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찾아오는 그런 날이었다. 잔뜩 욕심부리고 싶어 비우기보다는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 싶은 날. 문득, 그런 날이 찾아오면 차에 시동을 걸고 잠시 앉아 동쪽으로 갈지 서쪽으로 가질만 정한다. 동쪽으로 간다면 김녕 해안도로를 타고 성산까지 무작정 달리거나, 서쪽으로 간다면 애월 해안도로를 타고 협재까지 달린다. 이날은 서쪽이 내 투정을 받아주기로 했다. 천천히 달리기도, 빠르게 달리기도 하며 도착한 협재의 푸른 바다. 눈앞에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의 모습에 나는 깨달았다. 내 투정을 받아줄 곳은 제주밖에 없다고.
비양도를 향해 걸었다 : 금능해수욕장
에메랄드를 머금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
추워진 계절. 해수욕장을 즐기기엔 벅찬 날씨. 금능해수욕장 위의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겨울 바다를 즐겼다. 누구는 캠핑으로 머물며, 또 누구는 하얀 백사장 위에 그저 서서 바다를 지그시 바라보며, 또 누구는 터벅터벅 걸으며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며.
금능해수욕장은 바닥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를 담고 있다. 얕은 수심으로 물놀이를 즐기기에 좋은 바다는 여러 해수욕을 즐길 시설들로 즐비해 있다. 아이들과 다녀오기 최적의 조건을 갖춘 금능해수욕장. 이는 여름 휴가철이면 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인기 명소가 되었다.
한림읍에 위치한 금능해수욕장은 인근에 제주 서쪽 하면 떠오르는 협재해수욕장과 이어져 있어 더욱 유명해졌다. 청량감을 주는 바다를 수영하며 협재로 넘나들기 좋은 금능해수욕장. 멀리 보이는 비양도를 배경으로 즐기는 여행은 완벽하게 다가온다.
왜인지 걷고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날은 바다도 보고 싶었고, 산도 가고 싶었다. 그렇기에 선택한 서쪽의 풍경. 내 첫걸음은 금능해수욕장에 멈추게 됐다. 야자나무 사이로 커다란 텐트가 여럿 쳐져 있고, 하얀 모래사장 위로는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나 싶을 정도로 삼삼오오 모여 즐기는 금능의 바다. 혼자였던 나는 차가운 바람을 벗 삼아 에메랄드빛 바다를 즐기기로 했다. 비양도를 향해 천천히 걸으며 말이다. 모래사장에 남는 나이키의 신발 자국. 비양도 끝자락에 닿았을 때 사뿐히 남은 발자국은 하나의 길을 만들어 돌아가는 길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바다
비양도에 다가설 수 있는 가장 가까이에 다가선 나는 신발을 잠시 벗고 차가운 금능의 에메랄드빛 바다에 발을 담갔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쭈뼛 서는 차가움에 정신을 바싹 차린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에 그렇게 지치고 불만이어서 무언가를 채우러 왔는지 잊을 만큼 기분이 좋은 순간. 금능의 바다에 나의 여러 나쁜 것들을 떨구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행복해졌다.
겨울의 시작 : 정물오름
분홍빛 동백, 피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산 52-1
금능해수욕장에서 좋아진 기분을 안고 떠났다. 바다를 담았으니 이제는 산으로. 제주엔 산이라 하면 수 백 개가 넘는 산이 있다. 한라산이 그중 으뜸이지만, 오름 또한 만만치 않다. 나는 이번 욕심을 채울 장소로 정물오름을 택했다. 왜인지 지금 가면 뽀얗게 피어있을 동백꽃이 나를 반길 것만 같아서.
정물오름은 북서쪽으로 넓게 터진 말굽형 화구를 지니고 있는 오름이다. 서쪽 기슭에 솟아있는 원추형 알오름은 정물알오름이라고 하는데, 두 오름은 붙어 있어 같이 오르기에 좋다. 정물오름의 기원은 샘에서부터 온다. 오름 앞쪽의 기슭에는 쌍둥이 샘이 있는데, 이 샘의 이름이 '정물샘'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정물오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정물은 마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수로 이용하기도 빨래를 하기도 하며 사용했던 샘이 정물이었고, 이시돌목장의 목업 용수로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정물이었기 때문에 마을과 정물오름, 그리고 작은 샘은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화란춘성
화란춘성이란 말이 있다. 꽃이 만발하여 한창때인 봄날의 계절과 같다는 뜻을 지닌. 추운 겨울인 지금, 정물오름은 시간을 역행하고 있다. 아니 사실 제대로 말하면 겨울이 적확하게 찾아온 게 맞다. 왜냐하면 동백나무의 꽃은 겨울에 피니까. 하지만, 분홍색으로 핀 동백꽃은 마치 봄날의 따스함으로 다가온다. 정물오름 앞에 초록으로 빛나는 이시돌목장의 초원과 초입의 분홍 동백꽃은 특히나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오르기도 전에 차오르는 설렘. 어쩌면 이번에 부린 욕심은 꽤나 성공적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오름 정상의 풍경
분홍색으로 꽃 핀 동백을 지나 억새가 만발한 정물오름에 발을 디뎠다. 20여 분을 오르며 보이는 제주 서쪽의 풍경을 고스란히 감상하며. 아름답게 빛나는 제주 서쪽의 풍경. 초록의 잔디로 꾸며진 제주의 드넓은 초원은 제주를 사는 이유를, 제주에 살면서 감사하고 있는 이유를 꼬집게 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풍경, 초록빛 초원에 뛰노는 말들과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모습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욕심을 부려 찾은 금능해수욕장과 정물오름. 금능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정물오름의 분홍빛 낙화. 그리고 한림읍의 풍경까지 모든 게 내게는 적확했다. 바다와 산을 한 번에 찾을 수 있는 섬. 제주. 특히 서쪽의 풍경은 지금 너무나도 아름답다. 이 글을 읽고 제주를 떠난다면 정물오름의 동배과 금능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담아보자. 욕심을 한껏 부리고 싶었던 나조차도 너무나도 만족한 여행이 되었으니 분명 후회 없는 선택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