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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 위대한 서신 갈라디아서
‘큰 글자’로 번역된 ‘큰’은 헬라어 πηλίκοις(펠리코스)로 ‘얼마나 위대한’의 뜻이다. 한글은 ‘큰’으로 번역한데 비해 히브리어 성경은 ‘위대한, 발전, 성장’의 뜻을 가진 גדול (가돌)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한글 번역의 ‘큰’ 보다 헬라어 원어에 더 가깝게 번역되었다. 또한 ‘글자’의 원어는 헬라어 γράμμασιν(그람마)로 ‘기록, 편지, 서신’등의 뜻이다. 그러므로 ‘큰 글자’ 보다는 성령의 감동으로 쓴 ‘위대한 서신’, ‘위대한 편지’가 더 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 갈라디아서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2 박해를 받는 자 vs 영광을 받는 자
할례파들이 이방 사람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유일한 목적은 박해를 면하려는 것 뿐이었다. 이들은 박해와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할례를 통해 육체로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은 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유업에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말이다. 율법에 있는 할례를 행했다고 해서 그들을 율법 준행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할례는 율법의 한가지일 뿐이다. 우리 안에 말씀인 하나님을 지킬 필요가 없다면 고난은 없다. 예슈아께서 만약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있었을까? 그분은 유월절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유월절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이처럼 말씀을 우리 안에서 살아내기 위해 우린 죄와 죽도록 싸워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우린 그저 교회 다니는 육체를 자랑하는 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할수만 있다면 이방인들로 할례를 받게 하려고 했을까? 왜냐하면 더 많은 이방인들이 할례파를 추종할 수록 이들은 더욱 영광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갈4: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갈4:17)
3 율법을 지키는 자 vs 육체를 자랑하는 자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육체를 따르는 자들일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일까? 성경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은 창조물인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있다(전12:13). 우린 율법을 따르는 자를 지식으로만 믿고 육체로 섬기는 자들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 즉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영적인 자들이다. 물론 율법을 지키는 척하는 자들을 예슈아께서는 외식하는 자, 가식적인 자라고 책망하셨다. 당시 무늬만 유대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은 지키는 척하고 그들의 전통인 사람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그 당시 분위기였다. 모두가 사람의 교리를 지킬 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다. 그러나 충분히 도전할 만 하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위로와 은혜가 지금 당하는 비난과 고난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이 신령한 자들이다(롬7:14).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7:12,14,15)
4 교회는 천국 열쇠를 받았다
할례파는 율법의 일부만 취하고 나머지는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할례를 통해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구원의 언약이 있는 백성이 되었으므로 오히려 율법을 행하는데 우유부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육체의 표시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개념은, 거룩한 삶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율법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인생은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시들지만, 오직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사40:8). 또한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마5:18). 즉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율법은 계속해서 성취될 것이다. 만약 예슈아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바뀌고 끝났다면 다시 말해 더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면, 교회가 말씀이신 여호와를 부인하고 그의 아들 예슈아를 부인하는 것 같이 스스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매우 위험한 교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천국 열쇠를 받았다(마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16:18,19)
5 천국을 여는 지식의 열쇠
천국열쇠가 무엇일까? 예슈아일까?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예슈아의 이름만 있으면 천국에 가는가? 예슈아의 이름이 천국열쇠인가?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예슈아께서는 율법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들이 율법이 아니라 전통을 준행하라고 가르치고 전통을 율법이라고 부르며 왜곡한다면 그것은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까지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천국 열쇠를 주셨다. 그것이 율법이라는 지식의 열쇠이다. 뱀의 지식, 세상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척하는 자들이나 지키지 않는 자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은 것이다(눅11:52).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면 당시 율법사들처럼 율법을 가르치면서 지키지 않고 천국 문을 가로막던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눅11:52)
#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6 불법으로 자신을 높이는 교만
언약의 표징인 할례일지라도 육체를 자랑하고 언약에 불순종하게 한다면, 예슈아의 못 박히심을 헛되게 하고 자신을 더럽히고 넘어지게 하는 우상 숭배가 된다. 왜냐하면 불순종하는 것은 그의 머리가 마귀임을 말하는 것이고 곧 육신적인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일3:8). 또한 불순종한다면 그는 창조주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교만한 자이다. 율법중에서 할례를 행한다고 해서 그를 율법의 준행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일지라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할례는 헛된 것이다. 할례가 할례가 되기 위해서는 율법을 준행해야 함을 바울이 증언하고 있다(롬2:25). 이에 반해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육체를 복종시키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들이고 거룩한 하나님을 거룩한 법도로 섬기는 영적인 자들이라고 바울은 증언하고 있다(롬7:12,14).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롬2:23-25)
7 진정한 할례자인 새로운 피조물
당시 할례파들은 할례의 우월성을 하나님의 유업과 연결하였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는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할례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순종이 없는 할례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죄성이라는 불순종을 십자가에 못박고 순종으로 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고 예슈아의 십자가는 말하고 있다. 당시 무할례자(이방인)들이 예슈아로 인해 복음을 듣고 유대교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유대인은 이방인들을 향해 높은 마음을 품었지만 이들은 불순종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율법에 순종하는 자가 진정한 내면적 유대인(할례자들)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이다. 육체는 이방인이나 내면은 순종하는 유대인인 것이다. 반대로 육체는 유대인이나 내면은 불순종하는 이방인도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시 말해 할례자이든 무할례자이든 중요한 것은 율법을 준행하느냐 이다(롬2:29). 할례자가 율법을 준행한다면 그 할례는 분명 유익하다(롬2:25). 마찬가지로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게도 할례는 유익하다. 왜냐하면 할례는 ‘더욱 행하여 완전하라’는 언약의 표로서 주신 명령이기 때문이다(창17:1). 바울은 할례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할례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진정한 할례자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6-29)
8 지식에 까지 변화된 교회
새로 지으심을 받은 창조물은 지식에 따라 생각과 마음이 변화된 자들이다(히8:10). 즉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다. 예슈아께서도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다(사53:11). 우리는 지식으로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거룩하게 씻는 것은 말씀에서 나오는 물이라고 하셨다(엡5:26). 그리고 말씀 중에 말씀은 여호와께서 직접 손가락으로 써주신 율법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열쇠인 율법을 통해 지식에 까지 새롭게 되어 생각과 마음이 변화된 자들이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예슈아의 몸된 교회이다(눅11:52).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5:26)
That he might sanctify and cleanse it with the washing of water by the word,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53:11)
9 이 규례대로 걷는 자에게
하나님의 샬롬과 긍휼하심은 무법과 무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바울은 '이 규례대로 걷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규례를 말하는 것일까?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법도를 준행하는 내면적 유대인이라고 말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할례를 했지만 율법을 준행하지 않고 전통을 지키는 자들이었고, 이방인들은 할례를 하지 않았지만 유대교로 들어와 율법을 배우기 시작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율법도 하나님도 없는 소망없는 자들이었다. 이런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바울은 이 규례대로 걷는 자에게만 샬롬이 있고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 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거룩한 하나님을 거룩한 법도대로 섬기는 신령한 자들이 규례대로 행하는 자들이며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롬7:12,14). 만약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슈아만 믿어도 된다면 제일 먼저 귀신이 구원받을 것이다. 귀신처럼 행함이 없지만 분명하게 그분을 믿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약2:19) 분명한 것은 귀신도 믿을 수는 있으나 순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귀신의 믿음이 되지 않기 위해 즉 육적인 믿음이 되지 않기 위해 시내산에 강림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불순종하는 것이 귀신의 마음이라면 순종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임에 틀림없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2:19-21)
# 갈라디아서 6:17.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0 예슈아의 표를 가진 자
우리의 몸에 예슈아의 흔적, 예슈아의 표를 받는 것은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 죄와 싸운 흔적이고 고난을 당한 흔적일 것이다. 이 흔적이 우리가 예슈아의 몸이라는 표시이고 성전이라는 증거이다. 바울은 육체에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했다. 왜냐하면 예슈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는데 그 남은 고난에 자신이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슈아께서 죽고 부활하셨는데 어떻게 남은 고난이 있는 것일까? 모두 완성되어 끝난 것이 아니었는가? 그것은 예슈아의 몸인 교회가 아직 이 땅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하는 그날까지, 모든 교회가 부활하는 그날까지 그분의 고난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이다(골1:24,25). 여기서 '이루다'는 예슈아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을 때 '완전하게'와 같은 단어이다. 우리는 예슈아께서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완성하셨고 우리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완성하다, 이루다'의 뜻은 완성하고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예슈아께서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머리이신 예슈아처럼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 목숨까지도 드려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마5:17). 이러한 절대적인 순종을 십자가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말씀)에 불순종하고 육체의 영광만을 바라던 할례파는 십자가의 고난을 거절하므로 원수가 되었다.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던 할례파에게 십자가의 순종은 어리석은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골1:24,25)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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