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홍망(安泓望)
1派20世-참찬공파
泓望 홍망
字는 원택(源澤)
인조(仁祖)丁丑1637년生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叅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경종(景宗)癸卯1723년卒
묘광양시 진월면 오사리 136의1 묘갈(墓碣)과 상석 망주 비석 사적비 등이 있다 묘표는 7대손 용묵(鎔默)이 찬한바 총록에 실리다 세사일 陰10월14일
配증정부인김해김씨(贈貞夫人金海金氏) 父는 윤생(潤生) 1남을 두다
묘공묘(公墓) 부(祔)오른쪽 합장(合葬) 세사일은 공(公)과 같다
后配증정부인밀양손씨(贈貞夫人密陽孫氏) 父는 참봉(叅奉)을 지낸 근(瑾)
묘공묘(公墓) 부(祔)오른쪽 삼합폄(三合窆) 묘비 상석이 있으며 세사일은 공(公)과 같다
공의 휘는 홍망(泓望)이고 자는 원택(源澤)이다. 아버지는 증 군자감정(贈軍資監正) 연생(連生)이고 어머니는 김해(金海) 허현(許玹)의 딸이다. 선조(宣祖) 임진년에 분성(盆城) 신문리(新文里)로 피란 갔다가 정유년에 부군을 낳았다. 부군은 젊어서부터 기개가 대단하였다. 일찍이 무예(武藝) 과장(科場)에 나갔다가 관하인(官下人)이 오만한 것을 보고 화살을 쏘아 맞히고 나서 하동(河東)의 애치(艾峙)로 피신하였는데, 남원(南原)에서 재차 옮기어 정착한 것이다. 인조조(仁祖朝) 때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행 부산첨사(行釜山僉使)에 임명되었으나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계묘년에 세상을 떠나니 식자(識者)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그 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전(前) 부인 정부인(貞夫人)은 김해(金海) 김윤(金潤)의 딸이고, 후(後) 부인은 밀양(密陽) 손봉근(孫奉瑾)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 익하(益廈)는 무과(武科) 주부(主簿)이고 둘째 아들 익후(益垕도 무과 주부인데, 영조(英祖) 무신년(戊申年)에 세운 양무훈(揚武勳)으로 공신녹권을 하사받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셋째 아들은 익장(益章)이고, 넷째 아들 익형(益亨)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의 증직을 받았다.
부군을 처음에 다른 산에 안장(安葬)하였다가 그 뒤 꿈으로 인해 횡천(橫川)역리(驛里) 묘좌(卯坐)에다 자리를 잡아 이장(移葬)할 적에 때마침 역참을 그곳으로 옮기었으며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전 부인의 묘소는 애치리(艾峙里) 당산(堂山) 유좌(酉坐)이고 후 부인 묘소는 광양군(光陽郡) 진월면(津月面) 방죽리(芳竹里) 앞산 손좌(巽坐)이다.
안익후(安益垕)
[무과] 경종(景宗) 3년(1723) 계묘(癸卯) 별시(別試) 병과(丙科) 96위(125/478)
[인물요약]
UCI | G002+AKS-KHF_13C548C775D6C4B1685X0 |
자(字) | 군성(君聖)(주1) |
생년 | 을축(乙丑) 1685년 (숙종 11) |
졸년 | 임자(壬子)(주2)【補】 1732년 (영조 8) |
향년 | 48세 |
합격연령 | 39세 |
본인본관 | 순흥(順興) |
거주지 | 하동(河東) |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 478명 [甲1・乙28・丙449] |
전력 | 한량(閑良) |
무과규구 | 유엽전 5시 1순 1중(柳葉箭五矢一巡一中) 기추 1차 1중(騎蒭一次一中) 2기 취 1기(二技取一技) |
부모구존 | 자시하(慈侍下)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안홍망(安弘望)(주3)
품계 : 선략장군(宣略將軍)
관직 : 행구산진별장(行龜山鎭別將)
[처부(妻父)]
성명 : 문세기(文世紀)【補】
본관 : 남평(南平)【補】
[처부(妻父)2]
성명 : 문무달(文武達)【補】(주4)
본관 : 남평(南平)【補】
[안항(鴈行)]
형(兄) : 안익하(安益厦)【補】
제(弟) : 안익장(安益章)【補】(주5)
제(弟) : 안익형(安益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