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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한숨의 노래
글/ 이원익
내가 아직 어리고 부모님은 중년을 넘어서 희끗희끗 흰 머리칼이 생기기 시작할 때였나 보다. 어머님은 시골 오일장에 가서 집에서 난 애호박이라든지 몇 가지 농산물을 장사치들에게 넘기고는 장을 봐 오셨는데 지푸라기에 묶어 신문지에 싼 비린내 나는 꽁치 몇 마리에다가 학이 그려진 딱지가 붙은 작고 노란 냄비 같은 그릇붙이랑 몇 가지 잡화들, 그리고 머리에 물을 들이는 양귀비를 사 오셨다. 검고 반짝이는 종이 곽에 한자로 적힌 염색약의 상품명이 양귀비(楊貴妃)였는데 머리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마치 옷감처럼 검고 빛나게 물을 들인다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좀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내 삶에 있어서 그 즈음이 젊으셨던 아버님 어머님의 이제 다시는 대할 수 없는 그 값지고 아름다웠던 인생의 전환점을 맨 눈으로 지켜 본 마지막 나날이었던 줄이야 어찌 미리 알았으랴?
아무튼 이러한 미용 화장품에서뿐만 아니라 양귀비라는 이름은 그 시절까진 오래 전부터 언필칭 미인의 거의 유일한 대명사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높았으면 어땠을 것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는 그 후에 들었고 뒤따라 마릴린 몬로니 엘리자베스 테일러니 하는 새로운 이름들이 누나나 형들의 입을 통하여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 여기 와서 일고여덟 해도 전인가.., 보니 누가 카자흐스탄이니 타슈켄트니 하는 중앙아시아 다녀온 얘기를 쓴 게 있던데, 그 동네에 가니 미인이 흔해서 김태희가 밭을 매고 있더라는 둥…, 김태희가 그리 예뻤나? 아니면 잘 생겼나? 나 개인적으론 여태 동서양 통틀어 김지미 같은 미인은 못 본 것 같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내가 뭘 얻어먹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그저 그렇다는 말씀이다. 어흠!)
그런데 알고 보니 양귀비는 요새 같으면 일찌감치 일차 오디션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왜냐면 너무 토실토실하고 푸짐한 빅토리아식의 중세형 미인이었기에 조막만한 얼굴과 굶주려 죽어가는 병자같이 가는 허리와 팔다리를 원하는 요즘 사람들에겐 턱도 없는 소리다. (어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양귀비의 키는 155cm, 몸무게는 65kg이라고도 한다.) 구태여 중국의 역사에서 깡마른 후보를 구하자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췄다는 조비연(趙飛燕)이 가능성이 있겠다. 그래서 이름이 ‘날아가는 제비’ 아닌가! 비록 좀 악녀 짓을 하긴 했다만.
미모와 심성이 일치 안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면서도 깜빡 잘 속는 게 인간 심리인가 보다. 하기야 미인대회를 할 때 심성 테스트, 인성 테스트를 한다지만 그게 뭐 다 요식행위 아니겠나. 그런데 나와서 ‘나 성질 더럽소’ 할 눈치 없고 괄괄한 아가씨가 어디 있겠나. 다들 다소곳하고 아리땁고 참한 척을 하는 거지. 다시 중국으로 눈 돌리자면 천하의 악녀 측천무후도 그랬고 서태후도 여후도 조비연도…, 단, 베갯머리송사며 내숭과 권모술수 등 갖은 수단과 인내심을 다 발휘하여 마침내 권력의 올가미를 단단히 틀어쥘 때까지만 다소곳하고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은 어느 정도 우리네 평범한 마누라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큰일 날 소린가?) 단, 남편이 늙어 퇴직금 몫돈 받아와 손에 쥐어 줄 때까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미스 동양, 양귀비도 이렇게 두 얼굴이었나?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공평한 평가를 위해 부득이 이 여인의 일생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관전 포인트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좀 복합적이고 인간적이며 불쌍하다는 느낌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그럴 수 있듯이, 또 하나의 죄 많고 방황하는 내 누이의 영혼이요 애욕과 호기심의 포로이면서 다른 한 편 호사와 안락무사와 안전보증을 좇았지만 끝내 명대로 살지 못하고 윽박질려 목을 매단 애꿎게도 실패한 가련한 목숨이라고나 할까. 심리학의 정신분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는데 일찍 부모를 여읜 고아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천년을 넘게 특히 동방의 수많은 사람들이 덩달아 찬탄하거나 안타까워하며 글과 입에 올리고 내린, 그렇게 알려진 한 쪽 면만 있는 것은 아님을 알자.
본 이름이 구슬가락지(玉環)인 양귀비는 어릴 때부터 정말 옥처럼 곱고 아리따웠지만 호기심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커서 시집가 잘 살다 죽었으면 지금 내가 이런 글을 끄적일 일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하급관리이던 아버지랑 어머니가 일찍 죽어서 세 언니와 함께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는 데서 출발한다. 다행인지 법도가 엄한 삼촌집에 얹혀서 컸는데 이때부터 조신하게 몸을 사리면서도 본래 끼가 있었던 게지, 다른 한 편 몰래 무당에게서 춤과 노래를 배웠다. 그러다가 그 당시 당나라 임금이었던 현종(玄宗)의 딸들 중에 바깥나들이를 한 공주 하나와 끈이 닿아 궁중 잔치에도 가 볼 수 있게 되었고 과연 미모와 품격이 품격인지라 어느새 소문이 파다해진다. 궁궐의 꽃들이 옥환이가 지나가면 부끄러워해서 잘 피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귀비의 별명이 ‘꽃이 부끄러워함(수화:羞花)’이다. 그리고 현종의 비인 무혜비(武惠妃)와 열여덟 번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름이 ‘이모李瑁’다)의 눈에 들어 수왕의 아내, 곧 현종의 며느리가 된다. 여기까지라면 어쨌든 잘 먹고 잘 살다 죽었을 확률이 크다. 문제는 왕비인 무혜비가 얼마 안 가 죽었다는 것이고 현종이 무혜비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개원의 치(開元之治)’라고 해서 중국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융성기를 맞이한 장본인인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는 어느덧 자만심이 생겨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이며 능구렁이인 종친 이임보(李林甫)를 중용하고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너무 믿는 등 낌새가 영 좋지 않았는데 총애하던 마누라가 갑자기 죽자(물론 마누라가 한둘이 아니다. 삼천궁녀는 차치하고서라도) 정신을 못 차리고 완전히 사람이 변해 만사를 내팽개쳤다. 자고로 남녀간에 너무 닭살이 돋으면 사고를 치는 법이다.
이에 주군의 심기까지 경호하던 우리의 충신 고력사가 슬쩍 양귀비를 데려다 현종에게 보이고 자리를 비켜 줬는데 권력 풍향에 귀신인 이 환관의 예상대로 현종은 한 눈에 양귀비에게 빠져 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 살 맛이 났다(아들이 워낙 많다 보니 전에 결혼식에도 안 갔었나 보다). 그래서 정사를 다시 잘 돌보았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때부터는 찰떡궁합이 되어 옜다 모르겠다, 니가 다 알아서 해라 하고는 엔간하면 이임보와 고력사에게 다 맡겨 버렸다. 결과론이지만 그래서 당나라가 망한 것이고 우리가 양귀비를 속된 말로 ‘나라 망친 년(傾國之色)’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왕 이모만 불쌍하게 됐다. 옥환이 스물두 살, 이융기는 쉰여섯이니 둘 다 위험한 나이이긴 했다.
‘임금에겐 남세스럴 일이 없다(帝王無恥)’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며느리를 마누라로 삼자니 아들 보기도 그렇고…, 그래서 후궁 중에 하나를 떼내어 새장가를 보내 주고 ‘구슬가락지’는 자기 정식 마누라가 되게 길고도 귀찮은 신분세탁 과정에 들어간다. 물론 고력사가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손발이 됐다. 옥환을 아들에게서 떼놓느라 도교를 이용하면서 이름을 도교식으로 태진(太眞)으로 바꾸었다가 나중에 차차 계급을 올려 결국 귀비(貴妃)가 되는데 여섯 해가 걸렸다. 그러면서 환심을 사려고 양귀비의 친정 식구들을 모조리 등용했는데 육촌오빠인 양소에게는 나라에 충성하라고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주어 결국 재상이 되게 했고 세 언니에게도 작위를 주어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이 가운데 둘째인 괵국부인(양옥쟁)하고는 바람까지 피워 양귀비가 토라져 내쫓겼다 다시 불려 들어오는 등 질투와 사랑싸움이 있었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능구렁이 이임보가 나라를 잘 요리하시는 동안 자신이 한 수 아래인 줄을 아는 양국충은 몸을 좀 사리고 있었는데 궁중의 목줄대를 움켜쥐고 차츰차츰 권력의 사다리를 올라타던 이 친구, 본래 양귀비의 시집가기 전 은밀한 애인이었던 이 육촌오빠의 잠재력을 두려워한 이임보는 바깥에 멀리 있던 오랑캐 족속 안록산(安綠山) 띄우기에 힘을 보탠다. 안록산이 누구인가? 이 친구 빠지면 오늘 이야기 하나마나다.
안록산의 아버지인가 양아버지는 본래 서역에 살던 페르샤 계통의 소그드 사람이고 어머니는 돌궐(터키)계니 아무튼 동서양 합작의 혼혈아로 보면 되겠다. 제 나라 안식국(安食國)에 분란이 일어나 일가가 중국으로 망명해 왔는데 대개 페르샤(지금의 이란) 계통 사람들이 오면 안(安)씨 성을 받았다. 안록산의 ‘록산’도 빛을 뜻하는 ‘로우샨’이라는 페르샤 말을 옮겨 쓴 것이다. (우리나라 안씨가 다 이란 사람 자손이란 말은 아니다. 중국 안씨에도 서역, 안남 등 여러 계통이 있었다 하고 한국의 성씨에는 중국계통도 있을 수 있겠으나 피는 토종이면서 겉장식 글자만 중국 것 갖다가 자기 성씨로 쓴 것이 대부분이다)
그 당시 당나라는 지배지역이 넓고 교통이 불편해 변방 오랑캐들을 다스리기 힘들어서 절도사라는 직책을 만들어 병권을 포함하여 상당한 권력을 주어 보냈는데 여섯 나라의 말에 능통하고 싸움 잘하고 능수능란한 이 ‘페르샤의 빛’ 안록산도 이임보, 양귀비, 현종까지 잘 이용하는 정치력과 음흉함에 힘입어 결국 세 군데의 절도사와 당나라 전체 병력의 삼분의 일을 손아귀에 넣는다. 그 결과, 안록산의 난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중국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고 나라는 기울다 결국 망하며 자신과 양귀비는 물론 그 족속들까지 파멸로 몰아간다는 스토리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약술하자면, 나이 들어 능구렁이가 죽자 나라 충성 양국충은 본격적인 대권가도에 임한다. 그런데 전체 그림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머리 잘 돌아가고 젊고 잘 생긴데다가 군대까지 거느린 오랑캐,‘페르샤의 빛’이 결정적인 장애물로 거슬리는지라 현종께 독대하여 일러바친다. 반역의 조짐이 있다고, 바로 제거하자고. 그러자 이 페르샤의 빛을 아들같이 믿고 있던 현종은 어이없어 하며 도리어 양가를 미친 놈 취급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꺼림칙한 건 사실이라 다시 한 번 고하자 이번엔 정 그렇다면 안록산을 당장 불러 보자, 오면 아니고 안 오면 반역 맞다. 그래서 부르니 웬걸, 놈이 눈치를 챈 건지 데꺽 먼 길을 달려와 먼지도 털지 못하고 어전에 대령했다. ‘폐하, 부르셨나이까?’ 녹산은 시간을 벌고 국충은 우습게 됐다.
현종이 이렇게 안록산을 믿게 된 데는 물론 중간에 양귀비가 있다. 내가 여자는 아니지만, 아버지뻘인 현종과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냄새나고 따분한 궁중생활을 이어가던 양귀비에게 어느 날 변방의 이국적이며 유들유들한 호남아, 페르샤의 빛이 두 눈을 비추었을 때 그 감격과 신선한 충격이 어땠을까는 짐작 되는 바가 있다. 아낙의 속을 잘 들여다보는 능청스런 이 오랑캐는 이 때 자기보다 열 살 넘어 어린 양귀비더러 제 엄마가 돼 달라고 감히 응석을 부리는데 허물없고 유쾌한 이 가족적인 분위기에 맛이 간 현종이 즉석에서 허락을 하고…, 이 2백 키로가 넘는 희멀끔한 뚱보 아기를 궁녀들이 보자기에 감싸서 어르는 등 유희가 이어지며 깔깔 소리가 지엄한 궁중에 흘러넘쳐 간만에 사람 사는 동네가 된다. 그런데 실은 이때 모자관계가 아니라 애인관계가 맺어져 이 우량아 조숙 아기는 어린 엄마 집에서 자주 자고 간다. 소문이 안 날 리 있나? 그래도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눈으로 귀로 들어오는 법, 현종은 털끝만치의 의심도 않는다.
하지만 이제부턴 시간 게임이다. 나라에 충성이 아니라 자신과 일가에 적극 충성하던 양국충이 계속 감시의 안테나를 돌리자 결단성 있고 과감한 페르샤의 빛이 선수의 검을 빼든다. 잠깐, 이러기 전에 어린 엄마에게 먼저 암시를 하고 마지막으로 통첩을 보낸다. 늙은 꼰대냐 페르샤의 빛이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몇 날 몇 시까지 어디서 내 님을 기다리겠다고! 아, 수심과 머뭇거림에 빠져 일각이 여삼추인 우리 구슬가락지의 고뇌여! 그대의 하얀 두 발목을 휘감는 것이 무엇인가? 인륜인가, 계산인가, 연민인가, 자포자긴가!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걱정까지 해 주는지 모르겠다)
원수 같은 시간! 옥환이는 끝내 열린 문을 떠나 날지 못하고 새장에 머문다. 그리고 예고된 대로 반란은 일어난다. 도무지 믿지 못하던 현종은 정신이 들자 백성을 버리고 서둘러 뒷문으로 빠져 도망가다 말리는 아들에게 황급히 왕위를 물려준다. 많지 않은 근위병과 양귀비, 양국충 일파와 고력사 무리가 밥도 굶고 밤새워 따른다. 그러다 백리 남짓, 한낮이 되어 역참이 있는 마외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배는 고프지, 지쳤지, 앞길은 알 수 없지…, 평소의 불만이 쌓이고 쌓인 병사들과 신료들이 군기가 한꺼번에 빠져 대놓고 불만을 터뜨리며 설친다. 이 모든 사태가 양귀비와 양국충이 때문이라고! 그 놈들부터 잡아 죽여야 한다고! 양씨들 이제 큰일 났다!
그 때 공교롭게도 티베트의 사절단이 이들과 마주쳐 양국충이 그래도 재상이랍시고 맞이하는데 이를 본 군사 하나가 뜬금없이 내지른다. 저 양가 놈이 오랑캐한테 우리를 팔아넘기는 중이라고! 그러면서 칼을 빼어 국충의 목을 그대로 쳐버린다. 모두 우우 일어나 양씨들은 다 죽여 버린다. 그리고 현종의 등 뒤에 숨은 양귀비까지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보아하니 그냥 버티다가는 자기까지 죽을 판이라 비겁한 이융기는 금쪽같이 사랑한다던 자기 애인을 군사들, 아니, 그러기 전에 양귀비더러 스스로 죽으라고 명한다. (책임으로 따지자면 제가 먼저 죽어야지!) 아무튼 양귀비 이제 끝났다. 그런데 차마 어찌 제 목숨을 제가 끊나! 그렇게까진 모질지 못했나 보다. 마지막까지 완벽 서비스, 환관 고력사가 친절하게도 목에 비단폭을 옭아 주고 나무에 던져 걸어 주고 아직은 좋은 근력으로 당겨 주고 졸라 준다. 땅바닥 흙먼지에 양귀비의 비녀가 떨어져 구른다. 우리나이로 서른여덟이다.
이 장면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먹물들이 천년이 넘게 써먹는 글감인데(나도 그 중에 하난가?) 그 가운데 압권은 아래에 소개하는 백거이의 ‘기나긴 한숨의 노래’, 곧 장한가(長恨歌)이다. 거기에도 나오지만 반란은 아홉 해만에 겨우 평정 되어 살아 돌아온 현종도 죽을 때까지 이때의 일을 못 잊어 일흔여덟 살, 삶의 마지막 날까지 곱씹는다. 있을 때 잘 하지! 하기야 내 생각에는 그 당시 현종이 끝까지 양귀비를 감싸지 못한 것은 배신감도 느껴서 그랬지 않나 싶다. 어쨌든 자기 의붓아들과 바람피운 여자 아닌가.
글이 너무 길어져 그 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단칼에 자르겠다만 쓰다 보니 세상만사, 이런 게 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업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애욕의 끈질김이다. 손가락 몇 개 태워서 될 일이 아니다. 다른 한 편 이 세상 모든 일은 한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언제까지나 오직 그것뿐인 고정되고 정해진 자리는 없다. 사랑도, 이별도, 웃음도, 한숨도…, 양귀비에게도 현종에게도 백거이의 장한가가 묘사하는 그런 면이 있고 감춰진 뒷면이 있다. 그리고 한이며 한숨이며 꼭 양귀비에게만 그런 게 있고 그 사람 것만이 귀하다는 법이 있나! 이 이야기 뒤에는 그 몇 천배 몇 만배나 되는 이름 모를 이들의 한과 한숨이 또한 서려 있지를 않겠나!
화려한 겉면 뒤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고 찬탄 뒤에는 저주가 있다. 어느 것이 본바탕인가에는 각자의 판단과 가치관이 스며 있다. 그런 안목을 전제로 기나긴 한숨의 노래를 읊어 맛보시기 바란다. 우리말 번역이 어떠실지, 크게 장면을 나누자면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 전란의 비극, 하늘나라에 찾아간 이야기 이렇게 세 대목인데 적어도 이런 게 있다는 것 정도는 교양으로도 알아 둘만 하다. 되새기매 우리의 뿌리가 아시아, 그리고 그 동쪽 꽃 피고 물 흐르는 반도와 솨 솨 웅혼한 바람 부는 대륙 언저리에 있다면.
長恨歌(장한가)-기나긴 한숨의 노래
白居易(백거이)
漢皇重色思傾國(한황중색사경국)
한의 황제 색을 즐겨 빼어난 미인을 바라는데
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부득)
오랜 세월 살펴 보아도 찾을 길이 없었네
楊家有女初長成(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에 갓 자란 딸이 하나 있었으나
養在深閨人未識(양재심규인미식)
집안에 깊이 길러 아는 이가 없더라
天生麗質難自棄(천생려질난자기)
하지만 타고난 아름다움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일조선재군왕측)
하루아침에 뽑혀 임금 곁에 서게 됐네
回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
눈웃음 한 번에 온갖 애교 피어나니
六宮粉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여섯 궁의 단장한 미녀들 낯빛을 가렸다오
春寒賜浴華淸池(춘한사욕화청지)
추운 봄날 화청 못에 멱감기를 허락 받아
溫泉水滑洗凝脂(온천수골세응지)
매끄러운 온천 물에 기름 때를 씻어내고
侍兒扶起嬌無力(시아부기교무력)
시녀 아이가 도와 일으키니 가냘픈 그 교태
始是新承恩澤時(시시신승은택시)
임의 사랑 비롯한 건 이때부터였다네
雲鬢花顔金步搖(운빈화안금보요)
구름머리 꽃얼굴에 흔들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
부용 휘장 따뜻하여 봄밤은 깊어 가니
春宵苦短日高起(춘소고단일고기)
짧은 밤을 한탄하며 해 높아야 일어나네
從此君王不早朝(종차군왕부조조)
이로부터 임금은 아침 모임 건너뛰었고
承歡侍宴無閑暇(승환시연무한가)
양귀비는 잔치로 기쁨 바치느라 겨를 없었네
春從春游夜專夜(춘종춘유야전야)
봄에는 봄나들이 밤에는 밤 잠자리에
後宮佳麗三千人(후궁가려삼천인)
후궁을 가득 채운 삼천 미녀 있었건만
三千寵愛在一身(삼천총애재일신)
삼천에게 줄 사랑을 그 한 몸이 받았다네
金屋粧成嬌侍夜(김옥장성교시야)
금집에서 단장하고 교태로 밤을 맞아
玉樓宴罷醉和春(옥누연파취화춘)
옥 다락에 잔치 끝나니 술과 봄에 취하도다
姉妹弟兄皆列士(자매제형개렬사)
누이 형제 모두에게 땅을 베풀어 내려 주니
可憐光彩生門戶(가련광채생문호)
이윽고 그들 집안에 광채가 빛나더라
遂令天下父母心(수령천하부모심)
이에 따라 세상 모든 어버이들 마음이
不重生男重生女(부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게 되었더라
驪宮高處入靑雲(여궁고처입청운)
화청궁 높이 솟아 구름 속에 들어 있고
仙樂風飄處處聞(선락풍표처처문)
신선 가락은 바람 타고 어디서나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완가만무응사죽)
가락에 실려 드는 느린 노래 넘실 춤
盡日君王看不足(진일군왕간부족)
임금은 넋을 잃고 저물도록 바라보네
漁陽瞽鼓動地來(어양비고동지래)
느닷없는 싸움북 소리 어양 땅을 울리니
驚破霓裳羽衣曲(경파예상우의곡)
무지개치마 깃옷노래 중간에서 잘리도다
九重城闕煙塵生(구중성궐연진생)
아홉 겹 궁궐에는 연기 먼지 솟구치고
千乘萬騎西南行(천승만기서남행)
천의 수레 만의 말탄 군사 서남으로 달아나네
翠華搖搖行復止(취화요요행부지)
천자의 깃발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다가
西出都門百餘里(서출도문백여리)
서문을 빠져 나와 백리 남짓을 왔도다
六軍不發無奈何(육군불발무내하)
여섯 군대가 더는 안 움직이니 이를 어이할꼬
宛轉蛾眉馬前死(완전아미마전사)
양귀비 고운 눈썹 말 앞에 굴러 죽었네
花鈿委地無人收(화전위지무인수)
땅에 떨군 꽃비녀는 거두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취교금작옥소두)
비취 금옥 머리장식도 바닥에 흩어졌네
君王掩面救不得(군왕엄면구부득)
임금은 얼굴 가린 채 구하지를 못하고
回看血淚相和流(회간혈루상화류)
고개 돌린 두 눈에서는 피눈물만 흐르네
黃埃散漫風蕭索(황애산만풍소삭)
흙먼지 누렇게 일고 바람은 쓸쓸한데
雲棧縈紆登劍閣(운잔영우등검각)
구름 걸린 사다릿길 검각산을 오르네
峨嵋山下少人行(아미산하소인행)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旌旗無光日色薄(정기무광일색박)
빛 잃은 천자 깃발 햇빛마저 흐릿하네
蜀江水碧蜀山靑(촉강수벽촉산청)
촉나라의 파란 가람 산천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성주조조모모정)
임금은 아침저녁 양귀비 생각에 잠기도다
行宮見月傷心色(행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보는 달에 마음 절로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밤비에 말방울 소리 애간장을 끊노나
天旋地轉回龍馭(천선지전회룡어)
어느덧 정세 바뀌어 임금 돌아오는 길
到此躊躇不能去(도차주저불능거)
이곳에 이르러서는 차마 걸음 못 떼누나
馬嵬坡下泥土中(마외파하니토중)
마외 역의 한 자락 기슭 진흙더미 속에
不見玉顔空死處(불견옥안공사처)
고운 얼굴 어디 가고 죽은 자리만 남았던고
君臣相顧盡沾衣(군신상고진첨의)
임금 신하 서로 보며 눈물로 옷깃 적시네
東望都門信馬歸(동망도문신마귀)
동쪽 성문 바라보며 말에 길을 내맡기니
歸來池苑皆依舊(귀래지원개의구)
되돌아와 본 그 뜨락은 예와 마찬가지로다
太液芙蓉未央柳(태액부용미앙류)
태액 못의 부용이여 미앙 궁전의 버들이여
芙蓉如面柳如眉(부용여면류여미)
부용은 그대 얼굴이요 버들가지는 그대 눈썹
對此如何不淚垂)(대차여하불루수)
이들을 대하고 어찌 눈물 아니 떨구리
春風桃李花開日(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이 활짝 피고
秋雨梧桐葉落時(추우오동엽락시)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은 떨어지네
西宮南內多秋草(서궁남내다추초)
서쪽 궁전 남쪽 뜨락 가을 풀 우거지고
落葉滿階紅不掃(낙섭만계홍불소)
섬돌에 진 붉은 잎들 쓸지를 않는구나
梨園子弟白髮新(이원자제백발신)
이원의 노릇바치들 흰머리 돋아나고
椒房阿監靑娥老(초방아감청아로)
시중들던 초방 고자와 시녀들도 늙었네
夕殿螢飛思悄然(석전형비사초연)
반딧불 나는 저녁 궁궐 더욱 처량해
孤燈挑盡未成眠(고등도진미성면)
외로운 등 심지가 다 타도록 잠 못 이루니
遲遲鍾鼓初長夜(지지종고초장야)
더딘 쇠북과 북소리에 밤이 긺을 알겠네
耿耿星河欲曙天(경경성하욕서천)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은 다가오고
鴛鴦瓦冷霜華重(원앙와냉상화중)
차디찬 원앙 기와 서리꽃이 무거운데
翡翠衾寒誰與共(비취금한수여공)
함께 덮을 이 없어 싸늘한 비취 이불
悠悠生死別經年(유유생사별경년)
삶과 죽음이 갈라 놓아 어느덧 몇 해인가
魂魄不曾來入夢(혼백부증래입몽)
단 한 번 꿈속에서라도 만나 볼 길 바이 없네
臨邛道士鴻都客(임공도사홍도객)
임공의 어느 도사가 있어 도성에 머무는데
能以精誠致魂魄(능이정성치혼백)
정성으로 죽은 넋 다루어 불러올 수 있다 하니
爲感君王輾轉思(위감군왕전전사)
임 그려 잠 못 드는 임금을 위하여
遂敎方士殷勤覓(수교방사은근멱)
방사로 하여금 그대 넋을 찾게 하였네
排空馭氣奔如電(배공어기분여전)
그 방사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치솟으며
升天入地求之遍(승천입지구지편)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헤매는데
上窮碧落下黃泉(상궁벽락하황천)
위로는 벽락에서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양처망망개불견)
모조리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도다
忽聞海上有仙山(홀문해상유선산)
문득 들리기를 바다에 신선의 뫼가 있고
山在虛無縹緲間(산재허무표묘간)
그 뫼는 아스라이 허공에 떠 있다는데
樓閣玲瓏五雲起(누각령롱오운기)
그 속에 아롱진 다락집 다섯 빛깔 구름 일어
其中綽約多仙子(기중작약다선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살고 있다 하더라
中有一人字玉眞(중유일인자옥진)
그 가운데 옥진이란 선녀가 하나 있어
雪膚花貌參差是(설부화모삼차시)
흰 살결 고운 얼굴이 양귀비인 듯 하다 하네
金闕西廂叩玉扃(금궐서상고옥경)
사자는 금 대궐 서쪽 방 옥문을 두드리고
轉敎小玉報雙成(전교소옥보쌍성)
소옥더러 쌍성에게 알리도록 말 전하니
楣漢家天子使(문도한가천자사)
한황제의 사자가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구화장리몽혼경)
아홉겹 장막 안에서 놀라 깨어난 넋이여
攬衣推枕起徘徊(남의추침기배회)
베개 밀치고 옷 집어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屛迤邐開(주박은병이리개)
구슬발 은병풍 헤치고 열고 나오네
雲髻半偏新睡覺(운빈반편신수각)
구름 머리 반 드리우고 갓 깨어난 그 자태
花冠不整下堂來(화관부정하당래)
머리장식 안 고친 채 집에서 내려서네
風吹仙袂飄飄擧(풍취선몌표표거)
건듯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猶似霓裳羽衣舞(유사예상우의무)
무지개치마 깃옷춤 추던 그때 모습 그대롤세
玉容寂寞淚欄干(옥용적막루난간)
옥같은 얼굴 수심 젖어 난간에 눈물 떨구니
梨花一枝春帶雨(이화일지춘대우)
활짝 핀 배꽃가지 봄비에 젖었도다
含情凝睇謝君王(함정응제사군왕)
정 머금은 눈길 돌려 임금께 전할 말 사뢰되
一別音容兩渺茫(일별음용량묘망)
헤어진 뒤로 임의 얼굴 목소리 듣지 못하여
昭陽殿里恩愛絶(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받던 은혜와 사랑은 끊어지고
蓬萊宮中日月長(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 지나간 지 오래건만
回頭下望人寰處(회두하망인환처)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바라봐도
不見長安見塵霧(불견장안견진무)
장안은 안 보이고 짙은 안개와 먼지 뿐이었오
唯將舊物表深情(유장구물표심정)
이에 오래 지닌 물건으로 깊은 정 표하려 하오니
鈿合金釵寄將去(전합금채기장거)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가지고 가오시라
釵留一股合一扇(채류일고합일선)
비녀는 두 쪽 내고 상자는 갈라서
釵擘黃金合分鈿(채벽황금합분전)
반 토막 비녀에다 반 쪽짜리 상자를 주며
但敎心似金鈿堅(단교심사금전견)
우리 두 마음 이처럼 굳어 변치를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천상인간회상견)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임별은근중기사)
사자를 떠나보내며 간곡히 다시 하는 말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량심지)
임과 나 두 마음만이 아는 맹세가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일곱째 달 이렛날에 장생전에서 나눈 말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사람 없는 깊은 밤에 속삭이던 우리 둘은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한 날개씩 함께 나는 새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련리지)
땅에서는 한 나무로 얽힌 가지 되자 했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천지가 오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은 끊일 날이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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