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2.금요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1580-1623) 기념일
지혜13,1-9 루카17,26-37
“오, 하느님!”
- 하느님 예찬; 하느님이 답이다 -
하느님을 찾는 사람, 바로 수도자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싶어 수도원에 온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평생 여정이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요, 평생 공부가 하느님 공부고, 평생 화두가 하느님입니다. 22년전 1999년 순교복자수녀회 연피정 지도시 강론 주제는 “오, 하느님!” 이었고, 언젠가 청담동 성당 대림 특강 제목도 “하느님”이었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런 하느님 공부의, 하느님 탐구의 롤모델은 예수님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33년 동안 하늘 배경의 불암산 기슭 여기 요셉 수도원에 살면서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느님의 얼굴을, 하느님의 마음을 대하듯 가장 많이 바라 본 하늘이고, 하늘에 대해 쓴 시들도 참 무수합니다.
“나무에게/하늘은 가도 가도/멀기만 하다
아예 호수가 되어/하늘을 담자”-1997.2.
“늘 하늘에 닿아있는/고요한 산능선들
내 영혼/늘 하늘에 닿아있는/고요한 산능선이고 싶다”-1997.4
“이 가지 저 가지/가리지 않고/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하늘 사랑 꽃 피워내며
하늘로 하늘로/오르는/메꽃!”-1997.8
“나무는/평생/하늘만을 향해/살아 왔기에
하늘 사랑만으로/행복했기에
낮에는 햇빛 사랑/밤에는 달빛 은총
하늘 위로 속에/살아왔기에
꽃, 열매, 잎들/떠남에도/초연할 수 있는 거다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거다
그리움을 버텨낼 수 있는 거다”-1997.10
“그리움이 깊어/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되었다
영원한 하늘이/되었다
침묵의 하늘이/되었다
영원히 바라보는 눈빛이/되었다
하느님의 눈이/되었다/나는”-1997.11
“당신이/그리울 때
당신이/보고 싶을 때
눈 들어/하늘을 본다
한 눈 가득 들어오는/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흰 구름/빛나는 별들
한 눈 가득 들어오는/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보고 싶은 당신”-1998.11
하늘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열정이, 갈망이 바로 성소요 수도생활의 원동력입니다. 제 좋아하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매 주일과 대축일 제1끝기도, 신명기 독서도 우리 가슴을 늘 새롭게 두드리며 마음 설레게 합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신명6,4-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님의 기도를 바칠때는 목이 메어 더 이상 기도를 바치지 못한다는 동방 수도자의 일화도 생각이 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삼위일체 과목 강의 중 “하느님”이란 말에 목이 메어 강의 도중 나갔다는 강우일 주교에 대해 신학생 시절 들은 전설적인 일화도 생각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 불행과 비극은 하느님 망각에서 기인합니다. 인생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이고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 없이 답을 찾으려 하니 연목구어緣木求魚, 답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답인 하느님을 바로 앞에 놔두고 엉뚱한 밖에서 답을 찾는 무지의 어리석은 눈먼 사람들입니다. 꼭 언제나 기억해야 할 바 둘이 있으니, “죽음”과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에 끊임없는 회개를, 늘 깨어 있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13,1-9)는 “자연 숭배의 어리석음”에 관한 내용이고 후반부(지혜13,10-19)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 지혜서의 처음과 끝 구절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그러나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평생 아무리 많은 공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모르면, 기도할 줄 모르면 완전한 헛공부요 유령같은, 헛개비같은 삶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회개와 겸손으로 자기를 아는데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라면 애당초 회개도 겸손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궁극의 책임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엄중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평생 공부인 하느님 공부에 소홀히 한 책임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죽음을 환히 두고 깨어 산다면, 늘 하느님 사랑에 환히 깨어 산다면, 결코 세상 것들에 빠져 중독되어 아까운 시간, 정력을 낭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량 소비생활로 대량 쓰레기를 양산하는 눈먼 탐욕의 무지에 중독되어 생각없이, 영혼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태반인 현실입니다. 성인들보다는 날로 폐인들, 괴물들 늘어가는 작금의 부정적 자본주의 현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요, 악도 더 진화進化되는 느낌이고 조선시대 500년 동안의 당쟁과 보복의 악순환은 지금도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의 노아 때의 사람들이나 롯 때의 무지한 사람들은 그대로 오늘날 하느님을 잊은 사람들 모습 그대로입니다. 코로나, 기후위기 시대의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자 전적인 회개의 촉구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자업자득의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물과 불, 다음에 무슨 심판일까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회개의 촉구가 참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세상 것들 속에서 살되 집착하지 말고 늘 주님을 향해 홀가분한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그날 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때, 그분께서 데려갈 수 있도록 늘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날밤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을 그날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언젠가의 그날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될 것입니다.
계속되는 성인 축일입니다.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분발 노력하여 고유의 참 나의 성인이 되라고 있는 성인 축일입니다. 똑같은 성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43세로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우크라이나 요사팟 주교 순교자입니다. 한결같이 사랑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를 통한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요사팟 주교의 시성 과정의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성인의 순교후 무수한 기적들이 보도 되었다. 1628년 교황 울바노 8세는 위원회에 조사를 명령하였고 116개의 증거가 입증되었다. 사후 5년이 경과되었어도 성인의 시체는 부패하지 않았다. 1637년 2차 위원회가 그의 생애를 조사하였고, 사후 20년후 복자품에 올려졌으며, 마침내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의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하느님께서 감동하심을 보여주는 사랑의 기적들입니다. 성인마다 사랑의 크기, 색깔, 모양, 향기는 달라도 결코 우열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 친히 인정하시는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대가’였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덕聖德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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