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슨한 활
동화작가 이솝은 종종 어린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놀면서 지친 일상에 힘을 얻는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사람 중에는
다 큰 어른이 점잖지 못하게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논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또 그런 말을 하자
이솝은 옆에 있던 현악기의 활을 집어 든 뒤
느슨하게 풀어 그 사람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느슨해진 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악기의 활을 느슨하게 해 두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계속 줄을 팽팽하게 매어놓으면 활은 부러지고 맙니다.
다음 연주를 위해서는 활을 느슨하게
놓을 필요가 있지요."
'연비'는 자동차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각각의 연비가 있습니다.
이걸 모르고 쉼 없이 내달리기만 하면
결국 멈춰버리고 맙니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잠시 숨을 고르는 쉼과 조율을 통해
나를 돌보는 시간도 중요합니다.
# 오늘의 명언
때로는 휴식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이다.
– 마크 블랙 –
* 믿음의 자세
@ "믿기를 활(弓) 다리듯 하라. 활 다리는 법이 너무 성급히 다리면 꺾어지나니, 진득히 다려야 하느니라." (대순전경 p348)
@ 증산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나에게 구하지 말고 스스로 돌이켜 네 마음에서 구하라. 영감이 본래 너의 작용이니라."(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71)
@ 하루는 종도 한사람이 벽에 기대고 앉았거늘, 경계하시며 가라사대 "선천은 남에게 의지하는 바람에 기대고 망하나니, 너희들은 하다못해 방벽이라도 기대지 말라."하시니라.(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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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믿음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믿음은 나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해야 하고, 뭇 생명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발전해가며, 그 끝에 나를 포함한 뭇 생명들을 다스리는 주재자 상제님과 만남으로써 완성이 된다 하겠습니다. 이 믿음은 일회성의 강력한 발심만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삶속에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키워나가는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상제님께서도 "믿기를 활 다리듯 하라."하셨습니다. 활을 다릴 때, 급하게 마음먹고 활 다리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도 활이 꺾이고, 불이 너무 세도 그 화기에 활이 꺾이고 맙니다. 불 세기가 적당하더라도 성급한 마음에 다릴 활을 너무 불 가까이 대버리면 역시 활이 꺾여버리고 말지요. 이 강약이나 완급조절은 결국 자신이 가늠해서 하는 수 밖에 없는 데, 이는 체험속에서 감이 생기는 것이고 시간을 들여야지만 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욕속부달(欲速不達)'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치열하게 자기내면을 들여다보고 통제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할 때 얻어지는 것이며, 자기성찰과 자기통제는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맹목적인 신앙, 의타적인 신앙을 할 경우 결코 얻을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맹목적인 신앙과 의타신앙을 엄중히 경계했습니다. 내 신앙은 지도자가 키워주지 않습니다. 내가 키워가는 것입니다. 부모처자라도 운수가 제각각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을 내 부모도 내 운수를 대신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졸리면 내가 자야 하고, 내 배가 고프면 내가 밥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단의 지도자이든 그이는 진리로 가는 길의 안내자 역할만 할 뿐, 그 길을 판단하고 결정해서 걸어가며 진리를 하나하나 체화시켜 나가야 하는 당사자는 어느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상제님은 무조건 "주여 주여!" 외치는 식의 맹목적인 선천신앙인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상제님은 충직한 종복이 아닌 진리의 어진 벗, 즉 '도반'을 원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당신의 생애를 깊이 살펴, 그 길을 따르며 그 길을 더욱 완성시켜나가는 것이 우리의 소임입니다.
첫댓글 삶에도 강약 조절과 긴 호흡이 필요하듯이, 신앙의 성숙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걸어가야 할 천하사의 길이요, 죽어서도 함께할 세계일가 구현의 구도길이기에 우리의 눈은 멀리, 발은 현실에 붙이고 한결같은 소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