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4년 거제읍치 이전 사유와, 거제도호부 1711년 승격 사유>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7세기에는 임진왜란 후 다시 정묘·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의 인구 증가가 둔화되었고, 이상기후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저하, 관리들의 탐학(貪虐)에 의한 군정(軍政)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다. 거제현의 행정은 역사 이래 약70년 동안, 너무나 힘든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고현성은 임진난으로 황폐화되었고 이를 재건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로 근근히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63년과 1664년은 영남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정부에서 굶주린 백성을 모두 구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남해 거제에 유배 온 자들을 형편이 나은 읍에 참작해서 이배하게 하되, 그 중에서 그 지역에 정착하여 생활 터전을 삼고서 이배되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소원대로 그곳에 그냥 두게 했다. 사실상 유배를 풀어 주고 터전을 일구어 고을의 일손을 덜어주도록 했던 것이다.
현종5년(1664년) 3월 19일, 경상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치계하기를, “각 읍의 기민(飢民) 수가 통계 11만3438명인데 날마다 엄히 단속하여 각별히 구제하고는 있으나 지금 민간에는 극심한 춘궁기여서 뿌리박고 사는 백성이라 하여 기민 축에 끼지 못한 사람이라도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자는 그를 세밀히 골라내어, 으레 급여하는 8결을 기준으로 한 환자곡 외에, 한 달에 한두 번씩 별도로 조곡을 계속 주고 있고, 병(전염병)에 걸린 자는 모두 4284명에 대하여는 종전 규정대로 건량(乾粮)을 주어 그들 겨레붙이나 이웃에서 보살펴 주도록 하고 있는데, 기민 병민이 날로 불어나고 있어 앞으로 진구책을 계속하자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사안을 진휼청에 내렸다. 진휼청이 회계하기를, “기민과 병민의 수는 점점 많아지고 죽 먹일 거리는 계속 대기가 어려운 형편이어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1664년 윤6월 5일 장계에 따르면, 이상진이 바닷가를 두 차례 순시하며 그곳의 물정과 사세를 가지고 통제사 및 수사·병사와 서로 의논하고, 또 각포를 차례로 살펴보고서 자기의 소견에 따라 조모조목 나열하여 치계하였다. 또한 1664년 윤6월 13일 장계에는, "신이 각포(各浦)를 차례로 순찰할 적에 바닷가에 사는 민생이 참으로 매우 측은합니다."
경상도 거제현(巨濟縣)은 물과 토질이 매우 나빠 병으로 죽는 관리가 많았다. 감사 이상진이 계문하여 본 현(고정리, 고현성)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 명진촌(明珍村)으로 읍을 옮기자고 청하였다."
1664년 7월 4일, 이상진이 치계하기를, “신은 진휼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나서 나라에 비축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 됨을 알았습니다. 진휼하는데도 그러한데 불행하게 병난을 만나 군량이 없으면 어떻게 제도하겠습니까. 더구나 이 남쪽 변방은 따스한 바람이 불어올 때 외적의 환이 있는 법이니, 절반씩만 저축하면 군량과 진휼에 있어서도 뜻밖의 일에 대비하여 쓸 수 있습니다." 이에 경상도 각읍의 진휼에 쓸 미곡에 대해 특명으로 세미를 견감해 주고, 주리고 병든 백성에게 받을 조적(환곡을 꾸어 주거나 또는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서도 모두 모곡(耗穀)을 면제해 주었다.
당시 영남해안 지방은 흉년과 질병으로 인해 죽는 자가 속출했다. 경상감사 이상진이 거제현의 백성을 구제하고자 지형이나 이해(利害)가 어떠한지를 살펴, 넓은 평야와 왜적으로부터 좀 더 안전한 명진촌(거제면)으로 1664년 7월에 옮기게 됨은 대단한 변통(變通)에 속하는 일이었다. 또한 왜적의 공세에 대항 후 공세적인 측면에서, 수성과 방어가 용이한 지형을 고려한 결정이기도 했다. 거제면은 초대통제사 이순신의 임기동안 한산도와 마주하여 그나마 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거제도를 포함하여 남쪽 변방을 방어하는 주현영보(州縣營堡)를 옮겨 설치하는 일을 검토한 것은 이상진의 소견이었고 그 결정은 왕명이었다.
◯ 거제도호부 1711년 승격 사유는 거제면으로 읍치를 옮긴 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에 행정관청인 거제현과 수군 관할인 진영의 지역으로 나뉘어 끝없는 마찰이 생겼다. 현령은 종5품이었고 수군만호는 종4품이라 거제현령이 거제도 전체를 관할하지 못하는 상황이 수백 년간 지속되어 왔다. 고려말에는 거제행정 관청이 거창군 가조현에 있을 때에도 수군진영은 거제도를 관장했던 역사도 한몫을 했다. 이에 거제도 전체를 관장할 수 있는 새로운 체계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거제도는 해안 방위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해 숙종30년 1704년 2월19일~ 1705년 12월까지 거제현령을 역임한 변진영 부사를 승차시켜, 1711년 5월25일부터 거제 초대 부사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거제도호부로 승격된 일은 관찰사의 장계 이전, "거제현(巨濟縣)은 동래(東萊)와 한산(閑山) 사이에 있고 내양(內洋)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므로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8진(八鎭)을 통괄하게 해야 한다는 1707년 거제 유학 "신수오(辛受五)"의 상소에 의해, 조정에서 오랜 검토 후에 내린 결정이며, 당시 우리 거제민의 희망이 이루어진 역사적 결과였다. (당시 거제현의 규모로는 도호부 승격이 불가능 했다) 임진왜란 후, 거제의 해안 방위의 중요성이 계속 대두 되었고, 거제현령(행정관청)과 각 진영의 만호(수군관할)가 각기 독립된 재정과 운영을 하고 있어, 거제도 전체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거제의 현령은 관직일 뿐, 섬 하나를 빙 둘러 배치된 8진(거제읍치죽림포, 지세포, 옥포, 영등포, 조라포, 장목포, 율포, 가배량(소비포))에 한가한 벼슬(만호, 권관 등)이 많아 권력이 나누어져 있었다. 거제부로 승격시켜 "거제부사가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본 읍과 여러 진영을 모두 통솔하여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통제영과 전라도 왜적의 진출을 막기 위한 최고의 요해처임을 깨달은 조정의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