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8장 1-8절
설교제목 : 낯선 손님 맞기
불청객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한가위 추석이 단지 연휴를 넘어서 뿌리를 깊이 생각하고 뿌리와의 유대를 형성하여 더욱 단단해지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여전히 한낮의 무더위는 가시지 않았지만, 저녁에 걷기 위해 나가보면 시원한 바람이 우리 곁에 가을을 분명히 알리고 있습니다. 요즘 한시간 가량 걷다 보면 작은 천을 따라서 적게는 5명, 많게는 10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서 조깅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동네에서 달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런닝 모임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나이든 분들이 대체로 많이 걸으시고, 저녁에는 청장년층이 많이 걷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걷고 운동기구에서 열심히 몸을 관리하는 것은 건강 때문일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낯선 시간 앞에서 자신을 관리하려는 움직임입니다. 이런 건강한 자기 관리는 낯선 방문객이 예측불가한 삶의 내일에 다가올 때 적어도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합니다. 낯선 것들이 예고없이 찾아오기에, 그 방문객을 어떤 힘과 지혜로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낯선 방문자를 맞이할 바른 태도와 습관, 관리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낯선 것들이 불쑥 방문할 때 무방비 상태이거나 바르지 못한 삶의 태도로 일관되어 있다면, 큰 낭패와 실패에 노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딥페이크(Deep fake)가 미국 대선과 아이돌 그룹과 관련하여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하여, 기존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합성하는 영상 편집을 일컫는 말입니다. 인공지능의 심층 학습을 뜻하는 딥 러닝(deep learning)과 가짜를 뜻하는 페이크(fake)의 합성어입니다. 첨단기술을 활용하여 악의적으로 가짜정보를 확산시키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의 전형적인 예일 것입니다. 낯선 정보와 낯선 것들이 다가올 때 우리 자신에게 분별력과 바른 자세가 없다면, 그런 낯선 것들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겉모습과 소문으로 사람과 사태를 파악한다는 것이 자칫 위장되고 거짓된 정보를 무분별함으로 믿게 하고, 그 가짜를 더욱 선전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불청객이나 낯선 것들이 다가올 때 조금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바른 자세와 분별력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낯선 자의 방문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는 새이름을 주셨고, 사래에게는 사라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자신의 자손이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겠노라 계약을 맺었고, 아브라함은 할례의식을 행하였습니다. 보다 더 높은 목적과 소명을 위해 자기희생의 표로서 하나님과 약속한 것입니다. 이 상징적 할례를 통하여 아브라함은 보다 높은 인격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므레 상수리 나무 곁에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서 보니 낯선 세 사람이 맞은 편에 서 있었습니다. 상수리 나무는 고대 근동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던 장소로, 어떤 신탁이나 의식이 행해졌던 신령한 나무로 여겨졌습니다. 이 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 축이자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초월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을 연결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 장막을 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어떤 소통을 기다리며 갈망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면 어떤 곳에 나의 삶을 정렬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도서관에서 책과 연결된 사람은 그 책과 소통하게 되고 그 책이 주는 모든 인간적 경험과 지혜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그 게임이 주는 자극적 감각과 그 게임이 주는 경험과 친숙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그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가 결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내담자는 중학교시절부터 친구들과 사귈 수 없어서 그는 더욱 극단적으로 게임에만 몰두하였고 세상과는 단절된 채 살게 되었습니다. 부모와의 극단적 대치 속에서 대학은 들어갔지만, 갑작스럽게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며 그때부터 조울증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잘못 설정하고 삶을 도피하며 움츠려 들었을 때, 결국 삶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성함과 소통을 원했기에, 그 나무 곁에 장막을 치며 언제든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것과 좋은 곳을 선택하여 보다 넓고 깊은데로 나아갈 수 있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뜨거운 열기가 한 창일 때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보니, 낯선 세 사람의 방문객이 맞은 편에 있었습니다. 중동의 뜨거운 대낮은 활동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었다는 표현은 마치 무언가를 계속 기다리는 사람인냥 뜨거운 대낮에도 주시하여 주위를 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고개를 드는 것은 고도로 의식적이며 의지적인 행위이며, 이는 우리의 삶과 정신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도적으로 주위를 보지 않으면 내 앞에 다가오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낯선 것들이 다가올 때 고개를 들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갑니다. 이 세 방문객이 주님이심에도 고개를 들어 보지 않는다면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감히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수많은 꿈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낯선 자들의 방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개들어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놓쳐버리고 그저 시간의 강물 속에서 정처없이 흘려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스위스의 수호성인인 니콜라우스 폰 플뤼에가 하나님께 귀의하기 위해 출가하였지만, 다시 란프트(그의 고향)로 돌아와서 그는 환영을 봅니다. 그가 집안 일을 돌보고 있을 때 낯선 세 사람의 방문자가 나타나서 그와 대화를 하면서 약속하고, 떠나갔습니다.
“네가 다만 영원한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했다면, 나는 네가 70세에 이르면 자비로운 하느님이 너의 노고를 가련히 여겨, 너를 모든 고난에서 구원할 것임을 분명히 약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동안 네가 꾸준히 인내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나는 네게 내세의 영원한 삶에서 곰 발톱과 무적의 군대의 깃발을 주겠다. 그러나 우리를 기억해야만 하는 십자가는 네가 지고 가도록 남겨놓겠다.”[폰 프란츠 ML지음, 한오수 옮김(2023) : 니콜라우스 폰 플뤼에의 환영, 한국융연구원, 서울, p71-72]
이런 세 남자는 삼위일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대화를 보면 그들이 마치 하나님을 소개하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일인칭 화자시점이 아닌 것입니다. 그에 대한 약속으로 곰 발톱과 내세의 강력한 군대의 사관 후보생의 지위를 보장하는 상징적 내용은 이교도 신인 보탄과 연결됩니다. 이것에 더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의미는 니콜라우스 수사에게 이교도적인 신상과 기독교의 신상을 연합함으로써 정신의 계속된 발전을 이루어가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낯선 자의 방문을 통하여 다가올 시간 앞에서 보다 높은 정신 발전의 선취를 예고하는 환영이었습니다. 우리의 꿈과 환영은 바로 그런 낯선 것들로 채워져 있고, 그것을 통해 미래의 그림이 선취되는 것입니다. 이런 낯선 것들은 어떤 미래의 예고와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고개를 들어 그것을 주시하고 다가가야 합니다.
낯선 손님 환대하기
아브라함은 낯선 세 사람을 보자마자 맞이하며 엎드려 절을 하고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발도 씻으시고, 먹을 것도 먹으면서 쉬다 가시라고 권합니다. 아브라함은 극진히 이 손님들을 기꺼이 모시어 환대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환대야말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낯선 손님들을 그저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극진히 모십니다. 우리는 나에게 다가오는 낯선 손님들을 얼마나 쉽게 지나쳐 버리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의식의 문을 두드리는 무의식의 노크나 이미지가 나타날 때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말처럼,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18:3).”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쉬시고, 심지어는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길 바랍니다고 해야 합니다.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떠나시라는 것은 열기로 지쳐 있고 힘든 상태에서 충분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새로운 분위기로 전환된 다음에 가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밖에 다가오는 낯선 손님이나 우리 안에 낯선 손님이 일으키는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 우울감, 나를 힘겹게 하는 심상이 나타날 때 취해야할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때로 우울할 때 그 우울함이 충분히 머물러서 다시 기분이 상쾌해질 때까지 충분히 쉬고 먹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노래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머어머한 일이다.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내게 다가오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곱씹고 또 곱씹게 하는 대목입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 현재, 미래, 그의 일상이 오기 때문에 쉽게 보아서는 안되고, 그 현재의 외양을 보고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부서지고 또 부서졌을 그 마음을 혼의 입김인 바람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듯, 그 바람처럼 더듬어 부는 것을 흉내낸다면 그것이 환대임을 아주 분명하게 노래합니다. 바람처럼 감싸줄 수 있다면, 그것이 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4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낯선 이들이 우리에게 방문하고 나타날 때, 과거와 현재, 미래를 머금고 있는 낯선 방문객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기분이 상쾌해질 때까지 환대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 우리의 미래의 그림을 완성을 할 수 있는 복된 인생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