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첼시의 캡틴 존 테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베컴이야말로 독일 월드컵에서 주장으로 대표팀을 이끌 적임자" 라며 테리가 베컴 대신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야 한다는 세간의 평을 일축했다. 2006 월드컵을 자신의 대표팀 마지막 무대로 일찌감치 공헌한 베컴이 이와 같은 동료들의 신뢰를 업고 그동안 그에게 악몽과도 같았던 메이저 대회의 수모를 딛고 해피엔딩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마감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타블로이드의 수혜자 혹은 희생자
잉글랜드의 축구팬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그들의 이러한 축구사랑은 커다란 힘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엄청난 압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특히 영국에서 유달리 발달한 타블로이드 신문은 예의 원색적인 문구들로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선수를 비난하며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해 나간다.
유로2000에서는 필립 네빌이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진출하는 루마니아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 2대2로 마무리되어가던 경기 후반 몰도반에게 결정적인 페널티킥을 내주며 이러한 타블로이드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2002월드컵에서는 브라질과의 8강전, 판단 미스로 호나우딩요에게 결승 프리킥골을 내 준 데이비드 시먼이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타블로이드에 가장 많이 오른 내린 이름은 "BECKS" 였다.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이미 5천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보비 찰튼 축구 기술 경연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베컴은 17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정식으로 입단하며 스타의 길을 걷는다. 특히 잘 생긴 외모와 윔블던전 하프라인골과 같은 드라마틱한 장면 연출 그리고 당대 최고의 인기그룹 스파이스 걸스의 빅토리아와의 열애 등으로 타블로이드의 단골 손님이 되면서 프리미어리그 최고 인기 선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EPL신인상을 수상하고 매시즌 30경기 이상 출전해 10골 안팍의 득점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프리킥과 크로스로 인해 21살의 베컴은 대표팀에 승선한다. 폴 개스코인 등 노장이 떠나고 그와 마이클 오웬 등 젊은 선수들이 대거 가동된 프랑스 월드컵 16강 전에서 잉글랜드는 숙적 아르헨티나와 맞닥뜨린다.
루마니아에게 패배하며 조별 예선 탈락의 위기를 맞았던 잉글랜드를 환상적인 프리킥 한 방으로 건져 올린 베컴은 오웬의 기가 막힌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며 좋은 활약을 이어간다. 그러나 시메오네의 심리전에 말려든 그는 발을 치켜들었고 레드카드가 눈앞에 펼쳐지고 만다. 결국 잉글랜드는 승부차기 끝에 패배했고 "10명의 잉글랜드 영웅과 한 명의 얼간이" 등 치욕적인 타블로이드의 1면을 장식하며 베컴은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베컴은 바로 이듬해 맨유의 전설적인 트레블을 장식하면서 비난을 잠재운다. 그의 환상적인 어시스트와 정확한 코너킥이 한 몫을 톡톡히 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이 해에 FC 바르셀로나의 히바우도에 이어 FIFA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게 된다.
2002월드컵과 유로2004의 명암
앨런 시어러의 대표팀 은퇴로 주장 완장을 차게 된 베컴은 월드컵 직행이 달려있던 그리스와의 예선전에서 환상적인 프리킥을 작렬시키며 잉글랜드를 한일월드컵으로 이끈다. 유로2000에서도 예선 탈락의 부진을 겪은 잉글랜드에게 월드컵은 명예회복의 기회였고 그 중심엔 베컴이 있었다.
그러나 베컴의 부상은 이러한 전망을 어둡게 했다. 하지만 캡틴은 부상을 털고 일어섰고 죽음의 조를 극복하는 한 방의 페널티킥으로 4년 전의 치욕을 씻었다. 대표팀에서의 비난이 잦아지자 타블로이드는 알렉스 퍼거슨경과 그의 관계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퍼기가 찬 축구화가 베컴의 눈썹을 찢어 밴드를 붙인 사진이 1면에 도배되면서 맨유의 프랜차이즈 스타는 지구방위대로 행선지를 바꾼다.
레알에 이적한 후 동 포지션의 루이스 피구때문에 중앙 미드필더로 선회한 베컴은 예전만큼의 기량을 보이지 못한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그에게 악몽과도 같은 유로2004는 98월드컵의 재현이나 다름없었다. 시작은 좋았다. 최강 프랑스와의 대전에서 베컴은 예의 정교한 프리킥으로 램파드의 선취골을 어시스트하며 1천 78분 동안 닫혀있던 프랑스의 철옹성을 열어제낀다.
하지만 얼마 뒤 그는 유로2004 예선 터키전과 마찬가지로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불안한 기운이 경기장을 감돈다. 아니나 다를까, 지네딘 지단과 티에리 앙리의 마법은 3분만에 경기를 뒤집어 놓았고 또 한 번 훌리건들과 타블로이드는 베컴의 이름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웨인 루니의 활약으로 8강에 오른 잉글랜드는 다 잡은 경기를 헬더 포스티가의 한 방으로 연장까지 가게 했고 결국 승부차기로 승자를 가리는 순간이 왔다.
1번 키커의 중책을 맡은 베컴이 찬 공은 크로스바를 훨씬 넘기고 말았다. 이후 마누엘 루이 코스타가 실축하여 동점이 되었으나 결국 다리우스 바셀의 실축으로 포르투갈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떨군 캡틴에게 타블로이드는 섹스스캔들까지 덧씌워 그를 끝없이 할퀸다. "주장을 사임하라" 정도는 양반이고 29살의 노장이라 부르기엔 아직 젊은 선수에게 "대표팀 은퇴" 라는 사슬까지 얽어맨다. 이후 고의파울 논란까지 제기되며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고 가장 부유한 축구선수는 커리어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이제 명예 회복은 그 자신의 몫이다. 2006월드컵에서의 활약이 그에 대한 이제까지의 부정적인 평가를 역전시켜 줄 것이다.
해피엔딩을 위한 잉글랜드의 도전
내년의 월드컵 우승 1순위는 브라질이지만 잉글랜드의 전력 역시 만만치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열리는 월드컵인만큼 유럽팀에게 플러스알파가 부여되는 것은 당연하다. 테리-리오 퍼디낸드-솔 캠벨 등 중앙 수비수들의 레벨은 브라질보다 훨씬 우위에 있고 제라드와 램파드의 중원 역시 이들의 시너지 효과가 발휘된다면 세계 최고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루니, 대런 벤트 그리고 저메인 제나스 등 떠오르는 샛별들의 잠재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특히 어린 선수가 많은 잉글랜드 대표팀의 스쿼드에서 주장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루니, 벤트, 제나스, 저메인 데포, 조 콜, 다우닝 그리고 제라드, 램파드, 레들리 킹, 테리 등 월드컵 데뷔전을 치르는 젊은 선수들에게 큰 경기 경험과 노련미를 전수하는 일은 베테랑의 가장 커다란 역할이다.
언론과 팬들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잉글랜드의 대표팀 멤버들은 그에게 위의 테리와 같은 믿음을 전하고 있다. 오랜 대표팀 동료인 오웬은 그가 여전히 대표팀의 에이스라고 말한다. 그 대신 페널티킥을 전담하게 된 프랭크 램파드도 여전히 그의 킥이 최고라고 말한다.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 떠오른 스티븐 제라드 역시 그가 보여주는 리더쉽과 경기 운영 능력에 의존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지금부터는 베컴이 캡틴으로서 이와 같은 기대와 신뢰에 부응해야 할 시간이다. 프리메라리가에서 피구의 이적으로 자신의 원래 자리를 찾아 최근 전성기 못지 않은 기량을 회복하고 있는 베컴의 오른발이 2006월드컵에서 해피엔딩으로 타블로이드 1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순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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