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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조선 초의 재이관 Ⅲ 조선왕조실록 가뭄 기록의 특성 Ⅳ 태조·정종·태종연간 가뭄 기록의 실제 Ⅴ 결론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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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긴 역사 주기에서 근대라고 부르는 19·20세기는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시기였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이전과 달리 자연이 아니라 산업과 경제에 의존하게 되었다. 역사 연구자 또한 이러한 근대적 사고관을 공유하여 전근대인들의 일상적 삶에 미치는 자연현상의 영향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였다. 20세기 후반부터 자연과 경제에 대한 근대적 사고는 한계에 직면하였고 근대인들의 기존 믿음은 변화하게 되었다. 자연과 경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나타나면서 기상현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역사학 쪽에서도 기상과 기후의 장기적 변동과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산업화가 빨랐던 유럽과 미국에서 1960년대 이후 시작되었고, 한국도 최근 이와 같은 경향의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적 수준에서 기상 및 기후현상을 500년 넘게 지속적으로 축적한 기록으로서 전근대의 기상 및 기후 연구와 관련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본 논문은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후 및 기상 기록 중에서 특히 가뭄현상에 관한 기록에 비중을 두고 가뭄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응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특히 기우제·금주령·관형·사시라는 네 종류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Ⅱ 조선 초의 재이관
‘재이災異’란 일식·월식 같은 하늘의 이변과 가뭄·홍수·지진·이상기온 같은 지상의 이변을 포함하는 천재지변이다. 재이관은 이와 같은 재이현상에 대한 사회적 관념을 의미한다.
조선왕조의 재이관은 유학의 재이관에 기초하나, 유학이라는 고도의 추상적 관념 체계의 등장 이전에, 전통사회의 재이관은 이미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농업에 대한 사회경제적 의존이 절대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자연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지극히 절대적이었고, 그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여 예측·통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행동양상은 자연현상을 인격화하여 순조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유학의 재이관의 정서적 기반 또한 전근대인들의 일상적 행동양식에 있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 혹은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하늘天과 사람人이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되어서 서로 감응한다는 주장이다. 유학은 중국 한漢나라에서 국가 이념화되어, 공동체 운영의 원리로 채택되었다. 어떤 정치이념이 국가적 이념이 되려면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여길 수 있을 만한 어떤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전근대사회에서 유학이 국가이념이 되기 위해서, 자연과 공동체의 관계를 설명할 원리로 제시한 것이 바로 천인합일·천인감응의 개념이다.
천인합일의 ‘합일’이란 사람과 자연 사이의 ‘감응’이며, ‘감응’이란 사람과 자연이 어떤 방식의 상호작용 혹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뜻한다. 유학은 이 개념을 흡수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자연과 공동체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천인합일·천인감응설이 정치현실에서 갖는 의미는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했다. 하나의 방식은 “왕조나 임금은 백성들의 의중에 감응한 천명天命에 따라 세워지게 된다는 통치의 명분을 제공하며, 동시에 왕조가 바뀌게 되는 역성易姓혁명의 당위 역시 ‘천명의 사라짐’에서 찾”는 것이었다. 다른 한 방식은 대개 재이의 원인은 모두 국가의 실정失政에서 나오며 하늘은 재해를 통해 꾸짖고 경고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변화된 정치적 상황이 돌발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새로운 정상적 상황임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천인합일·천인감응의 개념을 유용하게 사용했다.
유학의 천인합일·천인감응설은 조선의 건립과 왕의 통치권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왕에게 자연현상이 공동체에 주는 영향에 대한 책임도 부여했다. 적지 않은 수의 신하들을 비롯해서 태종의 경우에도 천인감응의 원리를 글자 그대로 확신했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태종14년에 가뭄이 심각해질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태종은 “가뭄을 걱정하여...(중략)...내가 (처음에는 기우제를) 행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돌이켜 생각하니 백성들이 재해를 입는 것을 내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에게 뜻이 없이 없다고 한 적이 있는 까닭으로 뜻을 굽혀서 이를 행하였다.”고 말하였다. 요컨대, 천인합일·천인감응설은 그 자체의 타당성만큼이나 그것이 감당하고 있는 현실적 기능으로 인하여 부정될 수 없는 논리였던 것이다.
Ⅲ 조선왕조실록 가뭄 기록의 특성
가뭄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전체 재이현상 기록 중 절반을 넘는 빈도로 나타난다. 수많은 재이현상들 중에서도 가뭄은 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가뭄은 흉년으로 이어져서 공동체 전체에게 현실적인 재앙으로 변할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반도 기상 기후의 특징은 사계절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농사에 필요한 1년 강수량의 대부분이 여름 장마철에 집중되고, 나머지 계절에는 강수량이 많지 않다. 특히 겨울부터 봄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건조기 이후의 강수는 벼를 포함한 각종 작물의 파종시기와 겹쳐 한 해 농사의 흥망을 좌우했다. 농사와 긴밀한 관계의 자연조건과 빈약한 수리시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에 대한 절박한 기록으로 표현되었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가뭄 관련 기록을 포함해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기상현상 기록을 객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이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의 다른 입장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상기록을 기후의 장기적 변화를 규명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과, 조선왕조실록 기상기록이 다른 사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정치적인 상황을 반영할 뿐이라고 보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실록의 기상기록을 ‘객관적인 기상정보’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실록의 성격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실록은 작성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며, 관점에 따라 취사선택된 결과임에 틀림없으나, 실록 기록의 몇 가지 특성에서 객관성을 포착할 수 있다.
하나는 현왕現王이 선왕先王의 실록 내용을 열람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현실 권력의 소재에 따라 실록이 아닌 ‘일기’라고 명명하고, ‘개수실록’ 혹은 ‘수정실록’을 만들면서도 본래의 것을 없애지 않았다는 측면 또한 있다. 조선의 공식적 역사 기록자들은 관리官吏로 존재하면서도 최고 권력자에 대해서 기록의 객관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한 당파의 일원이었을지라도, 다른 당파에 속한 실록 기록자들의 기록을 없애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과정에서 다른 관점으로는 중요했을 수 있는 부분이 누락되었을 수 있지만, 없었던 일을 기록했거나, 실제 했던 일을 왜곡하여 전달하지는 않았다. 실록은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사실들을 선별적으로 기록하고, 선택된 사실들에 대해서 일정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것은 역사 기록의 보편적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실록에 실린 기상정보 전체를, 그대로 이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상정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실록의 가뭄기록은 그 빈도에 비해 지속기간과 지역 등의 구체적인 정보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하나의 기상정보 자체가 사실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록 기록의 객관성 여부를 가늠하기보다는, 그것을 객관화할 다양한 분석수단을 고안하는 것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
Ⅳ 태조·정종·태종연간 가뭄 기록의 실제
태조·정종·태종대 가뭄의 실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전에, 태조에서 태종대에 이르는 기간의 가뭄 수준이 어떤지를 조선왕조 전체 기간과 비교하여 대략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를 통해 이미 대략적으로 파악되었다. 우리가 분석대상으로 하는 기간인 태조에서 태종 때까지는 1392~1418년 27년간이다. 조선은 10년 단위로 평균 23회 정도의 가뭄이 발생했다. 1400~1420년 사이에 가뭄은 평균 25.7회 정도 발생했다. 이 시기 동안 가뭄의 발생 빈도는 대체로 고르기 때문에, 평균을 내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왜곡의 경우는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대상으로 하는 기간은 조선왕조 전체의 가뭄 빈도 평균보다 12%정도 많은 가뭄이 발생하고 있다. 비록 평균치를 약간 상회하고 있으나, 태종대까지의 가뭄 빈도는 평균치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가뭄 기록은 그 자체로는 통계수치로 이용하기에 대단히 불완전하다. 개별 가뭄 사례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상황이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가뭄 기록 중, 이 세 가지 조건에 대한 만족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첫째, 지역적으로 어떤 범위에서 가뭄이 들었는가. 가뭄은 그 자체의 속성상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기 때문에 그 지역 전체를 포괄해서 가뭄 상황을 기록한 경우는 많지 않다. 둘째, 가뭄의 지속기간이 얼마나 되는가. 실록에 등장하는 가뭄 기록 중, 그 시작을 정확하게 기록한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개는 가뭄이 예상되거나 심각해지는 시점부터 가뭄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셋째, 가뭄이 농작물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가. 『태종실록』의 기사에서 가뭄의 지속기간과 그 영향 사이의 관계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몹시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기사에서 태종이 경상도 가뭄에 대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자, 경상도 관찰사는 가뭄이 지속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가뭄 자체의 지속 정도가 아니라 농작과의 관련성임을 말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뭄 그 자체에 대한 기록이 불완전한 것에 비해서, 가뭄에 따른 중앙정부의 대응은 대단히 체계적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유학의 재이관과 특히 신왕조 건국 초라는 상황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 대응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실록에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뭄과 관련된 대부분의 정부 조치는 고려왕조 이래로 지속되고 있었다. 가뭄이 들었을 때 중앙정부는 궁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 세금을 면제하는 것, 요역이나 공사를 중지하는 것 등의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 중 거의 예외 없이 가뭄 현상이 지속되는 중에 취해졌고, 가뭄이 끝나면서 해제된 네 가지의 조치를 선택했다. 기우제·금주령·관형[형벌을 너그럽게 하는 것]·사시[시장 옮기기]가 바로 그것이다.
기우제를 지낸 날과 금주·관형·사시 조치가 취해진 날의 관계에서 볼 때, 이 모두가 이미 가뭄이 상당히 진행된 후에 등장하는 대응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 조치들은 상호보완적인 정보로 볼 수 있으며, 이들 모두를 합하여 가뭄의 지속기간을 파악 가능하다. 관형과 사시는 같은 수준의 가뭄 대응책으로 볼 수 있다.
가뭄은 비가 오지 않는 상태가 지속됨을 말하지만, 좀 더 핵심적인 사항은 농작農作
에 필요한 비가 오지 않는 상태를 말할 것이다. 한반도의 농사주기로 볼 때 비가 집중적으로 필요한 시기는 4월과 5월이다. 최초 기우제일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3월에 처음으로 기우제를 지낸 해는 없다. 이것은 매년 3월에 비가 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월 가뭄은 농작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4월에 최초 기우제가 있었던 해는 초봄 가뭄이 심했음을, 6·7월에 최초 기우제가 있었던 해는 늦가뭄이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5월에 최초 기우제를 지냈던 해는 초봄 가뭄은 심하지 않았어도, 농작에 필요한 강우량 수준에 많이 못 미친 해였다고 보아야 한다.
기우제를 지냈더라도 5월 하순까지 농작에 필요한 충분한 비가 오면 그 해는 가뭄이 든 해로 볼 수 없다. 나아가, 언제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그 해의 농작이 흉작으로 귀결되는가 하는 것도 일률적으로 정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6월 중순까지만 비가 오면 치명적인 피해를 막을 수 있었고, 이 기간을 지나 7월 초까지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가뭄 피해를 피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한 해의 가뭄 수준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우제·금주령·관형·사시를 종합하여 판단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가뭄이 종료된 날의 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예외 없이 실려 있다. 주로 농작과의 관련성, 즉 가뭄이 흉작으로 이어졌는가를 기준으로 구분하여 볼 때, 가뭄 자체가 없었거나, 5월말까지 비가 온 경우는 가뭄이 없었던 해로, 6월 중순 정도까지 비가 온 경우는 중간 정도의 가뭄으로, 초봄부터 가물기 시작해서 6월 하순에 이르기 까지 가문 해는 심한 가뭄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서 강우와 흉년의 상관관계를 보완할 수 있는 기록은 기근이나 진휼에 대한 기록이다. 태종 5년은 가뭄이 심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오는 봄에는 반드시 크게 주릴 것이니 구제할 물건을 미리 저축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실제로 다음해 1월부터 금주령이 내려지고 있으며, 황해와 경기·강원도·경상도에 차례로 진휼이 이루어지고 있다.
Ⅴ 결론
지금과는 물리적·사회적으로 다른 과거의 기상·기후에 대한 기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조건과 기상·기후 기록의 목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전근대사회 대부분이 그랬듯이, 조선왕조에서도 기상과 기후는 지금보다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측면에서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졌다. 전근대시대 통일국가의 형성이 빨랐던 중국과 한국은 기상과 기후를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의 획득과 관련지어 일찍부터 발전· 활용하였다. 그것이 바로 재이관의 형태로 발전했던 것이다.
기상 및 기후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히 변화무쌍하다. 기상 및 기후현상의 종류, 개별 기상 및 기후현상도 매우 다양하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수많은 기상 및 기후현상 중에서 단일 항목으로는 가장 비중이 큰 가뭄 현상을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이렇게 분석 대상을 제한했다고 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줄어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의 기상 및 기후 현상을 오늘날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과거 자료의 체계적 축적이 불가피할 것이다. 때문에 장기간의 기상 및 기후 변동과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에 대한 연구는 장기간의 연구가 필요하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수많은 기상 및 기후현상 중에서 단일 항목으로는 가장 비중이 큰 가뭄 현상을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가뭄 발생 기록은 풍부하지만, 개별 기록의 내용은 대단히 개괄적인 것에 그치고 있다.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본 논문은 몇 가지 분석 장치를 고안하였다. 기상현상의 내용보다 상세하게 기록된 정부 조치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태조-정종-태종 연간 가뭄 상황을 연구하였다.
조선의 사람들은 기상현상을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닌, 하늘이 왕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로 보았다. 정부조치는 그 신호에 대한 일정한 대응이었다. 위에서는 가뭄에 대한 수많은 대응방식 중 기우제·금주령·관형·사시 네 가지에 주목하였다. 가뭄이 지속되는 중에 취해진 네 가지 정보를 종합하여 태조-정종-태종연간 가뭄의 지속기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태조-정종연간과 태종4년까지는 가뭄이 흉년으로 이어진 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 5·7년에는 가뭄이 흉년으로 이어졌으며, 태종 11년부터는 태종 12~13년을 제외하고 가뭄에서 자유로운 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태종 11·15~16년에는 가뭄이 심각한 흉년으로 이어졌다.
Ⅵ 맺음말
조선시대 민중들의 역사를 접하면서 정치사가 곧 역사라고 믿었던 예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중들의 역사와 정치사의 관계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인지 혹은, 약간은 서로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후자가 좀 더 가능성 있게 느껴지던 찰나에 위의 논문 「조선 태조·정종·태종연간 가뭄 기록과 가뭄 상황」을 발견하였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의 기상 기록에 근거하여 조선 초기의 가뭄 상황을 분석한 논문이다. 가뭄에 대한 것이라면 민중들의 역사와 정치사의 정 가운데에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논문에서는 실록에 의거한 기록을 분석하고 정치적 측면에서 서술한 경향이 있으나, 논문을 읽고 요약하는 과정에서 가뭄으로 인한 사회적, 민중적인 모습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민중들의 삶과 직결되는 의미로서의 가뭄,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 행동해야만 하는 대상으로서의 가뭄. 가뭄은 조선의 농업사회에서 민중에게도 권력자에게도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에는 일상에서 민감하게 느끼지 않는 기상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가뭄의 해갈을 위한 염원에는 다양한 주체의 다양한 바람이 숨 쉬고 있었다. 기우제와 금주령, 관형, 사시와 같은 노력을 전근대적 사고의 한계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절실함과 진심을 담은 그들의 염원은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었고,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참고문헌
이정철, 「조선 태조·정종·태종연간 가뭄 기록과 가뭄 상황」, 『국학연구』, 한국국학진흥원, 2013
첫댓글 이번에 저희가 배우는 전염병과 기근에 내용에 접목해보면.좋을꺼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