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세르비아와의 2연전을 위해 대표팀 합류를 앞두고 가진 소속팀 강원FC의 경기에서 맹활약한 뒤 이근호가 남긴 말이었다. FC서울을 상대로 종횡무진 활약한 이근호는 4-0 대승을 이끌었다. 올 시즌 이근호는 소속팀의 리그 37경기 중 36경기에 나섰다. 32경기가 풀타임이었고 교체 출전은 1번에 불과했다. 데뷔 후 가장 많은 경기를, 그것도 좋은 내용을 보여주며 뛰고 있는 시즌이다.
소속팀에서 이근호가 보여준 활약은 대표팀에서도 이어졌다. 선발(콜롬비아전)로 뛰든, 교체(세르비아전)로 뛰든 이근호가 손흥민과 함께 그라운드에 서면 지난 1년 넘게 실종됐던 공격의 역동성이 살아났다. 타깃맨 없는 투톱 시스템이지만 이근호가 곳곳을 누비며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으로 손흥민이 파고 드는 전술은 효과적이었다. 심지어는 하프라인 아래까지 수비에 가담했다가 손흥민에게 다이렉트로 연결해 찬스를 만들어줬다.
그런 이근호는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러시아 월드컵 출전 전망이 흐릿한 선수였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 나서 득점을 기록했지만 아시안컵 이후 대표팀에서 보기 힘들었다. 중동 무대 진출 후 떨어진 경기력도 지난 시즌과 올 시즌 초반 충분히 만회한 상태였지만 지난 6월 위기에 처한 대표팀이 그를 긴급 호출할 때까지만 해도 국가대표 복귀조차 어두워 보였다.
긴 시간 대표팀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 이근호의 사례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이나 소속팀에 관계 없이 좋은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가 아니라, 늘 뽑히는 선수가 뽑히는 상황이었다. 브라질 월드컵을 준비할 때도, 그 뒤 새 감독이 그것도 외국인 감독이 왔음에도 대표팀은 어느 순간부터 선수 선발의 풀이 좁아졌다. 그나마도 경기에 나서는 선수 역시 누구일지 15명 정도 선에서 추측이 가능했다.
코너에 몰린 신태용 감독이 돌파구를 찾은 것은 전형과 전술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선수 기용의 폭부터 바꿨다. 이번에 소집된 23명의 선수 중 콜롬비아, 세르비아를 상대로 그라운드를 밟지 못한 것은 골키퍼 김진현, 그리고 처음 선발된 센터백 정승현 2명이었다.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은 그가 쉽게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콜롬비아전에 이근호, 고요한, 최철순 등 새롭게 기회를 받은 선수들이 변화를 일으킨 것처럼 세르비아전에서 같은 조건을 부여 받은 선수들이 눈에 띄었다.
골키퍼 조현우는 3번째 소집에서 A매치 데뷔전을 가졌다. 1실점을 했지만 그의 잘못이라고 평가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과감한 펀칭, 캐칭과 위치 선정의 안정감으로 호평을 받았다. 전반전에 골대 상단 구석을 정확하게 노린 아뎀 랴이치의 강력한 프리킥을 엄청난 반응으로 막아내는 장면으로 대구의 데헤아는 일약 전국구로 올라섰다.
올 시즌 소속팀 대구FC와 함께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 1부 리그에서도 맹활약을 이어간 조현우는 세 차례 대표팀 소집에서 항상 가장 뒤에서 대기하는 입장이었다. 김승규가 세르비아전을 앞두고 발목 부상을 입으며 김진현과 조현우를 놓고 고민했던 신태용 감독은 과감하게 A매치 경험이 없는 선수에게 기회를 줬다. 신태용 감독은 “훈련에서 확인한 좋은 모습을 실전에서도 검증하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고민했고, 부담도 됐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조현우를 테스트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에 선발로 냈다”라고 말했다.
아내의 생일날 A매치 데뷔전을 치른 조현우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자신감은 더 잘 해야 한다는 동기부여로 이어졌다. 그는 “마음 속으로는 내가 NO.1이라고 늘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김해운 코치님이 누가 나설지 모르니 준비를 확실히 하라고 해도 정말 그런 기회가 올까 싶었는데 이번 출전으로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더 잘 준비하면 또 기회가 올 거라는 확신이 든다”라고 말했다.
미드필더 정우영은 우즈베키스탄전에 이어 다시 한번 중계 화면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전술적 역할을 다 해 내며 현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현재 대표팀에서 기성용 다음으로 좋은 체격 조건과 수비력, 전방으로 나가는 킥을 지닌 그는 세르비아전에서 중앙 수비를 보호했다. 정우영 덕에 기성용은 콜롬비아전보다 더 전진했다. 후반에 이근호가 들어오고 전방에서 공간이 나자 기성용의 패스 플레이도 효과를 더 했다. 신태용 감독으로선 고요한을 기성용의 파트너로 세웠던 콜롬비아전과 달리 정면에서 부딪히고 기성용을 더 올려야 할 때는 정우영이 효과적이라는 걸 확인했다.
경기 후 정우영은 “조금씩 월드컵이 보이는 것 같다”라며 희망을 얘기했다. 그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 멤버지만 한국영의 부상으로 인해 마지막에 합류한 선수였다. 그 뒤 한동안 잊혀졌고, J리그 비셀 고베에서 확고부동한 주전이자 팀의 주장 역할을 소화하며 다시 조명 받았다. 2015년 처음 대표팀에 온 뒤 꾸준히 선발은 됐지만 경기에 나선다는 희망은 확고하지 못했다.
이제는 다르다. 신태용 감독은 정우영에게 확실한 쓰임새를 알려줬다. 상대가 적극적인 공세로 나오거나 힘으로 들어올 때는 그를 부른다. 모로코전에서도 정우영이 허리에서 적극적인 투쟁심을 발휘하며 싸워주자 흐름이 바뀌었다. “아직 정해진 건 없다. 하지만 처음 월드컵에 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팀이 원하는 역할을 더 성실히 수행하고 부상 없이 준비한다면 분명 꿈의 무대에 갈 수 있다”라는 게 그의 얘기였다.
열흘 간의 압축된 시간 속에서 그 동안 대표팀의 주역이 아닌 선수들이 많은 조명을 받았다. 그들 대부분은 과거 대표팀에 오면 훈련만 하고 간다고 느껴졌고, 본인들도 그런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다. 그랬던 선수들이 이번 2연전을 통해 대거 급부상했고, 아예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 희망 하나가 선수의 자세를 바꾼다. 고요한, 최철순은 어떤가? 선수 본인들은 물론, 그들을 아낀 팬들조차도 인연이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월드컵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다. 서른살이 넘어서지만 축구 선수 모두의 목표인 무대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커지며 그들이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집중력과 투지는 더 올라가고 있다.
“월드컵에 갈 수 있다.”
대표팀이 소속팀보다 더 많은 부와 영광을 주지 못하는 시대. 그 시대에 선수들을 움직이는 건 노력하고, 훈련 과정에서 공정하게 경쟁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최고의 무대에 갈 수 있다는 희망과 자격이다. 명단을 채우는 선수, 훈련하는 선수가 아니라 월드컵에 가기 위해 경쟁하는 선수들이 모이면서 신태용호는 진짜 팀이 됐다. 그 희망이 팀 내부에 공유됐고, 이 팀을 위해 한발 더 뛰고 헌신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발현됐다. 그것이 11월의 신태용호가 가장 달라진 핵심이다.
주장 기성용은 이전과 이번 11월의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라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번 대표팀은 전과 비교해 확실히 팀다운 모습이었다. 선수들 모두 책임의식을 갖고 자기 팀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보였다. 경기에 뛰는 선수도 뛰지 못하는 선수도 모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팀이 강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희망과 동기부여를 잃은 팀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신태용 감독이 월드컵까지의 여정에서 절대 놓지 말아야 할 팀의 동력이다. 가슴 안에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그래서 이 팀을 위해 언제든 내 모든 걸 쏟겠다는 준비와 다짐이 있는 선수에게 기회가 가야 한다. 그래야 기존 선수들도 더 분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