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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삼공견문기/이재수 | | | 명사의좋은글 |
2012.05.21 2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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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삼공견문기(曲阜三孔見聞記)
2002년 1월 18일 금요일 음력으로 섣달 초엿새, 대한을 이틀 앞둔 셈 치고는 날이 참 포근하다. 햇볕도 좋고 바람도 없다. 나는 인천항에서 청도(靑島, 칭다오)로 떠나는 밤배에 몸을 실었다. 중국말은 모르지만 필담으로라도 뜻은 통할 성 싶고 중국음식을 싫어하지만 고추장과 통조림을 챙겨 넣었으니 허기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못 알아듣고 배를 곯는다 해도 나는 꼭 내 눈으로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에 가서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한 것이 수십 년 째다. 나는 가방 속에 옥편을 챙겨 넣으며 이런 나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얻어 오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배에 오르는 순간 이런 자신감은 얼어붙고 말았다. 난초 난(兰)자를 몰라서 내가 타고 갈 배의 이름조차 읽을 수 없었다. 배 안에서도 옳을 의(义)자나 무리 중(众)자, 모일 총(丛)자와 같은 기본적인 글자를 몰라서 안내문도 읽을 수 없었다. 간자를 공부하지 않은 탓이다. 청도시내 거리의 상점 간판도 못 읽는 내게 안내자는 곡부에 가면 다 잘 읽게 될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오히려 곡부에 가면 까막눈이 된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의 뜻을 곡부에 가서야 알았다.
곡부(曲阜, 취푸)는 중국 산동성의 성도 제남에서 남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맹부가 있는 추성에서 20킬로미터 정도 북방에 있는 일개 현이다. 주나라 초기에 주공의 아들 백금(伯禽)이 다스리던 땅으로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도성(都城)이었다. 노남(魯南, 루난) 구릉과 노서(魯西, 루시) 평원이 만나는 곳이며 인구 육십여 만 명 가운데 공 씨(孔氏)가 오분의 일이다. 연 평균 기온은 13℃, 평균 강수량은 666㎜이며 밀과 옥수수 면화 석탄이 많이 난다. 일찍이 소동파는 곡부를 두고‘옛날의 기풍이 남아있어 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글 읽는 소리가 거리에 넘친다.’고 했다. 지금도 이백이십여개의 각 급 학교에 학생 수만도 십삼만 팔천여 명이나 되는 학문의 고장이며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삼공(三孔, 싼쿵)의 소재지이다.
곡부 남문 근처에 삼공(三孔)이라 부르는 공묘(孔廟, 쿵먀오)와 공부(孔府, 쿵푸)가 있고 곡부 성북에 공림(孔林, 쿵린)이 있다. 공묘는 지성묘(至聖廟, 즈성먀오), 공림은 지성림(至聖林)이라고도 한다. 삼공의 주인이신 공자(孔子)는 기원전 551년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8일, 1952년 중국정부 공식인정)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취읍(陬邑, 지금의 山東省 鄒縣)에서 칠십대의 노인이던 추읍 대부 숙량흘(叔梁紇, 紇이 이름 叔梁은 字)과 동료무사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던 이십 전의 안징재(顔徵在, 옌량짜이)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이복형인 맹피(孟皮)에 이어 둘째라는 뜻으로 버금 중(仲)자를 써서 자(字)를 중니(仲尼)라 했으며 이름은 구(丘)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따르면 숙량흘은 본처 시씨(施氏)와의 사이에 딸 아홉을 낳고 다시 장가들어 다리가 불편한 아들 맹피를 두었는데 가문을 이을 건강한 아들을 원해 안징재를 또 얻었다고 한다. 안징재는 곡부에서 약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니구산(尼丘山, 니치우산, 해발 340m)에 가서 기원한 후 공자를 낳았다. 공자가 세살이 되던 기원전 549년 숙량흘이 사망하자 안징재는 아들을 데리고 궐리(闕里, 췌리)로 이사하였다. 공자는 열일곱 살이던 기원전 535년 눈이 멀어버린 어머니마저 잃은 뒤 19세 때 송(宋)나라 올관씨(兀官氏)와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 伯漁)를 얻었다. 위사(委吏), 사직(司直)이라는 말단에서 시작하여 삼십 세에는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고 학문적으로도 성취하였다. 인망이 높아져 기원전 499년에는 대사구((大司寇, 현재의 법무부장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의 세도가였던 계손사(季孫斯)의 미움을 받아 더 이상 뜻을 펼 수 없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시켜 줄 어질고 현명한 군주를 찾아 수행제자들과 함께 기원전 496년 55세 되던 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십삼 년 동안 72명의 군주를 만나 인(仁)을 근본으로, 효(孝)와 제(悌)를 실천윤리로 하는 덕치주의를 역설하였으나 부국강병책으로 천하통일을 꿈꾸는 군주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갓집 개’처럼 박대 받고 죽음의 위협에도 시달리다 마침내 기원전 484년 6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를 기르고‘춘추(春秋)’를 편찬하며 경서를 정리하였다. 삼천이나 되는 제자를 가르쳐 육례(六藝)에 능통한 자만도 72인이나 되었다.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宗範)으로 삼고 있는‘논어(論語)’는 그의 언행을 모아 저술한 책이며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공자 말년의 가정과 개인사는 불행하였다. 기원전 483년 공자 69세 때 그의 외아들 이(鯉, 伯漁)가 나이 오십에 죽자 며느리는 아들 공급(孔扱, 子思)을 시부(媤父)에게 떠맡기고 서씨(庶氏) 집안으로 재가해버렸다. 다음해 기원전 482년에는 애제자 안회(顔回, 顔子, 子淵)가 32 세로 요절하여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噫! 天喪予! 天喪予!)”하며 크게 애통해 하였다. 다시 2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에는 공자보다 아홉 살 아래로 제자 중에 최 연장자이며 친구이기도 했던 자로(子路, 季路, 仲由) 마저 노나라 왕실의 계승분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고 유해가 젓갈로 담가졌다. 공자는 자로가 죽은 6개월 뒤인 이듬해 기원전 479년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묘(孔廟, 쿵먀오)는 공자를 기리는 사당이다. 역사적으로 수 천 년 동양학문의 조종지지이며 동양사상의 시원(始原)지지이다. 전 세계 이천여 개소의 공자사당 가운 데 역사와 규모가 단연 으뜸이다. 공묘 앞에 서니 가슴이 뛰었다. 짧은 식견에 시간조차 쫓기는 터이니 자세히 볼 수도 없고 보았어도 바로 본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없으며 많은 것을 들었으나 들은 것이 다 옳은 것도 아닐 터이다.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고 적은 것도 또 분명하다 할 수 없으니 이 기록이 장차 누가 될까 두렵다. 성인의 자취를 잠시 엿본 것만으로도 참람한 터이다.
공자 사후 1년 뒤인 기원전 478년에 노나라의 군주 애공(哀公)이 공자가 살던 집에서 제를 지내고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하던 행단(杏壇)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신 것이 공묘의 시작이다. 1년 뒤 주나라 경왕 12년에 애공이 공묘로 개축하여 제사를 올렸고 153년 동한 말의 환제가 처음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묘당을 지었으며 위나라 황초2년(221년) 공자가 거처하던 세 칸의 집을 사당으로 삼아 공자 생전에 쓰던 의관과 거문고, 수레, 책 등의 유품을 보관하여 공묘로 삼았다. 이후 이천오백여 년 동안 공묘에 향화가 끊어지지 않았다.
3개 공간이던 공묘는 공자의 위상이 크게 오른 서기 611년 수나라 때 대규모로 증축되고 송(宋)나라 진종 천희2년(1018)에 세 개 구역과 네 개의 뜰로 확장되었으며 묘 주변에 사백 개가 넘는 방들이 배치되었다. 금(金)나라 명창2년(1191)에 중수하였으나 1214년에 화재와 약탈로 묘가 파괴된 것을 원나라 성종 대덕4년(1300) 순제 지원2년(1336)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하면서 점차 확장되었다. 금(金), 원(元) 시기에 더욱 확장하고 명(明), 청(淸) 양 대에 걸쳐 앞 시대에 된 것을 중수 보수하면서 오늘날의 규모가 되었는데 청나라 옹정제는 친히 감독관을 파견하여 전후 6년간 3만 명의 장인을 동원하고 은자 십오만 칠천 냥을 들여 중수하였다. 그동안 열다섯 번의 큰 중수개선과 서른한 번의 대규모 개축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공묘는 중국에서 자금성(紫禁城, 쯔진청) 다음으로 규모가 큰 역사적 건물이다. 1499년 화재 이후 명나라 도성인 자금성을 본떠 남북 1.3㎞를 축으로 좌우대칭 장방형에 세 개의 전(殿), 한 개의 각(閣), 한 개의 단(壇), 세 개의 사당(祠堂), 두개의 당(堂), 두개의 서재, 466개의 방과 54개의 문으로 조성되었다. 여덟 군데에 출입문이 있고 아홉 개소의 정원이 있는데 세 번째 정원에서부터 외부와 차단된다. 그 공간 구조는 크게 외부(外部), 전부(前部), 후중부(後中部), 후동부(後東部), 후서부(後西部) 등 네 개 구역으로 되어있다.
기원전 205년 한 고조 유방이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공묘에 와서 제례를 지낸 이후 많은 황제들과 고관대작들이 전례로 따르게 되었다. 열두 명의 황제가 즉위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스무 차례 직접 공묘에 와서 제례를 지냈고 백여 명의 황제는 자신을 대행할 관리를 196번이나 파견하였다. 공묘는 웅혼 장대하고 역사적으로도 오래 되었으며 보존 상태가 온전한 건축물과 더불어 역사, 문화, 건축, 문장, 서화, 조각 등이 복합된 대형 박물관이다.
만인궁장(萬仞宮墻)은 곡부 고성(古城)의 정 남문으로 공묘의 외부(外部)가 시작되는 곳이다. 반원형의 성벽에는 원래 명나라 때의 서법가 호찬종(胡纘宗)이 공자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아 쓴‘만인궁장(萬仞宮墻)’이란 편액이 있었는데 현재의 것은 청 건륭제가 친필을 내려 대체한 것이다. 만인궁장의 높이는 약 7m, 둘레 4km이고 성벽 앞에는 약 3m 깊이의 해자(垓字)가 있다. 명나라 만력22년(1595년)에 추가 건설된 앙성문(仰聖門)은 제왕의 거동이나 큰 행사가 있을 때에만 사용되었다. 앙성문 앞 100여 미터는 늙은 잣나무가 늘어섰는데 지성(至聖)의 혼령이 제사를 받으러 납시는 공묘신도(孔廟神道)다.
신도(神道) 끝에 공묘의 전문(前門)이며 전부(前部)가 시작되는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이 있다. ‘금성옥진(金聲玉振)’은 지덕을 갖추어 완성된 인격이라는 뜻이며 맹자가 공자를 찬양하여 ‘공자는 선대 선인을 집대성하였다. 집대성은 금성옥진이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금성옥진방은 명나라 가정17년(1538)에 세웠는데 불길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형상화한 네 개의 팔각석주에 앙련(仰蓮)을 높이 얹어 그 위에 제후(諸侯)에게만 허락된 조천후(朝天吼)라는 석수상을 남향으로 놓고 호찬종(胡纘宗)이 쓴 글씨로 편액을 건 석문이다. 이런 패방은 석주를 세워 들보를 올린 모습이 자제와 치장이 다를 뿐 대체로 우리나라의 홍살문이나 일주문과 비슷한 모양이다. 문안과 문밖, 성속(聖俗)을 나누는 경계의 표지(標識)이기도 하고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다는 위엄의 상징이기도 하며 장식적인 기능도 있는 것이다. 금성옥진방을 지나면 공묘의 전부(前部)가 펼쳐진다.
공묘의 제1문은 건륭제가 편액을 쓴 영성문(楹聖門)이다. 문을 떠받치는 네 개의 화표석에 석수(石獸)가 아니라 인물상을 얹었다. 영성문을 지나면 공자의 도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표현한 태화원기(太和元氣)방이 있다. 그런데 금성옥진방은 붉은 글씨로, 영성문 편액은 노란 글씨로 태화원기방은 푸른색 글씨로 각기 달리 써 놓았다. 다시 성스러운 영역으로 들어선다는 지성묘(至聖廟)방을 지나면 공묘의 제2문인 성시문(聖時門)을 만난다.
성시문은 명나라 때 건설되었으며 문의 높이 12m 가로 23m 세로 11m에 세 개의 궁륭형 문을 내고 문의 앞뒤로 용을 조각한 단폐조각이 있다. 문의 이름은 청 옹정8년 1730년 ‘맹자 만장하(萬章下)’편의 ‘성지시자야(聖之時者也)’에서 따온 것이다. 이 문은 황제가 방문했을 때나 큰 행사가 있을 때, 또는 연성공(衍聖公)의 탄생 시에만 열었고 보통 때는 성시문의 좌우 곁문인 쾌도문(快睹門)과 앙고문(仰高門)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성시문 안은 공묘에서 가장 넓은 정원인데 측백나무 과에 속하는 수백 년 된 원백(圓柏)이 숲을 이루어 옅은 향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이 정원을 지나면 바로 옥대하(玉帶河) 벽수교(璧水橋)에 닿는다. 맑지도 않은 물이 수로를 따라 흐르는 듯 마는 듯, 그래도 옥대하라니 허장성세가 놀랍고 그 위에 놓인 다리조차 이름이 아깝다.
벽수교 건너 있는 공묘의 제3문 홍도문(弘道門)은 건륭제가 현판을 썼는데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는 논어 위령공편에서 따온 이름이다. 홍도문을 지나면 공묘의 제4문인 대중문(大中門)이 나타난다. 대중문은 송나라 때의 공묘정문으로 공묘의 첫 문이었으나 명(明) 대에 공묘가 확장되면서 네 번째 문이 되었는데 중화문(中和門)이라고도 한다. 가로 다섯 칸으로 성벽이 없는 문이며 녹색기와를 얹었다. 다시 제5문 동문문(同文門)을 넘으면 뜰에는 명나라 홍무(洪武), 영락(永樂), 성화(成化), 홍치(弘治) 등 여러 연간에 세운 돌비석이 있다.
동문문을 들어서서 바로 오른 쪽에 비정 없이 서있는 것이 공묘에서 문장과 글씨가 가장 빼어나다는 성화비(成化碑)이다. 성화비는 명나라 성화4년(1468) 헌종이 세운 것으로 3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모든 비문이 해서(楷書)로 쓰여 졌고 두 번째는 공자를 변론하는 내용이며 세 번째는 비석을 받치고 있는 것이 거북이 아니라 비희(贔屭)라는 점이다. 비희는 용왕의 여덟 번째 아들로 무거운 것을 등에 질 수 있는 괴력을 지닌 상상의 동물이라고 한다. 성화비 왼쪽에 명 효종 주우탱(朱祐樘)이 세운 홍치비(弘治碑)가 있다. 원래는 비정이 있었는데 비문에 ‘금원입주중원(金元入主中原), 강상소지지시(綱常掃地之時)’라는 구절이 청 건륭황제를 노하게 하여 없애버렸다고 한다.
성화비 북쪽에 명나라 홍무4년(1371) 주원장이 공자를 숭배하기 위해 세운 홍무비(洪武碑)가 있고 홍무비 왼쪽, 홍치비 북쪽에 영락비(永樂碑)가 있는데 주원장의 네 째 아들인 성조 주체(朱棣)가 영락15년(1417)에 공묘를 수리하면서 세운 것이다. 성조가 직접 비문을 썼으며 ‘중니일월야(仲尼日月也) 무득이유언(無得而踰焉)’등과 같이 공자를 예찬하는 내용이다. 비정(碑亭)이 없는 남쪽석비도 부자간에 세웠고 비정이 있는 북쪽석비도 부자간에 세웠는데 둘 다 동쪽에 세운이가 아버지고 서쪽에 세운이가 아들이다.
여기 동문문 좌우행랑채 부근에 있는 한비(漢碑) 13기를 비롯한 800여기의 비석군을 공묘비림(孔廟碑林)이라고 한다. 공묘비림(孔廟碑林)은 시안비림, 서창 지진비림, 고웅 남문비림과 함께 중국 4대 비림(碑林)의 하나로 꼽는다. 서예사에서 후한시대 예서체(隸書體)의 전범으로 꼽는 석비들이 다 여기 있다. 노나라 재상 을영(乙瑛)이 공자묘에 관리자를 두게 한 내용을 14자 씩 18행으로 쓴 을영비(乙瑛碑), 진시황제의 폭거 이후 허물어진 공자묘를 수리하고 예기(禮器)를 정비한 한래(韓勑)의 공덕을 기린 예기비(禮器碑), 승상 사신(史晨)이 공자묘에 제사를 지낸 것을 기념하여 세운 사신비(史晨碑) 등이 특히 유명하다. 육조시대의 대표적인 해서비(楷書碑) 장맹룡비(張孟龍碑)도 여기 있다.
고비(古碑)를 둘러보고 뜰을 지나면 삼층 누각으로 지은 공묘의 제6문 규문각(奎文閣)이 있다. 공묘 삼대건축물의 하나이며 중국 고대 십대명루의 하나이기도 한 규문각은 역대 황제들이 하사한 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높이 23.35m, 가로 30.1m, 세로 18m의 삼층 건물을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목재로 지었는데 이층에 난간이 있다. 송(宋)나라 때인 1018년에 장서루(藏書樓)라는 이름으로 건축되었는데 금나라 때인 1191년에 중수하면서 규문각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규문각은 공자의 위상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름이다. 중국고대천문학은 하늘의 별을 28개의 무리로 나누고 그 중에 문관의 우두머리이자 문장(文章)을 주관하는 별자리의 이름을 ‘규(奎)’라 하였다. 공자가 곧 규(奎)라는 것이다. 명나라 효종 홍치17년(1504)에 보수하고 1985년에 개수하였으며 현판글씨는 청 건륭제의 친필이다. 명, 청 때는 이곳에 7품 관리를 파견하여 서적을 관리하게 했다고 한다.
규문각 북쪽 정원에는 황금색 기와를 얹은 열세개의 비정이 2열로 늘어서 있는데 이를 십삼 비정(十三碑亭)이라고 한다. 십삼 비정은 금대(金代) 2정, 원대(元代) 2정, 청대(靑代) 9정 등 모두 십삼 정인데 비각(碑閣) 안에 당, 송, 금, 원,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53기의 비석이 있다. 대부분 황제의 시호가봉 및 공자 제축 공묘중수 또는 공자의 덕을 칭송하고 추모하는 내용이다. 이 중에 가장 오래 된 것은 688년 당 고종이 세운 것이고 가장 큰 것은 청나라 강희제가 북경 서산에서 650킬로미터를 운반해 와 세운 무개 65톤의 석비다.
십삼비정(十三碑亭)이 있는 규문각 뜰 북쪽에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금성문(金聲門)과 승성문(承聖門)이고 서쪽에 있는 것은 옥진문(玉振門)과 계성문(啓聖門)이다. 한가운데 폭이 5칸이고 황색기와를 이은 문이 공묘 본전으로 드는 일곱 번째 대성문(大成門)이다. 대성문은‘견아교착(犬牙交錯), 구심투각(勾心鬪角)’이라는 독특한 건축구조로 12개의 석주를 썼는데 중앙의 네 개 기둥에는 용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대성문서부터는 건축물들이 좌, 중, 우 삼열로 배치되어 있다. 서쪽 계성문(啓聖門)으로 들어가면 공자의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서부이고, 동쪽 승성문(承聖門)으로 들어가면 공자의 옛집이 있는 후동부이다. 가운데 높고 큰 대성문이 공묘의 후중부이며 심장부인 행단(杏壇)과 대성전(大成殿), 침전(寢殿)으로 통하는 문이다.
대성문을 넘으면 대성문과 침전 가운데 행단이 있고 행단과 침전 가운데 대성전이 있다. 이런 공묘의 심장부를 대성문과 침전이 마주하며 중국에서 가장 긴 곁채의 하나라는 동, 서무(東西廡,행랑, 곁채)가 둘러싸고 있다. 대성문 오른쪽에 공자가 손수 심었다는 회(檜)나무가 있고 나무 옆에 명 만력28년(1600) 양광훈(楊光訓)이 쓴 ‘공자수식회(孔子手植檜)’비가 있다. 회나무란 우리나라에서는 편백(扁柏)이라고 하며 노송나무라고도 한다. 처음에 세 그루를 심었으나 한 그루만 살아남았는데 청나라 때 불타 죽고 옹정 연간에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다시 자란 것이라고 한다. 죽은듯하다가 살아나기를 세 차례나 반복하며 공부와 왕조의 운명을 예견하는 것처럼 보여‘삼고삼영(三枯三榮)’이라 한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중앙에 행단(杏壇, 싱탄)이 있다. 행단은 2층 헐산식 지붕이고 황색 기와를 얹었다. 단 앞에 금나라 때 만든 석재 향로가 있으며 단 내에는 청나라 건륭황제 고종이 쓰고 세운 행단찬(杏壇贊) 비가 있다. 공자는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대문헌의 정리와 후세교육에 마지막 남은 열정을 바쳤는데 바로 이 행단이 중심활동구역이었다. 송나라 진종 천희 2년(1018)에 대성전을 북쪽으로 옮겨 확장하면서 원래 공자고택의 교수당이었던 이 터에 단을 만들고 살구나무를 심어 행단이라 했는데 금나라 시대에 비로소 단 위에 건축물을 세우고 승안(承安)무오년(1198)에 공자의 후손들이 당대의 문필가 당회영(黨懷英)의 글씨로 비를 세웠다고 한다. 공자가 여기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진리를 강론하며 고전을 정리했다고 하여‘행단예악(杏壇禮樂)’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고사를 떠올릴 늙은 나무는 없고 어린 살구나무 두 그루가 마당에 서있다.
행단을 지나면 바로 본전인 대성전이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운룡문(雲龍紋)이 석각된 어란석(魚卵石)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계단을 놓았다. 난간석도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이 석각되어 있다. 대성전은 공묘의 중심 건물로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에 이어 중국 제2의 건축물로 꼽힌다. 테두리에 용을 조각한 지금의 현판은 글자 한 자의 크기가 1미터 정도인데 청나라 옹정제(雍正帝)의 어필로 전(殿)의 이층 중앙에 걸려있다.
대성전이 처음부터 이렇게 웅장하고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당나라 때는 5칸의 작은 규모로 문선왕전(文宣王殿), 선성전(宣聖殿)이라 불리다가 송나라 휘종이 지금의 자리에 7칸으로 증축하고 맹자 진심장의‘공자지위집대성(孔子之謂集大成)’에서 따와 대성전이라 개칭하였다. 지금의 대성전은 높이 24.8미터 폭 45.78미터 길이 24.8미터에, 직경 0.81미터 높이 5.98미터인 28개의 돌기둥으로 황궁식 구오제(九五制)와 겹침지붕 양식을 채택하여 명 청대를 지나며 완성되었다. 정면 열개의 원기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발가락이 다섯 개인 두 필의 용이 손가락 깊이로 조각되어 있는데 한 필은 올라가고 다른 한필은 내려오는 모습이다. 황제가 방문할 때는 시샘을 우려하여 특별히 붉은 천으로 가렸다고 한다. 대성전의 측면과 후면에 있는 열여덟 개의 기둥은 팔각 돌기둥인데 기둥마다 한 면에 9필 씩 공자의 72제자를 상징하여 일흔 두필의 용을 조각하였다. 그러니 대성전 기둥에 조각된 용은 모두 1296필이며 이는 중국전설에 나오는 용들의 총수로 공부자를 옹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대성전의 지붕은 황궁과 동일하게 황금색 유리 기와로 덮여 있다. 용마루와 취두, 추녀마루도 물론 황금빛이다. 창방, 평방, 그것들의 머리, 서까래, 부연은 물론 전(殿)의 이층도 모두 단청이 호화롭고 두리기둥과 문짝은 모두 주칠이다.
대성전에 들어가 보니 가운데 금빛 닫집이 높이 놓였다. 닫집 위에 ‘만세사표(萬世師表)’와 ‘사문재자(斯文在玆)’라는 청색현판이 위아래 같은 규격으로 걸려있다. ‘만세사표(萬世師表)’는 강희제(康熙帝)가, ‘사문재자(斯文在玆)’는 광서제(光緖帝) 덕종이 썼다고 한다. 닫집 안에 공자 상이 있다. 공자상은 황제와 동등한 12류 면류관에 12장복(十二章服)을 입고 까만 진규(鎭圭)를 들고 3.35미터 높이로 앉아있다. 그 앞에 지성선사공자신위(至聖先師孔子神位)라는 위패가 있다. 공자상은 한나라 때 처음 봉안되고 당 현종이 문선왕으로 봉하면서 곤룡포를 입었는데 문화혁명 때 파괴된 것을 1982년 황금 48량(兩)을 들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공자상의 동 서 양쪽에 복성(復聖) 안회(顔回, 顔淵)와 술성(述聖) 자사(子思, 孔及) 종성(宗聖) 증자(曾子, 曾參)와 아성(亞聖) 맹자(孟子, 孟軻) 등 사성(四星)이 왕의 대례복과 같은 9류 면류관에 구장복(九章服)을 입고 손에 궁규(躬圭)를 들고 2.6미터 높이로 앉아있다. 그 바깥에 12철(十二哲) 상이 2미터 높이로 앉아 있다. 동쪽으로 비공 민손(費公 閔損), 설공 염옹(薛公 冉雍), 여공 단목사(黎公 端木賜), 위공 중유(衛公 仲由), 위공 복상(魏公 卜商)과 유약(有若) 상이 있다. 또 서쪽으로는 운공 염경(鄆公 冉耕), 제공 재여(齊公 宰予), 서공 염구(徐公 冉求), 오공 언언(吳公 言偃), 영천후 전손사(潁川侯 颛孫師) 등의 직제자와, 직제자는 아니지만 사서오경을 해석한 공로로 선철(先哲)에 봉해진 주희(朱熹) 상이 있다. 여러 악기와 무구(舞具)들도 진열되어 있고 편액과 주련도 많으나 ‘생민미유(生民未有, 사람이 난 이래 공자와 같은 성인은 없었다는 뜻)’라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의 어필이 특히 눈길을 끈다. 대성전의 동무(東廡, 동 행랑)와 서무(西廡, 서 행랑)에는 이외 공자제자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지금도 곡부에서는 공자를 숭모하여 대성전보다 더 높은 건물은 짖지 않는다고 한다. 대성전 앞뜰에서는 매년 9월 28일 공자의 탄신을 기념하여 팔일무(八佾舞, 바이우)라는 제사가무가 열리고 대만(臺灣,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삼고 있다.
대성전 뒤에는 공자의 부인 올관씨(兀官氏)의 침전(寢殿)이 있다. 이 침전은 대성문과 비슷한 모양으로 규문각, 대성전과 함께 공묘 3대 건축물의 하나로 꼽히는데 지붕을 떠받친 8각 석주(石柱) 22개에 석주마다 72마리의 봉황과 모란이 석각되어있다. 송 천희2년(1018)에 건설되었으며 명 홍치13년(1500)에 확장되었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가로 9칸 세로 4칸이며 높이는 22m다. 올관씨는 송 대중상부원년(1008)에 운국부인(鄆國夫人)에 봉해지고 원(元) 대덕11년(1307)에는‘대성지성문선왕부인(大成至聖文宣王夫人)’이 가시(加諡)되었다. 공자와 합사하여 제사지내다 송 천희2년(1018)부터 침전에서 따로 제사지내고 있다. 전 내부에는‘지성선사부인신위(至聖先師夫人神位)’라는 올관 씨의 위패가 금색으로 치장된 두 필의 용과 두 마리의 봉황이 새겨진 2층 단 위에 모셔져 있다. 처음에는 대성전의 공자 상처럼 올관 씨의 상(像)이 있었으나 청 옹정시기에 불타 없어졌다 한다.
침전 북쪽에 있는 성적전(聖跡殿)은 명 만력20년(1592)에 건립된 것으로 진대의 화가 고개자(顧愾子)가 그린 공자행교상을 봉안하고 공자의 일대기를 이야기그림으로 그린 성적도(聖跡圖) 120장을 석판에 새겨 진열한 사적관이다. 중국에서 제일 완벽한 인물고사(人物故事) 연환도화(連環圖畵)라는 성적도는 각 장의 높이가 38cm, 넓이가 60cm로 대략 3분의 2정도는 공자의 행적을 나타낸 그림이고 나머지 부분이 행적기로 되어있다. 유가사상을 형상화하여 전파한 시각적 자료의 모범으로 우리나라에도 이를 베껴 새긴 궐리사성적도(闕里祠聖蹟圖) 목판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동부에는 공자고택문(孔子古宅門)이 있다. 송나라와 금나라 양 대의 묘택문(廟宅門)이 있던 자리라서 공자고택문으로 삼았는데 안에는 청나라 고종 건륭(乾隆)황제가 쓴‘고택문찬비(古宅門贊碑)’가 있다. 이밖에 공자가 아들 공리에게 시(詩)와 예(禮)를 가르쳤다는 강당형태의 시례당(詩禮堂)과 당나라 때 심은 괴목(槐木), 송나라 때 심은 은행나무 등 노거수가 있다. 또 진시황 9년(기원전 213년) 공자의 9대 손인 공부(孔鮒)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피해 숭산으로 숨으면서 이중으로 벽을 쌓고 그 속에 상서(尙書),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 경서를 숨겨두었던 노벽(魯壁, 루삐)이 명나라 때 재축되어있다.
노벽 앞의 공택고정(孔宅古丼)은 공자가 마시던 우물로 송나라 때 보수하였다는데 돌로 덮어 놓았다. 1748년 청나라 건륭제가 이 우물을 예찬하여 쓴 '고정찬(故井贊)' 비가 우물 서쪽에 있다. 노벽뒤쪽 장방형의 공간 통로 양 쪽에 각각 한 개씩 공족보계도비(孔族譜系圖碑)가 있다. 명나라 영락7년 (1410)에 만들어진 것으로 동쪽의 것은 높이 2.6m, 폭 1.4m, 두께 35cm이며, 서쪽의 것은 높이 2.8m, 폭 1.24m, 두께 32cm로 공자에서 59대손 공언진(孔彦縉)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의 가계도를 그려놓은 비로 공자의 자손들을 연구하는 중요유물이다.
후서부에는 계성문(啓聖門), 계성전(啓聖殿), 계성왕침전(啓聖王寢殿) 등 공자의 부모와 관련한 다양한 기념물이 있다. 계성(啓聖)은 성인이 오실 길을 열었다는 뜻이니 계성전(啓聖殿)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의 사당이다. 숙량흘(叔梁紇)은 송나라 진종원년(1008) 제국공(齊國公)에, 원나라 지순(支順)원년(1330) 계성왕(啓星王)에 가시(加諡)되었다. 계성왕(啓星王)은 선성(先聖)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을 비롯하여 복성(復聖) 안회의 아버지 안무유(顔無繇), 종성(宗聖) 증자의 아버지 증점(曾點), 아성(亞聖) 맹자의 아버지 맹격(孟激) 등에게 추봉된 봉호이다. 계성전 북쪽의 삼간 계성왕침전은 남편이 추존됨에 따라 노국태부인(魯國太夫人), 계성왕부인(啓星王夫人)에 봉해진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의 사당이다. 이 밖에 금사당(金絲堂), 악기고(樂器庫), 오현찬비(五賢贊碑), 원가봉계성왕제조비(元加封啓聖王制詔碑)등이 있다.
공부(孔府, 쿵푸)는 공묘 동쪽에 길 하나를 사이로 있는데 공자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광대하고 화려한 장원이다. 공부로 들어가는 대문에는 성부(聖府)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송 인종(宋 仁宗) 때인 1038년에 처음으로 공묘 동쪽에 인접해서 건설되고 명 태조 때인 1377년 독립된 연성공부(衍聖公府)로 재건되었다. 1503년에 공묘처럼 아홉 개의 정원과 삼열로 늘어선 170개의 건물에 560개의 방으로 확장되었다. 1838년에 다시 개수하였지만 47년 후인 1887년 화재로 소실되어 2년 뒤에 전액 국비로 재건되었다. 오늘날의 공부는 12,470㎡에 480개의 방을 가진 152채의 건물로 되어있다.
중국의 역대 황제는 덕치를 표방하여 민심을 얻고자 공자를 받들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일찍이 진시황이 공자의 제9대 적손 공부(孔鮒, 子魚)를 노국문통군(魯國文通君)에 봉한 이래 한나라 고조 12년 기원전 195년에는 유방(劉邦)이 공부의 아우 공등(孔騰, 子襄)을 봉사군(奉祀君)에 봉했다. 송 태조 건덕(建德)4년(966) 1월에는 공자의 후예 공선(孔宣)을 등용했다고 사기에도 쓰여 있다. 특히 1055년 송나라 인종은 46대손인 공종원(孔宗愿, 子莊)을 제1대 연성공(衍聖公)으로 봉하여 대성전의 봉제사 외에 제후로서의 기능도 갖게 하였다. 이후 이 직위는 공자의 적손장자에게 중화민국이 성립될 때까지 습위(襲位)되었다. 따라서 공부의 주인 연성공은 왕조의 영욕과 부침에 관계없이 자자손손 제후가 되었다.
황제의 예방(禮訪)을 받는 공부에는 엄청난 식읍(食邑)이 하사되었다. 청말(靑末) 공부에 딸린 토지는 산동(山東, 산둥), 하북(河北,허베이), 하남(河南, 허난), 강소(江蘇, 장쑤), 안휘(安徽, 안후이) 등 오개 성(省)에 2억1600만 평이나 되어 수백 개의 재산관리소를 두어야 했다. 공부의 주인 연성공은 자연히 제후라는 직위 외에도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토지를 소유한 대장원의 주인이 되었다. 이런 공부에 청 건륭제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 1771년에는 궁중보물인 상주십기(商周十器, 十供)라는 청동예기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러니 사람들은 공부를 일러 천하제일가(天下第一 家)라고 하였다.
공부의 대문을 들어서면 중정(中庭)이다. 그 뒤에 성인지문(聖人之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이문(二門)이 있다. 곧바로 난 길이 중로(中路)다. 중로의 전반부는 공부의 관공서, 후반부는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명대에 축조되어 성지(聖旨)를 맞이하는 중광문(重光門)은 명(明) 세종이 은사중광(恩賜重光)이란 편액을 내리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소에는 개방되지 않고 공자의 종손인 연성공이 황제의 칙사를 맞이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등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만 열리기 때문에 달리 색문(塞門)이라고도 부른다.
중광문을 지나면 공부의 관아가 펼쳐진다. 마주 보이는 북쪽의 큰 건물 대당(大堂)은 연성공이 황제의 성지를 받거나 의식을 행하던 곳인데 대당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에 육부관아가 있다. 그 뒤에 연성공이 공문을 발송하거나 집사의 집무실로 쓰던 다섯 개의 방으로 된 이당(二堂)이 있다. 이당 뒤쪽에 공 씨 가문의 내부문제를 논의하거나 죄를 묻고 벌을 내리며 객실로도 썼던 삼당(三堂)이 있다. 삼당(三堂) 동쪽 뜰아래 골이 패인 석상이 놓여있어 집안의 훈육이 엄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광문에서 동로(東路)를 따라가면 가묘(家廟가 있고 서로(西路)를 따라가면 손님을 맞던 빈청이 있다.
삼당 뒤로 내택문(內宅門)이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연성공의 사택으로 타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다. 내택문 안에 가문의 연회를 열던 전상방(前上房), 가문의 어른이나 처녀들이 살던 전당루(前堂樓)와 후당루(後堂樓)가 있고 후당루(後堂樓) 뒤에 일꾼들이 거처하던 후오간(後五間)이 있으며 이런 살림 공간 맨 뒤에 정원인 후화원(後花園)과 태호석을 쌓아 만든 가산(假山)이 있다.
공부에는 황제를 비롯하여 칙사, 고급관리 및 명사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므로 자연히 손님접대를 위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는데 이를 공부가식(孔府家食)이라 하고 공부에서 여는 잔치를 공부연(孔府宴)이라고 한다. 황제가 요리사와 악대를 대동하기도 하니 음식문화와 예악(禮樂) 제절(諸節)은 더욱 발달하였다. 연회는 성격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었다. 연성공과 처자 등 직계의 생일잔치인 수연(壽宴), 세습봉작이나 집안 경사를 축하하는 희경연(喜慶宴), 대신이나 고위관리를 접대하기 위한 영빈연(迎賓宴), 친지나 친구를 접대하기 위한 가상연(嘉祥宴) 등이다.
이 가운데 황제를 접대하기 위하여 차리는 만한전석(滿漢全席)이 가장 귀하고 화려하다. 이때는 404종의 각기 다른 그릇에 196가지의 요리를 내는데 여기 상어지느러미와 낙타발굽, 곰 발바닥과 전양 숯불구이 등이 포함되었다. 손님접대가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술 담그는 양조기술도 발달하여 공부가주(孔府家酒)라는 세계적인 명주가 탄생되었는데 마셔보니 무색의 맑은 빛깔에 고량주보다 은은한 향이 있고 조청처럼 혀에 달라붙는 느낌이 있으며 뒷맛이 깨끗하였다.
이런 천하제일 가에도 부침과 분열이 있었다. 환난을 피하여 이천오백여년 간 공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적장손이 세 번이나 공부를 떠나야 했고 남종과 북종으로 분열하기도 했다. 첫 번째는 공자의 9대손 공부(孔鮒)가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영을 내린 진시황이 산동성(山東省, 산둥성)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남성(河南省, 허난성) 숭산(嵩山, 쑹산)으로 피신하여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반란군에 참여했다가 병사한 것이다. 두 번째는 1127년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침입으로 한족 최대의 치욕이라는 정강지변(靖康之變)을 당하여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 카이펑)이 함락되고 황제 비빈 및 대신들이 포로로 잡히자 휘종의 아홉째 아들인 강왕(康王) 조구(趙構)가 수도를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으로 옮겨 남송 첫 황제 고종(高宗)이 되는데 이때 48대손 공단우(孔端友)가 따라가 절강성(浙江省, 저장성) 구주(衢州, 취저우)를 식읍(食邑)으로 받고 눌러 살게 된 것이다. 공단우의 이런 피난은 구주에서 양자강(揚子江, 양쯔강) 이남에 유학을 일으켜 대학자 주자(朱子)가 나고 조선에 성리학이 꽃피는 원인(遠因)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이 송과 금으로 대립하는 동안 금나라 희종은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孔端操)의 아들 공번(孔璠)을 연성공에 봉하여 공묘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따라서 공자세가는 절강성 구주의 남종(南宗)과 산동성 곡부의 북종(北宗)으로 6대에 걸쳐 나뉘어 각각의 연성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중국을 통일하고 53대손 남종의 공수(孔洙)를 연성공으로 인정하여 배알토록 했으나 공수는 “남종 구주에 이미 5대의 분묘가 있어 떠나기 어렵고 북종은 조상을 모신 공이 있으니 동생 공치(孔治)가 북종 연성공의 작위를 세습함이 좋겠다”고 양보하여 마침내 원나라 성종원년 1295년 공치가 연성공이 됨으로서 남 북종이 통합되었다.
세 번째는 북종의 정통성을 잇는 77대손 공덕성(孔德成, 쿵더청)이 1936년 국민당정부에 의해 ‘대성지성선사 봉사관’에 임명되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장개석(蔣介石, 장제이)의 국민정부 편을 들어 78대 적손인 공유익(孔維益, 1989년 사망)과 함께 곡부를 떠나 대만(臺灣)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공덕성의 누이 공덕무(孔德懋)는 본토에 남아 중국정부로부터 우대를 받았다. 공덕성은 문화혁명 때 공묘가 파괴되자 “어떤 일이 있어도 대륙에 다시 가지 않겠다”며 대만에서 살다가 2006년 증손자 공우인(孔佑仁, 쿵유런, 80대손)을 보고 결국 2008년 88세를 일기로 대만에서 사망하였다. 중국정부는 공덕성의 공림 안장을 희망했으나 후손들이 거부하여 그대로 대만에 묻혔다. 공자의 적손은 현재 79대손 공수장(孔垂長)씨로 2006년에 아들 공우인(孔佑仁)을 낳아 대만에서 살고 있다.
사람은 살았을 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무덤의 호칭이 다르다. 백성이 죽어 묻히면 묘(墓)나 분(墳)이 되고 귀인이었으면 총(塚)이나 원(園)이 되며 제왕이었으면 능(陵)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중국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한 층이 더 있다. 능(陵) 위에 림(林)이 있는 것이다. 성인을 제왕보다 높은 신으로 숭앙하여 성인의 무덤을 신의 영역에나 쓰는 림(林)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계림(鷄林)이 있으나 특정인의 무덤이 아니라 신화와 관련하여 생긴 숲일 뿐이다. 이런 중국에 이림(二林)이 있다. 하나는 공자를 문성(文聖)으로 기리는 공림(孔林)이고 다른 하나는 관우(關羽)를 무성(武聖)과 재신(財神)으로 기리는 관림(關林)이다. 이제 곡부 성북에 가서 중국 이림(二林)의 하나인 공림을 볼 차례다.
공림(孔林, 쿵린)은 지성림(至聖林) 또는 공묘(孔墓)라고도 한다. 공자를 비롯한 직계자손들의 묘지공원으로 공자사후 제자들이 각처에서 가져와 심은 기이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인공원림이다. 2500여 년의 역사와 10만여 기의 분묘, 부지 면적 약 200만 평방미터의 공림은 명실 공히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고 크고 넓으며 잘 보전되어있는 사가능원(私家陵園)이다. 1331년에 벽과 문을 세우는 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18세기 후반에 3.6㎢의 공간을 두르는 7.5㎞의 벽이 만들어졌는데 전체적으로 열세 번에 걸쳐 보수 확장되었다. 공림 안에는 무덤 말고도 4000여기의 역대 비석과 석물 85점, 문(門), 방(坊), 정(亭) 전(殿) 등 고 건축물이 육십여 채나 있고 유명한 고목도 9,000여 그루나 있다.
곡부 북문을 나서 늙은 원백나무가 늘어선 공림신도(孔林神道)를 따라가면 산동성 4대 패방의 하나라는‘만고장춘(萬古長春)’방(坊)이 나타난다. 유례없는 길고 긴 꿈이라니 문득 죽음과 사후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만고장춘(萬古長春)’방은 여섯 개의 석주로 다섯 개의 문을 내고 문 위에 지붕을 얹었다. 가장 높이 세운 가운데 두 개의 석주에는 운룡문(雲龍紋)을 돋을새김하고 기둥 앞뒤로 포고석(抱鼓石)을 놓았으며 포고석 위에는 석사자상을 얹었다. 패방의 동서 양쪽에는 녹색기와를 얹은 정자가 있는데 동쪽 정자 안에는 대성지성선사공자신도비(大成至聖先師孔子神道碑)가 있고 서쪽 정자 안에는 궐리중수림묘비(闕里重修林墓碑)가 있다. 이 문을 지나 1킬로미터를 더 가면 좌우로 석사자가 지키고 있는 공림의 대문인 지성림(至聖林)을 만난다.
대림문(大林門)이라고도 하는 지성림을 지나 400여 미터를 들어가면 공림의 전문(前門)에 해당하는 공문(拱門)에 닿는다. 고대 노나라의 노성 북문(魯城北門)이었던 붉은 벽의 공문(拱門) 중앙정면에 전서체로 된‘지성림(至聖林)’이라는 음각 표지가 있다. 지성림을 지나니 원백나무와 떡갈나무의 수령이 한층 높은 듯하다. 곧바로 이 길을 걸으면 이림문(二林門, 얼린먼)에 닿는다. 이림문을 넘던 안내자가 석수상을 가리키며 천하에 가장 겁 없고 용감한 조천후(朝天吼)라는 동물인데 아픈 데와 같은 부위를 손바닥으로 쓸어주면 틀림없이 낫는다고 하니 일행들이 달려들어 엉겨 붙는다.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니 석수상의 주요부위가 다 반질반질하다. 몇 사람이나 저 석수의 등과 허리와 다리를 쓸고 갔을까. 죽은 이들을 보러 가면서 자신은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율배반이고 어불성설이다.
이림문을 넘으면 오른 쪽은 공자의 나이만큼 왼쪽은 노자의 나이만큼 원백나무를 심었다는 포도가 이어진다. 수령 천년이 넘었다는 가로수 사이로 초라한 무덤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에서 보았던 조천후가 나무 사이에서 지켜보고 있다.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었다. 이런 길을 대략 200미터쯤 가니 포도가 끝나고 잘 다듬은 흙길이 나타나며 마침내 공림의 내실로 들어가는 수수교(洙水橋)가 보인다. 여기 우리를 태우고 우선 공림을 한 바퀴 돌 무 괘도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곡부 전체면적의 오분의 일이며 우리나라 여의도의 70배나 되는 공림을 보려면 차를 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홉 명이 탈 수 있는 무 괘도열차에 분승하여 저속으로 공림을 한 바퀴 돌았다. 원백나무와 전나무, 느릅나무, 홰나무 등 십만여 그루의 노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는데 그 속에 분묘들이 널려있다. 우리나라의 산소처럼 봉분에 잔디를 입혀 잘 가꾼 그런 무덤들이 아니라 경운기로 흙을 한 차 실어다 그냥 쏟아 부어놓은 것같이 아무 손질한 흔적이 없다. 벌초는커녕 묘역의 구분도 없다. 오래된 무덤은 봉분마다 떡갈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마른 억새와 잡초가 누워서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부수수한 흙더미 위에 울긋불긋한 천 조각들이 꽂혀 있는 것은 매장한지 얼마 안 되는 무덤이며 누가 성묘 차 다녀갔다는 표지이기도 하단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자의 자손으로 삼공관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돈을 내면 누구든지 여기 묻힐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매장을 금하고 화장하도록 되어 있어 여기 매장되는 것은 공부만이 누리는 특혜라고 한다.
공동묘지에 부는 해거름의 섣달 바람은 더욱 스산하고 차가웠다. 지성 몇 세손 아무개, 지성 몇 세손 아무개, 산도 아니고 구릉도 아니니 아래위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십 세손 옆에 삼십 세손, 바짝 붙여 오십 세손, 조손(祖孫)을 가리지 않고 분묘를 썼다. 문화혁명 때 파묘되었었다는 지성직계 76세손의 묘비도 보였다. 사람이 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방법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중국인들의 생사관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림을 일주하는 무 괘도열차를 타고 칠 킬로미터를 달리며 이런 생각에 젖어 있는데 묘역 여기저기에 정자(亭子)와 문(門)이 보였다.
묘역에는 삼정(三亭)이 있는데 송(宋)나라 진종황제, 청나라 강희제와 공묘를 8번이나 찾았던 건륭제가 쉬어갔던 곳이다. 문(門)은 황실보다 더 존귀한 집안으로 출가해야 화(禍)를 피할 수 있다는 역술가의 말에 따라 공자의 72대손 공헌배(孔憲培)에게 시집왔던 건륭제의 공주(公主) 우부인(于夫人)의 문이라고 한다.
공림을 한 바퀴 돌아 괘도열차를 내리니 바로 왼쪽이 수수교(洙水橋, 주수이챠오)다. 수수교는 곡부성에서 나오는 물을 빼려고 만든 수수하(洙水河)에 놓은 다리다. 다리 동북쪽에 향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의관을 정제하기 위한 사당(思堂)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수수교 건너 숲길에 들어서면 드디어 공림의 내실이다. 좌우에 망주석인 화표(華表), 표범을 닮은 석수 문표(文豹), 외뿔괴수 녹단(甪端), 석인상 옹중(翁仲) 등 거대 석조물이 있다.
삼도(參道)에 들어서니 오른쪽에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심었다는 해(楷)나무가 고사하여 밑동만 남았는데 남은 밑동이나마 보호하기 위하여 각을 짓고 그 앞에 자공수식해(子貢手植楷)라 주서한 2미터 높이의 석비를 세워 놓았다. 자공이 외직에 나가있어 스승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뒤늦게 달려와 이를 통탄하며 심었다는 해(楷)나무다. 해나무란 중국이 원산지인 옻나무 과 암수 딴 그루의 큰키나무로 가지 끝에 붉은 꽃이 피었다 열매로 익으며 노란단풍이 아름다운 나무다. 그런데 이 비문의 네 번째 글자인‘심을 식(植)’자에 획 하나가 빠져 있다. 공자의 제자 삼천 명 가운데 자공 한사람이 장례에 불참하였기로 일부러 한 획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 탄신일인 음력 8월 27일 전후로 이 비석에는 물방울이 맺혀 자공의 눈물을 머금은 함루비(含淚碑)라고 부른다.
삼도의 왼쪽에 황금색 유리기와를 얹은 붉은 색 건물이 있는데 바로 공자의 제사를 올릴 때 향단(香壇)이 설치되는 향전(享殿)이다. 향전 바로 뒤에 늙은 원백나무로 둘러싸인 자사(子思)의 무덤이 있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로 중용(中庸)과 자사자(子思子) 23편을 저술한 이로 이름은 급(扱)이다. 공자의 직제자인 증자(曾子, 曾參)에게 배우고 노목공(魯穆公)의 스승이 되었으며 선조(先祖) 공자의 학통을 이은 사람으로 1330년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에 추봉되었다. 자사의 무덤 바로 위에 공리(孔鯉, 伯漁)의 무덤이 있다. 공리는 아버지 공자보다 일찍 죽었음으로 별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성인의 아들이라고 송나라 희종으로부터 사수후(泗水候)에 봉해져 무덤 앞에 봉호를 새긴 묘비가 있다. 자세히 보니 그 뒤에 2세조 묘(貳世祖墓)라고 전서로 쓴 작은 묘비가 하나 더 있다. 공자의 묘는 자사의 무덤 바로 위에 있고 공자의 묘 오른쪽에 아들 공리의 무덤이 있으니 공부자 삼대 묘의 배치는 바로 품(品)자 모양이다. 자식을 데리고 손자를 품에 안은 휴자포손(携子抱孫)형이다.
향전 뒤 자사의 묘 위쪽에 공자의 묘가 있다. 공자의 묘는 한(漢) 대에 쌓았던 석대를 헐고 당(唐) 대에 태산 봉선석(封禪石)을 옮겨와 1미터 높이로 묘역을 수축하여 그 가운데 모셨는데 떡갈나무가 진을 치듯 둘러싸고 있었다. 봉분에는 마른 잡초와 낙엽이 삭풍에 어지러웠다. 봉분의 크기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능침보다 작아 보였다. 공자의 무덤은 원래 규모도 작고 봉분도 없었는데 수나라 때 공자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이나마 무덤이 확장된 것이라고 한다. 묘 앞에 봉분석대와 같은 높이의 기단석을 놓고 기단석 위에 1443년 황양정(黃養正)이 예서(隸書)로 내려 쓴 문성지성문선왕(文成至聖文宣王)이라 음각한 비를 세웠는데 기단을 합쳐 비의 높이는 3.5미터쯤 되어 보였다. 이 묘비 바로 뒤에는 공자의 50대손 공원(孔元)이 1244년에 세웠던 묘비가 절반정도 크기로 서있다. 묘비를 세운 기단 앞에는 높이 1.6미터 정도의 청동 향로가 놓였고 바닥에는 판석이 깔려 있다.
3공(三孔)에 3고(三枯)가 있었다면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과 1966년의 문화대혁명이 포함될 것이다. 세상사에는 이해와 관계없이도 찬성과 반대가 있고 지지와 비판이 따른다. 존경과 질시가 공존하며 평화와 분쟁이 공존한다. 공자의 사상은 중국과 동아시아 민족 대부분이 정치 사회와 문화 전반의 근본으로 삼아 제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숭모와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비판하고 핍박하며 파괴한 시기도 있었고 세력도 없지 않았다. 세상일이란 본디 이루기보다 없애기가 쉬운 법이다. 이런 비판세력의 파괴행위는 비교적 단기간에 그쳤으나 그 상처는 크고 후유증도 적지 않았다.
진시황은 기원전 213년 재위 34년, 왕권강화를 위하여 승상 이사(李斯)가 건의한 협서금법(挾書禁法)을 시행하였다. 일체의 정치적인 비판을 금하고 사상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경전과 서책을 겨드랑에 끼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한편 진(秦) 나라의 기록과 박사관의 장서, 의약(醫藥), 복서(卜筮)와·농업서적 이외의 책은 모두 몰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이른바 분서사건(焚書事件)이다. 일 년 뒤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여러 방사(方士, 道人)와 유생들이 이런 폭정을 공박하자 불로장생을 장담했던 방사를 비롯하여 학자와 선비들이 금법을 위반하고 거짓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460여명을 잡아 생매장하였으니 이른바 갱유사건(坑儒事件)이다. 공부에서는 이때 공자의 9대손 공부(孔鮒)가 노벽을 쌓아 경서를 숨기고 숭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병사하였다.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7월에 죽었으나 협서금법은 진나라가 망하고 한(漢)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정권유지 차원에서 22년이나 존치되다가 한나라 제2대 혜제 4년 기원전 191년에야 비로소 해제되었다. 협서금법이 존치하는 동안 많은 학자들은 경전과 서책을 불사르기에 앞서 중요경서를 외워두었는데 해제되자 사제(師弟)간에 외워두었던 경전을 금문(今文)으로 복원출간하고 연구하여 금문학파(今文學派)를 형성하였다.
협서금법이 해제되고 104년이 흘러 전한의 제6대 무제말년 기원전 87년에 한의 제후국이었던 노나라 공왕(恭王)이 궁전의 뜰을 넓히려고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벽속에서 수십 편의 고문경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전한이 망하고 나서도 여기서 발견된 노벽의 경서들은 약 100여 년 동안 비부(秘府)에 보관되어 빛을 보지 못하다가 신(新)나라를 세웠던 왕망(王莽)이 정치개혁과 함께 복고정책을 펴면서 고문경학의 대종사로 불리는 유흠(劉歆)에 의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노벽에서 찾아낸 고문경전은 유흠에 의해 학관에 전시되고 금문경전과 함께 연구하게 되면서 고문학파(古文學派)가 형성된 것이다. 이후 금문학파(今文學派)와 고문학파(古文學派)간의 학문적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치열하게 지속되며 주역(周易)의 연구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66년 5월 16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이 제창한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1976년 모택동의 죽음과 정치선동전문가로 초반방향을 이끌었던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장칭), 장춘교(張春橋, 장춘차오), 요문원(姚文元, 야오원위안), 왕홍문(王洪文, 왕훙원) 등 이른바 사인방((四人幫, 네 사람의 불량배)의 체포까지 벌어졌던 여러 혼돈과 변혁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이 기간을 십년동란이라고 부르며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혁명은 임표(林彪,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자는‘비림비공(批林批孔)’으로 번졌다. 미디어와 선전망을 장악했던 사인방은 중국문화의 유교적 영향력을 제거한다며 전통문화를 비판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까지도 반혁명세력인지 의심해 볼 것을 장려하였다. 따라서 여러 역사적 건물과 공예품, 미술품, 서적 등이 파괴되거나 불태워지고 탈취되었다. 서양의 목격자들은 중국역사 수천 년의 문화유산들이 단 십 년간에 파괴되었다며 이런 파괴는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문화대혁명과 비림비공기간에 곡부삼공(曲阜三孔)은 많이 훼손되었다. 1966년 11월 홍위병 여성 지도자 담후란(譚厚蘭, 탄허우란, 1937-1982)의 주도로 구성된 이백여 명의‘문화혁명소조’는 29일간에 걸쳐 10만여 권이 넘는 고서(古書)와 진귀한 판본서적 1천7백여 책, 각종 자화(字畵) 9백 축, 국가1급 보호문물 7천여 점을 불태우고 공자 묘비를 비롯해 역대 비석 1천여 좌를 파괴하였다. 공자의 무덤을 파헤치고 제76대 연성공 공령이(孔令貽)의 시체를 파내기도 하였다. 이 밖에 2천여 기의 무덤을 도굴하고 5천여 그루의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를 잘라버렸다. ‘만세사표’라는 공자의 위상을 지우고 공자무덤을 없애버리는 역사적사명은 미래의 교사들이 맡아야한다며 혁명소조는 북경사범대학교와 곡부사범학원의 교직원과 학생들로 구성되었었다. 국가는 문화혁명이 끝나고 3천여만 원을 들여 삼공(三孔)에서 도난 된 일부 금은재보를 회수하였다.
1966년 11월 28일과 29일에는 곡부도심인원 육만 오천여 명의 1.5배인 십만 여명을 동원하여 '공가점훼멸대회'를 열었다. 담후란의 이런 만행은 홍위병들의 박수를 받으며 전 중국으로 번졌다. 자기들의 시조라는 염제(炎帝)의 능묘를 비롯하여 한자(漢字)를 창시한 창힐(倉頡)의 무덤, 황우(項羽)와 우희(虞姬)의 무덤,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와 악비(岳飛)의 무덤 등 사적에 이름이 있는 무덤들은 1966년에 거의 다 파헤쳐졌다. 또 중국 제일의 도교 성지로 노자(老子)가 직접 경을 강의했던 대(臺)와 도관(道館), 절강성 회계산(會稽山)의 대우묘(大禹廟), 이화원(頤和園)의 불향각(佛香閣) 등 유구한 전통 문화제를 부수거나 태워버렸고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거대한 황릉비석도 넘어뜨렸다. 담후란은 1978년 4월 반혁명 죄로 체포되고 1982년 11월 45세를 일기로 후회하며 죽었다. 담후란 이전에 살았던 명말청초의 평론가 김성탄(金聖嘆)이란 사람도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은 위대한 업적이었다면서 또 한 번 그런 영웅이 나타나 쓰레기만도 못한 책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런 말이 씨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림비공기간에 공자는 개(孔狗)라고 불렸다. 주유천하(周遊天下)하던 시절에도 공자는‘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若喪家之狗)’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태평천국의 난’ 때도 봉건지배계급의 주구(走狗)라고 개 취급을 받았고 노신(魯迅, 루쉰)의‘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도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비난을 받았었다. 개 취급을 당한 것이 한두 번 아니다.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이 단초가 되어 고문학파가 생기고 학문 발전의 기회가 되었듯이 문화대혁명과 비림비공도 후세에 또 어떤 발전의 계기로 작용할지 모를 일이다. 역사는 순환하는 것이니 후세에 또 다른 노벽이 생길지도 모른다.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공자는 다시 새롭게 부활하여 조명되고 있으니 필부들이 바닷물을 됫박으로 잴 수 없음을 깨달았음이다. 본래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법이다.
2012년 3월7일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에서 열린 향사례에 대만(臺灣, 타이완)에서 맹자의 76대 종손 맹령계(孟令繼, 멍링지)와 함께 참석한 공자의 79대 종손 공수장(孔垂長, 쿵췌이창)씨는 초헌관의 망기(望記)를 받자 “중국 본토에 있는 공자 할아버지의 묘소에 가보지도 못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퇴계선생에게 잔을 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정중히 거절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알묘 후 전교당에서 별도의 예를 올렸다고 한다. 이 보도를 보고 곡부 현장을 보고 온 외인으로서 그 고뇌를 심히 공감하여 여기 덧붙여 둔다.
공자의 무덤 바로 앞 왼쪽에 외양이 검소하고 야트막한 세 칸 집이 있다. 자공이 육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는 곳이다. 명나라 때인 1523년 어사(御史) 진풍오(陳風梧)가 이 집을 짓고 집 앞에 높이 1.5미터 정도의 자공여묘처(子貢廬墓處)라는 석비를 세워놓았다. 자공(子貢)의 성은 단목(端木)이고 이름은 사(賜), 자공은 그의 자이다. 자공은 언사에 막힘이 없고 이재에 밝아 천금의 재산을 모았으며 노나라와 위나라의 제상을 지내는 등 재주가 많아 당시에는 공자보다도 더 박식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온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편 스승의 활동자금을 꾸준히 조달하여 후에 공자의 제자 십철(十哲) 중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공자가 죽자 제자들은 증자(曾子, 曾參, 子輿)를 상주로 하여 부모에 준하는 예로써 상복을 입고 묘소 앞에서 함께 시묘살이를 했다. 이들이 삼년 상기를 마치고 목이 쉬도록 통곡하며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던 날, 자공은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며 홀로 남아 묘 마당에 여막을 짓고 삼 년의 시묘살이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아 - 옛 사람의 도리가 이와 같았구나.
이런 자공에게 공자는 많이 배워 아는 것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인 진리를 깨닫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일이관지(一以貫之)’를 설파하여 깨우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진 오늘 누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으랴. 세상의 부귀와 공명을 팽개치고 육년 동안이나 스승의 묘를 지켜 시묘살이를 한 자공의 지극정성에 어찌 숙연히 눈물 짖지 않으랴! 우리 가운데 누가 여기서 부끄럽지 않으랴! 부모 삼년상도 제대로 지내지 못했으니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남은 것 같은데 더는 할 수가 없다. 후안무치하다는 자공의 꾸지람이 들리는 것 같아 찬바람도 찬 줄을 모르겠다.
여정(旅程)은 남았으되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돌아보니 천하의 광대함이여! 성인의 위대함이여! 역사의 도도(滔滔)함이여! 부디 높이 보고 낮은 데로 흐를지니라.
삼공견문기
[출처] 곡부삼공견문기/이재수 (삶의질을위하여) |작성자 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