당함.
旌閭(정려):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붉은 문(홍살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
烈女 열녀
南氏。 士人尹昌祿妻也。 夫溺水, 南氏必欲從死, 而有遺腹, 舅姑泣止之。 南氏回心養兒, 嫁女娶婦, 舅姑亦終, 南氏遂沈水死。 今上癸酉命旌閭。
남씨는 선비 윤창록(尹昌祿)의 아내이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남씨는 반드시 따라 죽으려고 했으나 배 속에 아이(유복자)가 있었다. 시부모(舅姑)가 울면서 그녀를 만류했다. 남씨는 마음을 돌려 아이를 키우고,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시부모의 상(喪)까지 다 마친 뒤에, 남씨는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지금 임금(今上) 계유년(癸酉年)에 명을 내려 정려(旌閭)를 세워주었다.
핵심 내용 요약 및 분석
인물: 선비 윤창록의 아내 남씨
사건: 남편이 익사하자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부모의 만류와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삶을 연명함.
유교적 가치 실현: 자녀를 양육하여 혼인시키고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孝)'와 '의(義)'를 먼저 다함.
최종 선택: 가족에 대한 의무를 모두 마친 후, 남편을 향한 '절개(節)'를 지키기 위해 과거 남편이 죽었던 방식 그대로 물에 투신하여 순절함.
국가의 포상: 그녀의 숭고한 절개를 기리기 위해 왕이 직접 정려문(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동네에 세우던 붉은 문)을 내림.
주요 한자 및 어휘 풀이
士人(사인):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遺腹(유복): 아버지가 죽을 때 어머니의 배 속에 남아 있던 아이(유복자).
舅姑(구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즉 시부모를 통틀어 이르는 말.
今上(금상): 현재 재위 중인 왕.
癸酉(계유): 역사적 배경에 따라 구체적인 연도가 결정되는 간지(특정 왕대의 계유년).
旌閭(정려):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높이 사서 국가에서 마을에 정문(紅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이 문언은 유교적 지조와 가문 내부의 책임감을 동시에 완수한 조선 시대 여성의 전형적인 열녀상(烈女像)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烈女 열녀
金氏。 士人洪禹輔之妻也。 己巳十月初八日, 大虎當門, 攫去禹輔。 金氏挺身躍出, 奪取夫屍。 虎捨其夫, 囕死金氏。 事聞, 今上朝命旌閭。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등에 기록되었을 법한 열녀(烈女) 김씨의 정려(旌閭)에 관한 기록이다.
김씨(金氏)는 선비 홍우보(洪禹輔)의 아내이다.
기사년(己巳年) 10월 초여덟 날, 큰 호랑이가 문 앞에 나타나 홍우보를 움켜쥐고 달아났다.
김씨가 몸을 떨쳐 뛰어 나가 남편의 시신을 빼앗았다.
호랑이가 남편을 버려두고 김씨를 물어 죽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지금의 임금(주상)께서 명을 내려 정려(정문)를 세워주었다.
선성 김씨 열녀각(宣城金氏孝婦閣) *의성(宜城)
● 시대 : 조선시대
● 소재지 : 영월군 북면 공기2리 855전.빼골
● 문의처 : 영월문화관광 1577-0545
● 비문(碑文) : 烈女宣城金氏之門
정문은 숙종 44년(1781년) 2월에 건립되었다.
숙종 때 내려진 원래의 정문은 “烈女學生洪禹輔妻孺人宣城金氏之門 上之四十四年二月命旌”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현재의 정문에는 “烈女宣城金氏之門”이라고 쓰여 있다.
2. 주요 한자 및 어구 풀이
士人(사인):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나 유학자를 뜻한다.
己巳(기사): 육십갑자 중 하나로, 사건이 일어난 해를 나타낸다.
攫去(확거): 움켜쥐고 가버리다.
挺身(정신): 몸을 떨치고 나서다.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있게 나서는 모습.
囕(람): 물다, 삼키다.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 죽였음을 뜻한다.
事聞(사문): 사건의 전말이 임금에게 보고되다.
今上(금상): 당시의 임금(현재 재위 중인 왕)을 높여 부르는 말.
朝命(조명): 조정의 명령.
旌閭(정려):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붉은 문(정문)을 세우던 일.
3. 문맥적 핵심 요약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어 남편의 시신을 찾아왔고, 그 과정에서 호랑이에게 목숨을 잃은 김씨의 숭고한 절개와 희생을 기려 국가에서 포상(정려)을 내렸다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조선 시대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는 일화이다.
孝婦 효부
崔氏。 士人洪處寬妻也。 天性勤儉貞一。 舅沒姑老, 事之盡誠。 姑病方篤, 嘗糞以驗差劇。 荒年盜起嘯聚突入, 負姑免禍。 事聞給復。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등에 기록된 열녀(또는 효부) 최씨의 이야기이다.
💡"최씨는 선비 홍처관의 아내이다.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정숙하고 한결같았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가 늙자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
시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똥을 맛보아 병세가 나아지는지 악화되는지를 시험하였다.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일어나 무리를 지어 갑자기 돌진해 오자, 시어머니를 등에 업고 화를 면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복호(給復, 세금이나 부역을 면제해 주는 일)를 받았다.“
🔍 핵심 내용 및 역사적 맥락
단정하고 검소한 성품: 사대부가(士人)의 아내로서 유교적 덕목인 '근검정일(勤儉貞一)'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상분(嘗糞)의 효행: 시어머니의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확인하는 행동은 전통 사회에서 극진한 효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당도가 높으면 병이 중하고, 쓰면 회복될 징조로 보았다.
전란 및 재해 속의 구출: 흉년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고 도적이 들끓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시어머니의 안위를 먼저 챙겨 업고 피난했다.
국가의 포상(급복): 유교적 효행과 정절을 장려하던 조선 왕조는 이 사실을 보고받은 뒤, 해당 가문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급복)해 주며 표창했다.
旱田 한전
五百四十八結六十一負二束。 己卯結。
水田 수전
三十九結二十八負九束。 己卯摠。
旱田 한전 : 五百四十八結六十一負二束。 己卯結
밭[旱田]은 548결(結) 61부(負) 2속(束)이며, 기묘년(己卯年)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토지[結]이다.
조선 시대의 독특한 토지 면적 및 세금 부과 단위인 결부법(結負法)에 따른 기록이며, 주요 어휘와 단위의 상세한 의미는 아래와 같다.
1. 주요 어휘 해석
旱田 (한전): 가뭄 한(旱) 자를 써서 물을 대지 않고 작물을 기르는 '밭'을 의미한다. (반대로 논은 水田 또는 水癓으로 표기한다.)
己卯結 (기묘결): 특정 기묘년(己卯年)에 새로 측량하거나 파악하여 세무 장부(양안)에 등록하고 실제 세금을 부과하는 토지 총량을 뜻한다.
2. 토지 단위(결부법) 이해
조선 시대에는 절대적인 면적이 아니라 '수확량'을 기준으로 토지 단위를 계산했다.
단위의 환산 관계는 다음과 같다.
결 (結 / 마지기): 가장 큰 단위이다. 1결은 100부이다.
부 (負 / 짐): 1부는 10속이다. (문장의 '六十一負'는 61부를 의미)
속 (束 / 묶음): 1속은 10총(把)이다.
(문장의 '二束'은 2속을 의미) 즉, 문장에 기록된 밭의 총면적(세금 부과 기준)은 정확히 548결 61부 2속이 된다.
水田 수전
三十九結二十八負九束。 己卯摠。
논(수전)은 39결 28부 9속이다. 기묘년(1699년 또는 1759년 등)에 조사하여 합산한 총액이다.
2. 핵심 용어 풀이
조선 시대의 독특한 토지 결부법(結負法)과 세무 용어가 사용되었다.
水田 (수전):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논을 의미한다.
결부법 단위 (結·負·束): 조선 시대 토지 면적 및 세금 부과 기준 단위.
1결 = 100부, 1부 = 10속의 십진법 체계를 따른다.
結 (결): 가장 큰 단위 (39결)
負 (부/짐): 결의 아래 단위 (28부)
束 (속/묶음): 부의 아래 단위 (9속)
己卯摠 (기묘총): 기묘년에 파악한 전체 통계(摠額)라는 뜻.
조선 후기 관청에서는 특정 간지해(예: 1699년 기묘양전 등)에 조사된 수치를 기준으로 삼아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를 'ㅇㅇ총(摠)'이라고 불렀다.
進貢 진공 공물을 바침
人蔘, 紫草, 白茯苓, 赤茯苓, 紫草茸, 䓀莄, 柴胡, 石鍾乳, 茯神, 白芍藥, 川芎, 羌活, 獨活, 當歸, 牧丹皮, 五味子, 黃柏皮, 白扁豆, 何首烏, 兔絲子, 山査, 木桶, 茅香, 蓮翹, 山藥, 蟬殼, 瓜蔞芢, 葛花, 金銀花, 茵陳, 紫檀香, 鸎巢殼, 鼠, 鹿茸, 白淸, 石淸, 乾雉, 生雉, 生獐, 白芨。
조선시대 지방관이 왕실이나 조정에 바치던 진공(進貢) 품목들이다.
주로 약재(본초), 동물성 약재, 사치품(향나무), 그리고 특산 식품(꿀, 꿩, 노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한자 품목의 현대적 명칭과 의미를 알기 쉽게 분류하여 정리.
🌿 주요 한약재 (식물성)
人蔘 (인삼): 대표적인 보약재.
紫草 (자초): 지치 뿌리. 해열 및 해독 작용.
白茯苓 / 赤茯苓 / 茯神 (백복령 / 적복령 / 복신):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균체. 이뇨와 진정 작용.
䓀莄 (길경): 도라지 뿌리. 기침과 가래 치료.
柴胡 (시호): 시호 뿌리. 해열 및 간 기능 개선.
白芍藥 (백작약): 작약 뿌리. 통증 완화 및 보혈.
川芎 (천궁): 천궁 뿌리줄기. 혈액 순환 촉진.
羌活 / 獨活 (강활 / 독활): 뼈와 관절 통증(풍습) 치료 약재.
當歸 (당귀): 대표적인 보혈(피를 보충) 약재.
牧丹皮 (목단피): 모란 뿌리 껍질. 열을 내리고 혈액 순환 도움.
五味子 (오미자): 다섯 가지 맛이 나는 약용 열매.
黃柏皮 (황백피): 황벽나무 껍질. 해열 및 소염 작용.
白扁豆 (백편두): 흰까치콩. 소화기 강화 및 설사 멎춤.
何首烏 (하수오): 하수오 뿌리. 머리를 검게 하고 자양강장.
兔絲子 (토사자): 새삼의 씨앗. 신장 기능 강화.
山査 (산사): 산사나무 열매. 천연 소화제.
茅香 (모향): 향기가 나는 풀(모향). 제사나 향료로 사용.
蓮翹 (연교): 개나리 열매. 소염 및 해독 작용.
山藥 (산약): 마(참마)의 뿌리. 소화기와 기력 보강.
瓜蔞芢 (과루인): 하늘타리 씨앗. 가래를 삭이고 변비 치료.
葛花 (갈화): 칡의 꽃. 숙취 해소에 탁월.
金銀花 (금은화): 인동덩굴 꽃. 천연 항생제 역할.
茵陳 (인진): 인진쑥. 간 기능 개선 및 황달 치료.
🪵 향나무 및 식물 가공품
紫草茸 (자초용): 지치(자초)의 부드러운 싹이나 가공물.
木桶 (목통): 으름덩굴의 줄기. 이뇨 작용 약재.
紫檀香 (자단향): 자단나무 향목. 고급 향료 및 약재.
🪨 광물성 약재石
鍾乳 (석종유): 종유석. 뼈를 튼튼하게 하고 폐 기능 도움.
🐜 동물성 및 곤충류 약재
蟬殼 (선각): 매미 허물(선태). 가려움증이나 경련 치료.
鸎巢殼 (앵소각): 앵무새(또는 꾀꼬리) 둥지나 양귀비 껍질(앵속각)의 이칭으로 추정되는 약재.
鼠 (서): 쥐. 특정 전통 처방이나 약재로 사용.
鹿茸 (녹용): 사슴의 뿔. 대표적인 강장 약재.
🍯 토산 식품 (꿀 및 수렵물)
白淸 (백청): 흰 빛깔의 고급 천연 꿀.
石淸 (석청): 야생 돌 틈에서 채취한 귀한 꿀.
乾雉 (건치): 말린 꿩고기.
生雉 (생치): 잡은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꿩.
生獐 (생장): 신선한 노루 고기.
🩹 특수 약재白芨
(백급): 자란의 뿌리. 지혈 및 상처 회복.
糶糴 조적
元會一萬一千八百六十六石, 別會一千三百十七石, 賑穀四千一百四十一石, 營穀八百十五石。 十月開倉, 十二月封倉。
조적(환곡) 중 원회는 11,866석, 별회는 1,317석, 진곡은 4,141석, 영곡은 815석이다. 10월에 창고를 열고, 12월에 창고를 닫아 봉인했다.
2. 핵심 용어 및 명칭 해설
糶糴 (조적): 곡식을 빌려주고 거두어들이는 환곡(還穀) 제도를 의미.
봄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것을 '조(糶)',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어들이는 것을 '적(糴)'이라고 한다.
元會 (원회): 고을에 배당된 가장 기본적이고 정규적인 환곡의 원본(밑천)을 뜻한다. '원회환록' 또는 '원상(元上)'이라고도 부르며, 환곡 운영의 중심이 된다.
別會 (별회): 정규 환곡인 원회 외에, 특정 목적이나 필요에 따라 추가로 구분하여 비축·운영한 환곡이다.
賑穀 (진곡): 흉년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백성들을 구제(진휼)하기 위해 특별히 보관하던 구휼용 곡식.
營穀 (영곡): 지방 군사 및 행정을 총괄하는 감영(병영·수영 등)에서 관리하거나 그 자금 마련을 위해 고을에 배정해 둔 곡식.
石 (석/섬): 곡물의 부피를 나타내는 전통 단위로, 한 섬을 의미.
十月開倉 十二月封倉 (10월개창 12월봉창): 가을 수확기가 끝난 후 10월부터 백성들에게 곡식을 거두어들이거나 유통하기 위해 창고를 열고, 일정이 마무리된 12월에 창고를 다시 닫아 엄격히 봉인(잠금)했다는 뜻. 당시 환곡의 수납 및 마감 시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정 절차이다.
田稅 전세
大米十一石七斗, 田米五十六石十四斗, 太二十六石五斗。 二月收捧, 造船隻, 待水漲裝載。 自錦獐江路下, 流入西氷庫, 三日達于京江, 上納軍資倉。 大同、均稅同。
전세(田稅)는 대미(大米) 11석 7두, 전미(田米) 56석 14두, 태(太, 콩) 26석 5두이다.
2월에 거두어들여 배를 만들고, 물이 불어나기를 기다려 실어 나른다.
금장강(錦獐江) 길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 서빙고(西氷庫)로 유입되며,
3일 만에 경강(京江, 한강)에 도달하여 군자창(軍資倉)에 바친다.
대동(大同)과 균세(均稅)도 이와 같다.
"2. 핵심 내용 및 용어 해설
세금 품목 및 액수: 전세로 바치는 곡물은 대미(일반 쌀), 전미(밭에서 나는 쌀), 태(콩)로 나뉘며 각각 지정된 섬(石)과 말(斗)의 액수가 정해져 있었다.
수납 및 운송 시기: 매년 2월에 세금을 거두어들인 뒤, 겨울철 얼었던 강물이 녹고 봄비로 강물 수위가 높아지는 시기(待水漲 대수창)를 기다려 배에 실었다.
조운 경로: 금장강(錦獐江)에서 배를 띄워 한양의 서빙고 앞으로 들어왔다.
한양 경강까지는 물길로 총 3일이 소요되었다.
보관 기관: 수송된 세곡은 국가의 군사 비용과 군량미를 관리하는 국가 창고인 군자창(軍資倉)에 납부되었다.
동일한 규정: 전세뿐만 아니라 특산물 대신 쌀을 걷는 대동세(大同)와 군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걷던 균세(均稅)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2월에 수납되어 3일간의 물길을 통해 한양으로 상납되었다.
大同
大米四石五斗, 田米三十六石。 上納于宣惠廳。 儲置米四十石五斗。
大同 (대동): 대동세(大同稅) 항목이다.
大米四石五斗, 田米三十六石 (대미 4석 5두, 전미 36석): 대동세로 거둔 일반 대미(大米) 4섬(석) 5말(두)과 밭에서 거둔 전미(田米) 36섬이다.
上納于宣惠廳 (상납우선혜청): 대동법을 관장하는 중앙 관청인 선혜청(宣惠廳)에 바친(상납한) 액수이다.
儲置米四十石五斗 (저치미 40석 5두): 중앙으로 보내지 않고, 해당 지방 고을의 재정(또는 휼병, 진휼 등)을 위해 그 자리에 남겨두어 비축한 저치미(儲置米)가 총 40섬 5말이다.
수치적 의미와 특징
상납(上納)과 저치(儲置): 조선 후기 대동세는 크게 한양의 선혜청으로 보내는 '상납미'와 지방 고을의 운영비 및 진휼을 위해 남겨두는 '저치미'로 나뉘었다.
합계의 일치: 거두어들인 대미(4석 5두)와 전미(36석)를 합산하면 정확히 40석 5두(\(4.5 + 36 = 40.5\))가 된다. 즉, 이 고을에서 대동세로 징수한 쌀의 총량을 선혜청의 승인을 받아 전량 또는 상당 부분을 지역 내에 유치(저치)해 두었음을 보여주는 장부 기록이다.
均稅 균세
大米六石三斗, 太一石八斗, 結錢二百九十三兩五錢, 選武番錢一百四十六兩。
"균세(均稅)로 대미(大米) 6석 3두, 태(太, 콩) 1석 8두,
결전(結錢) 293냥 5전,
선무번전(選武番錢) 146냥이다.“
🔍 주요 용어 해설
균세 (均稅): 조선 영조 대에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면서 신설된 균역청(均役廳)에서 관리하던 세금 항목. 군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부족해진 재원을 메우고자 토지나 어염(魚鹽) 등에 부과했다.
大米 (대미): 껍질을 벗긴 쌀, 즉 흰쌀(정미)을 뜻한다. 당시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하는 표준 쌀이다.
石 (석) / 斗 (두): 전통 곡물 부피 단위. 1석(섬)은 10두(말). 즉, 대미 6석 3두는 6섬 3말을 의미한다.
太 (태): 콩(대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쌀과 함께 콩도 중요한 세금 납부 수단이었다.
結錢 (결전): 균역법 시행 이후 군포(軍布)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토지 1결(結)당 2냥씩 부과하던 토지세이다. 여기서는 해당 지역에서 징수된 결전의 총액이 293냥 5전임을 나타낸다.
選武番錢 (선무번전): 선무군관(選武軍官)들이 군대에 복무(상번)하는 대신 납부하던 군포(돈)를 의미한다. 균역법에 따라 부유한 양인(良人)층을 선무군관으로 선발하고 1년에 군관포 1필(또는 돈 2냥)을 징수했다.
俸廩 봉름
大米一百二十石, 田米二百六十三石五斗, 錢四百四十九兩, 柴二千五百丹, 炭七十九石, 雉二百四十首, 草二千六百丹, 鷄一千七百三十五首。
봉름(녹봉)은 대미(쌀) 120석, 전미(밭벼 쌀) 263석 5두, 엽전 449냥, 땔나무 2,500단, 숯 79석, 꿩 240마리, 풀(목초) 2,600단, 닭 1,735마리이다.
2. 주요 물품 및 단위 해설
조선 시대에는 관원에게 현물과 화폐를 섞어서 지급했다.
대미(大米): 품질이 좋은 일반 쌀.
전미(田米): 논이 아닌 밭에서 재배한 밭벼의 쌀.
석(石)·두(斗): 곡물 계량 단위로, 1석(섬)은 10두(말)이다.
냥(兩): 상평통보 등 조선 후기 쓰인 화폐의 기본 단위.
단(丹): 땔나무나 풀을 묶은 단(捆)을 의미.
수(首): 꿩(雉)이나 닭(鷄) 같은 조류를 세는 단위(마리).
軍兵 군병
騎兵八十一名, 步兵三十六名, 別騎兵二名, 砲保八十五名, 禦營軍保一百二十七名, 禁衛軍保二百六十三名, 禁軍保六名, 袱直保一名, 扈輦隊保五名, 內吹保九名, 樂工保十一名, 典設諸員保四十二名, 武學三十五名, 營牙兵七十名, 束伍軍一百二十七名, 莊陵守護軍九十名。
조선시대의 군병 기록을 번역하고 합산한 총 인원은 990명이다.
1. 한문 번역 및 군사 명칭각 항목의 뜻과 군사 배정 인원은 다음과 같다.
기병(騎兵): 말 탄 군사 81명
보병(步兵): 걸어 다니는 군사 36명
별기병(別騎兵): 특별 기병 2명
포보(砲保): 포병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 85명
어영군보(禦營軍保): 어영청 군사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 127명
금위군보(禁衛軍保): 금위영 군사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 263명
금군보(禁軍保): 국왕 친위대인 금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 6명
복직보(袱直保): 보따리를 관리하거나 당직을 서는 자의 보인 1명
호련대보(扈輦隊保): 국왕의 가마를 호위하는 부대의 보인 5명
내취보(內吹保): 궁중 내 취타수(군악대)의 보인 9명
악공보(樂工保):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의 보인 11명
전설제원보(典設諸員保): 장막을 치는 관청(전설사) 하급 관리들의 보인 42명
무학(武學): 무예를 배우는 학생 35명
영아병(營牙兵): 감영이나 군영에 소속된 사령과 군사 70명
속오군(束伍軍): 지방 군사 조직인 속오군 127명
장릉수호군(莊陵守護軍): 단종의 능(영월 장릉)을 지키는 군사 90명
2. 총 인원 계산 과정각 군병의 수를 산술식으로 합산하면 (81+36+2+85+127+263+6+1+5+9+11+42+35+70+127+90=990명)
✅ 계산 결과
조선시대 읍지(예: 영월 읍지 등)에서 확인되는 해당 구역의 총 군병 및 관련 보인의 인원은 990명이다.
[주-D001] 十 : 底本에는 뒤에 “口”가 더 있다. 本書 坊里 敍述 套式에 根據하여 削除하였다.
[주-D002] 阜 : 《關東志・寧越》 坊里에는 “邱”로 되어 있다.
[주-D003] 貢己 : 《寧越府邑誌》 坊里 및 《關東志・寧越》 坊里에는 “延平”으로 되어 있다.
[주-D004] 丘 : 《關東志・寧越》 坊里에는 “邱”로 되어 있다.
[주-D005] 忠淸 : 《寧越府邑誌》 道路 및 《關東志・寧越》 道路에는 “慶尙”으로 되어 있다.
[주-D006] 貢己 : 《寧越府邑誌》 道路 및 《關東志・寧越》 道路에는 “恭基”로 되어 있다. 아래 “貢己里”의 “貢己”는 同一하다.
[주-D007] 田 : 《寧越府邑誌》 道路 및 《關東志・寧越》 道路에는 “全”으로 되어 있다.
[주-D008] 淸 : 底本에는 없다. 《東覽・寧越郡》 建置沿革 및 《寧越府邑誌》 建置沿革에 根據하여 補充하였다.
[주-D009] 二十 : 《肅宗實錄》 25年 2月 10日에 “莊陵獻官, 宜以寧越郡守差定, 陞寧越爲府使, 利尊事體。”가 있다. 이에 根據할 때 “二十”은 “二十五”가 되어야 한다.
[주-D010] 萊 : 底本에는 “來”로 되어 있다. 《寧越府邑誌》 山川 및 本書 《寧越府》 山川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11] 泰 : 《東覽・寧越郡》 山川에는 “大”로 되어 있다.
[주-D012] 山 : 底本에는 없다. 《寧越府邑誌》 山川 및 《關東志・寧越》 山川에 根據하여 補充하였다.
[주-D013] 下 : 《寧越府邑誌》 山川 및 《關東志・寧越》 山川에는 “西”로 되어 있다. 以下 本縣 內에서 “下麓”의 “下”는 同一하다.
[주-D014] 獐 : 《東覽・寧越郡》 山川 및 《寧越府邑誌》 山川에는 “障”으로 되어 있다. 以下 本縣 內에서 “錦獐江”의 “獐”은 同一하다.
[주-D015] 淸冷浦 : 《東覽・寧越郡》 山川 및 《寧越府邑誌》 山川에는 “後津”으로 되어 있다.
[주-D016] 坡平 : 《東覽・寧越郡》 姓氏에는 “酒泉”으로 되어 있다.
[주-D017] 義城 : 《寧越府邑誌》 姓氏 및 《關東志・寧越》 姓氏에는 “羅州”로 되어 있다.
[주-D018] 在 : 底本에는 없다. 《寧越府邑誌》 陵寢 및 《關東志・寧越》 陵寢에 根據하여 補充하였다.
[주-D019] 陽 : 《寧越府邑誌》 陵寢에는 뒤에 “里鷄竹”이 더 있다. 《英祖實錄》 28年 11月 25日에도 “元孫胎峯, 定於江原道寧越府下東面正陽里鷄足山。”가 있다.
[주-D020] 壇 : 《寧越府邑誌》 壇廟 및 《關東志・寧越》 壇廟에는 “墻”으로 되어 있다.
[주-D021] 上 : 《寧越府邑誌》 壇廟 및 《關東志・寧越》 壇廟에는 “傍”으로 되어 있다.
[주-D022] 延平 : 《東覽・寧越郡》 驛院에는 “濟德”으로 되어 있다.
[주-D023] 陸末淵 : 底本에는 없다. 《東覽・寧越郡》 古跡 및 《寧越府邑誌》 古跡에 根據하여 補充하였다.
[주-D024] 羅 : 《東覽・寧越郡》 古跡에는 뒤에 “寺”가 더 있다.
[주-D025] 蜿蜒 : 底本에는 “宛然”으로 되어 있다. 《東覽・寧越郡》 古跡 및 《寧越府邑誌》 古跡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26] 所 : 底本에는 없다. 《東覽・寧越郡》 人物, 《寧越府邑誌》 人物, 《高麗史・嚴守安列傳》에 根據하여 補充하였다.
[주-D027] 五 : “戊寅”은 肅宗 25年이 아닌 24年이며, 《承政院日記》 肅宗 24年 12月 16日에 嚴興道를 郎官으로 褒贈하는 問題에 대해 論議하여 允許를 받는 內容이 나온다. 이에 根據할 때 “五”는 “四”의 誤字인 듯하다.
[주-D028] 壬戌 : 《英祖實錄》 19年 10月 8日에 “盛陳寧越戶長嚴興道忠烈之卓異, 請加贈其職。”이 있다. 이에 根據할 때 英祖 19年인 “癸亥”의 誤謬인 듯하다.
[주-D029] 五 : 《承政院日記》 英祖 34年 10月 4日에 “贈參議嚴興道, 一體配享云, 特爲亞卿贈職。”이 있다. 이에 根據할 때 “四”의 誤字인 듯하다.
[주-D030] 母憂 : 底本에는 “丑夏”로 되어 있다. 《東覽・寧越郡》 人物 및 《寧越府邑誌》 人物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31] 㗡 : 《東覽・寧越郡》 人物, 《寧越府邑誌》 人物, 《東國新續三綱行實圖・芿叱之自縊》에는 “芿叱”로 되어 있다.
[주-D032] 水 : 《寧越府邑誌》 人物 및 《關東志・寧越》 人物에는 뒤에 “死”가 더 있다.
[주-D033] 沈 : 《寧越府邑誌》 人物 및 《關東志・寧越》 人物에는 “投”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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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 輿地圖書
조선 영조 연간에, 왕명으로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55책으로 편찬한 {전국 읍지}.
『여지도서』는 1757년∼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이다. 읍지라고도 한다. 총 55책이며 필사본이다.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 진지 1개 등 313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 행정구역 중 39개 읍의 읍지가 누락되어 있다. 편찬된 지 200년이 지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편을 위해 왕명으로 각 읍에 읍지를 올려보내도록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읍지마다 거리와 방위 등이 정확히 기록된 대축척지도가 첨부되어 지도와 읍지가 밀접하게 결부돼 있고, 면·리 또는 읍별로 가호수와 남녀 인구수를 상세하게 기재한 점이 특징이다.
내용
55책. 필사본.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 監營誌 6, 兵營誌 7, 水營誌 3, 統營誌 1) 및 1개의 진지(鎭誌) 등 총 313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제1책∼제5책 : 경기도, 제6책∼제13책 : 충청도, 제14책∼제17책 : 강원도, 제18책∼제21책 : 황해도, 제21책∼제30책 : 평안도, 제31책∼제35책 : 함경도, 제36책∼제49책 : 경상도, 제50책∼제55책 : 전라도로 결책되어 있다.
당시의 행정구역을 상고하면 읍지가 수록되지 않은 결읍(缺邑)이 보이는데, 전라도 · 경상도 · 경기도 · 충청도 등지에서 39개읍의 읍지가 누락되었다. 경기도에서는 한성부(漢城府) · 개성부(開城府) · 파주목(坡州牧) · 고양군(高陽郡) · 적성현(積城縣) · 수원부(水原府) · 안성군(安城郡) · 양천현(陽川縣) · 김포군(金浦郡) 등 9개읍 및 경기도 총론 · 경기도지도 · 경기감영 · 병영의 지지, 충청도에서는 정산현(定山縣) · 온양군(溫陽郡) · 청안현(淸安縣) 등 3개읍의 읍지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전라도에서는 남원부(南原府) · 담양부(潭陽府) · 제주목(濟州牧) · 대정현(大靜縣) · 정의현(旌義縣) · 만경현(萬頃縣) · 임피현(臨陂縣) · 정읍현(井邑縣) · 전주부(全州府) · 익산군(益山郡) · 김제군(金堤郡) · 금산군(錦山郡) · 고부군(古阜郡) · 진산군(珍山郡) · 금구현(金溝縣) · 여산부(礪山府) 등 16개읍 및 전라도총론 · 전라도지도 · 감영 · 우수영 · 좌수영 · 병영의 지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울산부(蔚山府) · 양산군(梁山郡) · 영천군(永川郡) · 흥해군(興海郡) · 사천현(泗川縣) · 삼가현(三嘉縣) · 의령현(宜寧縣) · 하동부(河東府) · 산음현(山陰縣) · 안음현(安陰縣) 등 11개읍의 읍지가 결본이다.
각 읍지의 내용구성은 강역(疆域) · 방리(坊里 : 戶口 포함) · 도로(道路) · 건치연혁(建置沿革) · 군명(郡名) · 형승(形勝) · 성지(城池) · 관직(官職) · 산천(山川) · 성씨(姓氏) · 풍속(風俗) · 능침(陵寢) · 단묘(壇廟) · 공해(公廨) · 제언(堤堰) · 창고(倉庫) · 물산(物産) · 교량(橋梁) · 역원(驛院) · 목장(牧場) · 관애(關阨) · 봉수(烽燧) · 누정(樓亭) · 사찰(寺刹) · 고적(古蹟) · 총묘(塚墓) · 진보(鎭堡) · 명환(名宦) · 인물(人物) · 한전(旱田) · 수전(水田) · 진공(進貢) · 조적(糶糴) · 전세(田稅) · 대동(大同) · 봉름(俸廩) · 군병(軍兵) 등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편찬은 1757년 홍양한(洪良漢)이 임금에게 아뢴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팔도 감사에게 명을 내려 각 읍에서 읍지를 올려보내도록 하였다. 그 뒤 김응순(金應淳)과 이은(李溵)이 홍문관에 있을 때 이를 개수하였다고 하나, 현존하는 『여지도서』는 누락된 군현이 많고 결책 순서 등으로 보아 홍문관에 비치되었던 본이 아니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 읍지의 호구조의 기준 연도가 1759년(己卯帳籍)인 점으로 볼 때, 1760년 이후에 수집된 읍지들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의 편찬 목적은 편성된 지 270여 년이 지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수(改修) · 속성(續成)에 있었다. 『여지도서』는 『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하면서 방리 · 제언 · 도로 · 전결(田結 : 旱田 · 水田) · 부세(賦稅 : 進貢 · 糶糴 · 田稅 · 大同 · 均稅) · 군병(軍兵) 등의 항목이 첨가되어 사회 · 경제적인 내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16세기 후반이래 대두된 새로운 읍지 편찬의 경향을 정리하고 종합한 것으로 18세기 읍지의 종합적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방리 · 도로 · 부세에 관한 제 조항 및 각 읍 읍지의 첫머리에 수록된 채색지도이다. 일반적으로 읍지의 제일 첫머리에 기재하던 건치연혁조보다도 방리조를 앞에 위치시킴으로써 당시 읍지 편찬자들이 이를 중시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반 읍지의 방리조에는 면(또는 里)의 명칭과 위치를 기록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여지도서』에는 면 · 이 또는 읍별로 가호수[編戶]와 남녀 인구수를 상세하게 기재한 점이 특징이다.
『여지도서』에 보이는 또 하나의 변화는 도로조이다. 도로조는 이 시기에 신설된 항목으로서, 그 위치도 건치연혁조보다도 앞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항목 배열 순서 및 내용의 상세함을 통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도로가 중시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도로의 중요성이 커지고, 지역간의 교류가 증대되면서 지역간 및 지역내의 구체적인 유통망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조세 수취와 관련된 진공 · 조적 · 전세 · 대동 · 균세 · 봉름 등이 각각 독립 항목으로 설정되는 변화가 보인다. 조세량의 정확한 파악과 수납은 국가의 지방 통치력 및 중앙 재정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읍지에서 이에 관한 기록의 비중이 18세기 중엽 이후 점차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여지도서』에는 읍지 편찬의 역사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룩됨을 볼 수 있다. 각 읍의 첫머리에 각 읍별 채색지도가 부착되어 있는 점이다. 여지도(輿地圖)와 서(書)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여지도서』라는 서명을 붙일 정도로 지도가 중시된 것이다. 각 읍지마다 거리와 방위 등이 정확한 대축척지도가 첨부되어 지도와 읍지가 밀접하게 결부된다. 읍지의 내용을 지도로 도식화함에 따라 읍지의 내용에 정확성이 증가되고, 지도의 이용으로 당시 사람들의 공간적 인식에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여지도서』는 공시적 기록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전국에 걸쳐 동일한 시기에 작성된 읍지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8세기 중엽의 지방 사회를 전국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