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배우다/이명철
선운사 입구 문화관광해설사사무실에서 남쪽 도솔천(兜率川) 건너편에 사철 푸른 송악(楤㹊)이 바위에 붙어 자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367호다.
바위 밑에 뿌리를 내리고, 바위를 타고 올라가 작은 뿌리들을 바위에 착생하며, 250여년 그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도 저와 같을까? 사람이면 누구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착생하며 살아가는 삶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면서 서로의 귀중함이 새삼 느껴진다.
가끔 관광객들은 한글로 표기된 ‘송악’이란 푯말 때문에 “저 넝쿨식물이 소나무 과에 속한 식물이냐?”고 묻는다. 그럴 때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글로 ‘송악’이라 표기해 놓았기에 사람들은 소나무를 연상하는데, 송악은 소나무 과에 속한 식물이 아닙니다. 두릅나무 과에 속하는 넝쿨 식물입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두름나무 송(楤)자를 쓰고, 잎은 소나 염소가 잘 먹기 때문에 소의 약이라고도 하며, 소밥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소 악(㹊)자를 씁니다.”
“그런데 소 악자로 옥편이나 인터넷에서 찾으면 찾아지지 않습니다. 소 자 앞에 ‘흰’자를 붙여 흰 소 악자로 찾아야 합니다.“
사실 송악은 내륙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식물이며, 남쪽 따뜻한 섬 지방에 많이 자생한다. 섬 지방에는 이보다 더 크고 오래된 나무도 많지만 선운산에 있는 송악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내륙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기에 북으로 올라갈수록 나무는 작아지며, 그 한계선은 동으로는 울릉도, 서쪽으로는 인천 근방까지 자생하며 그 이북에는 송악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사철 푸르고 넝쿨이 강하긴 하나 바위나 절벽 등에 실뿌리를 착생시켜 살아가기에 다른 식물은 송악과는 같이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이 송악 옆에 있으면 송악이 내뿜는 맑은 기운에 머리가 맑아지며 사유(思惟)가 깊어진다고 한다.
자연의 가르침은 그뿐만이 아니다.
송악 앞 도솔천을 사이에 두고 등(藤)나무가 자라고, 자귀나무 우거진 옆에는 무성한 칡넝쿨이 잡목을 감고 올라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한다.
등나무넝쿨과 칡넝쿨이 무엇을 감거나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면 송악이나 담쟁이넝쿨은 바위나 벽에 붙어서 자라는 식물이며, 칡이나 등나무는 감고 올라가면서 자생하는 특성이 있다.
칡넝쿨은 오른쪽으로 감고 돌고, 등나무넝쿨은 왼쪽으로 감고 돈다. 두 나무가 같은 장소에서 자란다면, 넝쿨이 왼쪽 오른쪽으로 감고 돌아 엉클어져 풀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칡과 등나무가 왼쪽 오른쪽으로 감아 엉클어진 상태를 칡 갈(葛), 등나무 등(藤)자를 써서 갈등(葛藤)이라 한다.
그러나 엉클어진 상태가 영원할 수는 없다. 아무리 얽히고설킬지라도 세월가면 삭정이 되어 부스러지는 걸 보면 갈등이란 말도 본래는 허언이며 공(空)이란 생각이 든다.
갈등(葛藤)
//누가 칡넝쿨이고 누가 등나무넝쿨인지는 몰라도/우린 서로 엉클어져 살고 있다./등넝쿨(藤)은 왼쪽 칡넝쿨(葛)은 오른쪽으로 감고 도는 그들만의 삶의 법칙이라는 게/한번 얽히면 잘 풀어지지 않는다는 게/산 자들만의 삶의 편리한 방법임을/이제 겨우 알 것 같다/
세월은/묵은 넝쿨을 삭이고/삭은 것들은 애쓰지 않고도 먼지 되어 풀어지는 걸 보면/갈등이란/그 자체가 본래부터 없는/허망한 말 아니던가//
그렇다. 세월 앞에서는 아무리 깊은 원한이나 갈등이라도 결국은 먼지이고 허공일 뿐이다.
선운산농협 앞 도로 가에 은행나무가 서 있다.
그 은행나무 가지에 유주(乳柱)가 자라고 있는데, 유주는 젖 기둥이란 뜻이다.
흔하지 않는 현상이다.
동굴 속의 석순과 비슷하며, 나무가 상처를 입으면 생긴고 한다.
아무 나무에나 유주가 생기는 것은 아니고, 자기 치유능력이 강한 나무에만 생긴다.
보통의 나무는 상처를 입으면 썩거나 구멍이 생겨버리는데, 은행나무는 자기 치유 능력이 강한 나무이기에 치유의 일환으로 유주가 생긴 것이다.
생긴 은행나무 주위에 뿌리가 숨을 못 쉬게 포장해 버렸고, 은행나무 밑에서 노점상들이 불을 피워 나무에 상처를 주었기에 유주가 생긴 것이다.
스스로 치유(治癒)하며 사는 나무들이 자연의 위대한 순리와 우주를 위요(圍繞)하는 동화된 삶이 경이(驚異)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말없이 가르침을 주는 자연 앞에 겸허(謙虛)히 두 손을 모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