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청람(可連晴嵐)은 완산승경 32경 가운데 하나다. 가련은 전주시 덕진동 덕진공원 서편에 있는 높이 106미터의 가련산을 말한다. 청람은 갤청(晴), 아지랑이람(嵐)이다. < 멀리 보이는 산의 푸르스름한 기운 > < 화창한 날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 < 화창하게 갠 날씨 >등을 표현한다. 따라서 가련청람은 ‘가련산의 아름다운 아지랑이’를 가리킨다.
청람은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등장하는 단어다. 소상팔경은 호남성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있는 소상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 산시청람(山市晴嵐), 어촌석조(漁村夕照), 소상야우(瀟湘夜雨), 원포귀범(遠浦歸帆), 연사만종(煙寺晩鐘), 동정추월(洞庭秋月), 평사낙안(平沙落雁), 강천모설(江天暮雪)을 이른다.
가련산에는 6.25 때 전사한 학도병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있다. 가련산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북쪽 산자락에는 하가동과 아랫가르내, 서쪽 자락에는 웃가르내, 남쪽자락에는 사평이 있다.
아랫가르내의 다른 이름은 하가리(下可里)다. 아랫가르내 북쪽으로 가르내에 놓인 다리가 추천교(湫川橋)다. 이전에는 용산다리 혹은 전주교로 불리기도 했다. 이 다리에는 유래가 있다.
가르내(현재의 하가마을) 일대는 전주이씨들의 집성촌이었다. 호가 추탄(楸灘)인 전주이씨 후손 이경동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어느 날 밤 사경을 헤매었다.
이경동은 급히 인근 비석날(현재 팔복동 버드랑주)에 사는 명의한테 찾아가 처방약을 받아들고 귀가를 서둘렀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주천이 삽시간에 범람했다.
이경동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물을 건너기 위해 전주천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물살이 양쪽으로 쫘악 갈라지면서 길이 열렸다. 홍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다급한 이경동은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그의 부친은 얼마 후 기사회생했다. 물론 냇물은 추탄이 건너간 다음 다시 합쳐졌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그의 효성에 하늘도 감동했다며 칭송이 자자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나무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바로 추탄의 추 자를 딴 추천교(楸川橋)다. 냇물이 갈라진 웃마을을 상가리(웃가르내), 밑으로 갈라진 마을은 하가리(아랫가르내)라고 지금도 부른다.
추탄 이경동은 황방산 아래 마전 마을(지금의 서신동) 출신이다. 추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황강서원에 제향된 황강 이문정의 후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이백유의 손자다.
그는 우승지 벼슬을 지낼 때 왕비 윤씨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이경동은 대사헌, 예조참판, 병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동지경연사 등의 벼슬을 역임한 후 낙향하여 추천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말년을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팔복동 황방산 밑에는 이경동의 효행을 기린 비가 있다.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지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 추탄선생 조대비(嘉善大夫 兵曹參判兼 知義禁府事 司憲府 大司憲 楸灘先生 釣臺碑)”라고 새겨져 있다.
아랫가르내의 동쪽으로는 호반촌이 있다. 1970년대 택지조성사업 때 만들어진 동네다. 아랫가르내에서 가련산 자락을 따라 나있는 길이 있다. 이곳으로 내려 가다보면, 아랫가르내를 막 벗어나서 조그만 다리가 하나 있었다. 이 다리를 구성다리라고 했다.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다.
구성다리에 당도하기 전에 있는 산모퉁이는 구성다리모팅이라 했다. 가련산에서 구성다리모팅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에는 예전에 소나무가 꽉 들어차서 왕솔백이라고 했다. 구성다리를 지나 얼마쯤 가다보면 학동마을이 있다.
왕솔백이와 학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는 고라실이라고 한다. 제일 아래쪽은 아랫고라실, 가운데는 웃고라실, 제일 뒤쪽은 뒷고라실이라 부른다. 뒷고라실은 전주지방법원 바로 뒤쪽과 덕진중학교 맞은 편 골짜기로, 재경골이라고도 한다.
전주천은 이 지역을 벗어나면서부터 양편에 고사뜰과 사평뜰을 두고 북진하다가 고사뜰 북쪽 꼭지점에서 삼천과 만나 가래여울을 형성한다. 전주천이 건산천의 물길을 받아 삼천과 합류되는 구간이다.
전주천은 이곳에서부터 불리는 이름도 달라진다. 바로 이곳부터 만경강까지 이어지는 물줄기를 추천(楸川) 혹은 가래여울, 가리내(가르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