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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병에 대한 규례 (레 13장, 레 14장)
- 설교 : 김강산 목사
범위가 길기 때문에 전체적인 개관을 설명을 하고 그리고 그 구분을 따라서 조금더 설명을 하겠다. 그래서 구분을 제일 뒤에다가 돌려놨다. 음식물의 주보를 보자.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한 규례에서는 땅에 있는 먹을 것은 부정하다 그렇게 가르쳤고 출산으로 인한 정결법 규례에서는 생명이 출산이 부정하다 그렇게 말씀했다. 그러나 성소에서 이스라엘 과 함께 하신 여호와께서 그러한 부정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규례를 주시어 그들을 정결케 하셨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부정한데 먹을 것을 주셨고 출산을 통한 모든 것은 부정한데 정결법을 주셔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로 할례 되게 하시고 성소에 출입하도록 하셨다.
정결케 하는 규례는 하루의 해가 지는 것과 물로 씻는 것과 칠일과 40일이 차는 것과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정결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온전한 정결을 교회에 주심으로 이 생명의 언약 역사를 완성하셨다.
문둥병 규례에서는 이스라엘 의 몸과 의복과 가옥 등 모든 것에 하나님과 교제를 단절시키는 죽음이 활동하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그런 부정으로부터 이스라엘 을 정결케 하시는 규례를 주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성소에서 봉사케 하신 것이다.
전체적인 흐름이 이런 내용이다. 그러면 13-14장을 대충 설명하면 모든 썩어짐의 징후에 정하고 부정함을 판별하고 정결케 하는 자는 제사장이다. 무슨 징후가 있으면 칠일의 간격을 두고 진찰하고 또 칠일을 두고 진찰하고 만일에 그 징후가 우묵하거나 퍼졌거나 색깔이 짙어 졌으면 문둥병이며 문둥병은 심히 부정하다. 문둥병의 특징은 부정하다 그 말이다. 부정함은 어떤 의미로 부정하냐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의 진으로부터 분리되는 부정이다.
가령 출산한 여인의 부정은 다른 사람을 부정케 하고 하나님의 성소에 나가지 못한다는 의미로 부정이다. 또 음식물의 부정한 것을 먹으면 하루 동안 부정하고 물로 씻으면 깨끗하다. 그런데 여기 문둥병의 부정의 의미는 이스라엘 의 진으로부터 쫓겨나서 진밖에 있어야 된다 그런 의미로 부정하다.
문둥병이 나으면 먼저 정결케 하는 규례를 통하여 진으로 들어오나 칠일 동안 자기 집밖에 있어야 하고 제 팔일에 성소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된다. 정결케 하는 규례의 특징은 산 새 두 마리로 하는 정결법과 물로 씻고 털을 칼로 미는 것이며 제사법의 특징은 속건제의 피와 기름을 정결케 된자의 신체에 바르는 것이다.
설명에서 네 번째에 더 넣으라. 징후에 한가지를 더 넣어라. 난육이 있으면 난육은 문드러진 살이 속에서 올라온 것이다. 그런 것이 있어도 부정하다.
13장을 읽어보면 전체적으로 이런 이야기다. 자세히 보면 이런 저런 차이가 있지만 대충 읽으면 문둥병은 부정한데 제사장이 진찰하고 그러면 무엇이 문둥병이냐? 피부보다 깊이 들어갔거나 또 그 털이 햐해져버렸거나 또는 상처가 넓어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밑에서 문드러진 살이 올라오고 있거나 그러면 문둥병이다. 문둥병은 부정하니까 진 밖으로 쫓아내고 거기서 부정하다 그래야 된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 오냐? 문둥병이 아니고 이런 저런 피부병은 칠일 기간이 지나면 나으면 정결하다. 칠일을 기다려서 보고 또 만일에 문둥병이 확증되면 진 밖으로 쫓아내는데 하나님이 낫게 하셨으면 정결법을 통해서 돌아와야 되는데 물로 씻고 또 털을 다 밀고 그런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특징은 산 새 두 마리로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는 그런 것 그리고 14장에 제사법을 보면 다른 제사법 보다도 속건제 제사가 강조가 되어 있다. 그런 것들이 특징이다.
일단 이렇게 전체를 보는 습관을 길러야 된다. 그리고 전체를 대충 말할 수 있도록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이제 부분들을 볼수가 있다. 내가 한 번 쯤 읽어오라 그 말은 한 번만 읽어오라 그 말이 아니라 전체를 자기 말로 설명할수 있을정도로 일어오라는 말이다. 읽으라는 말이 숫자가 아니라 알수 있도록 읽으라는 그런 말이다. 성경은 전체로 빠른 속도로 읽고 그 전체를 파악하도록 하고 그리고 그 문맥에서 무엇을 말하고 그 표현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을 따라서 해석을 해야지 그 토대를 벗어 버리면 그 때부터는 다른 데서 끌어온 이야기다. 아무리 신학 이론적으로 맞아도 그 문장이 말하지 않는 것이라서 옳지 않다. 항상 문맥을 봐야 한다. 그래서 설명이 13-14장이 긴데 몇줄로 요약을 했다. 이런 말이 대충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알 것이다 해석도 전체적인 윤곽을 따라서 해석을 하고 그리고 부분들을 구분해서 성경이 기록했으니까 그 구분들을 따라서 특징들을 언급하면 될 것이다.
나은 여부는 칠일의 간격으로 진찰하고 정결케 하는 규례는 물로 씻는 것과 피와 기름을 바르면 정결케 된다. 흐르는 물은 죽음에 접촉해도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그랬다. 음식물은 부정하다 했을 때도 음식물이 방축 물이나 샘물에 떨어지면 부정하지 않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흐르는 물은 죽음에 접촉하여도 부정을 입지 않는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
피는 생명을 말하고 홍색 실과 백향목도 생명이 표상들이다. 백향목 하면 굉장히 크고 좋은 나무다. 그래서 홍색 실과 백향목 하는 것은 생명의 풍성한 활동들 그런것에 관계된 이야기다. 우슬초는 피를 뿌릴 때 이 우슬초에 뭍혀서 뿌리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로 우슬초는 정결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백향목과 우슬초를 연구해 봤자 모른다. 단지 백향목의 큰 것을 대비시킬려고 우슬초를 대비시킨 것뿐이지 백향목을 백향목대로 풍성하고 우슬초는 정결법이지 백향목은 크니까 우슬초는 째째하고 이렇게 하면 안된다. 성경에서 우슬초는 정결케 하는데 쓰인다. 거기다 뭍여서 뿌린다. 담장 위에 있는 우슬초 산 위에 있는 백향목 하는 것 보니까 우슬초는 별볼일 없는 풀인데 어떤 성경 용도는 별볼일 없다는데 강조가 아니라 정결케 할 때는 우슬초에 뭍혀서 뿌린다. 가령 우리 나라 같으면 보름에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데 피마자대로 한다. 그러면 피마자가 왜 그런지 우리는 모른다. 미신은 어리석은 것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면 그러니까 피마자 연구하지 않아도 되고 그 말이다. 우상은 참 어리석은 것이라 별볼일 없는 것인데 피마자 나무가 무엇이 겂나다요? 탱자 나무를 가지고 다니면 겁날 까 별볼일 없는 것인데 말하자면 우슬초 하면 성경이 그것은 정결케 하는데 묻혀서 뿌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지 우슬초를 연구해서 알 것도 없다 그 말이다.
백향목은 크고 곧은 나무를 이스라엘 의 풍성함 부요함으로 백향목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 용도를 따라서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백향목 보다 더 큰 나무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나무 연구가 아니라 성경이 가나안 땅의 평화에서 산림이 풍성하고 포도와 무화과가 많고 그런 것이다. 그러면 제일 맛있는 것이 포도고 무화과냐 하면 많지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있는 것은 제일 맛있는 줄 알고 그런데 더 맛있는 것이 많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은 최고 좋은 것만 주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언약 적으로 최고 좋은 것을 준 것이지 물건이 제일 좋은가 하고는 다르다.
그 때 아무리 좋은 것 주었어도 아이스크림 못 먹었잖아요? 우리는 백원이면 먹을 수 있는 것을 그러니까 성경은 언약 적인 이야기지 물질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성경이 백향목은 크고 좋은 나무 이스라엘 의 번성함 그러니까 여기서 생명의 표상으로 또 모든 붉은 색은 그렇게 썼다. 그런 이야기지 나무 자체를 연구해서 상수리 나무는 딱 딱한데 백향목은 어쩝니다 연구 해 봤자 모르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을 상수리 나무로 이야기한다. 상수리 나무를 베어도 그루터기는 남고 했을 때 그 나라에 상수리 나무가 많은 모양이지요? 그런 것을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이지 상수리 나무는 단단합니다. 철도 침묵으로 씁니다. 벌레가 먹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은 그러니까 상수리 나무 해 가지고 여러 이야기를 해도 모르는 이야기다. 그렇게 풀지 말고 문맥만 가지고 풀어야 한다.
정결케 하는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서 속건제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것이 강조 된 것은 문둥병으로 인하여 부정케 되어 진밖에 있어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왜 그렇게 해석이 가능하냐면 그러므로 마치 제사장의 위임식의 피와 기름처럼 속건제의 피와 기름을 문둥병으로부터 정결케 된자의 신체 기관에 바른다. 그리고 속죄제와 번제를 잡는 곳에서 속건제를 잡고 그 고기는 제사장에게 돌리는데 지극히 거룩하고 그리고 제사장은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를 드린다.
제일 먼저 드린 것이 속건제로 되어 있다. 다른 데서는 속죄제가 앞설 때가 있고 어느 때는 번제가 앞선다. 출산에 비유에서는 번제를 먼저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속건제를 제일 앞에다 나 뒀다. 그리고 제사장이 위임식에서는 위임제 제사에 피를 바른다. 속죄제나 번제로 바르니까 위임제 제사에 피를 오른 귓부리 엄지 손가락에 바른다. 그런데 문둥병을 정결케 하는 제사에서는 속건제의 피를 가져다 바른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위임식은 성소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즐거이 봉사하는 제사장의 사역이다. 그러니까 화목에 사역 그러니까 화목제 위임식에 피를 그렇게 발랐다. 그는 화목제의 몸으로 나가는 식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 속건제의 피를 그전에 제사장의 위임식에 화목제를 바른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는 속건제가 강조되어 있다. 그 몸을 속건제를 드리는 식으로 드리는 것이다. 속건제는 어디서 잡냐 말하기를 속죄제와 번제를 잡는 곳에서 잡으라 해서 잡는 곳을 같이 언급해서 같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그러면 속죄제와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제사들을 대표하는 대표 법들이다. 그러니까 문둥병 자가 정결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속건제가 강조가 되어 있다. 속건제는 본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갚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으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고 그런 권리 침해에 대해서 드리는 것이 속건제다.
그러니까 이 문둥병자는 문둥병 때문에 하나님의 성소에 나가서 마땅히 봉사해야 할 마땅한 의무 수행을 못한 것이다. 진 밖으로 쫓겨 났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속건제의 예물을 듸록 속건제 예물의 피를 그 전 신체 기관에 발라서 그의 전몸이 그 직무를 감당하는 회복의 의미를 준다. 그래서 그 제물을 제사장이 먹는 것이다. 그렇게 강조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모든 제사를 드린다.
산에서 자기에게 나온 제자와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의의 법을 친히 말씀하시고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의 문둥병 자를 정결케 하기 원해서 오신 분이시다. 그 문맥이 그런다.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이 고쳐 주고 싶으면 고치고 안 고치고 싶으면 안고쳐주고 그런 의미로 원하시면 그런 것 그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씀하신 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문둥병을 정결케 하시기를 원하셔서 오신 분으로 묘사를 해주고 있다. 이방인은 찾아 가시기를 원하셔서오셨고 그것이 마태복음 8장의 흐름이다. 원하여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오는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지시고 깨끗게 하셨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썩어짐을 이긴 생명의 것을 유업으로 받았으며 그 생명을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린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 예수님 죽으셨을 때 물과 피가 나오고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셨다. 요한-서 5장6-12절을 보면 물과 피로 임하셨는데 증거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고 성령은 진리시고 이 셋은 하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그렇게 쭉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도 물을 뿌리고 또 피가 있고 그렇게 정결케 하고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흐르는 물위에서 산 새를 잡고 그것을 우슬초에 뭍여서 뿌리고 한데서 연결이 되어 있다. 여기 보면 이전에는 음식물은 부정하다. 출생은 부정하다. 그랬는데 13장에서는 문둥병이 안드는데가 없다. 그러니까 다 보면 한마디로 썩어짐이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 썩어짐이 발동도 활동이 되면 부정하다. 생명이 하나님과 단절된다. 그 활동력은 죽어야 되고 죽은 뒤로도 또 씻어야 되고 여러 제사법이 있다. 그렇게 해서 진으로 들어오고 하나님의 성소에 나갈 수가 있다.
그러니까 물과 피의 정결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고 그 제물을 통해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이 정결법이 모든 것이 다 부정하고 모든 것에 죽음에 세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정결법을 통해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이 상실되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은혜의 일을 예수 안에서 완성하셨는데 예수는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유월절과 관계가 있고 제사법들과 관계가 있다. 그는 죽으셨을 때 물과 피를 흘렸고 다 이루었다 하고 죽으셨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그렇게 하고 죽고 눅가복음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렇게 죽고 요한복음은 다 이루었다 그렇게 하고 죽으신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물과 피를 흘렸다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그 이야기를 한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요한복음 처음부터 유월절과 관계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무엇을 이룸이겠는가? 그가 이제 생명의 주로서 자기 백성을 새로운 하나님의 교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신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너희들이 뉘 죄든지 용서하면 용서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을 새로운 인류로 짓고 계신다. 그런 문제들이 요한복음 문맥이다. 그러니까 물과 피의 정결법은 어디서 완결되는 것인가? 성령은 진리이신데 물과 피로 임하셨는데 증거하시는 것은 성령이시니라 성령은 진리시니라. 구약 개념에서 물과 피의 완성은 성령이시다.
하늘에 속한 생명 성령이 증거하신데 성령은 진리시다. 그런데 이 성령이 아들 안에 있다. 그러니까 아들이 있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영생이 없다. 그렇게 요한-서에서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교회는 썩어짐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것을 얻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을 기업으로 받았다. 우리의 몸도 먹을 것도 의복도 가옥도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은 한마디로 새로운 세대에 속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옛 질서에 매이지 말라 그 말이다.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레위기13-14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문둥병 자는 성소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남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의 책인데 병든 사람은 교회에 오지 말라는 말이 아니냐? 병든 사람은 교회가 일부러 찾아 가야지! 말하자면 물론 전염병이 들면 본인이 교회에 오지 않겠지요? 다른 사람이 위험하니까 그리고 목사도 심방하고 나서 다른 집에 갈 때 조심하고 가야겠지요? 아 나는 목사니까 전염병 들린 사람집에 들렸다가 나중에 아이 낳은 집에 들렸다가 그래가지고 병을 옮기고 다니면 안된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그전에는 어떻게 해석을 했냐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은 모르지만 어떻든 나쁜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제일 좋은 것 주지 나쁜 것을 줄 이유가 없다고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일 좋다는 것을 건강법으로 안다. 그런데 요새 알지요 고기만 먹었다 하면 몸이 산성화 된다는 것을 그러면 제사장은 제일 먼저 죽어야 되지요? 맨 고기만 먹어야 되거든. 봐라 피는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그런데 사람이 죽을려면 수혈하지요? 그러니까 언약 적인 언어로 읽지 않고 소위 하나님과 관계한 소위 신령한 것을 먹고 마시는 소위 육체의 것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 해석이 안된 것이다.
여기 문둥병도 병원 차리라고 해 났구만 이런 저런 병이 있으면 교회에 안 나온 것이 좋고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를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것이 지금도 통한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 설교하면 전부 감동을 받아 버린다. 레위기 신약에서는 계시록이고 구약에서는 레위기다. 설명했다면 맘대로 해 버릴 수가 있거든.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들의 삶의 질서 그 당시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 구체적인 관계에서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되고 그런 의미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어떻게 이전에 흔적들이 없어지고 하늘에 속한 것으로 완벽하게 회복되었는가를 선언하면 된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너희들이 먹고 마실 때 조심해라 그런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온 땅이 다 부패에 참여했다. 땅에 있는 것은 모두다 부정하다. 생육하고 번성해도 해산하는 고통과 죽음에 따라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가나안 땅의 모든 것 즉 집에서 문둥병이 있다. 그런 것은 부정한 것이다. 부정하기만 하면 진짜 소망이 없는데 그런 부정한 중에 생명의 양식이 있고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면 새롭게 출생되고 칠일과 40일이 지나면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고 그리고 문둥병도 그것이 부정한데 그것을 하나님이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깨끗케 하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봉사할 수가 있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그 몸으로 봉사했던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을 봉사하는 그런 백성으로 살수 있도록 속건제의 피를 그 몸에 바르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들이다.
죄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친히 생명의 하나님으로 함께 계시고 너희들의 모든 것을 생명의 회복해 주겠다 하는 약속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약속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된 것이다.
바울이 만일에 전도하다가 매 맞고 죽게 되면 나는 죽었도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날마다 죽음이 나타나면 그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는 약한 중에 하나님의 강함을 찬양한다. 그의 몸에는 죽음의 흔적이 없다. 겉 사람이 후패하면 속은 날로 새롭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그는 아무것도 없어도 다 가진 자다. 그는 세상에서 형편없는 욕을 먹어도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진 자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라 그 말이다. 오늘 아침에 했던 설교도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예수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썩어짐이 제거된 것이다. 여전히 먹는 떡 포도주 먹어봤자 뒤로 나오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생명의 관계로 살고 있지 이스라엘 백성처럼 죽음에 질서에 복종하는 선물을 받고 있지를 않다.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은 예수 안에서 쇠하지 않고 썩지 않는 영원한 기업이다. 그것이 우리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 말이다. 그것이 레위기 13-14장에서 문둥병 규례로 이스라엘 의 전 삶을 커버하는 방식으로 그 몸이며 옷이며 집이며 전체를 두고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서 구체적으로 나눠 가면서 설명을 해보면 그 의미들이 잘 드러날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이 틀을 따라서 적어 가면서 조금씩 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여기 보면 이런 것이 있다. 우묵하고 털이 희고 색갈이 짙으면 문둥병이다. 그런데 온 몸이 희여져 버리면 깨끗하다. 조금만 희끗희끗해도 가둬놓고 봐야 되는데 온 몸이 하야지면 깨끗하다. 하얗게 된뒤로도 거기서 난육이 생기면 부정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해가 안된다. 조금만 희끗 희끗해도 수상한데 온 몸이 하얗게 되면 이것은 진짜인데 문둥병으로 진찰을 받았다가도 온 몸이 하얗게 되면 괜찮다. 그렇다가도 속에서 문드러진 살이 올라오면 또 부정하다. 이런 것은 무엇인가?가령 온 몸이 하얗게 되면 그 병이 전 몸에 퍼진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게되면 그 몸에서 활동력은 멈춘다. 묘한 표현법이다. 완전히 하얗게 되었으니까 완전히 문둥병이다고 해야 될것인데 몸에 일부에서 활동하고 있으면 병이 활동하고있는 증거인데 온 몸에 퍼졌으면 그것은 온 몸에 하얗게 되므로 활동이 끝난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난육이 올라오면 부정한 것이다. 왜 다시 죽음이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 집이나 몸 모든 것에서 활동하는 죽음의 세력들 썩게 하는 세력들 그런 문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털이 하해 지면 이스라엘 은 아마 털이 까맣겠지요? 본래 흰 색깔이 있는 털도 있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부정한가 그래서 미장원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말하자면 이스라엘 의 영역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다. 우리도 털이 하얗게 되면 힘이 점점 빠지구나 낙엽 진다는 말이다. 그런 이야기다. 그런 의미로 속에 죽음이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다가 평소 피부보다 우묵하게 꺼져 있다. 또 그것이 점점 확대되면 분명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부정하다. 그런 이야기들이다. 지금 우리들이 병원에 가는 문둥병하고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번역이 그렇게 된 것이고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세시 병 그런 것하고 직접 관계된 이야기는 아니다.
의학적으로 하자면 오히려 곰팡이류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몰라도 좋다. 이 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도 좋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몸에 죽음이 활동하고 있는가? 옷에도 집에도 썩어짐 그런 것이 있는가?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그래서 치료해서 하나님의 은혜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병들어 있어도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병든 사람이 안되고 죽어도 예수안 에서는 하늘에 속하고 구약 때는 조상의 묘실에 있고 신약 때는 예수와 함께 하늘에 있다.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다. 구약 때는 조상의 묘실 어둔 곳으로 들어가는 그림자가 있다. 신약 때는 그런 것이 없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의 질서에 대한 문제다. 여러분이 죽으면 분명히 묘지에 들어가 썩는다. 성경은 그런 인간론에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지금 신약 교회에 있어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하나님이 너를 이겼도다 죄의 권세가 너를 이겼도다 죽음의 권세가 너를 끝냈도다 이런 이야기는 없다. 그것이 신약 백성이 누리고 있는 삶의 질서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죽은 뒤고 영혼은 천당 가고 육체는 무덤에서 잠잘까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까 이원론이구나 둘이구나. 그것을 연구해 봤자 성경을 가지고는 모른다. 성경은 그런 일에 관심하고 설명하지를 않는다.
한마디로 다윗은 죽었으나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지만 다윗이 말하기를 이렇지 않냐? 다윗과 부활하신 예수를 대비시킨 이야기지 우리 몸이 어떻게 되었냐 거기다가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관계 문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극히 가난한 자가 주님 나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께서 이 보리떡을 주셨나이다. 하고 감사하면 그는 세상에 부요한 자가 하나님을 모르고 소고기 먹는 자하고는 다르게 이는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에게는 한마디로 배고픔이 없다. 신체적으로 배가 안고프다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베고파서 못살겠다 그런 말을 안한다 그 말이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내가 자꾸 부부 예를 드는데 그런 것이다. 살고 있는 것이야 학고방이지 그런데 좋다고 둘이 손잡고 다니거든. 보리밥을 먹으면서도 맛있다고 한다. 식당 가면 그보다 훨씬 맛있는 것이 많이 있는데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맛있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에서 해석을 해야 되지 어떤 존재론적인 그런 것으로 하면 지금 오히려 구약 때 사람들이 더 오래 살았다. 구약 때 아브라함도 백칠십오세나 살았다. 그러면 예수님은 훨씬 빨리 죽었으니까 죄가 많구만. 그런 이야기 해 가지고는 모른 이야기다. 그래가지고 죄가 적었을 때는 오래 살고 죄가 많아서 고재봉이 같은 사람은 오래 살면 안되니까 고기를 많이 주어서 빨리 죽어버리게 하고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사람은 고재봉이를 모르겠구나. 우리 때는 고재봉이가 제일 나쁜 사람이었다. 요새는 누가 제일 나쁜가 꾀가 많은 사람 노태우 맞아 그 사람이 5년 대통령 했기에망정이지 더했다면 큰일나겠구나. 그런 사람이 한 천살쯤 살면 형사에 많이 붙어도 안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성경은 그런 나이를 세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 언약 적인 언어로 읽어 내야 한다. 그래야 지금 여러분이 당장 죽어도 죽는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문둥병 규례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친다.
이제 모든 것을 썩어짐에서 해방되는 약속들을 주고 있다. 어디든지 썩어짐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가 칠일에 간격으로 치료해서 깨끗하게 하시든지 물로 씻어 하시든지 또는 새의 피로 또는 피와 물로 정결케 하시던지 또 나중에 속건제 피를 발라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하시든지 그런 방식을 통해서 성소에서 봉사하게 하신다. 전 몸을 제사장 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속건제의 피를 거기 발라 주고 있다. 이것이 레위기에서 하고 있는 약속인데 이 약속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완성이 되었다.
우리는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낸다. 우리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받았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러면 왜 면도로 털을 다 밀라고 그럴까요? 그전에는 털도 죄로 해석을 했다. 대충 일회용 면도기로 밀면 털이 듬성듬성 여기저기 있어서 보기 싫어서 안된다. 스포해자기고 털뿌리까지 다 파 버려야 깨끗하지 그래가지고 죄 찾는 방식으로 풀었다. 면도칼을 하나님의 말씀 예리한 검이니까 그래가지고 그런 식으로 풀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공격하면 여러분들 털 없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공격하면 양심이 괴롭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몸안에 죽음이 활동하고 있었다. 흰털이 이었다. 그렇게 했을 때 나타난 모든 것들을 깨끗이 깎아서 없애 버리고 있다. 정결케 해주고 있는 것이다. 죄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상황으로 풀어야 되지 그것을 죄와 관계시킨다 해 가지고 소위 영해 시키면 안된다 그 말이다. 항상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해석을 하고 그 관계에서 예수가 우리의 전 삶의 질서에서 어떻게 했는가로 해석을 해야되지 우리는 예수안에 있는 구원을 개인이 어떻게 도덕적인 것을 회개하냐 전부 개인 구원론으로 해석을 하니까 우리의 전 삶의 질서로 해석을 못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전 삶의 절서를 포괄하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존재론적으로 통치하니까 우리가 거기까지 가서 도덕적으로 살면 거기 까지 깨끗해 진다. 이런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주님은 첫 창조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새 창조의 머리여서 그분안에서 모든 것은 새롭게 지어진 것이지 우리를 도덕적으로 단순히 개선하는 그런 것을 가르치는 종교 훈화집이 아니다. 우리의 몸도 새롭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몸의 정결케 된 것이다. 이제는 전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새로운 몸으로 지어진 것이다. 주님 오시면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죽음이 활동할 때까지라도 오히려 나는 내 약함을 자랑하겠다. 그렇게 바울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실망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미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울이 이제는 때가 가까웠으니 그 시대에 맞추어서 살라는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예를 들었지만 가령 구약 때 같으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것을 도적질하면 그것으로 대게 공격을 한다. 미가서나 아모스서에서 많이 공격을 한다. 너희 부한 자들아 왜 가난한 사람을 그렇게 하냐? 너희가 도적질 한 것이 하나님 앞에 증거가 되리라. 이렇게 한다.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 붙여 가지고 그러면 가난한 사람도 도둑놈 있고 부자도 정직한 사람이 있거든. 그런데 우리한테 직접 적용을 하면 부자들이 기분이 나쁘다. 헌금도 안해버린다. 그러니까 세상을 두고 한다. 보라고 세상이 얼마나 썩었냐고. 노태우 도둑놈 보라고 부자 된 것 보라고 그것을 노동자에게 나눠줬으면 얼마나 되겠냐고 교회 부자를 공격하면 안되지 왜냐하면 5-6공 장로가 있거든 안한다. 도적질하지 말아라 그러면 이제 알아서 들어라 그 말이지 그러니까 불특정 다수한테는 세게 하고 개인을 만나면 다 복을 주어 버리고 말을 못해 버린다. 이런 식으로 하면 여기서 도적질 안한 사람은 아 나는 거기에 안 걸리는 구나. 세상은 썩었구나 이렇게 있는 것이다. 왜 자기는 돈 번 것 중에 세금 잘라 먹는 것 없고 정직하게 벌었거든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설교했던 것처럼 헌금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했다. 좋아. 그러니까 나는 그 본문에 안 걸리겠구나 신약은 그렇게 안한다. 신약은 완성된 빛가운데서 해석을 해야 한다.
완성된 빛은 이제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으로 살라는 그 말이지 아 도덕적으로 정직해서 돈만 정직하게 벌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몸으로서 봉사하고 그랬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많이 구제하고도 그리고 자기는 더 잘먹고 살고 있다. 말하자면 넉넉하니 내가 우리 교회에서 구제 헌금을 제일 많이 했거든.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대리자로 봉사해야 되지 나는 남보다 헌금을 많이 했다 그것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가능해도 컸을 때는 아버지의 대리자로 봉사해야 되지 나는 그래도 동생 보다는 과자를 많이 나누어 줬으니까 되고 이렇게 하면 안되겠지요. 말하자면 동생들이 다 나쁘면 형님이 아버지 대신 뼈빠지게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나는 줄만큼 주었으니까 누가 나를 욕하겠는가 해도 동네 사람이 다 욕해버린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그러니까 구약 때는 도둑질만 안하면 된다. 왜 부자는 복받았으니까 그런데 도둑질해 가지고 부자가 되었거든. 그런데 부요한 자는 분명히 하나님께 복을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복받았다고 폼잡고 있는 것이다. 실은 도둑놈이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공격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때는 그런 삶의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를 따라서 살지 않으면 다 잘못이다 이 말이다. 신약 성경의 증거는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직하게 돈을 벌었다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이 좀 본을 보입시다. 다른 사람은 세금을 도적질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맙시다. 그런 도덕적인 단체로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요새 학생들 공부 참 못하는데 우리 장학금도 주고 공부 잘해서 좀 유명해져 봅시다.
요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면 다 박사 학위를 가지고 간다. 왜냐하면 박사 학위 따 가지고 가면 수상하고도 악수할 수 있거든. 그런데 목사만 되어 가지고 가면 면장하고도 악수를 잘못한다. 그러니까 전도하는데 장애가 많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교회가 세상을 좀 주도해야 되겠다. 주님이 말씀하신 방식하고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마치 예수님 시험받으실 때 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봐라 네가 한 번 해바라 한 것하고 비슷한 이야기다. 마치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생을 추종했던 것하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회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구약에 있는 것을 구약의 틀을 보지 않고 신약으로 막 연결을 하니까 그렇다. 신약은 부활하신 주님과 새로운 관계에서 해석을 해야 되지 구약 도둑질을 우리는 안했으니까 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다 옛 것을 붙들고 있는 나쁜 사람들이다. 그리고 몸으로서 수고가 아니면 구약처럼 그런 방식으로는 의롭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부활의 빛으로 해석을 했을 때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법으로 완전히 해석이 되고 부활의 빛이 아닌 것은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의 진행되는 빛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완전한 지금 새 시대의 빛을 가져올 수가 없다. 새 시대는 완결된 빛이다. 완결된 빛은 예수 안에서만 드디어 해석되고 주어지는 것이다. 성취되어야만 해석되고 주어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드디어 우리에게 주어지고 누려진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라 그 말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꼭 부자 되게 해야만 분란이 없을 까요. 교인 중에 부자 있고 가난한 사람 있으면 화목이 잘 안되니까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일정 기간 불안하지 않을 만큼 좀 부자가 되게 해야 좀 신앙의 자유가 있고 여유가 있지 그 사람이 너무 너무 가난하니까 자꾸 흔들이고 죄 짓는 것이라고 그렇게 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부자들 보고 가난한 사람 구제하지 말라는 그 말이 아니라 그가 부자가 되어야만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접근하지 말라 그 말이다.
마땅히 아내는 남편에게 잘해줘야 되겠지요? 그러나 남편이 너무 너무 가난하니까 마누라가 이 생각 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냐. 그런 해석은 아내를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일꾼과 첩은 설명하는 방식은 되어도 아내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니다. 제가 말하는 강조점을 알겠지요?
구약 교회는 가난하면 운다. 하나님 우리가 왜 외국 땅에 쫓겨나고 가난합니까 해도 지금은 십자가에서 죽어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죽는 것이 신약 시대다 그 말이다. 왜 새로운 관계로 주어졌기 때문에 구약 때는 가나안 땅의 부요함이 복이다. 신약 때는 영광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을 따라는 것이 복이다. 그러니까 그런 일로 넘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다. 가난해서 신앙이 약해지지 않는다 그 말이다. 여러분이 그 점을 잘 알아야 한다.
가난해도 방금처럼 권하면 세상 어떤 부자보다도 힘있게 그리고 넘치게 살아 버린다. 그런데 나도 보니까 너무 가엽거든요. 왜냐하면 형제가 가난하고 아픈데 마음이 안아프요? 그것만 자꾸 염두해 두고 있으면 위로할 방법이 없다. 내가 돈이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이 있어야 위로가 되지...
기도하면 느닷없이 준다고요?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냥 속은 진실 되게 염려한 듯 하는데 위로할 길은 없어져 버리고 내가 믿음으로 형제를 제대로만 보면 나는 아무것도 없이 가서 세상에 어떤 부자보다도 더 부요하게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 아무것도 안주고 무슨 말인가 알겠어요?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의 질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형제를 충분히 동정해야 되지만 참 다운 힘과 연합은 주님과 관계에 있지 내가 무엇을 가져다주면 그것으로 되고 마땅히 형제로서 봉사한 것이지 그 자체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안된다. 그런 점들은 조심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기독교인들이 무슨 일을 하겠다 해 가지고 프로그램을 자꾸 제사힌 일에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그쪽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열심히 반대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을 짜자 말자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하늘에 속한 것이 땅에 속한 것으로 전락이 되어 버린다. 영원한 생명의 관계가 이런 저런 거래 관계로 전락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하는 말이다.
흐르는 물은 깨끗하다. 피를 받으려니까 질그릇 위해서 잡는 것이다. 다른 것 아니고 그리고 산 새에다가 백향목 붉은 실로 묶지요. 우슬초와 함께 그리고 그 산새를 날려보낸다. 그리고 그 피를 정결함을 받을 문둥병자에게 뿌린다. 피는 뿌려지고 날라가고 있다. 그런 것이 다 정결케 된 생명의 자유들 그런 것을 말하고 있다. 머리에가 문둥병이 들었으면 칠일 동안 기다려 볼 것 없다. 즉각 진찰해라. 왜냐하면 머리는 항상 머리거든요. 거기에서 무슨 흔적이 있는 것은 더 뚜렷한 죽음의 활동력이다. 그러니까 더 퍼졌는지 깊어졌는지 볼 것이 없다. 즉각 진찰해라 그런 이야기다. 여러분이 해석할 수 있을 듯 한데 그러면 다음에 조금더 설명하면서 한 장에서 마무리를 짓겠다. 하여튼 14장까지 읽어 오기 바란다.
제가 구분해 준 것은 여러분이 읽기 좋도록 구분해 준 것이고 그 문장 자체를 여러 번 읽는 것이 최상의 해석법이다. 읽으면 여러분이 잘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모르면 넘어가고 그러면 다 안 것이다. 그래도 알 수 있지요? 부분 부분을 몰라도 거기서 말하는 충분한 썩어짐으로부터 자우에 대한 약소들은 알 수가 있지요?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봉사할수 있도록 우리를 정결케 하는 속건제의 피를 알수 있겠지요? 그러면 되는 것이다.
출처: 복있는 그리스도인 글쓴이: 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